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忠弼: (1725∼1789)의 유속리산록(遊俗離山錄)

2017. 6. 6. 14:03옛산행기

예약된 유람록 : 백불암 어른과의 약속

속리산은 한양에서 가깝기도 하고 산도 그리 험하지 않다. 또 많은 사람이 찾았고 남긴 유람록도 많으며, 전하는 유람록에 대한 소개도 많다. 그런데 많은 기록들 가운데 대부분의 작품들은 짤막한 글이며, 제법 긴 것들도 또한 소개됐다. 그중에 영남 사람으로 속리산을 유람하고 긴 유산록을 남긴 정충필(鄭忠弼: 1725∼1789)의 <유속리산록(遊俗離山錄)>을 보기로 한다.

이 유람록은 다른 사람의 유람록에 비해 유람의 동기와 목적이 다양하고 특이하다. 첫째는 친구가 유람의 목적지 부근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다는 점, 둘째는 유람을 떠나기 전 다른 사람의 요청에 의해 유람록을 지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 셋째는 미수 허목의 명산기를 능가하는 유람록을 짓고자 했던 것이다.

작자는 다른 유람록을 지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속리산이 좋다는 말을 이전에 들었고, 한 번 가고자 했으나 가지 못했다. 그런데 마침 고향의 절친한 벗이 속리산 가까이에 있는 옥천군 군수로 있게 됐다. 이것이 산행을 결행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 속리산 주능선의 기암 봉우리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중앙 끝 부분이 문장대다.


 

속리산은 호남과 영남의 경계에 있는데, 기이하고 수려한 것으로 이름이 났다. 나는 옛날부터 한 번 유람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멀어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병신년(1776) 겨울에 시골 친구인 이경진(李景珍)이 용궁현감(龍宮縣監)에서 옥천군수(沃川郡守)로 옮겨갔다. 옥천은 속리산 서남쪽에 있는데, 겨우 하루거리다.

이경진이 옥천군수가 된 것은 1776년이지만, 정충필이 속리산 유람을 떠난 것은 4년 뒤인 1780년이다. 경북 대구 근방에서 속리산까지 가는 데에는 길도 멀지만 중간에 아는 사람도 많아 그들에게 들러 쉬엄쉬엄 길을 갔다.

그런데 속리산까지 가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고, 중간에 머무는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우선 대구 칠계의 백불암 최흥원에게 들러 여러 날 묵으며 산행을 준비했다.

17일 칠계(漆溪)에서 잤다. 백불암 최 어른께 인사를 드리고 며칠 머물렀다. 최 어른은 내가 속리산 산행을 한다는 말을 듣고 “모름지기 산행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여 돌아오는 날 나의 와유(臥遊)의 자료로 삼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했다. 20일 최 어른께 작별을 고하니, 최 어른 말씀하시기를, “어제 그대가 농연(聾淵)을 지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슬퍼졌네”라고 하고는 마침내 입으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위의 내용에 의하면 17일 칠계에서 묵으며 최흥원을 뵈었고, 22일까지 닷새가량이나 그곳에 머물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최흥원은 본관이 경주(慶州). 자는 태초(太初) 또는 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이다. 학문에 힘써 성리학에 조예가 있었고,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보고 <남전향약(藍田鄕約)>을 참고해 부인동규(夫仁洞規)라는 향약을 만들었다. 이 규약을 통해 백성들에게 근면하고 검소하게 살도록 가르쳤고, 선공고(先公庫)·휼빈고(恤貧庫) 등의 창고를 설치해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이러한 학행으로 1778년(정조 2)에 천거되어 참봉·교관(敎官)이 되었고, 1782년 장악원주부·공조좌랑을 거쳐 1784년 세자익위사좌익찬(世子翊衛司左翊贊)이 됐다.

최흥원은 근검절약으로 모은 가산을 바탕으로 접빈객의 덕목을 실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그곳에 묵으며 쉬어가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충필이 최흥원을 뵙고 속리산 산행의 계획을 이야기하니, 최흥원은 즉시 기행록을 자세히 적어서 돌아오는 날 와유의 자료로 삼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4일을 묵은 뒤 그곳을 떠나려 하니 최흥원은 매우 섭섭해하며 시를 지어 주었다. 그러나 이때 바로 떠나지 못했다. 21일에는 비까지 내려 머무르며 백불암의 시에 대해 화답했다.

