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氣一元論

2017. 6. 19. 18:50성리학(선비들)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만물의 본질적 존재인 이(理)와 만물의 현상적 존재인 기(氣)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

  이기론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와 기의 관계를 "이와 기는 서로 뒤섞이지 않으며(理氣不相雜), 이와 기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理氣不相離)"는 말로 정리한다.

  존재의 본질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수양철학에서는 이를 중시해야 하므로 전자의 입장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고, 현실의 개혁에 치중하는 실천철학에서는 기를 중시해야 하므로 후자의 입장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다. 전자에만 치중하면 이기이원론으로 발전하고 후자에만 치중하면 이기일원론으로 발전한다.

  이기일원론적 입장에서는 이가 기보다 먼저 존재하며 이가 기를 낳는다고 하는 이기이원론적 주장을 거부한다. 명나라 때의 학자 나흠순(羅欽順)은 이기일원론적 입장을 강화하였고, 청나라 때의 학자 대진(戴震)은 "이는 기의 조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명언함으로써 이의 초월성과 불변성을 부정하였다.

  한국의 성리학에서는 이기일원론의 입장이 일부 수용되었다. 서경덕(徐敬德)은,

  "기 밖에 이가 없으며 이는 기를 주재하는 것"

이라 하여 이기일원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이(李珥)는 기본적으로는 이기이원론을 계승하면서도,

  "이와 기는 혼연하여 사이가 없고 서로 떨어지지 않으므로 다른 물건이라 할 수 없다."

고 함으로써 이기일원론적 입장에 비중을 두었다.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에서 본체의 ‘이(理)’와 현상의 ‘기(氣)’가 별개의 존재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임을 주장하는 이론. 이기론에서는 이와 기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 기초적인 중심 문제의 하나이며, 크게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으로 구분되고 있다.

  이와 기의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일반적인 원칙은, 이와 기는 뒤섞여도 서로 혼동할 수 없는 것(理氣不相雜)이며, 동시에 둘 사이를 갈라서 나누어 놓을 수도 없는 것(理氣不相離)이라는 상반된 규정이다.

  이 두 규정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면, 이와 기는 인식 과정에서는 개념적으로 서로 ‘구별’할 수 있지만, 존재의 차원에서는 하나의 실재로서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와 기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하더라도 두개의 존재가 함께 있는 것이라는 입장에 서면 이기이원론이 되지만, 함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가 다른 양상으로 인식될 수 있을 뿐이라는 입장에 서면 이기일원론이 된다. 따라서, 이기일원론에서는 이와 기 사이에 앞서고 뒤서는 것〔先後〕이 있다거나, 이가 기를 낳는다는 관계로 파악하는 이기이원론적 입장을 철저히 거부한다.

  정자(程子)는 성(性)과 기의 관계를 규정하면서, “성을 논하면서 기를 논하지 않으면 갖추지 못한 것이요, 기를 논하면서 성을 논하지 않으면 밝지 못하다.”면서 성과 기의 일체성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주희(朱熹)도 “기가 아니면 이도 머물 곳이 없다”고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기론을 집대성한 주희의 경우는 이와 기가 어느 한 쪽이 없이 다른 한 쪽만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이와 기는 확실히 두 가지 존재”라고 이기이원론적 입장을 확인하고 있다.

  이와 기의 일원적 통일성을 주장한 이기일원론의 대표적 인물로는 명나라 때의 나흠순(羅欽順)을 들 수 있다. 그는 주희의 이기이물설(理氣二物說)의 이원론을 거부하면서, “이는 기에 의거해 수립하고, 기에 붙어서 행해지는 것”이라고 이가 기에 의존해 통일된 존재임을 확인하였다. 그는 인식에서 이와 기의 구별이 필요함을 인정해, 이는 기에 나아가 인식하는 것이지만 기를 이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나흠순의 영향은 16세기 전반기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항(李恒)은 “심ㆍ성과 이ㆍ기는 혼연한 하나의 존재”라고 이기일물설의 일원론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또한, 서경덕(徐敬德)은 “기의 바깥에 이가 없으며, 이는 기를 다스리는 것(氣之宰)”이라 면서, 이가 기의 밖으로부터 와서 다스리는 것이 아니요, 다스린다는 것은 기의 작용에서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규정해 기 중심, 곧 주기론(主氣論)의 이기일원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황(李滉)은 서경덕이 ‘비이기일물설(非理氣一物說)’에서 말하는 “기이하고 기이하며 오묘하고 오묘하다.”는 이기일원론의 입장을 이기일물설에 빠진 것이라 비판하면서, 나흠순도 같은 입장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비해 기대승(奇大升)은 이황이 이·기를 분별하는 입장에 반대하면서, “이·기는 오묘하게 결합한 가운데 혼융(渾融)한 것”이라고 이기일원론적 입장을 제시하였다. 이이(李珥)의 경우도 “이와 기는 혼연하여 틈이 없어서 원래 서로 떠나지 않았으니 두 가지 존재(二物)라 할 수 없다.”라고 이기이원론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의 근원도 하나일 뿐이요 기의 근원도 하나일 뿐이라 서로 떠날 수 없으니, 이와 기는 하나다.”라고 이기일원론의 입장을 확인하고 있다. 그는 특히 이와 기의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을 ‘이·기의 오묘함(理氣之妙)’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기를 발동하는 것(發者)이라 하고, 이는 발동하는 까닭(所以發者)이라 하여, 기가 없이는 발동할 수 없고(不能發), 이가 없이는 발동이 없다(無所發)라 하여 어느 한쪽이 결여될 수 없는 통일체로 인식하고 있다.

