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017. 6. 19. 17:40성리학(선비들)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1)2)이 종 호**

 

❙차 례 ❙
Ⅰ.머리말
Ⅱ.酬唱詩의 槪念과 特徵
Ⅲ.退溪酬唱詩의 展開樣相
Ⅳ.退溪酬唱詩의 敎學意義
Ⅴ.맺음말

 

【국문초록 】
수창이란 시가를 통하여 상호 贈答唱和하는 것으로 소통 가능한 사람끼리 은밀한
생각을 한시라는 운문형식을 빌어 내면의 깊은 울림과 파장을 전달하고자 하는 문학행
위이다.수창시는 현장성,즉흥성,卽事가 생명이었기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붓에 맡겨
써내려가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그러나 정감의 분출에 무게를 두다보니 자연 시어
를 꾸미는 일에 유념할 겨를이 없다.정감의 진실성을 중시하고 수식을 돌아보지 않는
성향은 퇴계 수창시가 지닌 단처이면서 하나의 특징이다.
퇴계는 수창을 즐겼다.수창을 즐겼으니 수창시를 많이 남겼을 터이고,실제로 그
의 문집에는 수창을 계기로 지은 작품이 상당수 실려 있다.그 가운데 50세 이후 만년
에 지은 퇴계 수창시는 대부분 문생이나 자질과 주고받은 것이다.퇴계 수창시의 전개
양상을 贈答詩簡型,閑居求道型,山水遊覽型,自問自答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증답
시간형’은 편지를 왕복하듯이 수창하는 것이고,‘한거구도형’은 전원에 한가롭게 지내는

 

*이 글은 국제퇴계학회에서 주최한 제22차 <퇴계학국제학술회의>(2009년 8월 29일,영
남대학교 천마아트센터)에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임.
**안동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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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 수창을 통해 도학을 강론하는 내용을 보여준다.‘산수유람형’은 산수유람의 ‘興
趣’를 고조시키기 위해 창작된 작품들이다.‘자문자답형’은 흔치 않은 수창유형이다.수
창의 상대가 사람이 아니고 국화나 매화와 같은 무정물이어서 스스로 묻고 무정물을
대신하여 스스로 답하는 형식이다.
퇴계는 수창이 마음과 생각을 묘사하여 전달하고 풍자하고 비유하여 감발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믿었다.또한 양인 간의 수창은 서로의 修養을 위해서도 절실하다고 했
다.퇴계는 늙은 나이에 젊은 문생들과 수창을 통해 자신의 頹落한 마음을 분발시키고
자 했다.퇴계는 교학의 도상에서 수창시를 통해 상대의 성정을 가늠하여 편지를 통해
자신이 분석․비평한 내용을 알리고,다시 그 뜻을 압축하여 화답시로 담아 전달함으
로써 교육적 효과를 거두어내는 방식을 즐겨 이용했다.그가 만년에 도산에 은거하며
후진 교육에 힘썼던 만큼 ‘기질변화’를 중시하는 교육관이 부지불식간에 수창시 창작과
비평에 스며들었다.국화와 매화를 등장시킨 자문자답형 수창시는 수창의 상대가 문생
이나 자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는 점에서 천인합일의 의지를 바탕에 깔면서 매우
자기 성찰적이다.향후 이러한 수창시의 여러 측면들을 염두에 두면서 퇴계 한시를 새
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제어
퇴계,수창시,증답시간,한거구도,산수유람,자문자답

 

Ⅰ.머리말

 

퇴계 한시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1) 이렇게 많은 성

 

1)2000년 이전에 제출된 퇴계한시 연구성과에 대해서는 필자가 「퇴계의 詩歌文學論과 文
藝認識論의 爭點」(이종호, 한국의 철학 27,경북대 퇴계연구소,1999)을 통해 개괄적
으로 검토한 바 있다.그 이후의 주요 연구성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김주백,「퇴계
이황의 시 山居四時에 대한 일고찰」, 漢文學論集 19, 근역한문학회,2001;李源承,
「退溪詩의 一考察:우국․애민시를 중심으로」, 陶南學報 19,도남학회,2001;李源
承,「退溪詩의 一考察」(2), 陶南學報 20,도남학회,2004;민병수,「퇴계시의 변이
양상에 대하여」, 한국한시작가연구 5,한국한시학회,2000;崔斗植,「退溪詩의 仙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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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가 축적되어 있는 현실을 두고,필자와 같은 문외한에게 한 마디해보라는
발언권이 주어진다면,무엇을 말해야 할까 고민해 본 적이 있다.그 때 혹시
옥상옥이라는 나무람을 받더라도 퇴계 ‘酬唱詩’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밝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수창시 연구의 필요성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퇴계는 풍부한 감성을 타고났기에 한시 짓기를 좋아했다.좋아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한시창작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평소에 상당한 공력을 들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처음엔 冷淡한 듯 보이다가 오래 음미하다보면 절로 의미가
깊어지는 ‘枯淡’한 시풍을 창출하였다.고담한 시풍은 화려한 꾸밈을 자랑하지
않는 勁健하고 典實한 풍격과 통한다.굳세고 힘찬 필세에 법도와 내용을 갖
추었으나2) 화려하게 수식하지 않았기에 처음 보는 이는 무미건조한 느낌을

 


傾向」, 石堂論叢 32,東亞大學校附設石堂傳統文化硏究院,2002;鄭羽洛, 「退溪李
滉의 事物認識方法과 그 詩的形象」, 東方漢文學 24,동방한문학회,2003;송재소,
「퇴계이황의 시」, 시와 시학 49,시와시학사,2003;김주순,「퇴계시에 나타난 陶
淵明의 수용양상」, 중국어문학 45,영남중국어문학회,2005;김재룡,「退溪李滉의
梅花詩硏究」, 우리문학연구 19,우리문학회,2006;金榮淑,「退溪詩에 나타난 溪ㆍ
塘의 形象化와 內的志向」, 동아인문학 10,2006;金榮淑,「退溪의 六友詩類型에
따른 詩的形象과 그 의미」, 한민족어문학 51,한민족어문학회,2007;金榮淑,「退溪
詩에 있어서 ‘言志’와 ‘言學’의 類型과 詩的形象」, 동아인문학 12,동아인문학회,
2007;전재강,「退溪詩에 나타난 書堂과 書院心象의 존재 양상」, 대동한문학 28,
대동한문학회,2008;장도규,「퇴계 이황의 시인식과 달관시」, 한국사상과 문화 44,
한국사상문화학회,2008.최근 퇴계한시를 가장 집중적으로 연구한 이는 이정화이다.
따로 묶어 소개한다.이정화,「退溪詩硏究:樓亭漢詩를 중심으로」, 한국사상과 문화
2,한국사상문화학회,1998;「退溪李滉의 輓詩硏究」, 韓國思想과 文化 19,한국사
상문화학회,2000;「退溪李滉의 說理詩硏究」, 韓國思想과 文化 11,한국사상문화
학회,2001;「퇴계의 화답시 연구」, 한국한시연구 10,한국한시학회,2002; 退溪
詩硏究 ,숙명여대 박사논문,2003; 退溪李滉의 詩文學硏究 ,보고사,2003;「退
溪門人의 學退溪精神과 樓亭題詠에 反影된 繼承樣相」, 退溪學과 韓國文化 37,경북
대 퇴계연구소,2005;「퇴계 이황의 매화시 연구」, 한국사상과 문화 41,한국사상
문화학회,2008.
2)퇴계는 法度와 規矩를 갖춘 창작역량을 중시하였는 바,林億齡과 論詩한 다음 대목은
참고할 만하다. 退溪集 別集,卷1,「喜林大樹見訪論詩」:“吾詩尙豪宕,何用巧剞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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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지만 차츰 보면 볼수록 더욱 좋아지는 희열에 빠진다.3) 그로 인해 퇴계의
한시는 ‘言有盡而意無窮’한 수작이 많다.
한편 퇴계 자신의 풀이에 의하면,고담이란 바싹 말라서 촉촉함이 없고
매우 싱거워서 진한 맛이 없는 상태이다.4) 한시의 외면적 표현과 내면적 의
경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면,외면의 수식을 극도로 억제하고 획득되는 심오
한 사상성(철리성)을 고담으로 압축해 말한 것이 아닌가 한다.승려들의 禪
詩도 枯淡無味하다.심지어 채식을 위주로 하는 승려들의 시에서 나물과 죽
순의 기운,즉 蔬筍氣가 느껴진다고 한다.이처럼 고담은 산림에서 閒寂을 즐
기며 蕭散한 흥취를 사랑하는 사람이 한결같이 瓊瑤,華腴,綺麗한 광채 나는
시어를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경계이다.5)
퇴계는 청년시절부터 고담한 시풍에 다가서는 한시를 선보였다.그 대표
적인 작품이 바로 “이슬 젖은 어린 풀 푸른 언덕 감싸고/맑고 힘찬 작은 못
티끌 한 점 없구나/구름 날고 새 지남 어쩔 수가 없지만/이따금씩 제비가
물결 찰까 두렵네.”로 풀이되는 「들못 野池」이다.6) 18세 청년의 작품으로7)

 

吾行蹈大方,不必拘小節,詞氣甚激昂,河漢瀉頰舌,我初驚且嘆,中頗疑以詰,自非聖於
詩,法度安可輟,寧聞大賢人,不用規矩密,曷不少低頭,加工鍊與律,比如撞洪鐘,寸筳豈
能發.”
3)鄭惟一(1533-76), 文峯集 卷5,「閑中筆錄」:“退溪先生喜爲詩,平生用功甚多.其詩勁
健典實,不衒華彩,初看似無味,愈看愈好.嘗爲余言,吾詩枯淡,人多不喜,然於詩用力頗
深,故初看雖似冷淡,久看則不無意味.”
4) 退溪集 卷37,「答李平叔問目」(大學):“枯淡,由枯燥而無津潤,淡薄而無醲味也.”
5)퇴계의 한시와 승려의 禪詩는 모두 고담을 지향하기에 현란한 시어의 동원을 줄이고 묵
상과 관조를 통한 의미의 확충을 꾀하여 의경의 사상성을 극도로 제고시킨다.許筠은
「惺叟詩話」와 鶴山樵談 에서 玉峯白光勳의 시를 고담하다고 했고,李瀷은 星湖僿說
에서 隋煬帝의 시구 “寒鴉千萬點,流水繞孤村”을 고담하다고 말한 바 있다.
6) 退溪外集 ,卷1,「野池」:“露草夭夭繞碧坡,小塘淸活淨無沙,雲飛鳥過元相管,只恐時時
燕蹴波.”인용하는 이에 따라 간혹 “碧坡”를 “水涯”라 하고,“恐”을 “怕”이라 한 경우도 있
다.퇴계 한시의 번역은 이장우,장세후의 퇴계시풀이 (전5책,중문,1996~2007)와
퇴계학연구원의 퇴계학역주총서 제12책 퇴계전서 12(퇴계학연구원,1993)를 참고하
여 필자가 수정,윤문했다.
7) 退溪年譜 卷1,十三年戊寅(先生十八歲):“有遊春詠野塘一絶云…….”金榮淑은 「退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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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에는 시적 의경이 너무나 哲理的이다.天理(하늘의 이치)가 유행하는데
人欲(인간의 욕망)이 간섭할까 걱정하는8) 시인데,나이에 비해 우주자연에
대한 식견이 조숙했다고 평해도9) 좋을 성싶다.“고요할 땐 마음을 잘 간직하
고 움직일 땐 마음을 잘 관찰하여 외물이 오면 따라서 응하는 기상이 있다.”
고10) 하거나 혹은 “물결이란 것은 外物을 가리킴이니,외물이 이르러 온다
해서 성인이 어찌 미워하겠는가.다만 나의 心體가 움직이지 아니할 따름이
다.”라거나11) “인심은 본디 절로 虛明한데 외물이 오면 이에 응하나니 내가
예와 같이 하여 외물의 유혹으로 인해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는 등으로12)
해석될 정도로 理趣詩의 성격이 짙다.
왜 작품에서 하필이면 ‘제비’가 등장했을까.온계 서쪽 5리쯤에 있는 마을
인 제비골,즉 鷰谷으로 나들이했다가 청정한 작은 연못을 보고 마음이 상쾌
하고 정신이 맑아져서 悠然한 흥취가 생겨나 지었기 때문이다.13)제비골이니
詩에 나타난 溪ㆍ塘의 形象化와 內的志向」( 동아인문학 10,2006)에서 李滉의 號
退溪와 溪ㆍ塘素材詩를 살피고 溪ㆍ塘의 시적 형상화 및 작가의 내적 지향을 검토했
는데,위의 작품이해에 도움을 준다.

 

8)金富倫(1531~98), 雪月堂集 卷4,「退溪先生言行箚錄」:“先生少時,偶遊燕谷,谷有
小池,水甚淸淨,乃有詩曰,……,謂天理流行,而恐人欲間之.”
9) 金誠一(1538~93), 鶴峯續集 卷5,「退溪先生史傳」:“嘗過溪塘,有詩曰,……,識
者,已知識趣之不凡”
10)李玄逸(1627~1704), 葛庵集 卷19,「愁州管窺錄」:“退溪先生少年時有絶句一首曰,
…….南冥少時亦有詩云,病臥山齋晝夢煩,幾重雲水隔桃源,新水淨於靑玉面,爲憎飛燕
蹴生痕.兩詩皆有天然自得之趣,但退陶詩有靜存動察,物來順應底氣象,南冥詩便有主張
空寂,求照無物底意思.”이현일이 인용한 南冥曺植의 시는 「江亭偶吟」( 南冥集 卷1)
으로 문집에는 “病臥山齋”가 “臥疾高齋”로 “雲水”가 “雲樹”로 나와 있다.이현일은 같은
‘제비’를 등장시킨 남명의 시를 소개하고 퇴계의 것과 비교했는데,‘空寂’을 주장했다고
하여 남명시의 禪學的기미를 지적했다.
11)李瀷(1681~1763), 星湖僿說 卷30,詩文門,「朱子退溪詩」를 참조.
12)兪彥鎬(1730~96), 燕石 册4,「雲鳥塘銘」:“旣又書來曰,退溪詩云,……,盖謂人
心,本自虛明,物來斯應,我則如故,不可以外滑亂之也.”
13)李德弘(1541~96), 艮齋集 卷6,「溪山記善錄下」:“先生嘗遊鷰谷(里名,在溫溪西五
里),見一小塘淸淨,心神灑惺,若得悠然之趣,有詩一絶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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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당 제비가 얼마나 자주 날아들었을 것인가.일상의 전원생활에서 쉽게 접
하는 그 이른바 ‘물 찬 제비’를 빌려 와 심오한 천리-인욕의 대립적 구도를
표상했다.아직은 고담의 농도가 짙다고는 할 수 없지만,역시 감칠맛은 떨
어지고 평범한 시어와 시상의 전개가 天然自得하다.훗날 퇴계는 예순을 넘
긴 나이에 그 시절을 회상하고 말하기를 “그 때는 뭔가 마음에 깨달음이 있
다고 여겼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매우 가소로운 마음이 든다.앞으로 진일보
한다면 필시 지금 전날을 비웃은 것과 같게 되리라.”고14) 했다.심성수양을
통한 학문의 부단한 진보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학자다운 발언이다.
이 「들못」은 훗날 퇴계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인식될 정도로15)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그로 인해 퇴계의 한시를 두루 접하지 못한 일반인들
은 「들못」과 같은 이취가 풍부한 작품이 퇴계 시의 본령일 것이라는 선입견
을 갖기 쉽다.과연 「들못」계열의 작품을 퇴계 한시의 본령으로 생각해도
좋을까.필자는 다소 회의적이다.理趣를 담은 「들못」계열의 한시가 성리학
자로서 퇴계의 본색을 드러내주는 특징적 국면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가 창작
한 한시의 주된 情調를 대변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퇴계 한시의 본령은 어디에 있을까.우선 퇴계의 시집 6책을 꼼
꼼히 읽고 쓴 蒼雪齋權斗經(1654~1725)의 글을16)인용해 본다.
선생의 시는 학자들이 읽기 어렵다고 걱정한다.아마 읽기 어려울 뿐 아니라
실제로 빨리 배우기도 어려울 것이다.가만히 선생의 시를 음미해보니,그 중 스

