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이란

2017. 6. 19. 16:34성리학(선비들)

우리에게 성리학이란 무엇이었는가
시간의 분절에서 자유로운 학문은 없다. 언제나 현재를 살아가던 학문이 역사의 노도에 휩쓸려 한순간 과거로 추방된다. 나는 현재이다, 나는 과거가 아니란 말이다! 아무리 외쳐도 현실 세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시간의 위계를 좀처럼 헤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과거가 된다는 것이 단지 불행한 일일까? 과거는 과거의 현재로서 행복하게 추억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과거로서 냉철하게 성찰할 대상이기도 하다. 자기 성찰의 첫걸음은 자기를 과거로 사유하는 데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은 1910년대에 들어와 과거가 된다. 자기 성찰을 극대화하는 근본적인 물음과 만나게 된다. 아래에 그 물음 하나를 소개한다.

유가(儒家)의 이기설(理氣說)은 중국 송대(宋代)에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논변이 우리나라처럼 그렇게 성행하고 그 문자가 우리나라처럼 그렇게 심하게 지리하고 장황하지는 않다. 우리나라의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나라보다 뛰어난 것인가, 이치를 탐구하는 사람이 다른 나라보다 독실한 것인가? 아니, 아니다. 거기에는 까닭이 있다. 한갓 기성의 학벌(學閥)을 숭상하여 자득(自得)과 실공(實工)에 유감이 있기 때문이다. 아, 주자(朱子)가 말하지 않았던가. 여러분께서 공맹(孔孟)을 표준으로 삼는다면 전현(前賢)의 시비가 절로 자신의 판단에서 달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다른 나라는 비록 정주(程朱)를 으뜸으로 삼아도 더러 정주의 시비를 본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유자(儒者)는 오로지 정주를 으뜸으로 삼고 감히 그 시비를 말하지 않는다. 시비를 감히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러 공맹의 말을 정주의 학설에 억지로 인증하고 부합시켜 자신의 억측을 드러내니 두렵지 아니한가! (…) 아, 중국과 동국 두 나라가 실력이 없어 패망한 이유가 참으로 이렇게 허론(虛論)으로 세력을 붙들었던 데 있다. 이른바 송학(宋學)이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말하면 여러 학설의 문제점은 전적으로 이(理)와 기(氣)를 억지로 나누어 대거(對擧)하려는 생각에서 나온다. 게다가 으뜸이 되는 학벌로부터 재갈을 물려 신음하고 있으니 고매하고 총명한 바탕을 갖고도 남을 모방하느라 평생을 허비한다. 학문을 논함에 겹겹이 쌓인 곡절이 한 없이 생기고 서로 간에 극도의 갈등을 품어, 나아가든 물러나든 모두 시비를 다투는 자리를 만들고 조정에 서든 초야에 숨든 필히 양식이 되는 규범에 의거하여, 자기와 다른 의견을 만나면 사도(邪道), 이단(異端)이라고 매도한다. 이 때문에 걸출한 사람은 이쪽을 싫어해 저쪽으로 옮겨가고 훈고를 조금 아는 사람은 함부로 스스로 진짜 학문을 보았다고 여긴다. 도도히 공담(空談)을 일삼으며 날마다 쇠퇴해서 떨쳐 일어날 것을 생각할 줄 모른다. 학문은 침몰해 가고 사람은 몽매해져서 문득 오늘날이 되어서는 다시는 공자의 학문이 강하고 굳세고 바르고 실한 줄 알지 못하고 다른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 불굴의 수치를 받고 있으니 만약 이를 책한다면 책임을 학문에 돌려야 할까, 사람에게 돌려야 할까? 나 또한 오래 전부터 이 문제를 개탄했지만 학문이 없고 사람됨이 비루해 입을 열 계제가 없었다. 다행히 지난여름 이래 경성(京城)의 『매일신보(每日申報)』 지면에서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이 게재되고 있었기 때문에 대략을 보고 생각해 보았는데 여러 학설이 동이(同異)가 어떻고 득실(得失)이 어떻든 모두 조금도 실학(實學)에 이로움이 없다. 이로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 해로운 것도 적지 않을 성 싶다. 그래서 분수에 넘는 죄인 줄 알면서도 함부로 위와 같이 입설해 보았다. 원컨대 이에 뜻 있는 분들께서는 논박해도 좋고 옹호해도 좋다. 더러 비슷한 사례를 대서 질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정성껏 답변하겠으며 오늘은 개설만 거론해서 애오라지 단초를 열려 한다.
병진년(1916) 3월 상순. 차호(遮湖)에서 여중(旅中)에 기록한다. 오촌(梧村).

