遊白頭山記 - 소재집(篠齋集) - 서기수(徐淇修)

2017. 6. 6. 13:54옛산행기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

 

1. 갑산(甲山)에서 운총보(雲寵堡)까지의 기록

 

백두산(白頭山)은 땅 북쪽 끝에 있어서 우리나라 모든 산의 비조(鼻祖)가 됨이 중국의 곤륜산(崑崙山)과 같다. ()나라 때는 황복(荒服)에 예속되었고 사대부의 다녀간 흔적이 드물었다. 쫓겨 온 신하들이나 귀양 온 나그네가 때로 오기는 하지만 손가락으로 셀만할 뿐이다.

산의 남쪽으로 둘려 있는 고을들은 홍북(洪北), 이단(利端), 삼갑(三甲)등의 여러주로 갑산에서 가까이는 삼백 사십 리가 된다. 내가 귀양 와서 욕된 사람으로 이 고을에 살면서 구름에 덮인 산봉우리를 바라볼 때마다 감탄하고 아취 있게 여겨왔다.

지난해 정묘년(丁卯年) [순조7 (1807) ]여름에 특별사면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은혜를 입었으나 서류가 도착하지 않아 삼년을 머물렀는데 변성(邊城)에서 수적(戌笛)소리를 들을 때마다 도성과 멀어진 근심을 금할 수 없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예로부터 이 땅으로 쫓겨 온 공경대부들의 많은 사람이 백두산유람을 하였습니다. 그대의 산수를 아취 있게 바라보는 취미로 어찌 정상에 올라가 큰 연못을 내려다보아서 옛날 자장(子張)의 장한 여행을 이루지 않습니까? 또 이곳까지 왔다가 백두산을 보지 못한다면 마치 중국 땅 사수(泗水)를 지나면서 공자의 사당을 들어가지 않음과 같을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벌떡 일어나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진실로 나를 일으켜 세우는 구나.” 하였다.

 

이에 기사년(己巳年) [순조9 (1809) ] 5 11일 출발하였다.

백광위란 사람과 글을 배우던 노명준이 따라 나섰다.

 

다음날(庚午)은 맑았다.

일찍 아침식사를 하고 북문으로 나가니 날씨는 온화하고 들판은 텅 비었다. 내 마음은 벌써 백두산 정상에 있는 듯했다. 구동인사(舊同仁社)에서 40리 되는 곳에서 말을 먹였다. 영묘무오(英廟戊午)에 방어진을 검천(劍川)언덕으로 옮기니 다만 그 흔적들만 남아 있었다. (申時)후에 아간령(阿間領)을 넘어 운총보(雲寵堡)에 도착했는데 40 리를 걸어서 유숙했다.

영묘 병술(丙戌)에 산제당(山祭堂)을 운총보(雲寵堡) 북쪽에 설치하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에 쓸 제수를 서울에서 조달했다. 이는 예경(禮經)에 이르기를, 산하(山河)에 먼저 제사 지내고 해신(海神) 뒤에 제사지낸다 하였으니 옳은 일인가?

만호(萬戶) 신처문(申處文)군이 접빈관에 나와 저녁식사를 대접하였다. 그의 아들 재성(在成)군이 동행할 의사가 있으나 떠날 준비가 안 되었다고 사양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지팡이 하나와 집신 한 켤레면 족한데 어찌 행리(行李)를 핑계 삼는가?” 하고, 다음날 아침 오시천(烏時川)에서 모이기로 약속하니, 흰 연기를 보고 찾으라고 하였다.

 

自甲山扺雲寵堡記

 

白頭山 在於窮髮之北 而爲我國衆山之鼻祖 如中州之崑崙也 以其隸于荒服洛下士大夫之足跡 罕及於此 唯逐臣遷客 時或至焉 而亦指不多屈焉

環山南而邑者曰 洪北 利端 三甲諸州 而其距甲山府治冣 近爲三百四十里自余爲人居是州 每瞻雲嶂引領興嗟者雅矣 去丁卯夏 以特旨蒙歸田之恩 而以白簡未輟不得還 濡滯至于三載 邊城戌笛 自不禁去國之愁一日有客言于余曰 自古公卿大人之見放於玆土者 蓋多往遊白頭 以子之雅意林壑 何不上絶頂 俯大澤 以作子張之壯遊乎 且來此而不見白頭 則不幾近於過泗水而不入孔子廟者耶余蹶然而起曰 子言誠起余矣

迺於己巳五月十一日發行 甲人白光緯 塾生盧命駿 從焉

是日庚午晴 蓐食出北門 風日暄姸 原野寥曠 此心已飄然 在白頭之巓矣舊同仁社四十里秣馬 英廟戊午 移鎭於劍川岐 只餘破堞殘譙 申後踰阿間領 扺雲寵堡四十里宿

英廟丙戌 設望山祭堂於堡北 春秋香祝 自京師至 用擧柴望之典 此禮經所云先河後海之義歟 萬戶申君處文 出接賓館 仍具夕飯以饋 其子在成 有同遊之志 而以行李未辨爲辭 余曰一杖一鞋足矣 何用行李爲哉 約以平明相會于烏時川 仍指白烟一縷爲信

 

 

2. 오시천(烏時川)을 건너 신동인보(新同仁堡)에 이르는 기록

 

신미일(辛未日) 맑음,

어두운 새벽에 상쾌한 마음으로 출발하여 오시천(烏時川)에 도착하여 잠시 쉬니 지방사람  김국재의 집이다. 혜산진(惠山鎭)의 첨사(僉使) 이병천(李秉天)이 술을 들고 찾아와 나에게 말하기를,

“오늘 깊은 산에 들어가시는데 행구(行具)를 소홀히 하시면 안 됩니다. 저의 혜산진에 이상경이라는 포수가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모든 산에서 사냥을 해왔고 사람됨이 또한 충직하고 부지런 합니다. 이 사람을 길잡이로 삼아 의지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머리를 끄덕이고 사양하지 않았다. 인하여 술을 대작하며 회포를 풀었다.