 

14) 앞의 글:“辛酉(1561)夏,德弘問此何時所作也.先生曰,吾十八歲時作也,當時以爲有
得,到今思之,則心極可笑.此後若更進一步,則必如今日之笑前日矣.”
15)柳世鳴(1636~1690), 寓軒集 卷5,「讀拙齋先生文集」:“老先生詩集中二絶,露草夭
夭繞水涯,小塘淸活淨無沙,雲飛鳥過元相管,只怕時時燕蹴波,又花發巖崖春寂寂,鳥鳴
磵樹水潺潺,偶從山後携童冠,閑到山前看考槃,西厓先生集中一絶,大道難從口耳傳,此
心隨處自悠然,靜觀軒外千條柳,春入絲絲不後先,先生嘗以此三詩,聯書冊面而觀之.”
16) 權斗經(1654~1725), 蒼雪齋集 卷12,「敬題退溪先生詩集卷端」:“家中舊有別印詩
集六冊,佚其兩冊,請金天與山長補印,粧置案頭,聊識首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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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로를 경계하거나(自警)뜻을 말하거나(言志)학문을 면려하거나(勉學)학문을
강론한 것(論學)과 같은 작품들은 솔직한 표현에 치중하고(尙直致)윤색을 거부
하여(謝潤色),베와 비단이요 콩과 조이며 旨訣이고 精言이니,진실로 詩家의 평
론을 허용하지 않는다.唱酬하고 吟諷한 작품들은 고시고 율시를 논할 것 없이
會心得意한 곳이 庖丁이 소를 잡을 때 入神의 경지에서 칼날을 놀리는 듯하여 평
범을 벗어나 신묘한 경지에 나아가 情致가 감개하고 意思가 우유하고 氣象이 초
절하고 光景이 화창하여,淸峭하기도 壯麗하기도 淡雅하기도 하다.완곡하면서 미
약하지 않고 기발하면서 궤이하지 않으며 침중하면서 華實을 겸하고 온후하면서
詞格을 갖추었으며,광대하면서 精潤하고 활동하면서 工緻하여,진실로 小家의 치
우친 솜씨로는 능히 비슷하게 만들 수 있는 바가 아니다.왕왕 광채를 숨긴 것을
보고 노자를 숭상하여 질박함을 보인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는 의미가 심장하여
무궁한 맛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선생의 시를 제대로 읽어낸 자가 아니다.그
러나 초학으로 안목이 높지 못하고 雅俗을 분간하지 못하면서 갑자기 모의하고자
한다면 범을 그리다 개를 그린 꼴이 되었다는 조롱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17)
自警,言志,勉學,論學을 주로 하는 작품들은18)설리적이고 교술적인 성
격이 강한 반면 형상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므로 한시의 문학성을 따지기가 곤
란하다.이러한 시편들은 일종의 산문시에 가까워 순수문예의 영역에서 벗어
나 있다.때문에 권두경은 창수와 음풍에 주목했다.아마 酬酌의 대상이 있는
것을 ‘창수’라 하고 없는 것을 ‘음풍’이라 한 것 같다.음풍은 시를 지어 풍자
한다는 의미보다 경물을 吟咏한다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옳다.이런 작품들

 

17)앞의 글:“先生之詩,學者患其難讀.葢非惟難讀,實難驟學矣.竊嘗味之,其自警言志勉
學論學等作,尙直致,謝潤色,布帛也菽粟也旨訣也精言也,固不容詩家評喙.至於唱酬吟
諷之什,無論古律,其會心得意處,刃游神授,脫凡造妙,情致感慨,意思優游,氣象超絶,
光景和暢,或淸峭或壯麗或淡雅.婉而不弱,奇而不詭,沉重而華實兼,溫厚而詞格備,
廣大而精潤,活動而工緻,固非小家偏工所能髣髴.人往往見其藏芒隱彩,而疑其尙老示樸,
不知有雋永無竆之味,則非善讀者也,然初學眼目不高,雅俗未分,而遽欲摹襲則難乎免於
畫虎之譏矣.”
18)金榮淑은 「退溪詩에 있어서 ‘言志’와 ‘言學’의 類型과 詩的形象」( 동아인문학 12,
동아인문학회,2007)에서,퇴계의 言志와 言學의 개념을 분석하고 言志와 言學의 詩
的類型과 詩的形象을 살핀바 있다.
248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은 모두 詩家의 평론대상이다.
권두경은 회심득의한 퇴계의 작품에 주목해보라고 권한다.情致,意思,氣
象,光景이 뛰어나고 淸峭,壯麗,淡雅한 풍격을 형성하며,완곡,기발,침중,
온후,광대,활동이 온전히 드러나는 대가의 솜씨를 찾아보라고 말한다.그러
면서 고담한 시풍에 유의하여 퇴계의 시를 잘 읽어낼 것을 주문한다.광채를
숨겨 질박함이 우세한 작품을 보고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오히
려 그런 작품일수록 의미가 심장하여 무궁한 맛이 있다.퇴계 스스로 말했듯
이 처음엔 맛이 없는 것 같지만 볼수록 좋아지고 처음엔 냉담한 것 같으나
오래 보면 의미가 없지 않게 되는 그런 시를 구별해 낼 수 있어야 善讀者가
되는 것이다.
인용한 권두경의 퇴계시평은 향후 시간을 두고 좀 더 면밀하게 분석할 필
요가 있다.우선 권두경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전제하에,이 시점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퇴계 한시의 본령이 ‘창수’와 ‘음풍’에 있다는 사실이다.그
런 작품에서 퇴계 한시의 참다운 문학성을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창수’와
‘음풍’은 시의 형식이 아니고 시를 짓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하나는 상대를
염두에 두고 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건이나 사물을 계기로 성정을 음영
하는 것이다.모두가 서정시로서 주관의 정서가 형상을 통해 그려진다.19)
이 글에서는 우선 ‘창수’한 작품에 주목하여,퇴계 한시의 본령을 탐색함
으로써 퇴계 시문학의 지평을 넓혀 보고자한다.본론에서 수창시의 개념을
살피고 이어서 수창시의 양상을 몇 가지 부면으로 나누어 엿본 뒤,수창시의
교학적 의미를 모색해 본다.
퇴계 수창시 연구는 처음 시도되는 것으로서 퇴계 공부가 일천하고 한시
19)앞서 살핀 「들못」은 어디에 속할까.자연경물을 통해 작자의 情意를 드러내는 방식을
보여주었으니 응당 ‘음풍’의 범주에 들 것이다.다만 「들못」이 ‘存天理遏人欲’이라는 이
학적 명제를 관철하기 위한 직설적 표현으로 시종했다면,自警,言志,勉學,論學의
범주에 가까운 단순한 理言詩를 벗어날 수 없다.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49

 

이해가 부족한 필자에겐 매우 버거운 주제이다.20) 분에 넘치는 만용을 부리
다 보면 무리와 억측이 따르는 법이다.혹 몰이해와 誤讀으로 인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다.이에 대한 동학들의 질정을 바란다.

 


Ⅱ.酬唱詩의 槪念과 特徵
수창이란 시가를 통하여 상호 贈答唱和하는 것이다.예로부터 무엇이든
주면 우선 사양하고 받았으면 응당 답하는 것이 떳떳한 예법이다.노래를 부
르면 듣고 들었으면 화답하는 것도 그와 같다.퇴계도 같은 선상에서 수창시
를 이해했을 것이다.
퇴계는 ‘唱酬往復’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였다.일찍이 月川趙穆(1524~
1606)에게 보낸 편지에서,“또 듣건대,그대가 子中(鄭惟一의 字)이 縣에 있
20)이정화는 박사논문 退溪詩硏究 (2003)에서 景物詩,說理詩,述懷詩로 나누어 퇴계
시를 살폈는데,굳이 권두경의 구분과 연계시켜 본다면,설리시가 대체로 ‘언지와 언
학’에 가깝고,술회시가 ‘창수’,경물시가 ‘음풍’에 가깝지 않나 싶다.이정화는 동 논문
제3장 퇴계의 시세계,제1절 「자연과 인생」에서 ‘자연과 벗삼아’,‘누정에 올라’,‘신선
을 꿈꾸며’로 나누어 경물시의 특질을 살폈고,제2절 「학문과 사유」에서는 ‘자각과 자
성’,‘학문의 길’,‘이성과 감성’으로 나누어 설리시의 특징을 살폈다.제3절 「생활과 우
정」에서는 퇴계의 술회시가 대체로 화답시와 차운시로 되어 있다고 보고 이를 ‘회오와
자괴’,‘도반과의 화답’,‘우정과 신의’로 나누어 분석했다.이정화는 퇴계의 경물시는
경치와 사물에 의탁하여 시인의 主意를 드러내는 경물시의 기본틀과 달라서 실경 따위
는 전혀 말끝에 올리지 않고 내재하는 理만 말하고 있으며,설리시는 詩敎에 충실함을
긴절한 임무로 여기는 도학자들의 그것과 달리 직접 성리문자를 언표에 드러내지 않
고,스스로 체험적인 삶의 문제와 마주하게 될 때,스승으로서의 정감과 할아버지로서
의 마음,나아가 시인의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고 본다.퇴계의 술회시는 일상적 감상
에 흐르는 그것과 달리 초월적인 자기중심을 확보하는 中正한 마음을 잃지 않는 건강
성을 보여준다고 했다.특히 퇴계의 화답시는 상호의 고민거리를 제재로 하여 시상이
전개되지만 극도의 감상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심정을 헤아려 그를 정감적으
로 위무하는 것이어서 대체로 삶을 긍정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이러한
이정화의 연구는 본 퇴계 수창시 연구에도 여러 측면에서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250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을 때 여러 사람과 唱酬往復한 것이 셀 수 없을 정도였을 터인데,그대는 내
내 한 구절도 보여주지 않으니,이 무슨 情理意思인지 모르겠소!”라고21) 말
했을 때,‘唱酬往復’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시편이 양자 사이에 왔다 갔다
했다는 표현이 唱酬往復인데,22) 唱酬를 酬唱으로 바꾸어 놓아도 의미변화는
생기지 않는다.그래서 선인들은 唱酬와 酬唱를 구분하지 않고 편의에 따라
구사했고,때로는 唱和로 대신하기도 했던 것이다.
酬唱은 시를 가지고 서로 贈答,唱和하는 일체의 과정을 말한다고 했거니
와 증답시는 먼저 주는 贈詩와 화답하는 答詩가 있고,창화시는 唱하는 시와
和하는 시가 있어야 한다.사실상 증답이나 창화는 두 사람이 서로 시를 주
고받는다는 의미에서 별로 다를 것이 없다.다만 시의 제목에서 간혹 贈이나
答자를 노출시키는 경우가 있을 따름이다.창시는 먼저 지어 보낸 시를 말
하는데,이를 原詩로 부르고 그 시의 운자를 原韻이라고 부른다.그러나 제목
에 唱이란 글자를 내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和詩는 보내온 시에 화답한
시인데,화시를 할 때 상대 시(원시)의 운자를 빌려서 답하는 和韻,次韻을
활용하는 것이 상례이다.
화운풍조는 중국 당송시기에 유행을 보아 하나의 體式으로 굳어진 지 오
래다.23)和韻은 본래 상대의 시가 지닌 의미에 신경을 써서 화답하면 그만이
었기에 韻脚은 전혀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다.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원
시의 韻部나 韻字까지 그대로 화답하는 형태가 출현하게 되었다.和韻에는 同
韻과 次韻이 있다.次韻을 步韻,同韻을 依韻이라고도 한다.동운은 원시와

 

21) 退溪續集 卷5,「與趙士敬」:“且聞公當子中在縣時,與諸人唱酬往復無算,而公終始無
一句,不知此何等情理意思耶.”
22)蘇軾의 詩「次韻答邦直子由四首」에 “車馬追陪跡未掃,唱酬往復字應漫.”란 구절에 보인
다.이 역시 전후 문자를 바꾸어 往復唱酬라 해도 뜻은 다르지 않다.
23)宋張表臣, 珊瑚鉤詩話 :“前人作詩,未始和韻.自唐白樂天爲杭州刺史,元微之爲浙東
觀察,往來置郵筒倡和,始依韻,而多至千言,少或百數十言,篇章甚富.”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51

 


동일한 韻部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동일한 韻字를 사용하기에 차운하는 것보
다 조금 쉽다.원시와 韻만 같으면 되기 때문이다.그러나 차운은 운이 같을
뿐 아니라 운자를 놓는 차례마저 반드시 같아야 한다.동운과 차운의 중간
단계를 用韻이라 하는데,원시의 운자는 반드시 사용해야 하지만 그 차례는
달라도 좋은 경우이다.24)그러나 우리의 선인들은 화운,차운을 구분하지 않
고 함께 사용하였다.모든 수창시가 차운시로 진행된다고 보면 된다.
차운은 마치 상대는 때리고 나는 손과 발이 묶인 상태에서 방어하는 형국
과 같아 사람들을 매우 곤혹스럽게 만든다.원운자에 구속되어 알맞은 운자
를 찾아 안배하는 과정에서 작자의 시적 상상력이 제약을 받기 때문에 새로
운 의경창출이 어렵다.
조선시대 외교현장에서 거의 정례화되어 있던 것이 양국 외교사절의 한시
수창이다.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의 임무 중 하나가 능란한 수창에 있
었으므로 문학을 전공하여 詞藻가 富麗하고,酬唱에 精敏한 이가 선발되었
다.25) 수창에 능하다는 말은 상대 편 시의 운자와 의경을 감안하여 상대를
압도하는 정밀하고 민첩한 붓놀림에 뛰어나다는 표현이다.의주에서 서울을
오가는 연도에서 수창할 때,붓을 잡자마자 바로 시가 이루어져야만 중국사
신으로부터 ‘大手’라는 찬탄을 들을 수 있었다.26)

왕복수창은 언제나 가능할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수창에는 상대가 있어

 

