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과 주역

2017. 6. 19. 17:15성리학(선비들)

성리학과 주역

 

서문

  동양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먼저 중국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한․중․일 뿐만 아니라 베트남․태국 등 동양의 대부분 국가들의 제도․문물․문화․풍습 등 국가 경영이념과 개인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문화적 영향아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남송(南宋)이래 여러 나라에 수용된 성리학(性理學)은 이들 국가에서 제도에 반영됨으로써 통치 이념으로 형성되었으며, 우리나라에도 고려 말 성리학이 유입된 이후 조선 왕조 개국의 국시(國是)가 되었다.

  성리학은 그 연원을 유학(儒學)에 두고 있다. 그러나 전적으로 유교의 학설만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교(道敎)와 불교(佛敎)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이들 유․도․불 삼교 사상은 동양의 전통 사상으로 혼재 되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동양사상의 근본적 밑받침이 된 것은 역(易), 즉 주역이다. 주역은 동양에 전래하는 가장 오래된 책이며 우주와 만물․인간의 탄생과 사멸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므로 유가와 도가에서 각기 자파의 경전이라고 주장하고 있을 만큼 내용이 심원(深遠)하다. 이같이 심원한 내용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성리학의 일부 사상은 이미 17세기 이전 서양에 전래되어 라이프니츠 철학의 밑거름1)이 되기도 했으므로 주역은 동양을 넘어 세계 사상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주역의 일부에서 파생된 각종 술수(術數)들은 고래로 동양인의 생활을 좌우해왔다. 그러므로 주역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래하는 동양사상의 근본을 살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양철학의 근본을 살피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첩경(捷徑)이 될 것이다.


1. 주역(周易)이란 무엇인가

1) 역(易)의 기원

  주역은 주(周)나라 시대에 사용되던 역(易)이라는 뜻으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유가 경전이므로 역경(易經)이라고도 한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주대 이전인 하(夏)대에는 연산역(連山易)이, 은(殷)대에는 귀장역(歸藏易)이 사용되었으며 주대에는 이 3가지 역인 삼역(三易)이 모두 존재하며 주로 왕실에서 국가적 대사에 복서서(卜筮書)로 이용되었다고 한점으로 보아 주역은 고대로부터 점을 치는 책이었다. 그러나 처음 역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떤 경로를 통해 발생되었는가에 관해서는 분명한 기록이 없다. 다만 주역의 〈계사전(繫辭傳)〉에는 역의 발생에 관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있다.


첫째, “역에 태극이 있고, 이것이 양의(兩儀: − ꁌ)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 ꁍꁎ ꁏ ꁐ)을 낳았으며, 사상이 팔괘를 낳았다”라고 하여 태극(太極)을 역의 본원이라고 하였다.


둘째, “하늘이 신물을 내니 성인이 그것을 본받고, 천지변화를 성인이 배웠으며, 하늘이 상을 드리워 길흉을 나타내니 성인이 그 모양을 본떴으며, 황하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에서 그림이 나오니 성인이 그것을 본떴다”라고 하여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역의 기원이라고 하였다.


셋째, “옛날 포희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 우러러 하늘의 상을 살펴 본받고 구부려 땅의 이치를 관찰하여 본받았으며, 새와 짐승의 발자국(문양)과 땅의 마땅함과, 가깝게는 사람의 몸에서 취하고 멀게는 여러 사물에서 취하여 이로써 처음 팔괘를 지었다”라고 하여 포희씨가 하늘과 땅 ․ 짐승과 인체의 조화를 살펴 팔괘를 지었다고 하였다. 포희에 관해서는 고문학의 시조이며 공자의 11대 손으로 서한(西漢) 무제( 재위 BC 141-BC 87) 때 박사를 지낸 공안국(?-?)이 복희(伏羲)라고 함으로써 이후 “복희씨가 팔괘를 그렸다”고 전해지게 되었다.


