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성리학과 기호성리학

2017. 6. 19. 17:17성리학(선비들)

영남성리학과 기호성리학의 지역주의적

 

경합 구도에 대한 현대적 조명

 

- '한국 철학사상사의 지역성' 관점에서 -


김 기 현 (성균관대학교)

1. 서 론 : 논점의 정리

아직도 이른바 지역감정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현재의 한국사회 상황에서 한국철학사상의 전개 역사에 보이는 사상의 지역주의 성향을 논급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상의 전개를 엄정하게 객관적으로 조명하여 보았을 때 만일 한국의 철학사상 역사에서 지역주의 경향이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데도 한국사상의 지역성을 논급하는 것이 된다면 그렇잖아도 민감한 한국사회의 지역주의 문제를 부추기거나 조장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고, 만일 실제로 한국의 철학사상 전개에서 지역주의적 성향이 있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 해도 그것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현금의 상황에서라면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하나의 조그만 모험(?)을 시도하는 동기는, 첫째로 상아탑 밖의 현실 사회가 연구의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 그에 관계없이 상아탑 안에서의 객관적인 연구는 그 자체로 진행되어야 할 가치를 갖는다는 신념에 있고, 둘째로 비록 아무리 지지자가 없이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동의한다 할지라도 이른바 지역감정의 문제를 긍정적인 면에서 조명하는 시도도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 두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필자는 지역감정을 굳이 해소하고 없애기보다는 그것을 바른 방향으로 살려나가는 것이 더 가치 있고 바람직하다고 보는 입장에 있다.


첫 번째 논점은 과연 한국의 철학사상 전개에서 지역주의 성향이 있었느냐의 사실 여부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이 논점은 동일한 사상에 대하여 ① 사상의 주체들(지역적 정체성을 갖는 사람들) 중 서로 다른 지역에 연고를 두는 두 진영 이상의 집단이 각기 '우리는 이렇게 이해하고 이러저러한 주장을 한다'면서 서로 통합될 수 없는 신념과 의지를 유지한 적이 있는가와, ② 신념과 의지 이상으로 철학사상의 내용에서도 과연 그러한 차이가 담겨 있는지의 여부 문제로 세분된다. 우리가 집중적으로 살펴볼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에 적용하여 말하면, ①은 두 학파의 성리학자들이 모두 성리학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애쓰면서도 세부적으로는 서로 통합되기 어려운 신념과 의지를 유지하였는가의 문제가 되고, ②는 과연 영남성리학과 기호성리학은 성리학의 학설 면에서 서로 본질을 달리하는 부분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되겠다.


위의 ①과 ②를 각각 하나의 논점으로 간주할 때, 세 번째 논점으로는 위의 ①과 ②가 입증되었을 경우, 현대의 한국 사회 여건과 현대(Modern)라는 시대여건에 비추어 볼 때 오늘의 우리는 과거의 그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처리――활용 또는 봉합――해 나갈 것인가의 논점이 남는다.


우리는 특히 다 같은 성리학자들이면서도 200년 이상 서로 다른 철학적 색깔을 견지하였던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를 중심으로 위의 세 가지 논점을 확인하고 논의해 가고자 한다.

2. 조선조 이전의 상황

대부분의 고대 역사가 다 그러하듯이 한국민족의 고대 역사도 여러 부족 집단이 오랜 세월에 걸쳐 병합ㆍ분열하는 가운데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되어 갔다. 삼국시대 이전에 한국민족은 예맥ㆍ고조선ㆍ임둔ㆍ진번ㆍ진국ㆍ부여ㆍ마한ㆍ진한ㆍ변한 등등의 여러 정치 사회로 역사를 유지하다가 정복ㆍ흡수ㆍ통합 등의 방식으로 사회 규모가 커지면서 급기야 고구려ㆍ신라ㆍ백제의 삼국으로 정립되었다.
단일 민족으로서의 정체성(Identity)을 유지하면서도 그 사회 안의 집단 간의 사상(思想)상의 차이가 뚜렷한 경우란 어느 민족의 경우가 되었든 전통 사회의 경우 크게 다음 두 가지가 가능하다.


첫째, 그 사회의 계층 간에 차이가 나는 경우이다. 가령 지배 계급의 사람들은 불교를 신봉하는 데 비해 대다수의 민중들은 도교를 신봉한다든가 하는 일이 가능하다.


둘째, 그 국가사회 안에서 지역에 따라 사상상의 차이가 빚어지는 경우이다. 예컨대 갑 지역인들은 불교를 믿고, 을 지역인들은 유교를 믿는 경우이다.
다행히도 한국의 철학사상 역사에서는 이처럼 계층에 따라 또는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나 철학사상을 추종했던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동일한 사상 안에서 계층에 따라, 또는 지역에 따라 성향이 다른 종파(宗派)를 추종한 예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발견된다.


고구려ㆍ신라ㆍ백제 사회는 모두 기본적으로 고유의 무속(巫俗) 신앙을 기초 사상으로 하면서 외래사상인 불교를 크게 활용한 사회였다. 여기에 일부의 지식인층 및 관료층에서 역시 외래사상인 유교사상을 수용하여 특히 행정 및 교육 방면에서 활용한 공통점이 있다.
계층 간에나 지역 간에 발생할 수 있는 사상적 차이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삼국이 하나의 국가체제로 정비된 통일신라 때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불교의 경우, 귀족층은 교종(敎宗)의 5교, 그 중에서도 특히 화엄종(華嚴宗)을 존숭하였던 반면, 민중들에게서는 정토신앙(淨土信仰)이나 미륵신앙(彌勒信仰)이 환영을 받았다. 또 선불교(禪佛敎)가 전래되면서 지방의 호족(豪族) 세력이 선종(禪宗)을 지지하고 중앙의 귀족 세력이 교종을 지지하는 세력 간의 갈등 양상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귀족정치 체제에 의존하여 출발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후로 왕권을 강화해 가는 과정에서 당시 육두품 출신들을 중심으로 확장되어 가던 유교가 점점 국가의 관심을 끌게 되고, 이들 유교 세력이 왕권과 결합하면서 골품제도에 의지하는 진골(眞骨) 세력 및 그들이 지지하던 불교에 대항하는 독립된 사상과 세력으로 성장해간 사실이 있긴 하나, 이것은 같은 지배층 안에서의 일이다.


