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리학과 유교문화

2017. 6. 19. 17:09성리학(선비들)

조선시대 성리학과 유교문화

 

 

고영진(광주대학교 교수, 한국사상사)

 

 

1. 성리학의 이해와 왕도․민본

 

조선시대의 지배사상은 크게 보면 성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은 학자들에 따라 신유학․송학․정주학․주자성리학․주자학․도학․이학 등 다양한 용어로 불리우고 있어 혼란을 주기도 하지만, 대체로 신유학․송학은 송대 유학 전체를 의미하며 성리학은 주돈이로부터 시작하여 주희에 의해서 집대성된 이기심성론 중심의 학문체계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성리학은 신유학의 한 부분으로 지주전호제 아래서 지주, 특히 중소지주층의 이해를 반영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선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성리학이 조선시대 500년 동안 항상 지배사상으로서의 비중이 같았던 것은 아니었다. 역사적 상황과 그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성리학 뿐만 아니라 한당유학적 요소, 신유학의 다른 부분들이 강조된 시기도 있었으며 양명학․노장사상 등이 부각된 시기도 있었다. 또한 성리학의 사회경제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사상경향으로서 ‘실학’이 배태되어 나와 큰 영향을 미쳤던 시기도 있었다.

사상사 연구는 하나의 사상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하는 작업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는 조선시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상사 연구는 사상, 특히 지배사상이었던 성리학의 내적인 정합성과 발전과정을 살펴봄과(성리학의 이해) 동시에 다른 사상과는 서로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각 시대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려 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王道)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상이 일반민의 존재를 얼마나 고려하고 그들의 삶을 얼마나 향상시켜 주었는가 하는 점이다.(民本) 이 모든 요소들을 당시의 시대상황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살펴봐야 함은 물론이다.

성리학은 중국의 송에서 당시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던 불교와 도교를 철학적으로 극복하고 성립한 새로운 유학이었다.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리(理)와 현상적이고 가변적인 기(氣)로써 우주의 생성․변화를 설명하는 이기론(理氣論)은 자연과 인간․사회를 설명하는 성리학 전체의 기본 이론이었다.

이러한 이기론을 바탕에 두고 인간의 심성을 설명한 인성론(人性論)과 도덕적 실천방법을 설명한 수양론(修養論)이 체계화되었다. 인간의 본성이 곧 리라는 성즉리(性卽理)와 보편적 진리인 리는 지적인 탐구와 수양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다는 거경궁리(居敬窮理)가 그것이다. 그리고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함으로써[存天理去人欲] 성리학의 이상을 현실사회에 구현하는 방법이 예(禮)였다. 여기에 여러 정치․사회․경제정책들이 성리학의 기본 이념에 입각하여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성리학의 구조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기론(우주론․존재론)


 

성즉리(인성론)


 

거경궁리․존천리거인욕(수양론)

예(예론)

정치․사회․경제정책

  

 

이를 보면 성리학이 단순한 형이상학적인 철학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사회의 모든 분야를 일관되게 설명하려는 종합적인 사상체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현대 사회의 모든 분야를 규정하고 영향을 미치는 자본주의처럼 중세사회의 모든 분야를 규정하고 영향을 미치는 이데올로기, 즉 지배사상인 것이다.

 

 

 

2. 조선시대 성리학의 흐름

 

1) 성리학의 주체적 수용

 

고려 말-조선 초 지배사상이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바뀐 것은 사상사적인 발전을 의미하며 이는 이 시기에 이루어진 중세사회의 재편에 조응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원으로부터 고려사회에 도입된 성리학은 주로 북방의 한인 유학자들이 남송의 성리학을 수용해 관학화(官學化)한 것이었으나 성리학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남송의 주자성리학 그 자체와 주희․육구연을 절충한 학문 등 다양한 사상들이 들어왔다.

이처럼 다양한 사상 조류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신흥사대부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나타났으며 이들의 차이는 이색․정몽주 등의 온건개혁파와 정도전․조준 등의 급진개혁파의 대립으로까지 발전하여 전제개혁과 조선의 건국 등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결국 각자가 처한 사회경제적 기반과 사상적 차이가 당시 사회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에 차이를 가져왔던 것이다.

15세기 조선사회가 당면한 문제는 고려시대부터 누적되어온 대내외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왕조교체에 따른 새로운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건국세력들은 법가적인 성격이 강한 『주례』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중요시하였는데, 이는 조선의 국가체제 자체가 『주례』에 나오는 주대의 체제를 모범으로 하고 정치․경제․법률․예제 등 많은 분야에서 준거로 삼았던 데서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육전(六典)과 오례(五禮)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성리학을 그대로 받아들여 수용한 것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필요한 부분만 받아들이고 다른 사상으로 보완하는 방법을 통해 주체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며 그것이 시대적 요구이기도 하였다. 세종대에 실용적인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농업과 의학에 관한 서적들이 널리 간행된 것도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2) 성리학 이해의 심화

 

성종대에 들어서면서 고려 말 온건개혁파로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재야로 남은 세력들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영남사림이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향촌재지세력이었던 이들의 등장은 그때까지 지속되어온 조선 전기의 학문적 경향과 전통에 일대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김종직을 비롯한 신진사류들은 형정(刑政)보다는 교화(敎化)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였으며 훈척의 비리와 전횡을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당시의 사회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해보려고 하였다. 이제 성리학이 훈척 중심의 기존 체제를 공격하는 사상적 무기로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성리학의 수신서인 『소학』을 중시하였다. 김굉필은 평생토록 『소학』만을 읽었으며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기까지 하였다. 주자는 이 책을 성리학의 요체를 서술해놓은 『대학』을 배우기 전에 반드시 거쳐가야 할 단계로 설정함으로써 단순히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의 학문이 아닌 수기치인(修己治人)과 천하를 다스리는 과정의 하나로서 제시하였었다. 신진사류들은 바로 『소학』의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당시의 학문 풍토를 일신하고 기존 체제를 바꾸어 나가는 출발점으로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이 책은 훈척과 사림을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성리학에서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는 도학적(道學的) 성격의 강화와 함께 나타나는 이 시기의 또다른 특징은 주자 중심, 의리 중심의 도통론(道統論)이 확립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재야학자들의 학문을 계승한 동시에 세조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던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성이 학문에 반영된 것이었으며 훈척을 공격하는 효율적인 무기이기도 하였다.