다음날 출발하여 오시천을 건너서 백덕령(柏德嶺)으로 향했다. 긴 골짜기는 깊고 험했으며 숲이 하늘을 가렸는데 고개의 안팎이 거의 20여리나 험준했고 아간령보다 더한 것 같았다. 령을 뒤덮은 많은 잣나무로 인하여 백덕령이라는 이름이 붙.

신생(申生)이 약속한대로 종종걸음으로 도착했는데 고갯마루에 피어 놓은 연기가 아직도 피어나고 있었다. 앞뒤로 말을 타고 가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신동인보 40리에 당도했다. 보는 여러 산으로 둘러싼 가운데 있었는데 대신수(大新水)가 그 앞을 지나 펼쳐져 흐르니 곧 압록강(鴨綠江)의 상류다. 그 지역은 망창(莽蒼)과 삼호(蔘胡)지역과 격해 있어 종종 경계를 넘나든다고 한다. 국경을 수비하는 중요한 곳인데 돌을 쌓아 성을 만들었으나 군사적으로 엄하게 지켜야 할 중요한 문이 없으니, 만일 진나라의  채찍(秦鞭)이 흐름을 막는다면 그 한심한 일을 어찌 감당할까?

권관 정선의(權管 鄭善毅)는 교남(嶠南)사람이다.  그 옛날 평사 정문부(評事 鄭文孚)의 후손이다.  옛날 임진년 섬나라의 왜구(倭寇)가 길주(吉州)로 쳐들어왔을 때 정문부께서 난을 평정한 공이 있었다. 이때 나의 6대조이신 약봉 충숙공(藥峯 忠肅公)께서 호소사(號召使)로 경성(鏡城)에 이르러 의병을 일으키실 때 평사 정문부께서 크게 승리하였다는 첩보를 올렸다는데  이 일이 우리집안 가승(家乘)과 국사(國史)에 실려 있다. 오늘 그 후손과 더불어 관북(關北)지방에서 서로 만났으니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 사람됨이 질박함이 많고 꾸밈이 적어서 옛날 가풍 이 있었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옛 일을 떠올렸다. 이어서 행구(行具)를 준비했는데 도끼며 솥까지 모두 준비하고 떠나니 날이 저물어서 진()의 마루에서 유숙하였다.

 

渡烏時川扺新同仁堡記

 

辛未晴 昧爽發行 到烏時川少歇 土人金國才家 惠山僉使李秉天 携酒而至謂余曰 今入深山 行具不可疎虞 弊鎭砲手李尙敬 卽多年行獵都山者 而人亦忠勤 可仗以此人作鄕導官可乎 余諾而不辭 仍對酌敍懷

平明發渡前川 向柏德嶺 長谷谽谺 林木蔽天 嶺之表裏 幾爲二十里亢峻 則比阿間嶺加之 嶺木多柏故 以是名焉

申生果如期踵至 嶺上白烟 猶未散盡 聯轡而行 日晡到新同仁堡四十里 堡在萬山之中申大新水經其前 卽鴨綠上流 而距彼地只隔莽蒼蔘胡 種種越境云 可謂防守重地 而累石爲城 牛羊踰越 亦無重門之戎 嚴若當秦鞭之斷流 其爲寒心當如何 權管鄭善毅 卽嶠南人而故評事文孚之後裔也 昔在壬辰 島酋之入寇吉州也 文孚有靖難功 是時 余六代祖考忠肅公 以號召使 從事至鏡城起兵 授評事克奏大捷 此事載於家乘國史 今與其後孫相會於關北 良非偶然 人亦多質少文 有古家風 杯酒敍舊 仍料理行具 斧斤鼎鐺 亦皆摯去 日已晩 留宿鎭軒

 

 

3. 혜수령(惠水嶺)을 넘어 자포수(自浦水)에 도착한 기록

 

임신(壬申) 흐림.

이른 아침에 출발하니 혜수령(惠水嶺)의 시작이다. 이곳은 산을 오르는 시작인데 고갯길이 험하고 급해서 백덕령과 비교하니 더 한 것 같다. 나무들은 단풍나무, 회나무, 느릅나무, 개오동나무 들이다.

고갯마루에 도착하니 지세가 완만해지고 여기서부터는 평지가 연속되었다. 조금 올라가니 삼나무가 우거져서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혹 불에 타서 말라 있는데 가지도 없이 삐죽 올라서 있어서 마치 등간(燈竿)을 여러 개 세워놓은 듯하였다. 혹 나무뿌리는 옆으로 뻗었는데 용이 서린 것 같이 스스로 나무산봉우리를 만든 것 같아 기이한 볼거리를 만들었다.

6-7리를 가서 관산봉(觀山峰)에 도착하니, 점점 압록강의 물소리가 들렸는데  숲 사이로 철철 흐르는 소리를 내었다. 돌길을 가며 피로할 즈음에 정신이 번쩍 들게 하였다.

곤장평(昆長坪) 30리 지점에 도착하니 지역은 점차 평활해지고 숲이 열렸다. 일행이 모두 가시밭에 둘러앉아서 물을 마시고 바라보았다. 보릿가루로 요기를 했다. 이어서 솥을 나란히 걸고 불을 지펴 점심을 준비하고 말을 풀어 물을 마시게 했다. 행색이 마치 군인들의 행렬 같다고 생각했다.

점심을 들고 길을 떠나서 점점 진흙길을 어렵게 걸었다. 바람에 넘어진 나무들이 길에 누웠는데 마치 서까래를 걸어놓은 것 같아서 곧바로 전진할 수 없고 옆으로 피해가며 걸었다.  5리쯤 가려하면 돌아서 10리는 걸어야 했다. 겨우 10리도 못가서 큰 비가 쏟아졌다. 진흙 속에 발이 깊이 빠지고 범람할 때는 말의 배까지 넘실대어서 해서(海西) 황강(黃岡)의 붉은 진흙보다 심했다.

