최초의 성(姓)

2022. 1. 10. 16:34나의 이야기

인간 최초의 성()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 신공부방에서 발췌

2020.11.17

 

 

인간이 최초로 성()을 사용한 것은 우리 한民族의 始祖라고 할 수 있는

盤固桓因氏(기원전8937 상원갑자년)께서 최초로 사용하신 한일자()로 부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 본문에 의하면 환인씨는 한일자() 姓을 사용해왔다고 기록하고 있고,

1992년 호남성(湖南省) 악록출판사(岳麓出版社)에서 발행한 성씨심원(姓氏尋源)에는 초목의 뿌리는 곤륜산(崑崙山)이며

上古代때부터 한일자의 성을 천신(天神),

즉 하늘의 신()인 반고환인씨(盤古桓因氏 BC. 8937)께서 姓氏를 사용해왔다고 기록(記錄)하고 있습니다.

 

[성씨심원(姓氏尋源)은 청()나라때 장주(張澍)가 편찬한 책]

 

처음으로 한일자()를 성()으로 취했던 것은 우리 한民族최초의 文字가 처음으로 탄생한 것과 깊은 관련이있습니다.

 

盤固桓因氏(기원전8937 상원갑자년)께서 처음으로 세상을 열었을때는

지금으로부터 10944년전으로 인류가 막 빙하기에서 벗으나 새로운 문명의 씨앗을 싹틔우던 시기였습니다.

 

긴 빙하기의 추위속에서도 수 만년 동안 조상들의 지혜는 계속 축적되었고 전승되어져왔기 때문에

그 당시에 문자의 발명이나 天文學의 발달은 필연적이었으며

또한 우주의 진리를 읽어내는 玄妙한 道을 깨우친 성인들 또한 많았다고 필자는 보고 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미개한 원시인들만이 살던 그런 시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일만일천년전이면 약200억년의 역사를가진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아주 최근의 일이며

45억년의 지구역사와 비교해도 지극히 최근의 일 인것입니다.

 

그 동안의 지구는 알수없는 몇 번 인가의 고대문명이 존재 했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발견된 많은 미스테리한 유물들과 고고학자들의 연구성과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주제와 관계가 없는 이야기이므로 생략하고 한일자()가 만들어진 연원만 간단히 살펴 보도록하겠습니다.

 

한일자()는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고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은하수는 물을 가득히 품고있는 천체집단이며 바로 인류의 고향입니다.

밤하늘에 남과 북 사이를 길게 한줄로 죽 그어진 은하수를 보고 그린 문자가 한일자()입니다.

上上古時代에는 공해가 없었고 전기불이 없었기 때문에 밤하늘에 맨눈으로 볼수있는 별들이 아마 지금에 비한다면

천체망원경으로 하늘을 보고 있는듯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밤하늘을 보며 인간의 생각을 나타낸 문자가 최초로 등장했습니다.

바로 一() . |() . () . 丿() . () . () . () . () 등이 모두 천()에 해당하는 글자들 입니다.

 

이렇게 문자가 태어나게 된 것을 기록한 문헌이 역대신선통감, 유학수지, 사요취선 등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들 문헌에는 반고환인씨의 장남 지갱은 천문을 연구하여 간지력법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간지가 무엇입니까?

천간지지 바로 하늘과 땅 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사람이 있다는것이 생략된 것입니다.

오늘날 漢文字와 五行哲學은 바로 지갱이 연구한 간지력법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환인천제와 지갱 등 12형제는 모두 한일자()로 姓을 삼았습니다.

 

환인씨께서 한 일()자의 성을 쓴 것은 하늘사람이란 뜻입니다.

우리한民族의 한 역시 하늘이란 뜻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하늘사람(하느님)이란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기록에만 의존하여 전하는 것일뿐

당시기의 우리선인들이 정말로 그러한 법을 세웠다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예를들어 一() . |() . () . 丿() . () . () . () . ()등은

옥편이 만들어 지면서 天 . .地 와 陰陽五行의 순서에 따라 정리된 것인데

옥편은 훨씬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上上古時代시대의 사상과 철학이 오늘날까지 원본그대로 전해진다고 하면 넌센스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한마디로 뻥이 좀 심하죠.

 

그러나 전하는 기록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해서 후세인이 마음대로 고칠수 없는 것이 바로 고전(古典)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만 전할 뿐입니다.

 

이것이 최초의 姓입니다.

 

 

역사초기 姓氏의 발달

 

1. 姓의 발달

 

일반적으로 姓과 氏를 논할 때 姓은 모계사회, 氏는 부계사회의 유산으로 말을합니다.

 

회의자(會意字)인 姓은 "계집 여()" "날 생()"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뜻은 여자가 낳은 아이이고

형성(形聲)기능으로 보아 소리는 "()"으로 읽게되었던 것이 지금 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역사초기 姓의 변천과정에 대하여 율곤선생님의 저서를 인용하겠습니다.

(이氏의 뿌리歷史)

 

" 청나라때 사서인 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에 의하면 구황씨(九皇氏 BC. 8011)이후까지 한일()자 姓을 사용(使用)했고 7代 섭제씨(攝提氏 BC. 7895)때 부터 열아홉성(十九姓)으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8대 연통씨(連通氏 BC. 7786)때는 여섯성(六姓)이 다시 생기고

9代 서명씨(明氏 BC. 7675)때는 사성(四姓)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 거령씨(鉅靈氏 BC. 7562)와 오용씨(五龍氏 BC. 7562)때는 무려 열아홉성(十九姓)이 나누어지고

11代 구강씨(句彊氏 BC. 7454)와 합낙씨( BC. 7454)때는 다시 세가지성(三姓)이 생겨나게 됨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姓氏인지는 史書에 밝혀진바 없다.