기묘사림의 사상적 특징은 조광조가 경연에서 주장하였던 도학을 높이고(崇道學) 인심을 바르게 하며(正人心) 성현을 본받고(法聖賢) 지치를 일으킬(興至治) 것에 잘 나타나 있다. 도학은 성리학과 거의 같은 의미로 도덕․윤리의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할 때 많이 사용하였다. 기묘사림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지치를 현실사회에 실현하기 위해 소학 실천과 향약 보급 등 여러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기묘사림의 성리학 이론 수준은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들의 등장은 주자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이 조선사회에 확립되고 의리․명분과 실천을 중시하는 경향이 그 뒤 조선 성리학의 중요한 특성으로 자리잡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실천적 행동은 훈척까지도 성리학의 실체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고 성리학을 자기 시대의 이념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이제 성리학은 조선사회의 지배사상으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종대 이후 등장하는 사림은 기묘사림이 지치를 추진하는 데 학문적 기반, 특히 이론적 기반이 부족했다는 점을 인식하고 출사보다는 학문연구에, 성리학의 실천적 측면보다는 이론적 측면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성리학적 세계관과 이기심성론을 본격적으로 다룬 글들이 서경덕과 이언적 등을 통해 나오고 이어 사단칠정논쟁 등을 통해 이기심성론을 비롯한 성리학 이론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갔다. 특히 중종 말에 중국으로부터 처음 들어오는 『주자대전』은 주자의 저술을 모두 모은 문집으로 조선의 학자들로 하여금 주자의 전 사상체계를 접할 수 있게 함으로써 성리학 연구가 본궤도에 오르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서경덕과 이언적은 각각 조선 성리학에서 기일원론(氣一元論)과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우주의 본체인 태허(太虛)를 기로 보았던 서경덕의 학문은 북송 성리학을 독창적으로 집대성한 성격이 크다. 그의 학설에 영향을 미친 인물은 북송 성리학자인 장재와 소옹․주돈이었다. 그가 주로 관심을 가진 분야는 역학(易學)이었으며 연구하였던 성리서(性理書)는 송․명대 성리학 전반을 포괄한 『성리대전』이었다.

이는 당시 사상계가 『성리대전』을 중시하는 경향과 『주자대전』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뉘어져 감을 나타낸다. 『성리대전』을 중시하는 경향은 뒤에 가면 유․불․도 삼교에 두루 관심을 갖는 삼교회통사상, 천문․지리․의약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박학한 잡학(雜學)적 학풍과 결합되기도 하였다.

조식 역시 『성리대전』을 중심으로 공부하였으며 노장사상이나 불교에 대해서 포용적이었고 병법․의약․지리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성리학 이론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기심성론에 대한 이론적 탐구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경(敬)과 의(義)를 학문의 중심으로 삼고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을 주장하는 등 학문의 실천성을 강조하였다. 서경덕․조식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학문 경향은 16세기 중반 이후 하나의 중요한 사상적 조류를 형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상계의 주된 흐름은 주자의 학문, 주자 중심의 세계관에 충실하려는 것이었다. 이언적은 조한보와 벌인 논쟁에서 주자 이론의 핵심인 이기이원론과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에 기반하여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여 이황을 비롯한 후대 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주자 중심의 성리학이 조선사회에 확고히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 이황과 이이였다. 이황은 기대승과의 이기심성논쟁에서 사단은 리가 발하여 기가 그것에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리가 그것에 타는 것이라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반면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에 분속(分屬)시키는 것에 반대하고 기의 작용을 강조하며 리의 자발성을 부정하였다.

이황은 주자의 이론에 조선의 현실을 반영시켜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때문에 성리학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주력하면서도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근거를 객관적으로 증명해내는 심성론과 수양론에 더 중점을 두었다. 『심경』을 중시하고 실천 방법으로 경(敬)을 강조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제왕학의 모델을 제시한 『성학십도』를 선조에게 올린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서경덕과 기대승의 영향을 받은 이이는 성혼과 벌인 논쟁에서 사단과 칠정이 구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이 사단이며 이 사단칠정 모두 기가 발하고 리가 그것을 타는 것이라는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였다. 주자의 학설에 입각해 있으면서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 이기의 분리와 리의 운동성을 강조했던 이황과는 달리 이이는 주자성리학 자체에 충실하려고 함으로써 당시의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하였다.

그는 16세기 조선사회를 중쇠기(中衰期)로 파악하고 그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즉 통치기구의 재편과 위정자의 자질 향상을 목표로 한 통치제제 정비론과 경제적 능력에 맞는 부세와 중간 수탈의 배제를 목표로 한 부세제도 개혁론 등이 그것이다. 『성학집요』는 바로 이이의 경세론이 집약된 것인 동시에 16세기 초반부터 전개되어온 제왕학의 완결이었다.

이처럼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정치적 상황에 대한 대응양식에 따라 이론적 차이를 보이면서, 또한 성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지역적으로 크게 확산되면서 16세기 중반부터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서경덕학파와 이황학파․조식학파가 형성되고 그 뒤에 이이학파와 성혼학파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선조대 사림들이 중앙정계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함에 따라 각 학파를 기반으로 하여 정파가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서경덕학파와 이황학파․조식학파가 동인을 형성하였으며 이이학파와 성혼학파가 서인을 형성하였다. 동인은 정여립사건 즉 기축옥사(己丑獄事)를 계기로 이황학파의 남인과 서경덕학파․조식학파의 북인으로 분화되었다. 이후 학파와 정파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지니면서 전개되었으며 이것이 조선 중기 사회의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3) 예학의 발달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예학이 발달하였으며 두 차례의 예송을 비롯해 많은 전례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예학이 17세기 들어와 갑자기 부각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15세기 말부터 사림들에 의해 삼대(三代)의 예에 의한 교화가 강조되기 시작하고 중종대에 들어오면 기묘사림에 의해 『주자가례』와 『의례』가 『국조오례의』나 한당례(漢唐禮)보다 더 강조되면서 ‘국조오례의파(國朝五禮儀派)’와 ‘고례파(古禮派)’의 전례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어 16세기 중반 『주자가례』 중심의 생활규범서인 제례서(祭禮書)가 출현하고 동시에 『주자가례』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6세기 후반에 가면 문장을 주로 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성리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예에 관심을 가졌으며 예에 관한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학의 이러한 발전과정은 질적인 차이는 있으나 이기심성론의 심화과정과 거의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17세기에 들어와서도 예는 양란으로 인해 해이해진 예적 질서의 회복이 강조되면서 더욱 중시되었다. 나아가 예로 나라를 다스리면 다스려지고 가르침도 예교(禮敎)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며 학문도 예학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갔다. 예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방도로서 부각되었던 것이다. 예치(禮治)가 바로 그것이다.

