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27. 16:01ㆍ周易의 理解
계사전(上) - 第五章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仁者見之 謂之仁 知者見之 謂之知 百姓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鮮矣.
顯諸仁 藏諸用 鼓萬物而不與聖人同憂 盛德大業至矣.
富有之謂大業 日新之謂盛德. 生生之謂易. 成象之謂乾 效法之謂坤.
極數知來之謂占 通變之謂事. 陰陽不測之謂神.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한 번 음(陰)하고 한 번 양(陽)하는 것을 도(道)라 하니,
[도(道)가] 드러나는 것은 선(善)이요, 사물마다 갖추고 있는 것은 성(性)이다
仁者見之 謂之仁 知者見之 謂之知 百姓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鮮矣.
인자(仁者)는 이것을 보고 인(仁)이라 하고, 지자(智者)는 이것을 보고 지(智)라 하며,
백성들은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君子)의 도(道)는 [아는 사람이] 드문 것이다
이 글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사랑이냐 지혜냐를 묻는 것은 아닐 터이고.
분명, 주역에서의 仁과 知는 관찰자의 시점을 얘기하는 것일 겝니다.
오랜 시간 주역 세계를 주도해온 의리역학은 단순한 易의 사고를 매우 난해하게 만든듯 싶죠?
이것은 시간(時中)의 싯점에 관한 문제 제기입니다.
仁은 元이라고 하고 시초라는 의미니, 元(上+止)의 의미는 春을 기준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말하자면 물상이 만화방창하는 陽(木)이 터저 올라오는(浮) 泰를 변화의 목적으로 보는 시점이죠.
知는 본체(本)를 기준으로 보는 시점입니다.
만화방창은 寅의 랜즈가 반사시킨 子水의 스팩트럼 세계입니다. 허상이죠.
이것이 본래의 태극점으로 돌아와 우주의 정신과 합일되는 시점을 변화의 목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뭐가 맞을까요? ㅎ 둘다 실체죠. 介입니다.
이런건 百姓(=만물)이 알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백성은 그 우주원리 자체거든요.
백성은 관찰자가 아니라 행위자입니다. 실제로 그 易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본체죠.
그 백성들의 운동을 제3의 시점으로 관찰하는 자가 仁者이며, 知者일 뿐입니다.
어차피 제3자의 시점(矢=侯=王)은 우주 자체인 百姓과 동급일 수 없습니다.
百姓은 우주의 震巽, 즉 神性인 하늘과 땅의 현현체입니다. 그러니 終이면서도 始初이며
잘게 부서지는 나뭇잎 끝의 작은 바람이면서도 하느님인 神性과 동급이죠.
이것이 不知人 본뜻입니다. 人乃天, 하늘의 신성을 품은 사람이죠.
하늘이 천박한(白茅), 마굿간에 누웠으니 이를 알아볼 君子가 드문 것은 당연한 거겠죠.
顯諸仁 藏諸用 鼓萬物而不與聖人同憂 盛德大業至矣.
[천지의 도(道)가] 인(仁)으로 드러나며
용(用)을 감추어, 만물(萬物)을 고무(鼓舞)하면서도
성인(聖人)과 함께 근심하지는 않으니, 성한 덕(德)과 큰 업(業)이 지극하도다
천자문도 그렇지만 옛 문장들은 축약된 형태로 암송을 위주로 서술되어 있으니
글자들 사이에 생략한 글자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겠죠?
도통 글의 문맥이 매끄럽지 않고 엉뚱한 해석으로 풀이되어버리는 이유일 겁니다.
이 글을 서술하고 있는 사람은 仁을 用으로 보았네요. 당연하죠.
우리는 드러나는 세계에 살고 있고 震巽의 드러난 세계를 취하고자 하는 것이 주역의 목적입니다.
用이 감추어지면 知요, 玄이며, 幽죠. 잠자는 만물을 흔들어 깨우는(鼓舞) 일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근심은 聖人이나 君子의 몫일뿐 자연은 无心하며 无爲하며 无知합니다.
