退溪 李滉의 哲學思想

2017. 6. 19. 17:31성리학(선비들)

退溪 李滉의 哲學思想

1. 生涯
退溪(AD, 1501-1570)는 朝鮮 理氣哲學을 集大成하고 또한 朝鮮의 儒者型을 완성한 학자이다.
그는 性理學의 본질을 정밀하게 구명하여 조선 철학의 황금시기를 이루어 놓았다. 이때에 함께 활동한 학지로는 南溟 曺植, 河西 金麟厚, 一齋 李恒, 蘇齋 盧守愼, 牛溪 成渾 , 栗谷 李珥등과 佛敎係에서는 普雨와 西山 등의 사상가가 배출하였으며 특히 栗谷은 才幹과 經綸的인 識見이 뛰어 났었다.
眞城 李植의 五男으로 燕山君 7年에 安東禮安溫溪에서 출생하였으며 2歲에 叔父인 松齋에게 論語를 배웠고 聾巖 李賢輔에게 請益하고 19세에 性理大典을 보다가 학문의 단서를 깨친 그 述懷에 「홀로 숲속집의 萬卷書를 사랑하여 一般心事 십년여이라 그로부터 학의 단서를 이해한 것 같으니 도시내 마음을 잡이 太虛를 보았노라」하여 宇宙本質과 그 첫머리를 아는 것 같았다. 또 일찍이 周易을 精思讀究하여 침식을 잊어 몸을 상하게 하였으며 27歲에 及第하고 太學에 유학할 때 하서와 도의교를 맺었다. 中宗末에 文定王后와 仁宗 사이의 험악함을 보고 歸鄕하는 河西를 부러워 하다가 士林에 대한 탄압을 보고 드디어 귀향하였다. 그후 다시 丹陽과 豊基郡守를 지내고 白雲洞書院을 再建하여 士林의 수학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형 李瀣가 士禍를 입은 후는 벼슬길에 잘 나아가지 아니하였고 60에는 陶山書堂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宣祖朝에는 右贊成으로 時務六條疎와 聖學十圖를 올려 마지막 성의를 다하였다.
2. 理一元論
그는 처음 理氣二元論에서 출발하여 理一元論에 도달한 客觀的觀念論者였다. 朝鮮 전반의 주자철학 연구자는 대개가 理氣二元論에서 출발하여 理一元論에 이르렀던 것이나 退溪에 이르러 더욱 명백하게 드러 났다.
세계는 理와 氣로써 형성되며 理와 氣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하였다. 「理없는 氣없고, 氣없는 理없다. 理와 氣는 결코 二物이다.」「天地사이에 理와 氣가 있다.」「이외에 氣가 없고, 氣외에 理가 없다. 理氣는 원래 잠깐 사이도 떠날 수 없다.」 宇宙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그의 설명에 의하면 「形貌와 形象 形氣를 가졌으며 우주간에 찬 모든 것은 氣 곧 물체라」하였다. 形貌와 形象, 形氣를 가진 모든 사물은 理氣의 작용에 의하여 형성된다 생각하고 이는 하나이지만 氣는 만물을 형성하는 것이며 그 氣는 陰氣와 陽氣로 대립되었으며 그 서로의 작용에 의하여 만물이 형성되며 또 그것에 의하여 사람이 생기며 사람들의 賢愚등의 차이도 생겨났다고 설명하였다. 또 「만물 발생의 그 시초도 모두 物의 氣에 의하여 이룩되며 氣가 점점 어리고 모여 오래되면 굳어져서 형체를 가진 만물이 된다」고 하였고 만물 형성의 기본 質料는 일반적인 氣가 아니라 "物의 氣"라 설명 한 것으로 미루어 始元的存在로서 理와 氣를 동시에 인정 한 것이다. 그러나 理와 氣의 관계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따라 理一元論과 理氣二元論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있게 되는 것이다. 精神的 內容인 道와 具體的인 形體로서의 氣와의 관계는 곧 理와 氣와의 관계와 다름 없으며 太極과 陰陽과의 관계는 서로 떠날 수 없어서 어느것이 위고 어느것이 아래인지 판정하기가 여렵다 하였고 또 이것의 先後도 구별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또 다시 이와 기는 서로 결합되어 있기는 하지마는 개념상으로는 확실히 두 개가 성립된다고 강조하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退溪는 理氣二元論자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결코 "所以然"또는 "所當然"으로서 최초의 始元이라 생각하였다. 退溪의 理는 자연에서는 自然法則을 말하고 社會와 道德現象의 설명에서는 社會規範이며 道德規範이다. 사물 이전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理는 천지를 포함한 만물 발생의 최초의 근원이며 만물이 생긴 되에는 그 만물과 밀접히 맺어져 그 운동변화의 법칙을 규제하고 주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물은 반드시 그렇게 되는 所以然(必然性)의 緣故가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하는 所當然(當爲性)의 법칙이 있으니 이것이 이라」하였다. 이러한 法則性으로서 理는 事物以前에 있고 事物과 獨立하여 存在한다.
