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응의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

2017. 6. 6. 13:57옛산행기

서명응의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

글·사진 윤호진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남명학연구소장 기자의 다른 포토보기
백두산 생태와 감상, 동식물까지 묘사… 국방·국경 등에 대한 정보도 상세 소개  

1. 유배(流配)인가, 유람(遊覽)인가?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인식되는 백두산(白頭山)에 대한 유람기(遊覽記)는 그리 많지 않다. 서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 산이 높고 가는 길이 어려워 유람이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몇 편의 대표적인 유람록 가운데 박종(朴琮)의 <백두산유록(白頭山遊錄)>과 홍세태(洪世泰)의 <백두산기(白頭山記)>는 심경호 교수가 이미 소개한 바 있다. 하지만, 백두산 유람기의 백미로는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의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를 들 수 있다. (사진1)

 
▲ 사진1. 조선 후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백두산이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유백두산기>는 『백산학보』에 번역되어 소개된 바 있으며, 최근에는 대구 서씨 관련 웹사이트와 문화콘텐츠닷컴에 번역이 등재되어 있고, 이현일과 조창록이 이에 대해 논문을 쓴 바 있다.


이현일은 주로 <유백두산기>의 이본에 대해서 연구했고, 조창록은 주로 이 글에 언급된 국토, 국방에 관한 내용과 ‘상한의’를 가지고 위치와 고도를 측정한 것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이 유람기에는 자연, 생태, 경관, 그리고 백두산 12봉 등에 이름을 붙인 것 등도 매우 중요하다. 우선 이 글을 쓰게 된 과정이 유배를 갔다가 유람한 것이지만, 마치 유람을 위해 유배를 보낸 것 같아 매우 흥미롭다.


1766년 병술년(영조 42) 5월 21일 영조는 특교를 내려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서명응에게 홍문관록(弘文館錄)을 주관하도록 했다. 홍문관록은 ‘홍문관 교리와 수찬의 임용기록’인데 이를 주관한다는 것은 홍문관 관리의 임용 초안을 마련하는 것으로 막중한 임무를 갖는 것이었다. 임금이 두 번이나 명을 내렸으나, 서명응은 사양하며 끝내 나가지 않았다.


임금은 화가 나서 그를 ‘갑산부(甲山府)’로 귀양 보내고, 서명응을 대신해 조엄(趙曮, 1719~1777)을 부제학으로 삼아 불렀다. 하지만 조엄도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으니, 임금이 또 그를 삼수부에 귀양 보냈다. 그래서 조엄과 서명응 두 조정의 중신이 동시에 삼수와 갑산으로 귀양을 가게 됐다.


두 사람이 출발에서부터 귀양지에 도착할 때까지 함께 움직였던 사실은 “이 나이에 두 사람이 동문 밖으로 나가니 배웅하는 사람들이 바라보기만 할 뿐 송별을 할 수 없었다. 더위를 무릅쓰고 빨리 말을 달려 누원(樓院)에서 서로 만났다. 이때부터 길을 감에 반드시 앞서가거나 뒤따라갔고, 잠을 잠에 반드시 이웃하여 잤다. 대개 13일이 지나서 적소에 이르렀다”고 한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백두산 사진만 평생을 찍어온 사진작가 안승일씨의 ‘백두산’을 다시 찍었다. / 조선일보DB

이들은 임금의 명을 따라 멀고 먼 유배지로 가면서 백두산 유람을 함께하기로 계획했다. 유람은 처음 서명응이 제안하고, 조엄이 이에 호응해서 이루어지게 됐다. 왜 유람을 가야 하는지에 대해 서명응은 “아직도 마치지 못한 것이 세 가지 있는데, 첫째 『주역』의 설을 완성하지 못한 것, 둘째 백두산 유람을 하지 못한 것, 셋째 금강산 유람을 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 귀양 가서 살 곳이 백두산 아래에 있으니, 하늘이 혹시 나에게 백두산 유람을 하지 못한 빚을 끝내려 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이에 대해 조엄도 기뻐하며 “내가 북쪽으로 올라온 일이 두 번째이고, 그대가 북쪽으로 올라 온 일은 세 번째이다. 그런데도 한 번도 백두산에 오르지 못했으니 부끄럽다. 그대가 하지 못한 것을 나 또한 하지 못하였으니, 나와 그대가 함께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 것이다.