《주역․설괘전》 첫머리에는 “옛날 성인께서 역을 지을 때에 그윽이 신명을 돕고자 시초를 만들고 천수(天數)를 3으로 지수(地數)를 2로 세우고 음양의 변화를 관찰하여 괘를 세웠다”라고 하여 음양의 변화를 관찰하여 괘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대의 사관 사마천(BC 145 ?-BC 86?)은 《사기》에서 “복희가 황하에서 나온 용마의 등에 있는 문양인 하도를 본 따 팔괘를 만들고, 우(禹)임금이 낙수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있는 문양을 본 따 팔괘를 배치하였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팔괘를 겹쳐 64괘를 지었다”고 하고, 《한서》에 “주문왕이 팔괘를 겹쳐 중괘(重卦)하였으며, 공자가 십익(十翼) 열편을 엮었다”라고 하는 등 사서류에 행위의 주체자들을 기록함으로써 이후 사람들이 ‘복희가 팔괘를 그리고 문왕이 팔괘를 중괘하여 64괘를 만들고 괘사를 달고 문왕의 동생인 주공(周公)이 효사를 달았으며, 공자가 십익을 지었다’라고 주역의 완성에 관해 전해지게 되었다.



2) 역의 뜻

  역에는 크게 세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는 간역(簡易)이다. 역은 간단하고 평이하여 알기 쉽고 따르기 쉽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은 자연과 사물을 포용하여 낳고 기르므로 현상과 질서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천지의 작용은 번거롭거나 어지럽지 않고 간단하고 평이하다. 아침이 되면 해가 뜨고 저녁이면 해가 지며,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며 가을과 겨울이 오는 질서가 있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우며 천체의 운행은 차질 없이 이루어지며 사물이 생장 소멸하는 땅위의 현상들은 부드럽고 순탄하여 간단하고 알기 쉬우니 하늘과 땅의 공덕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변역(變易)이다. 본래 역(易)은 ‘바뀐다’는 뜻이다. 천지의 운행과 자연의 상태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아침에 해가 뜨면 저녁에는 해가 지며 낮과 밤이 교차한다. 봄이 다하면 여름이 오고 가을과 겨울이 온다. 사람과 사물도 생장소멸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처럼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 이것이 음양 두 기운이 천변(遷變)하는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셋째는 불역(不易)이다.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지며 밤과 낮이 교대로 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봄 다음에 여름이 오고 가을과 겨울이 오는 자연 현상의 순서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천지간의 만물은 태어나고 성장하며 열매맺고 죽는 생장소멸의 질서가 있다. 이러한 작용들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고, 이 법칙은 변화하지 않고 영원하다.


  역에는 이 같은 3가지 법칙이 담겨 있다. 그 외에도 ‘易’자를 ‘日’자와 ‘月’자가 합쳐진 회의자(會意字)로 보고, ‘日’은 양 ‘月’은 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천지 만물의 생장소멸 등 모든 변화가 음양의 조화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또한 ‘易’자를 ‘日’과 ‘勿(물)’자의 회의자로 보고 ‘하늘(해)를 거역하지 말라’는 뜻으로 풀이하는가하며, ‘易’자를 도마뱀의 상형문자(象形文字)이며, 도마뱀(카멜레온)이 보호색을 자주 바꾸는 것과 같이 천지 자연 사물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논리를 펴는 설도 있다. 또한 ‘易’자가 ‘日’과 ‘月’의 회의자 이므로 ‘明’자와 같이 사물의 이치를 밝힌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설도 있다.



3) 역의 구성

 

역을 구성하는 기본적 요소는 팔괘이다. 팔괘와 그 뜻․성질 등은 다음과 같다.