지역주의적 측면이 다소 보인 현상으로는 통일신라의 지방사회에서, 특히 옛 백제나 고구려 땅에서 중앙과는 성향을 달리하는 불교사상이 유행한 것을 거론할 수는 있다. 예컨대, 백제의 유민인 진표(眞表)가 미륵신앙을 통하여 백제의 유민들 사이에서 크게 환영을 받고 나아가 고구려의 유민들에게서까지 지지를 받은 일이나, 백제의 부흥운동을 일으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미륵신앙을 내세운 것과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한 것 등은 동일한 불교신앙임에도 중앙 세력과 지방 세력이 서로 색깔을 달리한 대표적인 사례가 되겠다. 그러나 이것은 중앙과 지방 간의 차이이지, 지역 간의 차이로 보기는 어렵다.


고려시대 역시 통일신라사회의 구조와 유사하게 전개되었다. 지방에서는 호족이 사실상 반(半)독립적 상태를 유지했고, 이들은 선종을 지지한 반면 중앙의 귀족 세력은 대체로 교종을 중앙정부적 차원에서 후원하는 양상이었다. 한편으로 유교가 중앙정부 및 지방의 호족 사회에서 점차 더 확대 보급되고 세력을 형성하게 되어 후에는 불교를 억누를 수 있을 정도로까지 성장하였고, 후기에는 문벌귀족과 대립하는 사회세력으로서 신흥 사대부 세력이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고려의 사상계에서 계층 간의 성향 차이는 줄곧 있었지만, 지역 간의 차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무신정권기에 무신 세력이 선종을 지지하여 교종 세력이 크게 타격을 입은 것이나, 무신정권기에는 불교와 유교계의 교류가 활발하였으나 원간섭기에 들어서 불교계가 친원적(親元的) 귀족불교로 회귀하자 자연히 서로 거리를 두게 되어 유학계 안에서 점차 불교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세력이 등장하였던 점 등등은 모두 지배층 안에서의 차이였지 지역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고, 또 사상상의 그러한 갈등이나 대립이 고려사회 전체의 운용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관계는 아니었다.

3. 사단칠정 논변과 퇴계ㆍ율곡 성리학의 정립

대부분이 재지 중소지주(在地中小地主) 출신이거나 향리(鄕吏) 출신인 고려의 신흥 사대부 계층은 북송(北宋) 이래의 성리학을 수용하여 당시 피폐해 있던 고려사회의 개혁을 위한 이념 및 철학적 배경 이론으로 활용하다가 공민왕(1351∼1374년 재위)이 추진한 일련의 개혁 정치 과정에서 고려 사회의 운용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갖는 하나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한다. 그렇게 사회 개혁에 매진하던 고려의 성리학계는 조선의 개국을 맞아 두 진영으로 양분된다. 새 왕조에 참여하여 유교적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참여파 학자들과 고려 왕조에의 절의를 강조하며 새 왕조에의 참여를 거절한 절의파(節義派) 학자들로 나뉘어 입장 차이를 보이다가, 포은 정몽주의 암살 사건 이후로 절의파 진영의 유학자들은 향촌 사회로 뿔뿔이 흩어져 제도권의 지평선 밖으로 사라진다.


정도전을 대표로 하는 참여파 진영의 유학자들은 16세기에 사대사화(四大士禍)를 거쳐 선조조에 사림파로 대체될 때까지 조선 전기의 관학파 성리학의 특색을 유지해 갔다. 이들은 거의가 대대로 수도권에 거주하면서 실질상으로 관직을 세습하는 일종의 귀족적 특권을 누렸다. 반면에 '사회 운용'의 지평선에서 사라진 제도권 밖의 재야 성리학자들은 각자 학문에 매진하면서 후학 양성 및 향촌 사회의 지도층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갔다.


조선 전기의 상황에서 관학파의 성리학풍과 재야 성리학자들의 성리학풍 간의 차이로는 다음 두 가지를 거론할 수 있다. 첫째, 재야 성리학자들은 수기(修己)의 수양 공부 및 실천의 면에서 관학파보다 더 엄격하고 철저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둘째, 재야 성리학자들이 성리학의 이론 탐구에 소극적이었던 반면에 관학파는 이론 면에서 그리 소극적이지는 않았다.


재야 성리학자들이 개혁과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상(理想)을 명분으로 중앙 정계에의 진출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은 성종(1469∼1494년 재위) 때였다. 정치 권력의 생리상,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훈구세력(관학파)이 이들 신진 세력의 진출을 방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기득권을 고수하며 신진 세력을 밀어내려는 훈구세력과 개혁을 부르짖는 사림세력 간의 충돌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피로 물든 사대사화이다.


1498년부터 1545년까지의 기간 중에 네 번 일어난 사대사화(戊午ㆍ甲子ㆍ己卯ㆍ乙巳)를 겪으면서 막심한 피해를 입은 사림파 성리학 진영은 학풍의 면에서 변화를 보인다. 가장 두드러진 전환은 성리학의 이론 탐구에 소극적이던 자세가 적극적으로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을 논구하는 학풍으로 바뀐 점이다. 이 점은 조선조의 유학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신유학 전개의 면에서도 큰 의의를 갖는다. 조선조 후기의 한국성리학이 동아시아의 성리학 전개에서 최정상급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성리학의 이론인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서 수준 높은 성취를 냈기 때문이다.


