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정에 처한 사람들 중에 김홍도도 들어간다. 요즘 그는 풍속화의
대가로 코흘리개 아이들까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물론 김홍도는 그가 살던 당대에도 풍속화를 잘 그려 인기가 높았다. 스승
강세황은 그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그가 ‘길거리, 나루터, 점포, 시험장, 연희
장’ 등을 그리면 ‘사람들이 다들 크게 손뼉을 치면서 기이하다 탄성을
질렀다(人莫不迫掌叫奇)’고 했다.
역시 당대에 이미 이름 높았다. 김홍도 시절에 이조참판까지 올랐던 서화
애호가 정범조(鄭範祖 1723-1801)는 그에게 산수화, 초충, 화조 그림을
청하는 시를 지으면서 ‘궁중의 황금 바른 장벽이나 귀한 집안의 흰 창이
나 벽에 모두 그의 그림이 걸렸다’고 하며 특기로는 ‘동물그림과 화조
그림이 가장 뛰어났다(尤工鈴毛與花葉)’고 꼽았다.
는 화조화 화풍도 예외는 아니었다. 후배 세대 중 단원 화풍을 따른 사람
은 여럿이지만 구도에서 필치까지 충실하게 모방하려 했던 화가를 꼽자
면 부산지방에서 활동했던 변지순(卞持淳 1780 이전-1831 이후)를 빼
놓을 수 없다. 그는 18세기말 무렵에 서울로 잠시 올라와 활동한 흔적을
보이는데 아마 이때 단원과 직접 만난 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홍도 <수하오수도(樹下午睡圖)> 지본담채 28.4x49.5cm 호암미술관
(田園樂)」으로 그림을 그린 시의도이다. 런데 이 그림에는 ‘변치화에게
그려준다(寫与卞穉和)’라는 관기가 있다. 치화는 변지순의 자이다. 이렇
게 각별했던 만큼 그의 그림에는 단원 화풍만 베낀 것이 아니라 단원에
대한 오마주라고 연상해볼만한 ‘방불한’ 그림이 있다. 그중 하나가 <게
그림>이다. 수초가 우거진 물속에 게 두 마리가 그려진 그림인데 단원
도 실은 게 그림의 전문가였다.
김홍도 <해탐노호> 지본담채 23.1x27.5cm 간송
송 소장의 <해탐노호>이다. 갈대에 달라붙은 게 두 마리를 그린 이 그림
은 갈대 잎을 그린 붓 솜씨로 보아 노련한 기량에 몸에 익은 만년 무렵
으로 보이기도 한다. 단원 시절에 게 그림의 수요가 많았던 것은 길상
(吉祥)의 뜻과 무관하지 않다. 즉 게의 등딱지, 즉 갑이 과거에 일등으로
붙는 일갑(一甲)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다. ‘제아무리 바다의 용왕이 사는 곳이라도 옆으로 걸어간다’는 뜻인
데 이는 당나라 때 시인 피일휴가 게를 보고 읊은 「음해(吟蟹)」의 한
구절이다.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변지순 <게그림> 지본담채 22.0x31.0cm 개인
하지만 그 중 한 점에 게 그림이 들어 있고 또 그 속에 단원이 쓴 이
구절도 반복돼 있다. 변지순은 행초서에 상당히 자신이 있었던지
초서에 가까운 필치로 이 구절을 적어놓고 있다. 낙관 마지막에
보이는 ‘해부(海夫)’는 그의 호이다.
할을 하고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