이와 같은 기록은 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과 고대사서(古代史書)인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잘 나타나있다. "

<인용끝>

 

일자성() 그리고 위 기록 外 BC.3898년 유소환웅(有巢桓雄)때 처음으로 불을 사용하게 되면서 화성(火姓)이 생겨났습니다. 복희씨의 어머니인 화서씨(華胥氏)까지 입니다.

 

다음으로 복희씨(伏羲氏)때 이후로 계집녀()字로 글자를 만들게 되고 계집녀()字로 만들어진 姓을 사용하게 됩니다.

<( : 黃帝), (), () >

 

복희씨(伏羲氏)의 姓은 여러개 였습니다.

風姓, 姜姓, 姬姓 을 가졌습니다.

강나루에서 용(:,임금)을 만났다고 강(:나루강,물강)씨라 하였고 후에 연애를 잘 해서 風씨 성으로 바꾸기도 하였고

바람을 많이 피우는 것이 좋지 않다하여 최종적으로 삼가할진字를 써서 진()씨라 하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요즘 옥편에는 삼가할진() 자는 없어져버렸고 아가씨희()자 만 쓰게 되었다고합니다.

복희씨는 伏姬氏 伏希氏 伏羲氏 포희씨 蜜羲氏 대호씨 태호씨 화희씨 등 유명세만큼이나 명칭이 다양해졌습니다.

그만큼 후대에 가까워 질수록 역사적인 기록이 풍부해짐을 의미하는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복희씨로 부터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BC.3071)가 姜姓을 가지게 되었으며

호족(虎族:호랑이족) 으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이때부터 族이라는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황제유웅씨(皇帝有雄氏BC.2679)는 웅족(雄族)으로 유소환웅(有巢桓雄)의 직계 혈통으로 내려왔습니다.

부족의 상징은 곰이었습니다.

 

우리역사에 호랑이와 곰의 비유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나중에 황제가 전쟁을 하는 시기에 와서 수컷웅()자 는 곰웅()자로 바뀌어 사용하게됩니다.

이는 부족의 힘을 강하게 보이도록 한 것입니다.

황제는 헌원씨 유웅씨 라고도 하고 공손씨(公孫氏) 姓을 썼으나

조상의 성이 희씨 이므로 희씨(姬氏)로 성을 고쳤다고 사서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기,제왕운기 참고 , 전쟁을 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외에도

 

주무왕(周武王)의 성은 희(姬), 이 후손들은 모두 희성(姬姓)

 

주나라 또한 희씨(氏)의 혈통으로 이어져 왔다.

진 오 노 조 채 정 위 한 조 위(晉 吳 魯 曺 蔡 鄭 衛 韓 趙 魏)나라는 모두 희성의 나라이다.

() 나라는 강씨(姜氏) 이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복희의 후예이므로 희씨인 것이다.

()나라는 규씨 이지만 요임검의 외가 이므로 이것도 역시 희씨가 뿌리 이다.

그리고 초()나라는 자씨(子氏)성 이지만 은나라 탕의 후예이므로 마찬가지로 희씨의 혈통 이다.

()나라는 말할 것없이 희씨성이다.

 

진시황은 한(), 영주땅 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姓을 영(瀛)으로 바꿈,

본시 진시황의 성은 한()이며 이름은 치() 조선도교사에 의하면 마한의 마지막 혈통이라고 적고 있음.

그러나 진나라() 진시황의 본래 성은 복희씨, 신농씨, 황제 이래로 이어져 내려오던 희씨의 성 이었다고 봐야한다.

 

황제의 아들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는 희성(姬姓)을 썼다. 이분이 신라의 시조 이다.

 

고구려의 시조는 황제의 아들 창의(昌意) 어머니 창복(昌僕) 으로부터 태어난 전욱고양씨의 아들 제곡고신씨 이다.

마찬가지로 희성(姬姓)을 썼다.

 

이상과 같이 희씨의 혈통으로 내려온 나라가 40개국 이상이며 형제나라는 15개국이다.

그리고 제후국이 70개국 이며 왕이외 소국인 제국왕의 나라수는 자그만치 1,800나라가 넘는다고

역대신선통감 본문 180쪽에 기록 하고 있다.

 

<이하생략>

 

 

2. 氏의 발달

 

인류사회가 모계사회로부터 발전하여 차츰 부계사회로 변천해갔지만

또한 어떤 시기에 와서는 다시 여권이 강화되는것을 볼수 있는데

이는 인류사회가 부단히 부권의 시대에만 영구히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던지 사회적상황과 자연의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며 인류는 자연스럽게 적응해왔다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姓의 출현이 모계사회의 유산이라고 한다면 氏의 출현은 종족의 시조 또는 제왕적 상징에서 출발하여

차츰 부권의 상징으로 퇴화하였으며 주나라를 거쳐 전국시대에 와서는 姓과 氏는 합일화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앞글에서도 보셨듯이 上古代의 제왕들은 모두 氏로서 호칭을 정함으로서

종족의 우두머리 혹은 시조, 씨알의 뜻을 강조하였습니다.

실제로 姓과 氏의 고대발음은 현재와 별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이듭니다.