24)清吳喬,「答萬季埜詩問」:“和詩之體不一,意如答問而不同韻者,謂之和詩;同其韻而不
同其字者, 謂之和韻;用其韻而次第不同者, 謂之用韻;依其次第者, 謂之步韻(亦稱次
韻).步韻最困人,如相敺而自縶手足也.蓋心思爲韻所束,而命意布局,最難照顧.今人不
及古人,大半以此.嚴滄浪已申斥之,而施愚山嘗曰,今人祗解作韻,誰會作詩.此言可畏.”
25) 盧守愼(1515~90), 穌齋集 卷8,「遠接使辭免五度」:“國家近來擇遠接使,專以文學
爲主,凡詞藻富麗,酬唱精敏者,僅能當之.”
26)李珥(1536~84), 栗谷全書 卷34,附錄二,「年譜下」,壬午十年(四十七歲):“沿途酬
唱,操筆立成,詔使歎曰,大手大手.”이렇게 왕복수창한 시편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 皇華集 인데,조선조 수창집의 최고수준을 보여준다. 退溪集 卷42,「成王皇華集序
」(成憲王璽):“昔之使來諸賢,多務酬唱,積成卷帙.”
252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야 하기 때문이다.내가 수창하고 싶다고 해도 상대가 인정하지 않으면 성립
할 수 없다.서로 수창한다는 것은 은연중에 상호 창작역량을 인정하거나 우
정의 도타움을 표지하기도 한다.구구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분방한 감정
표현을 즐기는 시인들 사이에는 상대의 시적역량이 뛰어나면 서로 달려들어
수창하려 하고,27) 성격과 기질이 달라도 무언가 통하는 동질적 요소가 조금
이라도 있으면 수창은 금방 이루어진다.尤庵宋時烈(1607~1689)이 호방
한 기질의 소유자로 농담을 잘 했던 錦湖林亨秀(1514~1547)가 얌전한 선
비였던 퇴계와 수창이 가능했던 것은 이질적인 가운데 서로 좋아하는 동질적
인 요소를 함께 공유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이 발언은28) 참으로 탁견이라
고 본다.
이렇듯 수창에는 ‘관계’가 중요하다.수창할만한 관계란 양자가 매우 친밀
한 사이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다.퇴계가 “친한 벗이 물어오지 않는다면,
품은 생각을 어찌 열 수 있을까.”라고 했듯이,29) 서로 잘 모르거나 사이가
좋지 않으면 수창은 어렵다.양자 간의 상호신뢰관계를 나타내는 심리학 용
어인 라포르(rapport)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의사를 소통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직접 대면하여 육성을 통해
소회를 밝히거나 간접으로 편지에 담아 산문체 문자 언어로 호소하는 방식이
있다.소통하고자 하는 내용에 따라 소통의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수창은
소통 가능한 사람끼리 은밀한 생각을 한시라는 운문형식을 빌어 내면의 깊은
울림과 파장을 전달하고자 하는 문학행위이다.30) 때문에 정확한 의미전달에

 

27) 退溪集 卷46,「通訓大夫行成均館司成文公墓碣銘幷序」:“遇文人墨客,輒與之吟詩,得
意發興,諷誦琅然,旁若無人,往往爲曲修邊幅者所笑,而一時名流,亦樂與爲唱酬往復焉.”
28)宋時烈(1607~89), 宋子大全 卷148,「錦湖集跋」:“余自少則聞錦湖林公是偉人豪士,
每讀退溪李先生所與酬唱,而以爲公平生善謔以戲,與先生氣象不同,而其相好若是,是必
於其不同之中,有所同者存焉.”
29) 退溪集 卷3,「次友人寄詩求和韻,二首」:“親朋非有問,懷抱詎能開.”
30)면식이 없이 처음 만난 사이에도 수창은 이루어진다.이 때의 수창은 상대의 마음을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53

 

는 수창시가 효과적이지 못하다.생각을 꾸밈없이 직접 서술하는 편지가 훨씬
낫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나 육성을 통해 전달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면,
수창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천 마디 말 만 자의 편지보다 한 수의 수창
시가 인간의 내면동정을 압축하여 감동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들 들어 본다.忍齋洪暹(1504~1585)이 퇴계에게 시를 부쳐 松岡趙
士秀(1502~1558)의 비문을 짓지 않는다고 책망한 적이 있었다.이에 퇴계
는 홍섬의 시를 차운하여 되묻기를,“공은 대대로 큰 문장가를 낸 집안 출신
이요/나는 작문에 게으르고 서투른 늙은이라네/무슨 마음으로 죽은 벗의
뇌사를 짓지 않고/팔짱끼고 졸렬한 내 솜씨를 구경만 하려드는가(첫째 수).
친구는 돌아가 저 세상 사람 되었으니/지난날이 자꾸 생각나 잠 못 이루겠
네/생각건대 이런 마음 그대가 더욱 심할 터라/문형을 맡고서도 어찌 비문
짓기를 꺼린단 말인가(둘째 수).”31)라고 했다.퇴계는 碑文不作論者였기에32)
조사수의 신도비문을 지을 수 없었다.오히려 당시에 대제학으로 있던 홍섬
이 적임자라고 생각했다.그런데 퇴계의 시에서 흥미로운 것은 거절의 뜻을
에둘러 표현하는 언어구사이다.간결하고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여 누르기도
하고 치켜 올리기도 하면서 상대의 자존심과 의리,우정에 호소하여 문득 홍
섬으로 하여금 붓을 들어 비문을 짓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도록 유도하고
있다.
또한 靜庵趙光祖의 從孫인 趙忠男이 퇴계에게 정암의 행장을 청하였을
떠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소통을 위한 준비 단계로써 의미가 크다.또한 공식적인
국가간 외교의 현장에서 수창이 이루어지는 경우,수창 당자 사이에 친밀성이 전혀 없
을 수도 있다.그러나 이 외교란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수창당자의 관
계는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31) 退溪集 卷3,「洪貳相退之寄詩,責余不作松岡碑,次韻卻問,二絶」:“公是瀛洲弈世仙,
我如慵綴老蠶眠,何心靳作亡交誄,袖手要觀拙斲鐫;故人歸作海山仙,苦憶平生忘寢眠,想
得斯情公更甚,司文何惜賁豐鐫,(松岡題龍宮浮翠樓詩,樂天兜率非吾願,歸卽須歸海上山.”
32)이종호, 퇴계학에세이 온유돈후 (아세아문화사,2008),‘퇴계는 왜 신도비문을 짓지
않았나’를 참조.
254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때도 퇴계는 시를 지어,“늘 조정을 빛내던 정암의 의젓한 모습 생각했더니/
이제 고귀한 후손을 만나보니 그 모습 여전하구려/내 어찌 감히 공의 훌륭
함을 찬양하리오/천리 눈길을 떠나는 그대에게 부끄럽구려.”라고33) 하여,
부응할 수 없다는 뜻을 전달하기도 했다.34) 이렇듯 수창은 깊은 마음 속 생
각을 시에 담아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백적인 문예이다.
아마도 고해성사를 하듯,숨김없이 토로하고 나면 마음의 灑脫과 정신의 淨化
가 찾아올 것인바,이야말로 수창시의 큰 기능이 아닐 수 없다.
수창은 양자 간에 일대일로 진행되는 것이 기본이다.그러나 창자 1인과
화자 다중의 관계로 진행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사제관계의 수창에서는 스
승의 원운에 문생이 돌아가며 화운하고,壽宴과 같은 자리에서는 상석에 있
는 어른의 원운에 나머지 자질과 지우,후진들이 잇달아 화운한다.규모가
작은 雅集이나 眞率한 모임에서도 마찬가지다.때에 따라서 원래의 수창시에
시차를 두고 후속 수창이 이어지거나,시대를 隔하여 선대를 회상하는 후대
의 수창이 되풀이되기도 한다.그러나 수창시의 생명은 현장성,즉흥성에 있
으므로 후대에 이루어진 수창은 추모와 회고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뿐 수
창 당시의 감흥을 찾기 어렵다.
수창은 언제 어디에서 주로 이루어지는가.수창의 공간과 계기는 한결같
지는 않지만 대체로 유람과 연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예가 많다.도성이나 전
원에서 조촐하게 주연을 베풀고 아담하게 모여 주고받는 수창은 사대부의 일
상적인 문학행위였다.수창하기에 좋은 곳이 따로 있지는 않지만,시인의 창
작욕구를 자극하기에는 주변 풍광이 뛰어난 누정이 제격이다.

 

33) 退溪續集 卷2,「贈趙忠男」:“常思儀鳳瑞王庭,玉樹今逢尙典刑,盛美揄揚吾豈敢,雪
霜千里愧君行.”
34)율곡의 從曾孫인 李子馨이 懷川으로 우암을 찾아와 栗谷年譜 를 빨리 수정해 달라고
청했을 때,퇴계가 조충남에게 했던 일을 본떠 거절하는 뜻을 시에 담아 보냈다고 한
다. 宋子大全 卷135,「書退溪先生詩贈李子馨說」을 참조.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55

 

백년도 못 채우는 유한한 인생살이에서 우환과 질병 그리고 사고를 제외
하면 즐길 날이 얼마 없다.우리의 선인들은 그 즐거움이란 것 가운데 벗과
글과 술로 즐기고 산천을 유람하며 구경하는 일을 으뜸으로 쳤다.이런 즐거
움은 나이가 적고 지위가 낮으며 몸이 한가로운 자에게 합당한 지라 누구나
쉽게 얻어서 항상 소유할 수는 없다.35) 이처럼 산수유람은 입신양명에 실패
한 이들에게 큰 위안이 되는 문화행위이기도 했던 것이다.
글 읽는 선비라면 누구나 명승지를 돌아다니며 나그네의 회포를 펼쳐내어
吟諷唱和하는 작품을 남기게 마련이다.다만 말을 타고 다니며 산수를 구경
하다가 짓는 것이 다반사여서,간혹 황급히 지은 것은 법도나 규율에 맞지
않아 배를 쥐고 웃을 정도로 시원치 않은 작품들도 많았다.36)
퇴계 당대에 주자가 張栻,林用中두 문인과 함께 남악을 유람하면서 수
창한 시를 한 책으로 엮은 南岳唱酬錄(集) 이 널리 읽혀진 듯하다.퇴계도
진작에 제자 龜巖李楨(1512~1571)이 찍어서 부쳐준 명대 鄧淮編 남악
창수집 을37) 눈에 익게 보았을 것이다.우리의 선비들은 남악창수록 을 얻
으면 무슨 귀한 보석이라도 찾은 듯이 손에서 놓지 않고 열심히 읽어나갔
다.38) 남악창수록 을 읽으면서 기이한 경치를 찾고 풍월을 읊조린 주자의
시에서 순수한 성정의 바름(性情之正)을 간파해고자 했고,39) 수창시구 사이

 

35)趙泰億(1675~1728), 謙齋集 卷41,「桂陽酬唱帖序」:“人之生,常不滿百歲,除憂患
疾病事故外,爲樂之日無幾.其樂也莫尙乎朋好文酒山川游賞之事,而此皆年少位卑身閑者
所宜,豈能易得而恒有之哉.”
36)金世弼(1473~1533), 十淸軒集 卷3,「關東酬唱錄序」:“抵歷名區,攄發羈懷,於是
有吟諷唱和之作,此書生故態也,第出於鞍馬馳勞之餘,或草次口號,不規度法律,較工於
翰墨之場,則見者不惟思睡,抑有捧腹之不暇也.”
37) 退溪集 卷22,「答李剛而」:“印寄皇極內篇,南嶽唱酬集,皆所願見,深荷惠及之意.”
38)李徽逸,(1619~1672), 存齋集 卷4,「書南嶽唱酬後」:“余見此書於隣舍,亟請而歸讀
之,不翅如南金美璞,未嘗離手.”
39)金應祖(1587~1667), 鶴沙集 卷5,「凝石寺酬唱錄跋」:“昔紫陽朱夫子遊南嶽,當時門
弟子諸賢實從之,其酬唱諸篇,裒爲一帙,至今膾炙人口,赫赫若前日事.夫以天下之賢師,
從天下之賢弟子而遊,其所酬唱,莫非粹然出於性情之正,豈搜奇探勝嘲風詠月爲工而已.”
256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에서 주자나 장식의 쇄락한 마음과 광대한 기상을 상상하고,가는 곳마다 강
론하여 서로 충고해주는 뜻까지도 찾아내려 했다.40)

 

주자는 남악에서 4~5일 사이에 백여 편에 달하는 시를 지었다.그러고
나서 지나 친 수창은 마음을 황폐하게 만든다고 경계했다.우리의 선비들은
이 사실을 상기하고,41) 궁리와 실천공부가 소홀하게 될까 봐 수효를 일부러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42)어쨌든, 남악창수록 은 조선 사대부
들의 수창문화에 심원한 영향을 주었다.이를 모방한 師弟同行의 산수유람과
남악창수시 를 차운하는 일이 다반사처럼 되어 갔다.43) 그 결과 수많은 ‘酬
唱集’,‘酬唱錄’,‘酬唱帖’이 엮어져 문집에 수록되었다.44) 그 중에서 嘯皐朴

 


40) 李喜朝(1655~1724), 芝村集 卷20,「書朱張二先生南嶽唱酬錄後」:“噫,二先生襟
懷之灑落,氣像之廣大,卽此而猶足想見其彷彿,况其隨處講論交相箴戒之意,又藹然見於
詩句之間,尤豈非後人之所可法哉.”
41) 金元行(1702~72), 渼湖集 卷13,「題丹丘酬唱錄」:“昔朱子與張南軒諸賢,遊於南
嶽,唱酬之多,四五日,至百餘篇,……然而猶自以爲荒也,爲之交規互勉,凜凜若垂千仞
之壑而懼其墜焉,何也.君子之於道,其不可須臾離,而無往而忘其進德,蓋如是歟夫.”;
周世鵬(1495~1554), 武陵雜稿 卷7, 原集, 「遊淸涼山錄」;“乃爲南嶽遊山後記曰
…… 又曰,詩之作本非不善也,而吾人之所以深懲而痛絶之者,懼其流而生患也.”; 宋子
大全 卷139,「雪窖酬唱集後序」:“蓋晦翁與二門人同行也,凡山川林壑,風煙景物,無
非詩者,而旋又懲之而痛絶之,故其所作至于二百餘篇而止曰,蓋懼其流而生患也.”
42)張顯光(1554~1637), 旅軒續集 卷10,附錄,「景遠錄」(門人權崶):“先生不喜題詠,
立巖山水,可謂甲於東方,而只有精舍詩數篇.嘗誨小子曰,詩不過言志,而貴在平澹,神
鎪鬼剜,不足取法,昔朱夫子與張南軒遊南嶽,而僅解戒詩之令於罷歸之日,吾輩不必專意,
至分踐履尋究之工焉.”
43)李光庭(1674~1756), 訥隱集 卷2,「敬次南嶽唱酬詩韻(四十九首),幷序」를 참조.
44)한국문집총간 나타난 수창시집의 출현양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西行酬唱錄 ( 白
軒集 卷30,「西行酬唱錄序」:병자호란 이후 심양길에서 李一相과 朴遾과 수창하고
제가들이 화답), 雪窖酬唱錄 ( 宋子大全 卷139,「雪窖酬唱集後序」:심양객관에 구
류중이던 金尙憲이 曺漢英과 3백편이 넘게 수창), 巴谷酬唱詩帖 ( 宋子大全 卷149,
「書巴谷酬唱詩後」:화양동 巴谷을 거쳐 仙游洞에 이르는 답사하고 난 뒤 송시열이 선
창하고 권상하를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화답), 九日龍山酬唱錄 ( 壺谷集 卷15,「九日
龍山酬唱錄序」:중양절 양주 용산 태극정에서 李喜朝,賀朝형제 및 南龍翼,金益廉등
이 모여 주연을 베풀고 수창), 大芚酬唱詩帖 ( 文谷集 卷26,「書大芚酬唱詩序後」:
金尙憲이 제주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海南에 들려 白振南과 李弘冑를 이끌고 大芚
山頭輪寺일대의 경치를 구경하면서 수창), 西湖酬唱錄 ( 西河集 卷12,「李兄西湖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57

 

承任(1517~1586)이 柏巖金玏(1540~1616)을 비롯한 문생 수 십 인을
거느리고 凝石山(혹은 蓮花山라고도 함.경북 영주 남쪽에 있었음)의 凝石寺
를 유람하면서 잇달아 수창하여 凝石寺唱酬錄 을 엮은 것은 영남일대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45)

 

유람과 연회의 부산물인 수창시는 사실의 기록을 위해서도 의미가 있었

 