그러므로 理는 氣에 비하면 더욱 근본적이며 일차적이라 보아 理先氣後를 주장하였다. 그는 朱子의 말을 인용하여 「이 事物이 있기 전에 이 理가 있고 君臣이 있기전에 君臣의 理가 있으며 父子의 理가 있었다. 사물이 존재하기 전에 이 理는 이미 갖추어 있었다」고 하였다. 우주의 궁극을 추구할 때 實在界에서는 理가 먼저 있다. 그러므로 위의 이의 설명을 요약하면 첫째 氣활동의 법칙으로서의 理와 둘째 氣活動의 근저로서 실재하는 理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두 개의 理에 대한 설명은 「答鄭子中書」에서 드러난다.
「朱子가 일찌기 理에 動靜이 있기 때문에 氣에 動靜이 있으니 만약에 動靜이 없다면 기가 어디로부터 동정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개 理가 動하면 氣가 따라서 생기며 氣가 動하면 理가 따라서 드러난다. 周濂溪는 太極이 動하여 陽이 생겼으니 이것은 理가 동하여 氣가 생긴다는 것이다. 周易에서 復에서 天地의 心을 본다 한 것은 氣가 動하여 理가 드러난다는 것임을 알수 있다.」하였으니 理動, 氣生과 氣動, 理顯에서 두 개의 理가 생각된다. 理動氣生의 이는 窮極實在로서 理를 뜻하고, 氣動理顯의 理는 現象의 法則으로서 理를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一次的 窮極者인 理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理는 虛하기 때문에 상대가 없다. 그리하여 이 理에는 加損할 것도 없다」하였으니 理는 상대계를 초월한 것이며 理자체는 加損할 수 없는 절대자일 뿐만 아니라 만사 만물의 根底요 중심(樞紐)이며 동시에 사물 자체의 법칙이며 主宰者라 생각하고 「上天의 일(理)은 소리도 듣지 못하고 냄새도 없으며 진실로 만물 조화의 중심이며 만사의 根底이다. 대개 理가 비록 형체는 없을지라도 至虛한 곳에 至實한 本體가 있는 것이다. …… 그런즉 생물의 근본이며 만사의 근저가 아니고 무엇이냐」하여 理의 實體性을 강조하였으며, 이와같은 實在에 말미암아 만물이 潑剌하고 생생하며 뚜렷한 질서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사람의 본질이기도 하며 道德의 根源이기도 하다.  결국 退溪가 생각한 우주의 본질은 理이며 理가 곧 一次的인 실재라 생각하는 理一元論이다. 그러므로 「理는 氣의 統帥者요, 氣는 理의 兵卒이라.」 또는 理는 자체의 자기운동에 의하여 陰陽(氣)을 발생한다고 생각하였으며 「情과 意가 없으니 본연의 體이며 능히 발동하며 능히 생동하니 至妙한 用이다. 理는 스스로 작용하는 능력을 가졌으므로 자연으로 陰과 陽을 生하는 것이다.」고 하여 空闊한 시원적 실재인 理 그 자체가 지극히 오묘한 자기 작용에 의하여 음양(氣)을 能發 能生하여 理가 氣를 낳는 것이라 생각 하였다. 이러한 생각이 柳西厓의 理氣觀에 영향을 주었으며 드디어는 權淸臺와 같은 理生氣論者를 낳았다. 또, 退溪는 일단 사물이 생성되고 나면 理는 각 사물의 본질이며 나아가 주재하는 법칙이 된다. 그러므로 「사물에는  大와 小의 차별이 있지마는 理는 大小의 차별이 없으며 이른 곳마다 없는 곳을 보지 못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사물의 본질과 우주의 본질은 동일한 理라 생각하였으며 또 사물에 각기 갖추어진 理는 앞서 말한 바와같이 氣動理顯한 理에 해당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3. 認 識 論
