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초기 문신 신익성(申翊聖)의 산수도

2018. 7. 20. 09:21詩書藝畵鑑賞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7세기 초기 문신 신익성(申翊聖)의 산수도입니다.

그림의 상단 오른쪽 여백에 칠언절구의 제화시가 있고, ‘군석(君奭)’, ‘유옹(惟翁)’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어 신익성(申翊聖)이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화시에 적혀 있는 글은 초서와 행서가 뒤섞여 있어 몇 자 자신 없는 글자도 있지만

저보다 더 뛰어나신 분들의 지도를 기다리며 제가 생각하는 글자 그대로 적어 올립니다.









 

신익성(申翊聖)

 

생몰년 : 1588년(선조 21) ~ 1644년(인조 22)

병자호란 때의 척화오신(斥和五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석(君奭), 호는 낙전당(樂全堂)·동회거사(東淮居士)이다.

우참찬 신영(申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성도사 신승서(申承緖)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신흠(申欽)이다.

어머니는 병마절도사 이제신(李濟臣)의 딸이며 선조의 부마(駙馬)였다.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올랐으며, 1606년(선조 39)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되었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가 추방되어 쫓겨났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재등용 되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3궁(宮)을 호위(扈衛)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호종하여 끝까지 성을 지켜 청군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주화파(主和派) 대신들이 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자고 하자 칼을 뽑아 그들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호종의 공으로 재상과 같은 예우를 받고, 1638년에는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제수했으나

사퇴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뒤 삼전도비사자관(三田渡碑寫字官)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부 사퇴하였다.

1642년 명나라와 밀무역을 하다 청나라로 잡혀간 선천부사 이계(李烓)가 조선이 명나라를

지지하고 청나라를 배척한다고 고하여, 최명길(崔鳴吉)·김상헌(金尙憲)·이경여(李敬輿)

등과 함께 심양(瀋陽)에 붙잡혀가 억류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주선으로 풀려나와 귀국한 뒤 시·서로써 세월을 보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문장·시·서에 뛰어났으며, 특히 김상용(金尙容)과 더불어 전서의 대가였다.

글씨는 회양의 「청허당휴정대사비(淸虛堂休靜大師碑)」, 광주(廣州)의 「영창대군의비

(永昌大君碑)」, 파주의 「율곡이이비(栗谷李珥碑)」 등이 있다.

저서로는『낙전당집樂全堂集)』·『낙전당귀전록(樂全堂歸田錄)』·『청백당일기

(靑白堂日記)』 등이 있다.

 

[제화시의 원문과 해석]

 

長橋际水似虹飮(장교제수사홍음)  긴 다리에 물이 모이니 마치 무지개를 삼키는 듯한데

驢皆尋諸白未圔(려개심제백미압)  나귀와 함께 찾으니 모두 깨끗해서 아직 사라진 건 아니네.

樓閣聳空飛瀑瀉(누각용공비폭사)  누각은 솟았고 허공을 날아 폭포는 쏟아지는데

不知何飜合吟安(부지하번합음안)  탄식과 평안이 왜 함께 넘쳐 나는지 모르겠네.

 

인장 : 군석(君奭), 유옹(惟翁)

 

 

[느낀점]

 

그림의 실물을 보지 못해 정확히 단정할 수 없으나 화면에 나타난 상태로 볼 때 이 그림은

종이바탕에 채색이 가미된 지본 담채화로써 그림의 구성은 조선 초기 안견(安堅)과 이징(李澄)

등에 의해 확립된 편파 삼단구도로 표현되어 있고, 화법은 이곽화풍을 근본으로 하는 안견화풍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병자호란 이후 청으로부터 유입되었던 남종화법과 절파화풍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그림입니다.

특히 근산의 능선과 정상 부분에 수목을 표현한 태점(苔點)은 16세기부터 나타나는 안견화풍의

기본적인 특징이며, 소나무와 가옥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인 표현을 하고 있어

16세기 중기에 활동한 허주(虛舟) 이징(李澄)과 매우 유사한 화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산수도에 강의 다리를 건너는 인물을 표현함에 있어 16세기까지는 주로 사람이

걸어서 가는 모습이라면 17세기 이후는 말을 타고 가는 모습으로 전환되어 이 그림이

17세기의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작자인 신익성(申翊聖)은 선조의 부마로서 광해군때 폐모론에 반대하여 추방되기도 하였으나

인조때 재 등용되었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군에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후 최명길(崔鳴吉), 김상헌(金尙憲), 이경여(李敬輿) 등과 함께 심양(瀋陽)에 붙잡혀가

억류당했다가 소현세자와 함께 풀려나 귀국하여 이후 시와 서로 세월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신익성이 그린 그림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12폭의 ‘금강산도권(金剛山圖卷)’과 최근에

발견된 개인 소장의 ‘백운루도(白雲樓圖)’ 등의 작품이 남아 있어 신익성은 시(詩)와 서(書)

뿐만 아니라 화(畵)도 대단히 뛰어난 삼절(三絶)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림은 멀리 누각이 보이는 근산에 폭포가 떨어지는데, 오래된 소나무가 있는 강 다리를

거문고를 든 시종 한사람과 함께 건너가는 전형적인 그림으로 이런 그림은 대부분 관념

산수화로써 마음속에 품은 ‘소요유(逍遙遊)’를 즐기고 싶은 희망을 이렇게 그림으로

그렸을 것입니다.

 

다만 제화시에서 ‘樓閣聳空飛瀑瀉 不知何飜合吟安’라 하였으니 병자호란의 여파로 청나라에

약 10년간 볼모생활을 한 후 귀국하여 그 동안의 소회와 인조와 소현세자와의 갈등관계

속에 처해 있는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