酬唱錄跋」:李懏이 중씨인 李恒과 수창한 湖中記行詩수 십 수), 伽倻酬唱詩帖 ( 西
坡集 卷5,「伽倻酬唱詩幷序」:성주목사로 있던 吳道一이 이웃 고을 수령들인 趙持正,
崔柱岳,尹泓,南老明등과 함께 가야산 해인사 일대를 유람하고 서로 命酒賦詩한 작
품), 石潭酬唱錄 ( 丈巖集 卷25,「題石潭酬唱錄後」:李喬岳이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 文元公金長生의 位板을 石潭書院에 배향한 뒤 여러 유생들과 석담 가에서 酬唱한
70여수), 春遊酬唱錄 ( 三淵集 拾遺,卷24,「春遊酬唱錄跋」:어느 봄날 김창흡이
풍악을 잡힐 요량으로 피리와 거문고 다루는 악사를 대동하고,자신의 형제와 가까운
친척들인 金時保,李聖佐,金昌協,金昌直등과 만나 산수유람에 나서 수창), 仙樓酬
唱詩帖 ( 損窩遺稿 卷12,「仙樓酬唱詩跋」:평안도관찰사로 있던 崔錫恒이 평양감영
에서 임기를 마친 뒤 成川에 들려 그곳 수령인 鄭悏을 降仙樓에 오르고 뱃놀이를 하면
서 창화한 십 여 수), 桂陽酬唱帖 ( 謙齋集 卷41,「桂陽酬唱帖序」:趙泰億이 벼슬
을 그만 둔 뒤에 權詹,李肇,鄭壽期서울과 인천 중간에 있는 부평에서 만나 주연을
베풀고 여러 날 묵으면서 각기 수 십 편씩 지어 하나의 鉅軸을 만들었다.여기에 趙泰
一이 비평을 가하고 다시 崔昌大가 續和한 詩軸), 蘿溪酬唱錄 ( 謙齋集 卷43,「題
蘿溪酬唱錄後」:趙師錫이 재상을 그만둔 후 坡州蘿溪의 水月亭에 은거했는데 종유하
는 이웃 사람 李諱基,같은 고을에 사는 李世華및 堂兄인 趙泰老,泰耈등과 수창한
작품 12수), 花縣酬唱錄 ( 圃巖集 卷12,「花縣酬唱錄序」:尹明運이 花山현감 임
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조카 尹鳳朝형제와 서로 왕래하며 모임을 갖고 틈나는 대로
산수를 유람하며 누대에서 주연을 베풀어 수창), 四郡酬唱詩帖 ( 貞菴集 卷9,「書
四郡酬唱詩後」:閔遇洙가 金信謙과 四郡선수를 유람하면서 수창), 鐘巖酬唱錄 ( 晉
菴集 卷7,「題鐘巖酬唱錄後」:李天輔가 鐘巖에서 南有容,吳瑗과 함께 각기 한 운을
사용하여 수창한 7언 율시 20편), 丹丘酬唱錄 ( 渼湖集 卷13,「題丹丘酬唱錄」:金元
行이 벗들과 단양 일대를 유람하며 수창한 시), 谿澗酬唱帖 (宋德相 果菴集 卷9,
「書谿澗酬唱帖後」;李書九 惕齋集 卷8,「谿澗酬唱帖跋」:정묘,병자호란을 전후로
谿谷張維와 南磵羅海鳳이 수창한 시), 南遊酬唱詩帖 ( 燕石 册3,「題南遊酬唱詩
後」:兪彥鎬가 남쪽 지방을 유람하면서 安衡과 수창한 30여 편), 南村六老酬倡詩帖
( 硏經齋續集 册11,「南村六老酬倡詩小序」:成海應의 거주지인 남촌에서 뜻을 함께
하며 살아가는 환갑을 넘긴 여섯 노인이 답답함을 풀어내고 권태로움을 잊기 위해 7
언시로 수창한 시첩).
45)朴承任(1517~86), 嘯皐集 附錄下,知舊門生贈遺,「凝石寺唱酬韻」를 참조.
258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다.특히 누정에서 주연을 베풀 경우,술을 거나하게 들이켜고 풍류가락을
즐기며 시를 짓다보면,왕왕 성률이 제대로 맞지 않고 음조도 통창하지 못해
하자가 많은 작품을 생산하기 마련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비들은
자유분방한 소년시절의 감성을 버리지 않고 수창에 나선다.무엇 때문인가.
감흥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바로 시를 짓기에 나중에 시를 보면 그 때의 일들
을 생생하게 되살려낼 수 있다.이것이 바로 ‘記實’이라는 수창시의 기록성이
다.46)

 

수창이 조탁을 일삼지 않고 솟구치는 정감과 당시의 분위기를 순간적으로
사진을 찍듯 스케치한다는 면에서, 반복하거나 흉내 낼 수 없는 아우라
(Aura)와 같은 독특한 분위기를 갈무리할 수 있다.이것이 단점이 많을 수
있는 수창시의 장처이다.따라서 이 장점을 잘 살리면 유람의 체험과 흥취를
오래도록 지속시킬 수 있다.47) 체험도 중요하지만 체험을 잊지 않고 반추하
는 것 역시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이 또한 선인들이 수창시를 남기려
한 주요한 동기였다.
수창시는 현장성,즉흥성,卽事가 생명이었기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붓에
맡겨 써내려가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그러나 정감의 분출에 무게를 두다
보니 자연 시어를 꾸미는 일에 유념할 겨를이 없다.정감의 진실성을 중시하
고 수식을 돌아보지 않는 성향은 구차하게 말해서 수창시의 단처이면서 하나
의 특징이다.48)

 


46)尹鳳朝,(1680~1761), 圃巖集 卷12,「花縣酬唱錄序」:“仲父宰花山及瓜而返,吾兄
弟迭相往來團會以其暇,放浪乎山水厓壑,陶寫乎琴酒樓臺,一未甞不得意焉.其發之酬唱
者,雖聲律未盡叶,音調未及暢,疵纇易出,完粹者絶少,而要皆從少年習氣談笑而出之.
卽事而詩成,按詩而事存,向所稱愉快者悔吝者,善惡俱形,瑕瑜不掩,並集於紙墨,此皆
爲記實也.”
47) 閔遇洙(1695~1756), 貞菴集 卷9,「書四郡酬唱詩後」:橧巢每曰凡遊事,有紀述文
字然後其遊長,苟無文字則事過而旋忘,殆不記其有斯遊也.”
48)兪彥鎬(1730~96), 燕石 册3,「題南遊酬唱詩後」:“且其所爲詩,率口信筆,惟在乎
輸寫而不求其藻繢,則彼此相與之際,以實而不以文者,亦見其一端矣.”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59

 

시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법이다.그런데 일단 시가 우러나왔으면 더 이
상 손을 대지 말라고 한다.왜 그럴까.그만두지 않고 손을 계속 대는 행위
는 마음에 累가 될 뿐 아니라 결국엔 道에서도 멀어지기 때문이다.49)우리의
선비들은 그렇게 믿는다.그래서 수창에 강한 이는 상대를 凌駕하려 하고 약
한 이는 상대를 仰慕하려 하는데 그런 태도는 좋지 않다고 한다.남을 이기
려는 마음,즉 승부욕이 생겨나면 天機가 삭아들어 없어지기 때문이다.그러
나 이러한 경향 역시 수창의 일반적인 병폐이자 또 하나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50)
퇴계는 누구와 수창을 했을까.생애 단계마다 수창의 상대가 달라졌을 것
이다.퇴계의 생애를 초년 독서기,중년이후 사환기,만년 은거강학기로 나누
어 본다면 그 때마다 수창의 주 대상이 향촌의 儕輩,중앙관료․지방장관,
성균관 및 향교 유생,예안과 안동,영주 등 향촌의 문생과 자손 등으로 바
뀌었을 것이다.다음 장에서 퇴계의 수창시가 어떠한 전개양상을 보이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Ⅲ.退溪酬唱詩의 展開樣相
퇴계는 편지 쓰기를 즐긴 분이다.통신이 어려웠던 시절이니 편지로 왕복
하여 정보를 주고받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다.그렇다 하더라도 퇴계에게
편지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편지를 즐겼다’는 것은 퇴계가 편지를 활용하
여 당면한 고민거리를 무리 없이 해결하고 나아가 자신이 구상한 미래 비전

 

49)趙璥(1727~87), 荷棲集 卷7,「豐墅酬唱錄跋」:“詩出於心,出而不已,則心爲之累,
而於道遠矣.”
50)李天輔(1698~1761), 晉菴集 卷7,「題鐘巖酬唱錄後」:“余見世之唱酬者,彊者凌而
駕之,弱者企而慕之,於是,勝心生而天機則索然盡矣.”
260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을 실현하고자 했다는 뜻이다.퇴계만큼 효과적으로 편지를 이용한 인물은
흔치 않다.간혹 편지로 인해 구설에 오르거나 논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
데,퇴계에겐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그만큼 퇴계는 함부로 편지를 쓰지 않
았다.
퇴계는 편지 못지않게 수창을 즐겼다.퇴계는 초면이든 구면이든 사람을
만나면 으레 수창을 청했던 것 같다.특히 문생들에게는 수창을 종용하다시
피 했다.왜 그랬을까.뒤에서 다시 상론하겠지만 일찍부터 수창의 기능과
효과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널리 알려져 있는 퇴계의 조심성 있는 글쓰기
태도는 수창의 현장에서도 여전히 유지된다.상대의 오해를 불러오지 않을
수창시를 써야한다는 배려가 크게 작용한 탓이다.수창을 즐겼으니 수창시를
많이 남겼을 터이고,실제로 대강 그의 문집을 일별해 보면,수창을 계기로
지어진 작품이 전체 시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51)
퇴계 수창시 전반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이 글에서
는 다만 수창시의 상당 부분이 문생이나 자질과 주고받은 것이므로 퇴계가
50세 이후 만년에 지은 수창시를 주 대상으로 삼아 편의상 몇 가지 국면,즉
贈答詩簡型,閑居求道型,山水遊覽型,自問自答型으로 나누어 그 전개양상을
엿보기로 한다.간혹 4가지 유형이 서로 중첩되는 부분도 있고,4가지에 속
하지 않아 달리 항목을 설정해야 할 퇴계의 수창시도 있을 것이다.보기에
따라서는 贈答詩簡型과 自問自答型이 형식적 요소가 강하고 閑居求道型과 山
水遊覽型이 내용적 요소가 강하므로 둘씩 묶어 형식과 내용으로 나누어 퇴계
수창시의 성격을 서술하는 편이 효과적일 수도 있다.그러나 앞서 제시한 4
가지 유형은 단지 논술의 편의상 구분한 것일 뿐,형식과 내용을 명쾌하게

 

51)퇴계 시에서 수창시의 점유율을 정확히 제시할 수 없지만 절반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
다.이에 대해서는 퇴계시집을 정밀하게 분석한 통계수치를 가지고 다른 지면에서 재
론하기로 한다.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61

 

분별하거나 모든 양상을 완벽하게 포괄하려 의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퇴계 수창시의 분류에 대해서는 차후에 필요하다면 수정 보완하는 기회를 갖
기로 한다.또한 지면관계상 각각의 수창양상에 대해 그 경개만 간략하게 기
술하느라 해당 사례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한다.아울러 동학들의 양해를 빈다.

 

1. 贈答詩簡型酬唱詩

 

증답시간형은 편지를 왕복하듯이 수창하는 양상이다.편지에 동봉하여 부
치는 경우도 있고 별도로 시만 적어 보내기도 한다.일찍이 퇴계는 누런 작
은 종이를 黃孝恭,琴軸,朴承任에게 각각 40매씩 부치고 아울러 절구시 한
수를 보내며 화답을 구한 바 있거니와 그 시에서 “당나라 薛濤가 했던 것처
럼52) 누런 종이를 작게 만들어,그대들에게 부치노니 아름다운 경치를 종이
에 담아 보내주시오.”라고53) 하여,왕복수창을 적극적으로 권면했다.퇴계가
시를 보낼 때는 詩筒을 사용했다.錦溪黃俊良(1517~1563)의 시에 보
면,54)퇴계가 일찍이 대죽을 구하여 시통을 만들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시
를 담아 왕래수창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고 했음은 물론이다.그 때 아마
新寧(현 경북 영천 신령면)현감으로 있던 황준량이 퇴계의 청에 부응하여
시통을 만들어 보냈던 듯하다.55)

 

52) 資暇錄 卷下「薛濤傳」과 後漢書 卷108 「箋紙譜」에 의하면,당나라 長安의 名妓
로 시를 잘 지었던 설도가 만년에 成都浣花溪에 우거하면서 빨간(鮮紅色)채색 종이
를 짧게 잘라 시를 적어 넣었다고 하는데,여기에서 ‘설도의 종이(薛濤牋,蜀牋)’라는
말이 유래하였다.즉 퇴계도 설도처럼 짧은 시를 적어 넣기에 알맞은 조그마한 채색
종이를 만들어 보냈던 것이다.
53) 退溪外集 卷1, 「黃小牋寄龜巖南溪鐵津各四十枚, 幷呈一絶求和」:“小作黃牋效薛牋,
寄君賭取裹風烟.”
54)黃俊良(1517~63), 錦溪集 卷1,「次退溪公求大竹擬作詩筒筮筭詩韻」; 錦溪集 卷
3,外集,「次退溪見寄」其2:“時遊翰墨騁雄豪,虹貫詩筒玉氣高,披向小軒風動竹,咀呑
一半笑吾饕.”
55) 退溪集攷證 卷5,第十九卷書:“詩筒:案仲擧詩,有退溪求大竹爲詩筒云云.意此筒,
262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퇴계는 황준량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통이 오래도록 竹閣에 머물러 있구
려.연말이라 생각이 깊을 터인데,행여 때때로 시에 담아 서둘러 보내주어
이 사람의 울적한 마음을 씻어주면 좋겠구려.”56)라고 말하기도 하고,“문득
거듭 詩札을 보내주시어 이 사람의 쓸쓸한 마음을 위로해주시니 너무도 고마
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두어 구절을 지어서 시통에 넣었으나
그대에게 보이기에 부족하니 그냥 한번 웃고 치우면 다행이겠소.”57)라고 말
하기도 했다.여기서 우리는 퇴계가 시통을 이용한 왕복수창을 얼마나 염원
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조목에게는 “시통을 받아 보고 편지에서 말씀
하신 뜻을 다 알았습니다.요즈음 울적한 심사를 모두 토로하였으니,마치
친히 만나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듯합니다.”58)라고 해서,산문 편지로는 내면
의 정서를 토로하기에 부족하므로 왕복수창이 필요하다는 관점을 보이기도
했다.
일찍이 황준량이 신령현 원님으로 있을 때,객관 서편 대나무 숲 속에 작
은 누각,즉 竹閣을 짓고 시를 보내어 퇴계의 화답시를 청한 듯하다.퇴계의
시를 받아 판각하여 새로 지은 죽각에다 걸 요량이었던 것이다.59) 퇴계는
1552년 4월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어 상경한 뒤,화답시를 지어 인편에 부쳐
주었는데,그 시에 이르기를 “높은 벼슬도 좋고 돈 많은 부자도 좋다지만/집
안에서 벗할 만한 이는 오직 대나무 뿐/줄기마다 옥같이 서서 자리를 다투
지 않고/죽순마다 용처럼 뛰어 하늘로 오르려는 듯/까칠한 바위와 찬 시내
는 푸른빛을 띠었고/성긴 창문 빈 난간에 맑은 바람 불어오네/가련타,사