괘형

괘명

형태

성질

방위

계절

인물

신체

사물

동물

건(乾)

하늘(天)

강건

서북

늦가을

아버지

머리

대평원

태(兌)

연못(澤)

기쁨

가을

소녀

골짜기

이(離)

불(火)

아름다움

여름

중녀

문서

진(震)

우뢰(雷)

결단

장남

나무

손(巽)

바람(風)

들어감

동남

늦봄․초여름

장녀

다리

초목

감(坎)

물(水)

정착

겨울

중남

술․약

돼지

간(艮)

산(山)

멈춤

동북

초봄

소남

집․성

곤(坤)

땅(地)

유순

서남

늦여름

어머니

마루․음식

팔괘의 탄생

〈계사상〉에 “역에 태극이 있고, 이것이 양의를 낳으며, 양의가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는다”라고 하였는데 이 내용을 통해 팔괘가 탄생하는 순서와 괘수를 살펴보자.

태극(太極)

양의(兩儀)

사상(四象)

팔괘(八卦)

태극

양(−)

태양(ꁍ)

건(☰)

1

태(☱)

2

소음(ꁎ)

이(☲)

3

진(☳)

4

음(ꁌ)

소양(ꁏ)

손(☴)

5

감(☵)

6

태음(ꁐ)

간(☶)

7

곤(☷)

8


위 도표를 부연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태극에서 양의(兩儀)가 태어나면, 양의에서는 양(−)은 기수(奇數: 홀수) 1이며 음(ꁌ)은 우수(偶數: 짝수) 2가된다.


2. 양의가 사상을 낳는데, 기수인 양(−)이 양을 낳은 것이  태양(太陽 ꁍ)이 되며 숫자 1의 위치가 되고, 음(ꁌ)을 낳은 것이 소음(少陰 ꁎ)으로 숫자 2의 위치가 된다. 음(ꁌ)이 양을 낳은 것이 소양(少陽 ꁏ)으로 숫자 3의 위치가 되고, 음을 낳은 것이 태음(太陰 ꁐ)으로 숫자 4의 위치가 된다.


3. 사상이 팔괘를 낳는데, 태양(ꁍ)이 양을 낳은 것이 건(乾 ☰)으로 숫자 1의 위치이며, 음을 낳은 것이 태(兌 ☱)로 숫자 2의 위치이다. 소음(ꁎ)이 양을 낳은 것이 이(離 ☲)로 숫자 3의 위치이며, 음을 낳은 것이 진(震 ☳)으로 숫자 4의 위치이다. 소양 ꁏ이 양을 낳은 것이 손(巽 ☴)으로 숫자 5의 위치이며, 음을 낳은 것이 감(坎 ☵)으로 6의 위치이다. 태음 ꁐ이 양을 낳은 것이 간(艮 ☶)으로 7의 위치이며 음을 낳은 것이 곤(坤 ☷)으로 8의 위치이다. 


4. 수(數)는 숫자를 낳는 생수(生數) 1 ․ 2 ․ 3 ․ 4 ․ 5와, 태어나는 수인 성수(成數) 6 ․ 7 ․ 8 ․ 9 ․ 10가 있는데, 위 2항의 사상조를 인용하여 살펴보자. 태양은 위치가 1 ․ 소음은 2 ․ 소양은 3 ․ 태음은 4인데, 이들이 성장한 수 10이 되기 위해 태양에게는 9가 필요하고, 소음에게는 8이, 소양에게는 7이, 태음에게는 6이 필요하다. 이것을 ‘사상의 수’라고 한다. 또한 역은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다만 음이나 양이 극에 이르러야 변화할 수 있으므로 태양과 태음만이 변화할 수 있다. 따라서 태양의 수 9와 태음의 수 6을 각각 양효와 음효로 표기하는 것이다. 



4) 주역의 체례와 내용

  易은 본래 복서를 위해 저작된 것으로 기구(器具)를 편리하게 쓰고 먹을 것 입을 것을 넉넉하게 하여 백성의 생활을 나아지게 한다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위해 복희가 천지 만물의 이치를 인간 세계에 묘사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 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문왕이 팔괘를 중복하여 64괘를 만들고 괘사인 단(彖)을 지었으며 주공이 효사인 상(象)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易은 춘추시기 까지도 일부 학자들에 의해 지극히 제한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지고 연구방향 또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길흉을 점치는 점서(占書)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공자가 周易의 단․상을 10편으로 나누어 자연과 인문(人文)․사회(社會)․인사(人事) 등 여러 학설의 연원을 이용하여 이론적이고 철학적으로 해석한 것이 십익(十翼)이다. 십익의 ‘翼’이란 조리 있게 펼치고 해설하여 경문을 돕는다는 뜻이며, 십익의 각 편은 ‘전(傳)’자를 붙여서 괘사인 단사(彖辭)나 효사인 상사(象辭)와 구별하도록 〈단전(彖傳)〉․〈상전(象傳)〉 등으로 쓴다.

