杜香과 退溪

2017. 6. 19. 17:38성리학(선비들)

妓女 杜香退溪 李滉悲戀(기녀 두향과 퇴계 이황의 비련)

 

 

 

 

 

이황(李滉-1501~1570 ,退溪,퇴계)선생이1548년 그의 나이 47세 일때 충청도 단양(丹陽) 군수를 제수 받아 10개월을 재직하였다. 이때 단양(丹陽)에는 두향(杜香)이란 관기(官妓)가 있었다.

 

두향은 본시 기녀가 아니었으나 5살 때 부모와 사별하고 퇴기(퇴기)인 수양모 아래서 자라 10살 때 기적에 올랐다고 전한다.

 

그는 얼굴도 뛰어나게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시문과 서화에도 특히 매화와 난초를 사랑했다고 한다. 그녀는 군수로 부임한 퇴계(退溪)선생의 고매한 인격과 심오한 학문에 감탄하여 수청기생을 자청하였다. 두향은 퇴계(退溪)선생에게 사랑의 증표로 여러 가지 선물을 드렸으나 청렴 결백한 그는 번번이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두향(杜香)은 포기하지 않고 퇴계선생이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지를 아전들에게 물어 매화를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두향은 곧 많은 돈을 드려 수소문 끝에 매화 한 그루를 구했는데 그 꽃 빛이 희다 못해 푸른 빛이 나는 진귀한 매화였다.

 

그 매화를 퇴계(退溪)선생에게 드리니 "나무야 못 받을 것 없지." 하고 그 나무를 동헌 앞에 심고 즐겼다. 그 후 퇴계(退溪)선생은 풍기(豊基) 군수로 옮겨 가게 되었는데 이 때 매화나무도 함께 가져가서 도산(陶山)에 심었다고 한다.

 

 

 

 

꽃잎이 아래로 드리운 수양매(垂楊梅 거꾸로 피는 매화)를 보고 지은 시는

 

 

 

 

도수매(倒垂梅)

 

 

 

 

一花?背尙堪猜 胡奈垂垂盡倒開

 

일화재배상감시 호내수수진도개

 

 

 

 

賴是我從花下看 昴頭一一見心來

 

뢰시아종화하간 묘두일일견심래

 

 

 

 

한 송이 꽃 약간 뒤돌아 피어도 오히려 의심스럽거늘

 

어찌하여 모두 거꾸로 드리워져 피었는고

 

그 까닭을 알고자 꽃 아래에서 살펴보니

 

머리 쳐든 한송이 한송이 꽃심이 보이네

 

 

 

 

다음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이 44세 때 매화를 보고 시로 읊은 작품

 

 

 

 

막고산(姑山) 신선이 눈내린 마을에 와

 

형체를 단련하여 매화 넋이 되었구료

 

 

 

 

바람에 맞고 눈에 씻겨 참 모습 나타나니

 

옥빛이 천연 스럽게 속세를 뛰어 났네

 

 

 

 

이소(離騷)의 뭇 화초에 끼어 들기 싫어하고

 

천년이란 고산(孤山) 한번 웃음 웃네

 

제비봉과 금수산, 멀리는 월악산이 감싸고 있어 충주호 수운관광의 최절경지로 손꼽히고 있으며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은 구담봉의 장관을 보고

 

 

 

 

碧水丹山界 淸風明月樓

 

벽수단산계 청풍명월루

 

 

 

 

仙人不可待 ??獨歸舟 슬플 초(+) 슬프할 창(+)

 

선인불가대 초창독귀주

 

 

 

 

푸른 물 단양과 경계를 이루는 이곳

 

청풍에는 명월루가 있다지

 

신선이 기다려 주지 않아

 

실망하고 홀로 배타고 돌아오네.

 

라고 읊었다 한다.

 

 

 

 

퇴계(退溪 李滉)선생은 죽기 전에 그 유언이 매화꽃에 물을 주는 것이었다는 군요 선조3(1570) 128일 아침 시봉하는 사람에게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명한 뒤 저녁 5시에 편안하게 세상을 뜨셨다고 한다.