退溪는 理의 認識을 省察과 體驗으로 가능하다 하였다. 그러므로 「存養體察은 吾家의 宗旨라」하여 存養 혹은 存性함에 있어서 理를 체험하고 성찰하여 사람의 본래적인 性을 存養하여 德性을 기르고, 天理를 성찰하고 체험함으로써 그것의 認識이 가능하다 한 것이라, 天理와 性의 본질을 성찰 및 체험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直觀的方法을 뜻하는 것이라, 덕성의 存養은 修養을 의미한 것이다. 存養이란 心이 발동하기에 앞서서 未發之中(性)을 기르는 것이니 窮理盡性의 방법이 자연 內向的인 心의 문제로 돌아 가게 된다. 그리하여 內面的인 체험이 중요시되고 오랜 存養省察의 공부가 익어 도덕적 鍊成과 節操의 氣魄이 人格化 된다. 그러므로 독서도 한정이 있게 되며 博學보다는 오히려 心性의 수양에 필요한 思索으로 이인 근본 실재를 주체적으로 파악하되 그것은 다만 이론적이며 지식적 파악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체험과 성찰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므로 「그래서 隨時隨處에서 觀省體驗하되 이 心을 放逸치 않게 할 뿐이다」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적인 참여활동보다 內面的存養을 치중하는 退溪학풍을 낳게 하엿다. 退溪학파는 敬 혹은 仁의 문제에 集中的인 관심을 모아 道義主義的인 경향이 강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또 心性情問題에 관심을 집중하여 四端七情의 문제 중심적인 연구 과제로 드러난 것이다.
또 認識論의 한부분으로서 知行問題에 있어서는 知行互進을 주장한다. 이 知와 行의 문제는 이론과 실천의 문제와 같은 것으로서 儒學에서는 전통적으로 중요시 하여왔다. 그런데 退溪는 중국의 王陽明의 知行合一에 대하여 反駁하는 가운데서 感性的 단계의 知行은 合一이나 理性的 단계에서는 知行이 竝進이라 하였다. 「사람의 마음이 形氣에서 이는 것은 본능이어서 배우고 힘쓰지 아니하여도……行에 知가 있다 할수 있으나 義理의 마음에서 이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 배우지 않으면 모르고 힘쓰지 않으면 能하지 못하니 밖으로 행함은 반드시 마음속이 성실치 못하면 善을 보고도 모르고 善을 알고도 實踐하지 못한 사람이 있거늘……義理상의 知行을 통틀어 말한다면 원래 서로 기다려서 아울러 행하는 것이다」하여 道德規範을 안다 혹은 모른다 하는것과 잘 실천한다 혹은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의 氣質的인 차에서 오는 것으므로 훌륭한 기질을 가진 聖人은 알수 있으나 惡한 기질을 가진 衆人은 알지도 못할뿐더러 실천하지도 못한다 하였다. 退溪의 의리상의 知란 道德規範(理)에 대한 인식이며 行이란 것도 그것의 실천을 뜻한 것이다.
그러므로 「眞知와 實踐은 수레의 兩輪과 같아서 하나도 없을 수 없으며 사람의 두다리가 서로 互進하는 것과 같다」하고 또 「知行의 둘은 兩輪兩翼과 같이 서로 先後하고 서로 輕重한다. 성현의 말에 先知後行이 있으니 '大學'과 '孟子'이요, 先行後知는 '中庸과 朱子의 「答晦叔書」에 있다. 다 들 수는 없으나 先知는 盡知한 후에 시행하는 것이 아니며 先行은 盡行한 후에 始知한다는 것이 아니다」 「二者를 竝進하면 그 門路가 점차로 통달하여 걸리지 않을 것이다.」 互進 혹은 여기서는 竝進이라 하는 「二者는 서로 首尾가 되나니 실로 兩端의 공부이다. 分段으로 근심하지 말며 오직 반드시 서로 나아감을 법으로 할 것이 라」하였다.