氏는 종족의 시조, 부권, 제왕의 호칭으로 쓰여져 오다가 요()임검때와서는 임검(壬儉), 왕검(王儉) () 등으로

대체 되다가 다시 황(), () 까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에 수록된 상고대의 제왕들을 나열해보면 반고환인씨(盤固桓因氏) 부터 시작되어

천황씨, 지황씨, 인황씨, 거방씨, 구황씨, 섭제씨, 연통씨, 서명씨, 거령씨, 구강씨, 초명씨, 탁광씨, 구진씨, 황신씨,

이령씨, 대괴씨, 귀외씨, 기호씨, 감자씨, 태봉씨, 염상씨, 개맹씨, 대돈씨, 영양씨, 무당씨, 태일씨, 공상씨, 신민씨,

기제씨, 차민씨, 진방씨, 하성씨, 회괴씨, 동호씨, 황담씨, 이광씨, 계통씨, 길이씨, 궤거씨, 희위씨, 호락씨, 사황씨,

소홀씨까지 44세역년 5038년으로 모두 氏를 사용했던 제왕들 이었으며

이를 신선(神仙) 또는 한民族史의 제1기 단군(壇君) 이라고합니다.

 

그외 복희씨, 염제신농씨, 유소한웅씨, 도당씨(陶唐氏제요씨(帝堯氏당요씨(唐堯氏) 등이 있습니다.

 

*** 도당씨(陶唐氏제요씨(帝堯氏당요씨(唐堯氏)는 모두 요임금의 호칭.

 

그 후...

 

차츰 인구가 증가하면서 姓氏들이 많아지고 혼인제도가 더욱 엄격해지게 되었습니다.

더욱 번성해진 자식들에게는 독립한 다음 서로 구별되는 그 어떤 부호를 가지게 해야 했는데

이러한 수요에 부응하여 제왕의 상징이었던 씨()는 단순한 씨족의 시조 또는 수장의 자리로 내려오게됩니다.

 

계급사회에서 씨()는 신분의 고저귀천(高低貴賤)을 나타내는 부호이기도 하여 王子(왕의 아들), 王孫(왕의 손자),

公子(제후의 아들), 公孫(제후의 손자, 공자의 아들)이 씨()로 사용되었고 땅을 봉해 받은 사람은 봉읍(封邑) 지명을,

관직에 있는 사람은 관직을, 어떤 직업이나 기능직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 직업이나 기능직을 씨()로 삼게되었습니다.

 

예를들어 축()씨는 제사를 맡아보는 축사(祝史)라는 벼슬에서 왔는데 그 자손들은 축()을 씨()로 삼았던 것이며

사씨(史氏)는 고대의 사관(史官) 벼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사()를 씨()로 삼았다는것 등입니다.

 

후세에 와서 빈번한 사회적 변동을 거치면서 씨()로 표현했던 고저귀천의 의미가 점점 희미해져

마침내 성씨합일(姓氏合一)이 이루어지게되었습니다.

 

 

추가설명

 

복희씨의 직계후손인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 BC. 3071)는 강()姓이며

염제신농씨와 헌원황제씨(軒轅黃帝氏 BC. 2679)는 같은 혈통(血族)이면서 姓은 공손(公孫)이다.

 

황제(黃帝 BC. 2679)는 계집 여()자로써 글을 만들었으며

치우(蚩尤 BC. 2707)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씨로 姓을 고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帝王韻紀 참고)

 

치우(蚩尤)의 아버지는 계곤씨(啓昆氏 BC. 2979)로 황제(黃帝)의 아버지 소전씨(少典氏 BC. 2789)와는 한 형제벌이다.

 

그러나 蚩尤는 서자출신으로 형제가 81名이나 된다는 기록이 사기(史記)에 나타나있다.

다시 말해 같은 血統이라도 제각각 성씨가 다른 것은 모계사회에서 나름대로 성씨를 사용해 왔던 것을 볼 수 있다.

 

黃帝 아들은 25名이었지만 성을 받는 아들은 14이었다고 史記에 기록하고 있으며 山海經에도 적혀있다.

특히 黃帝 아들 중, 큰 아들은 낙명(駱明)이며 창의(昌意), 현효(), 호금천씨(少昊金天氏 新羅始祖), 우경(禹京),

우호(禹豕)외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기서 황제아들 중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BC. 2578)는 희()씨성으로 신라(新羅)의 시조(始祖)로 되어있고

현효()의 아들은 교극()이며 교극의 아들은 제곡고신씨(帝嚳高辛 BC. 2482)로 희()씨 성으로 되어있다.

제곡고신씨의 첫째 부인은 강원씨(姜嫄氏)로 후직(后稷)을 낳았으며 이름을 기()라고 했다.

 

두 번째 부인은 간적씨(簡狄氏)로 설()을 낳았고, 세 번째 부인은 진풍씨(陳豊氏)로 요()임금을 낳았다.

 

()임금의 성은 이()씨이다.

한편 황제아들 창의(昌意)는 전욱고양씨(頊高陽氏 BC. 2491)를 낳았고 고양씨의 아들 곤곤(鯀鯀)을 낳았으며

곤곤은 하()나라 우()임금을 낳았다.

 

황제아들 창의(昌意)와 창의의 아들 고양씨(高陽氏)는 모두 희()씨 성이였으나

고양씨의 친손자인 하우(夏禹)임금은 ()씨의 성이였다.

한편 황제(黃帝)아들 창의는 고양씨를 낳고, 또 다른 아들은 궁선(窮蟬)을 낳고, 궁선은 경강(敬康)을 낳고,

경강은 구망(句芒)을 낳았다.

 

구망은 교우(橋牛)를 낳고, 교우는 고수(瞽叟)를 낳았으며, 고수는 순()임금을 낳았다.

그런데 순()임금은 요()라는 성씨였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같은 血統으로 내려왔지만 성씨(姓氏)가 전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은()나라 성탕(成湯)은 요()임금의 형이였던 설() 14세손으로 성씨는 자()이다.