길은 더욱 험난해 졌다. 이아치(梨兒峙)를 넘으니 또 한 개의 준령이다. 삼나무 잣나무가 길옆에 빽빽해서 겨우 한사람씩 지날 수 있었다. 동서로 잡아당겨서 옷이 모두 찢어졌다. 머리를 숙이고 나뭇등걸을 피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말발자국을 살피며 전진했다. 왼손으로 채찍과 재갈을 잡고 오른 손으로 초립과 부채를 들었다. 부채로 모기와 등애를 쫓았는데 팔이 아프면 좌우로 바꾸었다. 쉬지 않고 말을 몰았으니 마음이 연못가를 지나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머리와 눈과 손과 입과 마음이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 그 위태함이 이처럼 심할 수가, 부득이 말을 두고 맨손으로 탁류에 둥둥 떠서 넘실대는 붉은 흙탕물을 헤치고 풀처럼 넘어지고 자빠지며 가니, 이처럼 가면 어떤 장관이 기다릴지 알지 못하지만 다만 눈앞에 어려움으로 산행하는 사람이 싫어할 뿐이다.

자포수(自浦水) 30리에 도착하여 유숙했다.

관청에서 여막을 설치하고 나무껍질 등으로 두껍게 덮었지만 겨우 바람과 이슬을 피할 뿐이었다. 이날 60리를 걸었지만  말을 탄 것은 수십 리에 불과하다. 불을 피우고 옷을 말리며 술을 데워서 습기를 막았다. 모기소리가 우레 같았는데 한패의 사람들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풀을 태워 연기를 피웠으나 모기떼를 막아낼 수 없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는 밤새도록 그칠 줄 몰랐는데  동이로 쏟아 붓는 것 같아서 느낌이 급한 물살에  배라도 띄울 것 같았다. 앞길을 조용히 생각하니 걱정스러웠다.

 

踰惠水嶺扺自浦水記

 

壬申陰 平明發 由惠水嶺 此是入山初程 嶺勢之陡急 較栢德又加焉 其木多楓檜楡檟及到嶺脊 則地勢夷衍 自此連從平地 上行未數里 杉木彌亘 不見天日 或火損自枯 上竦無枝 如燈竿之森立 或木根倒臥 龍拏虯攫 自作木假峰巒 亦一奇觀

行六七里 到觀山峰 漸聞鴨綠江聲 從樹間㶁㶁而鳴 菱履昏倦之餘 令人神氣頓醒到昆長坪三十里 地漸平闊林木稍開 一行皆班荊而坐 酌水和瞿 麥屑療飢 仍午飯 列鼎而炊 放馬而吃 行色依然有出塞從軍想 飯訖發路 漸艱連行泥淖中 且風落木橫截路傍如掛椽然 不得直造 每逶迤而避之 如欲作五里行 輒回互作十里 役行未十里 雨大作 泥濘深沒人脚 或漲過馬腹 甚於海西之黃岡赤泥 路益崎嶇 踰梨兒峙 亦一峻嶺也衫栢夾路 劣容一人身 而東西牽刺 衣裳盡碎 低首而避木芒 明目以審馬蹄 左手持鞭持 右手把笠子又把扇 以逐蚊 當其用手 時輒左右易之 繼以叱馭 不絶于口 心亦兢兢乎臨淵谷 頭目手口心役役無片時暇

噫 其危也 亦已甚矣 不得已舍馬而徒手浮濁流 陸黃泥踉蹌 草莽十顚九斜 不知此去有何壯觀 而目下艱楚已令行者倦厭也 到自浦水三十里宿 自官設幕 厚覆木皮 俾避風露也 是日行六十里 而跨馬不過數十里 仍對火燎衣 煖酒禦濕 而蚊聲如雷 一陣撲人雖以扇障面 藝草生烟 不能禁 雨勢終夜不止 翻盆注麻 怳然若艤舟急瀨 籌前程 愁殺莫甚

 

4. 자포수(自浦水)에서 허항령(虛項嶺)까지의 기록

 

계유(癸酉) 흐림.

이른 새벽에 비를 무릅쓰고 떠나서 구포수(九浦水)를 경유하여 악단(惡湍)의 한길이나 되는 진흙길을 가니 재험참(在險塹)이 있는 곳이다. 종자에게 이런 곳이 몇 개나 되느냐고 물으니, 자포수(自浦水)로부터 임어수(林魚水)까지 40리에 68개소가 있다고 하였다. 전에 갑인(甲人)이 말한 92개가 맞는 것 같다.

소자포수(小自浦水)에 도착하여 보다산(寶多山)의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니, 구름사이로 보이는 산세가 빼어나게 가파르고 서로 붙어 있는 듯 하였다.

미시(未時)에 적수포(赤水浦) 30리에 도착하여 점심을 지어먹었다. 량군(糧軍)에서 돌아오는 포수를 만나서 사슴고기 말린 것 열 개를 받았는데 술안주로 제격이었다.

서쪽으로 한 봉우리가 보이는데 옆으로 누운 베개를 닮아서 그 이름을 침봉(枕峰)이라 하였다. 이곳이 허항령(虛項嶺)의 정상이다. 산의 목이 오목하고 낮으며 동쪽이 기울고 빈 것 같아서 허정령이라 한 것이 아닌가?

멀리 서북간을 바라보니 산 하나가 반쯤 보이는데 웅장하고 울퉁불퉁하였고 산 정상의 모양이 희어서 마치 첫눈이 내린 것 같았다. 경외심을 일으키게 하였는데 묻지 않아도 백두산(白頭山)임에 틀림 없었다. 이는 마치 유강주(庾江州)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맹종사(孟從事)를 알아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임어수(林魚水)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날씨가 개이고 운무가 점점 흩어지며 햇빛이 밝게 빛나니 일행이 모두 상쾌했다. 여기서부터 나무가 성글어지고 비로소 시야가 트이니 점차 넓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시(未時)쯤 되어 어둑해 질 때 허항령(虛項嶺) 20리에 도착해서 고개 위에 숙참(宿站)을 설치했는데 언제나 수초가 있는 곳을 선택했다. 일행들이 숲의 신에게 빌었는데 수십 명이 모두 합장을 하고 산행이 무사하기를 비니 웃음을 감추지 못하겠다.