 


是新寧製送,而所以盛往來酬唱者也.”
56) 退溪集 卷19,「答黃仲擧」:“詩筒久滯於竹閣,歲晏幽抱,幸或有時而催遣,洗此悁悒.”
57) 退溪集 卷19,「答黃仲擧」:“忽復再枉詩札,慰此岑寂,荷意珍重,不知裁謝,……數
句掇入詩筒,不足以塵雅鑑,一笑爲幸.”
58) 退溪集 卷23,「答趙士敬」:“獲接詩筒,兼悉簡喩,披寫近鬱,如親晤對.”
59) 退溪外集 卷1,「竹閣曾有二刻,已不勝愧.今又索題,恐或重浼,故前者辭之.書來再
督,只以一絶塞責,千萬勿掛他眼,幸甚」.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63

 

람과 경계 다 새로운 곳 되었으나/내가 이어 지은 시 보잘 것 없어 부끄럽
구려.”라고60) 했다.대나무의 기상을 예찬하고 그 대숲을 배경으로 지어진
죽각을 아울러 찬미하여,그 덕이 죽각을 지은 황준량에게 미치게 하였다.
이런 수창시는 다소 의례적인 성격이 강해 보인다.시판에 올릴 목적으로 퇴
계에게 시를 요구했으므로 그에 합당한 방향으로 내용을 구성해야 했을 퇴계
의 고심이 엿보인다.
황준량이 새로 세운 죽각은 임란으로 불타버렸다.그에 따라 죽각의 門楣
사이에 걸려있던 시판이 모두 사라졌다.그 후 죽각이 다시 지어졌지만 시판
은 걸지 못했다.同春宋浚吉(1606~1672)의 부친인 宋爾昌이 현감으로 부
임하여 죽각을 중수하여 단청을 베풀고 다시 퇴계의 시판을 걸었다.이에 仙
源金尙容(1561~1637),敬亭李民宬(1570~1629)과 같은 명류들이 번
갈아 시통을 보내 續和하여 죽각을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고 한다.61) 이민성
은 퇴계의 죽각시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敬亭集 에 퇴계시를 여러 차례(4
회)차운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62)

 

이렇게 의례적이어서 다소 밋밋한 증답시간형 수창시가 있는가 하면,은
유와 해학이 넘치는 것도 있다.그 대표적인 것으로 월천 조목과 수창한 작
품 가운데 「풍기의 객관에서 진사 조목에게 답하다」를 소개한다.
1566년 정월,퇴계는 동지중추부사로 부름을 받고 몸을 일으켜 부임하려
했다.이 소식을 듣고 조목은 송별시로 절구 3수를 지어 퇴계에 올린 바 있

 

60) 退溪集 卷2,「次韻寄題黃仲擧新構竹閣」(夏赴都後):“肉食終難近臭銅,此君唯足友軒
中,竿竿玉立非爭列,籜籜龍騰欲上空,瘦石寒溪團翠色,疎欞虛檻灑淸風,可憐人境俱新
處,續舊題詩愧未工.”
61)宋浚吉(1606~72), 同春堂別集 卷8,「先考淸坐窩府君年譜」,光海三年(府君年五十
一歲):“修竹閣,揭退溪李先生詩.始黃錦溪俊良宰是縣,新搆竹閣,退溪先生爲題七言律
一章,揭在楣間,兵燹之餘,蕩無存者,厥後竹閣再創而無詩,聞者惜之.府君至則加葺其
閣,施以丹碧,復揭其詩.仙源金相公李承旨民宬諸名勝,遞筒續和以侈之.“
62)李民宬(1570~1629), 敬亭集 卷2,「新寧竹閣,敬次退溪先生韻」․「再次竹閣韻」;
卷9,「復次新寧竹閣韻」․「六月十五夜對月,偶用新寧竹閣韻」.
264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는데,그 중 한 수에서 “어제 밤 바다 모퉁이에서 바람 불고 천둥 치더니/
용의 무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 다투어 달리더이다/선생께서 힘써 올라가
명철하신 주상을 도우신다면/성군과 현신이 만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
고63) 했다.퇴계는 이 시를 받고 조목이 자기를 분에 넘게 치켜세워 기롱했
다고 여긴 듯하다.그러던 차에 퇴계는 병으로 영천(영주)에 이르러 사직소
를 올리고 풍기 객관에서 왕명을 기다리고 있었다.이 때 마침 조목이 공릉
참봉에 제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를 놀려줄 양으로 화답시를 지어 부쳤
다.시에 이르기를 “어떤 새 숲 떠나 그물에 걸리니/숲 속의 새 한 마리 껄
껄 비웃었다네/어찌 알았을까,다시 그물 가진 자/그 둥지 덮어 씌워 옴짝
달싹 못하게 할 줄을.”이라 하여,64) 이전에 받았던 놀림을 되갚았다.65) 퇴
계는 두 마리 새를 등장시켜 자신과 조목을 비유했다.먼저 숲을 떠나 그물
에 걸려든 새가 퇴계이고 숲 속에서 이를 보고 껄껄 비웃는 새가 조목이다.
그러나 轉句에 이르러 반전이 이루어진다.사냥꾼이 그물로 숲 속에 있던 새
마저 잡아가고 만다.조목도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음을 비유한 것이다.이제
누가 누굴 보고 웃어야 할까.두 마리 새가 떠나간 숲은 쓸쓸하기만 하다.
진정한 기쁨의 웃음은 다시 떠난 새가 숲으로 돌아오는 데서 찾아진다.譏弄
詩에 그칠 것 같은 퇴계 화답시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바로 이것이다.
이 화답시는 후대에 ‘二鳥詩’혹은 ‘呵呵詩’로 불리며 널리 유행하였다.특
히 출사와 은거의 기로에 섰을 때,퇴계의 시를 암송하며,斷章取義함으로써
한바탕 껄껄 웃으며 고민을 해소해 나갔던 것이다.66)

 

63) 趙穆(1524~1606), 月川集 卷1,「伏呈退溪先生時先生將赴召」:“昨夜風雷震海隅,
群龍起蟄競時趨,先生力去扶明主,做得風雲際會無.”
64) 退溪集 卷4,「豐基館,答趙上舍士敬」(時士敬寄詩來,頗譏余行,適聞其有恭陵參奉之
命,故詩中戲云):“有鳥辭林被網羅,林中一鳥笑呵呵,那知更有持羅者,就掩渠巢不奈何.”
65) 月川年譜 四十五年丙寅(先生四十三歲)二月:“以銓曹薦,除將仕郞,恭陵參奉,不赴
(時退溪先生被召而起,先生上別章三絶,其一曰,……退溪先生到豐基,聞先生有參奉之
除,寄一絶云,……)”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65

 

2. 閑居求道型酬唱詩

 

한거구도형은 전원에 한가롭게 지내는 사이에 수창을 통해 도학을 강론하
는 내용을 보여주는 유형의 작품을 말한다.여기서 구도는 講道와 같다.퇴계
는 閑居를 제대로 즐길 줄 아는 분이었다.따분하다 못해 졸음이라도 쏟아질
듯한 무료한 한거를 고집하는 이도 있겠지만,퇴계는 창조적 활동의 계기로
한거를 이용했다.
퇴계는 한거를 통해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고 일체를 초월하는 달관을 추
구했다.어느 벗과 수창한 시에 차운한 “편벽된 성격이 늘 고요함 좋아하고/
야윈 육신이라 추위가 정말 두렵다네/마당 문을 닫고 솔바람 소리를 듣다가
/화로를 껴안으며 설중매를 바라보네/노년이 되고 보니 세상맛이 달라지고
/말로에 이르니 사람살이 더욱 어렵도다/도리를 깨닫고서 한바탕 웃음이
나는 것은/본시 모든 것이 남가일몽이었기 때문일세.”67)라고 했다.이 작품
은 후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운율을 잘 갖추었을 뿐 아니라 閑居自得하
는 운취가 있어 읽고 나면 깊은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68)‘한거자득’

 

66) 宋子大全 卷42,「答李靜伯」(丁巳十一月二十一日):“曾聞兄有行遣,暗誦退陶詩,恨不
得相對大噱也,然雖同在網羅,而豈可與朝夕就炰者,同年語也(退翁詩云,…… 此詩可以
斷章矣.好笑好笑).”;卷32,「答兪武仲」(戊戌二月十八日):“吉兄已歸否,無乃恰取得退
陶呵呵詩耶.”;卷96,「與李同甫」(丙寅四月九日):“忽於數日前,渠聞有徵命,蒼黃東去,
此友從今亦失淸靜之致, 可謂退翁笑呵呵之詩料也.”;卷39, 「答權思誠」(戊子十一月二十
一日):“繼聞被召去就之計,前定不窮矣,謾誦退溪先生二鳥詩,以奉戲也.狗續太僭,不
但爲淸朝之累,尤悚尤悚.”;李端相(1628~69), 靜觀齋別集 卷2,「答宋尤齋」:“几
舃還朝, 中外聳賀, 區區之悃, 有倍於人, 而第此下書笑人爲人所笑之敎, 卽退陶先生所
謂……之意也.”;黃胤錫(1729~91), 頤齋遺藁 卷4,「奉贐水翁(金益休)東陵之行幷
小序」:“水樓翁四十四始仕,爲一謝西上,過我山雷靜居,念其幾年高蹈,忽落塵網,寧不
爲如我見笑者所快乎,因記退溪赴召路,聞趙月川有恭陵新命,寄一韻反嘲,可爲今日借用,
輒改數字以贈行.”
67) 退溪集 卷3,「次友人寄詩求和韻,二首」其2:“性僻常耽靜,形羸實怕寒,松風關院聽,
梅雪擁爐看,世味衰年別,人生末路難,悟來成一笑,曾是夢槐安.”
68)宋相琦(1657~1723), 玉吾齋集 卷17,「南遷錄上」:“余嘗喜退溪先生詩,…… 非但
句律精工, 其居閒自得之趣, 可以想見, 今於窮陋中, 偶一諷誦, 益覺有味.”송상기는
266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이란 바로 조용히 지내면서 자연과 인생에 대한 哲理를 깨닫는다는 뜻이다.
이 한거자득이 바로 퇴계가 지향한 창조적 활동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퇴계는 51세 무렵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한가롭게 지내면서 조목,구
봉령,김팔원,권대기 등 예안과 안동에 포진한 문생들과 수창한 시 14수를
남겼다.69)시에서 퇴계는 문생들에게 중국 성리학의 발전맥락과 우리나라 선
현들의 長短과 功過를 제시하면서 분발을 권면했다.
마지막 수는 이 시의 에필로그인데,“마음속 생각을 조금 시에 담아내었
지만/결국 空言이라 곡조에도 맞지 않으리/그냥 보시고 사람들에게 전하지
마소/남들은 다 내 말을 수긍하지는 않을 터이니.”라고70) 하여,비난의 의
혹을 미리 방비하는 예의 그 침착함과 조심성을 빠뜨리지 않았다.퇴계는 여
전히 자신의 주장과 관점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음을 우려하고 가급적
언론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새로운 내용을 담은 글을 문생들에
게 보이면서 항상 말미에 ‘널리 퍼뜨리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같은 작품 제6수에서 퇴계는 “원나라의 오랑캐가 중국을 더럽힌 것이 몇
해 이런가/그래도 오히려 우리 유학은 한층 새로워졌다네/가련타,원의 더
러운 정사가 그렇게 악했다지만/산림에서 도학 강론하는 이를 없애지는 않
았구나.”71)라고 하여,당쟁으로 인해 도학자가 위축되었던 송대보다 정사는
폭압적이었으나 도학자를 그런대로 대우하여 자유로운 강론을 보장해준 원대
를 긍정했다.퇴계는 이 시의 말미에 자세한 주석을 달아,선비를 대우하는
1722년(壬寅)1월,慈旨를 矯誣한 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康津으로 유배된 바
있는데,그 때 퇴계시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고 차운시를 남긴바 있다.

 

69) 退溪年譜 卷1,三十年辛亥(先生五十一歲):“是年,先生不仕家居(有次諸人唱酬韻十
四首).”
70) 退溪集 卷2,「閒居,次趙士敬,具景瑞,金舜擧,權景受諸人唱酬韻,十四首」其14:
“幽懷多少寄吟窓,畢竟空言不入腔,襲置無令傳衆手,人人未必便心降.”
71)앞의 시,其6:“元虜中州溷幾春,斯文猶得一番新,可憐穢德能如許,不廢山林講道人.”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67

 

도리가 송대보다 훌륭한 적이 없었으나,소인들이 득세하여 천하의 公議를
극력 배격하고 군자를 奸僞로 몰아 도학을 박해하는 풍조 때문에 도학하는
이들이 도학자라는 것을 숨겨왔는데,원대는 도리어 이런 일이 없어 선비들이
도학을 숨기지 않게 하였으니,조금은 가상히 여길 만하다고72)하였다.73)
이 시가 示唆하는 바가 무엇일까.퇴계는 당대에 벌어진 훈구척신과 신진
사림과의 대립과 갈등이 결국 사화를 불러와 도학의 발전을 크게 저해했다고
인식했다.그러나 이 대목을 무리하게 해석하여,폭압적인 정사 아래서라도
학문의 자유가 보장된다면 그런대로 괜찮다고 해선 안 된다.물론 퇴계는 자
신의 시가 그렇게 해석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오히려 惡政하에서도 학
문의 자유가 주어졌거늘 도덕적인 정부아래서는 그보다 더 나은 講道가 보장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었지 않나 싶다.그러나 아쉽게도 퇴계의 희망과
달리,퇴계사후 사림파가 내부 분열에 의해 극심한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
려 들어가 도학발전이 위축되고 말았다.
한편 퇴계의 이 작품은 만주족의 중원지배가 현실화되고 나서 실의에 빠
진 조선선비들에게 오랑캐 치하에서도 성리학의 명맥은 전수될 것이라는 믿
음을 갖게 했다.시에서 말한 元이 淸으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그래서 원대와 같이 청대에도 도학을 강론하는 이들이 필시 남아있을
것이라 하여 북경에 가서 퇴계시대에 널리 유포되었으나 稀覯本이 된 性理

諸家解 ․ 皇極經世書釋義 ․ 天原發微 이라든가 청대의 주자학자였던 黃越
의 四書或問語類大全合證 과 李霈霖의 四書朱子異同條辨 등을 사들이고자
열을 올렸던 것이다.74)

 

72) 앞의 시,尾注:“三代以下,國家待士之道,莫善於宋,然小人得志者,力戰天下之公議,
指君子爲奸僞,斥逐排擯,使之不容於世.唯元朝,卻無此事,使士不諱道學,差可尙耳.”
73) 星湖僿說 卷17,人事門,「不諱道學」; 星湖全集 卷30,「答權旣明」(庚辰)別紙을
참조.
74) 靜觀齋集 卷10,「與南雲卿(龍翼)」(丙午):“其時此三書,流布東方,而今則絶無,弟於
268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3. 山水遊覽型酬唱詩

 