예가 치국의 방도로 대두하면서 예학 연구는 심화되고 각 학파의 예학의 차이는 전례논쟁을 통해 표출되었다. 중종대 시작된 왕실의 전례논쟁은 선조대 흑립(黑笠)․백립(白笠)논쟁, 광해군대 공빈추숭(恭嬪追崇), 인조대 원종추숭(元宗追崇) 등을 거치면서 그 논쟁의 수준이 점점 높아져 갔으며 예송은 그 대립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송에서 이이학파의 서인은 『주자가례』와 『의례』 등을 강조하며 신권의 입장에서 왕사동례(王士同禮)를 주장하였다. 왕실에 적용되는 예와 일반 사대부에게 적용되는 예가 똑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서경덕․조식학파의 학문을 계승한 근기남인은 『주례』와 『예기』 등을 강조하며 왕권의 입장에서 왕사부동례(王士不同禮)를 주장하였다. 왕실의 예는 일반 사대부에게 적용되는 예와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예송은 표면적으로는 효종의 상에 삼년복을 입을 것인가 기년복(朞年服)을 입을 것인가(1차 예송) 그리고 효종비의 상에 기년복을 입을 것인가 대공복(大功服)을 입을 것인가(2차 예송) 하는 복제(服制)의 문제였지만, 근본적으로는 17세기 사회에서 각 학파 내지 붕당들이 나름대로의 학문적 기반 위에서 자신들의 노선의 정당성을 주장한 전형적인 ‘정치형태로서의 전례논쟁’이었다.

즉 성리학과 예학의 심화, 친가․장자 중심의 가족제도로의 변화, 학파․붕당 간의 긴밀성, 신권의 성장, 양란 이후 국가 재건의 방법 등 당시 정치․사상적인 면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의 요인들이 종합적으로 결합되어 왕실의 전례문제를 매개로 표출된 것이다.

나아가 예송에서의 사상적 차이는 중세 사회체제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연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송은 조선 후기 사회체제가 변화해가는 상황에서 반드시 겪어야만 했던 하나의 과정이었다.

 

4) 새로운 사상경향(실학)의 대두

 

인조반정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이이학파의 서인은 숙종대 이이․성혼의 문묘종사를 성사시켰다. 이는 이이의 학문이 국가적으로 공인받았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이황의 학문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서 조선사상계의 주류로 자리잡게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주자의 학문을 절대화함으로써 자신들의 학문적 기반을 공고히 하려고 하였으며 이는 송시열의 『주자대전차의)』와 한원진의 『주자언론동이고』 등의 작업으로 뒷받침되었다. 주자의 본뜻에 충실함으로써 당시 조선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반면 주자의 학문을 상대화하고 육경(六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 등에서 모순 해결의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는 경향도 17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되었다. 윤휴와 박세당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서경덕 사상의 영향을 받은 윤휴는 『대학』․『중용』을 비롯하여 『효경』․『주례』 등의 경전에 대해 독자적인 해석을 하였으며 박세당 역시 양명학과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아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였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인격천(人格天)으로서의 천을 리보다 상위에 상정함으로써, 인격천을 부정하고 이법천(理法天)만을 인정하여 천을 태극․리와 동일한 것으로 설정한 주자의 학문․체계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노론)의 강한 공격을 받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조선사상계는 다시 심성론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인간과 사물이 본성이 같은가(人物性同異), 발하지 않는 마음의 본체가 선한가(未發心體有善惡), 성인과 범인의 마음이 같은가(聖凡心同不同)를 둘러싼 호락논쟁(湖洛論爭)이 벌어졌다.

17세기말 이황․이이학파 양쪽에서 간헐적으로 전개되었던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이 논쟁은 18세기 초 이이학파 노론 안에서 권상하의 문인이었던 한원진과 이간 사이에 벌어진 논쟁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한원진은 인물성이론을 주장하고 이간은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는데 스승인 권상하가 인물성이론을 지지함으로써 충청지역 학인들간의 이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논쟁의 소식을 들은 김창흡․박필주․이재 등 서울․경기지역 학인들이 이간의 주장에 동조함으로써 논쟁은 지역적인 대립으로 확산되었으며 이후 100여 년간 지속되었다.

인성과 물성의 문제로 시작된 호락논쟁은 뒤에 성인과 범인의 마음이 같은가 하는 문제로 귀결되었다. 이는 이 논쟁이 단순히 주자의 심성론과 이이의 이통기국론에 담겨있는 논리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철학사상 내적인 이유 때문에 일어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오히려 국제정세의 변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도시의 성장, 농민층의 성장과 신분제의 동요, 새로운 정치세력과 사상경향의 대두 등 조선 후기 사회변동에 대한 노론 집권층의 사상적 대응의 성격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호락논쟁은 성리학적 세계관의 핵심인 이기심성론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와 당시 사회변동에 따른 인간관․자연관의 변화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이후 성리학적 세계관 극복의 바탕을 마련해 주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노론 집권층이 심성논쟁을 통해 자기반성과 이론적 재무장을 하는 사이 1694년 갑술환국을 계기로 중앙정계에서 밀려나 경기지방에 정착한 근기남인을 중심으로 이기심성론보다는 당시 사회경제적인 모순의 해결에 더 관심을 갖는 새로운 사상경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근기남인실학이 그것이다.

근기남인실학은 이미 17세기 후반 서경덕과 조식의 사상을 계승하고 육경과 제자백가를 학문적 바탕으로 삼았던 유형원․허목․윤휴 등에 의해 그 이론적 체계가 갖추어지지만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는 것은 18세기 전반 이익에 이르러서였다.

이들은 주로 농촌에 생활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농촌사회의 모순과 농민들의 고통에 대해 주목하게 되고 따라서 소농민의 이해를 대변하여 지주전호제의 모순을 완화하고 농업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근기남인실학이라고 해서 농촌 현실과 관련된 개혁책만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관료제와 군제의 운영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개혁책을 제시하였다. 이는 북학이 상공업에 관한 개혁책만 주장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기론 등 철학적 기반을 볼 때 근기남인실학은 대체로 기를 강조하기 보다는 리를 강조하고 나아가 리를 재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허목과 유형원에서 나타나는 실리(實理)의 강조가 그것이다. 기라는 현상적 측면이 아니라 리라는 본질적 측면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가 토지개혁론 등 근본적인 개혁론으로 표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전반에는 근기남인뿐만 아니라 소론에서도 기존의 성리학을 극복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정제두와 유수원이었다. 절충적인 성격을 지닌 성혼의 사상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소론은 이미 박세당에서 보이듯이 양명학과 노장사상 등을 수용하여 성리학을 절대시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소론의 새로운 사상경향은 18세기 말에 이르러 고증학을 수용하면서 더욱 풍부해졌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1728년 이인좌의 난과 1755년 나주괘서사건 등으로 노론의 공격을 받아 중앙정계에서 밀려나면서 이긍익․이충익 등 강화학파를 중심으로 가학(家學)으로 계승되었으며 홍양호․서유구 등 일부가 중앙에서 활동하였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노론 안에서도 낙론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과 성범심동론(聖凡心同論)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현실 사회를 개혁해 보려는 새로운 학문경향이 나타났다. 북학(北學)이 그것인데 대표적인 인물은 홍대용과 박지원, 그리고 서얼 출신인 박제가․이덕무․유득공 등이었다.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하나의 학파를 이루며 활동하였던 이들은 청에 사절로 가 청의 선진 문물을 접하고 조선의 낙후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기존의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화이론을 극복하고 화(華)와 이(夷)가 차이가 없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 여기에 도시의 성장과 상공업의 발달이라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변화에 맞닥뜨리면서 상공업 개혁을 통한 부국강병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은 청의 선진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배워와 상공업 발전의 기틀을 삼을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화폐의 유통과 수레의 이용, 시전상인들의 독점적인 영업권 폐지를 통해 상업을 활성화시키고 선박 등을 이용하여 대외무역을 확대해 나갈 것을 주장하였다. 아울러 수공업과 수산업을 발전시키고 광업을 개발하기 위한 여러 시책을 실시하여 재정수입을 늘리고자 하였다. 이는 당시 성장하고 있던 상인층과 수공업자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었다.