고개가 평행해지며 평탄하기가 숫돌 같았다. 고개 위에는 불에 탄 삼나무가 몇 백주가 되는지 몰랐다. 수십 년 전에 산불이 나서 스스로 탄 것이라 하는데 보기에도 걱정스럽다.

소백두산(小白頭山)이 비로소 구름 밖으로 솟았는데 표묘()한 모양이 볼만하였고 신선이 사는 곳 같아서 아득한 모양이 신령스런 지경이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이 고개 동쪽으로는 무산으로 통하는데, 200여리나 된다. 지나는 이 길은 보다산(寶多山)의 동쪽으로 무산에 속하고, 서북으로는 갑산에 속한다고 한다. 그 산위에 작은 못이 하나 있는데, 길이 몹시 험하며 온 산이 가시나무로 덮여 있어 사람이 오르지 못하는데  간혹 사냥꾼이 왕래한다고 한다.  

포수 이상경에게 세발의 총을 쏘라고 했더니 산골짜기가 울렸다. 산중의 기이한 일을 만들었다. 이 밤엔 하늘에 구름도 한 점 없고 맑은 달이 대낮처럼 밝았다. 상쾌하면서 고요하여 누군가를 만날 것 같았는데, 어제 빗속의 광경이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먹을 들고 설령(雪嶺)을 올라온 것이다. 내가 시 한수를 지었는데

 

풀잎 버석이고 말 우는 별빛 아래서     吃草馬嘶星影下

소나무 아래 물소리 들으며 자는 사람   藝松人宿水聲中

 

당시의 정경을 노래한 것이다.

몸과 정신이 맑고 냉랭하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自自浦水扺虛項嶺記

 

癸酉陰 黎明冒雨作行 由九浦水 惡湍丈泥 在在險塹 使從者 籌其揭厲處則自自浦水至林魚水四十里內 爲六十八處 甲人所謂九十二浦者 誠不虛也

到小自浦水 望見寶多山 諸峰 露出雲際 山勢峭拔 無幽朔間意 未時到赤水浦三十里午炊 遇砲手回糧軍 得鹿脯十 亦堪佐酒

西望一峰 如橫枕形 其名曰枕峰 乃虛頂嶺之上頂也 其項低凹 東偏空虛嶺或以是名之耶 遠望西北間 一山露出半面 雄渾磅 山巓逈白 如微雪之初下 使人凜然起敬 不問可知爲白頭山也 此何異 庾江州席上識孟從事者也

到林魚水 始有霽色 雲霧漸散 白日揚輝 一行咸大快 自此林薄始稍稍開漸有空曠意 日未晡 到虛項嶺二十里 嶺上設宿站 每擇水草處止舍 從者禱于叢祠 數十人皆合掌頂禮 以冀山行之利涉 亦堪一笑

嶺勢平行 坦乎如砥 嶺上杉木之火燒 不知爲幾百株 數十年前 遇山火自焚云景色愁沮 小白頭山 始卓出雲表 縹可翫 使人僊僊 有遐擧想 自覺靈境之漸邇 此嶺東通茂山界 爲二百十里 過此路 甚堪寶多山之在東者 屬之茂山 在西北者 屬之甲山云

其山上亦有一小澤 而徑甚犖确 漫山都是荊棘 人不得陟 或有獵戶往來者云使砲手李尙敬 放三砲 山谷皆應 亦可謂山中一奇事也 是夜一天無雲 霽月如晝 軒爽幽聞 意與境會 回想昨日雨中光景 不啻出墨池而登雪嶺也

余有詩曰  吃草馬嘶星影下 藝松人宿水聲中

是卽景語也 令人骨淸神冷 不能就寐

 

 

5. 삼지연(三池淵)을 보고 연지봉(臙脂峰)으로 간 기록

 

갑술(甲戌) 아침에 흐림.

상쾌한 새벽에 아침식사를 재촉하여 들고 출발했다. 별안간 실비가 소리를 내며 내렸다. 비를 맞으며 고개를 넘으니 고개 아래로 천평(天坪)이 평평하게 펼쳐졌는데 모두 농지를 새로 개간한 듯하여 천평(天坪) 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럴듯하였다. 북쪽으로 무산(茂山)경계에 이르는데  몇 백리가 되는 평원 인지 알지 못한다.

5리쯤 가니 삼지(三池)에 이른다. 상중하 세 못이 있는데 그 사이가  몇 마장(馬場)에 불과하다. 품자(品字)모양으로 배열되었다. 상지(上池)는 길이가 3리쯤 되고 폭은 그 절반인데  물이 잔잔하였다. 중지(中池)는 길이가 5리쯤 되고 폭이 7리쯤 되는 큰 늪이었다. 세 못 중에 중지가 가장 큰데 못 가운데 작은 섬이 솟아나서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다. 섬 위에는 삼나무와 회나무들이 양의 뿔처럼 울창한데 옛날에는 물이 얕아서 사람이 건널 수 있었으나  지금은 물의 깊이가 한 길이나 되어서 사람이 건너다닐 수 없었다. 섬의 이름이 지추(地樞)인데, 이는 나의 종조숙부이신  문정공(文靖公) [보만재  서명응(徐命膺)]이 갑산(甲山)에 적거(謫居)하시면서 백두산을 오르실 때‘지추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대개 침봉(枕峰)으로부터  백두산(白頭山)까지는 60여리로 동북쪽 산하의 추()가 되니 북극의 경도(經度) 6도가 추가 되는 것이 혼천의(渾天儀)에 추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못의 바닥은 흰 모래와 조약돌인데  물이 심히 맑아서 사람의 수염과 머리털을 비춰볼 수가 있었다. 비단 오리와 알록달록한 뜸부기들이  파문을 일으키며 노는 모습에 돌아갈 것을 잊게 했다.

대개 못의 물은 고여 있어서 흐려질까 염려하는 것인데, 이 못의 물은 거울처럼 맑아서 티끌 하나도 물들지 않았으니 참으로 신선의 집이 아닐는지?  더욱 중추가절에 못에 비친 달을 본다면 더욱 좋겠다.