이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단순히 유람을 한 뒤 뒷날의 추억거리로 유람록을 남겼던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일종의 과제를 안고 유람을 했고, 과제를 위해 유람록을 작성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유람록을 지었던 까닭이 이것이 전부가 아님을 다음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나는 일찍이 미옹(眉翁: 眉叟; 許穆)의 명산기(名山記)를 사모했지만, 그 글에서는 단지 산수의 형세만을 논하고 유력의 순서에 미치지 못했다. 예컨대, 지리산, 덕유산, 청량산, 가야산 등 여러 산에 관한 글이 모두 그러하다. 그런데 유독 속리산에 대해서는 없었다. 나는 스스로 미수와 같은 필력이 없음을 생각지 못하고, 남몰래 그것을 본받아 별도로 ‘속리산기’를 짓고자 했으나, 등산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산의 뛰어난 경치는 자세히 기록할 수 없어, 유람한 일록만을 써서 다른 날 비망의 자료로 삼고자 한다. 또 백불장께서 부지런히 가르쳐 주신 뜻을 받들어 메우고자 한다.

미수 허목의 명산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지리산, 덕유산, 청량산, 가야산 등 여러 산에 대해서는 기록이 있으나, 유독 속리산에는 없다고 하며, 허목과 같은 필력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것을 본 따서 속리산기를 짓고자 한다고 했다.

작자 정충필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영일(迎日). 처음 이름은 흥필(興弼), 자는 창백(昌伯), 후에 자를 백경(伯敬)으로 고쳤다. 호는 노우(魯宇)이다. 1747년(영조 23)에 두역(痘疫)이 창궐하자 아버지를 따라 경주(慶州)에서 영양(英陽) 입암(立巖)으로 옮긴 후, 그곳에서 최흥벽(崔興壁)과 이상정(李象靖)에게 글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병약해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 도서(圖書), 상수(象數), 율려(律呂), 산법(算法), 지리(地理) 등을 두루 섭렵, 깊이 연구하지 않는 바가 없었으며, 전초(篆草)에도 뛰어나 원근에 널리 알려졌다.

저서로는 <노우문집(魯宇文集)> 6권이 있는데, 이 글은 권4에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은 “경자년(1780) 복월(復月: 11월) 상완(上浣)에 쓰다”라고 했으니, 작자의 나이 55세 때 지어진 것이고, 산행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 11월 11일이니 산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글을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산행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의 산의 뛰어난 경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을 수 없고, 다만 유람한 것을 날짜별로 기록해서 다른 날 비망(備忘)의 자료로 삼겠다고 했다. 그리고 백불암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한다는 뜻도 밝혔다.

2. 즐거운 준비 : 속리산에 대한 해학적 풀이

정충필의 속리산 산행은 매우 즐겁게 시작됐다. 그는 절친인 이경진(李景珍)이 옥천군수로 부임해 속리산을 유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고, 이처럼 유람을 위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매우 고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매우 들뜬 마음으로 속리산의 뜻풀이를 한 시를 지어 이경진에게 부쳤다.

나는 경진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도가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를 멀리 하며, 산이 속세를 떠난 것이 아니라 속세가 산을 떠났다. 속리산 아래의 관리에게 말을 부치노니, 때에 맞추어 속리산에 갈 수 있겠는가?(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寄語俗離山下吏, 可能時到俗離山)”라고 했다. 경자년(1780) 10월 서쪽으로 유람을 가기로 뜻을 굳히고 족숙(族叔) 상사공(上舍公)과 24일 장천점(帳川店)에서 만나 함께 가기로 약속을 했다. 16일 내가 먼저 길을 떠나 호연정(浩然亭)에서 잤다.