  이기일원론은 조선 중기에는 서경덕·이이 등에 의한 주기론적 입장에서 이를 기 속에 포함시키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데 조선 말기에는 기정진(奇正鎭) 등에 의해 유리론(唯理論)의 입장에서 기를 이 속에 포함시키는 경향이 대두되고 있다.

  기정진은 이기일체론을 전제로 하면서, 기를 이와 상대〔對擧〕시키는 것은 성현의 말씀이 아니라 하여 이기이원론을 거부한다. 그리고 기를 이 속의 일이요 이가 유행하는 데 손발 노릇 하는 것이라 지적한다.

  이기일원론은 본체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통일시켜 일체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가치론에서는 이이의 경장론(更張論)처럼 현실과 이상의 이원화를 거부하고 현실에 적극적 관심을 지닌 현실주의적 입장을 취하기도 하고, 한말 위정척사론의 경우처럼 이상을 현실화시키려는 의지가 강한 이상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수양론적 도학의 학풍에 비해 능동적인 현실 참여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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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론(理氣論)

    <p>이기론(理氣論)은 우주의 근원적인 요소가 이(理)와 기(氣)로 형성되었다는 이론이다. </p><p>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이(理)와 기(氣)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理)란 어떤 것이 그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치요, 본래성이며,
    기(氣)란 어떤 것의 이치가 실현될 수 있는 재료이자 실현될 힘이다. </p><p>이처럼 이(理)과 기(氣)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이 세계 만사만물이 있기 위해서는 이 양자가 반드시 하나로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이(理)와 기(氣)는 그 존재적 역할과 기능에 있어 대등하고 상호의존적이며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 </p><p>이(理)는 태극(太極)이요,,,,  기(氣)는 음양(陰陽)이다.
    형이상(形而上)은 자연의 이(理)이고,,,,, 형이하(形而下)는 자연의 기(氣)이다." </p><p>여기서 이(理)라는 개념은 << 세상 만물을 정신적인 체계로 >> 보는 개념이고 --- 목적, 의미, 가치 --- 합리 --- 주관적기(氣)라는 개념은 << 물질적인 요소 >> 를 강조한 사상이다. -------------- 결과, 실질 ---- 경험 ---- 객관적 이(理)는 지배계층의 계급인 사(士)를 말하고, 기(氣)는 피지배계층의 계급인 민중을 말한다 </p><p>이(理)는 남자(男)이고,,, 기(氣)는 여자(女)이다.
    이(理)는 하늘(天)이고,,,,기(氣)는 땅(地)이다.
    이(理)는 양(陽)이고,,,,,, 기(氣)는 음(陰)이다.  </p><p>그래서 이(理)를 강조한 주리론(主理論)이 있고,,,, 기(氣)를 강조한 주기론(主氣論)이 있다.</p> </p>


 주리론(主理論) & 주기론(主氣論)

    <p>이(理)와 기(氣) 가운데 무엇을 더 근원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는가?
    또 무엇이 더욱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따라 학자들의 의견이 달라진다 </p><p>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기(氣)가 근본적 요소이며 이(理)는 기(氣)의 변화생성의 법칙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p><p>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理)가 근본적 요소로써 기(氣)는 단지 이(理)에 의해 변화 생성되는 재료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p> </p>


 이기 일원론(理氣 一元論) & 이기 이원론(理氣 二元論)