근기남인실학이 철학적 기반으로 리를 강조한 데 비하여 북학은 상대적으로 기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근기남인실학이 리를 재해석하려고 했던 것처럼 북학도 기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기론(氣論)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자연계에까지 확대하고 경제지학(經濟之學)과 상수학(象數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개혁론을 개진한 것도 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18세기에 들어와 본격화된 이러한 새로운 사상경향은 탕평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우문정치(右文政治)와 개혁을 추구하였던 정조에 의해 부분적으로 수용되었다. 정조는 규장각에 새로운 사상경향을 지닌 이들을 학파와 신분을 뛰어넘어 기용하였으니 근기남인의 이가환․정약용, 소론의 서영보․서유구, 노론의 이서구․남공철, 서얼 출신의 박제가․이덕무․유득공․성대중 등이 그들이다.

정조의 학문은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동시에 고증학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즉 성리학에 학문적 기반을 두었지만 주자의 학설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잃지 않았으며 고증학 자체에는 부정적이었지만 훈고(訓詁)․명물(名物)의 방법론의 수용에는 적극적이었다. 말하자면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성리학(宋學)과 고증학(漢學)의 장점을 절충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 조선 사상계에서 대두하고 있던 근기남인․소론․노론의 새로운 사상경향을 수용하였으며 역으로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 등을 통해 규장각을 중심으로 한 당대의 젊은 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러나 문체반정(文體反正)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정조의 새로운 사상경향의 수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5) 성리학의 경직화와 극복노력의 좌절

 

서울의 급속한 발전과 서울지역에 기반을 둔 노론 탕평파의 정국 주도권 장악으로 이미 18세기부터 보이기 시작했던 사상계에서의 경(京)․향(鄕) 즉 서울과 지방의 분화는 19세기에 들어오면 더욱 가속화되었다.

또한 중앙학계가 서울지역의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현상도 심화되었다. 즉 서울 근교에 살면서 육경과 제자백가, 또는 서학에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였던 근기남인, 산림에서 전환하여 역시 서울 근교에 살면서 양명학과 고증학을 수용하여 개방적인 학문경향을 보였던 소론, 이이학파의 학통을 계승하면서도 주자 중심의 성리학에서 벗어나 북학을 수용하였던 노론 낙론계 학자들이 중앙학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여러 대에 걸쳐 서울에서 관료생활을 하는 가운데 경화사족(京華士族)으로 성장해갔으며 자제 교육과 학문 교류, 혼인에 있어서도 이전의 성리학자들이나 같은 시기의 재지 성리학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19세기를 전후하여 서울지역 학자들이 가졌던 학문적 공감대는 북학이었다. 18세기 후반 대두하였던 북학은 홍대용과 박지원 단계에서는 조선 사상계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었으나 19세기 전반에 이르면 그 영향력을 확대해나가 서울지역 학자들 사이에 각 학파의 학문적 기반에 상관없이 크게 유행하였다. 당시 급격한 사회변동에 직면하여 사(士), 즉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재인식하고 그 속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청의 과학기술과 문물제도를 도입하여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도정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노론 집권층이 분화되면서 이러한 노력은 굴절과 좌절을 겪어야 했다. 정조대에 규장각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문체반정 당시 정조의 견책을 받기도 했던 노론 시파의 김조순․심상규․이상황과 박지원의 문인이었던 남공철 등이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핵심인물이 되어 당시 정계와 사상계를 주도하였지만 이미 이들의 사상은 현실과 유리되고 보수로 회귀하는 상황이었다. 이는 남공철이 고증학에 경도되어 개혁에 무관심해지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더욱이 세도가문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측근 학자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개혁 성향을 지닌 학자들은 학파에 상관없이 중앙정계에서 밀려났다.

한편 세도정권에 참여하여 고위관료에까지 올랐지만 세도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국가재정의 안정적 확보와 농업생산력 확대, 능력 위주의 인재 선발 등에 관한 현실적 개혁방안을 주장하였던 이서구․서유구․홍석주․김매순과 같은 일단의 관료학자군이 있었다.

또한 한 세대 아래로서, 북학에 경도되었던 박제가․성해응 등의 학문적 영향을 받아 청의 문물과 고증학의 수용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김정희와 조인영․권돈인 등이 중앙학계의 일단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곧 풍양조씨 세도정권의 핵심인물이었다.

이처럼 세도정치의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선사상계는 청의 문물을 수용하는 데서 나아가 청의 학문인 고증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는 단계에 이르면서 경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으며 그를 바탕으로 당시 학자들 사이에 한송논쟁(漢宋論爭), 즉 한학과 송학의 학문적 우위를 다투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사상계에서의 고증학의 수용은 일단 성리학의 자체적 반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따라서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고증학의 엄격하고 세련된 경전주석방법은 기존 성리학적 경학 연구에 큰 변화를 가져와 주자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동요시켰으며 금석학․음운학 등의 발달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사상경향을 주로 중앙의 세도가문과 경화사족 출신의 관료학자들이 주도하게 되면서 고증학은 이들의 문화적 세련에 봉사하게 되고 또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순수학문적 성격으로 인해 당시 현실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는 전혀 기여하지 못하였다. 이는 풍양조씨 세도가였던 조인형이 공공연히 개혁을 거부하고 구체제를 고수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데서 잘 드러난다.