다음 또 知識論으로 중요한 것은 格物致知다. 먼저 사물의 理(法則)를 알고자 하면 사물에 接해서 사물의 법칙을 체험하고 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라 하고 「理는 사물에 內在한다. 따라서 사물에 접하여 그 理를 찾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사물은 認識主體와는 별개로 있음을 말하여 「사물로부터 말하면 천하의 모든 사물은 실제로 나의 마음밖에 있는 것이다. 어찌 理가 하나라 하여 天下의 사물이 나의 마음 속에 있다고 할수 있는가」하였다. 이와같이 생각한다면 經驗論인 것 같이 보이지만, 인식주체와 떠난 客觀的사물의 존재를 인정하고사물의 理는 사물에 접하여 인식된다 하였을지라도 그 사물의 理는 물질적인 법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先天的인 本具의 理性能力의 所産인 도덕규범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王陽明이 尊德性을 중요시 하고 「大學」의 條目 가운데서 誠意가 중심이라 한데 반하여 退溪는 朱子의 해석에 따라서 道問學을 중요시하고 格物致知를 八條目의 근본이라 반대하였다. 中庸의 思는 尊德性과 통하고 學은 道問學과 통하여서 思와 尊德性을 근본으로 보면 주관적이 되며 學과 道問學을 중요시하면 객관적이 된다. 주관적인 관념론자인 王陽明을 반대하는 그는 객관적 관념론자라 해서 마땅하다. 그러므로 그는 「大學」의 「明明德이란 자기의 學에 말미암아 그 德을 밝힘을 말하는 것이라」해석 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王陽明의 主觀的觀念論과 같이 心의 理를 추구함으로써 객관적인 理가 드러난다 한 것이 아니라 客觀的인 理를 추구함으로써 心의 理를 드러낸다고 보는 格物致知論이 었다.
4. 四端七情 및 理氣互發說
退溪이후 三百年동안 朝鮮學界의 중심적인 論爭꺼리가 된 것이 四七理氣說이다. 四端七情理氣說을 줄여서 四七理氣說이라 하며 이것은 心理에 대한 분석이론이다. 退溪는 心을 理와 氣가 竝合한 것이라 생각하고 性情의 통일자라 하였다.
그런데 이 心의 작용에 道德觀을 개입시켜 善과 惡의 현상이 있다고 보았다. 본래적인 性(本然之性)은 순수한 理體이므로 惡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으나, 비본래적인 性(氣質之性)에는 惡이 개입하게 되며 그것은 氣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형질을 가진 우리로서는 氣의 작용을 받지 않을 수 없고 사람은 天理와 人慾의 상극을 자기속에 안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理發, 氣發 혹은 道心은 理發이요, 人心은 氣發이라 하고 또는 四端은 理의 發, 七情은 氣의 發이라 하는등 心性情에 대한 분석에 理氣哲學을 적용하여 파란중첩, 삼백년 未決의 公案이며, 論爭꺼리가 된 것이다. 드디어는 黨爭과 결부되어 격렬한 論壇을 폈다. 이 문제의 발단은 당시 秋巒鄭之雲이 발표한 「天命圖說」을 退溪가 다소 고쳐서 세상에 알린 데에 있었다.
慕齋 金正國의 제자인 秋巒은 아우인 鄭之霖에게 天命心性의 理를 알기쉽게 설명하여 「天命圖說」을 만들었다. 이것을 退溪가 보니 그 가운데 「四端은 發於理하고, 七情은 發於氣라」한 것이 있으므로 「四端은 理之發이요, 七情은 氣之發이라」改定하였다. 그리하여 「天命新圖」를 만들어 心가운데의 理와 氣가 단독으로 서로 발동하여 情이 된다 하였다.
그런데 明宗 14년(1559) 高峰 奇大升으로부터 質疑를 받게 되었다. 高峰은 四端과 七情을 분리할 수 없다 하여 四端은 七情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理와 氣는 不可分으로 통일된 理氣二元論的인 입장에서 주장한 것이다. 退溪는 이에 대하여 第一書를 보내어 만약에 四端을 七情에다가 포함시키면 七情은 氣를 兼하였기 때문에 四端의 純善함을 생각할 수 없으므로 「四端은 理의 發이라 純善하고, 七情은 兼氣의 發이라 善惡이 있는 것이라」하여 다소 완화 하였다. 退溪의 논거는 理氣의 불가분한 관계를 인정하지만 그것은 서로 다른 두 가지라는 생각에서 출발 하였다. 그후에는 그는 「朱子語類」의 輔漢卿의 기록인 孟子를 論하는 조항에서 朱子가 「四端은 理之發이요, 七情은 氣之發이라」한 것을 발견하고 자기의 前說과 부합하므로 정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사실 「四端의 發은 純理요, 七情의 發은 兼氣라」한 것은 명백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理發氣發이라는 사상과는 서로 맞지 않는다. 그런데 「答奇大升第一書」에서 「性情의 변론은 先儒의 發明함이 상세하다. 오직 四端과 七情을 운운함은 함께 情이라 할 것이나 理氣로 나누어 설명한 사람을 아직 못보았다」하여 자기 獨創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四端은 理發, 七情은 氣發이라 한 說에 대하여 두 가지로 해석 할 수 있다.
