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시

2020. 11. 18. 09:49나의 이야기

강 있는 마을 김상옥

 

강(江) 있는 마을

 

한굽이 맑은 강(江)은 들을 둘러 흘러가고

기나 긴 여름날은 한결도 고요하다

어디서 낮닭의 울음소리 귀살푸시 들려오고

 

마을은 우뜸 아래뜸 그림같이 놓여 있고

읍(邑)내로 가는 길은 꿈결처럼 내다 뵈는데

길에는 사람 한 사람 보이지도 않어라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그 문전 김상옥

 

그 문전(門前)

 

모처럼

지는 꽃 손에 받아

사방(四方)을 둘러 본다

 

지척엔

아무리 봐도

놓아 줄 손이 없어

 

그 문전(門前)

닿기도 전에

이 꽃잎 다 시들겠다.

 

향기 남은 가을, 상서각, 1989

 

 

 

 

 

깃을 떨어뜨린 새 김상옥

 

깃을 떨어뜨린 새

 

새는 앉는 자리마다

깃을 떨어뜨린다.

나도 서울 와서

수없이 옮겨 앉고

또 수없이 짐을 꾸렸다.

산다는 일은 고작

짐이나 꾸리는 일,

그 동안 넝마로 넘긴 짐이

자그만치 다섯 가마니

남은 짐도 결국은 넝마뿐이다.

이번에 옮겨 갈 곳은

또 어느 길목, 어느 등성인가?

문득 머무는 한 생각―

이윽고 더는 못 옮길

땅거미 깔린 이승의 끝,

내 이미 깃을 떨어뜨린 새

이 새는 스스로 짐 되어

마지막 짐짝모양 실려 가리니

그때는 돌아볼 이승도

다시 꾸릴 짐도 없을라.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낙엽 김상옥

 

낙엽(落葉)&

 

맵고 차운 서리에도 붉게 붉게 타던 마음

한가닥 실바람에 떨어짐도 서럽거늘

여보소 그를 어이려 갈구리로 검나뇨

 

떨어져 구을다가 짓밟힘도 서럽거든

티끌에 묻힌 채로 썩을 것을 어이 보오

타다가 못 다 탄 한을 태워 줄까 하외다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다보탑 김상옥

 

다보탑(多寶塔)

 

불꽃이 이리 튀고 돌조각이 저리 튀고

밤을 낮을 삼아 정 소리가 요란터니

불국사(佛國寺) 백운교(白雲橋) 위에 탑이 솟아오른다.

 

꽃쟁반 팔모 난간(欄干) 층층이 고운 모양!

그의 손 간 데마다 돌옷은 새로 피고

머리엔 푸른 하늘을 받쳐 이고 서 있다.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대역의 풀 김상옥

 

대역(代役)의 풀

 

허구헌 날, 서울의 구정물을 다 받아 내리던 청계천(淸溪川) 육가(六街). 그 냇바닥을 복개(覆蓋)한 시멘트 위로 고가도로(高架道路)가 놓이고, 그걸 또 받쳐 든 우람한 교각(橋脚). 그 교각(橋脚)의 틈서리에 한 포기 강아지풀이 먼지 묻은 바람을 맞아 나부끼고 있었다. 시멘트 아스팔트로 덮인 서울은 풀씨 하나 묻힐 곳도 없는데, 이 교각(橋脚)의 강아지풀은 온갖 가냘프고 질긴 목숨들을 스스로 대신(代身)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날아와 떨어진 씨앗이던가? 이 강아지풀은 또 좁쌀보다 작은 그의 씨앗을 실오리 같은 줄기 끝, 흰 다갈색(茶褐色) 털 속에 달고 있었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더러는 마주친다 김상옥

 

더러는 마주친다

 

살아가노라면

더러는 마주친다.

 

세상에는

외나무다리도 많아,

아무리 피하려도

피할 수 없는―

 

이 다리 위서 너는

뒤따라온 모리꾼으로 마주치고,

또 젊으나 젊은 날

허리 꾸부린 내시(內侍)로도 마주친다.

