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4. 16:53ㆍ책과논문
인장(印章)은보인(寶印)·관인(官印)·사인(私印) 등으로 나눈다.
보인(寶印)은 국새(國璽 : 玉璽·御璽)와 어보(御寶)가 있다. 국새는 국명을 새긴 「朝鮮國璽」ㆍ「大韓國璽」와 직명을 새긴 「朝鮮國王之寶」ㆍ「皇帝御璽」 등의 실무에 사용한 실용인이 있고, 어보는 존호(尊號)· 휘호(徽號)·시호(諡號)를 새기어 종묘에 보관하던 의례적으로 왕의 가례나 보위에 오를 때 공식행사에 사용하던 보인이 있다. 관인으로는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 등의 중앙관과 지방관의 인장을 망라한 관리의 인장이다. 사인은 개인이 사용한 도서인과 낙관인이 주종을 이룬다.
임금의 인장은 삼국과 고려까지는 국새(國璽)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조선시대에는 옥새(玉璽)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였다. 왕과 왕후, 왕세자의 인장을 함께 보인이라고 한다. 임금의 새(璽) 외에는 대부분 몸에 차도록 되어 있다. 관인은 중앙관에서 지방관에 이르기까지 인장을 지참하였으며, 인꼭지에 구멍을 뚫어 인끈을 꿰어 허리에 찼다. 관인이란 집정에 쓰이던 인장으로 모두 정해진 인장제도와 계급·신분·지위에 따라 만들어졌다. 이와 같이 인장은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하나의 신표였기 때문에 규격이나 재질·용도·신분에 따라 인발(印文)과 인끈(印綬)의 색깔까지도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인장의 이명(異名)과 대표(代標)
인장에는 인(印)·장(章)·신(信)·도서(圖書)·도장(圖章) 등의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서압(署押)·화압(花押)·함(啣, 銜)·착명(着名)·착압(着押)·수결(手決)·수례(手例)·수압(手押)·수장(手掌)·수촌(手寸) 등도 인장의 대용으로 사용한 신표(信標)들이다.
인장의 자체(字體)
인장의 자체(字體)는 전서(篆書)가 주로 사용되어 전각(篆刻)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다. 보인은 전서에서도 구첩전(九疊篆)이 주로 사용되었고, 관인은 무전(繆篆)이 많으며, 사인은 소전이나 무전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예술적으로 형상화된 자체를 선호하였다. 사인의 종류에 있어서도 낙관에 사용하는 낙관인, 전적에 사용하는 도서인(圖署印)나 장서인(藏書印) 등이 있다.
인뉴(印)
인꼭지를 말하는 인뉴(印)는 모양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보인에는 용이나 거북을 조각한 용뉴(龍)와 구뉴(龜)가 사용되었다. 관인은 직뉴(直)를 사용하였으며, 사인은 매우 다양하다. 특히 고려 청동인의 인꼭지(인뉴)는 십이지를 비롯하여 특유한 조각의 형상이 많은 인꼭지(인뉴)들이 있다.
우리나라 인장의 기원은 <위서>에 “환인(桓因)이 환웅(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 3과를 주어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하니 건국과 같이 하였다. 낙랑의 인장은 봉인과 함께 한대의 인장제도를 이어 받은 것으로, 관인으로 보이는 ‘낙랑태수연왕광지인(樂浪太守王光之印)’과 ‘신광(臣光)’ 등 2과, 사인으로 ‘왕광화인(王光和印)’이 있다. 그리고 여러 점의 봉니가 남아 있다. 강원도 지방을 통치하였던 ‘예왕지인(穢王之印)’이 출토된 기록이 있고, 삼국시대에도 여러 곳에서 ‘새(璽)’를 사용한 예를 볼 수 있다.
삼국의 인장
고구려에서도 국새를 사용한 기록이 있고, 관인으로 사용된 ‘진고구려솔선한백장(晉高句麗率善韓佰長)’ 등과 함께 여러 점의 고구려 인장이 있다.
신라는 문무왕 때 “동(銅)으로 백사(百司) 및 주군인(州郡印)을 주조하였다”는 관인을 주조하여 사용한 기록이 있으며, 여러 점의 인장이 남아 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인(木印)이나 석인(石印), 함안성산산성, 설봉산성 등에서 출토된 봉인(封印)은 당시 인장의 사용을 말해준다.