퇴계는 일찍이 사신에 임명되어 북경으로 가는 벗에게 “어찌 다만 장쾌하
게 놀고 의기만 드높일 것인가/즐거워라,수창시가 음률에도 아주 잘 맞으
리니.”라75) 했고,黃俊良이 宋寅과 함께 가야산을 유람하고 수창시를 많이
남겼는데,보여주지 않자 매우 섭섭하다고76) 말했으며,또한 文峯鄭惟一
(1533~1576)이 청량산을 유람하고 나서 수창시를 보내오지 않자 “청량산
신선 구경이 마침 단풍이 흐드러질 무렵에 이루어졌으니 그 농욱한 흥취를
상상할 만합니다.다만 수창시를 아끼시고,멀리 있는 이에게 보여서 속세의
울울함을 씻어주지 않으시니,정말 섭섭합니다.”라고77) 아쉬움을 표한 바 있
다.한편 松巖權好文(1532~1587)에게 보낸 글에서는 “내가 지난해 입산했
을 때 진실로 즐거운 바가 있었는데,병든 몸을 돌보지 않고 지나치게 위험
한 길을 다니다가 병이 나서 바로 나왔지만 남은 회포가 여전하였소.그런데
그대의 遊山으로 인해 더욱 감흥이 생겨나 시로 표현하고자 했지만 병으로
죄다 화운하지는 못하고,율시 4수를 별폭에 기록하였으니,그대가 살펴보면
아마도 나의 감흥을 알 수 있을 것이오.”라고78)하여,수창시를 통한 유람의

 

年來,廣加搜問,堇得天原一書,而亦未准秩.頃以此請於靑平都尉之行,而未得購來,兄
於此行,如不欲以燕市一物浼於橐中則已,若未免購書以來,則幸須留意於此也.…… 若
此性理之學,則自有所不與此而俱晦者焉,觀於退陶先生詩,可知也.安知今日講道於山林
者, 又有如金仁山․許白雲․程林隱鮑魯齋諸人也耶.”; 芝村集 卷19, 「別判敦寧閔靜
能赴燕序」:“昔在丙午壺谷南尙書之使北京也,先君子請購天原發微,性理諸家解,皇極經
世釋義三書,仍引退溪先生…… 噫,自丙午至今日,亦幾半百年矣,神州之陸沉依舊,志
士之痛,可勝言哉.近見一二書冊,來自彼中,或名四書或問語類大全合證,或名四書朱子
異同條辨,一爲黃氏越所編,一爲李氏霈霖所著,其人似方在世,觀其學又皆篤信朱子,而
李尤不草草,雖置之仁山白雲林隱魯齋之間,亦無甚愧焉.”
75) 退溪集 卷1,「奉贈圭庵宋眉叟以冬至副使赴京」:“豈但壯遊增氣義,樂哉酬唱如宮商.”
76) 退溪集 卷20,「答黃仲擧」:“伽倻酬唱,竟靳辱示,可憾.”
77) 退溪集 卷27,「答鄭子中」:“淸涼仙賞,適在爛楓之時,濃興可想,但靳惜酬唱,不以遠
示,洗此塵鬱,爲可憾耳.”
78) 退溪集 卷37,「答權章仲好文」(丙辰):“吾去年入山,固亦有所樂,而病不自量,太涉危
險,發病而徑出,餘懷耿耿,今因章仲之遊,而益有感焉,欲以詩發之,而病不能盡和,律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69

 


감흥을 공유하고자 애썼다.이렇게 퇴계는 산수유람의 흥취를 담은 수창시
감상에 탐닉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왜 산행에 수창시 창작을 수반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퇴계는 산수를 유
람할 때 전인의 유람기를 참고했다. 소백산에 오를 때는 愼齋周世鵬
(1495~1554)의 遊山錄을 白雲洞書院(紹修書院)의 有司로 있던 金仲文의 처
소에서 얻어 보고 석륜사에 이르러 판각되어 벽에 걸려있는 유산록을 다시
읽어 보기도 했다.이르는 곳마다 주세붕의 유록과 수창시를 펼쳐서 읊조렸
다.주세붕의 시문을 읊조릴 때마다 마치 紅顔白髮한 노인(주세붕)과 대화하
며 서로 수창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퇴계는 마침내 유산록과 수창시의 소
중함을 깨달았다.수창시를 읊다보면 흥이 일어 유산의 멋을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수창시가 산수유람의 ‘興趣’를 고조시켜주는 작용을 한다고 믿은
것이다.그래서 퇴계는 산수유람하는 이는 반드시 유록이나 수창시를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다.79)이러한 생각에 따라 퇴계는 단양과 풍기군수를 지내면서
유람할만한 곳을 골라 직접 산행이나 뱃놀이를 체험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
다.특히 도산과 청량산,그리고 낙동강 상류의 수계를 타고 이어진 자연풍
광과 관련한 수창시를 많이 지었다.
그 중 청량산 紫霄峯아래 蓮花峯동편에 있던 사찰,蓮臺寺에서 지은 작
품은 인상적이다.시를 보면,“연대사 맑고 깨끗한 경계/온 산이 얼굴을 맞
댄 형상/울굿불굿한 단청이 환하여 더욱 새롭고 /불상은 어찌 그리도 기이
하고 화려한지/살고 있는 중이 알던 모르던/그저 수고롭게 맞으러 번갈아
찾아오네/누대 위에서 일어나 바람을 피하다가/강당 앞에 죽 이어서 둘러
앉았네/함께 유람하는 이 모두 재주가 뛰어나고/일찍 당도한 이들도 훌륭한

 

詩四首,錄在別幅,章仲覽之,其可以知吾之感也夫.”
79) 退溪集 卷41,「遊小白山錄」:“余初得景遊遊山錄於白雲院有司金仲文處,及到石崙,則
是錄也書于板掛壁矣.余賞其詩文之雄拔,到處披詠,若與紅顔白髮翁,對語相酬唱於其間,
賴此發興而得趣者良多.信乎遊山者不可以無錄,而有錄之有益於遊山也.”
270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분들이라/술병을 기울여 돌려가며 조금씩 마시더니/가슴 열고 宏論을 펼치
네/말이 서로 들쭉날쭉해도 번거롭게 여기지 않고/우연히 만났어도 깊이
마음을 통하네/어찌 서로 시로 수창하지 아니하랴/본디 주자가 남악에서
수창한 적도 있거늘 /늙은 내가 감히 먼저 시를 지어보일 터이니/여러분이
훌륭한 시를 지어 화답해 주시오.”라고80)했다.
1564년(갑자)4월,퇴계는 李文樑,琴輔,琴蘭秀,金富儀,金富倫,權慶
龍,金士元,柳仲淹,柳雲龍,李德弘,南致利등 문생 그리고 조카 李㝯,손자
李安道와 함께 청량산을 유람했다.당초에는 예안현감 곽황 및 趙穆,琴應夾
이 참가하기로 약속을 했으나 이르지 않았다.81) 퇴계의 문집 권3에 수록된
「여러분과 청량산 유람을 약속하고 말위에서 짓다」라는 작품에서부터 「金慎
仲의 시에 차운하다」라는 작품까지82) 총17제 19수는 모두 이때 수창한 것
이다.83)

 

「연대사」는 수창에서 唱에 해당하는 시이다.이 시를 원운으로 해서 다른
문생들의 차운이 이어진다.84)퇴계의 「연대사」전체 18구는 세 부분으로 구
성된다.앞 6구는 도입부로 연대사 정경을 묘사했다.청정도량 연대사의 지
세,불당과 불상의 아름다움,승려들의 마중이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레 포치
되었다.중간 6구는 연대사에 도착한 퇴계 일행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그려졌
다.연대에 올라 바람을 쐬고 스승과 제자가 함께 강당에 나란히 앉아 조촐

 

80) 退溪集 卷3,「蓮臺寺 :“蓮臺淸淨界,一山當面勢,金碧煥增新,象敎何詭麗,居僧知不
知,迎勞來更遞,臺上起避風,堂前坐接袂,同遊盡英英,曾到亦濟濟,傾壺細酌傳,開抱宏
論揭,參差不厭煩,邂逅或深契,那無唱與酬,前賢固有例,老我敢先挑,佇看諸盛製.”
81)앞의 시 尾注:“時余與永陽李大成,鳳城琴士任,琴聞遠,光山金愼仲,金惇敍,永嘉權施
伯,金景龐,豐山柳景文,柳而得,永陽李宏仲,英陽南成仲同遊,滉姪㝯,孫安道從.禮
安宰苞山郭景靜及橫城趙士敬,鳳城琴夾之,期而不至.”
82) 退溪集 卷3,「約與諸人遊淸涼山,馬上作」;「次韻愼仲」(時愼仲諸人,寓金生庵).
83) 退溪年譜 卷2,「四十三年甲子」(先生六十四歲);“四月,與諸生遊淸涼山(有遊山諸作).”
84) 艮齋集 卷1,「淸凉蓮臺寺,次退溪先生韻,以示諸丈」(甲子);鄭士誠(1545~1607), 芝軒集 卷1,「謹次退溪先生蓮臺寺韻」.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71

 

한 술자리를 베풀고 담론하는 모습을 정답게 보여주면서도 문생들의 재능을
치켜세우는 미덕을 잊지 않았다.끝 6구는 보다 깊은 마음의 소통을 위해 수
창을 권면하는 대목이다.서로 자유로운 담론을 통해 우연히 만났지만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었으니,마치 주자가 두 문인과 남악을 유람하고 수창시를
남겼던 것과 같이 유람과 교유의 감흥을 서로 시에 담아 공유해보자고 권했다.

 

4. 自問自答型酬唱詩

 

자문자답형은 흔치 않은 수창유형이다.수창의 상대가 사람이 아니고 국
화나 매화와 같은 무정물이어서 스스로 묻고 무정물을 대신하여 스스로 답하
는 형식이다.흔한 표현을 빌자면,무정물의 의인화가 이루어진 시이다.
먼저 국화와 문답한 작품을 소개한다.퇴계의 국화문답시는 문생인 秋淵
禹性傳(1542~1593)에게서 비롯되었다.우성전이 먼저 국화문답시를 지어
퇴계에게 보내자,퇴계가 “‘국화문답시’는 한 때 느낌 붙인 뜻을 알 만합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멀리서 생각하고 나태함을 흥기시킵니다.다만 서로 통해
다니지 못해 수창왕복하기에 어려움이 있으니 장차 훗날을 기다릴 뿐입니다.”
라고85)하여,화답시를 짓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그래서 지어진 것이 우성
전의 시에 차운한 국화문답시 6수이다.
퇴계가 국화에게 묻기를 “사물의 성정이 옮겨지는 것을 늘 싫어하거늘/
좋은 것 얼마 없고 나쁜 것만 자꾸 많아지네/어째서 뜰에 가득 피어난 국화
송이들이/반쯤 쑥대가 되었다 시들어 가나.”86)라고 하자,국화가 답하기를
“타고난 황색을 내 어찌 옮길까/초췌해도 비 이슬을 받으면 번성하고요/바

 

85) 退溪集 卷32,「答禹景善」:“菊問答詩,可見一時寓感之意,令人遐想起懦,只緣地禁,
有難於酬唱往復,且竢後耳.”
86) 退溪集 卷5,續內集,「次韻禹景善菊問答,六首」,問菊其1:“常嫌物性有遷移,美者
無幾惡轉滋,豈謂滿庭霜下傑,半成蓬艾亦離支.”
272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람 서리 가득한 세 오솔길에서/도연명을 기다리며 굳세게 버틴다오.”87)라고
한다.퇴계는 타락해가는 말세의 국화를 보고 절망에 빠진다.그러나 국화는 절
망하지 말라며 말세에도 시들지 않고 본심을 지키는 국화도 있다고 항변한다.
다시 퇴계가 “올 여름 장마에 땅이 힘을 못 쓰자/황국이 꽃 피우지 못한
채 시들해지네/그래도 황색 찬란한 작은 떨기가 남아서/향기를 풍기니 시
든 국화를 부끄러워해서라.”88)라고 하자,국화는 “무슨 일로 세상이 분분히
변해 가는가/이럴 때 곧은 국화가 간절히 그립다네/말하노라,굴원이여 탄
식하지 마소라/남은 꽃으로도 충분히 그대와 기약할 수 있다오.”89)하고 답
한다.퇴계는 험난한 세파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남은 국화의 모습을 그렸
다.국화는 험난한 시대일수록 마음 변치 않는 곧은 인물은 남아있게 마련이
니 너무 낙담하지 말라고 이른다.국화를 사랑한 도연명과 굴원은 모두 절망
한 시대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간 이들이다.따라서 퇴계가
그들을 국화의 화신으로 등장시킨 이유도 자명하다.이렇듯 국화와 같이 곧
고 굳센 인물이 필요한 시대를 퇴계는 살았다.
마지막 대화가 이어진다.퇴계가 “서리 내린 동산에서 날마다 찾았더니/
아직도 그 때의 깊은 흥취 떠오른다네/푸른 잎 금빛 국화 두어 떨기도 남지
않았으니/어디에서 술 마시며 늦가을을 즐겨볼까.”90)하니,국화가 말하기를
“다른 꽃 잡초에 묻혀 찾기가 어려운데/금빛 꽃이 변화하니 너무도 이상하
네/조용히 天理를 따르면 크게 길한 법이거늘/잘못 알고 요사스런 빛깔로
계절을 현혹하는구나.”91)라 한다.국화에게도 황금빛이 찬란했던 시절이 있

 

87) 退溪集 卷5,續內集,「次韻禹景善菊問答,六首」,菊答其1:“坤黃天賦我何移,憔悴
猶承雨露滋,滿地風霜三徑裏,陶翁相待好橕支.”
88)앞의 시,問菊其2:“今年夏潦坤成痺,黃菊渝貞欲入時,尙有小叢依舊色,含芳無乃恥同期.”
89)앞의 시,菊答其2:“紛紛受變知何事,漠漠懷貞向此時,爲報靈均休歎息,殘芳猶足與君期.”
90)앞의 시,問菊其3:“東園霜露日幽尋,尙憶從前趣興深,不有數叢金間綠,一尊何處玩餘陰.”
91)앞의 시,菊答其3:“衆芳蕪沒已難尋,變到金英怪亦深,不信黃裳元自吉,枉將妖氣眩晴陰.”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73

 

었다.퇴계는 그 시절을 잊지 못한다.그러나 늦가을이 다가오자 그 때의 국
화를 만나보기 어려웠다.국화의 상실,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세도를 지탱
시켜 줄 인물의 부재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또다시 퇴계의 눈빛은 힘을 잃
고 국화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하고 고민한다.그렇지만 국화는 말한
다.국화도 시절을 이길 수 없으니 때가 되면 자연법칙에 따라 자취를 감추
는 것이 마땅하다고.그렇지 않고 꼼수를 부려 요상한 빛깔을 내면서 세상을
현혹시켜서는 안 된다고.한편으로 사이비 국화의 출현을 경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국화에 현혹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이처럼 국화문답시는 어려운 시절을 살아야 했던 퇴계의 고민이 傲霜孤節
하는 국화라는 형상을 통해 잘 표출된 작품이다.이어서 매화문답시를 살펴
본다.
퇴계는 굴원의 離騷 만이 아니라 도연명의 「歸去來辭」에 나오는 세 갈래
오솔길(三徑)에도 매화가 빠진 것을 매우 유감으로 여겼다.그래서 “도연명의
동산은 솔ㆍ국화ㆍ대 세 가지라/매화는 어찌하여 그 속에 못 들었나/내
이제 매화를 넣어 만년의 벗으로 삼으리니/굳은 절개,맑은 향기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라오.”라고92) 하여,도산서당에 節友社를 조성하면서 특별히 매
화를 ‘절우’의 하나로 삼았던 것이다.그런가 하면,임종하기 전까지 침상에
누워있는 퇴계의 곁을 지킨 것은 한 분의 梅兄,盆梅였다.93) 퇴계는 병세가
위중해져 자리에다 설사를 하게 되자 “매형에게 불결할 터라.마음이 편치 않
다.”고 하여,곁에 있던 분매를 다른 곳으로 옮기게 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분매에 물을 주라는 명하고94)는 그만 눈을 감았다.퇴계의 매화사랑이 얼마