 

삼봉의 이야기

 

단양(丹陽)의 명승지인 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 때, 떠 내려와 지금의 도담 삼봉이 되었으며, 그 이후 매년 단양에서는 정선군에 세금을 내고 있었는데 어린 소년 정도전(鄭道傳 13421398 고려 말 조선 초 문신·학자·개국공신.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우리가 삼봉을 정선에서 떠내려 오라 한 것도 아니요,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어 아무 소용이 없는 봉우리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으니 필요하면 도로 가져가라고 한 뒤부터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將軍峰(장군봉)에는 삼도정(三嶋亭)이라는 육각정자가 있는데 나룻배를 타고 이곳에 올라 시 한수 읊으면 누구라도 신선이 된듯하다. 일찌기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은

 

 

 

 

山明楓葉水明沙 三島斜陽帶晩霞

 

산명풍엽수명사 삼도사양대만하

 

 

 

 

爲泊仙橫翠壁 待看星月湧金波 (떼 사 +)

 

위박선사횡취벽 대간성월용금파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석양의 도담삼봉엔 저녁놀 드리웠네.

 

신선의 땟목을 취벽에 기대고 잘적에

 

별빛 달빛아래 금빛파도 너울지더라

 

 

김시습(金時習 1435-1493자는 영경(悅卿)호는 매월당(梅月堂)만의 매화에 대한 아름다운 예찬이 깃들어 있는 매화시(梅花詩)는 다음과 같다.

 

 

 

 

花時高格透群芳 結子調和鼎味香

 

화시고격투군방 결자조화정미향

 

 

 

 

直到終時存大節 衆芳那堪窺其傍.

 

직도종시존대절 중방나감규기방.

 

 

꽃 필 때의 높은 품격 꽃 중에 빼어나고

 

열매 맺어 조화하면 국 맛이 향기롭다.

 

끝 날때가 되어서도 큰 절개를 두고 있으니

 

여러 꽃 들이 어찌 그 곁을 엿볼수 있으리.

 

 

 

 

그는 누구보다도 매화의 품격과 조화를 사랑했던 사람이다.

 

 

 

 

풍기군수로 전근 간 퇴계(退溪)선생이 몸이 쇠약해져 사직하고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두향은 칠성당을 짓고 이황의 건강을 소원했으나, 이황이 죽자, 저승에서 다시 모시겠다는 일편단심으로 자신의 유해를 남한강 강선대(降仙臺 단성면 장회리 소재)에 묻어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26세 꽃 같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는 도연명의 시를 좋아했고, 그의 사람됨을 사모하였으며,

 

훗날 전원으로 돌아가기(歸田園)를 그토록 갈망했던 것은 소년시절 도연명(陶淵明 365427)중국 동진(東晉()나라의 시인)에게서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퇴계(退溪)선생이 열다섯 살에 처음으로 지은 가제(石蟹)라는 제목의 이 시는 동심이 그대로 묻어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負石穿沙自有家 前行走足偏多.

 

부석천사자유가 전행각주족편다.

 

 

 

 

生涯一山泉裏 不問江湖水幾河.

 

生涯一국산천이 불문강호수기하.

 

 

돌을 지고 모래를 파니 저절로 집이 되네

 

앞으로 가고 뒤로 달리니 다리도 많구나.

 

평생을 살아도 한 움큼의 산샘(山泉) 속이니

 

강호(江湖)의 파도치는 물이 그 얼마인지를 알지 못하네.

 

 

두향은 한편 퇴계(退溪)선생이 10개월 만에 단양골 원직를 떠나자

 

두향은 부화(富華)한 시중잡배(市中雜輩)와 어울리는 것이 그 어른의 인격에 대한 모독(冒瀆)이라 생각하고 아예 기적(妓籍)에서 물러 날 것을 결심하고 신임 사또에게 이황을 사모하는 몸으로 기생을 계속 할 수없다며 기적에서 이름을 없애 달라고 간청하여 기생을 면했다고 한다.

 

 

 

 

오로지 퇴계 선생만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면서 함께 노닐던 강변을 혼자서 거닐기도 하고,

 

수많은 사연들을 추억하면서 외롭게 살다가 나중에 퇴계(退溪)선생이 안동에서 타계하자 두향은 강선대(降仙臺)에 올라 거문고로 초혼가를 탄 후 일생을 마치면서 내가 죽거든 내 무덤은 강가에 있는 거북바위(龜岩) 옆에 묻어다오,

 

거북바위는 내가 퇴계 선생을 자주 모시고 가서 시를 말하고 인생을 논하던 곳이다. 라는 유언에 따라 400여년 동안 그 곳에 묻혀 있다가 충주 땜이 건설되어 수몰될 지경에 놓이자

 

퇴계의 15대손인 이 동준(李東俊)의 주선으로 1985년 지금의 신단양 제미봉 기슭으로 이장되었다. 그 때 비석을 세웠고. 비석에는 杜香之墓라 했는데, 이동은(李東恩) 퇴계 종손이 썼다 고한다. 두향의 존재가 인정되기까지는 너무도 많은 세월이 지났다.