    주자 ( 朱子 : 1130 년 ~ 1200 년 ) : 중국 남송( 南宋 )의 유학자 --- 이기 이원론(理氣 二元論)<span style="font-size: 11pt;"></p></span>
      <p>공자, 맹자의 철학을 연구하여 윤리학적인 유학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을 창시하였다.
      주자의 철학은 지금까지 동양을 대표하는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유교  </p><p>그는 우주만물을 형이상학적인 이(理)와 형이하학적인 기(氣)로서 구성되어있다고 보고,
      인간의 본성은 선한 이(理)가 발하여 나타나는 것이나,,,,, 불순한 기(氣)로 인하여 악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이론을 주자( 朱子 )의 이기 이원론(理氣 二元論) 이라고 한다 </p><p>그는 송나라의 유학자였던 주돈이(周敦頤 : 1017년~1073년)가 쓴 태극도설(太極圖說) 의 영향을 받아
      이(理)와 기(氣)로 이뤄진 우주와 만물이 생성되고 움직이는 운동법칙을 태극(太極) 의 원리로 설명하였다.< </p><p> </p><p>
      화담 서경덕(徐敬德) -- ( 1489 년 ∼ 1546 년 ) --- 주기론(主氣論) & 이기 일원론(理氣 一元論)
       </p><p>주역에서의 변역(變易)에 역점을 두고 주장하였다.
      기(氣)를 중시하는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한 학자이다.  </p><p>그가 주장한 주기론(主氣論)은 이(理)라는 원칙이 사물에 기운을 불어넣어 현실에서 현상이나 작용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주장이다. </p>
        <p>성리학의 시조인 주자( 朱子 )는 이(理)와 기(氣)를 다른 것으로 보았는데,
        화담은 주자( 朱子 )의 이기이원론(理氣 二元論)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이기일원론(理氣 一元論) 주장 </p><p>그는 이(理)와 기(氣)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이(理)와 기(氣)가 서로 작용 원리로 사용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p><p>그는 음기와 양기의 양능(良能)으로 생성변화가 이루어가는 법칙을 <이(理)>라고 하였다. </p>
      <p></p><p> </p><p>
      퇴계 이황(李滉) --- ( 1501 년 ~ 1570 년 ) --- 이기 이원론(理氣 二元論)</p>
        <p>이(理)를 중시 </p><p>이(理)와 기(氣)는 자연과 우주를 구성하는 근본 요소이다.
        기(氣)는 우주를 구성하는 질료이면 이(理)는 그 조직과 생성의 질서이다.
        이 두 요소는 비록 형상적으로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서로 근원을 달리한다.
        퇴계는 이와 같이 이기 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자연철학을 확립하였다 </p><p>이(理)는 아무리 많은 개별성으로 나누어진다 해도 그 보편적 본질이 언제나 동일하므로 선의 근원이 되고, 기(氣)는 청탁(淸濁), 수박(粹粕), 정조(精粗), 강약(强弱) 등의 차이가 있으므로 악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  </p><p>퇴계는 만약 이러한 이(理)와 기(氣)의 차이를 혼동한다면 사물과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큰 혼란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윤리 도덕의 기준이 되는 선악의 구별도 불가능해진다고 확신하였기에
        이(理)와 기(氣)가 하나가 아니고 둘로 나뉘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p><p>퇴계는 주역의 삼의(三義) 중에서 불역(不易) 측면을 강조하였다 </p><p>오늘날 과학의 발달로 야기되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인간과 기계는 구별될 수밖에 없으며,
        문제점의 원인을 퇴계철학을 통해서 알고자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p><p><서경덕의 기론은 인간의 주체적 능동성과 자유로운 권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p><p>이황은 태극을 강조하여  </p><p><지극히 존귀하여 만물을 명령하는 자리요, 어떠한 것에도 명령받지 않는 것>이라 했다.  </p><p>그는 또 만물 중의 태극보다도 인심(人心) 중의 태극을 강조하고, 인간 자아의 인격과 성명의 주체성을 진리의 근본으로 삼았다. </p>
      <p></p><p>
      고봉(高峰) 기대승 (奇大升 ; 1527 년 ~ 1572 년 ) --- 이기 일원론(理氣一元論) </p>
        <span style="font-size: 11pt;">조선 중기시대 전남 나주(羅州) 출신의 성리학자, </span><span style="font-size: 11pt;">32세때 퇴계 이황(李滉)의 제자가 되었다.</span>
        <span style="font-size: 11pt;">스승인 퇴계 이황(李滉)의 이기 이원론(理氣 二元論)을 비판하고 이기 일원론(理氣 一元論)을 주장하였다</span>
      <p>
      율곡(栗谷) 이이(李珥) --- ( 1536 년 ~ 1584 년 ) --- 이기 이원적 일원론(理氣  二元的 一元論) </p><p></p>
        <p>이(理)와 기(氣)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묘합(妙合)의 논리를 주장하였다.
        이기지묘(理氣之妙) 라고 불리는 것으로 이율곡 이기론(理氣論)의 중심사상이다 </p><p>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이(理)를 원인으로 보고,,,,기(氣)를 결과로 보는 기발 이승 일도설( 氣發 理乘 一途說 )을 주장하였다.
        여기서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명백히 시간이 개입하는데, 동일한 하나의 개체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위치를 바꾼다는 것이다.
        위(上)가 되기도 하고, 아래(下)가 되기도 하며, 남자(男)가 되기도 하고, 여자(女)가 되기도 하며, 음(陰)이 되기도 하고 양(陽)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p><p>원인과 결과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고 이(理)와 기(氣)는 결국 하나로 통합될 수 밖에 없다</p>

      결론
        <p>이기 이원론과 이기 일원론은 한국에서는 최종적으로 일원론(一元論)으로 결론이 났다. </p><p>토론과 토론을 거쳐 일원론(一元論)의 승리로 결론이 났다.
        이(理)와 기(氣)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은 작용 원리로 사용된다는 일원론(一元論)의 승리는 지배 계층( 이--理 -- 양반 )과 피지배 계층 ( 기-- 氣 -- 민중 ) 과의 싸움에서 피지배 계층이 승리한 것이다.  </p><p>이기 일원론(理氣 一元論)의 승리로 조선은 좀더 대중 친화적이고, 현실 참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정책이 나오게 되었다 </p><p>조선의 유교가 2분법적 차별주의를 극복하고, 일원론(一元論)으로 나가는 것과 함께 조선의 불교도 주류와 비주류를 통합하여 좀더 진보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p>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만물의 존재가 이(理)와 기(氣) 두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론.
정이(程)가 주창하였고 주희(朱熹)가 완성하였다.

 


성리학의 발생시기는 불교의 폐해가 노출되어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시켰던 당나라 말기였다.