 


92) 退溪集 卷3,「陶山雜詠幷記」,十八絶(七言),節友社:“松菊陶園與竹三,梅兄胡奈不
同參,我今倂作風霜契,苦節淸芬儘飽諳.”
93)權好文(1532~87), 松巖別集 卷2,「祭退陶先生文」:“臥床何伴,盆梅一枚.”
94) 艮齋集 卷6,「溪山記善錄下」,‘臨終之命’:“先生庚午十二月初三日,泄痢於寢房,盆梅
在其傍,命移于他處曰,於梅兄不潔,故心未自安耳.初八日朝,命灌盆梅.”
274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나 깊었는지 웅변하는 듯하다.95)

 

1566년(丙寅)2월,퇴계는 조정의 召命을 받자 사직소를 올리고 辭免되
기를 빌며 醴泉객관에 머물러 있었다.그런데 다시 공조판서로 陞拜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이때 퇴계는 정유일의 편지를 받고 진퇴의 어려움에 더욱
탄식하여 예천 동헌에서 시를 지어 뜨락에 있는 매화와 문답했다.
먼저 퇴계가 “외롭게 홀로 피는 매화에겐 외로운 산이 제격인데/무슨 일
로 예천군 채마밭으로 옮겨졌나/결국은 스스로 명예 때문에 잘못되었을 터
이니/늙은 내가 명예로 인해 시달린다고 깔보지 마소라.”96)하니,매화가 답
하기를,“나는 관가 채마밭서 외로운 산을 생각하고/그대는 객관에서 잠자며
고향산천을 꿈꾸겠지/그대와 한번 웃고 만난 것도 하늘의 뜻이러니/굳이
임포마냥 사립문에 仙鶴을 함께 할 것 없구려.”97)라 한다.퇴계는 매화가 고
산에 있지 않고 예천군 동헌 뜰에 있게 된 것과 자신이 지금 진퇴로 고민하
는 까닭이 모두 명예에 있다고 본다.매화는 퇴계의 고민을 진작 알고 있었
다.자신이 고산에 있어야 하듯이 퇴계 역시 산림에 있어야 한다고 하여,퇴
계에게 은근하게 벼슬에 나가지 않고 산림에 은거하라고 권하고 있다.
퇴계는 한 달 뒤인 3월에 마침내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도산
의 매화를 찾는다.그 때 마침 도산 매화가 막 피어나기 시작하였다.이때
다시 매화문답시를 짓는다.먼저 “묻노니 산중의 두 옥 같은 신선이여/어찌
타 백화가 만발하는 시절까지 남아 있나/예천 객관에서 만난 것과는 다른
듯한데/추위를 무시하고 웃으며 나를 반겨주는구려.”98)라고 눈길을 건네는

 

95) 星湖僿說 卷5,「萬物門」,梅花不入騷를 참조.
96) 退溪集 卷4,「得鄭子中書,益歎進退之難,吟問庭梅」(書言陞拜事):“梅花孤絶稱孤山,
底事移來郡圃間,畢竟自爲名所誤,莫欺吾老困名關.”
97) 退溪集 卷4,「代梅花答」:“我從官圃憶孤山,君夢雲溪客枕間,一笑相逢天所借,不須
仙鶴共柴關.”
98) 退溪集 卷4,「陶山訪梅」:“爲問山中兩玉仙,留春何到百花天,相逢不似襄陽館,一笑
凌寒向我前.”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75

 

것으로 도산 매화와 반가운 만남을 기렸다.매화가 답하기를,“내가 임포의
모습을 바꾸어 환생한 신선이라면/그대는 요동 하늘로 내려온 돌아온 학과
같구려/서로 만나 한번 웃는 것은 하늘도 허락한 일/예천의 일을 가지고
앞뒤 사정을 비교하지 마소.”99)라 했다.매화와 퇴계가 도산이라는 공간에서
만나 하나가 됨을 본다.모두가 제 자리를 찾았기 때문이다.그러니 고민스
레 문답했던 예천의 매화와 비교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陶山매화와 문답한 지 몇 년 뒤인 1569년(己巳)3월경,퇴계는 서울 집
에 있으면서 분매를 얻어 늘 가까이에 두고 지내다가 장차 고향으로 돌아가
게 되자,문답시를 지어 작별을 대신했다.
이별하며 말하기를 “처량한 서울 살이에 문득 梅仙이 생겨 짝해주니/객
창이 한층 멋들어져 꿈속에서도 향기를 풍겼다네/아쉽게도 고향길에 그대를
끌고 가지 못하니/먼지 많은 서울이지만 아름다움을 고이 간직하게나.”100)
라고 하니,매화가 답하기를 “듣자니 도산의 매화도 우리처럼 처량했었다는데
/그대가 돌아오길 기다려 진한 향기를 내 뿜으리라/원컨대 그대와 다시 만
나든 서로 그리워하든/옥설 같은 청진함을 모두 잘 간직하세나.”라고101)한
다.서울매화의 역지사지하는 마음씨가 너무나 곱다.마치 사랑하는 두 연인
이 작별을 아쉬워하는 정경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표현이 애틋하다.문답시
를 읽다보면 퇴계가 매화인지 매화가 퇴계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감이입
이 자연스럽다.‘옥설같은 청진함’이야말로 매화를 매화답게 하는 본질속성이
거니와 퇴계가 그토록 매화를 사랑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99) 退溪集 卷4,「代梅花答」:“我是逋仙換骨仙,君如歸鶴下遼天,相看一笑天應許,莫把
襄陽較後前.”
100) 退溪集 卷5,續內集,「漢城寓舍,盆梅贈答」:“頓荷梅仙伴我涼,客窓蕭灑夢魂香,東
歸恨未携君去,京洛塵中好艷藏.”
101) 退溪集 卷5,續內集,「盆梅答」:“聞說陶仙我輩涼,待公歸去發天香,願公相對相思
處,玉雪淸眞共善藏.”
276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퇴계는 이윽고 사직을 허락받고 고향으로 내려와 다시 도산매화를 찾아
대화를 나눈다.도산 매화가 주인에게 인사하기를 “총애,광영,명성,이록
따위는 그대에게 당치도 않은 일이건만/늙도록 벼슬길에 나가 벌써 한 해
가 지났구려/이제 고향으로 물러나도록 임금님께 허락을 받은 것도 다행인
데/게다가 내가 꽃 피울 봄철에 맞추어 오시다니.”라고102) 하자,주인이 답
하기를 “그대에게 음식 간 맞추는 조미료는 어울리지 않나니/내 그대의 맑
은 향을 너무 사랑하여 시를 지어 사모했지/이제는 내가 달려와 약속을 지
킬 수 있으니/응당 내가 좋은 시절 저버렸다 혐의하지 마시라.”고103)한다.
퇴계와 도산 매화의 화해가 이루어졌다.이젠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는 일
이 없을 터이니 서로 오해할 일도 생기지 않을 터이다.이후 퇴계는 서울로
올라가는 일 없이 도산에 머무르다 세상을 마쳤다.그리하여 매화와 맺은 약
속을 지킨 것이다.104)

 

퇴계의 매화문답시는 후대 문인들에게 애송되어,金壽增,金昌翕,趙德鄰,
李東汲같은 이들은 그 체제를 모방하여 문답시를 짓기도 했다.105)

 

102) 退溪集 卷5,續內集,「季春,至陶山,山梅贈答,二首」梅贈主:“寵榮聲利豈君宜,
白首趨塵隔歲思,此日幸蒙天許退,況來當我發春時.”
103)앞의 시,主答:“非緣和鼎得君宜,酷愛淸芬自詠思,今我已能來赴約,不應嫌我負明時.”
104)金榮淑은 「退溪의 六友詩類型에 따른 詩的形象과 그 의미」(2007);이정화,「퇴계
이황의 매화시 연구」(2008)를 참조.특히 이정화는 박사논문 退溪詩硏究 (2003)
에서 매화와 국화를 시적 대상으로 한 작품을 화답시의 범주에 넣어 언급했는데,퇴
계가 만년에 매화,국화로 표상되는 자연물과 합일하여 교감을 나누는 경지까지 그
시적 정서가 발전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105)金壽增(1624~1701), 谷雲集 卷1,「石室盆梅,蓓蕾正姸,病臥曉起,偶記退溪梅花
問答詩,遂效其體戲賦」;金昌翕(1653~1722), 三淵集 卷4,「伏次伯父梅花問答詩
韻」;趙德鄰(1658~1737), 玉川集 卷2, 「盆梅問答二絶」;李東汲(1738~
1811), 晩覺齋集 卷1,「梅花問答二首」.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77

 

Ⅳ.退溪酬唱詩의 敎學意義
퇴계는 만 섬이나 되는 愁情을 풀자면 한가로운 가운데 시를 통해 陶寫하
는 방법밖에 없다고 하면서106) 가슴속 미묘한 부분을 참답게 그려내는 문장
을 자잘한 기예라 여겨 비웃지 말라고107)했다.
사람마다 간직한 愁情이나 흉중의 妙處는 당자가 말로 표현하지 않는 한
알 수가 없다.그래서 퇴계는 시문이 필요하다고 여겼다.그 가운데서도 수
창을 더욱 강조했다.왕복수창이 古人들의 切偲輔仁하는 도리에서 본다면 이
미 말단의 일에 속할지는 모르지만 또한 輸情寫意하고 諷喩感發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에 고인들도 즐겼다고 한다.108)퇴계는 수창이 마음과 생각을 묘사
하여 전달하고 풍자하고 비유하여 감발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믿었다.또한
양인 간의 수창은 서로의 修養을 위해서도 절실하다고 했다.그래서 퇴계는
늙은 나이에 젊은 문생들과 수창하는 것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과의 수창이 자신의 頹落한 마음을 일으켜주기 때문이다.109)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창하는 일을 대수롭게 여겨 아예 그만두려는 이들이
많아져 갔다.절친했던 林億齡이나 金彦琚는 본시 수창을 좋아했기에 단박 그
만두지는 못했지만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한 때 퇴계도 수창하기를
주저했고 아애 그만둘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110)그러나 퇴계는 수

 

106) 退溪別集 卷1,「又次韻答松岡」:“萬斛愁情誰解得,閒中陶寫只憑詩.”
107) 退溪續集 卷2,「復用前韻」:“莫笑文章爲小技,胸中妙處狀來眞.”
108) 退溪續集 卷4,「與黃仲擧」:“酬唱往復,自古人切偲輔仁之道觀之,已爲末事,而猶有
輸情寫意,諷喩感發之快,故古人樂之.”
109) 退溪集 卷4,「次韻,答趙士敬,二絶」:“兩君酬唱切交修,起我頹心老不羞.”
110) 退溪續集 卷4,「與黃仲擧」:“今則幷與此一事,斂手相戒而欲廢之,可嘆,然豈盡然
乎,林大樹(億齡)金季珍(彦琚,答尙牧金季珍,光州人,號風詠亭,登第,官判校)輩好
之,不能頓廢,但畏之之心多也,松岡扣之則答,武陵扣之,亦不應,此可笑,亦可悶,僕
亦漸畏而漸廢之,時不能呑而復出之,近有與大樹往復數詩,倦未及寫呈耳,大槩時習如
是,故前來佳篇,尙未播也”
278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창을 끝내 그만 둘 수 없었다.수창의 교학적 효능을 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
이다.한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1565년(乙丑)겨울 어느 날 趙穆이 퇴계의 처소로 찾아들었다.그 자리
에 이미 동문인 金明一․金誠一․禹性傳등이 와 있었다.함께 心經 과 大
學章句 를 질문하고 토론했다.그런데 서로 견해가 다른 부분이 더러 있었다.
조목은 그 때의 느낌을 시에 담아 퇴계에게 부쳤다.시에서 “낙천 상류 영지
산 아래로 큰 스승을 찾아뵈오니/벗들이 한 방에 앉아서 온갖 의문을 분석
하네/강마을 십리 길을 돌아오자니/잘 새들이 스스로 알고 풀숲을 찾아드
네.”라고111)했는데,이듬해인 1566년(丙寅)퇴계가 화답시를 보내어,“학맥
이 단절되었으니 지금 사람에게 어찌 스승이 있을까/마음을 비우고 이치를
살핀다면 의문이 풀리리라/바람을 빌어 숲으로 돌아가는 새에게 감사의 뜻
을 부치노니/다만 저절로 때를 알 뿐 억지로 알 수는 없는 것이네.”라고112)
했다.퇴계는 함께 보낸 편지에서 “찬찬히 그대의 시를 살펴보니,요즈음 크
게 진보하여 취미를 얻은 것 같아 기쁘지만,그 사이에 誇逞矜負自喜하는 태
도가 없지 않고,謙虛斂退溫厚한 생각이 적으니,만일 이와 같이 하기를 그만
두지 않는다면 마침내 進德修業의 실제에 방해가 있지 않을까 하오.”라고 하
여,조목의 시에서 조목의 나쁜 기질을 읽어내었다.
특히 퇴계는 “강마을 십리 길을 돌아오자니/잘 새들이 스스로 알고 풀숲
을 찾아드네.”라는 구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왜냐하면 조목의 시가 경전을
강론하는 자리에서 남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곳을 자기만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시에서 ‘스스로 알고(自知)’라는 표현을 퇴계는 매우 불손하

 

111) 月川集 卷1,「乙丑冬,謁先生于退溪,金彦純(明一)․士純(誠一)․禹景善(性傳)在
焉.辨質心經․大學章句.或有未契」:“水北山南謁大師,群朋一室析千疑,歸來十里江
村路,宿鳥趨林只自知.”
112) 退溪續集 卷2,「次韻趙士敬」:“學絶今人豈有師,虛心看理庶明疑,因風寄謝趨林鳥,
只自知時莫强知.”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79

 

다고 느낀 것이다.퇴계는 평소에 수창시의 의경을 판단함에 있어서 詩人趣
味,곧 文人騷客의 懷抱에서113) 나왔는가 아니면 儒者의 學問意思나 學問義
理에서 나왔는가를 엄격히 따지려 했다.114)물론 퇴계는 유가 성리학을 전공
하는 입장에 서있었기에 학문의사나 학문의리를 중심에 놓고 문예를 바라보
고 평가하는 관점이 우세했다.115)따라서 조목의 시가 시인취미에서 볼 때는
매우 뜻을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학문의사에서 보면 큰 결함이 드러나게 마
련이었다.116)

 

그래서 퇴계는 “그대가 지난날 안다고 자부한 것이 너무 조급한 생각이
아니었나 싶소.그래서 내가 그대의 시에 차운하여 참람하게 云云한 대목이
있는데,어떨지 모르겠소.”라고 했다.‘참람하게 운운한 대목’이란 바로 “다만
저절로 때를 알 뿐 억지로 알 수는 없는 것이네.”라고117) 한 구절을 말한다.