 

이 다리 위서 너는

한 오리 미꾸라지로 마주치고,

이미 눈에 불을 끈

늙은 암여우로도 마주친다.

 

세상(世上)을 사노라면

외나무다리도 많아,

아무리 피하려도

피할 수 없는―

 

짐짓 꽁무니 감추어도

더러는 마주친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뜨락 김상옥

 

뜨락

 

자고 나면

이마에 주름살,

자고 나면

뜨락에 흰 라일락.

 

오지랖이 환해

다들 넓은 오지랖

어쩌자고 환한가?

 

눈이 부셔

눈을 못 뜨겠네.

구석진 나무 그늘

꾸물거리는 작은 벌레……

 

이날 이적지

빛을 등진 채

빌붙고 살아 부끄럽네.

 

자고 나면

몰라 볼 생시.

자고 나면

휘드린 흰 라일락.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묵을 갈다가 김상옥

 

묵(墨)을 갈다가

 

묵(墨)을 갈다가

문득 수몰(水沒)된 무덤을 생각한다.

물 위에 꽃을 뿌리는 이의 마음을 생각한다.

꽃은 물에 떠서 흐르고

마음은 춧돌을 달고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묵(墨)을 갈다가

제삿날 놋그릇 같은 달빛을 생각한다.

그 숲 속, 그 달빛 속 인기척을 생각한다.

엿듣지 마라 엿듣지 마라

용케도 살아 남았으니

이제 들려 줄 것은 벌레의 울음소리밖에 없다.

 

밤마다 밤이 이슥토록

묵(墨)을 갈다가

벼루에 흥건히 괴는 먹물

먹물은 갑자기 선지빛으로 변한다.

사람은 해치지도 않았는데

지울 수 없는 선지빛은 온 가슴을 번져난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방관자의 노래 김상옥

 

방관자(傍觀者)의 노래

 

슬퍼라 가을이여! 서릿발에 서걱일 잎새는커녕, 진구렁 뿌리마저 썩더란 말가. 해마다 이맘 때면 살을 긁던 그날의 그 갈대숲, 한강(漢江)엔 인제 등뼈 굽은 피래미만 꼬리치나니.

 

슬퍼라 가을이여! 차라리 갈대처럼 살갗이라도 긁히고지고. 피가 배이도록 자해(自害)라도 저지르고지고. 사위(四圍)는 둘러 봐야 막막한 무인지경(無人之境). 쉬이 쉬이 손꾸락 입에 대고 하던 말 도로 멈출, 그런 눈짓이라도 만나고지고.

 

슬퍼라 가을이여! 이미 약물에 산천(山川)은 찌들었건만, 지금쯤 애가 탈 금수(錦繡)로운 마무리. 그러나 이런 걸 비로 울릴 한 가닥 심금(心琴)인들 없단 말이냐. 골수에 스민 방관자(傍觀者)의 뉘우침은 곪아 가나니.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백자부 김상옥

 

백자부(白磁賦)

 

찬서리 눈보래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白鶴) 한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 끝에 풍경(風磬)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 틈에 불로초(不老草) 돋아나고

채운(彩雲) 비껴 날고 시내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드노다

 

불 속에 구워 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純朴)하도다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변신의 꽃 김상옥

 

변신(變身)의 꽃

 

아무도 없는 뜨락이었다.

이내 같은 흰 꽃이 피어 있는―

 

가까이 가 보지 않았으나

이미 만개(滿開)한 배꽃일시 분명하다.

 

굳이 배꽃이 아니래도

이내같이 머흐는 꽃이었다.

 

하루는 이 꽃이

느닷없이 하나의 열쇠가 되었다.

꽃이 어찌 열쇠가 되는가?

 

느끼며 기다리며 또

오래 오래 참고 살아 볼 일이다.

 

이 꿈꾸듯 적적(寂寂)한 꽃은

어떤 엉구렁에서도 길을 낸다.

