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問之學

2022. 7. 7. 05:46나의 이야기

기문지학(記問之學)이란

단순(單純)히 책()을 외우기만 하고 

제대로 이해(理解)하지 못한 학문(學問)을 말합니다.

 

記問之學 不足以爲人師

기문지학 부족이위인사

 

기억(記憶)만 잘하는 학문(學問)으로는 

박식(博識)하더라도 남의 스승이 되기에 부족(不足)하다.

 

이 말은 【예기(禮記)】 『학기편(學記篇)』에 나오는 말인데

고전(古典)의 내용(內容)이나 사실(事實)을 잘 기억(記憶)하여,

(), 암기(暗記)를 잘 하여 

잡다(雜多)한 지식(知識)이 많지만

이를 행동(行動)으로 실천(實踐)하는 것을

중시(重視)하지 않는 학문(學問)을 말하는 것이니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머리에 든 것이 많다고 하더라도

남을 가르치기에 부족(不足)하다고 지적(指摘)한 것입니다.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 것을 충분(充分)히 익혀 새로운 것을 알면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하다.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말로

복거지계(覆車之戒)와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말입니다. 

 

옛 것을 익힌다 함은 

지나간 역사(歷史)를 중시(重視)한다는 것이며,

잘한 것은 본받기 위()해서,

잘 못한 것은 같은 실수(失手)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자(孔子)는 과거(過去)의 지식(知識)과 새로운 지식(知識)

내재적(內在的) 관계(關係)에 있다고 보았으며,

공부(工夫) 과정(過程) 그 자체(自體)

과거(過去)의 지식(知識)과 새로운 지식(知識)

연계(連繫)해 나가는 과정(過程)이라고 보았습니다.

 

과거(過去)의 지식(知識)

현재(現在)의 활용(活用)을 위()한 기초(基礎)가 되며,

이를 바탕으로 미래(未來)의 나와 타인(他人)을 이끄는

스승 역할(役割)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작정(無酌定) 옛 것을 외우거나

무조건(無條件)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오래 되고 낡은 지식(知識)이라도

비판적(批判的) 시각(視覺)으로 보고 해석(解釋)하면

새로운 사실(事實)을 유추(類推)하거나

남다른 것을 창출(創出)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먼저 옛 학문(學問)을 되풀이하여 연구(硏究)하고,

현실(現實)을 처리(處理)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學問)을 이해(理解)하여야 

비로소 남의 스승이 될 자격(資格)이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자왈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危殆)롭다.

 

아무리 이것 저것 배운 것이 많아도 내 마음에서 

그 원리(原理)를 완전(完全)히 터득(攄得)하지 못했다면

그 배운 것이 서로 혼돈(混沌)되고,

그저 잡다(雜多)한 지식(知識)에 불과(不過)할 뿐이며,

응용력(應用力)도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세상(世上)에는 다양(多樣)한 가치(價値)들이 있는데,

아무것도 배우지는 않고 

오로지 사색(思索)과 명상(冥想)만 한다면,

자기(自己)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어

조그마한 깨달음을 가지고도 

마치 우주(宇宙)의 도()를 관통(貫通)한 것처럼

착각(錯覺)할 수도 있으므로 매우 위태(危殆)롭습니다.

 

그러므로 배움과 사색(思索)을 병행(竝行)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옳은 방법(方法)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서

공자(孔子)께서는 아래와 같이 

말보다 실천(實踐)이 중요(重要)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子貢問君子 子曰 先行其言 而後從之

자공문군자 자왈 선행기언 이후종지

 

자공(子貢)이 군자(君子)에 관()하여 여쭈어보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자신(自身)의 말을 스스로 실행(實行)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自己)를 따르게 하는 것이다.

學非學文

近有友人從鄕里來者, 余問有子否, 曰有, 又問今年幾歲, 曰十三, 又問何不送入學校, 曰姑使在家稍習漢文, 嗚呼此皆不知學非學文之義故爾, 於是而國漢両文, 互相爭辨, 斷斷不已, 甚可歎也, 夫文者成文之言語也, 言語者不成文之文也, 凡以言語敎人, 常難記而易忘, 故不得已而盡爲曲直之形, 發爲脣舌之音, 命之以文字, 今有釋孝義者, 漢文則曰善事父母曰孝, 國文則부모잘셩김을왈효라, 國漢両文雖有不同, 其釋孝義一也, 則人當學爲孝而已, 不當爭孝효二字也, 故孔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以信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子夏曰, 賢賢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吾必謂之學矣, 由此觀之, 古者聖人, 學孝弟謹信, 而未嘗敎人學文也, 而我韓五百年之間, 朝廷則以詞賦取士, 儒學則以經史立家, 平日見聞不出於是, 人知學非學文之義者, 盖無幾矣, 余於學報第 
 