한편 서울지역 학자들 가운데 성리학적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극복해 보려는 노력도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용과 최한기였다. 근기남인이면서 근기남인실학과 북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받는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생활 과정에서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등을 비롯한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 작업을 통해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하였다. 그의 사상은 시기적으로 조금씩 변해갔지만 궁극적으로는 지주소작제와 양반신분제의 철폐, 인민주권의 주장 등 중세체제의 전면적 개혁을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중반에 활동한 최한기는 북학과 고증학 뿐만 아니라 서양의 자연과학까지 수용하였다. 그는 기존의 학문들이 객관성과 보편성을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진정한 학문이 아니라고 보고 이러한 것들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새로운 기개념을 설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학(氣學)이라는 독특한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말하자면 과학적 진리의 인식론적 근거로서 기개념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기학은 가치론 중심이며 직관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성리학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근대적 사유방식에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진적인 이들의 사상이 세도정권에 의해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하였다.

19세기 세도정치기는 사상사적으로 암흑의 시기는 아니었다. 사회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그 모순을 성리학의 재정립을 통해 해결하려는 노력, 고증학을 통해 해결하려는 노력, 성리학적 세계관의 극복을 통해 해결하려는 노력 등 다양한 노력들이 사상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결실을 맺기 전에 세도정치라는 현실에 억눌려 좌절되었다. 북학에서 배태되어 나오고 고증학을 수용하기도 했던 세도정권의 핵심사상가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주자 중심의 성리학으로 돌아갔다. 지배기술만 고도로 발달한 이들에게 남은 것은 송시열이 세운 일당전제의 노론세도론 뿐이었다. 이들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개혁적인 요소를 가진 사상은 가혹하게 탄압하거나 체제 유지에 장애가 되지 않는 한도 안에서만 허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일반민들의 전면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3. 조선시대 유교문화

 

조선시대 유교문화는 유적․유물들을 통해서 그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종묘와 사직, 향교와 서원, 누정, 정려, 금석문, 고문서 등이 있다.

 

1) 종묘와 사직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 추존왕(追尊王)과 추존왕비(追尊王妃)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사드리는 사당을 지칭하는 것으로 태묘(太廟)라고도 하였다. 본래 중국 고대에는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곳을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하였으나 한대 이후 왕실에 국한하는 용어로 한정하여 사용되었다.

종묘에 관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보이지만 제도로서 완비된 것은 고려 성종대였다. 조선이 건국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자 1395년 새로운 종묘를 완성하였으며 이때 규모는 7칸 동당이실(同堂異室)로 좌우의 익실(翼室)은 각각 2칸이었다. 1461년(세종 3) 종묘 정전 바로 서쪽에 별묘인 영녕전(永寧殿)을 세웠는데 정전 4칸에 좌우로 익실 1칸을 더한 것이었다.

이어 1546년(명종 1) 증축을 하여 정전이 좌우 2칸씩 모두 4칸이 늘어나 11칸이 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리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다시 이전 상태대로 복원되었으며 영녕전은 정전 4칸에 좌우 익실 각 3칸으로 이전보다 증축되었다. 1667년(현종 8) 영녕전의 익실을 좌우 각각 1칸씩 중축하고 1726년(영조 2) 종묘 정전의 신실을 동쪽으로 4칸 중축하였다. 종묘 정전은 1836년(헌종 2) 다시 동쪽으로 4칸을 늘려 모두 19칸이 되었으며 이때 영녕전도 같이 증축하여 좌우 익실 각 2칸씩을 늘려 모두 각 6칸이 되었다. 종묘 정전에는 27명의 조선 왕 가운데 18명과 추존된 왕 1명 등 19명의 왕과 왕비의 신위만이 봉안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영녕전에 있다. 그리고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아예 없다.

종묘 제사는 삼국시대부터 시행되었으며 고려 성종대에는 태묘(太廟)로 이름을 고치고 천자의 예로 제사를 지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종묘를 세우고 제후의 예로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 대한제국기에는 다시 황제의 예로 제사를 지냈는데 현재는 대한제국기의 형식을 대체로 수용하면서 시대에 따라 변하였다.

종묘의 각 신실의 건축 구성은 지극히 단순 질박하다. 이 단순 질박한 각 실이 옆으로 길게 연속되면서 종묘 정전의 전체 공간 구성은 앞도적인 장엄함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이 점은 우리나라의 다른 어떤 건축도 흉내낼 수 없는 종묘만이 갖는 건축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직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가리킨다. 이 두 신을 제사지내는 단을 만들어 모신 곳이 사직단이며 조선시대 사직단을 관장하던 관청이 사직서였다. 사직은 종묘와 함께 제일 격이 높은 대사(大祀)에 속했다. 조선시대에 종묘와 사직이 국가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의미를 지녔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주례』에 의하면 ‘좌묘우사(左廟右社)’라 하여 종묘는 궁궐의 좌측에, 사직은 우측에 세웠다. 또한 종묘는 수도 한 곳에만 설치한 데 반하여 사직은 수도 뿐만 아니라 지방행정단위인 주현마다 설치하였다. 주현의 사직도 관아의 서쪽, 즉 오른쪽에 세웠으며 왕 대신 그 지역의 수령이 제사를 지냈다. 국가 전체 차원에서 볼 때는 사직이 종묘보다 비중이 컸다고도 할 수 있다.

『주례』나『예기』에 의하면 사직단은 사단(社壇)과 직단(稷壇)을 따로 설치하였으며 사단은 동쪽에, 직단은 서쪽에 위치하였다. 각 단에는 다섯 가지 색깔의 흙을 덮었는데 동은 청색, 서는 백색, 남은 적색, 북은 흑색, 중앙은 황색 흙으로 하였다. 또한 각 단에는 신위를 모셨는데 사단에는 국사신(國社神)을 북향하여 모시고 후토신(后土神)을 동향하여 배향하였으며, 직단에는 국직신(國稷神)을 북향하여 모시고 후직신(后稷神)을 동향하여 배향하였다. 각 단에는 사방으로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단 둘레에는 유(壝)라 하는 울타리를 치고 그 유에도 사방으로 문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후대에도 크게 변화가 없었다.