그러나 요()임금의 큰 형님이었던 후직(后稷), 즉 기() 16세손인 주무왕(周武王)의 성은 희()씨였다.

 

 

그 후 노(), (), (), (), (), (), (), ()나라들은 모두 희()씨 성이였다.

 

한편 제()나라는 강()씨 성이며, ()나라는 규()씨의 성이었다.

그리고 초()나라와 송()나라는 자()씨 성을 지녔다.

 

반면에 한국인 한()과 위(), 그리고 조()나라는 진()나라에서 갈라져 나온 같은 혈통이므로

모두가 희()씨 성이였다.

하지만 진()나라인 진시황제(秦始皇帝)는 황제손자 전욱고양씨(頊高陽氏)의 후손이었지만

()씨성을 따르지 않고 李氏 성이였으나 영(嬴)씨의 성으로 바뀌었다.

 

 

()나라가 망한 후 진한(秦韓)의 직계 후손이었던 진한(辰韓)의 新羅는

황제(黃帝)아들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왕호(王號)를 따서 김()씨로 바꾸었다.

 

모계사회서 파생된 姓氏는 혈통(血統)과 관계없이 그때그때에 따라 성()을 받게 되거나 봉작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관직을 받을 경우와 王으로부터 성을 하사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굳이 血統을 고집하고 성을 이어온 것은 조선왕조(朝鮮王朝)밖에 없다.

 

상고시대(上古時代) 때부터 高麗때 까지만 해도 모계사회의 영향으로 굳이 血統을 고집하여

똑같은 성()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

물론 춘추전국(春秋戰國)이후 전란으로 인하여 성()의 계보를 지키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신하(臣下)가 죽음을 두려워 멀리 숲으로 도망가 임씨(林氏)성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한국에 있는 모든 성씨(姓氏)의 족보는 高麗때부터 기록한 것으로 되어있다.

사실은 조선왕조(朝鮮王朝)초기 때부터 중국대륙(中國大陸)에 있었던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을 무대로 하여

족보를 엮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것은 高麗때까지 몽고(蒙古)난으로 인하여 혈통을 지키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高麗때까지는 모계사회의 영향으로 인해 성씨의 血統관계는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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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권시대(父權時代)의 시작

 

요순(堯舜 BC. 2357~2319)때부터 점차 부계사회로 넘어오려는 조짐이 있었다.

 

그러나 요순(堯舜)때 만해도 모계사회의 강한 영향으로 안으로는 모계사회의 힘이 흐르고 있었다.

 

( BC. 2224)나라 우()임금때 와서는 치산치수(治山治水)에 성공하여

( BC. 2284)임금으로부터 대비(大費)라는 본 이름대신 현규(玄珪)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후,

() 임금의 딸 옥녀(玉女)를 처로 삼게 되었다.

이때 순()임금의 성은 요()였으며 옥녀(玉女) 역시 요()성이었다.

(海內西經 참고)

 

()임금이 등극한 후 옥녀(玉女)에게서 두 아들을 얻었는데 큰 아들은 대염(大廉)으로 조속씨(鳥俗氏)

작은 아들은 약목(若木)으로 비씨(費氏)이다.

 

두 아들 모두 제후왕으로 있을 당시 우()임금은 주색에 놀아나고 궁녀(宮女)들과 어울리는 과정에서

부권사회(父權社會)의 권위의식이 극에 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순()임금의 두 딸은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태호(太湖) 호수에 있는 동정산(洞庭山)에 들어가 선녀처럼 살았다고

산해경(山海經) 주석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다.

(필자의 저서 山海經 참고)

 

부권시대(父權時代)는 우()임금 때부터 시작하여 춘추시대(春秋時代 BC. 770~476)로 이어져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 475~221)에 들어와 진()나라가 統一할 때 까지

모권사회(母權社會)는 표면적으로 쇠약해졌다.

 

이상과 같은 상황 속에서 땅이름을 고치고 바꾸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칠웅(七雄), 즉 진(), (), (), (), (), (), () 등이 난립하다 망한 후

地名의 변천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이하생략>

 

출처 : 논문 " 모계사회(母系社會)와 성씨(姓氏) " 율곤 著

 

 

, 名에 대하여...

 

族이란것은 몸과 마음을 같이하는 무리라는 뜻으로

일가족을 기본단위로 몇개 또는 수십 . 수백 .수천의 무리를 이루는것을 말합니다.

크게 말하면 종족(種族)이 되고 종족(種族)이 커지면 나라가 되겠지요.

 

고대의 族에 관한 개념은 황제와 염제가 서로 갈라지면서 생겨나기 시작했다고봅니다.

 

바로 곰을 상징으로하는 웅족과 호랑이를 상징으로하는 호족간의 몇대에 걸친 대전쟁을 말하는데

황제가는 적장자 출신으로 왕권을 물려받고

치우는 염제의 문중에 속하여있었는데 서자출신이라는 이유로 왕권을 받지못해

스스로 천자가 되었음을 선포하면서 황제와 대전쟁을 벌이게 되고

그 피해는 민중들에게 돌아가 전 대륙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난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民族 대이동이 촉발되어 베링해를 넘어 아메리카땅으로 건너간 무리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이렇듯 族이라는것은 대체적으로 정착과 이동, 풍습 등을 같이하는 동류들을 일컷는 개념으로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名은 한개인에게 붙여지는 호칭인 만큼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것 같습니다.

 

그외에 유교적으로 사람을 호칭할때 쓰는 작위 봉작 군 호 시호 자 아명 등은 생략하겠습니다.

