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열상산수도(冽上山水圖)

2018. 4. 30. 15:53한국의 글,그림,사람

조선 정조시기 위해한 대학자였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그린 산수도입니다.

가로 33.8cm, 세로 27.0cm 크기의 종이 바탕에 그려진 수묵화로써 현재 개인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본관 나주(羅州)이며 자는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이고 호는 다산(茶山)·

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籜翁)·태수(苔叟)·

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등이며 가톨릭 세례명 요한이다.

시호는 문도(文度)이며, 광주(廣州)(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출생이다.

 

1776년(정조 즉위) 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承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 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辛酉迫害) 때 장기(長鬐)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

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경세유표

(經世遺表)》,《흠흠신서(欽欽新書)》,《마과회통(麻科會通)》,《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상서고훈(尙書古訓)》,《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상례사전

(喪禮四箋)》,《사례가식(四禮家式)》,《악서고존(樂書孤存)》,《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춘추고징(春秋考徵)》,《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맹자요의

(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제화시의 원문과 내용]

 

騷騷雲木擺孱顔(소소운목파잔안)  소소하게 구름 낀 숲에 험준한 바위가 열리니,

疑有天風到此間(의유천풍도차간)  아마도 하늘 높은 바람이 이곳에 왔겠지.

草岸小亭誰作者(초안소정수작자)  풀 언덕 작은 정자는 누가 지었나?

瀑泉聲出對頭山(폭천성출대두산)  폭포 샘 소리 두산(頭山)에서 들려오네.

 

洌樵                                     열초

 

* 騷騷(소소) : ① 황망하다 ② 쏴쏴 ③ 다급하다 ④ 어수선하다

* 孱顔(잔안) : 산이 험준한 모양. 험악한 바위.

* 天風(천풍) : 하늘 높이 부는 바람

 

[인장] : 洪顯周(홍현주)

 

홍현주(洪顯周, 생물년 미상)

 

조선 정조의 사위. 자는 세숙(世叔), 호는 해거재(海居齋)ㆍ약헌(約軒), 시호는 효간(孝簡).

본관은 풍산(豊山). 홍인모(洪仁謨)의 아들. 우의정 홍석주(洪奭周)의 아우.

정조의 딸 숙선 옹주(淑善翁主)와 결혼하여 영명위(永明尉)에 봉해지고 1815년(순조 15)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문장에 뛰어났다.

 

 

[작품의 감상과 느낌]

 

다산은 조선 정조시기에 발탁된 대 학자였으나 정조 사후 모함으로 인해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학문에 정진하여 큰 업적을 남긴 조선이 낳은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림은 황공망과 동기창의 화법을 적용한 전형적인 남종화품의 문인화로써, 큰 강물이

흐르고 있는 강가에 수종이 다른 고목 옆에 작은 정자가 하나 있고, 반대편에는 우람한

바위산과 그 사이에 계곡수가 강으로 흘러들고 있는 관념산수도입니다.

 

강 언덕 위에 홀로 있는 작은 정자는 작가인 다산 자신을 표현하고 있으며, 정자 앞을

흐르는 큰 강물에 물결의 표식이 없는 것은 앞날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정국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변에 홀로 있는 정자 뒤쪽은 수종이 다른 여러 나무가 우뚝 서 있는데, 그 중 정자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크게 자란 소나무는 다른 나무와 달리 자란 방향이 강과 정자쪽으로

기울어 있으니 이는 남과 타협하지 않는 작가 자신의 꿋꿋한 기상과 절개를 상징한다고

보여집니다.

 

정자 뒤쪽에 뭉쳐 잇는 나무는 모두 총 열 그루로써 이를 명리학적으로 해석해 보면 10은

‘공허와 몰락, 그리고 암흑천지에서 헤매는 고독한 수리’라는 의미가 있으니, 현재 다산이

처해있는 상황으로 느껴지며 강 건너 보이는 수목이 없는 큰 바위산은 적대시하고

음해하려는 정치적 현실 앞에 놓여 있는 다산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산은 전라도 강진에서 오랜 유배생활을 끝내고 고향인 열수에서 생활하며 여러 글씨와

그림을 작품으로 남겼는데, 이 때 자주 사용한 호가 열초(洌樵)이므로 이 그림은 아마도

그의 만년 시기에 제작된 작품일 것입니다.

또한 이 시기 정조의 사위이자 다산과 절친했던 해거재(海居齋) 홍현주(洪顯周)와 학문의

벗으로 지냈는데, 그림의 오른쪽 하단 여백에 그의 인장이 찍혀 있어 한때 그의

소장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배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암울한 정치적 환경과 앞날을 생각하며

착잡하고 고독한 심정을 이 그림에 담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