1559년에 당시 중앙 학계에서 문명(文名)이 높던 59세의 퇴계 이황(1501∼1570)과 이제 막 대과(大科)에 합격한 33세의 고봉 기대승(1527∼1572) 간에 사단칠정 논변이 시작된다. 성리학의 심성정론(心性情論)에 대한 이론적 탐구인 이 사단칠정 논변이 계기가 되어 사림파 성리학자들의 이론 탐구가 본격화되었고 급기야 퇴계성리학과 율곡성리학의 출현을 보게 되었으며, 퇴계성리학을 모체로 하는 영남성리학의 대하(大河)와 율곡성리학을 모체로 하는 기호성리학의 대하가 열리게 된다.


『맹자』에는 인간의 착한 마음씨로 사단(四端: 惻隱之心ㆍ羞惡之心ㆍ辭讓之心ㆍ是非之心)이 말해지고 있고, 『예기』「예운」편에는 사람의 정서(人情)로 칠정(七情: 喜怒哀懼愛惡欲)이 열거되어 있다. 현대의 개념으로 정리하면 사단은 도덕감정(moral feeling)이고, 칠정은 사람의 감정을 총칭한 것이다. 우리의 상식선에서 말한다면 칠정은 도덕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비-도덕(non-moral) 감정일 것 같다. 도덕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므로 '일반 감정'이라 부를 수 있다. 주자는 맹자의 사단설에서 '측은지심(惻隱之心)ㆍ수오지심(羞惡之心)ㆍ사양지심(辭讓之心)ㆍ시비지심(是非之心)'의 '지심(之心)'을 적절히 배제하면서 측은ㆍ수오ㆍ사양ㆍ시비를 정(情)으로 규정한다.


주자는 또한 {예기} [예운]편의 희ㆍ노ㆍ애ㆍ구ㆍ애ㆍ오ㆍ욕의 칠정과 {중용}에 나오는 희ㆍ노ㆍ애ㆍ락(喜怒哀樂)의 사정(四情)도 정에 귀속시키며, 그 외에도 의(意)와 지(志) 등을 모두 정으로 정리한다.


주자철학에서 정(情)은 오늘의 우리가 쓰는 개념으로는 '의식 일반'에 해당된다. 요컨대 주자는 우리 내면의 의식 작용을 총괄하여 정으로 개념화하였다.


그런데 상식의 선에서 말할 때, 사단의 감정은 그것을 그대로 행위로 옮겼을 때 착한 행위가 되는 도덕감정인 반면에 희노애락 등의 감정은 그것을 그대로 행위로 옮겼을 때 선이나 악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의식 내용을 분류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유학의 경우 굳이 도덕이 기준이 되는 이유는 동서고금을 망라하여 유가철학만이 갖는 특성의 하나가 유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오로지 '도덕'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식에 따르면, 희노애락 등의 감정은 명백히 비-도덕 감정인데도 주자는 사단의 도덕감정과 칠정의 비-도덕 감정을 총괄하여 정으로 규정하였던 것이고, 여기서 '도덕'의 영역에 칠정 등을 끌어들일 것이냐, 아니면 배제 또는 구별할 것이냐의 문제가 성리학상의 학술 문제로 부상되어 마침내 조선조 사단칠정론의 두 해석입장을 낳게 되었다.


문제는 성리학의 철학적 특성에서 비롯된다. 성리학에 따르면 인간의 정은 그 어느 것이 되었든 모두 성즉리(性卽理)의 성에 근거를 둔다. 인의예지의 성은 성리학 용어로 정(情)의 소이연자(所以然者: 形而上의 근거가 되는 것. 情은 形而下의 현상이다)이다. 형이상의 근거는 하나인데 형이하의 정은 서로 성격을 달리하는 사단과 칠정의 두 부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사단칠정 논변의 원인은 여기에 있다.  구체적 사례를 들어 이 문제를 파악해 보자.

㉮ 선) 어느 날 공사장 옆을 지나가다가 "사람 살려요"라는 소리를 들었다. 달려가 보니 자동차 한 대가 지하로 떨어져 있는데 부상을 입어 숨이 가쁜 듯한 운전자가 소리를 내고 있었고, 옆 좌석의 사람은 엎어진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나'는 이들을 끌어내고 119에 연락을 취하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


㉮ 악) '나'는 철로 옆을 지나가다가 세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철로 위에 엎드려 있는데 부상을 입었는지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면서 소리내어 울고만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저 멀리 기차의 기적 소리가 들리고 있었지만, '내'가 달려가 아이를 안고 내려올 시간은 충분하다고 판단되었다. 하지만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 그냥 지나갔다.


㉯ 선) 직장의 주최로 '열린음악회'가 열렸는데, '나'도 참석하여 다함께 노래도 부르고 흥겨워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악) '열린음악회'에 참석한 '나'는 다함께 노래 부를 때 불쾌한 표정으로 신경질을 부렸고, 남이 박수를 안 치는 데도 혼자서 박수를 치고 떠들었다.

동서고금의 철학사상들 중 유학이 갖는 독특한 면모 중의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하여 도덕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유학은 도덕형이상학(Moral Metaphysics)이다. 위에서 희로애락에 뿌리를 두는 ㉯부류를 ㉮부류의 도덕 가치에 포함시킬 것이냐 아니면 ㉯부류를 차별화 할 것이냐가 사단칠정 논변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낳게 된다.