 

 

참고문헌

 

* 이氏의 뿌리역사 : 율곤 이중재

 

294-1

 

- 끝 -

인간 최초의 성()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 신공부방에서 발췌

2020.11.17

 

 

인간이 최초로 성()을 사용한 것은 우리 한民族의 始祖라고 할 수 있는

盤固桓因氏(기원전8937 상원갑자년)께서 최초로 사용하신 한일자()로 부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 본문에 의하면 환인씨는 한일자() 姓을 사용해왔다고 기록하고 있고,

1992년 호남성(湖南省) 악록출판사(岳麓出版社)에서 발행한 성씨심원(姓氏尋源)에는 초목의 뿌리는 곤륜산(崑崙山)이며

上古代때부터 한일자의 성을 천신(天神),

즉 하늘의 신()인 반고환인씨(盤古桓因氏 BC. 8937)께서 姓氏를 사용해왔다고 기록(記錄)하고 있습니다.

 

[성씨심원(姓氏尋源)은 청()나라때 장주(張澍)가 편찬한 책]

 

처음으로 한일자()를 성()으로 취했던 것은 우리 한民族최초의 文字가 처음으로 탄생한 것과 깊은 관련이있습니다.

 

盤固桓因氏(기원전8937 상원갑자년)께서 처음으로 세상을 열었을때는

지금으로부터 10944년전으로 인류가 막 빙하기에서 벗으나 새로운 문명의 씨앗을 싹틔우던 시기였습니다.

 

긴 빙하기의 추위속에서도 수 만년 동안 조상들의 지혜는 계속 축적되었고 전승되어져왔기 때문에

그 당시에 문자의 발명이나 天文學의 발달은 필연적이었으며

또한 우주의 진리를 읽어내는 玄妙한 道을 깨우친 성인들 또한 많았다고 필자는 보고 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미개한 원시인들만이 살던 그런 시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일만일천년전이면 약200억년의 역사를가진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아주 최근의 일이며

45억년의 지구역사와 비교해도 지극히 최근의 일 인것입니다.

 

그 동안의 지구는 알수없는 몇 번 인가의 고대문명이 존재 했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발견된 많은 미스테리한 유물들과 고고학자들의 연구성과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주제와 관계가 없는 이야기이므로 생략하고 한일자()가 만들어진 연원만 간단히 살펴 보도록하겠습니다.

 

한일자()는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고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은하수는 물을 가득히 품고있는 천체집단이며 바로 인류의 고향입니다.

밤하늘에 남과 북 사이를 길게 한줄로 죽 그어진 은하수를 보고 그린 문자가 한일자()입니다.

上上古時代에는 공해가 없었고 전기불이 없었기 때문에 밤하늘에 맨눈으로 볼수있는 별들이 아마 지금에 비한다면

천체망원경으로 하늘을 보고 있는듯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밤하늘을 보며 인간의 생각을 나타낸 문자가 최초로 등장했습니다.

바로 一() . |() . () . 丿() . () . () . () . () 등이 모두 천()에 해당하는 글자들 입니다.

 

이렇게 문자가 태어나게 된 것을 기록한 문헌이 역대신선통감, 유학수지, 사요취선 등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들 문헌에는 반고환인씨의 장남 지갱은 천문을 연구하여 간지력법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간지가 무엇입니까?

천간지지 바로 하늘과 땅 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사람이 있다는것이 생략된 것입니다.

오늘날 漢文字와 五行哲學은 바로 지갱이 연구한 간지력법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환인천제와 지갱 등 12형제는 모두 한일자()로 姓을 삼았습니다.

 

환인씨께서 한 일()자의 성을 쓴 것은 하늘사람이란 뜻입니다.

우리한民族의 한 역시 하늘이란 뜻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하늘사람(하느님)이란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기록에만 의존하여 전하는 것일뿐

당시기의 우리선인들이 정말로 그러한 법을 세웠다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예를들어 一() . |() . () . 丿() . () . () . () . ()등은

옥편이 만들어 지면서 天 . .地 와 陰陽五行의 순서에 따라 정리된 것인데

옥편은 훨씬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上上古時代시대의 사상과 철학이 오늘날까지 원본그대로 전해진다고 하면 넌센스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한마디로 뻥이 좀 심하죠.

 

그러나 전하는 기록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해서 후세인이 마음대로 고칠수 없는 것이 바로 고전(古典)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만 전할 뿐입니다.

 

이것이 최초의 姓입니다.

 

 

역사초기 姓氏의 발달

 

1. 姓의 발달

 

일반적으로 姓과 氏를 논할 때 姓은 모계사회, 氏는 부계사회의 유산으로 말을합니다.

 

회의자(會意字)인 姓은 "계집 여()" "날 생()"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뜻은 여자가 낳은 아이이고

형성(形聲)기능으로 보아 소리는 "()"으로 읽게되었던 것이 지금 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역사초기 姓의 변천과정에 대하여 율곤선생님의 저서를 인용하겠습니다.

(이氏의 뿌리歷史)

 

" 청나라때 사서인 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에 의하면 구황씨(九皇氏 BC. 8011)이후까지 한일()자 姓을 사용(使用)했고 7代 섭제씨(攝提氏 BC. 7895)때 부터 열아홉성(十九姓)으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8대 연통씨(連通氏 BC. 7786)때는 여섯성(六姓)이 다시 생기고

9代 서명씨(明氏 BC. 7675)때는 사성(四姓)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 거령씨(鉅靈氏 BC. 7562)와 오용씨(五龍氏 BC. 7562)때는 무려 열아홉성(十九姓)이 나누어지고

11代 구강씨(句彊氏 BC. 7454)와 합낙씨( BC. 7454)때는 다시 세가지성(三姓)이 생겨나게 됨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姓氏인지는 史書에 밝혀진바 없다.

