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친필 행서(行書) ‘유거(幽居

2018. 7. 20. 09:24詩書藝畵鑑賞

커피전문 브랜드 ‘테라로사’ 김명성 회장의 개인 장서각 아라재(亞羅齋)에 소장되어 있는

퇴계 이황(1501년~1570년)의 친필 글씨입니다.

 

과거 서울시 서예박물관에서 전시되기도 하였던 작품으로서 퇴계 선생과 동 시대 문신

학자였던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년~1554년)이 경주 양동(良洞)의 자옥산(紫玉山)에 은거하던

1535년에 지은 15편 연작시인 '산림에 은거하며 읊은 시 15편(林居十五詠)‘ 중 '유거'(幽居)를

행서로 쓴 작품입니다.

아래에 있는 사진은 이언적 선생이 은거하였던 경주의 독락당으로써 인터넷 웹 서핑으로

사진을 옮겨왔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언적(李彦迪, 1491년~1554년)

 

조선 전기 중종 때의 문신. 그의 기보다 이를 중시하는 주리적 성리설은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었다.

〈일강십목소〉는 그 정치사상을 대표한다. ‘이언적수필고본일괄’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본관 여주. 호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자 복고(復古). 이름 적. 시호 문원(文元).

원래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령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경주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사헌부 지평·장령·밀양부사 등을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김안로(金安老)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귀향한 후 자옥산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 부교리·응교를 거쳐 이듬해에는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 무렵 일강십목(一綱十目)으로 된 상소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그 후 성균관 대사성·사헌부 대사헌·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1542년 이조·형조·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노모 봉양을 이유로 자주 사직을 하거나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안동부사·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44년 무렵부터 병이 생겨 거듭되는 관직 임명을 사양하였는데, 인종이 즉위한

다음해(1545)에 의정부 우찬성·좌찬성에 임명되었다.

그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 등이 사림(士林)을 축출하기 위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는데, 이때 의금부판사에 임명되어 사람들을 죄 주는 일에

참여했지만 자신도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시 축출될 때

그도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

 

부인은 박숭부(朴崇阜)의 딸로 슬하에 자식이 없어 종제(從弟) 이통(李通)의 아들인

이응인(李應仁)으로 양자를 삼았으며, 서자로는 이전인(李全仁)이 있다.

1566년 이전인은 《진수팔조(進修八條)》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그가 죽기 전에 작성해

놓은 것으로서, 임금의 학문에 필요한 《진덕수업(進德修業)》의 8가지 조목을 열거한 것이다.

그는 조선의 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27세 때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벌어진

‘무극태극(無極太極)’ 논쟁에 참여하여, 주리적(主理的) 관점에 입각하여 이들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였다.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적 성리설은 그 다음 세대인 이황(李滉)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김안로 사후 그는 재등용되어 중종의 신임을 받으며 정치일선에 복귀하는데, 이때부터 중종

말년까지 약 20년간 그는 생애 중 가장 활발한 정치활동을 펴 나갔다.

그가 올린 〈일강십목소〉는 그의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김안로 등 훈신들의 잘못에

휘말린 중종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는 글이다.

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一綱] 왕의 마음가짐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바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열 가지 조목[十目]을 열거하였다.

 

유배기간 동안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은 유학의 근본개념인 ‘인(仁)’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나타낸 것이며, 《봉선잡의(奉先雜儀)》는 제례(祭禮)에 관한 책으로서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의 예설(禮說)을 모아 당시 실정에 맞도록 편집한 것이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惑問)》은 《대학》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견해를 보여주는 책으로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을 보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특히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학설을

제시하여 이를 개편하려고 한 시도는 그 이후의 도학자(道學者)들에 비해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학문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중용구경연의》는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를 저술하여 정치의 도리를 밝혔지만

제왕학(帝王學)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어 이를 중용의 구경(九經)으로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완성을 보지 못한 책이지만 그는 여기에서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마음이며

왕은 천도(天道)를 체득하여 배천(配天) ·경천(敬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1573년에는 경주의 옥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1610년

(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언적의 주요저술 원본은 ‘이언적수필고본일괄’이라고 하여 보물 제586호로 지정되어

독락당과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다른 글들은 문집인 《회재집》에 실려 있다.

 

이황(李滉, 1501년(연산군 7)~1570년(선조 3))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搜).

이황의 학문은 주자학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주자의 서간문(書簡文)을 초록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20권은 그가 평생 정력을 바쳤던

편찬물이다.

이황의 성리학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체계화한 개념을 수용하여 이를 보다 풍부히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이(理)를 보다 중시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理)를 모든 존재의 생성과 변화를 주재(主宰)하는 우주의 최종적 본원이자 본체로서

규정하고 현상세계인 기(氣)를 낳는 것은 실재로서의 이(理)라고 파악했다.

이황의 학문·사상은 이후 영남(嶺南)·근기(近畿) 지방을 중심으로 계승되어 학계의 한 축을

이루었다.

영남지방에서 형성된 학통은 유성룡(柳成龍)·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 등의 제자와 17세기의

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를 이어 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 등 한말까지 내려왔다.

근기 지방에서는 정구(鄭逑)·허목(許穆) 등을 매개로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

등 남인(南人) 실학자(實學者)에게 연결되어 이들 학문의 이론적 기초로서 기능했다.

한편 이들의 학통계승은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각 학파·당파의 정치투쟁과 궤를

같이하면서 전개되는데 이들은 남인 당색 하에, 이이의 학문을 사상적 기반으로 기호지방에서

성장한 서인과 치열한 사상투쟁·정치투쟁을 벌이며 조선 후기 사상계·정치계의 한 축을

이루었다.

 

[글씨의 원문과 내용]

 

幽居(유거)                              고요하고 그윽한 삶

 

離群誰與共吟壇(이군수여공음단)  무리를 떠났으니 누구와 시 읊는 곳을 함께 할까?

巖鳥溪魚慣我顔(암조계어관아안)  바위 위 새와 계곡의 물고기는 내 얼굴에 익숙하네.

欲識箇中奇絶處(욕식개중기절처)  개중에 가장 기이한 곳을 알고 싶은지

子規聲裏月窺山(자규성이월규산)  두견새 소리 속에 달이 산을 엿보네.

 

* 幽居(유거) : 속세를 떠나 깊숙하고 고요한 곳에 묻혀 외따로 삶.

                    ①유거하다 ②으슥한 거처 ③은둔하다 ④은거(隱居)하다

* 離群(이군) : ①집단에서 떨어지다 ②집단을 이탈하다

* 與共(여공) : 함께 나누거나 누림. ①같이 있다 ②함께 하다

* 奇絶(기절) : 비할 데 없이 기이(奇異)함 ①기절하다 ②극히 기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