  십익의 구성은 상․하편으로 구성된 〈단전〉과 〈상전〉․〈계사전〉외에 〈문언전(文言傳)〉․〈설괘전(說卦傳)〉․〈서괘전(序卦傳)〉․〈잡괘전(雜卦傳)〉 등 모두 10편으로 되어 있다.


5) 역학의 전래

  주역을 연구하는 것을 역학(易學)이라고 한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易은 본래 점괘를 해설한 책이었다. 따라서 한대까지 주역을 근거로 점을 치거나 천문․지리․인사를 해설하는 방법이 발달해 왔는데 그러한 역학 방법을 상수역학(象數易學)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晋)대의 왕필(王弼, 226-249)은 지나치게 참위설과 결합한 상수역학의 폐단을 지적하고, 유가적 시각에 의해 주역을 뜻과 이치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역학을 주장했는데, 그것이 의리역학(義理易學)이다. 그는 의(義)와 이(理)의 분석적이고 사변적(思辨的) 학풍을 창설하여 중국 중세의 관념론체계에 영향을 끼쳤는데, 체용일원(體用一源)의 무(無)를 본체로 하고 무위(無爲)를 그 작용으로 하는 본체론(本體論)을 전개하여 인지(人知)나 상대세계(相對世界)를 무한정 한 것으로 보는 노자(老子)의 (無爲自然)〉에 귀일함으로써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주역 해석에 도가적 관점이 스며들게 되었다. 후대에 많은 학자들에 의해 주역의 태극이 무극(無極)이라고 하게 된 것도 왕필의 도가적 견해에 따르게 된 것이다.

  당대에 이르러 불학가인 이현통(李玄通, 633-730) 주역으로 불교 화엄종의 교의를 해설하였으므로 이후 중국뿐만 아니라 여러 국가에서 불교의 교의를 역학에 의해 해석하는 주역 선해(禪解)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허중(李虛中, 762-813)은 서한 이래의 상수역학을 연구하여 복서와 택일 등에 능통하였는데, 음양오행과 천간 지지에 사람이 출생한 년․월․일․시를 대입하여 길흉과 귀천을 추측하는 명리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송대의 인물 진단(陳摶,?-989)은 유․도․불에 정통하였는데, 그는 이 삼교의 관점으로 상수역학과 의리역학을 함께 연구하여 우주와 만물․인간의 탄생과 사멸을 설명하였다. 이후 주돈이․소옹 등에게 그의 역학이 전해져 발전하고, 정호․정이 형제가 주돈이의 문하에서 주역을 공부하였다. 그 가운데 정이는 더욱 유가적 덕목으로 주역을 해석하였으므로 그가 쓴 《역정전(易程傳)》은 의리역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 또한 후일 남송의 주자는 주돈이․소옹 등의 상수역학과 정이의 의리역학을 함께 집대성하고 이에 복서적 견해를 첨가하여 《주역본의》를 완성하였는데, 중국 명대의 영락제(永樂帝, 1360-1424) 때 호광(胡廣, 1370-1418) 등이 정이의 《역정전》과 주자의 《주역본의》를 하나로 묶어 《주역전의대전(周易傳義大全)》이라고 하였는데, 조선의 내각본(內閣本)은 이 책을 그대로 따름으로써 지금 국내에 전해온다.



