遊漢拏山記 - 崔益鉉

2017. 6. 6. 14:12옛산행기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

최익현(崔益鉉)


고종(高宗) 10년 계유년(癸酉年) 겨울에, 나는 조정에 죄를 지어 탐라(耽羅)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하루는, 섬사람들과 산수(山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내가 말하기를,

“한라산의 명승은 온 천하가 다 아는 바인데도 읍지(邑誌)를 보거나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구경한 이가 아주 적으니, 이는 못 가는 것인가,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인가?”

하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이 산은 4백 리에 뻗쳤고,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서, 5월에도 눈이 녹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정상에 있는 백록담(白鹿潭)은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는 곳으로, 아무리 맑은 날이라 할지라도 항시 흰 구름이 끼어 있읍니다. 이 곳이 바로 세상에서 영주산(瀛洲山)이라 일컫는 곳으로서,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에 들어가는데, 어찌 범상한 사람들이 구경할 수 있겠습니까?”

하므로, 

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놀랐다.


그 후, 고종 12년 을해년(乙亥年) 봄에, 나라의 특별한 은전(恩典)을 입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그래서 한라산을 찾을 계획을 하고, 이 기남(李琦男) 선비에게 길을 안내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일행은 어른이 10여 명에 짐꾼 5, 6명이 뒤를 따랐다.


3월 27일, 남문(南門)을 출발하여 10리쯤 가니 길가에 시냇물이 흐르는데, 이는 한라산 북쪽 기슭에서 흘러내리는 물들이 모여서 바다로 들어가는 시내였다. 언덕 위에 말을 세우고 벼랑을 따라 수십 보를 내려가니, 양쪽 가에 푸른 암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그 가운데에 큰 돌이 문 모양으로 걸쳐 있는데, 그 길이와 넓이는 수십 인을 수용할 만하며, 높이도 두 길은 되어 보였다. 그 양쪽 암벽에는 ‘방선문 등영구(訪仙門登瀛丘)’란 여섯 자가 새겨져 있고, 또 옛 사람들의 제품(題品)들이 있었는데, 바로 한라산 10경(景) 중의 하나이다.

문의 안팎과 위아래에는 맑은 모래와 흰 돌들이 잘 연마(鍊磨)되어 그 윤기가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였고, 수단화(水團花)와 철쭉꽃이 좌우로 나란히 심어져 있는데, 바야흐로 꽃봉오리가 탐스럽게 피어나고 있어, 이 또한 비길 데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는 이런 풍경에 취해 한참 동안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다시 언덕으로 올라와 동쪽으로 10리쯤 가니 죽성(竹城)이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즐비(櫛比)한 인가가 대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날이 저물어 어느 큰 짐에 숙소를 정했다. 하늘이 컴컴하고 바람이 자는 게 비가 올 것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짐꾼에게 날씨를 물었더니, 어제 초저녁보다 오히려 더 심하다는 대답이었다. 또, 바로 돌아갔다가 나중에 다시 오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술 한 잔과 국물 한 모금을 마신 다음, 일행의 의사를 어기고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돌길은 험하고도 좁았다. 5리쯤 가니 큰 언덕이 나타나는데, 이름이 중산(中山)으로, 대개 관원들이 산을 오를 적에 말에서 내려 가마로 바꾸어 타는 곳이었다.


여기에 이르니, 갑자기 검은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비치어 바다와 산들이 차례로 자태를 드러내기에, 짐꾼을 시켜 말을 돌려보내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서 올라갔다. 집 주인 윤규환(尹奎煥)은 다리가 아파 돌아가고, 나머지는 모두 일렬로 내 뒤를 따랐다.

한 줄기 작은 길이, 나뭇꾼과 사냥꾼들의 내왕으로 약간의 형태는 있었지만, 갈수록 험준하고 좁아서 위태로왔다. 구불구불 돌아서 20리쯤 가니, 짙은 안개는 다 걷히고 날씨가 활짝 개었다. 그러자, 일행 중 당초에 가지 말자던 사람들이 날씨가 좋다고 하므로,

나는 

“이 산 구경을 중도에서 그만두자고 한 것이 모두 그대들이었는데, 어찌 조용히 삼가지 않는가?”

하였다. 

여기서 조금 앞으로 나가니, 바위틈에서 물줄기가 쏟아져 나와 굽이굽이 아래로 흘러간다. 평평한 돌 위에 잠시 앉아 갈증을 푼 뒤에, 물줄기를 따라 서쪽으로 갔다. 비탈진 돌길을 넘고 돌아서 남쪽으로 가니, 고목을 덮은 푸른 등나무 덩굴과 어지럽게 우거진 숲이 하늘을 가리고 길을 막아서 앞으로 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런 데를 10여 리쯤 가니, 가느다란 갈대가 숲을 이루었는데, 그 아름다운 기운이 사람을 엄습해 왔으며, 또 앞도 확 트여서 바라볼 만하였다.