퇴계와 고봉 간의 제1차 사단칠정 논변 및 우계와 율곡 간의 제2차 사단칠정 논변에서 4인의 성리학자는 기본적으로 두 해석 입장으로 귀결된다. 퇴계와 우계에 의하면 사단과 칠정이 비록 다같이 정이기는 하나 서로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부류이므로 성리학상(이기론)으로도 각각 다르게 규정하여야 한다. 퇴계가 "사단은 이가 발한 것에 기가 따른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에 이가 탄 것이다(四端, 理發而氣隨之; 七情, 氣發而理乘之)"고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에 배속한 호발설(互發說)은 이 해석 입장을 대표한다.


반면에 고봉과 율곡에 의하면, 성리학에서 모든 정의 근거가 되는 성(性)에는 오직 인의예지의 성이 전부이므로 사단의 정이나 칠정의 정이나 모두 인의예지의 발현이며, 따라서 비록 사단의 정과 희로애락 등의 정 간에 내원(來源)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성리학의 이기론상으로는 차별이 불필요하다. 사단과 칠정이 모두 "기가 발한 것에 이가 탄 것이다(氣發而理乘之)"고 규정한 율곡의 일도설(一途說)은 이 해석 입장을 대표한다.


두 입장 간의 이러한 해석 차이는 마침내 각각 퇴계성리학과 율곡성리학을 낳게 되었다. 퇴계의 주체적인 사유에 의해 정립된 퇴계성리학과 율곡의 주체적인 사유에 의해 정립된 율곡성리학은 주자철학을 답습 또는 모방한 복제품이 아니다. 그것들은 퇴계와 율곡의 치열한 사유(思惟)상의 분투(奮鬪)가 가져온 산물이며, 또 조선조 지식인 사회의 토양이 두 성리학 체계를 각각 키워주고 인정해 줄 수 있었기에 오늘에까지도 권위를 갖고 있다.


퇴계성리학과 율곡성리학은 다같이 성리학 체계이면서도 성리학설상의 철학적 신념상에 서로 다른 면을 갖고 있다. 인체(人體)로 말하면, 척추에서 서로 다른 면이 있기에 세부의 학설들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남성리학자들의 성리학설은 그 기초의 면에서 퇴계성리학과 상통하고, 기호성리학자들의 성리학설 역시 그 기초의 면에서 율곡성리학과 상통한다.


퇴계성리학의 척추에 해당되는 철학적 신념은 도덕 가치와 비-도덕 가치를 차별(差別)하는 것이다. 희로애락 등의 비-도덕 가치를 감히 도덕 가치와 대등(對等)하게 간주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단과 칠정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대해서도, 인심은 엄연히 그 연원(淵源)에 있어서나 가치(價値)에 있어서나 결코 도심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이 퇴계 및 영남 성리학자들의 확신이다.


반면에 율곡은 인심으로 출발했더라도 이(理)를 제대로 따른다면 도심과 같이 선이 되며 도심으로 출발했더라도 도중에 이(理)에서 멀어진다면 불선(不善)이 된다는 인심도심종시설(人心道心終始說)을 세웠다. 퇴계성리학과 비교할 때 율곡성리학이 갖는 가장 관건이 되는 특색은 희로애락 등의 비-도덕 가치를 도덕의 영역에로 끌어들이는 점에 있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성리학의 이기론에 대하여 "사단 칠정뿐만 아니라 풀 한 포기가 싹트고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는 것과 한 마리 새가 날고 한 마리 짐승이 뛰는 것까지 그 어느 것이든 '기가 발한 것에 이가 타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듯이, 율곡성리학에 따르면 이 세상의 그 어느 움직임도 선악과 무관한 것은 없다. 울고 웃는 희로애락도 잘 하면 선이고 잘못하면 불선(악)이다. 율곡의 이러한 철학적 신념은 칠정의 근거가 되는 성을 인의예지(仁義禮智)로 단언하고서 다음과 같이 배분(配分)한 데서 확연해진다.

사람의 정에서 기뻐해야 할 일에 기뻐하는 것, 상(喪)을 당하여 슬퍼하는 것, 친하게 모셔야 할 이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것, 이(理)를 보면 궁구하려 하는 것, 현인을 보면 그의 수준에 오르려 하는 것(이상 희喜·애哀·애愛·욕欲의 네 가지 정)은 인(仁)의 단서이다.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는 것, 미워해야 할 일에 미워하는 것(노怒·오惡의 두 가지 정)은 의(義)의 단서이다. 존귀한 이를 보고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것(구懼의 정)은 예(禮)의 단서이다. 희(喜)·노(怒)·애(哀)·구(懼)해야 할 상황에서 각각 그 기뻐해야 할 일임을 알고 분노해야 할 일임을 알고 슬퍼해야 할 일임을 알고 두려워해야 할 일임을 아는 것(이것은 시是에 속한다)과, 또한 각각 그 기뻐할 일이 아님을 알고 분노할 일이 아님을 알고 슬퍼할 일이 아님을 알고 두려워할 일이 아님을 아는 것(이것은 비非에 속한다. 그리고 이들 7정을 모두 합하여 그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정)은 지(智)의 단서이다.

사단과 칠정을 일괄하여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로 해석하는 율곡의 사칠 해석은 최종적으로 위의 판단에 의거(依據)한다. 퇴계와 영남학파의 성리학자들이라면 도저히 위의 진술에 동의할 수가 없다. 칠정이 인의예지의 성과 '관련이 있다' 정도까지는 허용될 수 있지만, 사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칠정의 각 정도 인의예지의 '단서이다'고 서술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 주자는 어떻게 처리했는가? 주자도 율곡과 비슷한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율곡처럼 확정지어 말하지는 못했고, 상황에 따라 말에 변동이 있어 주자의 최종적인 입장이 어떤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결국, 율곡의 이 확정적 발언은 율곡성리학의 독자성을 보증하는 것의 하나가 된다. 성리학의 동아시아적 전개 역사에서 이 점은 철학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퇴계성리학 및 영남성리학자들의 성리학설에서는 칠정이 사단과 대등하게 인의예지의 단서로 말해지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본래 주자철학에서 인간의 본성으로 인정되는 것은 오직 인의예지의 성뿐이다. 사단은 인의예지의 발현이다. 그런데 퇴계는 고봉과의 사단칠정 논변 과정에서 칠정 역시 인의예지의 성과 관련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사단과 칠정이 모두 인의예지의 성과 관련이 있다면, 그렇다면 사단과 칠정을 어떻게 변별(辨別)할 것인가? 여기에서 퇴계 및 영남학파의 성리학자들은 이발설(理發說)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게 된다.