첫째 心은 理와 氣를 兼合한 것이요, 心의 작용을 자세히 살펴 보면 理의 發動부분과 氣의 發動부분을 구별 인식할 수 있다. 四端은 純善한 心의 작용이며, 理의 일어남이라 생각되며 七情은 善惡이 정하여지지 않는 心의 작용이며 氣의 일어남이니 단순히 四端은 理의 일어남이요, 七情은 氣의 일어남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答奇大升第一書」에서 退溪는 「나는 일찍이 情에 四端과 七情의 구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性에 本然과 氣質의 차이가 있는 것과 같이, 그러하다면 性을 理와 氣로 분석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情만을 理氣로 分析할 수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惻隱, 羞惡, 辭讓, 是非의 四端은 어디에서 이는가, 仁義禮智의 性에서 일 따름이다.
喜, 怒, 愛, 哀, 惡, 欲의 七情은 어디에서 일었는가, 外物에 그 형기가 접촉하여 마음속으로 움직여 대상을 따라서 나타난 것이다. 四端의 일어남은 孟子가 벌써 心이라 했으므로 心은 원래 理와 氣가 합한 것이다. 그런데 理를 주동으로 한다함은 무엇인가. 仁義禮智의 性이 순수하게 마음깊이 도사리고 있어서 四端은 그 실마리요, 七情의 일어남을 朱子는 本有한 當然의 法則이라 하였으니 理다. 그런데 氣에 있다함은 무엇인가, 外物의 자극을 느끼기 쉬워 먼저 움직이는 것은 形氣와 같은 것이 없으니 七情은 그 싹이다. 어찌 마음속 깊이 있는 純理가 일어남에 氣를 섞을 것이며, 形氣가 異物에 느꼈으니 그 일어남을 理의 본체라 하겠느냐」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四七前說이다. 理氣互發을 마치 本然性과 氣質性과 같은 것이라고 비교하였다. 그러나 원래 氣質性에는 本然性이 內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本然性과 氣質性의 비유로써 四七互發을 증명하려 한다면 온당치 못하게 된다. 만약에 이 비유가 온당하다고 하면 七情은 高峰의 지적대로 四端을 포함하게 된다. 그러면 오히려 四端은 七情의 善一邊이라 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理가 주동하는 本然性과 氣가 주동하는 氣質性이 있는 것과 같이 情에도 또한 理發와 氣發이 있는 것이라 해야 정당할 것이다.
 Ⅱ. 栗谷 李珥의 哲學思想
1. 生涯
栗谷 (AD 1536∼1584)은 中宗 31년 江陵 外家에서 出生하여 19세에 金剛山寺에 출입하다가 다시 儒學으로 돌아와 李退溪에게 學을 묻고 29세에 及第하여 宣祖初期에 玉堂(弘文館)에 들어갔고 이어 大司諫 大提學, 兵, 吏曹判書를 거쳐 49세로 죽음에 退溪와 같이 理氣學을 集大成한 學者이다.
그는 士林의 하나로 정권에 참여하여 勳舊派와의 투쟁에서 혹은 士林 前期의 이론적 집대성자로서, 혹은 政治家로서, 혹은 敎育家, 思想家로서 후세에 栗谷派를 이루게 할 만큼 退溪學派와 더불어 雙峰을 이루게 하였다.
그는 또 특히 政治經濟에 대하여 卓見을 가져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어서 退溪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退溪, 花潭의 사상과 또 中國의 羅整庵의 사상을 연구하여 독자적인 理論體系를 세우려 하였다. 그 철학적인 글은 栗谷全書九와 十卷의 「答成浩原(牛溪)書」이며 중요한 論文은 「東湖問答」「鄕的」「學校模範」「學規」「聖學集要」「擊蒙要訣」「經筵日記」등이다.
그는 늘 독창성을 강조하여 「退溪는 모방하는 경향이 많다」하고 「朱子일지라도 참으로 理氣互發을 주장하였다면, 그것은 誤謬라」하였다. 退溪와 朱子에 대하여 비판적이었고 반면 徐花潭 혹은 羅整庵등의 독창은 존중하였으나 학설자체는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徐花潭의 氣一元論에 대하여 「氣를 理라 하는 病」이 있다고 지적 하였다.
2. 理氣二元論的 理一元論
栗谷은 理氣二元論을 고집하다가 드디어 理의 一次性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理一元論에 도달하였고, 앞서 말한바와 같이 退溪는 처음부터 理의 一次性을 인정한 것을 비교하여 보면 그 정밀의 도가 스스로 다른바 있다.