 


한유(韓愈)는 오륜(五倫) 등을 강조하는 유교의 사회철학적 입장에서 사회성이 결여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배척하였으며,

 


이고(李)는 불교의 장점인 해탈의 논리를 유교의 이론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불교의 필요성을 부정하였다.
이고가 재구성한 유교적 해탈의 논리는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초월적이고 불변적인 요소인 성(性)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성은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존재하는 주관적인 것이어서 인식하기 어렵다.

 


이고를 계승한 송나라의 주돈이(周敦)는, 바깥의 사물에 존재하는 불변자와 자신의 성이 일치한다는 전제 하에,
자신의 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바깥 사물에 내재하는 불변자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방법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주돈이는 음양오행으로 구성된 만물의 내면에는 무극(無極)과 태극이라고 하는 불변자가 있음을 확인하였고,
뒤를 이은 장재(張載)는 기(氣)가 잠시 모여서 형성된 형태가 만물의 현상태이고
기가 흩어진 상태인 태허(太虛)가 만물의 본질태라 파악함으로써 만물의 불변적인 본질을 확인하였다.

 


그 뒤 정이는 만물의 현상태인 음양오행 등을 기로 수렴하고
무극, 태극, 태허 등의 불변하는 만물의 본질을 이(理)로 수렴함으로써 이기론을 완성하였는데
이 이기론은 주희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성리학의 중심적인 이론이 되었다.

 


정이와 주희에 의하여 완성된 이기론은 원래 인간의 불변적 본질인 성을 인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개된 것이므로
만물의 변하는 요소인 현상태를 대변하는 기와 불변하는 요소인 본질태를 대변하는 이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이원론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만물의 물질적 존재와 삶의 작용, 인간의 감정 등 인식가능하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모든 요소는 기이다.
기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본질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인식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며
궁극적으로 하나로 귀일되는 요소는 이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본질이 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여 이의 입장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유교철학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한국의 성리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이기이원론을 수용하지만,
퇴계 이황(李滉)을 중심으로 하는 수양철학에서는
존재의 본질을 회복하여야 하는 입장 때문에 이를 중시하였고,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철학에서는
현실을 개혁해야 하는 입장 때문에 존재의 현실적 요소인 기를 강조하였다.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만물의 본질적 존재인 이(理)와 만물의 현상적 존재인 기(氣)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
이기론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와 기의 관계를 “이와 기는 서로 뒤섞이지 않으며(理氣不相雜),
이와 기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理氣不相離)”는 말로 정리한다.

 


존재의 본질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수양철학에서는 이를 중시해야 하므로 전자의 입장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고,
현실의 개혁에 치중하는 실천철학에서는 기를 중시해야 하므로 후자의 입장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다.

 


전자에만 치중하면 이기이원론으로 발전하고 후자에만 치중하면 이기일원론으로 발전한다.

 


이기일원론적 입장에서는 이가 기보다 먼저 존재하며 이가 기를 낳는다고 하는 이기이원론적 주장을 거부한다.

 


명나라 때의 학자 나흠순(羅欽順)은 이기일원론적 입장을 강화하였고,

 


청나라 때의 학자 대진(戴震)은
“이는 기의 조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명언함으로써 이의 초월성과 불변성을 부정하였다.

 


한국의 성리학에서는 이기일원론의 입장이 일부 수용되었다.

 


서경덕(徐敬德)은 “기 밖에 이가 없으며 이는 기를 주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기일원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이(李珥)는 기본적으로는 이기이원론을 계승하면서도
“이와 기는 혼연하여 사이가 없고 서로 떨어지지 않으므로 다른 물건이라 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이기일원론적 입장에 비중을 두었다.

 

http://home.cein.or.kr/~kupkika/cha1-1-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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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설명하자면.....

 

1)이기 일원론은 하나(본질,진리)그 자체로서만 만물은 존재한다는 것이고
결코 하나에서 유출된 또다른 하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어렵게 사람들이 설명하지만 일원론은 일신론과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취한다고 보시면 될 것같습니다.

 


예)신은 원래 하나였고, 언제나 하나로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종교의 근간을 일신교라고 칭하는 이유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유대인에게 있어서 유일신 신앙은 막연한 이름이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야웨)라고 하는 유일신의 속성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신앙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여호와=야웨=메시야=예수를 동일하게 한 신으로 섬기는 것을 일신론으로 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상제,천,진리,본질)을 섬긴다고 하지만
하나에서 유출된 인위적인 요소(인간의 열성, 종교성, 제사, 형식)를 신앙으로 알고 있는
유대인의 돈과 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주의자들은 실상은
유대의 근원적인 신앙이라는 측면에서는 일원론(일신론,유일신 신앙)을 상실한 이원론을 취하고 있는
이방 즉 뱀의 후손으로 취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일원론=천의 본질을 가진자=피로서 죄가 가리워진 자=인간에게서 유출된 일체의 개념을 거부하는자=그 사상의 절대성을 믿고 의지하는 자
각 국면에서(종교 사상) 일신론의 절대성을 믿음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아마 여기에는 빈부의 귀천과는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2)이기 이원론은 하나(본질,진리)에서 유출된 또다른 물질적인 요소를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경우(동,서양의 사상의 근간)가 마찬가지라 할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유대인의 예를 들자면 자신들은 새의 백성(천국 백성, 교회, 이스라엘)로 보았습니다.
말그대로 자신들은 일신론(일원론)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이 신앙해야 할 것은
형식적으로 신의 이름이나 제사나 율법을 지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바로 이들이 일신론으로서 신의 백성(진리,본질,정통성)으로 간주되어 지는 방식은
이러한 제사나 율법이나 신의 이름 그 자체가 아니라
제사나 율법이나 신의 이름이 대관절 자신과 무슨 관계에 있으며
자신이 그것들의 뜻을 지향하고 있는가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천손의 자손(천의 개념, 상제의 개념)은 그 본질을 잃지 않은 자들을 통하여
육의 관계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천의 본원적인 의지에 의해 유지된다는 사상입니다.