! 이곳의 경승(景勝)을 예호()나 호두()사이에 옮겨놓고 정자를 짓고 배를 띄우면 반드시 호사자(好事者)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을 것인데, 빈 골짜기에 버려두니 아깝지 아니한가?

또 한 개의 작은 못이 있었는데 중지(中池)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여서 웅덩이를 만든 것이다. 하지(下池)는 상지에 비하여 넓이와 길이가 작다.

이처럼 산행을 하느라고 바빠서 더 머물지 못하고 걸음마다 아쉬워 뒤를 돌아보았다.

허항령(虛項嶺)으로 부터 천수(泉水)로 향하는 길이 이미 수십 리를 지났어도 우리는 아직도 천평(天坪)안에 있었다. 가도 가도 평평한 삼나무 숲이었는데 겨우 일평(一坪)을 지났을 때 말 앞에 큰 사슴이 나타났다. 살펴보니 암수사슴이 앞뒤로 가고 있었는데 앞의 놈은 머리에 창 같은 큰 뿔을 머리에 달았는데 그 가지가 여러 개다. 그 크기는 송아지만 하고 털빛이 붉었다. 말의 발소리를 듣고 놀래서 벌판을 달리는데 절룩이는 것 같아도 나는 듯하였다. 대개 산의 흙에는 염분이 많은데  언제나 봄과 여름 교미할 때에는 산속에서 내려온다고 한다.

정오가 되어서 천수 35리에 도착하니 비가 그치고 날이 개였다.

모든 산의 포수들이 모이는 막사가 있었다. 수렵을 끝내면 이곳에 모이는 곳인데 막사 안에는 제를 지내는 웅이사(熊耳社)가 있었다. 두 사람의 포수가 있었는데 나무로 짠 모자와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주고받는 말이 달랐는데 진실로 북방의 포수들이었다.

식사를 하고 출발하여 연지봉(臙脂峰)으로 향했다. 몇 리를 가서 속석포(粟石浦)에 도착했다. 그 포()의 위아래가 모두 수포석(水泡石-일명 浮石)이었는데 빛깔이 밝고 희었다. 연하여 놓여 있고 간간히 붉은색 수포석도 있어서 기이하였다.

조정암(竈頂巖)이 있는데 푸른색 돌로 위아래로 널려 있어서 걸터앉을 만 하였다. 바위의 형상이 층층으로 쌓여서 스스로 계단을 만들었는데 둥글어서 솥뚜껑을 덮어놓은 것 같았다. 그래서 조정암(竈頂巖)이라는 이름이 붙였으나 그 이름이 아취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바위에서는 맑은 물이 방울방울 처마 물처럼 떨어졌다. 종자를 시켜 표주박으로 받게 하여 가득 찬 다음에 마셔보니 그 맛이 심히 상쾌하였다.

속석포(粟石浦)에서 5리 남짓 가니 또 한 개의 작은 암석이 있고 상조정암(上竈頂巖)이라 하였다. 처음 본 것보다 작고 기이함도 덜했는데 마르고 건조함이 흠이었다. ‘이런 때 하늘에서 소나기라도 내리면 좋을 것 같다‘ 고 일행은 말했다. 여기서부터 연지봉(臙脂峰)까지는 계속 개펄을 따라 가야 하는데 그 넓이가 100여무(-거리의 단위)쯤 되고, 모두 파란 모래와 흰 돌로 덮여 있어 서설(瑞雪)이 땅을 덮은 것과 같고 명옥(明玉)이 쌓여 비쳐서 사람의 눈을 밝게 하고 누런 진흙에 발이 빠질 염려도 없다. 또 삭풍(朔風)이 머리털을 날리면 사람은 상쾌한 기운을 느끼고 말들도 제 그림자를 돌아보며 울어서 채찍을 들지 않아도 달렸다. 좌우의 산봉우리들은 모두 밝은 빛을 띠고 구름 일고 안개 자욱하다.

옛날 동진(東晋)의 옹자유(王子猷)가 산음으로 갈 때에 길 위에서 마중하지 않아도 마음 쓰지 않았다는데 오늘 우리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비로소 백두산의 참 모습을 바라보니, 울창하게  쌓인 모습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고 그 몸집이 더 없이 컸으며, 비할 수 없이 빼어난 빛으로 높이 하늘에 닿았고, 우러러보니 뾰족하고 높아서 더욱 굳세게 의젓하여 그 형상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산의 한 자락이 남쪽으로 말의 꼬리처럼 뻗어갔는데 은은하고 힘차서 몇 백리나 되는지 알지 못하였다. 이는 감여가(堪輿家-풍수가)가 말한 ‘용의 형상으로 펼쳐졌다.’ 것이다. 맑은 기운이 푸른 언덕으로 모여서 동쪽으로 허항령(虛項嶺)이 되고 보다(寶多)의 여러 산들이 되었으며, 구불구불 북으로 뻗어서 장백산(長白山)이 되었고 무산(茂山)의 경계를 지나 육진(六鎭)으로 들어갔다. 남쪽으로는 마등(馬登), 참두(嶄斗), 황토(黃土), 천수(天秀)등 모든 산봉우리가 되고, 다시 솟아서 후치령(厚峙嶺)이 되었다가 북청계(北靑界)를 지나 남관(南關)으로 들어가서 백두의 줄기가 되어 령기후치(嶺畿厚峙-영남,경기 지역)에 달했으니 곧 우리나라 모든 산의 조상이며 정간(正幹)이 된다.

서쪽으로 소백두(小白頭)를 바라보니 모든 산들이 푸르게 우거졌고 백두산에 두 손을 잡고 읍하는 모양이 마치 ‘대종(岱宗-중국 태산의 다른 이름)앞에  양부(梁父-산이름)’와 같았다.