富有之謂大業 日新之謂盛德. 生生之謂易. 成象之謂乾 效法之謂坤.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을 대업(大業)이라 하고,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성덕(盛德)이라 하고,
낳고 낳는 것을 역(易)이라 하고,상(象)을 이루는 것을 건(乾)이라 하고, 법(法)을 드러내는 것을 곤(坤)이라 하고,
乾 - 盛德
坤 - 大業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입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종교는 표현은 달라도 똑같은 형태의 텍스트를 갖습니다. 그게 진리니까 당연한 거겠죠.
종교가 존재하는 것도 인간 스스로를 위한 것이니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성찰이죠.
爻는 본뜨다는 뜻입니다. 하늘의 태극원리를 본떠서 爻로 書한거죠.
매일 해는 새로 뜨고(日新) 만물은 더욱 자라고 자라나더니(生生之) 땅을 가득해 채웁니다(富有)
效는 鼔이며 성인과 군자들의 근심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交는 上+爻로 하늘의 뜻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은 生生之意죠.
어차피 이 성인과 군자들이 설레발을 떨지 않아도 자연은 무심히 또 그 길을 걷고 또 걸을 터이건만
욕심이 앞선 사람들이 북을 치며 땅의 호흡을 건너기(濟) 위해 안달할 수밖에 없지요.
그것이 業입니다. 좋게 얘기하면 문명이고 자연을 극복하여 濟世以和하는 거지요.
業은 본래 악기(壴)를 걸어두는 나무입니다.
對(=尌)는 이렇게 걸어둔 악기를 양쪽에서 마주보고 치면서 降神하는 행위죠.
壴에는 吉이 보이죠? 各(客)의 걸음을 재촉하기 위해 만든 악기입니다.
菐(번거로울 복)은 業과 大(사람)이 겹쳐져 있네요. 북을 치는 사람인가 봅니다.
朴(=樸)은 북채를 든 사람(卜)인데, 신라의 박혁거세가 말해 주는 것처럼 박수무당을 뜻하는 글자입니다.
하늘과 소통하는(夫) 사람이며, 占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이겠지요?
效는 敎입니다. 하늘의 움직임(易知)을 알려주어 백성들로 하여금 하늘을 본받게 하고자 함이죠.
交는 孝이고 孝는 하늘의 뜻을 본받아 그대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의 마음은 生生之意이고 모든 생명체의 孝는 우주의 정신을 본받아 자손을 잇는 것입니다.
勞謙은 하늘의 숭상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공양하고(謙) 하늘의 生生之意를 땅에 실천하는(勞) 것이죠.
부지런한 농부는 그저 하늘의 뜻을 실천하는 자이며, 곧 하늘입니다. <당신>과 <나> 입니다.
極數知來之謂占 通變之謂事. 陰陽不測之謂神.
수(數)를 지극히 하여 미래를 아는 것을 점(占)이라 하고, 변(變)에 대해 통달하는 것을 일[事]이라 하고,
음(陰)하고 양(陽)하여 측량할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 한다
一 하늘
口 땅
亅 꿰뚫다, 알다
彐 손(헤아리다, 일하다)
주역은 爻로써 天易을 기록했고, 그 기록(曆)을 헤아려 미래를 예측하며(占)
그 자연의 다양한 변화를 통달하여 백성을 養育하는 것이 事가 말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인과 군자의 일이죠.
그러나 헤아릴뿐 결국 자연은 무심한 神의 뜻대로 흘러갈 것입니다. 예측은 예측일 뿐이죠.
인류의 그 수고로운 노력에도 늘 자연은 예기치 않는 변고를 통해 그 위대한 힘을 드러냈지요.
人間, 그 가난하고 위대한 이름이며, 无妄한 하늘의 桎梏앞에 나약한 존재가 또 우리들 白茅가 아니겠습니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易을 통찰하려 애쓰는 까닭도 여기에 있지요.
인간이 헤아리는 능력(知性)은 천지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띠끌에 불과한 것을 깨닿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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