 

 

 

===>이원론=천의 본질을 상실하고 인을 천과 동일시하는 자=피라는 개념과 상관없는자=인간(육,국가,조직,민족)의 가능성을 꿈꾸는자=그러한 사상을 당연히 여기며 살아가는 대다수의 민족주의자, 종교주의자
종교내에서 진리의 개념을 부차로 돌려버리고 숭상숭배, 인간숭배, 인간이성을 근간하는 일체의 종교성들....오늘날 대다수의 일신론자로 시작하였다가 이신론자로 변한 카톨릭,기독교,또한 대다수 조직종교들이 그 범주에 들어 간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들의 사상은 이원론이 지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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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파(조선 세조의 찬위를 도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관료학자들)

 

정인지() ·신숙주() ·최항() ·권람() ·서거정() ·양성지() ·이석형() ·강희맹() ·이극돈() 등이 이 파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조의 공신() ·충신() 또는 어용학자()들로서 높은 관직에 기용되었고, 관찬사업()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수차에 걸친 공신전()의 지급을 통하여 막대한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신진사류()인 사림파()의 등장으로 그 세력이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즉, 사림파는 훈구파에 대해 토지제도의 개혁을 요구함으로써 두 세력 사이에 충돌을 야기하였으며,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훈구파는 이 사화에서 영남유생과 싸워 승리했고,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도 사실상 승리하였다.  

 

사림파(조선 중기에 사회와 정치를 주도한 세력을 가리키는 말)

 

 

고려 말, 조선 초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두 차례의 사화()를 겪은 15세기 말엽에 와서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니는 정치세력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본래 지방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 중소지주 출신의 지식인으로, 중앙의 정계에 진출하기보다는 지방에서 유향소()를 통하여 영향력을 행사해 오던 세력이었다. 학문적으로는 사장()보다는 경학()을 중시하였고, 경학의 기본 정신을 송대 신유학 가운데서도 성리학()에서 구하였다. 길재()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이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의 제자를 배출하면서 그 세력이 커졌다.  

성종 초에 김종직 등 영남출신 사류()를 등용하면서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훈신()들의 장기 집권에 따른 비리로 인해 동요하는 지방사회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세조 말에 혁파된 유향소제도를 부활하여 《주례()》의 향사례(향음주례()를 시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기반이 강한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유향소가 권력가의 지방에 대한 수탈의 하부조직으로 악용되었다. 이에 지방에서는 사마소()라는 독립기구를 만들어 대항하는 한편, 중앙에서는 삼사() 등 주로 언론 ·문필 기관의 관직을 통해 정계로 진출하여 훈신·척신() 계열의 비리를 비판하는 언론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에 대한 훈신·척신의 보복으로 사화가 발생하여 그 세력이 크게 제거되었지만, 중종대에 다시 정계에 진출하여 조광조()를 중심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일종의 천거제인 현량과()를 통해 자기 세력을 중앙으로 크게 진출시키고, 지방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주자()가 증손()한 여씨향약()을 군현마다 시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훈신·척신의 강한 반발로 또다시 사화가 발생하여 그 세력이 크게 꺾였다. 이후 지방에서 서원()과 향약을 토대로 기반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다가, 16세기 후반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척신정치가 일단 종식되면서 중앙에 활발하게 진출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후에는 척신정치의 척결문제를 둘러싸고 선배 관인과 후배 관인이 서인(西)과 동인()으로 대립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붕당()으로의 분기가 거듭되고 일부 세력의 도태를 겪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을 계기로 17세기 후반까지 학연을 기반으로 한 서인·남인()을 중심으로 붕당정치의 질서를 수립하였다. 권력가들의 탄압을 뚫고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면서 자기들의 이념을 정치에 구현하려 한 전통은 그후 조선 후기의 지배층이 사회와 국정을 이끄는 기본정신이 되었다 

 

무오사화

언제:1498년(연산군 4)  무엇을: 사화

누가:유자광 중심의 훈구파 어떻게:김일손 등 신진사류의 처형과 귀향, 파면

왜: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 

 