氣의 法則性으로서 理는 氣와 아울러 존재하여 宇宙를 구성하며 理와 氣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漠無朕(無形有兆)이란 理를 말한 것이다. 理에서 氣를 찾는다면  漠無朕하되 萬象이 森然하고, 氣에서 理를 구하면 一陰一陽을 道라 할 것이다. 말이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실은 理없이 독립하여  漠無朕속에 陰陽(氣)없을 때가 없다. 이곳을 주의하여 잘 살펴 보고 깊이 硏究할 것이라」 理와 氣는 竝存하는 것임을 주장하였다. 다시 退溪의 理先氣後의 理一元觀을 반대하고 栗谷은 理氣無先後라 하였으며 退溪의 四七理氣互發說에 대하여는 氣發理乘을 주장 하였다. 栗谷哲學의 근본은 理氣二元說과 理通氣局說 및 本然之氣說과 氣發一途說로 형성되어 있다. 退溪의 理先氣後說에 반대한 그는 理氣의 無先後를 주장하여 「대저 理는 氣의 主宰者요, 氣는 탄(乘)바라, 理가 아니면 氣의 根底할 바가 없고 氣가 아니면 理가 의지할하가 없다. 이미 둘이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일이면서 이요,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이이면서 일이다. 하나가 아니란 무엇인가. 理와 氣는 서로 떠날 수 없어서 神妙하게 合하였다. 理는 스스로 理요, 氣는 스스로 氣라 서로 挾雜치 않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라 한 것이다. 둘이 아니라 함은 무엇인가. 비록 理는 스스로 理요 氣는 스스로 氣라 할지라도 渾淪해서 빈 사이가 없다. 先後도 없고 雜合도 없으니 둘임을 알 수 없기에 둘이 아니라 한다. 이러기 때문에 動靜은 端이 없고 陰陽은 始가 없다. 이에 始가 없기에 氣도 또한 始가 없다」 理와 氣의 불가분의 통일 관계를 말하는 그로서는 결국 理氣二元論을 정립하게 되어 理와 氣는 세계를 형성하는 二元的인 근본실재라 보게 되었다.
「모든 현상이 꼭 같이 않음은 氣의 소위이다. 비록 氣의 소위라고는 하지만 반드시 理가 주재하여 그 꼭같고 고르지 못하는 소이가 있다. 또한 理가 이와같아서 理가 아니면 氣홀로서는 이렇게 할 수 없다」하여 參差不齊한 모든 자연현상은 氣의 소위이나 理가 主宰하고 질서 지우는 것이므로 理가 없다면 氣 홀로서는 이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발동케 하는 것은 氣요, 발동하는 소이가 理다. 氣가 아니면 발동할 수 없고 理가 아니면 발동할 근거가 없다」한것도 理氣二元의 세계관을 충분히 설명한 것이다. 理氣二元論의 입장에서 氣一元論과 理先氣後의 理一元論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다시 절충하여 「程子는 器 또한 道이요, 道는 또한 器라 하였다. 이 말은 理氣가 서로 분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理氣는 하나라 한 것이다. 朱子는 理와 氣는 결코 하나가 아니라, 각각 다른 둘이라 하였다. 이 말은 理와 氣가 서로 섞이어 혼잡치 않음을 말한 것이나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理氣는 先後가 있다고 한다. 羅整庵과 같은 학문에 고명한 사람도 理와 氣는 하나라 하는 오해가 약간 있고 退溪와 같이 정밀한 생각에도 理와 氣는 先後가 있다는 병이 약간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理와 氣를 규정하여 理는 물론 모습도 없고 운동능력도 없으나 氣는 그 대신 형태와 운동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여기에 바로 退溪의 理氣論과의 차이가 있게 된 것이다. 退溪는 원래 형태는 없으나 운동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여 太極(理)이 자기운동능력에 의하여 陰陽(氣)을 生하는 것으로 보아 理先氣後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栗谷 역시 太極은 곧 理라 해석하면서 理의 운동능력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理가 宇宙의 궁극자임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운동능력이 없는 太極은 陰陽을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栗谷은 理氣二元論的인 입장에서 理先氣後를 부정하였다.