이경진과 약속을 하고, 길을 떠나기로 한 뒤로 이경진에게 보낸 시인데, 언어유희에 가까운 매우 해학적이며 재미있는 시를 지었다. <논어>의 ‘도가 사람을 멀리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를 멀리 한다’는 내용을 본따서 구절을 만들고, 그 대구로 속리산을 산이 세속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속세가 산을 떠난 것이라고 멋진 구절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속리산 아래 관리에게 부친다고 했는데, 속리산 아래 관리가 바로 이경진인 셈이다. 그는 속리산 유람을 결심한 뒤로 한편으로는 자신의 족숙인 상사공과 24일 장천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22일 대구 감영을 지나며 잠시 정곡(靜谷) 이척숙(李戚叔: 친척 아저씨)을 기다렸고, 조상사를 조문했으며, 저녁에 송림사(松林寺)에서 잤다. 23일에는 인동(仁同)의 신곡(新谷) 장윤종(張胤宗)의 산거(山居)에 이르렀다. 친척간의 정의(情誼)에 대해 이야기하고, 대대로 좋게 지낼 것을 이야기했다. 장윤종은 평소에 유아(儒雅)로 이름이 났었는데, 한번에 선정신(先正臣)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요즈음 일삼은 바가 무엇인가를 물으니 장윤종은 병을 앓는 동안에 절구시 한 수를 지은 것이 있다고 했다.

16일에 길을 떠나 호연정에서 자고, 22일에는 대구 감영을 거쳐 23일에는 인동에서 묵었다. 인동의 친척 장윤종의 산거에 이르러서는 위에서 보듯 절구시 두 수를 화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화답한 절구시 한 수씩만을 수록했는데, 그와는 여러 수의 시를 화답했다. 화답한 시는 7언 절구가 4수, 칠언율시가 2수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시를 짓고 여유를 즐기며 24일에는 장천점에 이르렀다. 여기에서는 자신의 족숙인 상사공을 만난다고 했는데, 정작 족숙은 오지 못하고 대곡(大谷) 홍생(洪生)이라는 사람이 대신 와서 족숙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25일에는 금산(金山)에서 자고 26일에는 황간을 지났다. 이때도 청산을 노래하며 말 아래를 지나는 사람이 있어 오언절구를 서로 화답했다.

24일 오전에 장천점에 이르렀다. 조금 있으려니 대곡 홍생이 위임을 받아 와서 족숙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초자(醮子)의 기일이 가까워 멀리 나갈 수 없어,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고 했다. 나는 홀로 여행을 하는 것은 무료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이미 벌인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마침내 홍생에게 답장 편지를 써서 주었다. 곧 비산진(琵山津)을 건너서 귀미점(龜尾店)에서 잤다. 25일 금산(金山)의 봉계(鳳溪)에 사는 종인(宗人) 이우(履遇) 씨의 집에서 잤다. 26일 아침에 황간(黃澗)의 경계를 지났는데, 마침 청산(靑山)을 노래하며 말 아래를 지나는 사람이 있어 마침내 5언절구 한 수를 입으로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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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충필의 <유속리산록>의 본문.


 

그리고 27일 새벽에 출발해 심천점(深川店)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이곳이 바로 옥천 땅이었다. 저녁에 이경진의 집에 이르러, 그곳에서 이경진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고는 이경진과 시를 주고 받고, 가악(歌樂)을 즐기며 사흘을 묵었다.

저녁에 군재(郡齋)에 이르러 원님과 더불어 이야기했다. 조금 있다가 그 대인(大人)인 온양 어른께 들어가 인사를 드렸다. 온양 어른은 아버지의 벗이신데, 여러 해 동안 중풍을 앓아 다리를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데도 내가 오는 것을 보고 걸어두었던 갓을 꺼내 쓰고 일어나 앉아 계셨다. 내가 마침내 절을 드리고 그간 적조했던 마음을 푼 뒤에 경진(景珍), 경안(景顔)과 더불어 금소당(琴嘯堂)에 들어가 이야기했다. 한밤중에 이르러 경안과 함께 잤다. 이틀을 머물고 산으로 들어가고자 하니, 이장과 경진이 모두 말하기를, “여러 날 길을 왔는데, 어찌 곧바로 가려 하느냐”라고 했다. 그래서 초2일 떠나가기로 결정했는데, 이달은 그믐날이었다. 밤에 술과 안주가 마련됐고, 귀머거리로 퉁소를 부는 사람이 있었다. 몇 명의 기녀에게 퉁소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도록 했는데, 한밤중이 되어서야 파했다.