조선시대 이전에도 사직제도는 존재하였다. 고구려에서는 392년(고국양왕 9)에 국사(國社)를 세우고 종묘를 수리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신라에서는 선덕왕(780-785) 때 사직단을 세웠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992년(성종 11) 종묘와 함께 사직단을 설치하였는데 중국의 제도와 거의 같았으며 단의 크기도 너비가 5장, 높이가 3척 6촌으로 중국과 비슷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394년 8월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자 9월 태조가 정도전 등을 한양으로 보내 사직단의 위치를 도성 서쪽 인달방(仁達坊)으로 정하였으며 1395년(태조 4) 정월 공사에 착수하였다. 공사가 끝난 시기는 기록에 정확히 나오지 않지만 궁궐과 종묘가 완성된 9월에 같이 완성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국조오례의』에 나와있는 조선 초기의 사직단의 모습을 보면, 한 가운데 사단과 직단이 각각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였는데 너비는 2장 5척이고 높이는 3척이었다. 이 두 단을 둘러싼 것이 유인데 이 유의 한쪽 면의 길이는 25보였으며 사방으로 홍살문이 나 있었다. 그 밖으로 다시 네모난 담장이 둘러쌌으며 이 담장에도 역시 사방으로 홍살문이 나 있었다. 특이하게 다른 홍살문은 모두 문이 하나인데 담장의 북문만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이유는 신이 출입하는 문이므로 격을 높였기 때문이다. 유의 바깥 서남쪽에는 신실(神室)이 있고 유의 북문과 담장의 북문 사이에는 왕이 서있는 자리인 판위(版位)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조선의 사직제도는 중국의 제도와 같았으나 규모는 반으로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직단은 임진왜란으로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리고 단만 남았다. 신위는 개성의 목청전(穆淸殿)에 묻어 보관했다가 평양으로 옮겼으며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게 되자 세자가 받들고 황해․강원도 등으로 돌아다니다가 환도해서는 명종대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의 집에 종묘의 신위와 함께 모셨다. 1596년(선조 29)에 신실을 지어 봉안하였다. 사직단이 완전히 재건된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603년 사직단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1608년 종묘가 재건되기 전에 복구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중건된 사직단은 초기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따랐지만 높이가 3척 4촌이고 유의 한쪽 면의 길이가 22보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규모에서 약간 차이가 있었으며 부속 건물의 위치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즉『국조오례의』에서는 악기고․신주․제기고․재생정 등 부속 건물이 단 서쪽에 따로 담장을 치고 그 속에 모여 있었는데 1783년(정조 7) 편찬된『사직서의궤』에서는 부속건물이 이전보다 많이 늘어나고 서쪽에 제기고․재생정․전사청․잡물고․수복방 등이 위치하고 동쪽에 악기고․안향청․차장고․악공청․부장직소 등이 위치하는 등 양쪽에 퍼져 있었다. 사직에 제사드리고 관리하는 일이 더욱 많아지고 세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에는 부속건물 가운데 재실로 쓰이던 안향청과 정문만이 남아있다.

 

2) 향교와 서원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에 설치한 관립학교라고 할 수 있다. 서울에 설치한 관립학교는 특별히 성균관이라 불렀다. 향교는 공자와 성현들을 모신 대성전(大成殿)과 동․서무(東․西廡) 등 제향공간과, 명륜당(明倫堂)과 동․서재(東․西齋) 등 강학공간으로 기본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그밖에 전사청(典祀廳), 고직사(庫直舍), 양사재(養士齋) 등의 부속건물들이 있다.

이러한 기본 구조가 언제 확립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려시대에는 문묘와 강당이 한 건물 안에 있어 공자와 선현에 대한 봉사가 교육에 부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대성전이 독립되고 아울러 동서무가 건립되면서 제사 기능을 위한 체제가 확대되었는데 이는 성균관의 체제를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향교는 군현에 따라 규모와 봉안하는 신위 수에 차이가 있었다. 즉 군현의 격에 따라 대설위(大設位), 중설위(中設位), 소설위(小設位)로 구분할 수 있다. 대설위는 성균관처럼 대성전에 공자를 주향으로 하고 4성(四聖)을 배향, 공문10철(孔門十哲)과 송6현(宋六賢)을 종향하고 공문72자(孔門七十二子)와 중국의 제유(諸儒) 22인, 동국18현(東國十八賢)을 동서무에 모신 것이다. 중설위는 부․목․도호부의 경우로 공자를 주향으로 4성, 공문10철, 송6현을 대성전에, 동국 18현은 동서무에 봉안하였다. 소설위는 일반 군현의 경우로 공자와 4성, 송6현을 대성전에, 동국18현을 동서무에 봉안하였다.

향교의 교육과 운영을 담당한 자는 교관이었다. 교관의 지위는 군현의 격에 따라 달라 부․목․대도호부에는 종6품인 교수가, 일반 군현에는 종9품인 훈도가 파견되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모두 329명의 교관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향교 교육이 쇠퇴하면서 17세기 이후 교관이 파견되지 않자 지방 양반들이 실제로 향교 운영을 맡아 행했는데 이들은 교임이라고 하였다. 교임은 수임(首任)인 도유사(都有司: 齋長, 齋首, 校長)와 차임(次任)인 장의(掌議: 2명), 말임(末任)인 색장(色掌: 2명)으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들은 동재유생(東齋儒生: 靑衿錄儒生) 가운데서 선출하였는데 관권의 간섭을 가급적 배제하면서 향교를 운영하였다. 임기는 1년이고 교체와 선출에 엄격한 절차를 취하여 교임의 권위를 부여하고 선출과정에서의 대립의 소지를 방지하였다.

향교의 학생을 교생(校生)이라 불렀다. 대체로 15-16세면 입학할 수 있었다. 정원은 초기에는 부․목․대도호부에 50명, 도호부에 40명, 군에 30명, 현에 15명이 배정되었으나『경국대전』에서는 각각 90, 70, 50, 30명으로 늘어나 이것이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이 정원이 법적으로 국역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숫자였다. 또한 같은 교생이라도 양반은 액내교생(額內校生) 또는 상액(上額)으로, 서얼과 평민은 액외교생(額外校生) 또는 중액(中額)․하액(下額)으로 구분하였다.

그런데 인조대 교생고강(校生考講)으로 인해 양반들은 액내교생 대신 청금록유생(동재유생)이라 이름하여 교생과 구별하였고 서얼과 평민들이 대신 액내교생으로 입교하여 서재교생(西齋校生)이라 이름하였다. 위치에 따른 기숙사의 명칭이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용어로 변화한 것이다. 서재교생의 정원이 바로 군현의 등급에 맞게 배정된 교생의 정원이 되었으며 따라서 액외교생은 향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라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향교에 입속한 자들을 의미하였다.

동재유생 가운데서 선출된 교임들은 향교에서 과거를 준비하는 학생이 아니라 향교 운영에 참여하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제관이 되어 향교의 제례를 거행하고 향교 재정을 관할, 운용하였으며 도서 관리, 건물 수리 및 유지 등을 담당하였다. 또한 수령에게 자문하고 군현내의 교화와 기강 확립에 노력하기도 하였다. 양반사족임을 과시하는 명부로 이용되었던 청금록은 정원이 없었다.

액내교생은 향교에서의 수직(守直), 제향(祭享)의 집사(執事), 병부(兵符)의 전달, 사문(赦文)의 전달과 낭독을 담당하였고 그밖에 호적대장의 정서(淨書), 칙서(勅書)의 보관 등도 담당하였다. 이들은 군역을 면제받는 대신 60세까지 이러한 임무를 수행할 의무를 지닌 일종의 역담당자였다. 또한 이들의 신분은 대체로 평민의 상층과 서얼 등 중인이 많았다.