 

때로는 목숨도 잊어버리고

때로는 만남의 문턱으로 드나든다.

 

아무도 없는 뜨락에

호젓이 핀 이 이내 같은 꽃은―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병상 김상옥

 

병상(病床)

 

내 어찌 조심 없이 세상을 살았기로

뜯기고 할퀴어 왼몸에 상처(傷處)거니

이 위에 병을 마련해 날로 이리 지든다

 

잦아진 촛불인 양 숨소리도 가냘프고

외로 돌아누워 눈이 띈지 감겼는지

창(窓)밖에 저무는 빛이 죽음같이 고와라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봄 김상옥

 

봄&

 

심지어

동냥 온 쪽박에도

눈부신 햇살이 쏟아진다.

 

신(神)도

이런 날은

저 달동네 꼬맹이처럼

 

추녀 밑

제비 새끼랑

해종일 재잘거리고 논다.

 

창작과비평, 1991.봄

 

 

 

 

 

봉선화 김상옥

 

봉선화(鳳仙花)&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 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 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노나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불모의 풀 김상옥

 

불모(不毛)의 풀

 

늙은 서인(庶人) 두자미(杜子美),

징용으로 끌려온

그 변방(邊方)에도

풀은 철따라 푸르렀다.

 

고향 강남(江南)엔

담 넘어 꽃잎 날리고,

부황난 처자(妻子)

눈앞에 아른거렸나니

 

이룬 것 없이 나도

그만큼 찌들었는가

서울은 가을,

불모(不毛)의 풀만 무성하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비가 김상옥

 

비가(悲歌)

 

아파트 꼭대기에도

자욱한 귀뚜라미 소리,

이미 잃어버린 밤을

올올이 자아 올린다.

 

알것다 알것다

그만하면 알것다.

 

남루한 영혼들

짜고 매운 양념으로

푸성귀 발기듯

그 살갗 치대고 있다.

 

알것다 알것다

그만하면 알것다.

 

깎아지른 벼랑 밑

강들은 숨을 죽이고,

홑이불 같은 달빛

강물 위에 깔려 있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비 듣는 분막 김상옥

 

비 듣는 분막(墳幕)

 

등성이 넘어 넘어 골도 차츰 아늑한데

무덤은 도란도란 한 뜸으로 둘러 있고

비 듣는 안개 속으로 벌레 소리 자욱하다.

 

여기 다른 하늘 낮과 밤이 흘러가고

금잔디 다 젖어도 버설거지 하지 않고

외로운 넋들이 모여 의초롭게 살더란다.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사향 김상옥

 

사향(思鄕)&

 

눈을 가만 감으면 굽이 잦은 풀밭 길이,

개울물 돌돌돌 깊섶으로 흘러가고,

백양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 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도

저녁 노을처럼 산을 둘러 퍼질 것을.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 오리.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수해 김상옥

 

수해(樹海)

 

도끼에 닿기만 하면 선 채로 썩어지는 나무

한 번 보기만 해도 삽시에 연기로 갈앉는 나무

몇 백리(百里) 지름을 가진 그런 숲 속에 묻히고 있다.

 

숨을 거두는 향기 속에 멍석만한 꽃이 피고

먹으면 마취(痲醉)되는 아름드리 복숭아 열매

인종은 벌레만 못해, 발도 아예 못 붙인 이곳.

 

칠흑의 머리를 푼 수양버들이 달려오고

휘황한 등불이 매달린 계수나무도 달려와서

구천(九天)에 휘장을 두르고 세상 밖에 노닐고 있다.