서명응이 조엄과 함께 백두산을 향해 떠날 때의 상황은 “적소에 도착한 지 3, 4일 되는 날, 나와 조엄은 편지로 6월 10일에 백두산 산행을 하기로 약속했다. 갑산 부사 민원(閔源)과 삼수 부사 조한기(趙漢紀) 모두 산수 유람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기꺼이 따라가기를 원했다. 나의 두 손님인 최우흥(催遇興)과 홍이복(洪履福), 조엄의 손님인 이민수(李民秀), 민원의 아들 정항(廷恒)이 모두 동행했다. 길을 잘 아는 갑산 선비 조현규(趙顯奎), 군교 원상태(元尙泰)가 앞에서 인도했다”고 하는 데에서 알 수 있다. 갑산과 삼수 부사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따라갔는데, 그 여행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본문 가운데 일행이 100여 명이라고 한 데에서 알 수 있다.


<유백두산기>는 이처럼 유배를 가게 된 과정과 연유, 그리고 유배를 가는 경로가 모두 날짜별로 정연하게 제시되어 있으며, 이후 백두산 등정 때의 일정도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다. 이들이 백두산을 올랐던 경로와 일정은 다음과 같다.


이들의 백두산 유람은 6월 10일에 시작해 6월 17일 끝났다. 가는 데 4일, 오는 데 4일 걸려 모두 8일이 소요됐다. 귀양지에 도착하자마자 백두산 산행을 시작했다가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자마자 이들은 귀양이 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귀양살이를 시작도 하기 전에 산에서 돌아오자마자 용서한다는 임금의 명령이 이미 내려와 있었다.

 

16일 자포(滋浦)에서 출발하여 운총(雲寵)에 이르렀다. 자포에서 자고 아침 일찍 길을 떠나 서수라덕령(西水羅德嶺)에 이르렀다. 순찰사가 기발(騎撥)을 보내와서 나와 조엄의 유배가 풀렸다는 관문(關文)을 전했는데, 저보(邸報)·가신(家信)과 함께 이르렀다. 두 사람이 말에서 내려 풀과 나무 사이에 앉아 먼저 저보를 보니 임금의 체후가 편안하며 거동이 평상시와 같아 6월 8일에 진전(眞殿)과 원묘(原廟)를 배알했다고 한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돌아보며 기뻐했다. 다음으로 관문을 보니 임금이 보낸 글이 간절하여 선고에 대해 논급하시며, 특별히 두 사람의 유배를 풀라고 명했다.


두 사람은 또 서로 돌아보며 눈물을 머금었다. 임금의 은혜의 말씀이 정중한 것에 감격하고, 집에 돌아갈 기약에 있음을 기뻐했다. 다음으로 가신을 읽은 뒤에 길을 떠나 검천에 이르렀다. 점심을 먹고 또 5리를 가니 혜산 첨사 유언신(兪彦愼), 운총 만호 윤득위(尹得偉)가 길에서 맞이했다. 말에서 내려 풀섶에 앉아 이야기를 몇 차례 주고받은 뒤 또 길을 떠나 운총에 이르러 잤다. 다음날 나와 갑산 부사는 갑산으로 돌아오고, 조엄과 삼수 부사는 삼수로 돌아갔다.

 
▲ 사진2. 김정호의 ‘청구도’에 나와 있는 백두산.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본

이들은 귀양지에 올 때 함께 왔던 것처럼 돌아갈 때도 6월 22일 서울로 출발하기로 약속했다. 유배지에 도착해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모두 19일 지났는데, 서울에서 유배지까지 11일 걸려서 갔고 바로 백두산에 갔다 온 것이 8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명응과 조엄이 죄를 지어 이곳에 이른 것은 하늘이 그들에게 백두산을 한 번 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사진 2)


이것으로 보면 두 사람이 삼수와 갑산으로 귀양을 간 것은 마치 애초부터 백두산 유람을 계획했던 것과 같았다. 임금이 두 사람의 유람을 위해 일부러 귀양을 보내기라도 한 듯이 같은 때에 두 사람에게 똑같은 곳으로 가게 했고, 또 같은 때에 두 사람에게 서울로 돌아오도록 했다. 그래서 “아! 두 사람이 임금께 죄를 얻어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은, 하늘이 백두산에 대한 묵은 빚을 갚으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두 사람의 가고 머무는 것이 이것에서 또 하나의 기이함을 더하게 됐다”고 자신들의 일이 마치 하늘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인 양하여 감탄하며, 또 임금의 은혜에 감개무량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 조망(眺望)과 생태(生態)


<백두산유람기>의 작자 서명응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달성(達成)이고, 자는 군수(君受)이다. 보만재(保晩齋)라는 호는 정조로부터 받았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부제학(副提學)·이조판서를 거친 뒤, 청나라 연경(燕京)에 사행하여 다녀왔다. 