향교의 경제적 기반으로는 학교전(學校田)과 학교노비(學校奴婢)가 있다. 국가는 군현의 격에 따라 토지와 노비를 지급하였는데 1406년(태종 6) 학교전에 대한 액수가 제전과 품전으로 나누어 정식으로 정해진 후 몇 차례의 액수의 재조정이 있었으며 1492년(성종 23) 『대전속록』에 부․목․도호부는 10결, 군은 7결, 현은 5결로 법제화되었다. 뒤에 영조대『속대전』에서는 부․목․도호부는 7결, 군현은 5결로 축소되었다. 학교노비는 조선 초기에 지급액에 여러 차례 변동이 있다가『경국대전』에 부는 30명, 대도호부․목은 20명, 도호부는 20명, 군현은 10명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학교촌(學校村)을 설정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서원, 향청, 이청(吏廳) 등에 널리 설정되었던 제역촌(除役村)의 하나이다. 이 학교촌에는 향교가 소재한 동(校村)과 향교에서 별도로 지정한 학교속촌(學校屬村)이 있었다. 교촌은 수직, 수리, 사환 등의 잡역을 담당하거나 또는 납전(納錢)을 하였고 학교속촌은 부민(富民), 부촌(富村)들이 급계납전(給契納錢)한 계방촌(契房村)의 일종이었는데 모두 그 대가로 군역, 잡역, 환곡 등에서 면제 혜택을 누렸다.

향교에서는 사장(詞章)과 경학(經學)을 배웠다. 경학은 경전뿐만 아니라 사서(史書)도 함께 배웠다. 또한 향교에 일정 기간 출석한 자에 대하여 과거 응시자격을 부여하는 원점법(圓點法)의 적용하고 향시(鄕試)의 도별 합격 예정인원을 도별로 제한하는 등 향교 교육의 내용은 제도적으로 과거제와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향교의 교과과정은 생원․진사시의 시험과목에 준하였을 겻으로 여겨진다. 즉『소학』과 주자가례, 사서오경과 여러 사서(史書)을 비롯하여『근사록』과 『심경』등을 공부하였다.

세종대 15일 동안은 시문을 제술하고 15일 동안은 경서와 제사(諸史)를 강독하게 하며 제술과 강론에서 우등한 자는 5인씩 녹명(錄名)하여 예조에 보고하여 바로 생원회시에 응시하게 한다는 기록이나『경국대전』장려조의 교생으로서 독서한 매월 말에 수령이 관찰사에게 보고하면 관찰사가 순행하여 고강하고 영에 의하여 권장함을 문부(文簿)에 기록하였다가 교관이 전최(殿最)할 때에 그의 일과(日課), 월강(月講)을 빙고(憑考)하여 우등한 자는 호역(戶役)을 헤아려 감한다는 내용에서도 향교의 공부 내용을 엿볼 수 있다.

서원은 향교와는 달리 대부분 읍내와는 멀리 떨어진 인적이 드물고 경치가 뛰어난 산기슭이나 계곡 등에 위치하고 있다. 교육과 연구를 위해서이다. 그러나 단순히 경치만 좋다고 서원의 입지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서원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선현의 봉사이기 때문에 배향한 선현, 특히 주향자와 연고가 있는 곳에 건립되는 경우가 많았다.

순흥의 소수서원은 안향의 고향에 세워졌으며 화순의 죽수서원과 순천의 옥천서원은 각각 조광조와 김굉필의 유배지였던 곳에 세워졌다. 또한 안동의 도산서원이나 연산의 돈암서원처럼 서당을 만들어 제자를 양성하던 곳에 세워지는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여러 가진 연고가 있는 지역 가운데 가장 경관이 뛰어나고 지리적 이점을 가진 땅을 골라 서원을 세웠던 것이다.

서원은 향교와 마찬가지로 선현을 봉사하는 제향공간과 교육과 연구를 위한 강학공간으로 기본 구조가 이루어져 있으며 대체로 강학공간이 앞에, 제향공간이 뒤에 위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을 띠고 있다. 제향공간에는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과 선현을 모신 사당이 있고 강학공간에는 정문인 외삼문과 공부하는 강당, 기숙사인 동재․서재 등이 있으며 그밖에 문집, 서적을 펴내거나 보관하는 장판각(藏版閣)․장서각(藏書閣), 제사에 필요한 제기고(祭器庫), 서원의 관리와 식사 등을 담당하는 고직각(庫直舍) 등이 있다. 원생들이 휴식하거나 여가를 위해 마련한 누각이 있는 곳도 있으며 누각이 정문을 겸한 경우도 있다.

서원의 건물 구성은 서원에 따라 차이가 있고 시기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었다. 초기에는 교육시설이 중시되었으나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사현(祀賢)기능이 강화되면서 제향시설을 중심으로 건물 구성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후대로 갈수록 장판각이나 누각 등이 점차 사라져가고 사당과 강당만으로 구성된 단순한 형태의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서원에서의 교육은 원규(院規)에 의한 규제와 원생 자신의 자율적인 실천과 학습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원규에는 수학규칙(受學規則), 거재규칙(居齋規則), 교수실천요강, 독서법 등이 실려 있었다. 교육의 방법이 지금처럼 일방적인 강의 위주가 아니었다. 원생들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공부할 진도가 정해지고 자습과 독서를 통해 뜻을 새기고 스스로 실력을 쌓아갔다. 독서는 다독(多讀)과 기송(記誦)만을 일삼지 말고 정독과 사색에 힘 쓸 것과 지(知)와 행(行)이 반드시 일치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서원의 전통적인 교수방법은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있고 의리를 문답하는 강(講)이었다. 강은 대개 순강(旬講)․망강(望講)․월강(月講) 등으로 나뉘었으며 낭독 방법에 따라 암송낭독인 배강(背講)과 임문(臨文)강독인 면강(面講)으로 나누기도 하였다. 낭독 뒤에는 질의응답을 통하여 단순한 암송 위주의 학습법을 극복하였다.

또한 강을 받는 데는 강의(講義) 또는 강회(講會)라는 일정한 절차를 두어 학습에 대한 진지성과 예의를 갖추도록 하였다. 또한 도기제도(到記制度)를 도입하여 원생의 출석 여부를 확인하고 학령의 준칙에 따라 고과평정과 독서지침을 제시하였다.

강의평가는 대통(大通), 통(通), 약통(略通), 조통(粗通), 불(不)의 5단계, 또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4단계로 하였으며 대통은 구두에 밝고 설명에 막힘이 없어서 책의 취지를 두루 알 수 있는 가장 높은 학습수준을 갖춘 자에게 부여하였으며 불은 낙제를 의미하였다.