당일 저녁이 되기전에 연지봉 40리에 도착하니 흙빛이 단사(丹砂)처럼 붉게 엉겨서 점점이 물에 잠겨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개펄을 버리고 동쪽으로 뻗은 곳에 연지봉 소동암천(小東巖泉)이 있는데 자못 그윽하였다.

초막이 하나 있는데 무산으로 귀양 왔던 윤복초씨(尹復初氏)가 지은 것으로 지난 가을에 이곳을 지났다고 한다.

백두산 정상에서 30리 되는 곳에서 유숙했다. 이곳으로부터 지세는 더욱 높아지고 산은 점점 험준해지며 가는 길이 계속 오르막으로 오르는 일만 있고 내려가는 일은 없었다. 산행하는 이들이 모두 이곳에서 유숙하면서 바람도 멎고 날씨가 쾌청하기를 기다렸다가 비로소 산을 오른다고 한다. 예로부터 산행을 하는 사람이 천둥번개가 치는 비나 강풍 또는 우박을 만나면 혼비백산(魂飛魄散)해서 한 발짝도 오르지 못하고 헛되이 돌아간 자들이 많았다고 하니, 이는 어찌 옛날 ‘배를 타고 삼신산(三神山)에 접근하다가 배가 바람에 끌려서 신선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고사와 다르겠는가?

이날 저녁에 별안간 소리가 있어 마치 은은히 산골짜기가 진동하는 뇌성과 같은 울림이 있었다. 일행이 모두 듣고 크게 놀랬는데 곧 정상에 있는 천지연이 우는 소리였다. 하늘이 비를 내리려할 때는 이런 징험이 있다고 했다.

나도 또한 놀래고 의아해 했다. 곧 보다산(寶多山)동쪽을 보니 번개가 번쩍이고 검은 구름이 피어올라서 비가 내릴 조짐이 농후해졌다. 내일 산행이 지금부터 좌우되었다. 또 듣기로는 산속에서 비를 만나면 길이 막혀서 오갈 수 없게 되어 혹은 한 달씩도 갇힌다고 하였다. 마음이 조급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날 밤에 나는 목욕을 하여 몸을 정결하게 하고 일행에게 머리를 올려 묵고 정성스레 기장밥을 짓게 한 뒤에 산신에게 비는 사언문(四言文)을 작성하였다. 첫닭이 우는 때에 맞추어 일행과 함께 산에 올라 향을 사르고 몸소 백두산 산신에게 빌었다. 그 글은 이러하다.

 

하늘이 높은 산 만들어 북쪽에 예속시켰습니다.

이름난 산이 여덟인데 세 개가 먼 외방(外方)에 있습니다.

경도(經度) 6에 해당하는데 그 추()가 혼천의(渾天儀)에 있습니다. 높고 가파르며 두텁고 신령스러우며 널리 퍼져 있지요.

왼쪽 바다로 뻗은 높은 산들은 자손들처럼 도열해 있고

봄가을 무성한 숲은 하해(河海)와 앞뒤서지요.

! 욕된 이 몸이 갑산에 유배되어,

북쪽으로 우뚝한 산 하늘에 닿은 빼어남을 바라보면,

구화(九華)를 바라보는 맹종사(孟從事)를 떠올렸습니다.

기장밥 드리고 늙은 몸 엎드려 돌 위에서 큰절을 올리나이다.

나의 신발을 보살피사 거친 풀을 잠재우시고

타고 갈 썰매에 튼튼하게 못을 박으소서.

주리고 목마르다고 말할 때면 숙석으로 마음에 보상하소서.

천지여 어둠을 관찰하사

백주에도 우레와 우박을 내리시고,

귀신의 신비함과 하늘의 아끼심으로 새벽기도를 일제히 밝히시어 견우성이 중천에 있을 때

나의 기도를 자랑하게 하시고 영험 있게 하소서.

당나라의 창려후(昌黎候-한퇴지를 이름)도 형산(衡山)의 신에게 빌었나이다.

세상의 강령은 풀지 못해도 능히 산속의 구름은 열 수 있으리다.

내가 사람의 할 도리를 다하여 하늘의 액을 멀리하고자 하오니 산신이시여 감청(監聽)해주옵소서. 믿음을 드리나이다.

 

하니,

이는 창려후 한유가 형산에 제사지낸 일을 본받은 것이다.

빌기를 마치고 식사를 재촉해서 먹고 출발하려고 하니 하늘에 구름이 걷히고 달과 별이 반짝여서 산신이 감동한 것 같았다.

 

觀三池扺臙脂峰記

 

甲戌朝陰 昧爽促飯發 微雨忽至 琳琅有聲 冒雨踰嶺 嶺底有天坪 一望數十里皆畇畇平坂 如畦塍之新發 然坪名良有以也 北至茂山界 不知爲幾百里 廣坪云

行五里 到三池 上中下三池 其間各不過數馬場 許熱如品字 上池縱可三里衡裁半之 水勢甚恬穩 中池縱可五里 衡可七里 卽鉅藪也 三池中 中池最大 池心有小島 突起如穹龜之伏 其上衫檜羊躅 蔚然蔥蒨 昔則水淺可涉 今則水深過丈 不可通人島名地樞 卽從祖叔父文靖公 謫甲山時 白頭歷路 命名曰地樞云

蓋自枕峰 至白頭 六十餘里 爲樞於東北山河 猶北極之經六度 爲樞於渾天也池底皆白沙素礫 水甚淸澈 可鑑鬚髮 錦鳧繡 演漾於文漪之間 使人澹然忘歸 大抵池水渟 每患混濁 而此池則 鏡波澄漣 一塵不染 眞可謂神仙窟宅 而尤與中秋觀月爲宜

噫 以玆境之勝 致之杜之間 則亭臺帆檣 必有好事者之極意舖置棄之空谷 可不惜哉 又有一小池 卽中池餘派之爲匯瀦者 而下池比上池 稍小廣 亦如之行 甚忙不得留衍 自不覺步步回首矣