백제는 인장과 기와에 찍은 상당히 많은 수의 인문(印文)이 있다. 대부분 이름과 간지(干支)를 새겨 찍은 것으로 그 형태는 양각원인(陽刻圓印) , 양각방인(陽刻방方印)과 음각방인(白文方印) , 음각원인(陰刻圓印) 등 이다.
고려의 인장
고려때는 요, 금 등에서 고려 임금에게 금인(金印)을 보내왔고, 원에서는 <부마국왕선명정동행중서성(駙馬國王宣命征東行中書省)>을 보내왔으며, 1370년 명에서는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을 보내 왔으나, 고려의 실정에 맞게 다시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고려는 주조한 청동인이 유명하다.
인문은 알아보기 어렵게 결구가 형상화되었고, 인꼭지의 조각은 여러 가지 금수의 모양을 형상화한 매우 특이한 조각이 많다. 인꼭지가 동물의 형상인 십이지를 비롯하여 사자·해태·잉어·봉황·도깨비·나비·기와모양 등으로 다양하며 직뉴도 사용하고 있어 천태만상의 자연을 형상화 하였다.
인장의 관리
관인의 관리는 고려시대에는 인부랑(印符郞)에서, 조선은 상서원(尙瑞院)에서 관리하였다. 새보(璽寶)를 맡은 관원인 장새관(掌璽官)이 새보(璽寶), 부패(符牌), 절월(節鉞) 등을 관리하였다.
어보는 종묘의 사직을 이어간다는 상징적인 보인으로 사후에 존호, 시호, 휘호 등을 새겨 종묘에 보관하며 의례용으로 임금의 가례나 보위에 오르는 공식적으로 종묘에 고해야하는 등 행사의 의식에 사용하였다. 옥으로 만든 옥보(玉寶)와 유기로 만들어 금도금한 금보(金寶)가 있다. 현재 330여과의 어보가 전한다.
옥새는 보통(寶筒)에 넣어 보갑(寶匣)에 보관한다. 인장은 인갑(印匣)에 넣어 인뒤옹(인궤)에 용도와 종류별로 보관한다. 그리고 인뒤옹은 인가(印家)에 보관하고, 인가는 인신관(印信官)이 직접 관리한다. 특히 각종의 부정부패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전곡출납의 경우 봉사인(奉使印)을 사용하여 전곡을 출납하였다. 전곡의 출납 후에 봉사인은 환수하여 호조에서 직접관리 하였다. 관인을 위조하는 경우 위조관율(僞造關律)에 의하여 인신을 위조한 율(律)로 극형으로 엄벌하였다.
인장 주조
관인의 주조는 대개 이, 호, 예, 병, 형, 공 등의 각 부처에서 임금에 아뢰어, 상서원에서 어보의궤율(御寶儀軌律)이나 전례에 따라 주조하였다. 어보를 전각할 때는 존호, 휘호, 시호 등의 순서로 새긴다. 어보의 인재(印材)는 남양옥(南陽玉)을 사용하였고, 왕비와 왕세자의 보인도 같이 주조하였다. 태종, 세종 때 각 부서의 인장을 부분적으로 주조하였으며, 임진왜란 직후 선조 때 각 관아의 인장들을 다시 주조하였다. 영조(英祖) 때 다시 문란해진 보식(寶式)을 정제하였고, 고종 2년(1865) 대왕 대비전과 대비전의 옥책문제술관 등의 관리를 임명하여 면모를 갖추었다. 고종 13년(1876) 11과의 보인을 개주, 개조·수보하였고, <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를 만들어 전모를 기록하였다.
사인의 유래
사인의 사용은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으나 고려 말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관인(官印) 뿐 만 아니라 관리의 부인들도 사인을 사용하였는데, 특히 각종 매매문서라든가 분재기에서 그 용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낙관의 유행에 따라 문인묵객들에 의하여 서화에 사용된 낙관인이 주종을 이룬다.