다시 서쪽으로 1리쯤 가니, 우뚝 솟은 석벽이 대(臺)처럼 서 있는데, 뾰쪽하게 솟은 것이 수천 길은 되어 보였다. 이는 삼한(三韓) 시대의 봉수(烽燧) 터라고 하지만, 근거가 될 만한 것이 없고, 또 날이 저물까 염려되어 가 보지 못하였다.

다시 몇 걸음 더 나아가니, 가느다란 골물이 흐른다. 물줄기를 따라 위로 올라가니 빙설(氷雪)이 가파른데, 잡목들이 뒤엉켜 있어 머리를 숙이고 기어가느라고 몸의 위험이나 지대가 높은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렇게 기다시피 6, 7리를 가니 비로소 상봉(上峯)이 보이는데, 흙과 돌이 서로 섞이고 평평하지도 비탈지지도 않으며 원만(圓滿)하고 풍후(豊厚)한 봉우리가 가까이 이마 위에 있었다.

거기에는 초목은 나지 않았고 오직 파릇한 이끼와 덩굴만이 바위에 깔려 있어서 앉아 쉴 만하였으며, 전망이 넓게 트여서 해와 달을 옆에 끼고 비바람을 다스릴 만할 뿐 아니라, 의연히 세상의 일을 잊고 홍진(紅塵)에서 벗어난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얼마 후, 짙은 안개가 몰려오더니 서쪽에서 동쪽으로 산등성이를 휘감았다. 나는 괴이하게 여겼지만, 이 곳까지 와서 한라산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공든 탑이 일시에 무너지는 골이 되고, 섬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굳게 먹고 곧장 수백 보를 전진해 가서 북쪽 가의 우묵한 곳에 당도하여 상봉(上峯)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이르러, 갑자기 가운데가 움푹 파인 구덩이를 이루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백록담(白鹿潭)이었다. 주위가 1리를 넘고 수면이 담담(淡淡)한데, 그 반은 물이고, 반은 얼음이었다. 홍수나 가뭄에도 물이 붇거나 줄지를 않는다 하는데, 얕은 데에는 무릎에, 깊은 곳은 허리까지 찼으며, 맑고 깨끗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으니, 은연(隱然)히 신선이 사는 듯하였다. 사방을 둘러싼 산각(山角)들도 높고 낮음이 다 균등하였으니, 참으로 천부(天府)의 성곽(城郭)이었다.


석벽에 매달려 백록담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털썩 주저앉아 잠시 동안 휴식(休息)을 취하였다. 모두 지쳐서 피곤(疲困)했지만, 서쪽을 향해 있는 봉우리가 이 산의 정상이었으므로 조심스럽게 조금씩 올라갔다. 그러나 따라오는 사람은 겨우 셋뿐이었다. 이 봉우리는 평평하게 퍼지고 넓어서 그리 까마득하게 높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위로는 별자리를 바라보고 아래로는 세상을 굽어보며, 좌로는 해돋이를 바라보고 우로는 서양(西洋)을 접했으며, 남으로는 소주(蘇州 : 쑤조우), 항주(杭州 : 항조우)를 가리키고, 북으로는 내륙(內陸)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섬들이 옹기종기, 큰 것은 구름장만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하게 보이는 등 풍경이 천태만상이었다.

‘맹자’에 “바다를 본 자는 바다 이외의 물은 물로 보이지 않으며, 태산에 오르면 천하가 작게 보인다.”

했는데, 성현의 역량을 어찌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또, 소동파(蘇東坡)에게 이 산을 먼저 보게 하였다면, 그의 이른바


 허공에 더 바람을 다스리고, [憑虛御風]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른다. [羽化登仙]


라는 싯구가 적벽(赤壁)에만 알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자(朱子)가 읊은


 낭랑하게 읊조리며 축융봉을 내려온다. [朗吟飛下祝融峯]


라는 시구를 외며 백록담 가로 되돌아오니, 짐군들이 이미 밥을 정성스럽게 지어 놓았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데, 물맛이 어찌나 달고 맛있던지,

나는 일행을 둘러보며 말하기를,

“이 맛은 금장옥액(金漿玉液)이 아니냐?”

하였다. 

북쪽으로 1리쯤 떨어진 곳에 혈망봉(穴望峯)과 옛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것이 있다 하는데, 해가 기울어 가 보지 못하고, 산허리에서 옆으로 걸어 동쪽으로 석벽을 넘는데, 벼랑에 기미처럼 붙어서 5리쯤 내려갔다.


다시 산남(山南)으로부터 서지(西趾)로 돌아들다가 안개 속에서 우러러보니, 백록담을 에워싸고 있는 석벽이 마치 대나무를 쪼개도 오이를 깎은 듯이 하늘에 치솟아 있는데, 기괴하고 형형색색인 것이 석가여래가 가사(袈裟)와 장삼(長衫)을 입은 형용이었다.

20리쯤 내려가니 이미 황혼(黃昏)이 되었다.