 

113) 退溪集 卷22,「答李剛而」:“臨淸一記,…… 只似從文人騷客懷抱中來,略無有儒者
學問義理一段氣象,則爲梅溪之作,決矣.”
114)朴長遠(1612~71), 久堂集 卷18,「箚錄上」:“趙士敬詩曰,歸來十里江村路,宿鳥
趨林只自知云云,退翁以爲以詩人趣味論之,亦甚得意,然以學問意思看來,正恐病處在
此句上,何者,以其太早計也云.詳味此語,警省多矣.”
115)이러한 퇴계의 비평관점은 후대의 大山李象靖에 와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이상정
은 이태백의 시와 주자의 무이구곡시를 동일한 관점에서 보려는 시도를 비판한 바
있는데 그 때도 ‘學問意思’를 중심에 놓고 논했다.李象靖(1710~81), 大山集 卷
7,「答權孟堅」(辛未):“大抵李白詩,自是對景寓興,以道其蕭散閒寂之致,而今借轉來,
以爲吾學深造自得之妙, 與九曲之亂, 同其趣味, 正如詩家所謂斷章取義者, 依以諷玩,
亦覺有味,然恐或近於牽彊帶累,反害夫超然自在之趣也.…… 此亦但言遊觀一段事耳.
然其意味深遠,反以求之學問意思, 亦可以爲竿頭進步升堂入室者之諭,此自是讀詩者諷
玩自得之餘味耳,詩中初未有此意也.李白之詩,天趣超然,自是詩人得意之作.然頗有
夸肆自多之意,苦淡閴寂之思,以學問意思看來,將自家所占地位,自謂高妙,不肯說與
人,把弄眼前光景,作天地外別樣奇特事,此正是禪家自私之見,無用之學,恐與先生深
造自得善與人同之妙,不可同日論也.”
116) 退溪集 卷23,「與趙士敬」:“細看公詩,近覺有長進得趣味,可喜,但其間,不無有誇
逞矜負自喜之態,而少謙虛斂退溫厚之意,恐如此不已,終或有妨於進德修業之實也.其
首章歸來十里江村路,宿鳥趨林只自知,此一句,正是公所以自言其超然獨得於人不及知
處,以詩人趣味論之,亦甚得意,然以學問意思看來,正恐病處在此句上,何者,以其太早
計也.”
280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즉 학문이란 자득하게 되는 때가 있는데,부단히 노력하다 보면 그 때가 오
는 것이지,억지로 이 때다하고 경솔히 판단하고 자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조목이 한 것처럼 조금 터득한 것이 있다고 자기가 최고인양 스스로 큰
체만 하고 더 이상의 향상공부를 해나가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낭패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다.
藥圃鄭琢이나 松巖權好文에게도 이러한 詩敎,일종의 문학을 통한 교육
이 베풀어졌는데,118) 더 이상의 詳論은 피한다.이렇게 퇴계는 교학의 도상
에서 수창시를 통해 상대의 성정을 가늠하여 편지를 통해 자신이 분석․비평
한 내용을 알리고,다시 그 뜻을 압축하여 화답시에 담아 전달함으로써 교육
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식을 즐겨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Ⅴ.맺음말
뛰어난 인물과 인연을 맺음으로 인해 무명의 지대(공간)가 세상에 알려져
전보다 더 귀중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있다.후대인들에게 그러한 작용을 했

 

117)앞의 글:“公前日之負自知,無乃太早乎,故拙句僭有云云,不知何如.”
118) 退溪集 卷35,「與鄭子精(琢)」(丙寅):“就中盛製行錄,固善,其與柳君唱酬諸作,波
瀾浩汗,亦甚佳好.然鄙意猶有所可慮者.夫詩雖末技,本於性情,有體有格,誠不可易而
爲之.君惟以誇多鬭靡,逞氣爭勝爲尙,言或至於放誕,義或至於厖雜,一切不問,而信口
信筆,胡亂寫去,雖取快於一時,恐難傳於萬世.況以此等事爲能,而習熟不已,尤有妨於
謹出言收放心之道,切宜戒之.”; 退溪續集 卷6,「與權章仲」:“寄來百韻詩,…… 學
而至此,亦可謂不易,然細看之,其病亦不少, 言必欲長,故支蔓而駁雜,韻必欲滿,故
牽强而剩衍,用事或當或否,屬對或的或贅,與其務多而駁雜,孰若辭約而精當乎,與其
長驅而屢躓,孰若循軌而獨至乎.往年,見所作論數篇,知弊病在此,嘗苦口告之,其不見
省耶.此詩好語甚多,非論比,但被間間蔓辭贅句壞累他,所以幷好處亦不好,是爲可惜.
以爾之氣質恬靜,學問篤切,宜無此弊,不知何故,胸中容得許多草木叢雜,不能以時芟
剔淨盡耶.如此不改,非唯於吾儒學問路脈甚遠,亦恐文章家爐錘,亦不堪當得,非唯文
章家,下至塲屋文字,亦不可以此手段求之,如何如何.”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81

 

던 인물을 들라면,조선 이전에는 고운 최치원이 으뜸이요 조선이후에는 물
론 퇴계 이황이 단연 돋보인다.119) 후인들은 당대 혹은 후대에 새겨진 암벽
의 글자,누정에 걸려 있는 기문이나 시편,그리고 판각 인쇄되어 유행하는
시문집을 통하여,퇴계가 남긴 발자취를 회상하고 추억한다.
수많은 선비들이 예안 용두산 新巖에 가면 퇴계가 읊은 6수를120)찾아보
고,121) 상주의 觀水樓에 오를 때면 퇴계가 지은 관수루시를122) 떠올리
며,123) 충청도 鎭川객사에 이르면 퇴계가 흉년에 백성 구제하는 救荒摘奸御
史로 내려왔을 때 썼던 작품을124) 회상하면서125) 큰 소리를 내어 敬誦하는
것을 千古의 一快事로 여겼다.이렇듯 因物懷人하는 사대부 풍류는 퇴계의 시

 

119) 柳根(1549~1627), 西坰詩集 卷1, 「讀退溪先生詩」:“先生詩留壁, 再拜一瓣香,
因人地增重,讀之牙顂涼,…….”
120) 退溪集 卷4,「三月初八日,獨遊新巖,六絶」.
121) 鶴沙集 卷2,「退溪先生嘗獨訪新巖泉石,有六絶,余與士友五十餘人尋遺躅,囑諸益各
次一絶」; 鶴沙集 卷5,「書新巖仙會錄後」:“在昔隆慶丁卯春,我退陶先生,嘗匹馬獨
遊于宣城龍頭山之新巖洞,有手書絶句詩六篇,今百有餘年,上年夏,余與遠近士友,會于
新巖,相與仰高山俯淸流讀遺詩,慨然想慕乎百載之下,而芳塵剩馥,宛然如昨日,令人徘
徊瞻眺,竟夕而忘歸,蓋秉彝好德之良心,人所固有也,噫,山水固可樂,況帶先賢遺躅
乎,先賢遺躅固可敬,況我老先生遺躅之在此淸境者乎,今吾輩此會,豈非千古一快歟.旣
歸,題名于小冊子,各次先生六詩中首篇,竝錄其下,而繼書三賢士記文,以爲居閒處獨展
觀寓懷之資云.”; 寓軒集 卷6, 「新巖會賞錄序」:“新巖固稱絶勝, 況有老先生遺躅在
焉,宜爲後人尙慕之地,而山阿寂寥,遊跡罕到,近因金學諭景謙氏搜奇闡幽,往來稱道,
益聞其有殊特之觀,僭欲一寓目於其間者久矣.今年夏四月,鶴沙先生會水雲老爺,曁諸
斯文偕往遊焉,遠邇聞風從者至累十人,寔是月之二十五日丁巳也.”
122) 退溪別集 卷1,「洛東觀水樓」(乙未夏護送官時).
123)柳道源(1721~91), 蘆厓集 卷3,「答金叔晦」:“迺者江山勝處,追逐好朋友,泛舟三
十里,飛登觀水樓,莊誦退陶先生詩,共唱迭和而罷,又是千古一快事.”
124) 退溪集 卷1,「鎭川東軒」.
125) 南九萬(1629~1711), 藥泉集 第一,「鎭川客舍,次韻退陶詩,幷序」:“壬寅二月,
受慶尙道賑恤御史之命,乞於去路省病親於鎭川任所,初七日到鎭縣,客舍有退陶詩一首
云,……,嘉靖壬寅春,救荒摘奸御史,議政府檢詳李滉.余前來此時,亦曾仰瞻此詩,
而只爲一諷誦而已.豈料此身所受之命,乃與昔賢相似,而歲月又適是壬寅春也,荒政固
是自古之所難能者,而乃以空疏,當此重任,不知昔賢作爲果何如,伊時施設,今則無徵,
只自奉讀遺詩,興感起慕而已,敬次其韻,以識歲月前後之相同云爾.”
282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를 차운하는 수많은 懷古型수창시집의 탄생을 촉진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안동의 선비는 퇴계가 30대 서울에서 고향편지를 받고
흐느끼며 써내려 간 5언 장편시에 감동하여 차운시를 지어 그와 비슷한 의경
을 담아 자신의 심사를 기술했는가 하면,126) 어떤 저명한 문인은 퇴계가
武夷志 를 읽고 주자의 「무이구곡도가」를 10수로 차운한 시가127)들어간 武
夷全圖병풍을 얻고자 염원하다가 그 꿈을 이루고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
고,128) 어떤 승려는 퇴계에게 받은 시를 두루마리에 고이 간직해 두었다가
만나는 사람마다 차운하도록 종용하여 續和한 이가 무려 13인에 달하게 한
경우도 있다.그 승려는 이 詩軸을 보배로 삼아 衣鉢대신 계승자에게 전했
다.그토록 퇴계의 수창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로 인식되었던 것이
다.우리의 선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의 양심에 따르는 일이요 변치
않는 天理라고 믿었다.129)
양심과 천리는 지금도 변치 않고 있다.아무리 세도가 무너지고 인정세태
가 浮薄해진다 해도 우리는 그렇게 믿고 살아가야 조금이라도 사람의 도리를
할 수 있다.선인들이 생각한 퇴계의 한시는 그래서 더욱 우리의 가슴을 설

 

126) 蘆厓集 卷1,「敬次退陶先生歲季得鄕書五言長篇,寄泰齋直次」.
127) 退溪集 卷1,「閒居讀武夷志,次九曲櫂歌韻,十首」
128) 林象德(1683~1719), 老村集 卷1,「敬和武夷櫂歌十章」(六章佚):“象德嘗於退陶
集中,見有所謂武夷志者,恨世無傳本,今年得之嶺南人,乃明朝人所編,志共四卷,其
規摹倣一統志,畫武夷全圖於卷首,……,愚伏鄭公,得之鄕人,附錄退陶續櫂歌十章,
於卷末,自爲小跋百餘言,誠希寶也.象德欲倩能書人,傳出一本,又得畫手,謀作十疊
小屛,其第一疊,畫九曲全圖,以下九疊,畫九曲各圖,每疊上面,書櫂歌本韻,以退陶
詩配之,然屛吾作也.”
129)具鳳齡(1526~86), 栢潭續集 卷2,「玉澄軸,書退溪先生詩後,幷序」:“今夏,澄又
請之甚勤,然後叩其所以傳之之義,則澄有李先生詩一絶,筆跡宛然,續之者無慮十三人.
噫.澄浮屠之老者耳,其徒之相受授,不過一衣一鉢而止耳,彼之不求於彼,而必以此詩
爲篋中寶,欲永永相傳,可謂知所寶,而異乎人之所寶者矣,鳳凰芝草,賢愚皆知其爲瑞,
信乎先生片言隻字散落人間者,價重連城,有耳目者皆能寶愛之,而不必在吾徒中媚學之士
而已也.……知寶先生詩而追慕之,是固秉彝好德之良心,而天理之不容泯者,槪可見已.”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83

 

레게 한다.천여 편이 넘는 퇴계의 한시를 무 자르는 손쉽게 요리할 비법은
없다.필자는 이글의 본론을 통해 후인들에게 깊은 감흥과 영향을 준 수창시
의 경개를 거칠게 조망해 보았을 뿐이다.
이제 17세기 안동의 선비 愚川鄭侙(1601~1663)이 쓴 「酬唱詩序」를
읽으면서 결론에 이르고자 한다.「수창시서」에서 정칙이 “시의 창작은 요컨대
‘마음을 말하고(道情)생각을 펴내는(叙懷)것’에 있으니,많은 것을 자랑하
거나 아름다움을 다투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130)고 했듯이,수창도 정회를
표출하는 하나의 한시 창작방식이었다.정칙은 이어서 수창의 내용에 대해
“말과 뜻이 공교로운가 졸렬한가,격조와 율격이 정교한가 조잡한가,이런 것
은 모두 따져서 안 된다.그 이른바 마음을 말하고 생각을 펴내며(道情叙懷)
시속을 아파하고 세상을 한탄하는(傷時歎世)뜻이 말 밖에 흘러넘치기는 해
도,더할 수 없는 괴로움에 분함을 느끼는(窮苦感憤)작품이 우리들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된다.”라고131) 했다.‘도정서회’는 가장 일차적이고 일반적 수창
시의 세계인데,답답한 마음과 만남의 즐거움과 같은 서로의 생각이나 회포
를 시를 통해 전달하는 단계에 그친다.그러나 ‘상시탄세’와 ‘궁고감분’은 개별
적이고 특수한 서정이다.‘상시탄세’는 난리를 만나 시대를 슬퍼하거나 불우한
세상을 탄식하는 애상의 정조가 주조를 이룬다.‘궁고감분’은 더 이상 괴로울
수 없는 극한의 고통,그리고 그로 인해 솟아난 몹시 분하고 원통한 생각의
덩어리들이다.그런데 정칙은 왜 ‘궁고감분’의 서정을 수창시에 넣지 말라고
했을까.‘궁고감분’은 사회에서 패배하고 낙오한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분노의
목소리일 터이다.그 목소리가 지나치게 격정적으로 표출되면 溫柔敦厚를 상
실하고 玩世不恭에 빠져들기 쉽다.132)

 

130)鄭侙(1601~63), 愚川集 卷5,「酬唱詩序」:“詩之作,要以道情而叙懷,不欲誇多而
鬪靡也.”
131)앞의 글:“語意之巧拙,格律之精粗,皆不暇論,而若其所謂道情叙懷傷時歎世之意,則溢
乎詞表,至於窮苦感憤之作,則所當絶於吾輩之口也.”
284 退溪學과 韓國文化第47號

 

퇴계는 ‘완세불공’에 비판적이었다.산림에서 도의를 기뻐하고 성정을 기
르는 선비가 취할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수창시에 ‘궁고감분’을
수용하지 않으려 한 정칙의 본의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고 그러한 태도
는 다분히 선학인 퇴계의 발언을 의식한 결과이다.
우리가 살펴본 퇴계 수창시의 세계도 우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전개방식에서 퇴계의 교학적 입장이 집요하게 관철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그가 만년에 도산에 은거하며 후진 교육에 힘썼던 만큼 ‘기질변화’
를 중시하는 교육관이 부지불식간에 수창시 창작과 비평에 스며들게 된 것이
다.국화와 매화를 등장시킨 자문자답형 수창시는 수창의 상대가 문생이나
자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는 점에서 天人合一의 의지를 바탕에 깔면서
매우 자기 성찰적이다.시에서 국화나 매화와 대화하며 서로 저버리지 말자
고 약속한 그것은 바로 위기지학에서 이탈하지 않겠노라는 양심선언과 다를
것이 없다.
이제 겨우 수창시 연구에 발을 들여놓았을 뿐 앞으로 보충하고 틀 잡아
논할 부분이 적지 않다.또한 보다 근본적으로는 퇴계의 한시를 어떠한 시각
으로 접근하는 것이 본래면목을 제대로 설명하는 길인지 더욱 고민하고 토론
해야 한다.이번의 작업이 그러한 토론에 작은 실마리를 제공했으면 하고 바
란다.

 


132)이종호, 안동선비는 어떻게 살았을까 (도서출판 신원,2004).157~160쪽,둘째마
당:안동선비의 현실인식과 문예인식,‘정칙의 문예취향과 자득적 문예인식’을 참조.
퇴계 수창시의 양상과 의의 285

 

【참 고 문 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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