「太極이 兩義(陰陽)를 生한다 하여 氣가 있기 전에 理만 있다 든가 혹은 湛一淸虛한 太虛가 陰陽을 낳는다고 하는 생각은 오류이며, 陰陽이 원래부터 존재함을 모르는 과오라」지적하고 太極은 처음부터 그 자체에 운동능력을 가진 陰陽을 포함했으며 陰陽도 太極과 같이 처음도 없으며 끝도 없고 陰陽(氣) 역시 자기 원인에 의하여 운동하기에 이르는 것이라 하며 세계의 生成은 始原的인 두 개의 실재인 理와 氣에 의한다 생각하였다. 徐花潭의 氣가 陰陽의 근본이며 一氣가 陰陽兩氣를 발생시킨다는 생각도 착오라 한다. 그는 氣의 永遠性은 인정하였지마는 理氣二元論的 입장에서 氣一元論은 받아 들일 수 없었다. 栗谷의 始原的實在論이 理氣二元이라 함은 명백하나 그 어느 것이 더욱 一次的이냐의 문제 있어서 徐花潭의 氣不滅論은 반대함으로써 二元論의 불철저성을 드러내었다.
그는 氣一元論에 근거한 花潭의 氣不滅論을 반대하여 氣의 상대성과 유한성을 지적하고 한편 理의 절대성과 무한성을 주장함으로써 그의 二元論은 崩壞되고 理의 先次性 및 一次性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그는 理一元論에 빠지고마는 자기모순을 가져오게 된다. 花潭은 湛一淸虛한 氣가 모든 것에 존재한다고 하여 모든 先聖이 아직 전하지 못한 妙理를 자기가 체득한 것처럼 말하였으나 더욱 그위에 理通氣局의 一節이 있는 것을 몰랐다. 「선천적인 善은 계속하여 性이되며 이는 모든 것에 존재하나 湛一淸虛한 氣는 모든 것에 존재하지 않는다. 理는 변화하지 않지만 氣는 변화하며 원기를 상생하여 끝이 없으므로 낡은 것은 없어지고 새로운 것이 계속하여 낡은 氣는 벌써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花潭은 一氣가 영원히 존속하며 낡은 것도 없어지지 않으며 새로운 것도 계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으니 이것이 花潭의 氣로써 理라 한 오류이다」하였다. 낡은 氣와 새로운 氣의 끊임없는 更新을 주장하였으니 실로 氣의 有限性을 지적한 氣滅論이 된다. 이와 같이 그는 氣와 비교한다면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理를 주장하고 太極과 陰陽은 불가분으로 통일되어 있다 하며 또 양자가 동일한 始原的 실체라 한 그의 理氣二元論에 위기가 온 것이다. 그는 이 모순을 자기가 부정한 理先機後論으로 해결하였으니 이것도 불철저한 이론체계라 지적할 수 있다. 「理氣는 시초가 없기 때문에 사실은 先後로 말할 수 없다. 단지 근본에 미루어 그 所以然(그렇게 되는 이유)인 理는 사물의 줄기요 根底이다. 그러므로 理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성현의 천만의 말들이 대체로 이것에 불과하다. 만약 物에서 이것을 살핀다면 분명히 理先氣後다. 대개 천리가 있기 전에는 天地의 理가 없었다 할 수 없다. 이것을 物에 미루어 보면 물이 다 그러하다」하였으니 그가 반대하던 理先氣後를 인정하는 동시에 理의 一次性을 인정한 것이다. 그는 또 理는 形而上, 氣는 形以下라 하여 氣는 만물생성의 물질적인 담당자요 理는 만물생성의 최근원자라 하여 理의 一次性을 논증한다.
「形而上者는 자연의 理요, 形以下者는 자연의 氣다. 이 理가 있다면 理氣가 없을 수 없고 이 氣가 있으면 만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이 氣가 발동하면 陽이 되고, 靜하면 陰이 된다. 一動一靜하는 것은 氣요, 동정케 하는 것은 理다. 陰陽이 벌써 나누어 지면 兩儀가 비소 열리며 兩儀가 이미 열리면 만물의 萬化가 발생한다. 그렇게한 것은 氣요, 그렇게 하는 所以然(原因)은 理라」하고 또 「오직 易에만 구하고 理에 구하지 않으면 단지 그렇게 되는 것만 보고 그렇게 하는 所以然을 보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드디어 易學의 근본을 상실한다」하였으니 이는 만물생성하기 전에 또 氣이전에 실재할 뿐만 아니라 氣의 所以然으로서 만물생성의 최초의 근원적 실재라 보았다. 인간의 생사에 있어서도 人間未生前에 인간의 理만이있고 사후에도 理만 남는다. 生하면 氣가 있지만 死하면 氣는 없어지고 理만 實在한다. 이처럼 인간의 생사와는 관계없이 獨立實在하고 생사를 지배하는 理의 絶對性을 인정한 것이다.