저술로는 『역학계몽집전(易學啓蒙集箋)』·『황극일원도(皇極一元圖)』·『계몽도설(啓蒙圖說)』등의 역서류,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記)』·『기사경회력(耆社慶會曆)』·『기자외기(箕子外紀)』·『대구서씨세보(大丘徐氏世譜)』·『양한사명(兩漢詞命)』 등의 사서류, 『고사신서(攷事新書)』의 유서(類書) 등을 편찬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저술로는 『보만재집』·『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보만재잉간(保晩齋剩簡)』 등을 남겼다.


이 저술들은 그 사후에 아들 호수(浩修)와 손자 유구(有榘) 등에 의해 정리된 것인데, 『보만재총서』는 정조로부터 “우리 동쪽에서 400년간에 이런 거편(鉅篇)이 없었다”는 평을 받았다. 『보만재총서』는 일종의 유서로서 『고사신서』와 함께 그의 농업을 중심으로 한 이용후생의 학문 정신을 대표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후대에 북학파(北學派)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추구하는 그의 학문 정신은 아들 호수, 손자 유구에로 이어져 가학(家學)의 전통이 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전대로부터 쟁쟁한 가문 출신으로 판서 성(渻)의 5세손이고, 남원부사 정리(貞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찬 문유(文裕)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종옥(宗玉)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그는 부제학으로 있었고, 뒤에 영의정을 지낸 그의 아우 명선(命善)도 그 무렵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 핵심 요직에 있었다. 임금의 명을 거슬러 귀양을 갔다가 바로 임금으로부터 특별히 사면을 받은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귀양이 풀렸을 때 받은 임금의 사륜에서 그의 돌아간 아버지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는 이것을 보고 감격했던 것을 살필 수 있다.


후대에 그의 아들 호수는 도승지 등을 역임했고, 그의 손자 유구는 이조판서, 우참찬을 거쳐 대제학에 이르렀고, 『임원경제지(林園經濟誌)』를 저술했다. 이렇게 보면 서명응의 가계는 위아래로 모두 높은 벼슬이 끊이지 않는 문벌이었으며, 또한 서명응으로부터 시작되는 북학파 실학의 맥을 이어 이 방면의 저술을 통해 많이 남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명응이 백두산을 유람하며 보았던 것이 다른 선비들의 유람과 달랐던 것도 이러한 배경과 사상에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스스로 “산택(山澤)의 빼어남과 기이함, 조망의 시원하고 아득함, 강역(疆域)과 관방(關防)의 형편을 한눈에 모두 볼 수 있으니, 진실로 평생 잊지 못할 즐거운 일이었다”고 한 바 있다. 그런데 그들은 14일 백두산에 오르기 전인 10일에 운총에 도착해 “옛 사람들은 일을 할 때 늘 몇 가지를 겸했다. 우리가 만약 한갓 산이나 보고 물이나 즐긴다면 천박한 것이다. 관방의 형편을 살필 수도 있고, 북극성이 떠있는 것을 관측할 수도 있다”고 했다.


북학파의 시조이며, 조정의 중신이었다는 그의 인물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는 ‘한갓 산이나 보고 물이나 즐긴다면 천박한 것’이라 하고, 변경의 방비를 위해 지세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이처럼 국방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갑산에서부터 남병영까지는 마덕령(馬德嶺), 후치령(厚峙嶺), 관령(關嶺)이 겹겹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어 오가는 데에 5, 6일은 걸린다. 만일 급한 일을 알리려고 하면, 아무리 서둘러도 제 때에 알리기가 어렵다”고 하여, 이 지역의 험준한 지세로 인한 봉수의 문제점을 심도 있게 짚은 바 있다.