 

 

 

 

그 묘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될 뻔한 적이 있었다. 퇴계 선생의 후손이자 국학자인 고 이가원(李家源 19172000 한문학자. 경상북도 안동(安東) 출생) 선생이 생전에 두향 묘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그분이 전해준 말은

 

수몰(水沒)을 앞두고 고심하던 어느 날, 그분 꿈속에 두향이 나타났다. 두향은 "나를 그대로 두시오. 물에 잠겨서라도 이곳에 있겠소"라고 했다는 것이다. 곡절 끝에 지금 자리로 이장되긴 했으나 두향(杜香)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은 꿈속에서도 단호했다. 퇴계 선생이 임종(臨終)을 앞두고 남긴 말은 알다시피 "저 매화에 물 줘라"이다. 그 말에서 선생의 심중에 남은 두향(杜香)의 모습은 아리따운 모습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 생각에 지친 야윈 모습이 였을가.

 

 

 

 

그 후 도산으로 옮겨진 두향(杜香)의 매화는 선조3(1570) 128일 한서암(寒棲庵)에서 좌절(坐折)한 후에 매화도 함께 고사 했다고 한다.

 

 

 

 

그 후로부터 단양 기생 들은 강선대(降仙臺)에 오르면 반드시 무덤에 술잔을 올리고 놀았다고 한다. 그 이후 200년이 지난 어느 날 이광려 (李匡呂, 1720~1783 본관 전주(全州). 자 성재(聖載). 호 월암(月巖) ·칠탄(七灘)조선 후기의 학자)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외로운 무덤가에 누워있는데

 

물가 모래밭에는 붉은 꽃 그림자

 

어리어 있어라

 

두향의 이름 잊혀 질 때야

 

강선대 바위도 없어지겠지

 

 

 

 

지금도 잡초 우거진 두향(杜香)의 무덤이 단양에 남아 있게 되었다고 한다.

 

1976년 소설가 정비석(鄭飛石;1911~1991)은 그곳을 직접 찾아가 단양군수에게 충주 댐이 완성되면 두향의 묘가 수몰 되니 이장 하여 줄 것을 청하여 현재의 안전 곳으로 옴겨 졌다고 한다. 소설가 정비석이 쓴 명기 열전에는 두향이 죽령을 넘어 풍기로 찾아가 먼 발치에서 퇴계 선생을 바라보고 애정에 목마른 가슴을 안고 돌아 오는 장면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푸른 물은 단양의 경계를 이루고,

 

청풍에는 명월루가 있다.

 

선인은 어찌 기다리지 않고

 

섭섭하게 홀로 배만 돌아오는가.

 

 

 

 

라는 시로 거북 한 마리가 뭍으로 올라가는 형상의 구담봉(龜潭峰) 장관을 노래했다.

 

名妓 杜香 죽음의 이야기

 

 

두향의 죽음은 두 가지의 소문으로 전해진다.

 

하나는 유서를 남기고 부자를 달인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소복을 입고 강선대바위 위에서 뛰어내려 남한강에 투신하였다는 것이다. 워낙 물살이 급한 천탄(淺灘)이라 두향(杜香)의 몸은 사흘 만에 강물 위로 떠올랐다고 한다,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두향(杜香)이 남긴 유언에 따라 생전에 그녀의 초당이 있던 자리에 무덤을 마련해 주었다. 처음에는 해마다 매화가 무덤 주위에서 피어나 봄소식을 알리곤 하였다고 전한다.

 

탁 트인 호수 저편으로 한눈에 이퇴계(李退溪)선생이 가장 좋아하였던 구담봉(龜潭峰)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비록 강선대(降仙臺)는 수몰되어 물에 잠겼다고는 하지만 바로 이곳, 이 자리가 퇴계선생과 두향과 더불어 노닐고 감흥에 젖어 시를 읊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 곳일 것이다.

 

구담을 노래한 사람은 이퇴계(李退溪)선생 뿐이 아니다. 조선의 대학자로 이퇴계(李退溪)선생과 쌍벽을 이루던 이율곡(李栗谷)도 구담봉(龜潭峰)을 지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지 않았던가.