3. 認識論과 四七氣發一途說
栗谷의 獨創性과 合理的인 요소는 認識問題에서 나타난다. 인간의 마음을 思惟器官 이라하고 思惟器官은 血氣의 身에 의해서 존재한다고 한다.  「血氣之身이 있는 직후에 知覺之心이 있다.」하며 感覺器官, 思惟器官을 精氣의 작용능력으로 설명 하였다. 「사람의 지각은 精氣에서 생긴다. 耳目이 총명한 것은 魄이 靈하기 때문이며 心管이 思慮하는 것은 魂이 靈하기 때문이다. 그 총명으로 思慮하는 것은 氣이며 그 총명으로 사려하게 되는 원인은 理이다.」 감각하고 사유케 하는 원인은 어디까지나 理라고 보았다.  
「귀가 있은 후에 비로소 소리를 듣고, 눈이 있은 후에 빛깔을 보며, 마음이 있은 후에 思慮한다. 精氣가 일단 흩어지면 귀로 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으며 마음으로 思慮 할 수도 없으니 어떤 사물이 있는가 알 수도 없거니와 어떤 지각이 따로 있겠는가. 어찌 사물이 있더라도 귀없이 듣고, 눈없이 보며, 마음없이 思慮 하겠는가」 이러한 認識 論的 입장에서 佛敎를 排斥하며 「이미 지각이 없다면 어찌하여 天堂지옥이 있으며 고락을 누가 알겠는가, 석가의 인과응보설은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파멸될 것이다.」하였다. 의식에서 독립한 존재인 객관적 사물은 감각기관의 작용이 없다면 감정이란 생겨 날 수가 없다.  「주역에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되 드디어 통한다 하였으니, 비록 성인의 마음이라도 감하지 않고서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다. 반드시 感하여서 비로소 움직인다. 感하게 하는 바는 모두 外物이다. 무엇으로 그렇게 말하는가.  父에 感하면 孝가 움직이고 王에 感하면 忠이 움직이며 형에 感하면 敬이 움직인다. 父, 王, 兄이 어찌하여 마음속의 理일 것인가. 천하에 어찌 感하지 아니하여도 마음속으로부터 스스로 이는 情이 있을 수 있느냐. 이제 만약에 外物에 感하지 않고서 마음속으로 스스로 발동한 것을 四端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父없이 孝心이 일고, 君主없이 忠心이 일며, 兄없이 敬이 발동하게 되니, 어찌 사람의 眞情이라 하겠는가. 이제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으로 말하면 幼兒 샘에 빠지는 것을 보고서야 불상한 마음이 발동하는 것이다. 感케하는 것이 幼兒이다. 幼兒는 外物이 아닐까, 어찌 幼兒가 샘에 빠지는 것을 보지않고서도 자연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발동할 수 있겠는가.」 의식에서 독립한 사물이 우리의 감각기관에 작용하지 않고서 정이 생길 수 없거니와 사유활동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며 「의는 원래 정에 의하여 시비를 판단하는 것일까. 단지 사람이 아직 물에 접촉하지 않고 감하지 않을 때도 염려가 발동하니 어찌 반드시 정에 의하여 한다 하는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그 이전에 발생한 정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로 그때 비록 정에 접촉하지 않아도 실은 그 전의 물에 의하여 사념인데 어찌 정에 의하지 않았다 할 것인가」 현재의 사유활동이 외물에 접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과거의 접촉 경험으로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단과 칠정의 관계에 있어서 선, 노, 애, 구, 애, 오, 욕중에서 어느정이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사단에 해당되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와같은 시도는 주자와 퇴계도 시도한바 있으나 실패한 것이다. 견강부회로 된 선일변설은  실패작이 되어 성공하지 못하고 그의 선일변의 약점을 드러냈다. 칠정은 선악미정의 정이며, 사단은 순선한 정이다. 본래 감정을 사단과 칠정으로 분석한데서 억지가 있었던 것이다. 「발동하는 것은 기요, 발동하는 소이는 리다. 그 발동이 정리에서 바로 나타나서 기의 작용이 없으면 도심이요, 칠정의 선일변이다. 발동할 때 기가 벌써 작용하면 인심이요, 칠정의 선악을 겸한 것이다. 그 기의 작용을 알고서 정하게 살펴서 정리에 좇으면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듣게 된다.」한 것으로 보아정리에서 직출하여 기가 작용못한 것이 도심이며 사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심과 사단은 리발이란 말인가. 또 발동할 때 기가 벌써 작용하면 인심이요 칠정이라 하였으니 발지 한 것은 리라 할 것인가. 아니면 발동하는 기와 그것에 또 작용하는 기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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