내가 

“듣건대, 여기서 인가까지는 매우 멀다 하여, 밤공기도 그리 차지 않으니, 가다가 길거리에 피곤해서 쓰러지는 것보다 차라리 노숙하고서 내일 홀가분하게 가는 것이 어떤가?”

하니, 일행 모두가 좋다고 하였다.


바위에 의지해서 나무를 걸치고 모닥불을 피워 따뜻하게 한 뒤에, 앉은 채로 한잠 자고 깨어 보니, 벌써 날이 새어 있었다. 밥을 먹고 다시 출발했는데, 어젯밤 이슬이 마르지 않아 옷과 버선이 다 젖었다. 얼마 후, 길을 잃어 이리저리 방황하였는데, 그 고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어서 어제에 비하면 평지를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10리를 내려와서 영실(瀛室)에 이르니,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에 우뚝우뚝한 괴석(怪石)들이 웅위(雄偉)하게 늘어서 있는데, 모두가 부처의 형태였으며, 백이나 천 단위로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여기가 바로 천불암(千佛巖) 또는 오백 장군(五百將軍)이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산남(山南)에 비하면 이 곳이 더욱 기이하고 웅장하였다.

산 밑에 시내 하나가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는데, 다만 길가에 있기 때문에 얕게 드러나 있었다. 풀밭에 앉아서 얼마쯤 쉬다가 이내 출발하여 20리를 걸어 서동(西洞)의 입구를 나오니, 영졸(營卒)들이 말을 끌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인가에 들어가서 밥을 지어 요기(療飢)를 하고, 날이 저물어서 성으로 돌아왔다.


백두산이 남으로 4천 리를 달려 영암(靈巖)의 월출산(月出山)이 되고, 다시 남으로 달려 해남(海南)의 달마산(達摩山)이 되었으며, 달마산은 또 바다로 5백 리를 건너뛰어 추자도(楸子島)가 되었고, 다시 5백 리를 건너서 이 한라산이 되었다고 한다. 이 산은 서쪽으로 대정현(大靜縣)에서 일어나 동으로 정의현(旌義縣)에서 그치고, 가운데가 솟아올라 정상이 되었는데, 동서의 길이가 2백 리이고, 남북의 거리가 1백 리를 넘는다.


어떤 이는 이 산이 지극히 높아 하늘의 은하수를 잡아당길만해서 한라산이라 부른다고 하고, 어떤 이는 이 산의 성품이 욕심이 많아서, 그 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관장(官長)의 청탁(淸濁)으로 알아서, 외래 선박이 정박(碇泊)하면 번번이 비바람으로 패실하게 하므로 탐산(耽山)이라 이른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이 산의 형국이 동쪽은 말, 서쪽은 곡식, 남쪽은 부처, 북쪽은 사람의 형상이라고 하나, 다 근거(根據) 없는 말들이다.

그 중에서 오직 형국설(形局說)만을 가지고 그 유사점을 찾아본다면, 산세가 구부러졌다가 펴지고 높았다가 낮아지는 것이 마치 달리는 듯한 것은 말과 유사하고, 위암(危巖)과 층벽(層壁)이 죽 늘어서서 두 손을 마주잡고 읍하는 듯한 것은 부처와 유사하며, 평평하고 광막한 곳에 산만하게 활짝 핀 듯한 것은 곡식과 유사하고, 북을 향해 껴안은 듯한 곱고 수려한 산세는 사람과 유사하다. 그래서 말은 동쪽에서 생산되고, 곡식은 서쪽이 잘 되며, 불당은 남쪽에 모였고, 인걸은 북쪽에 많다던가…….


이 섬은 협소한 외딴 섬이지만, 대해(大海)의 지주(砥柱)요, 3천리 우리나라의 수구(水口)며 한문(捍門)이므로, 외적들이 감히 엿보지를 못한다. 산해진미(山海珍味) 중에 임금에게 진공(進供)하는 것이 여기에서 많이 나며, 위로는 공경대부(公卿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일상에 쓰는 물건이 나고, 경내 6, 7만 호가 이곳을 근거로 살아가니, 나라와 백성에게 미치는 이로움이 어찌 금강산이나 지리산처럼 사람들에게 관광이나 제공하는 산들과 비길 수 있겠는가?

이 산은 궁벽하게 바다 가운데에 있어서 청고(淸高)하고 기온도 낮으므로, 지기(志氣)가 건고하고 근골(筋骨)이 강한 자가 아니면 결코 올라갈 수가 없다. 그리하여, 이 산을 오른 사람이 수백 년 동안에 관장(官長) 몇 사람에 불과했을 뿐이어서, 옛날 현인(賢人)들의 거필(巨筆)로는 한 번도 그 진면목을 적어 놓은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세상의 호사가(好事家)들이 신산(神山)이라는 허무하고 황당(荒唐)한 말로 어지럽힐 뿐이고, 다른 면은 조금도 소개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산이 지니고 있는 본연의 모습이겠는가?

우선 이 글을 써서, 가서 구경하고 싶은데도 못 가는 사람들에게 고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