고향의 벗인 경진에게 들러 자신의 아버지 친구이기도 한 그의 어른을 뵙고, 그 아우와 함께 잠을 잤다. 그리고 밤에는 술을 마시며 그동안 쌓였던 많은 이야기를 할 뿐만 아니라, 퉁소를 부는 사람과 기녀를 시켜 가악을 즐기기도 했다. 이때의 즐거운 마음을 절구시로 지어 드디어 “동각의 새벽 창에서 이야기만 했는데도, 삼분은 진객이요 칠분은 신선이 되었네(東閣晨窓聊話別, 三分塵客七分仙)”라고 했다. 속리산에는 아직 이르지도 않았는데, 이미 70%는 신선이 되었다고 읊었다. 이렇게 흥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4일 뒤에는 마침내 그곳을 떠나 보은(報恩)으로 향했다.

3. 실패한 산행 : 최고봉 문장대에 오르지 못함

정충필의 속리산 일정은 매우 느긋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10월 16일 산행을 위해 길을 떠난 지 17일 만인 11월 3일에 속리산 골짜기 입구에 이르렀다. 대구 근방에서 보은에 이르는 기간은 보통 3~4일이면 충분한 것인데, 정충필은 17일 만에 이르렀으니 그가 얼마나 여유 있게 속리산 산행을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11월 3일 비로소 속리산 입구에 이르러 그곳의 뛰어난 여러 봉우리를 보았고, 마침내 멋진 시도 한 수 읊었다.

3일에 자리에서 일어나 밥을 먹고 십리를 갔다. 산의 모서리에 옛 성이 있었는데, 공노(鞚奴)가 혼잣말로 “사람의 공력을 잘못 사용했다”고 했다. 내가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비록 어리석은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또한 지극한 이치가 있다”고 했다. 박석현(薄石峴)에 이르니 이미 속리산의 바위 봉우리가 짙은 아지랑이 속에서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내려가 십리쯤 가서, 속리산의 골짜기 입구로 돌아들어갔다. 사방을 돌아보니 여러 봉우리가 우뚝하게 빼어나서 이미 속세에서 보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속리산 입구에 이른 뒤에도 바로 속리산 산행을 시작한 것이 아니고, 지금의 법주사로 보이는 절의 이곳저곳을 자세히 살피며 시도 지었고, 피리 하나 없는 당시의 상황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산행을 위해서는 시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시 짓는 일을 그만 두었다. 유람에 집중하기 위해서인데, 이것도 매우 흥미 있는 유람의 모습 가운데 하나이다.

몇 굽이를 지나가니 큰 가람이 있었다. 감사가 순행을 위해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관도(官途)가 편평했다. 장난삼아 다음과 같은 절구시 한 수를 지었다.

‘깊은 골짜기의 산길이 숫돌처럼 편평하니, 속세의 나그네가 크게 이름이 난 때문이라네. 산의 신령이 만약 길이 속세를 떠나고자 했다면, 응당 겹겹의 산봉우리를 돌문으로 닫았어야 했네.’

나는 이어서 눈이 기이한 경관을 좇는 것이지 마음이 뱃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또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그윽이 감상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이때부터는 마음만을 말할 뿐 시를 짓지 않았다. 마침내 이곳저곳 둘러보며 천천히 가서 금강문 밖에 이르러 말에서 내렸다. 그 가운데에는 오층의 걸출한 누각이 있었는데, 팔상전(捌相殿)이다. 서쪽에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이 있는데, 또한 이층이었다. 가운데에는 장육금신(丈六金身)이 있었다. 그 서쪽은 수정봉(水晶峯)인데 그 위에 오르면 내산(內山)의 기이한 봉우리들이 한눈에 모두 들어온다고 한다. 팔상전 뒤에는 극락보전(極樂寶殿)이 있는데 모두 이층이다. 왼쪽에 약사보전(藥師寶殿)이 있고, 오른쪽에는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다. 약사보전 뒤에는 세 칸의 원당(願堂)이 있는데, 담으로 빙 둘려 있었고, 밖에는 중문(重門)을 설치하여 엄숙하기가 묘당의 모습과 같았다.