二號, 亦嘗言小學用國文, 中學用漢文者未必無參酌之意, 而諸公自不加察, 或相謗毁, 甚至有子十三歲, 不入學校, 而在家習漢文, 吾恐此子已失小學足踉, 從使一躍以登中學, 亦不能立脚, 數年之後, 雖悔無及矣, 近日子弟輩其年過十七八, 粗解詩書文字者, 雖初入學校, 輒以中學待遇, 然旣無小學工夫, 故志氣浮薄, 言語侈張, 將來成就不可期望, 諸公不究其所以然, 而徒歸咎於學校何也, 我朝先正金宏弼, 常自稱小學童子, 故當時論篤行君子, 則必以先生稱首, 然今觀其遺集, 不過寂寞數篇而已, 則古人學非學文之義, 推可見矣, 勗哉諸公。
학문은 문자를 배운 것이 아님(學非學文)
요즈음 한 친구가 자기 향리(鄕里)로부터 나를 찾아와서 묻기를 “자네는 아들이 있는가?”라고 하므로 나는 “있네”라고 하였다. 그는 또 “금년에 나이가 몇인가”라고 하므로 나는 “13세이네”라고 대답하자 그는 또 “어찌 학교(學校)를 보내지 않고 있는가”라고 하므로 나는 “아직 집에서 한문(漢文)을 배우고 있네”라고 하였다. 
아! 이것은 모두 학문은 문자를 배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국(國)·한문(漢文)을 두고 서로 다투며 끝임없이 자기 주장만 하고 있으니 매우 개탄스러운 일이다. 글이라는 것은 글로 표현한 언어(言語)이며 언어라는 것은 문자(文字)로 형성되지 않는 글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언어(言語)로 사람을 교육하면 항시 기억하기 어려워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부득이 곡직(曲直)의 형상(形像)을 만든 후 그것을 입술과 혀로 발음하여 이것을 문자(文字)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지금 효자(孝子)의 뜻을 풀이한다면 한문(漢文)은 “선사부모왈효(善事父母曰孝)”라고 하지만 국문(國文)으로 쓴다면 “부모 잘 섬기는 것이 효(孝)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국(國)·한문(漢文)이 비록 다르지만 그 효자(孝字)의 뜻을 해석하는데는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효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며 효(孝)·효 두 글자를 다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는 “제자(弟子) 입측효(入則孝) 출측제(出則第) 근이신(謹以信) 범애중(汎愛衆) 이친인(而親仁) 행유여력(行有餘力) 측이학문(則以學文)” 제자(第子)가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면 공순하여 근신(謹愼)과 신의(信義)를 지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인(仁)한 사람을 친근히 해야 할 것이니 이런 일을 행한 후에 남은 힘이 있으면 학문을 해야 할 것이다. 편자주 이라고 하였고 자하(子夏)춘추(春秋), 위인(衛人). 성은 (卜), 명은 (商), 공자(孔子)의 제자(弟子), 공문4과(孔門四科) 중 문학과(文學科)에 들고 시(詩)를 공부하여 공문(孔門)의 시학(詩學)이 자하(子夏)로부터 6인(人)을 거쳐 손향(孫鄕)에게 이르고 손향(孫鄕)은 부구백(浮丘佰)에게 전수하여 노시(魯詩)의 개조(開祖)가 되었으며 또 춘추(春秋)의 공양(公羊)·곡양(穀粱) 2부(二傅)도 자하(子夏)로부터 전수되고 공자(孔子)가 작고한 후에는 서하(西河)에서 학문을 강론하였으며 위문후(魏文侯)가 사사하기도 하여 공문경부파(孔門經傅派)의 개조(開祖)가 되기고 함. 편자주 는 “현현역색(賢賢易色) 사부모(事父母) 능갈기력(能竭其力) 사군(事君) 능치기신(能致其身) 여붕우교(與朋友交) 언이유신(言而有信) 수왈미학(雖曰未學) 오필위지학의(五必謂之學矣)”어진 사람을 어질게 여기어 얼굴빛을 바꾸어 대하며 부모를 섬기되 그 힘을 다하고 임금을 섬기되 그 몸을 다 바칠 것이며 친구를 사귀되 하는 말마다 신의(信義)가 있으며 그 사람이 비록 학문을 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반드시 학문을 하였다고 말할 것이다. 편자주 라고 하였다. 이 글을 보면 옛날 성인(聖人)들은 효(孝)·제(弟=悌)·근(謹)·신(信)을 배운 것이며 사람들에게 학문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韓國)은 500년 동안 조정에서는 사부(詞賦)로써 선비를 기용하였고 유사(儒士)들은 경이(經史)로써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니 그들의 평일 견문(見聞)은 이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학문이 글을 배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발표한 학보 제2호(學報 第二號)에도 소학교(小學校)에서 국문(國文)을 사용하고 중학교(中學校)에서 한문(漢文)을 사용하여 이것을 참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제공(諸公)들은 이 점을 살펴보지 않고 서로 헐뜯기만 하여 심지어는 아들이 13세가 되도록 학교(學校)를 보내지 않고 집에서 한문(漢文)이나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나는 내 아들이 이미 소학교(小學校)에는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며 비록 등을 뛰어넘어 중학교(中學校)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견디어 낼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되면 수년 후에 후회를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17~8세 된 자제(子弟)들이 조금 시서(詩書)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학교를 들어가면 중학생(中學生) 대우를 받고 있지만 그들은 이미 소학교(小學校)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뜻이 경박하고 언어(言語)도 과장이 많아 앞으로 그들이 학문을 성취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제공(諸公)들은 그 이유를 구명(究明)하지 않고 공연히 그 허물을 학교에 돌리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우리 조선조(朝鮮朝)의 선정(先正) 김굉필(金宏弼)1454~1504. 조선 초기의 학자, 자는 대유(大猶). 호는 한훤당(寒暄堂), 사옹(簑翁)·시호는 문경(文敬), 관직은 형조좌랑(刑曹佐郎)을 지내고 사후에 우의정(右議政)에 증직되었으며 육경(六經)과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한 후 다른 사람과는 달리 실천에 치중하여 5현(賢) 중 1인(人)으로 추앙되고 이퇴계(李退溪)·조광조(趙光祖)와 함께 배향(配享)되었으며 김정국(金正國)·이장곤(李長坤)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음. 편자주 은 항시 자신을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독행군자(篤行君子)로 칭하였다. 그렇다면 그것은 반드시 선생(先生)이란 칭호 중에서 제일(第一)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지금 그의 유집(遺集)을 보면 적막한 수편(數篇)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고인(古人)의 학문은 글을 배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니 제공(諸公)들은 노력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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