2. 주역과 성리학

  당 말인 859년 지주와 농민․유민이 주체가 된 구보의 난과, 868년부터 8년간 계속된 방훈의 난, 875년부터 10년간 지속된 황소의 대란으로 곡창지대가 황폐해져 당의 재정은 치명적 타격을 받았으며 사회는 극도로 혼란해 있었다. 또한 참위설과 결합한 일부 불교 세력으로 인해 폐해가 노출됨으로써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야기되었다. 한유(768-824)는 유가의 오륜을 강조하며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배척하였는데, 그의 제자 이고(李翺, 772-841)가 바로 성리학의 근원을 내포한 학설을 탄생시킨 학자이다. 그는 불교사상의 심성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보였다. 즉 불교에서 해탈의 논리를 취하여 유교의 이론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불교의 필요성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초월적이고 불변적 요소인 성을 회복해야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 같은 이고의 사상은 송대 성리학의 형성 기반이 되었다.


1) 성리학과 태극

  송왕조 건립이후 농업과 상공업의 눈부신 발달이 있었음에도 불합리한 租稅정책으로 농민과 하층민들의 삶이 궁핍해지고 북방의 요(遼)와 서방의 서하(西夏)의 위협이 증대되는 등 국력이 쇠약해져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불교와 도교가 흥성하고 현세 도피적 현상이 사회적으로 팽배해 있었다. 유학자들은 외래 종교인 불교와, 민간에 깊숙이 자리잡은 도교를 허무적 내세관을 내세우는 사회 병리적 현상으로 단정 짓고, 유학의 부흥만이 이러한 사회현상을 타개할 수 있는 돌파구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우주와 만물의 탄생과 소멸․ 인간의 탄생과 사망․정치․사회적 이상향을 그려내는 일종의 근본적 이념 개발이 필요했다. 그들은 그 해답을 고대로부터 유가적 우주론의 결정체이며 때로는 복서서로 사용되었던 주역에서 구하려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주역〈계사전〉의 “한번 음이고 한번 양인 것을 도라고 한다(一陰一陽之謂道)”․“역에 태극이 있다(易有太極)”․“낳고 낳는 것을 역이라고 한다(生生之謂易)”․“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장구하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등을 명제로 설정하고 이에 대해 연구하였다.

  소옹과 주돈이는 도가설과 상수역학을 혼합하여 도서설과 태극도설을 창안하고, 이에 근거하여 의리역학의 명제인 ‘일음일양’과 태극을 설명하였으므로, 우주와 만물 탄생의 이론이 필요하던 송대 유학자들에게 그들의 설이 중심사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주돈이는 이고가 제기한 심성론을 바탕으로, 외부 사물에 존재하는 불변자는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성과 일치한다는 전제하에, 자신의 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외부 사물에 내재하는 불변자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방법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음양과 오행으로 구성된 만물의 내면에는 무극(無極)이며 태극이라는 불변자가 있다는 논리를 구성한 것이 그의 태극도와 태극도설이다. 그는 “태극이 움직여 양을 낳고, 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고요해지는데, 고요해지면 음을 낳는다.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다시 움직이니, 한번 움직임과 한번 고요함이 서로 근본을 이룬다.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 양의가 세워진다.”라고 하여 “무극이며 태극”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노자(老子)》의 “흰 것을 알고 검은 것을 지키는 것이 천하의 법도가 되며, 천하의 법도가 되면 항구한 덕이 어긋나지 않고 다시 무극으로 돌아간다”는 구절에서 무극이라는 개념을 취하여 태극과 결합시킨 것으로, 이후 송대 이학의 중심사상이 되었다.