모든 정은 성의 발현이므로, 사단과 칠정은 인의예지의 성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단, 칠정은 기가 발현한 것에 이가 타고 있는 것인 반면에 사단은 인의예지의 성(理)이 직접 발현하고 기가 그것에 따른 경우이다. 퇴계는 이렇게 말한다.

사단과 칠정, 이 두 가지는 비록 모두 이와 기를 벗어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무엇으로부터 발하여 나오느냐에 따라서 각각 그 주가 되는 것을 가리켜 '이것은 이이다', '저것은 기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요컨대, 퇴계성리학이 최종적으로 의존하는 것 중의 하나는 이발설이다. 도덕감정인 사단을 비-도덕 감정인 칠정과 차별화시켜야만 하는 퇴계 및 영남성리학자들은 인의예지의 성ㆍ리(性ㆍ理)가 직접 발현한다는 이발설을 타당한 것으로 여기고서 그 입증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결론적으로, 제1차 사칠논변과 제2차 사칠논변을 통해 사단칠정의 이기론적 해석 문제 및 이것을 둘러싼 성리학설에서 두 가지 해석 입장이 나뉘었고, 퇴계성리학과 율곡성리학은 각각 그 두 해석 입장의 정립이다.

4. 영남학파의 순수도덕주의 성향과 기호학파의 범도덕주의 성향

유학은 실학(實學)을 지향한다. 어느 시대에나 유학의 주체는 현실에 대하여 책임감을 갖는 것이 필수이며, 유학은 언제나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유용한 학문이어야 한다는 것이 유가철학자들의 공통 신념이다. 묘하게도 퇴계성리학과 율곡성리학은 사림파의 동서 분당(分黨)에서부터 조선조 후기의 역사를 주도한 영남 사림과 기호 사림의 사회 참여를 뒷받침해주는 이념으로 활용되어 갔다.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영남"ㆍ"기호"라는 용어나 "영남인"ㆍ"기호인"이라는 용어의 외연(外延, extension)부터 짚고 가자. "'영남(嶺南)'이란 '경상도'와 같은 말"이고, 대체로 14세기 이후로 "경상도를 '영남'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조령(鳥嶺)과 죽령(竹嶺)의 남쪽에 있다 해서 '영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기호'의 경우에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기(畿)'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 일원을 가리킨다. '호(湖)'는 충북 제천의 의림지 서쪽의 충청도 전역을 가리키는 호서(湖西)의 의미와, 옛날의 호강(湖江: 지금의 금강) 이남, 즉 전라 지역을 가리키는 호남(湖南)의 의미를 갖는다. 호서와 호남에 대해서는 예컨대 "조선 시대에는 경기ㆍ충청출신인 기호 세력이 정계를 주도했다. 그리고 영남 세력이 야당으로 간간이 정권에 참여했다. 반면 호남과 평안도ㆍ함경도 사람들은 정계에서 소외되어 있었다."는 서술에서와 같이 호서와 호남을 구별하는 관점이 특정의 연구 분야에 따라 타당성을 갖기도 하나, 조선조의 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회에서는 "경기ㆍ호서ㆍ호남 지역의 유학을 통틀어" '기호 유학' 또는 '기호 성리학'이라 명칭하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우리가 말하는 '영남성리학'은 퇴계와 율곡 이래 300여 년 이상의 조선 성리학 역사에서 통상 '영남학파'로 불리는 계열의 주요 성리학자들이 추구한 성리학을 지칭하고, '기호성리학'은 기호학파의 주요 성리학자들이 추구한 성리학을 지칭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선조조에 중앙 정계와 학계를 완전 장악한 사림파는 얼마 가지 않아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립(分立)한다. 사림파는 모두 개혁 세력이었는데도, 이처럼 동인과 서인의 분당이 이루어진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는 "선조 초년에 명종조 권신 정권 하에서 심의겸의 도움으로 관계에 진출했던 선배 사림과 사림 정치 하에서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후배 사림들 사이에 갈등 구조가 형성"된 데 있다. 심의겸은 왕실의 외척이기는 하나 평소 사림 세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림파의 개혁에 동참하는 입장이었고, 실제로 "권신을 내쫓고 사림의 화를 미연에 방지한 공"이 있으며 적지 않은 선배 사림들이 심의겸의 도움으로 관계에 진출하였다. 그런데 같은 시대임에도 나중에 진출한 사림세력은 훈구세력과의 긴밀한 관계없이 거의 독자적으로 관료가 되어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들 후배 사림들이 선배 사림들의 처신과 소극적인 개혁 의지에 불만을 표출하면서 두 입장의 대립이 가시화되었다. "후배 사림들은 선배 사림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또 사사건건 대립하곤 했다."


현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정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신진 사림측의 주장은 저 훈구세력을 깨끗이 청산하여야 개혁이 완성될 수 있고, 이후 우리 사림의 행보도 그만큼 떳떳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조의 성리학계가 낳은 두 노선에 적용해 말한다면, 신진 사림측의 사고 방식은 사단과 칠정이 비록 다 같은 정(情)이지만 차별을 두어 둘 중 사단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순수하게 도덕적인 것에 치중하는 퇴계성리학과 통한다. 이들이 동인(東人)이다.