自虛項向泉水 已過數十里 而人尙在天坪之內 去去是平楚杉場 纔過一坪忽麋興於前馬上 諦視之 卽雌雄後先而行 前者頭戴大角如戟 枝之岈然 其大如犢毛色甚赤 聞馬蹄人跡 驚逸岡坂 蹩蹩如飛 蓋山土多鹹鹵 鹿性嗜此故每當春夏之交 自中山越來云

日午到泉水三十五里 雨快霽 有都山砲手之結幕 此罷獵出來時 都聚處也幕中有熊耳社 砲手二人 枷笠皮服 言語甚詭 眞朔方獵胡也

攤飯訖 發行向臙脂峰 行數里 到粟石浦 一浦上下 皆是水泡石 其色瑩然皓白袞袞不絶 間有紫水泡石 亦可異也 有竈頂巖 靑石彌延上下 盤陀可坐 巖形層累 自成階級 穹然如竈頂之上覆 故仍以名之 而名甚不雅 巖溜點滴 如簷 使從者持瓢而受之 滿一瓢吸之 味甚爽冽沿

浦行五里餘 又有一小巖 稱上竈頂巖 比初見差小 而奇峭亦減之 但恨乾涸無水若得天公 副急雨則可 令一行叫奇 自此至臙脂峰 連從浦中行 廣可百餘武 而皆緣沙白石 如瑞雪舖地 明玉積圃照 暎人眼 旣無黃泥之沒足 又朔風浙浙吹髮 使人颯爽生氣馬亦顧影驕嘶 不鞭而自疾 左右峰巒 皆暎帶明媚 雲興霞蔚 昔王子猷之山陰 道上應接不暇者 未知較此何如也

始望見白頭眞面 蜿鬱積 體勢博大 崛嵂秀色卓乎接天 仰彌高鑽 彌堅嵬嵬然 不可名狀 山之一脉 南走如馬尾 隱隱融融 不知其幾百里 此堪輿家所謂 舖氈龍勢 而淸淑之氣 湊于靑邱 東爲虛項嶺 起寶多諸山 邐迤北走爲長白山 歷茂山界 入于六鎭 南爲輦巖,馬登,嶄斗,黃土,天秀諸嶺 仍起厚峙嶺 歷北靑界 入于南關 爲鼻白山 達于嶺畿厚峙 卽正幹而爲我東諸山之中祖云

西望小白頭 諸山鬱繆蒼蒼 環拱趨揖 如岱宗之梁父云 亭日未夕 到臙脂峰四十里土色凝紫如丹砂點水故 峰以是名之 捨浦而迤于東 有臙脂小東巖泉 頗幽夐 有一草幕 茂謫尹台復初氏 客秋過此云

仍留宿距白頭上角爲三十里 而自此地益高山益峻 徑路登登 有上而無下矣行者例留此處 以待風恬日朗 始得上山 而自古入山者 或遇雷雨風雹 魂迷魄褫 不得進一步而虛還者 蓋多有之 此何異舟近三山 爲風所引 去不得遇仙而歸者哉 是夕忽有一聲 噌吰如雷 殷震山谷 從者大恐諦聽之 卽上角大澤之鳴也 天將雨則輒有是徵云

余亦驚訝 卽見寶多山東 電光燁燁 陰雲潑墨 雨意正濃 明日之遊 自此左矣且聞山中遇霖雨 則道不得通 進退維谷 或至經月淹滯云 方寸煩懊 按住不得 是夜余乃沐浴 濯潔齊明 顒若命從者 精淅粢盛 仍搆禱神文四言 鷄初鳴時辰 率一行上香躬禱于白頭之神 其文曰

 

天作高山 係北直隸 名嶽維八 三在荒裔 若極經六 樞于渾天 崛嵂磅 毓靈箕躔 左瀛群宗 列如兒孫 春秋望柴 河海後先 嗟余大 編管于甲 北望傑瑰 界天秀色 如望九華 識孟從事 若米老顚 納石丈拜理我靑鞋 露宿草菱 橇 敢云飢渴 夙昔賞心大澤 冥觀 白晝雷雹 鬼秘天慳 齊明露禱 牽牛正中 夸我巫祈 奔走效靈 有唐昌黎 祈衡神 不解世綱 能開岳雲儘我人窮 非天之阨 神之聽之 有孚顒若

 

此效韓昌黎衡岳故事也 禱罷促食將發 見天際雲翳忽收 月星明穊黙 有神理之孚感

 

 

6. 연지동(臙脂洞)에서 백두산(白頭山) 상봉에 오른 기록

 

을해(乙亥) 맑음.

밤 오경에 오르기 시작하여 십여 리를 산행했을 때 일출을 보았다. 슬해(瑟海)에 붉은 구름이 씻은 듯이 출렁일 뿐, 모든 산들이 가려서 해가 떠오르는 곳을 볼 수 없음이 한스러웠다.

길에는 흰 철쭉이 만개하였는데 바람이 심하여 가지가 땅에 누어서 무성하게 자라지 못하였다. 또 보니 모래가 바람에 몰려와 쌓여서 스스로 전답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반듯반듯 모가 나고 도랑이 분명하여 다 그러하였다.

장연(長淵)의 금빛 모래는 본래 이상한 볼거리였는데 바뀔까 걱정이 되었다.

 5리쯤 가서 지경포(地境浦)에 도착하니 겨울에 내린 눈이 아직도 녹지 않았다. 말에서 내려 어름을 밟으며 건넜다. 연지소동(臙脂小洞)으로부터 소백두(小白頭) 및 연지봉 정상에 이르렀는데 온 종일 연지봉을 왼쪽에 끼고 오른 것이다.

비로소 분수령(分水嶺)에 도착하여 정계비(定界碑)를 보니, 비문에 이르기를

<오라총관 목극등(穆克登)이 교지를 받들어 변방을 살피고 이곳에 이르렀다. 서쪽은 압록(鴨錄)이고 동쪽은 토문(土門)이다. 그러므로 분수령 위에 돌에 새겨서 기록한다,> 고 하였다.