  소옹은 태극이 곧 도(道)라고 하였다. 만물의 근원적 이치가 도 또는 도리(道理)라 한다면 태극은 곧 태초부터 영원까지, 극소에서 극대까지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치라 하였으니, 다시 말하면 공간적으로 대 · 소가 있을 수 없고, 시간적으로 장(長) · 단(短)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장재(張載, 1020-1077)는 주돈이의 학설을 수용하고 태극에 대하여 “한 가지 물질이 두 가지 체(體)를 지녔다는 것은 그것이 태극을 이름인저!” ․ “태허는 형체가 없으나 기의 본체이다. 한 가지 물질로 두 가지 체를 지닌 것은 기(氣)이다.”라고 하여, 기의 본체가 태허이며, 태허가 곧 기이며 음양이라고 하고, 우주의 만유(萬有: 우주의 모든 사물)는 기의 집산(集散)에 의해 생멸하고 변화하므로 우주 만물의 시원이 태허라고 정립하였다. 장재의 이 같은 주장은 주돈이의 태극론에서 무극의 개념을 취해 자신의 이론으로 발전시킨 것이었지만 이는 송대 최초로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전개한 것으로, 태극 = 태허 = 무극 = 기 = 음양의 등식을 성립한 것으로 같은 시대 인물인 정호․정이 형제와 후일 주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정호는 태극을 체와 리․용․명의 측면으로 분류하고 이에 易․道․神․性을 대입하여 설명하였다. 그는 태극론을 더욱 발전시켜 다양한 자연현상을 질서지우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理라고 명명하고, 만물의 본질적 존재인 理와 만물의 현상적 존재인 氣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다며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과 성즉리(性則理)설을 주창하였다.

  정이(1033-1107)는 의리역학 연구가 탁월하였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철학을 수립하여 후대의 성리학 완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학문의 방법은 ‘敬’을 중시하였으므로 거경궁리(居敬窮理)에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지미( 至微)한 것은 本體인 理이며, 지저(至著)한 것은 用인 象이며, 體와 用의 근원을 같은 것으로 보고 顯․微 간에는 사이가 없다고 體用의 상관관계를 설명하였다. 그의 학설은 후대에 朱子에게 계승되어 정주학으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太極 = 無極 = 陰陽의 본체 = 太虛 = 氣 = 理 = 性 =心의 등식이 성립되었는데, 이들 북송오자(北宋五子)의 태극관은 주자에게 계승되어 성리학의 중심 이론으로 완성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대의 여러 학설을 주자가 집성(集成)하여 철학적 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이므로, 정이천과 주자의 성을 따서 이를 ‘정주학(程朱學)’ 또는 주자학(朱子學)이라고 한다. 또한 주자는 주로 객관적 유심론을 주장하고 도문학(道問學: 問學第一)을 존중하였으며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성즉이설(性卽理說)을 제창하였으므로 이를 이학(理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주자와 같은 시대 인물인 육상산(陸象山, 1139-1192)의 학문을 성리학이라고도 하는데, 그는 정명도의 존덕성(尊德性:德性第一)을 존중하고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였으므로 이를 ‘심학(心學)’이라고 하며, 후일 명나라의 왕양명(王陽明, 1472-1528)이를 계승 발전시켰으므로 이를 ‘양명학(陽明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리학이라고 하면 주자의 성리학을 말한다. 

 

2) 성리학과 이기론

  이기론이란 이(理)와 기(氣)의 원리를 통해 우주와 만물 · 인간 · 사회의 존재와 운동을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론체계이다. 유교적인 관점에서 이의 개념을 정립하고 이와 기를 결합한 이론체계를 세우기 시작한 인물은 주돈이이며, 그의 제자인 이정자(二程子 : 정호· 정이 형제)가 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기론을 체계화하였다. 정호는 ‘천리(天理)’라는 개념을 통해 이가 자연법칙이며, 또 다른 면에서는 정치적 질서 및 윤리도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이는 세계를 관철하는 보편적 원리와 구체적 · 개별적 원리 사이에 일치성이 있다는 이일분수(理一分殊)와 성즉리(性卽理) 등의 명제를 통해 이기론의 기본 틀을 확립했다. 성리학의 이기설은 우주․만물․인간의 탄생과 구성을 이(理)․기(氣)라는 두 가지 법칙으로 설명하는 이론으로 다음 몇 가지 설로 분류된다.