 

향기 남은 가을, 상서각, 1989

 

 

 

 

 

십일면관음 김상옥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으슷이 연좌(蓮座) 위에 발돋움하고 서서

속눈섭 조으는 듯 동해(東海)를 굽어 보고

그 무슨 연유(緣由) 깊은 일 하마 말씀하실까

 

몸짓만 사리어도 흔들리는 구슬소리

옷자락 겹친 속에 살결이 꾀비치고

도도록 내민 젖가슴 숨도 고이 쉬도다

 

해마다 봄날 밤에 두견(杜鵑)이 슬피 울고

허구헌 긴 세월(世月)이 덧없이 흐르건만

황홀한 꿈 속에 쌓여 홀로 미소(微笑)하시다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어느 가을 김상옥

 

어느 가을

 

언제나 이맘때면 담장에 수(繡)를 놓던 담쟁이넝쿨. 병(病)든 잎새들 그 넝쿨에 매달린 채 대롱거린다.

 

가로(街路)의 으능나무들 헤프게 흩뿌리던 그 황금(黃金)의 파편(破片), 이 또한 옛날 얘기. 지금은 때묻은 남루조각으로 앙상한 가지마다 추레하게 걸렸다.

 

멸구에 찢긴 논두렁 허옇게 몸져 눕고, 사람 같은 사람은 벌레만도 못해 인젠 마음 놓고 한 번 울어 볼 수도 없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이순의 봄 김상옥

 

이순(耳順)의 봄

 

올봄은

이순(耳順)의 봄.

 

지난 날

지난 봄은

 

시정(市井) 잡배(輩)도,

산중 돌배꽃도,

 

제 얼굴 아니게

분(粉)칠했다.

 

올봄은

이순(耳順)의 봄.

 

더덕더덕 칠한 것

말짱 지우고,

 

몰라 본 주인(主人)도

찾아 뵈옵고,

 

피부색(色) 그대로

볕 발리 서리로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인간나라 생불... 김상옥

 

인간(人間)나라 생불(生佛)...

 

원제 : 인간(人間)나라 생불(生佛)나라의 수도(首都)

 

신라(新羅) 일천년(一千年) 서라벌은 한 왕조(王朝) 아니라, 한 왕조(王朝)의 서울 아니라, 진실로 인간(人間)의 서울, 오직 인간(人間)나라의 서울이니라.

 

한 가닥 젓대의 울림으로 만(萬)이랑 사나운 물결도 잠재운 나라, 모란빛 진한 피비림도 새하얀 젖줄로 용솟음치운 나라, 첫새벽 홀어미의 사련(邪戀)도 여울물에 헹궈서 건네 준 나라, 그 나라에 또 소 몰던 백발(白髮)도, 행차(行次)에 나선 젊으나 젊은 남의 아내도, 서로 죄(罪) 없는 눈짓 마주쳤느니

 

꽃벼랑 드높은 언덕을 단숨에 뛰어올라, 기어올라, 천지(天地)는 보오얀 봄안개로 덮이던 생불(生佛)나라 생불(生佛)들의 수도(首都)이니라.

 

향기 남은 가을, 상서각, 1989

 

 

 

 

 

입동 김상옥

 

입동(立冬)

 

그대 바람같이 가 버리고 이내 이날로 소식(消息)도 없다

 

잎 진 가지 새로 머언 산(山)길이 트이고

새로 인 지붕들은 다소곤히 엎드리고

김장을 뽑은 밭이랑 검은 흙만 들났다

 

둘안을 깔린 낙엽(落葉) 아궁에 지피우고

현불에 지새우던 그날 밤을 생각느니

몹사리 그리운 시름 눈에 고여 흐린다

 

칩고 흐린 날을 뒷뫼엔 숲이 울고

까마귀 드날르고 해도 차츰 저무는데

헐벗고 떠나신 길에 주막(酒幕)이나 있는지……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주변에서 김상옥

 

주변(周邊)에서

 

그것은

한 가지 질문이었다,

두엄 곁에 핀 달개비꽃도.

 

그것은 또

한 가지 대답이었다,

풀잎을 기는 딱정벌레도.

 

참으로

뭉클한 슬픔이었다,

가까이 들리는 먼 귀울림.