여기의 큰 가람은 법주사를 말하는 것이다. 뒤에 팔상전이니 하는 여러 건물을 언급한 것을 보아도 법주사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이 골짜기에 들어서니 감사의 행차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길이 편평하게 닦여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을 위해 이렇게 길을 잘 닦아 놓았다고 장난삼아 시를 한 수 지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좋은 경관을 구경함에 있어서는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를 짓느라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여유 있게 좋은 경치를 구경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 시 짓는 일을 그만 두었다. 남들 못지않게 시를 열심히 지었던 사람이 또 감상을 위해 시를 짓지 않겠다고 한 경우는 처음 보는 것이다.

이같은 대단한 각오를 반영하듯 그는 법주사에 들러 건물 하나하나 자세히 둘러보고 이곳에 얽힌 전설 등도 살펴보았다. 이튿날인 4일에도 나한전 등을 돌아보고는 마침내 속리산에 올라갔다. 속리산을 오르면서 바라보이는 여러 봉우리에 대해 그 뛰어난 모습을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날씨 때문에 정작 속리산의 정상인 문장대(실제 정상은 천왕봉 : 편집자 주)에는 오르지 못했다. 다음 일정을 보면 그가 속리산의 최고봉이며 속리산의 가장 대표적인 장소인 문장대에 오르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중사자암으로부터 동쪽으로 산허리를 돌아서 골짜기 위로 십여 리를 들어가면, 곧 문장대이다. 문장대는 최고 절정의 가장 높은 곳이어서,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으나, 길이 험하고 위에는 너무 추워서 올라갈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서 올라갈 수도 있겠으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한계가 있었다. 말하기를, “아무 곳 아무 산이라 하는 것은 단지 승려가 손으로 가리키는 것에 의지해야 하는데, 승려가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지 않으니, 하필이면 근력을 힘들게 하면서 엉터리로 바라보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래서 마침내 이곳에서 하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또한 정상을 눈앞에 두고 발길을 돌리는 탄식은 없을 수 없었다.

그는 중사자암이란 곳에 이르러 그곳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이제 그곳에서 산허리를 돌아 십여 리만 들어가면 문장대라고 했다. 문장대는 속리산의 최고 높은 곳으로 주변의 경관을 둘러볼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날씨가 추워 올라가기가 어려웠고, 올라간다고 해도 멀리까지 조망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적극 만류해 올라가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날씨 때문이기는 했지만, 그는 문장대에 오르지 못한 자신의 산행을 스스로 실패한 산행으로 말했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발길을 돌리는 아쉬운 산행이었던 것이다.

4. 마음을 달래며 : 100% 신선이 되었다는 위안

정충필은 문장대에 오르지 못하게 되자 바로 하산했다. 하산하면서도 산의 위치라든지 아니면 들렀던 곳의 유적에 관해 소개하고, 자신의 단상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다소 맥이 빠진 산행이었지만, 산행의 흥취를 끝까지 유지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만약 곧바로 골짜기 입구로 내려가면 그 사에 두 곳 바위 문이 자못 기이한 곳이 있다. 바로 큰 가람[법주사]에 이르렀는데, 십여 리를 가면 마복천(馬福泉)에서 머물 수 있다. 다시 앞길을 찾아서 고개 위에 이르렀다. 오래된 소나무 뿌리가 서려 있는 모습이 마치 호상(胡床)과 같았는데 다리를 펴고 쭉 펴고 앉아 잠시 쉬었다. 환에게 일러 말하기를, “어제 복천의 동대(東臺)에 올라 천왕봉과 비로봉 등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았는데, 지금 사자암의 서쪽 산허리에 올라 향로봉과 관음봉 두 봉우리를 바라보니 서쪽 산등성이를 서대(西臺)라고 부를 수 있겠다. 또 보현봉은 바로 사자암의 남쪽에 있으니 남대(南臺)라고 할 만하다”고 했다. 마침내 복천으로 내려와서, 공노(鞚奴)에게 말을 끌고 앞에서 가도록 했다. 걸어서 옛 성 가에서 말을 탔는데, 성 가에는 하나의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평탄하여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옛날에 응당 왕이 앉았던 곳이라는 이름이 있었을 것인데, 그 자세한 것을 알 수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말 가는 대로 십여 리를 가서, 다시 심검당(尋劒堂)에 들어가 잠을 잤다.