(1) 기일원론(氣一元論): 송대 장재(張載)의 설이다. 우주와 모든 만물이 기로써 이루어졌으며, 태허(太虛)가 기라고 하는  '태허즉기(太虛卽氣)'설을 주장하였다. 기는 태허에서 나오고 기가 모여서 만물을 생성하며 기가 흩어지면 만물이 소멸한다. 그러나 기는 다시 태허로 돌아간다. 즉, 기가 흩어진 모습이 태허라고 설명하였다.


(2)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만물의 본질적 존재인 이(理)와 만물의 현상적 존재인 기(氣)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으로, 이와 기의 관계를 "이와 기는 서로 뒤섞이지 않으며(理氣不相雜), 이와 기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理氣不相離)"는 말로 정리한다.


(3)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 만물의 존재가 이(理)와 기(氣) 두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론으로, 정이는 만물의 현상태인 음양오행 등을 기로 수렴하고 무극, 태극, 태허 등의 불변하는 만물의 본질을 이(理)로 수렴함으로써 이기론을 완성하였다.


  주자는 이 같은 이기론을 계승하여 이와 기의 성격이 더욱 확연하게 구별하였다. 그는 이를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는 ‘소이연(所以然)’과 법칙론적 의미를 지니는 ‘소당연(所當然)’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분류하고, 이러한 이가 기의 내부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또한 기는 형질(形質)을 지니고 운동하는 것이며, 이(理)는 형질이 없고 운동도 하지 않지만 그 실재는 기를 통하여 관념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가 기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가 형질을 띠거나 운동 등의 작용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의 존재 자체도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윤리에 적용하여 이 · 기에는 경중이 있으며 기의 청탁(淸濁)에 의해 사물이나 인물의 선악이 결정된다고 하고, 인간의 신체와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은 기에서 성립되며, 그것이 도덕적으로 선(善)한 성(性)은 이(理)가 마음에 내재화(內在化)된 것이라고 하였다.


3)성리학의 한국 전래

  성리학은 주자 생존시에 송나라의 정치적 환경으로 인해 위학(僞學)으로 몰려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원(元)대에 이르러 관학으로 채택되고 과거의 교재로 사용되면서 크게 번성하게 되고, 명․청대에도 귀족의 학문 또는 실속 없는 공론으로 일부 배척을 받기는 하였으나 과거의 교과 과목으로서 여전히 그 지위를 유지 하였다.

  한국에 성리학이 들어온 것은 고려 말 충렬왕 시기인 1288년 문신 안향(安珦,1243-1306)이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연경(燕京: 현 북경)에서 《주자전서》를 필사하여 가져와 연구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그 후 성균관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으로서 새로운 학풍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의 대표적 인물들인 이색 · 정몽주 · 길재 · 정도전 등이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 학자들은 조선 개국에 참여하여 태조 이성계를 도와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아 법전(法典)의 제정과 기본정책의 결정을 결정함으로써 성리학은 이후 한국의 제도․문화․학술․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이후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은 사화(士禍)로 혼란스런 사회에 성리학설을 이용하여 선악과 정(正) ․ 사(邪)를 밝히고 올바른 진리를 천명함으로써 사람들이 나아갈 바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퇴계의 이같은 성리학설은 후세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율곡 이이(李珥, 1536-1584) 또한 유학의 본령을 들어 그 기본정신에 투철하였으며 이를 철학적으로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실문제에까지 연결시켰다. 그는 자애(慈愛)와 효도와 충성과 우애라 하더라도 그것을 행하는 이유를 추구하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의 피폐한 현실에서 국방력의 강화․경제적 부강․사회정의의 확립 등을 주장하는 동시에 이러한 실리를 주장하다 보면 의리(義理)에 어긋나고 의리를 추궁하다 보면 실리를 망각하기 쉬우므로 이러한 모순을 원만히 타결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같은 퇴계와 율곡의 성리학은 인간성의 문제를 매우 높은 철학적 수준에서 구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허한 관념을 벗어나 역사적·사회적인 현실과 연관을 가지고 영향을 주었으며, 후대의 실학사상 형상을 주었으므로 우리 생활에 더욱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