반면에 기성 사림측은, 저들이 비록 훈구세력 출신이기는 하나 저들의 생각이 이미 바뀌어 개혁 의지가 뚜렷하고, 또 우리의 개혁 운동에 동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면 이들도 '우리 세력'에 포함시켜야 하지, 단지 훈구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 가리고 배척하려고만 한다면, 진정한 사회의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의 명분을 걸어 놓고 세력을 규합하는 것밖에 안 되지 않느냐는 견해이다. 사단과 칠정이 모두 이(理)에 의거하는 인정(人情)이라면 사단과 칠정의 변별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이것들을 모두 포용하면서 현실에서의 도덕의 실현에 역점(力點)을 두려는 범도덕주의(汎道德主義)의 율곡성리학과 통한다. 이들이 서인(西人)이다.


실제로 "동인에는 청명한 젊은 선비들이 많았다. 반면 서인에는 나이든 선배들 몇몇 외에 인망 없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퇴계의 문인들과 남명의 문인들이 많이 가담한 동인측은 자연스럽게 학연(學緣)에 의한 정치 집단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던 데 비해, 서인측은 이들 영남 사림이 주축이 되어있던 동인측의 '비판 대상'이라는 공통점 외에는 수적으로도 열세였고 학연성도 거의 없었다. 다시 말해서 공통의 이념도, 유기적인 조직력도 갖추지 못했다. 이러한 분립(分立) 사태가 하나의 거대 붕당으로 통합시키는 쪽으로 결말이 나느냐, 또는 내분에 기력을 소모하느라 국정(國政)이 사실상 마비되는 지경으로 치닫느냐, 아니면 이것이 빌미가 되어 사림세력이 다시 재야로 밀려나느냐 등등의 갈림길에서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율곡 이이이다.


율곡은 동인-서인 간의 이 대립 상황을 걱정하면서 처음 한동안은 양측의 조정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사태를 관망하면서 양측의 갈등을 조정해 보려 노력하던 율곡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스스로 서인 진영에 가담한다. 율곡과 사칠논변을 벌였던 우계 성혼(牛溪 成渾)도 율곡과 함께 서인에 합류한다. 이렇게 해서 그 동안 한쪽은 너무 비대한 세력인 데 비해 다른 한쪽은 붕당으로서의 구색조차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던 동인과 서인 간의 불균형이 해소되고, 비로소 양대 세력 간의 상호 비판과 견제를 통한 경합 구도 속에 왕실이 그때 그때의 판단에 따라 국정을 이쪽에 맡겼다 저쪽에 맡겼다 하는 조선조의 붕당정치가 본격화된다.


일제시대의 高橋亨(타카하시 도오루) 같은 이들은 사림의 동서 분열이 이율곡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사칠 논변조차도 퇴계와 고봉 간의 논쟁 끝에 퇴계에 의해 잘 마무리가 되어가던 상황에서 난데없이 율곡이 시비를 걸고 나옴으로써 마치 "꺼진 재에서 불씨가 살아나듯이(死灰再燃)" "조선 유학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켜 2대 학파가 대립하는 물길을 터놓았다"는 식으로 서술하였다. 바꿔 말하면,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지 않는 율곡의 이러한 분파적 처신 때문에 당쟁이 수 백년 동안 지속되었고, 급기야 수 백년 후에 나라가 망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식이다.


고교형의 이 관점을 우리는 동아시아를 주도하려는 대일본 제국주의에 충실하여야만 했던 한 일본인 관학자의 관점으로 치부할 수 있겠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인 집단이 동인과 서인으로 파당을 지어 싸우는 상황에서 율곡 등이 현격하게 약세이던 서인 진영에 가담함으로써 두 진영의 대립 구도가 확정된 이 사태에 대해 조선호의 선장인 왕실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나라의 동량들인 지식인 집단이 하나로 똘똘 뭉치지 못하고 파가 갈린 것에 대하여 우려하거나 실망하는 쪽이 아니라, 놀랍게도 선조는 율곡(이이)과 우계(성혼)의 서인 가담을 크게 환영하였다. 선조는 다음과 같이 말한 일도 있다.

아! 진실로 군자라면 그들끼리 당을 만드는 것이 걱정이 되기는커녕 그 당이 적은 것이 걱정이다. 나도 주희(朱憙)의 말을 본받아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기를 원한다.

현대의 관점에서 되돌아보자면, 16세기 이후로 조선조 싱크탱크(두뇌집단)가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양대 진영을 형성하여 경합 관계를 유지해 온 데는 분명 이씨(李氏) 왕실의 '의도'와 '역량'이 포함되어 있다고 필자는 본다. 지식인 집단을 기관차에 비유할 때, 조선조 왕실의 그러한 주인 의식과 방향 제시 및 조종 능력을 현대 한국사회에서는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이 길러야 할 것이다.


성리학설 면에서는 퇴계성리학과 율곡성리학의 대두 이후로, 학자적 관료 집단으로서의 붕당(朋黨)의 면에서는 선조조 때의 동서 분당 이후로, 영남 지역에 거점을 둔 영남학파는 퇴계 및 퇴계성리학을 긍정하는 것을 공통 분모로 하였고, 기호 지역에 거점을 둔 기호학파는 율곡 및 율곡성리학을 계승하는 것을 공통분모로 하였다. 두 진영 간의 노선 차이는 국가 사회의 운용에 직ㆍ간접으로 참여하는 사회 참여의 과정에서 노정(露呈)된 것이지만 이것이 그들의 성리학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하겠다.