그리고 국방문제에 대해서도 “지금 만약 동인진(同仁鎭)과 동량보(東兩堡)를 파하고 감평(甘坪)과 신대신동(申大新洞)에 진을 설치한 뒤에, 갑산을 방영(防營)으로 삼아 오랑캐를 방비하는 것을 강화하고, 삼수부와 여러 연변(沿邊)의 절진(節鎭)을 통솔하게 함으로써 길주(吉州)와 서로 기각지세(埼角之勢)를 형성하게 하며, 설령(雪嶺)에서 길주에 이르는 좁은 옛길을 개통한다면, 영(營)과 진(鎭)이 벌려 있어 서로 도와주는 것이 견고하게 될 것이다. 무릇 후치령(厚峙嶺) 밖으로 남병사가 적의 동태를 들어 알 수 없는 것은 갑산 방영에서 자주적으로 호령해 적을 막는 방책으로 삼는다면, 비록 드러나지는 않다고 하지만, 하나의 장성(長城)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비록 귀양길에 있기는 하지만, 조정의 중신들이었기 때문에 나라의 안위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봉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를 걱정하고, 오랑캐들의 침략을 저지하는 국방에 대한 대비책을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이 내용들에 이어 백두산 정계비(定界碑)와 관련된 사건의 전말을 소상히 전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조창록의 논문에 자세히 나와 있어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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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3. 서명응의 <유백두산기>에는 마치 위성사진으로 들여다보는 것과 같이 백두산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스 제공

서명응이 지은 <유백두산기>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백두산에 올라 열두 봉우리와 천지를 묘사한 대목에 있다. 그는 백두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장엄한 경치, 곧 여러 봉우리들이 백두산을 기점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간 모습을 마치 요즈음의 항공 촬영한 사진처럼 묘사하고 있다. (사진3)


그 위에 오르니 사방의 여러 산이 모두 깔고 앉은 자리 아래에 있어 하늘 끝까지 바라보니, 한눈에 모두 들어왔다. 다만 시력이 한계가 있음이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미루어 생각하건대, 그 북쪽은 영고탑(寧古塔)·오라(烏剌)·길림(吉林)의 땅이다. 그 서쪽은 요야(遼野)·심양(瀋陽)의 땅이다. 서남은 혜산(惠山)·인차(仁遮)·가파(茄坡)·폐사군(廢四郡)의 땅이다. 그 동쪽은 무산(茂山)·회령(會寧)·종성(鍾城)·온성(穩城)의 땅이다. 그리고 동남쪽 한 줄기가 소백산(小白山)·침봉(枕峯)·허항령(虛項嶺)으로부터 보다산(寶多山)이 되고 마등령(馬登嶺)이 되고 덕은봉(德隱峯)이 되고, 완항령(緩項嶺)이 되고, 설령(雪嶺)이 되고, 참두령(巉斗嶺)이 되고, 원봉(圓峯)이 되고, 황토령(黃土嶺)이 되고, 후치령(厚峙嶺)이 되며, 통파령(通坡嶺)·부전령(赴戰嶺)·죽령(竹嶺)·상하검산(上下黔山)이 되니, 모두 한양(漢陽) 산의 정맥(正脈)이다. 봉우리들을 내려다보니 더러는 높고 더러는 낮으며 더러는 뾰족하고 더러는 둥근 것이 마치 파도가 치고 운무가 끼어 아득히 만 리에서 서로 이끌고 와서 받드는 것 같았다.


몸을 돌려 두 봉우리 사이 비어 있는 곳에 서니 봉우리 아래 땅까지의 거리가 500~600길이나 되었는데, 텅 비고 평평하였으며 큰 못이 가운데 있었다. 둘레가 40리인데 물이 매우 푸르러서 하늘빛과 위아래로 한 가지 색이었다. 못의 동남쪽 언덕에 정황석산(正黃石山) 세 봉우리가 있는데 높이는 한 가지였다. 그 바깥 봉우리 셋은 사람의 혀가 입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뒤의 사면은 열두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는데, 마치 못에 성이 있는 것과 같았다. 신선이 쟁반을 이고 있는 것과 같은 것도 있으며, 큰 붕새가 부리를 들고 있는 것과 같은 것도 있으며, 기둥처럼 떠받드는 것도 있으며, 솟아서 뽑아놓은 것 같은 것도 있다. 안쪽은 모두 깎아지른 것 같은데, 절벽에는 붉고 누런 분을 발라 찬란하게 빛나서 잘 짜인 포목으로 둘러친 것 같았다. 그 바깥쪽은 푸르고 희게 비스듬히 경사가 져있는데 혼연히 큰 수포석(水泡石) 한 덩어리가 응결한 것과 같았다.