이와 같은 기록은 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과 고대사서(古代史書)인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잘 나타나있다. "

<인용끝>

 

일자성() 그리고 위 기록 外 BC.3898년 유소환웅(有巢桓雄)때 처음으로 불을 사용하게 되면서 화성(火姓)이 생겨났습니다. 복희씨의 어머니인 화서씨(華胥氏)까지 입니다.

 

다음으로 복희씨(伏羲氏)때 이후로 계집녀()字로 글자를 만들게 되고 계집녀()字로 만들어진 姓을 사용하게 됩니다.

<( : 黃帝), (), () >

 

복희씨(伏羲氏)의 姓은 여러개 였습니다.

風姓, 姜姓, 姬姓 을 가졌습니다.

강나루에서 용(:,임금)을 만났다고 강(:나루강,물강)씨라 하였고 후에 연애를 잘 해서 風씨 성으로 바꾸기도 하였고

바람을 많이 피우는 것이 좋지 않다하여 최종적으로 삼가할진字를 써서 진()씨라 하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요즘 옥편에는 삼가할진() 자는 없어져버렸고 아가씨희()자 만 쓰게 되었다고합니다.

복희씨는 伏姬氏 伏希氏 伏羲氏 포희씨 蜜羲氏 대호씨 태호씨 화희씨 등 유명세만큼이나 명칭이 다양해졌습니다.

그만큼 후대에 가까워 질수록 역사적인 기록이 풍부해짐을 의미하는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복희씨로 부터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BC.3071)가 姜姓을 가지게 되었으며

호족(虎族:호랑이족) 으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이때부터 族이라는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황제유웅씨(皇帝有雄氏BC.2679)는 웅족(雄族)으로 유소환웅(有巢桓雄)의 직계 혈통으로 내려왔습니다.

부족의 상징은 곰이었습니다.

 

우리역사에 호랑이와 곰의 비유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나중에 황제가 전쟁을 하는 시기에 와서 수컷웅()자 는 곰웅()자로 바뀌어 사용하게됩니다.

이는 부족의 힘을 강하게 보이도록 한 것입니다.

황제는 헌원씨 유웅씨 라고도 하고 공손씨(公孫氏) 姓을 썼으나

조상의 성이 희씨 이므로 희씨(姬氏)로 성을 고쳤다고 사서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기,제왕운기 참고 , 전쟁을 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외에도

 

주무왕(周武王)의 성은 희(姬), 이 후손들은 모두 희성(姬姓)

 

주나라 또한 희씨(氏)의 혈통으로 이어져 왔다.

진 오 노 조 채 정 위 한 조 위(晉 吳 魯 曺 蔡 鄭 衛 韓 趙 魏)나라는 모두 희성의 나라이다.

() 나라는 강씨(姜氏) 이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복희의 후예이므로 희씨인 것이다.

()나라는 규씨 이지만 요임검의 외가 이므로 이것도 역시 희씨가 뿌리 이다.

그리고 초()나라는 자씨(子氏)성 이지만 은나라 탕의 후예이므로 마찬가지로 희씨의 혈통 이다.

()나라는 말할 것없이 희씨성이다.

 

진시황은 한(), 영주땅 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姓을 영(瀛)으로 바꿈,

본시 진시황의 성은 한()이며 이름은 치() 조선도교사에 의하면 마한의 마지막 혈통이라고 적고 있음.

그러나 진나라() 진시황의 본래 성은 복희씨, 신농씨, 황제 이래로 이어져 내려오던 희씨의 성 이었다고 봐야한다.

 

황제의 아들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는 희성(姬姓)을 썼다. 이분이 신라의 시조 이다.

 

고구려의 시조는 황제의 아들 창의(昌意) 어머니 창복(昌僕) 으로부터 태어난 전욱고양씨의 아들 제곡고신씨 이다.

마찬가지로 희성(姬姓)을 썼다.

 

이상과 같이 희씨의 혈통으로 내려온 나라가 40개국 이상이며 형제나라는 15개국이다.

그리고 제후국이 70개국 이며 왕이외 소국인 제국왕의 나라수는 자그만치 1,800나라가 넘는다고

역대신선통감 본문 180쪽에 기록 하고 있다.

 

<이하생략>

 

 

2. 氏의 발달

 

인류사회가 모계사회로부터 발전하여 차츰 부계사회로 변천해갔지만

또한 어떤 시기에 와서는 다시 여권이 강화되는것을 볼수 있는데

이는 인류사회가 부단히 부권의 시대에만 영구히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던지 사회적상황과 자연의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며 인류는 자연스럽게 적응해왔다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姓의 출현이 모계사회의 유산이라고 한다면 氏의 출현은 종족의 시조 또는 제왕적 상징에서 출발하여

차츰 부권의 상징으로 퇴화하였으며 주나라를 거쳐 전국시대에 와서는 姓과 氏는 합일화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앞글에서도 보셨듯이 上古代의 제왕들은 모두 氏로서 호칭을 정함으로서

종족의 우두머리 혹은 시조, 씨알의 뜻을 강조하였습니다.

실제로 姓과 氏의 고대발음은 현재와 별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이듭니다.