유학이 진정 인간 사회에 유용한 실학(實學)을 추구한다면 조선조 유학의 이 현상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회 참여에 있어서의 노선과 그 배경이 되는 철학과의 관계를 우리는 '상성(相成)'의 관계로 말할 수 있겠는데, 고영진 선생은 사단칠정 논변 등을 통한 이기심성론상의 차이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각 학파의 이기심성론의 차이는 당시 그들이 처했던 정치적 상황과 그에 대한 대응양식에서 형성된 것이기도 하였다. 즉 리의 자발성, 이원적 사고에 의한 도덕성과 수신을 강조하는 이황의 사상이 당시 훈척 정치와의 투쟁 과정에서 사림의 구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면, 리는 두루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는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을 주장하여 만물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강조하였던 이이의 사상은 정권을 담당하여 현실을 주도해 가는 사림의 입장에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간의 성향 차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相對的)' 차이라는 점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마치 미국의 싱크탱크가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경합하는 가운데 설령 아무리 큰 색깔 차이를 보이더라도 결국 어느 진영의 지식인이 되었든 모두가 미국의 번영을 위한 애국심과 세계의 평화를 지향하는 공통의 기반을 갖고 있듯이, 조선조의 사림들도 이(理)를 추구하고 도덕적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신념에서는 어느 진영의 선비가 되었든 예외없이 모두 일치하였다. 다만 구체적 실현의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학파 간의 입장 차이가 있었을 따름이다.


16세기 후반 이래로 조선조 내내 유지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성향 차이를 필자는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학설 면에서 영남학파의 성리학자들은 순수하게 도덕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간의 차별(差別)을 중요시한다. 이것을 순수도덕주의(Pure-Moralism)라 말할 수 있겠다.


반면에 기호학파의 성리학자들은 현실 세계를 우주 전체의 운용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규명하는 접근 자세를 선호하다 보니, 순수하게 도덕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간의 차이를 철학적으로는(理氣論상으로) 사실상 무시한다. 이것을 범도덕주의(Pan-Moralism)이라 부를 수 있겠다.


둘째, 국가사회의 운용에 참여하는 자세에 있어 영남학파는 상대적으로 이상주의적(理想主義的) 성향을 보이고, 기호학파는 현실주의적(現實主義的) 성향을 보인다. 임금이 내려 준 벼슬일지라도 '아니다' 싶으면 떠나는 것이 선비들의 공통 특성인데 영남 선비들이 더욱 그러하였다. 반면에 기호학파의 선비들은, 율곡이 그러했던 것처럼, 별의 별 비난을 들으면서도 '현실을 등진다면 어디에 가서 선(善)을 실현한단 말인가'의 신념이 강하여, 가령 사단과 칠정으로 말할 때 사단적 성분보다는 칠정적 성분이 훨씬 더 많다고 볼 수 있는 현실 세계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었다.


셋째, 기호학파의 학자들은 영남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방적이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금의 시점에서도 영남의 어느 산간 계곡에는 아직도 의관(衣冠)하고 책장에 『퇴계문집』을 모셔두고서 실천에 힘쓰는 유자(儒者)가 찾아질 것이다. 1934년에 경상북도 경찰청에서 간행한 일제의 극비 문서, 『고등경찰 요사』에 보면 제1장 총설에 "경상북도는 양반ㆍ유생의 소굴이요, 배일ㆍ불온운동의 원천이다"라고 씌어 있다. 일제 고등계 간부들이 영남 선비들의 순수한 기백과 이 순수주의에서 나오는 추진력을 두려워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보여주는 영남인들의 단결력과 다른 지역인에 비해 비교적 더 강한 것으로 보이는 종법사상(宗法思想)은 이와 같은 순수 지향의 성향에 연원(淵源)을 둔 것으로 보인다.
한편 기호학파의 학자들은 현실의 흐름에 따라 실학(實學: 실제적 효용성이 있는 학문)을 추구하는 자세 탓에, 조선조 "후기 실학은 거의 기호학자들의 학문 성과"라는 서술이 가능하고, 일부 조선 성리학자들의 양명학적 경도에서 개화사상에 이르기까지를 넓게 포괄하는 개방성을 보여준다.


5. 결 론 : 현대적 조명

필자가 이해하는 한, 민주주의는 지방 자치를 필수 요건으로 한다. 국가 사회의 민주적 운영을 정착시킨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중앙정부의 주도 하에 국가사회를 조직화하여 효율적 운영을 해오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각 지방정부에 의한 지역적 활동도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궤도에 오른 민주사회로 인정되는 것 같다. 세계화와 지역화 역시 같은 원리로 '병행'되어야 하는 관계일 것이다. 열악한 자연 환경 하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풍요로운 문화를 건설했던" 라다크(인도 북쪽의 사막) 사람들이 현대화의 밀물이 밀어닥친 후로 불과 20여 년 만에 지역사회가 경쟁의 정글로 변하고 고유의 문화와 뿌리를 거부하는 지경에 이른 사례는 결코 세계인들에게 모범 사례가 될 수 없고, 반대로 저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반면 교사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 사회의 역사가 쌓여갈 때 사상의 면에서도 언젠가는 지역인들의 성향에 따른 지역주의적 이질성(異質性)이 출현하게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인위적인 요소 또는 환경적인 요소가 작용하고, 때로는 이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 중국인들은 기질과 취향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북방인과 남방인 간의 성향 차이가 있어 줄곧 거론되어 왔다.

 

노사광 선생은 중국의 북방문화와 남방문화를 각각 주대(周代)의 문화 및 은대(殷代)의 문화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면서, 남방문화가 신권(神權)을 중시하는 반면 북방문화는 자각(自覺)과 노력에 의한 인간의 주체적인 면을 중요시하고, 남방인들이 자유분방한 반면 북방인들은 엄숙한 생활을 추구하며, 남방인들이 예술 지향적인 면이 강한 방면 북방인들은 정치 지향적임을 열거한다.