문장대에 올라갈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바로 하산할 때의 모습이다. 어제 산에 오를 때에는 마복천으로 가면서 천왕봉, 비로봉 등을 보았는데, 지금 하산하면서는 사자암 서쪽의 향로봉과 관음봉을 바라본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심검당까지 내려와 잠을 잔 뒤 5일에 다시 길을 떠나려 했지만, 비가 내려서 가지 못했다. 저녁 무렵에 비가 그쳐서 말을 타고 갔는데, 늦게 출발했지만, 수십 리를 가서 증봉점(甑峯店)에서 묵게 되었다.

그런데 비가 와서 발이 묶이게 되자, 그는 오히려 그 주변의 경치를 돌아보며 감상을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번 산행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특히 남명의 <두류록>을 읽으며 자신의 산행과 비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비가 와서 길을 갈 수 없는 무료한 상황이 되자, 남명(南冥) 조식(曹植)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을 읽었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남효온(南孝溫)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 이륙의 <두류록(頭流錄)>, 김종직(金宗直)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을 포함해 두류산에 관한 유록이 여러 편 있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남명의 <두류록>을 읽었다고 한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 정충필은 ‘비가 와서 속리산 정상에 올라가지 못했지만 신선이 된 느낌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비록 문장대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신선이 된 것 같은 느낌이 있다고 했다. 처음 옥천을 지나갈 때는 70% 신선이었는데, 신선세계를 직접 다녀왔으므로, 이제는 100% 신선이라 했다. 문장대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100% 신선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충분히 보상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6일에는 비가 내려 할 일이 없어 무료했고, 산을 나오니 진실로 서글픈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속세를 떠나 산에 들어갔던 때를 돌이켜 생각하니, 어찌 신선의 산을 갑자기 떠날 수 있으랴? 산 앞에서 삼일 동안 비가 와서 삼일 묵으니, 귀객에게 산과 이별하는 시를 재촉하는 것 같네’라는 시를 지었다. 오후에 상산의 북정점에 투숙했고, 7일에는 고을의 성북에 묵으면서 친척과 친구를 방문했다. 밤에 쌍천(雙泉) 이장(李丈)이 있는 곳에 모였는데, 이때 강세청(姜世淸)이 저녁을 제공했다. 그리고 강필장(姜必章), 상사 이지권(李之權), 강세청의 형 세백(世白)도 와서 모여 이야기했다. 강세백과 더불어 시를 논하다가, 한밤중에 흩어져 돌아갔다.

9일에는 친구 김승묵(金崇默)을 방문했는데, 김승묵은 산행의 시에 대해 논했다. 그런데 그는 ‘官奴一篴(관노일적)’이란 시는 커다란 흥취가 있지만, ‘似催歸客別山詩(사최귀객별산시)’는 구절을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관노일적’이란 시는 11월 3일 속리산 입구에 들어서며 지었던 “却恨官奴一篴無(각한관노일적무)”라는 구절의 시를 말하는 것이다. ‘사최귀객별산시’는 바로 11월 6일에 지었던 시이다. 김승묵이 그 시에 대해 구절을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그는 그의 말에 동의해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다. 산행에서 시를 짓는 일이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지은 시에 대해 이처럼 논평하고 수정한 과정을 소상히 기록한 것은 쉽게 볼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좋은 경치를 보고 시를 짓고 지은 시에 대해 논평하던 정충필이 대략 24일에 걸쳐 감행한 속리산 유람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그는 10월 16일 길을 떠나 11월 11일에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 왕복 24일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족숙이 급히 행록에 대해 토론하고, 보기를 마치자 함께 가지 못한 아쉬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족숙과 더불어 율시 한 수를 수창한 것으로 글을 끝맺었다.

물론 중간 중간 친구도 찾아보고, 심지어는 문상도 하는 여유 있는 여행이었지만, 대구에서 속리산까지 가는 길이 쉽지 않고, 또 지금도 그렇지만 날씨가 좋아야 제대로 구경할 수 있는 것임을 보여 주었다. 정충필의 유람은 날씨 때문에 정작 절정을 가보지 못하여 “등산에 성공하지 못하였으므로 산의 뛰어난 경치는 자세히 기록할 수 없었다”고 스스로 말한 것처럼 아쉬운 산행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선이 사는 듯한 곳에서 100% 신선이 된 느낌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며 산행을 끝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