 

 

 

 

땅을 울리는 듯 잇단 피리소리에 나그네 놀라 깨니

 

어지러이 떨어지는 가을 잎이 창을 두드리는 소리라네

 

알지 못하겠구나. 밤이 새도록 찬강에 내리는 비가

 

수척이나 높은 구봉을 가벼이 넘나드니

 

 

 

 

정비석(鄭鼻石)의 명기열전(名妓列傳)에는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1903~1982)의 두향(杜香)에 대한 시는

 

 

 

 

두향아 어린 여인아 박명하다 원망치마라

 

네 고향 네 놀던 터에 조용히 묻혔구나.

 

지난 날 애국투사들 못 돌아온 이가 얼만대

 

강선대 노는 이들 네 무덤 찾아내어

 

술잔도 기울이고 꽃송이도 바친다기에

 

오늘은 가을 나그네

 

시 한장 주고 간다.

 

 

 

 

단양군수 수촌 임방(水村 任傍;1640-1724)은 두향시집(杜香墓詩)(任傍文集 수촌집에 수록)에서

 

 

 

 

一點孤墳是杜秋. 降仙臺下楚江頭

 

일점고분시두추. 강선대하초강두

 

 

 

 

芳魂償得風流價, 絶勝眞郞葬虎丘

 

방혼상득풍류가, 절승진랑장호구

 

외로운 무덤 하나 두추(두향)이라네

 

강 언덕 강선대 그 아래 있네

 

어여쁜 이 멋있게 놀던 값으로

 

경치도 좋은 곳에 묻어주었네

 

 

 

 

퇴계 선생은 말년에 아름답던 그 옛날과 두향을 그리워하며 지었을 것이라고 전해지는 시는

 

 

 

 

?券中間對聲賢. 虛明一室坐超然

 

황권중간대성현. 허명일실좌초연

 

 

 

 

梅窓又見春消息. 莫向瑤琴嘆絶絃

 

매창우견춘소식. 막향요금탄절현

 

 

 

 

옛날 책 속에서 성현을 만나보며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 다시 보니

 

거문고 대해 앉아 줄 끊어졌다 탄식마라

 

 

기녀 두향(杜香) -김석

 

 

 

 

두향은 단양 기녀입니다

 

지금은 장회나루 건너 기슭에 옮겨 누워서

 

푸른 전설 남한강 흐르는 물 바라보고 있습니다.

 

 

 

 

杜香은 선생이 홀로 물가 거니실 때면

 

먼발치로 따르며 흠모했습니다.

 

선생이 하늘길 가셨다는 풍문(風聞)의 날

 

매화분 옆 그녀 가슴에도

 

단양 하늘에도 눈이 내렸습니다.

 

 

 

 

가능하면 나를 강선대(降仙臺)

 

강선대 기슭에 묻어달라고

 

거문고 자락 밑에 글을 남기고

 

그녀는 몇 밤을 하현달이 이울도록

 

거문고 밤을 뜯었습니다.

 

 

 

 

님을 먼발치라도 따르며 바라보았던

 

짧은 세월 강물 위로 눈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눈보다 더욱 흰 그리움으로

 

흰옷을 가라입었습니다.

 

존경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례(喪禮)를 치렀습니다.

 

 

 

 

자국눈 사이 돌밭 골라 디디며

 

강선대 지나고

 

강기슭 잔설 위를 걸었습니다.

 

두 번 더 옥순봉 앞에서 넋을 놓다가

 

님 명복 빌고 빌었습니다.

 

이튿날 눈 위에 쓰러진 그녀 곁에는

 

一心이란 문양석 하나도 누워 있었습니다.

 

 

 

 

천 구백 팔십삼 년 햇살이 푸른 오월이었습니다.

 

단양부터 물길은 흘러서 목벌리 돌밭, 나는

 

검은 돌 속에 하얀 여인이

 

무릎 꿇어앉은 앉은 형상에

 

두 손을 곱게 모은 문양석 한 점 만났습니다.

 

흐르는 남한강 물에 곱게 씻어서

 

오월 햇살 섞어 품고 왔습니다.

 

송도 삼절 황진이가 세월이 흐른 뒤 자신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지었다는 시

 

 

小栢舟 소백주 잣나무 배 황진이

 

汎彼中流小柏舟 幾年閑繫碧波頭

범피중류소백주 기년한계벽파두

 

後人若問誰先渡 文武兼全萬戶侯

후인약문수선도 문무겸전만호후

 

저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조그만 잣나무 배

 

몇 해나 이 물가에 한가로이 매였던고

 

뒷사람이 누가 먼저 건넜느냐 묻는다면

 

문무를 모두 갖춘 만호후라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