[窃惟儒家理氣之說, 自中國宋代始矣, 而其辯未有若我邦之盛, 其文支離張皇, 亦未有若我邦之甚, 抑其好學者有長於他邦歟, 玩繹者有篤於他邦歟. 否否. 其有故焉. 徒崇旣成學閥, 而有感於自得實工也. 噫. 朱子不云乎. 諸公以孔孟爲標準, 則前賢之是非, 自不逃吾鑑矣. 他邦則雖宗程朱, 而或有見程朱之是非者, 然吾邦之儒, 則專宗程朱, 而莫敢言其是非, 非惟莫敢言其是非, 或以孔孟之言强引附合於程朱說, 而露其臆測之見, 可勝悚然哉. (…) 噫. 中東兩邦之無實力而敗亡之由, 亶在此虛論持勢之故也. 所謂宋學烏能免其責乎. 一言以蔽之, 曰諸說之病, 專出於對擧强分之意, 而且呻吟於宗閥羈絆之下, 以其豪邁聰睿, 費了一生畵胡蘆, 而論學則以生無限層折, 互懷極端葛藤, 進退皆爲是非之場, 出處必據模型之規, 遇異吾見, 則輒罵以邪道異端, 由是之故, 桀然者厭此而就彼, 粗解訓詁者, 妄自以爲見得眞學, 滔滔以空談爲事, 日就萎靡, 不知思所以振作之, 以學湮沈, 以人倥侗, 遽至今日, 使之不復知有孔學之剛毅正實, 而受他學人不屈之恥, 若其責之, 歸于學乎, 歸于人乎. 愚亦慨然乎此者久矣. 然學滅人卑, 無由開口之階, 幸而客夏以來, 京城每日申報紙上, 揭朝鮮儒敎淵源一般, 故覽得大略而思之, 則諸說之異同得失, 合無足分毫有益於實學, 非唯無益而又害之者, 恐似不尠, 故不顧僭越之罪, 妄說如右, 願有志于斯者, 可敵之敵之, 可袒之袒之, 有或觸類而質者, 當可慥慥隨辯, 而今纔擧槪. 聊啓端倪. 丙辰三月上澣, 記于遮湖旅中. 梧村.]


- 설태희(薛泰熙, 1875~1940), 『학림소변(學林小辯)』 「일(一), 이기변(理氣辯)」


이기변(理氣辯)이 첫 번째로 실린 『학림소변(學林小辯)』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은 우리나라 유학사를 정리한 명작이다. ‘조선유교연원’이라는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조선’이란 식민지 조선의 현재성과 조선시대의 역사성, 그리고 기자조선의 근원성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표상이다. ‘유교’란 조선시대의 도학을 대체하고 새롭게 부상한 시대적인 표상이다. 황덕길(黃德吉)의 도학원류찬언(道學源流纂言), 심기택(沈琦澤)의 아동도학원류(我東道學源流), 신기선(申箕善)의 도학원류(道學源流) 등 기존의 여러 작품과 달리 도학의 역사 대신 유교의 역사를 선택한 것이다. ‘연원’이란 우리나라 유학사를 기원부터 당대까지 자신의 역사의식에 입각하여 통시대적으로 완성하겠다는 의지의 소산이다. 이와 같은 특성들이 근대에 출현한 한국유학사로서 이 책의 고전적인 가치를 높여 준다.

그런데 근대 학술사의 관점에서 『조선유교연원』의 학술사적 가치는 조금 특별한 데가 있다. 그것은 근대의 학술 공간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미디어와 관계가 있다. 미디어는 근대에 들어와 지식을 생산하고 전파하는 강력한 기제였고, 미디어에 의해 창출된 네트워크를 타고 지식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가 연쇄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조선유교연원』은 책이기에 앞서 사실은 신문 칼럼이었다. 1922년 회동서관(匯東書館)에서 순 한문체로 출간되기에 앞서 1917년 『매일신보』제1면에서 몇 달 동안 국한문체로 연재되었다. 비록 대중 매체의 한정된 학술 공간이었지만 거기에 맞게 적합한 분량의 날씬한 모습으로 매회 매회 신문 독자들에게 메시지가 발신된 이 글은 독자들에게, 특히 신문을 읽는 유교지식인에게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설태희(薛泰熙)의 「이기변(理氣辯)」은 그 반향 중의 하나이다. 설태희는 함경도 단천 출신으로 일제식민지시기 물산장려운동으로 저명한 인물인데, 국망 전에는 관직 생활도 하고 사회 활동도 했지만 국망 후에는 고향에 은둔하며 유교를 연구하고 있었다. 어째서 유교인가? 그는 전에는 서양이 기독교에 입각해 부강한 국가가 되었듯 한국도 유교에 입각해 부강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후에는 자본주의와 군국주의로 가득한 서양 물질문명을 비판하면서 끊임없이 유교적 가치를 환기하였다. 그러나 유교를 당대의 현실에 끌어와 현실에 참여시키고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공맹의 유학에 걸린 성리학이라는 주술을 풀어야 했다. 그는 이(理)와 기(氣)의 이원적 분설(分說)에 갇힌 공맹의 본래적 심성론을 회복하고자 하였고, 정이(程頤)와 주희(朱熹)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입설을 모두 주리(主理)로 보고 ‘주리는 허론이다[主理是虛論]’라고 외쳤다.

역사의 혹독한 현실은 과거를 돌아보는 근본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과거가 끝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재는 과거와 사투하며 진행된다. 그런 의미에서 장지연과 설태희의 태도가 흥미롭다. 장지연은 「조선유교연원」을 연재하여 과거가 끝났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설태희는 이를 읽고 「이기변」을 지어 과거와 사투하며 현재를 일으키려 하였다. 근 백 년이 흐른 지금 그 과거는 어디 있는가? 누군가의 말처럼 오래된 미래에 숨어 있는가?



글쓴이 : 노관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