 

철학사상에 있어서도, 북방의 문화전통은 공자의 유가철학으로 집약된 반면 남방의 문화전통은 노자와 장자의 도가철학으로 대표된다고 말한다. 한국의 남북 분단 상황에 대하여 혹자는 남한 지역과 북한 지역의 환경 여건에 차이가 있어 북쪽에는 공산주의 경제가 적합하고 남쪽에는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쉬웠다고 볼 수도 있고,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남과 북을 갈라놓았다고 볼 수도 있다.

 

1930년을 전후한 시점에 개신교 안에서 당시 서북지방(황해도와 평안도)에서 크게 세력화한 북장로교 계통의 보수주의 신앙 세력과 이 세력에 반발한 비서북(非西北) 교회들 간에 일어난 대결 양상은 전적으로 인위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의 서북지역에 북장로교의 보수적인 신앙이 전파된 주된 이유는 외국의 선교 단체들이 한국에 선교사업을 시작할 때 선교 지역이 겹치는 것을 피하고자 각 교파별로 한국의 여러 지역을 나눠 서북지방에는 북장로교가 들어가기로 사전에 안배된 데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어느 요소가 어느 정도 작용했던 간에 지역주의 성향의 대두는 예견될 수 있는 것이다.


사상 및 가치관의 관점에서 말할 때 현재 우리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한국사회의 지역주의 현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광복 후 반세기 동안 남한사회와 북한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사상(思想)상의 차이이다. 다른 하나는 20세기 후반에, 특히 1971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출현한 이른바 '영남패권주의'(영남 對 비영남 구도), 또는 '호남인 차별 및 1980년대 호남인들의 집단적 결집'으로 거론되는 소위 지역감정 문제이다.


우리는 조선조 사회에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가 지역주의적 기반 위에서 경합 관계를 유지한 것을 현대사회의 요건에 맞추어 다음과 같이 결론 맺고자 한다.


현대사회는 다원(多元)의 공존(共存)을 대전제(大前提)로 한다. 가령 종교로 말할 경우, '우리 종교만이 옳은 종교이고 다른 종교는 모두 사이비이다'는 식의 생각은 현대사회의 기본 조건을 부정하는 자격 미달의 발상이다. 민주사회에서는, 타(他)의 존재를 긍정할 줄만 안다면 정치사회 면에서든 철학사상의 면에서든 둘 이상의 집단주의가 대두되는 것 자체는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다면, 군주의 명령을 천명(天命)으로 간주하던 조선조 사회의 독재 체제 하에서도 영남지식인 집단과 기호지식인 집단이 국가사회를 위한 애국심과 능력 발휘의 차원에서 경합 구도를 유지해 온 것은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놀랍고도 훌륭한 전통이다.


지역주의적 행동의 동인(動因)으로 지목되는 지역감정은 하나의 줄기찬 동력(動力)이다. 그것을 제거하거나 해소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방향으로 살려 국가사회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으로 승화시키는 쪽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것의 훌륭한 선례(先例)를 우리는 조선조 때 영남학파의 선비 집단과 기호학파의 선비 집단이 상호 비판과 견제를 통해 국가사회의 정상적(正常的)인 운용에 이바지한 사례로 확인할 수 있다.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성공적인 사례를 통해 장차 한국의 지역주의 주체들에게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필수 요건으로 요구하여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지역주의적 활동의 배경이론으로서 철학사상(세계관과 가치관)을 정립하고 제시하라고 요구해야 하겠다. 영남 사투리로 '우리가 남이가'를 복집이나 음습한 데서 비밀리에 나누는 것을 지양하고, 밝은 광장으로 나와서 떳떳하게 왜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도 우리 지역 사람들이 한국사회의 건전한 운용을 위해 단결하여 애국애족하는 것이 타당한가를 주장하고 설득하여 인정받을 수 있도록 유도하고, 그 배경이 되는 철학을 밝히고 다듬어 가도록 하여야 하겠다. 조선조의 영남학파와 기호학파가 200년 이상 국가 운용의 기관차 역할을 수행하고 그 전성기로 진경시대(영ㆍ정조 시대)의 견실(堅實)함을 낳았던 것은 영남성리학과 기호성리학이 그 시대 지식인들의 기저(基底)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라 필자는 확신한다.


다른 하나는, 수준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주권자인 국민이 이것을 관리할 줄 알아야 하겠다. 1970년대 이래 현재까지의 한국 정치가 보여준 작태는 집권세력이 최고 권력자의 출신 지역에 국가 예산을 집중적으로 쏟아 특별히 경제기반을 닦아주거나, 또는 특정 지역을 왕따시켜 정치적 효과를 거두는 방식이었다. 조선조의 선비 집단이라면 그 반대로 처신한다. 강원도 출신의 선비는 정부 예산을 특별히 강원도에 더 많이 배정하는 것을 결코 허용할 수 없다. 이것이 '수준'의 문제이다.
자유 민주주의는 법이 허용하는 한 침팬지 수준의 개체 이기주의와 집단 이기주의를 허용한다.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듯이, 지역인의 공통된 정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지역주의는 지역인의 물질적 편의 쪽으로 흘러 망국의 원인이 될 수도 있고, 지역인의 문화적ㆍ도덕적 자존심에 근원(根源)하여 국가사회의 건전한 운용에 이바지하는 민족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후자의 실례로 우리는 그 철학사상적 배경과 함께 조선조의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영남 대 비영남'이 되었든, '영남 대 호남'이 되었든, 한국 사회의 지역주의가 만일 수준을 유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나의 입장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자존심과 주의주장(主義主張)도 긍정하면서 공생(共生)하는 요령을 터득한다면, 남한 사회 내의 지역성 문제뿐만 아니라 남과 북의 분단 상황도 의외로 쉽게 실마리가 풀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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