인재와 형태에 있어서 조선 시대의 사인은 전대보다 널리 일반화되어 그 재료도 돌·상아·청동·나무·옥 등 다양할 뿐 아니라, 인장의 형태도 사각형·직사각형·원형을 비롯하여 종모양·솥모양·호리병모양·향로모양·매화 등 여러 가지 다각형이 있다.
각풍의 변화
각인(刻印)하는 사람을 조충소기(彫蟲小技)의 쟁이로 치부하여 천대한 결과로 인장의 문화가 침체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는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 대가이고, 사대부 출신의 학자 홍석구(1621~1679)는 스스로 조각한 98과(顆)의 인장을 남겨 놓음으로써 이 시대의 각풍을 살필 수 있다. 그 후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 : 1710~1760)과 그의 숙부 회암(檜巖))이 인장을 새겼다. 추사 김정희는 청대에 유행하던 금석학의 영향을 받은 인장의 각법을 수용하였으며, 뒤를 이어 오규일(吳圭一), 정학교(鄭學敎 : 1832~1914), 유한익(劉漢翼 : 1844∼1923), 강진희(姜璡熙 : 1851∼1919), 오세창(吳世昌 : 1864∼1953), 김태석(金台錫 : 1875∼1952) 등은 근대의 전각계의 문호를 열었다.
인보의 출현
조선 말기에는 인보가 출현하게 되었다. 게다가 청으로부터 수입되는 각종의 인보들은 전각(篆刻)이라는 명칭으로 유행하였다. 우선 보인의 조성· 봉안·관리를 위해 국가에서 조성한 인보가 있다. 고종 때 보인을 대대적으로 개주·수보·개조하면서 작성한 <보인소의궤>, 보인과 부신의 관리를 위해 총목록을 작성하고 각각의 제원을 정리한 <보인부신총수>, 대한제국 선포이후 새보를 모은 <새보인본>, 장서각에서 관서인(官署印)을 정리한 <장서각소장인보>등이 있다. 그리고 사망한 왕실인사의 존호를 추상하거나 살아있는 왕실인사의 존호를 가상하면서 조성한 보인을 모은 <문조익황제상존호보문(文祖翼皇帝上尊號寶文)>·<신정왕후인보본(神貞王后印寶本)>·<현목수비옥인본(顯穆綏妃玉印本)>·<효유헌성왕대비지보(孝裕獻聖王大妃之寶)> 등이 있다.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에 의하면 보인의 주조에 있어서 참여한 인원은 이조판서와 호조판서를 비롯하여 행정관이 29명, 기술자만 들어도 23종의 기술자가 77인이 참여하여 조성된다. 전자관(篆字官)이나 각수(刻手)를 제외한 기술자들의 종목을 살펴보면 화사(畵師)·보장(寶匠)·두석장(豆錫匠)·금장(金匠)· 은장(銀匠)·옥각수(玉刻手)·소로장(小爐匠)·담편장(擔鞭匠)· 병풍장(屛風匠)·목수(木手)·소목장(小木匠)·조각장(彫刻匠)· 야장(冶匠)·쇄자장(鎖子匠)·마조장(磨造匠)·마광장(磨光匠)· 칠장(漆匠)·호갑장(護匣匠)·척피장(皮匠)·다회당(多繪匠)·입사장(入絲匠)· 안자장(鞍子匠)·매집장(每緝匠) 등이 망라되는 민관 합동 종합예술의 결정이다. 교서관에는 각수(刻手)와 전자관(篆字官)이 있어서, 전자관은 보문(寶文)을 쓰고 각수는 보문을 새겼다.
사인의 인영
사인의 인영을 찍은 인보로는 헌종과 왕실소장인을 모은 <보소당인존>, 고종이 사용하던 인장을 모아 만든 인보로 <덕수궁인존> · <수옥헌인존>, 순종의 왕세자, 황태자시절의 용인을 찍은 <동장(銅章)>, 영친왕 이은의 용인을 모은 <은친왕인존> 등은 조선 말기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왕실의 인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일반인들의 사인을 모은 인보로는 <전황당인보> · <근역인수> 등이 대표적인 인보이다. 개인의 인보로는 <김정희인보> · <김태석인보> · < 오세창인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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