발걸음을 여러 봉우리로 옮기니, 큰 못이 더러는 둥글게 더러는 네모지게 그 보이는 모양이 각각 달랐다. 사방의 조금 평평한 봉우리에 자리를 펴고 앉으니 봉우리에 오석(烏石)이 많았다. 아래로 큰 못을 내려다보니, 삼면이 산에 막혔는데, 그 북쪽이 갈라져서 물이 바위틈으로 넘쳐흘러 혼동강(混同江)이 되어 곧바로 영고탑(寧古塔) 땅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더러 압록강과 토문강이 큰 못에서 발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슴들이 무리를 지어 있는데, 물을 마시는 놈도 있고, 다니는 놈도 있으며, 누워 있는 놈도 있고, 느릿느릿 달리는 놈도 있다. 검은 곰 두세 마리가 벽을 따라 오르내리기도 하고, 이상하게 생긴 새 한 쌍이 날다가 물을 차기도 하니, 마치 그림 가운데에서 보는 것 같았다. 이때에 일행이 백여 명에 가까웠는데, 봉우리에 둘러서서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산수의 정취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자기도 모르게 발이 앞으로 나가고 몸이 가로 기울어졌다. 나와 조엄은 아래로 추락할까 두려워서, 이를 금지시켰으나 소용이 없었다.

 
▲ 백두산 천지의 아름다운 모습과 주변 봉우리들이 천지에 그대로 비쳐 있다. / 조선일보DB

실감나는 비유로 묘사


천지 주위에 서 있는 열두 봉우리를 마치 성처럼 둘러싸고 있다고 했으며, 열두 봉우리의 각기 다른 모습을 선녀가 쟁반을 이고 있다거나, 큰 붕새가 부리를 들고 있다는 등 신비한 느낌이 들거나 실감나는 다양한 비유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경치는 자체로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성이 있는 것처럼 묘사했다. 그래서 일행 100여 명이 모두 경치에 심취해 위태로운 절벽 앞으로 자신들도 모르게 나아가서 금지시키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천지 주변의 모습을 묘사한 내용은 곰 두세 마리가 벽을 따라 오른다는 것만 제외하면, 마치 한라산 백록담의 모습을 묘사한 것과 흡사하여, 한라산과 백록담이 백두대간의 시작과 끝임을 실감케 한다.


이 기록에는 이처럼 서명응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백두산의 생태와 그에 대한 감상을 묘사한 것이 많은데, 다음 내용도 백두산 특산품, 혹은 그곳에 사는 동식물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 백두산 사진작가 안승일씨의 전시회에서 백두산 모습을 그대로 새로 찍었다. / 조선일보DB

또 세 골짜기가 있는데 북쪽으로 가면 신대신동처럼 깊고 넓었다. 수년 전 날씨가 가물었을 때 초목이 모두 말랐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불을 놓아 산꼭대기까지 모두 타버린 뒤에는 산삼이 다시는 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날아다니는 새도 보이지 않고 가끔 꾀꼬리가 관목 위에서 우는데, 울음소리가 남쪽에서 듣던 것처럼 조금 촉급했다. 짐승은 또한 호랑이와 표범은 없고 곰과 사슴들만 있는데, 여름철이 되면 더위를 피해 백두산 아래로 들어왔다가, 가을과 겨울이 되면 다시 남쪽으로 간다. 담비와 박쥐는 사계절 모두 있다. 그러므로 담비 잡는 사람이 큰 나무를 물에 띄우고 그 가운데에 구멍을 뚫은 뒤 시내 위에 매어 놓으면, 담비가 물을 마시기 위해 들보를 오르내리다가 구멍 안으로 떨어져 물에 빠지게 되어 마침내 사람들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산삼이 나지 않게 된 것, 호랑이와 표범은 이때 이미 보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담비 잡는 방법 등이 소개되어 흥미롭다. 이처럼 서명응의 <유백두산기>는 백두산을 유람하며 지은 일종의 기행문이기는 하지만, 국방, 국경, 생태, 관광 등 여러 측면에서 매우 소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백두산 자체와 관련한 특별한 내용과 그리고 그의 실학자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특징은 또 다른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출처 : 월간산 2015.4월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