 1498년(연산군 4)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사초()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로 조선시대 4대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이다. 사림파의 중앙진출을 보면, 세조 때 중앙집권·부국강병을 지나치게 추구하고, 훈구 대신들이 권력·재산을 모으자, 성종 때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 정계로 진출하였다. 3사(: · ·)의 언론직() 및 사관직()을 차지하면서 훈구 대신의 비행을 폭로·규탄하고, 연산군의 향락을 비판하면서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였다.한편 훈구파는 사림파를 야생귀족()으로 보고, 사림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여 연산군 이후 그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종직과 유자광은 일찍이 개인감정이 있었고,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으면서 훈구파 이극돈()의 비행과 세조의 찬탈을 사초()에 기록한 일로 김일손과 이극돈 사이에도 반목이 생기게 되었다. 유자광·이극돈은 김종직 일파를 증오하여 보복에 착수하였다.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자, 실록청() 당상관()이 된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 하고, 이를 문제삼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이와 같은 죄악은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었다. 사림파 김일손·권오복()·이목()·허반(권경유() 등은 선왕()을 무록()한 죄를 씌워 죽이고, 정여창()·강겸()·이수공()·정승조()·홍한()·정희랑()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 죄로, 김굉필(이종준()·이주(박한주()·임희재(강백진()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보냈다.   

 

한편, 이극돈·유순(윤효손(어세겸() 등은 수사관()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하였다. 이로써 사화 발단에 단서가 된 이극돈이 파면된 뒤 유자광은 그 위세가 더해진 반면, 많은 사림파 인사들이 희생되었다. 

 

갑자사화

언제:1504년 연산군 10년  어디서:조선왕궁 누가:연산군

무엇을: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위문제와 관련된 사화

어떻게:윤씨복위에 반대한 선비들을 처형(부관참시)하고 그들의 가족들도 처벌함

왜:연산군 어머니의 원수갚음과 동시에 선비들의 기를 누름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 

 

 

 

성종비() 윤씨는 질투가 심하여 왕비의 체모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하였다는 이유로, 1479년(성종 10) 폐출()되었다가 1480년 사사()되었다. 윤씨가 폐출 사사된 것은 윤씨 자신의 잘못도 있었지만,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엄숙의()·정숙의(),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합심하여 윤씨를 배척한 것도 하나의 이유로 볼 수 있다. 한편 연산군의 사치와 낭비로 국고가 바닥이 나자 그는 공신들의 재산의 일부를 몰수하려 하였는데, 이때 임사홍()은 연산군을 사주하여 공신배척의 음모를 꾸몄다. 이때 폐비윤씨의 생모 신씨()가 폐비의 폐출·사사의 경위를 임사홍에게 일러바쳤고, 임사홍은 이를 다시 연산군에게 밀고하면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연산군은 이 기회에 어머니 윤씨의 원한을 푸는 동시에 공신들을 탄압할 결심을 한 것이다.  

 


연산군은 정·엄 두 숙의를 궁중에서 죽이고 그들의 소생을 귀양보냈다가 사사하였다. 그의 조모 인수대비도 정·엄 두 숙의와 한패라 하여 병상에서 난동을 부렸으며 그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폐비 윤씨를 복위시켜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에 배사()하려 하였는데, 응교 권달수()·이행() 등이 반대하자 권달수는 참형하고 이행은 귀양보냈다. 또한 성종이 윤씨를 폐출할 때 찬성한 윤필상(이극균()·성준()·이세좌()·권주(김굉필()·이주() 등을 사형에 처하고, 이미 죽은 한치형(한명회(정창손(어세겸()·심회()·이파(정여창(남효온() 등의 명신거유() 등을 부관참시()하였으며, 그들의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하였다. 이 외에도 홍귀달()·주계군(
) 등 수십명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다.   

 


이 사건은 표면상 연산군이 생모 윤씨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벌인 살육으로 평가할 수도 있으나 그 이면에는 조정 대신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작용한 결과이다. 연산군의 극에 달한 향락생활과 사치로 인해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자 이를 제어하려는 신하들과 연산군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신장하려는 신하들로 나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궁중세력()과 훈구 사림파 중심의 부중세력()으로 나뉘게 되었고, 임사홍이 이러한 구도를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연산군의 복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임사홍은 무오사화 때 당한 원한을 갚기 위해 연산군비 신씨의 오빠인 궁중세력의 신수근()을 끌어들여 부중세력의 훈구파와 무오사화 때 남은 선비들을 제거하기 위해 옥사를 꾸몄던 것이다.   
 

 
갑자사화는 이후 국정과 문화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는데, 사형을 받았거나 부관참시의 욕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역사상 그 이름이 빛나는 명신과 대학자·충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사화로 성종 때 양성한 많은 선비가 수난을 당하여 유교적 왕도정치가 침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연산군의 비행과 폭정을 비난하는 한글 방서사건()이 발생하자 글을 아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옥사를 벌였고, 이를 계기로 한글서적을 불사르는 등 이른바 언문학대()까지 자행되어 이후 국문학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연산군의 계속된 실정은 새로운 정치질서를 모색하는 사람들에 의해 중종반정()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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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라 함은 일반적으로 16세기에 훈구파 내지 훈신, 척신 계열과 대립한 재야사류를 배경으로 형성된 정치 세력을 일컫는다. 이 사림이라는 용어는 고려 말, 조선 초에도 간혹 쓰이긴 했으나 무오사화 이후 사화가 거듭되면서 사화를 당한 선비 집단을 통틀어 표현하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사림파라는 용어는 근대 역사학의 성립 후에 비로소 쓰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 사학자의 저술에는 조선 전기의 문인, 학자의 유파를 훈구파, 절의파, 사림파, 청담파 등으로 구분했는데 이 구분에서 사림파는 훈구파와 대비되는 존재로서 그 대상이 둘로 나누어지고 있다.  