氏는 종족의 시조, 부권, 제왕의 호칭으로 쓰여져 오다가 요()임검때와서는 임검(壬儉), 왕검(王儉) () 등으로

대체 되다가 다시 황(), () 까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에 수록된 상고대의 제왕들을 나열해보면 반고환인씨(盤固桓因氏) 부터 시작되어

천황씨, 지황씨, 인황씨, 거방씨, 구황씨, 섭제씨, 연통씨, 서명씨, 거령씨, 구강씨, 초명씨, 탁광씨, 구진씨, 황신씨,

이령씨, 대괴씨, 귀외씨, 기호씨, 감자씨, 태봉씨, 염상씨, 개맹씨, 대돈씨, 영양씨, 무당씨, 태일씨, 공상씨, 신민씨,

기제씨, 차민씨, 진방씨, 하성씨, 회괴씨, 동호씨, 황담씨, 이광씨, 계통씨, 길이씨, 궤거씨, 희위씨, 호락씨, 사황씨,

소홀씨까지 44세역년 5038년으로 모두 氏를 사용했던 제왕들 이었으며

이를 신선(神仙) 또는 한民族史의 제1기 단군(壇君) 이라고합니다.

 

그외 복희씨, 염제신농씨, 유소한웅씨, 도당씨(陶唐氏제요씨(帝堯氏당요씨(唐堯氏) 등이 있습니다.

 

*** 도당씨(陶唐氏제요씨(帝堯氏당요씨(唐堯氏)는 모두 요임금의 호칭.

 

그 후...

 

차츰 인구가 증가하면서 姓氏들이 많아지고 혼인제도가 더욱 엄격해지게 되었습니다.

더욱 번성해진 자식들에게는 독립한 다음 서로 구별되는 그 어떤 부호를 가지게 해야 했는데

이러한 수요에 부응하여 제왕의 상징이었던 씨()는 단순한 씨족의 시조 또는 수장의 자리로 내려오게됩니다.

 

계급사회에서 씨()는 신분의 고저귀천(高低貴賤)을 나타내는 부호이기도 하여 王子(왕의 아들), 王孫(왕의 손자),

公子(제후의 아들), 公孫(제후의 손자, 공자의 아들)이 씨()로 사용되었고 땅을 봉해 받은 사람은 봉읍(封邑) 지명을,

관직에 있는 사람은 관직을, 어떤 직업이나 기능직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 직업이나 기능직을 씨()로 삼게되었습니다.

 

예를들어 축()씨는 제사를 맡아보는 축사(祝史)라는 벼슬에서 왔는데 그 자손들은 축()을 씨()로 삼았던 것이며

사씨(史氏)는 고대의 사관(史官) 벼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사()를 씨()로 삼았다는것 등입니다.

 

후세에 와서 빈번한 사회적 변동을 거치면서 씨()로 표현했던 고저귀천의 의미가 점점 희미해져

마침내 성씨합일(姓氏合一)이 이루어지게되었습니다.

 

 

추가설명

 

복희씨의 직계후손인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 BC. 3071)는 강()姓이며

염제신농씨와 헌원황제씨(軒轅黃帝氏 BC. 2679)는 같은 혈통(血族)이면서 姓은 공손(公孫)이다.

 

황제(黃帝 BC. 2679)는 계집 여()자로써 글을 만들었으며

치우(蚩尤 BC. 2707)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씨로 姓을 고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帝王韻紀 참고)

 

치우(蚩尤)의 아버지는 계곤씨(啓昆氏 BC. 2979)로 황제(黃帝)의 아버지 소전씨(少典氏 BC. 2789)와는 한 형제벌이다.

 

그러나 蚩尤는 서자출신으로 형제가 81名이나 된다는 기록이 사기(史記)에 나타나있다.

다시 말해 같은 血統이라도 제각각 성씨가 다른 것은 모계사회에서 나름대로 성씨를 사용해 왔던 것을 볼 수 있다.

 

黃帝 아들은 25名이었지만 성을 받는 아들은 14이었다고 史記에 기록하고 있으며 山海經에도 적혀있다.

특히 黃帝 아들 중, 큰 아들은 낙명(駱明)이며 창의(昌意), 현효(), 호금천씨(少昊金天氏 新羅始祖), 우경(禹京),

우호(禹豕)외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기서 황제아들 중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BC. 2578)는 희()씨성으로 신라(新羅)의 시조(始祖)로 되어있고

현효()의 아들은 교극()이며 교극의 아들은 제곡고신씨(帝嚳高辛 BC. 2482)로 희()씨 성으로 되어있다.

제곡고신씨의 첫째 부인은 강원씨(姜嫄氏)로 후직(后稷)을 낳았으며 이름을 기()라고 했다.

 

두 번째 부인은 간적씨(簡狄氏)로 설()을 낳았고, 세 번째 부인은 진풍씨(陳豊氏)로 요()임금을 낳았다.

 

()임금의 성은 이()씨이다.

한편 황제아들 창의(昌意)는 전욱고양씨(頊高陽氏 BC. 2491)를 낳았고 고양씨의 아들 곤곤(鯀鯀)을 낳았으며

곤곤은 하()나라 우()임금을 낳았다.

 

황제아들 창의(昌意)와 창의의 아들 고양씨(高陽氏)는 모두 희()씨 성이였으나

고양씨의 친손자인 하우(夏禹)임금은 ()씨의 성이였다.

한편 황제(黃帝)아들 창의는 고양씨를 낳고, 또 다른 아들은 궁선(窮蟬)을 낳고, 궁선은 경강(敬康)을 낳고,

경강은 구망(句芒)을 낳았다.

 

구망은 교우(橋牛)를 낳고, 교우는 고수(瞽叟)를 낳았으며, 고수는 순()임금을 낳았다.

그런데 순()임금은 요()라는 성씨였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같은 血統으로 내려왔지만 성씨(姓氏)가 전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은()나라 성탕(成湯)은 요()임금의 형이였던 설() 14세손으로 성씨는 자()이다.