 

문학사상, 1992

 

 

 

 

 

참파노의 노래 김상옥

 

참파노의 노래

 

늙고 지친 참파노

인제는 곡예(曲藝)에도 손을 씻고

철겨운 눈을 맞으며

종로의 인파(人波) 속을 누비고 간다.

 

길은 찾으면 있으련만

봄이 오는 머언 남쪽 바닷가

내 전생(前生)의 젤소미나

너는 이날 거기서 뭘 하느냐?

 

내 그만 돌아갈까

우장(雨裝)모양 걸쳤던 코오트

그 체크무늬에도 봄은 오는가.

 

쑥국으며 햇상치쌈

울 밑에 돋아난 향긋한 방풍나물

그런 조촐한 저녁상 앞에

너와 함께 그날처럼 앉고 싶구나.

 

ꡒ참파노오 참파노오

참파노가 왔어요!ꡓ

 

흐린 날 외론 갈매기

목이 갈리던 그 울부짖음

뒤끝이 떨리던 나팔(喇叭)소리

지금도 쟁쟁 내 귓전에 울린다.

 

언제나 사무적(事務的)인 이승에선

눈만 껌벅인 젤소미나

내 역시 골이 비었어도

아직 추스릴 눈물만은 간직했다.

 

향기 남은 가을, 상서각, 1989

 

 

 

 

 

추천 김상옥

 

추천

 

멀리 바라보면 사라질듯 다시 뵈고

휘날려 오가는 양 한 마리 호접(胡蝶)처럼

앞뒤 숲 푸른 버들엔 꾀꼬리도 울어라.

 

어룬 님 기다릴까 가비얍게 내려서서

포탄잠(簪) 빼어 물고 낭자 고쳐 찌른 담에

오지랖 다시 여미며 가쁜 숨을 쉬도다.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축제 김상옥

 

축제(祝祭)

 

살구나무 허리를 타고 살구나무 혼령이 나와

채선(彩扇)을 펼쳐 들고 신명나는 굿을 한다.

자줏빛 진분홍을 돌아 또 휘어잡는 연분홍!

 

봄은 누룩 딛고 술을 빚는 손이 있다.

헝클린 가지마다 게워 넘친 저 화사한 발효(醱酵)

천지(天地)를 뒤덮는 큰 잔치가 하마 가까워 오나부다.

 

향기 남은 가을, 상서각, 1989

 

 

 

 

 

태 김상옥

 

태(胎)

 

벽장 안

낡은 손가방

그 속엔 으례 칫솔과 타올.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호로병(甁) 속에 있고,

 

겨울 숲

땅거미 깔려도

다 그 태(胎) 속의 고물거림…….

 

시와 시학, 1993

 

 

 

 

 

화창한 날 김상옥

 

화창(和暢)한 날

 

우리 평생(平生)에 이런 날이 며칠이나 될까. 지금 강변로(江邊路)엔 꾀꼬리빛 수양버들, 머리 푼 세우(細雨)처럼 드리웠다. 흩뿌리는 시늉으로 천만사(千萬絲) 가지마다 연초록 휘장모양 드리워 있다.

 

휘장에 가리운 외인묘지(外人墓地). 저 호젓한 구릉(丘陵)에도 초록빛 사이사이, 흰 묘비(墓碑) 사이사이, 연교(連翹)꽃 노오랗게 어우러졌다. 브로크 담장 밖엔 살빛 분홍꽃도 조금씩 조금씩 초친 듯이 번져난다.

 

여기는 절두산(切頭山) 드높인 성당(聖堂), 낭떠러지 받쳐든 위태로운 난간(欄干)을 기대 선다. 삶과 죽음마저 남의 일처럼 굽어보기에 알맞은 곳. 살아 있는 외로움이 뼈에 사무친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記問之學  (0) 2022.07.07
최초의 성(姓)  (0) 2022.01.10
율리시스의 계약  (0) 2020.11.11
需卦  (0) 2020.10.21
山 의 哲學 안병욱   (0) 2019.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