 

우선 성종 대에는 문장, 경술과 관련하여 영남 일대의 종주격이던 김종직 문하를 가리켰고, 다음으로는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의 밑에서 수업한 중종 대의 조광조 일파를 지칭했다.  

김종직 문하들이 주로 문예를 중시한 영남학자들 이었다면 조광조 일파는 도학의 비중을 절대시했던 영남, 기호학자들이라는 점이 둘 간의 차이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을 일컬어 사류 또는 사족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 이후 도학에 중 점을 둔 집단적인 학파를 이룬 사람들을 사림이라고 하기도 했다. 따라서 사림은 현직 관리보다는 재야 지식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학자들을 지칭한다. 이들의 학습은 관학인 사부학당이나 향교보다는 서원이나 서재를 통한 경 우가 많았고, 사림파는 신유학(성리학) 중에서도 중국 송대의 정호, 정이 형제와 주희가 체계화한 정주 성리학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성리학은 송학, 정주학, 이학, 도학이 한 계통이고 명학, 육왕학, 양명학, 심학이 다른 한 계통을 이룬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자인 정주계의 이학이 발달하고 상대적으로 육구연, 왕수인 등이 체계화한 육왕계의 심학은 별로 발 달하지 못했다.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 흔히 성리학이라고 하면 정주계의 이학을 가리킨다.  

 

우리 나라의 성리학사에서 볼 때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말까지는 사림파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사화기 시대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화를 겪으며 사림파 학자들은 15세기 중엽부터 약 1세기 동안 성리학 특유의 의리의 실천에 역점을 두고 성장했다. 이처럼 조선 성리학은 일종의 실천 성리학으로서의 도학적 특색을 지녔는데, 사림파 학자들이 성리학의 의리관을 실천에 옮기려는 경향을 흔히 사림파 정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는 사회 운동 내지는 정치 사상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당시 사림파 학자들이 체질화시킨 성리학의 규범은 도덕적 규범의 성격이 강했지만 동시에 정치적 성격을 지닌 규범이기도 했다. 

 

 사림파의 정치적 활동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향촌 질서의 재확립과 관련되는 사회 운동으로, 일종의 지방자치 기구인 유향소 및 향약의 제도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회 운동은 관료제에서 나타나는 모순들을 혁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군주 정치에 대한 인식에서도 그 이전의 정주학자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조선왕조 초기의 정치 주체는 군주로 인식되고 있었지만, 16세기 이후의 사림파 정신에서는 군주 역시 신하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닦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군주가 도학적 인격을 갖추지 못하면 군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가치관이 성립되어 있었다. 주자의 '대학'정신에서 비롯된 이같은 인식의 전환은 군주제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군주의 절 대권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도학적인 이념을 실천하는 군주를 요구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인재의 등용에서도 과거제보다는 천거제를 선호하였다. 그것은 과거제가 인간을 다스리는 능력을 측정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때문에 사림이 공인하는 인재들을 천거의 형태로 등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 며, 실제 중종 대의 조광조 등은 현량과를 통해 이를 실천으로 옮기기도 했다.  

 