그러나 요()임금의 큰 형님이었던 후직(后稷), 즉 기() 16세손인 주무왕(周武王)의 성은 희()씨였다.

 

 

그 후 노(), (), (), (), (), (), (), ()나라들은 모두 희()씨 성이였다.

 

한편 제()나라는 강()씨 성이며, ()나라는 규()씨의 성이었다.

그리고 초()나라와 송()나라는 자()씨 성을 지녔다.

 

반면에 한국인 한()과 위(), 그리고 조()나라는 진()나라에서 갈라져 나온 같은 혈통이므로

모두가 희()씨 성이였다.

하지만 진()나라인 진시황제(秦始皇帝)는 황제손자 전욱고양씨(頊高陽氏)의 후손이었지만

()씨성을 따르지 않고 李氏 성이였으나 영(嬴)씨의 성으로 바뀌었다.

 

 

()나라가 망한 후 진한(秦韓)의 직계 후손이었던 진한(辰韓)의 新羅는

황제(黃帝)아들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왕호(王號)를 따서 김()씨로 바꾸었다.

 

모계사회서 파생된 姓氏는 혈통(血統)과 관계없이 그때그때에 따라 성()을 받게 되거나 봉작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관직을 받을 경우와 王으로부터 성을 하사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굳이 血統을 고집하고 성을 이어온 것은 조선왕조(朝鮮王朝)밖에 없다.

 

상고시대(上古時代) 때부터 高麗때 까지만 해도 모계사회의 영향으로 굳이 血統을 고집하여

똑같은 성()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

물론 춘추전국(春秋戰國)이후 전란으로 인하여 성()의 계보를 지키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신하(臣下)가 죽음을 두려워 멀리 숲으로 도망가 임씨(林氏)성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한국에 있는 모든 성씨(姓氏)의 족보는 高麗때부터 기록한 것으로 되어있다.

사실은 조선왕조(朝鮮王朝)초기 때부터 중국대륙(中國大陸)에 있었던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을 무대로 하여

족보를 엮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것은 高麗때까지 몽고(蒙古)난으로 인하여 혈통을 지키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高麗때까지는 모계사회의 영향으로 인해 성씨의 血統관계는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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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권시대(父權時代)의 시작

 

요순(堯舜 BC. 2357~2319)때부터 점차 부계사회로 넘어오려는 조짐이 있었다.

 

그러나 요순(堯舜)때 만해도 모계사회의 강한 영향으로 안으로는 모계사회의 힘이 흐르고 있었다.

 

( BC. 2224)나라 우()임금때 와서는 치산치수(治山治水)에 성공하여

( BC. 2284)임금으로부터 대비(大費)라는 본 이름대신 현규(玄珪)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후,

() 임금의 딸 옥녀(玉女)를 처로 삼게 되었다.

이때 순()임금의 성은 요()였으며 옥녀(玉女) 역시 요()성이었다.

(海內西經 참고)

 

()임금이 등극한 후 옥녀(玉女)에게서 두 아들을 얻었는데 큰 아들은 대염(大廉)으로 조속씨(鳥俗氏)

작은 아들은 약목(若木)으로 비씨(費氏)이다.

 

두 아들 모두 제후왕으로 있을 당시 우()임금은 주색에 놀아나고 궁녀(宮女)들과 어울리는 과정에서

부권사회(父權社會)의 권위의식이 극에 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순()임금의 두 딸은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태호(太湖) 호수에 있는 동정산(洞庭山)에 들어가 선녀처럼 살았다고

산해경(山海經) 주석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다.

(필자의 저서 山海經 참고)

 

부권시대(父權時代)는 우()임금 때부터 시작하여 춘추시대(春秋時代 BC. 770~476)로 이어져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 475~221)에 들어와 진()나라가 統一할 때 까지

모권사회(母權社會)는 표면적으로 쇠약해졌다.

 

이상과 같은 상황 속에서 땅이름을 고치고 바꾸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칠웅(七雄), 즉 진(), (), (), (), (), (), () 등이 난립하다 망한 후

地名의 변천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이하생략>

 

출처 : 논문 " 모계사회(母系社會)와 성씨(姓氏) " 율곤 著

 

 

, 名에 대하여...

 

族이란것은 몸과 마음을 같이하는 무리라는 뜻으로

일가족을 기본단위로 몇개 또는 수십 . 수백 .수천의 무리를 이루는것을 말합니다.

크게 말하면 종족(種族)이 되고 종족(種族)이 커지면 나라가 되겠지요.

 

고대의 族에 관한 개념은 황제와 염제가 서로 갈라지면서 생겨나기 시작했다고봅니다.

 

바로 곰을 상징으로하는 웅족과 호랑이를 상징으로하는 호족간의 몇대에 걸친 대전쟁을 말하는데

황제가는 적장자 출신으로 왕권을 물려받고

치우는 염제의 문중에 속하여있었는데 서자출신이라는 이유로 왕권을 받지못해

스스로 천자가 되었음을 선포하면서 황제와 대전쟁을 벌이게 되고

그 피해는 민중들에게 돌아가 전 대륙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난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民族 대이동이 촉발되어 베링해를 넘어 아메리카땅으로 건너간 무리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이렇듯 族이라는것은 대체적으로 정착과 이동, 풍습 등을 같이하는 동류들을 일컷는 개념으로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名은 한개인에게 붙여지는 호칭인 만큼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것 같습니다.

 

그외에 유교적으로 사람을 호칭할때 쓰는 작위 봉작 군 호 시호 자 아명 등은 생략하겠습니다.

 

 

참고문헌

 

* 이氏의 뿌리역사 : 율곤 이중재

 

294-1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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