보름에 한 번 정도 열리는 강회 때가 되면 모든 원생들은 강당의 대청에 올라 정연히 앉는다 여러 명의 교수진 앞에 한 사람씩 불려 나와 그동안 공부한 내용을 보고하고 문답을 통해 학습의 정확성을 검증받는 강(講)을 받는다. 여기서 합격하면 다음 진도가 부여되지만 불합격하면 여지없이 낙제여서 다음 강회 때 같은 내용을 다시 시험치른다. 이처럼 철저하게 능력별 진급과 졸업제도가 적용되기 때문에 수업 연한이 별도로 정해져 있지 않아 짧게는 2년, 길게는 10여년에 걸쳐 졸업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항시 수업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모든 교수진이 상주할 필요가 없었으며 교육을 총괄하는 원장과 행정을 총괄하는 유사만이 상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여타의 교수진은 강회 때와 개인 사정에 따라 출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교수진을 겸하는 서원의 운영진에는 서원의 대표자인 원장(院長), 부원장 격인 원이(院貳), 경학․예절에 대한 강(講)을 담당한 강장(講長), 원생들의 훈도와 후생을 담당한 훈장(訓長), 동․서재의 사감인 재장(齋長), 서원의 규율을 단속하는 집강(執綱), 총무 역할을 하는 유사(有司), 당회(堂會)․강회(講會)의 서기인 직월(直月), 직월을 보좌하는 직일(直日), 당회의 총괄자인 장의(掌議), 재정과 행정을 감독하는 색장(色掌) 등이 있었다.

서원의 교육 활동을 위한 중요한 재원의 하나는 서원전이었다.『속대전』에 의하면 사액서원에는 각각 3결을 지급하였다. 비사액서원은 유지들이 기증하는 원입전(願入田), 면역을 위하여 납상하는 면역전(免役田), 자체에서 사들이는 매득전(買得田), 관찰사․지방관에 의한 공전(公田)의 급속(給屬)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광대한 농장을 소유하여 학전(學田)으로 이용하였으며 관찰사․지방관이 지급하는 어물․식염 등으로 필요잡비를 충당하였다.

 

3) 누정과 정려․금석문

 

누(樓)․정(亭)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줄인 말로, 일반 살림집과는 달리 자연을 배경으로 한 풍류 내지 사교 공간으로 지은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전근대시대의 학인(學人)들은 이 누정을 중심으로 시가(詩歌)를 주고 받고 시국에 대해 토론하고 향리의 자제나 제자들에 대해 교육하고 은둔․소요하며 학문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누정의 현판 등 관련자료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 당시 학인들의 교유 관계, 사족들의 정치․사회적 역학 관계를 밝혀내는 데 많은 기여를 할 수가 있다.

 

* 무등산 원효계곡 주변의 정자

면앙정(俛仰亭): 1533년 송순이 건립. 대사헌, 우참찬 등 역임. 면앙정가단.

송강정(松江亭): 1584년 정철이 죽록정을 중수하여 건립. 대사헌, 우의정 등 역임. 성산가단.

명옥헌(鳴玉軒): 1652년 오희도의 아들인 오이정이 건립. 한국식 정원.

식영정(息影亭): 1560년 김성원이 건립하여 스승인 임억령에게 드림. 밑에 서하당(棲霞堂)이 있음.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 임억령은 담양군수 등 역임.

소쇄원(瀟灑園): 1540년대 양산보가 건립. 한국식 정원.

환벽당(環碧堂): 1540년대 김유제가 건립. 나주목사 등 역임. 외손녀사위인 정철이 공부한 곳.

취가정(醉歌亭): 1890년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고 기리고자 후손 김만식 등이 건립.

독수정(獨守亭): 조선 초기 전시민이 건립. 고려 공민왕대 북도 안무사 겸 병마원수, 병부상서 등 역임.

풍암정(風巖亭): 김덕령의 동생인 김덕보가 건립.

연계정(漣溪亭): 유희춘이 건립. 대사성, 이조참판 등을 역임. 미암일기를 보관한 모현관이 있음.

 

* 영산강 유역의 정자

기오정(寄傲亭): 1669년 박세해(반남 朴氏)가 창건. 이광사가 쓴 현판.

영모정(永慕亭): 1520년 임붕(나주 林氏)이 창건.

소요정(逍遙亭): 1520년 이종인(함평 李氏)이 창건. 병조참판, 전라좌수사 등 역임.

창주정(滄州亭): 1600년경 정상(나주 鄭氏)이 창건. 사헌부 감찰, 창평․무주․철원군수 등 역임.

석관정(石串亭): 1500년경 이진충(함평 李氏)이 창건. 신녕현감 등 역임.

장춘정(藏春亭): 1561년 유충정(고흥 柳氏)이 창건. 장흥도호부사 등 역임.

식영정(息營亭): 1630년 임연(나주 林氏)이 창건. 영암군수, 좌우승지, 남원부사 등을 역임.

 

정려(旌閭)는 정표여문(旌表閭門)을 줄인 말로 충신, 효자, 열녀 등에 대하여 그들이 살던 동네에 정문(旌門: 홍살문)을 세워 표창하는 것을 뜻한다. 유교국가를 표방하고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보급과 실천에 힘썼던 조선은 충․효․열 삼강(三綱)에서 특이한 행적을 보인 사람들을 관직에 임명하거나 세금을 감면해 주거나 정문을 세워주는 정표정책을 적극적으로 행하였다.

사족들의 입장에서도 국가로부터 정려를 받는다는 것은 지방사회에서 유력 가문으로 성장하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정려를 받기 위해 거짓으로 보고한다든지 문중 차원에서 강요하는 폐단이 발생하고 정려 자체가 형식적인 측면으로 흐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정려를 통해 향촌 유력 가문의 성장의 한 측면을 살펴볼 수가 있다.

금석문(金石文)은 고문서와 함께 지방사 사료 가운데 중요한 부문을 차지하고 있는 1차 사료이다. 금석문에 나타난 기록들은 그 지역의 지명과 인명, 인물의 행적, 건립 경위 등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어 관찬의 중앙중심적인 문헌사료의 한계점을 보완해준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금석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비(碑)이다. 비는 내용에 따라 신도비(神道碑)․유허비(遺墟碑)․기적비(紀績碑), 공적비(功績碑)․선정비(善政碑), 효자비(孝子碑)․열려비(烈女碑)․망곡단비(望哭壇碑), 창의비(倡義碑)․순의비(殉義碑)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외에 전통건축과 향약․동약 등도 있을 것이다. 또한 유물․유적 뿐만 아니라 유교적 생활관습과 전통 등도 유교문화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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