16세기 사림은 정치적으로 훈척 세력과 대립하면서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규합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척신 정치가 종식되자 사림은 내부적으로 학연과 파벌에 따라 나누어지게 된다. 이를 흔히 붕당이 라고 하는데, 이는 정파간의 상호 견제를 통한 새로운 신권 정치를 낳았다. 따라서 사림은 일차적으로 훈척의 대 립 세력으로 발생하여 몇 번에 걸친 사화를 겪은 다음, 선조 이후 훈척 세력이 거의 사라지자 내부적으로 파벌에 따라 나누어져 붕당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은 붕당 현상은 한쪽 파벌이 정권을 장악하지 않는 한 조선 조정을 균형있게 끌어가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는 곧 조선 후기의 정치에서 왕이 붕당의 조정자로 자리매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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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는 훈구파에 대한 비판활동을 제기하면서 향촌사회에서 세력근거지를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면 언론활동과 유향소(留鄕所)의 복립 노력이었다. 세조 즉위 이후에 군주와 정난공신(靖難功臣)을 비롯한 훈구파들이 정국을
주도했다. 이들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특권을 독차지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또한 강력한 인신적 지배예속을 매개로 농장과 같은 방법을 통하여 넓은 토지를 점유하고 양인농민에 압력을 가하여 전지노비(田地奴婢)로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인구(人口)를 은점(隱占)하고 있었던 훈구파에 대하여, 하천부지 등을 개간하여 자신의 농지를 확대하면서 소농(小農)을 기초로 경제력을 키우고 있었던 사림파로서는 그러한 행위가 자신들의 경제적 기초를 침해하는 것이기도 했다. 성종대에도 좌리공신(佐理功臣)이 정치세력의 중심이었다.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정부는 물론이고 이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대간(臺諫) 등 언관(言官) 계통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결국 왕권의 약화를 가져오고 관료적 지배체제라는 조선 본래의 권력구조의 운용이 어려워지는 것을 뜻했다. 김종직이 경직(京職)에 복귀하면서 그의 문인 중에서 관리가 되어 대간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생겼다.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관직에 진출한 이들은 훈구파를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이 시기의 사림파의 활동은 주로 이러한 언론활동에 한정되었으며 한편으로 향촌질서의 안정을 위한 유향소 설치를 주장했다. 유향소는 조선초에 유향품관층을 중심으로 조직한 기구로서 중앙집권체제를 추구하던 태종에 의해 한차례 폐지되었다. 그뒤 세종대에 향풍교정(鄕風矯正)을 내세우면서 부활되었지만 유향소 세력이 수령과 결탁하여 농민을 수탈하거나 자체의 힘을 키워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세조 말년에 다시 혁파되었다. 유향소 복립운동은 사림파에 의하여 향촌사회의 성리학적 질서 수립을 위한 조직으로 인식되어 추진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세조 말년에 혁파된 유향소라는 제도를 부활시킨다는 데 있지 않았으며, 〈주례 周禮〉의 향사례·향음주례를 시행하기 위한 기구로서 유향소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두 의례는 덕행이 있는 자와 연로한 자를 각각
앞세우는 것으로서 유교윤리 기준에 의한 향촌질서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유향소의 복립운동은 훈구파의 맹렬한 반대로 1483년(성종 14)부터 5년간 논의되다가 1488년에 결실을 보았다. 그러나 경재소(京在所)를 통한 유향소의 장악이 가능한 상태에서 유향소가 곧 사림파의 세력기반이 될 수는 없었다. 경재소는 본디 그 지방관련자에 의하여 구성·운영되는 것이었는데 훈구파는 경재소제도를 고쳐 중앙 고위관료의 지방연고권의 범위를 넓혀 그를 발판으로 수령을 통해 유향소를 장악하도록 했다. 따라서 사림파는 우세한 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사마소(司馬所)를 세워 대항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마소가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시) 통과자라는 제한적인 인적 자원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강력한 세력 구축이 어려웠고 무오사화(戊午士禍)에서는 강제 혁파당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빌미로 일어난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타격을 받았지만 훈구파 역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의하여 희생되었다. 양대 사화로 희생된 사림파 인물은 주로 김종직의 문인이었고 김굉필·정여창 등의 문인은 크게 관련되지 않았다. 중종반정은 훈구파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므로 중종 초기에는 훈구파가 정권을 장악했으며 사림파의 본격적인 진출은 1515년(중종 10) 이후에 가능했다.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하는 중종대의 사림파는 강력하게 삼대(三代:夏·殷·周)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도학정치를 내세웠다. 이들은 주로 삼사(三司)와 같은 언관직에 진출하여 훈구파를 비판하고, 천거제(薦擧制)를 통하여 과거제나 문음으로써 등용할 수 없는 유일(遺逸)과 학생(學生)을 선발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했다. 또한
여악(女樂)·내수사장리(內需司長利)·기신재(忌晨齋)·소격서(昭格署)를 혁파했다. 그러나 중종반정 이후 책봉된 정국공신에 대한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주장하다가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면서 제거당했다. 기묘사화 이후에도 사림파는 중종의 제1계비 윤씨에게서 난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과 제2계비 문정왕후가 난 경원대군(慶原大君)의 외숙인 윤원형(尹元衡) 두 외척 다툼 사이에서 위축되었다.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윤원형과 이기(李芑) 세력이 결탁하여 윤임 및 사림파를 제거했다. 이후에도 명종 연간에 잇달아 일어난 사화로 사림파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결국 권신 이기의 죽음과 척신의 배후였던 문정왕후의 죽음을 계기로 더 이상의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넓은 의미에서 사림의 재등장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훈구파와 대립하는 정치적 세력으로서의 사림파는 훈구파가 정리되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찾기 어렵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동일한 계급으로, 두 세력을 차별짓게 하는 것은 성리학 실천의 방법에 있다. 흔히 훈구파는
사장(詞章)을 중시하고 사림파는 경술(經術)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으나 양자는 서로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향촌에서 주자학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수양론(修養論)·도학론(道學論) 등을 깊이 연구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훈구파를 비판했다. 따라서 이들의 정치사상은 수신(修身)에 두고 있었다.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은 유교정치 사상에서 서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의 강조점은 시기와 사람에 따라 달리 나타났다. 사림파는 치인보다는 수기를 앞세웠고, 수신의 기본교재인 〈소학〉 공부를 강조했다.
〈소학〉은 생원·진사시나 잡과의 필수과목으로 되어 있으며 성균관의 학령(學令)에도 반영되었던 것이나 그에 대한 강조는 사림파의 수기강조라는 또다른 뜻이 있었다. 그외에도 수신을 강조한 것은 〈삼강행실〉·〈이강행실〉의 번역·배포라든가 향약·향음주례·향사례의 실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도학의 정통을 세우고 이를 현실사회에서 급속히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기의 강조가 곧 치인의 배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앙정계에서의 활동 자체가 이미 치인의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종대 사림파의 경우 치인에의 관심은 보다 확실했다. 사림파가 군주의 수기와 권한을 강조했다고 하여 곧 전제적 왕권체제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량과(賢良科)의 실시와 같이 관료제의 강화를 통하여 그들의 정치적 구상을 실현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를 실현하는 데에는 추진하는 힘이 필요했던 것이고 현실적인 필요에서 군주의 역할을 기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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