이는 강희 임진 오월에 세운 것이다. 토문(土門)은 지금의 두만강(荳滿江)인데 강의 수원이 부석(浮石) 속으로 스며들어 산을 이루다가 40리쯤에서 솟아나온다. 일찍이 상고해보니, 청나라사람 방상영(方象瑛)의 장백산기(長白山記)에 이르기를

<강희황제(康凞皇帝)가 두만강 발원하는 그 아래에 예부가 주관하여 산제당(山祭堂)을 지어 향사(享祀)하되 오악(五岳)에서 제사지내는 것과 같이 하라.> 고 하였다.

대개 청나라가 개국할 때 왕적(王跡)이 천녀가 천지 가운데서 내려왔다고 하였다.

백두산의 다른 이름은 장백산(長白山)이다.

지경포 옆에 목책과 석축이 있는데 그해 팔월에 조정의 령으로 남북을 나누어 쌓은 것이다.

경상(卿相) 홍치중(洪致中)이 북평사 동기역(董其役)으로 경계를 정할 때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의 보은수(報恩水-천지를 지명한 듯)옆에 비를 세워서 산의 남쪽은 우리 땅으로 산의 북쪽은 저쪽 땅으로 해서 서로 만족할만한 곳을 택했어야 했다. 반드시 지경포위에 도랑을 나누는 경계비를 세워야 하는데, 지금 세운 경계비로 인하여 우리나라의 국토가 몇 백리나 줄어들었다. 또 비문 끝에 사실을 기록한 내용을 보면 경계를 정할 때 조정에서 파견한 관원이 통역관 몇 사람이었고 오로지 목극등(穆克登)이 마음대로 하도록 방임(放任)

하였었다. 국토의 경계는 왕정에서 매우 큰일인데 조정에서 변방에 대하여 소홀(疎忽)히 여겼으니 진실로 개탄할 일이다.

정계비로부터  20리를 가니 산길이 모두 수포석(水泡石)으로 깔려 있고 풀 한 포기 없으니 진실로 불모(不毛)의 땅이다.

이에 백두산의 아래 봉우리에 올랐다. 두 눈이 밝아지면서 큰 연못의 깊고 넓은 모양을 내려다보았다. 정신이 두렵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안정을 찾기 힘들었다.

계속 중간봉우리에 오르니 아래서 본 것과 같았다.

드디어 맨 위에 오르니 곧 병사봉(兵使峰)이다. 큰 못의 온전한 모양이 보였다. 넓이는 30, 길이는 40리쯤 되는데 네 개의 산이 둘서 있어 80리쯤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뾰족한 산 위에 앉아서 그 넓이를 내려다보아 대략 그럴 것이라는 추측일 뿐이다. 만약 평육(平陸)으로 종행(縱行) 잰다면 그 길이가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다.

큰물이 깊고 깊어서 바라보아도 끝을 모를 것 같다.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하고 마음을 취하게 만들어 비록 광릉(廣陵)에서 물결을 바라보고 석강(淅江)에서 파도를 타는 것 같아서 예측했던 일 보다 더하여 이처럼 기이할 수가 없었다.

동쪽에 한 봉우리가 있는데  와갈봉(蛙喝峰)이라 한다. 그 형상이 마치 거인(鋸人-톱질하는 사람)이 무릎 꿇고 앉아서 못을 흘겨보는 것 같은데 또한 기이한 볼거리였다.

대개 백두산이 겉모양은 중후(重厚)한 토산(土山)이고 그 속 모습은 석봉(石峯)을 조각해서 수놓은 듯이 이어붙인 것이다. 이런 돌산으로 큰 못의 사면을 담처럼 둘러싸서 동..남 세 면엔 뚫린 곳이 없고 다만 북쪽만 한쪽이 뚫려 있다. 그 사이로 물이 흘러 절벽을 따라 흘러내리는데  천상수(天上水)라고 부른다. 이곳을 통하여 북으로 흘러서 흑룡강(黑龍江)이 되는데 이곳이 곧 영고탑(寧古塔) 부근이다. 청일통지(淸一統志)를 살펴보니,

<못 주위에 큰 돌들이 둘러서 있는데 그중 돌 하나가 우뚝하다. 마치 돌사자가 하늘을 보고 포효하며 사해를 내려다보는 형상이다.> 하였다.

못의 빛은 넘실넘실하여 만 두둑의 밭고랑 같고 유리처럼 투명하다. 모든 산봉우리가 거꾸로 투영되어 물결 따라 흔들리고 붉은 암벽은 잠겼다가 드러나니 곧 살아 있는 그림이다. 또 보니, 한 줄기 구름기운이 못 가운데서 일어나서 연기도 같고 아닌 것도 같더니 공중에 이슬비가 되어 흩어지지 않았다. 삽시간에 만 가지로 변하고 암벽의 색을 오색으로 물들였다. 빛나는 것이 대부분 붉은 빛을 띠었는데, 단양(丹陽)의 사인암(舍人巖)을 빼어 닮았다. 여러 모양을 보이는데 찢어진 치맛자락 같고 쌓이면 부도와 같다. 모나기도, 둥글기도, 돌출하기도, 평평하기도 하였으며 흩어 졌다가 서로 만나기도, 만났다가 서로 나뉘어져서 혹 맹수와 기괴한 것들이 어울려 싸우는 것 같고, 혹 대나무 같고 혹 연꽃 같아 서로 빼어남을 경쟁하는 것 같았다.

또 한 봉우리가 못 가운데 솟았는데 옷을 걷어 올리고 서 있는 높은 낚싯대 같았다. 초연히 홀로 서서 병사봉과 마주하고 서있다.

뾰족한 산줄기가 북으로 뻗어가다가 한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돌의 형세가 사면으로 높고 낮게 나란히 모여서 금강산의 중향성(衆香城)을 닮아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때때로 미풍이 불어와 물결을 두드리면 파도소리 드높고, 돌구멍을 드나들면 종소리가 울리는 듯, 모든 산들이 소리를 내고 물빛이 검푸르며 넓은 못이 깊이를 알 수 없으니, 그 속에 반드시 신물(神物)이 엎드려 있어서 날씨가 좋은데도 음울하고 한기가 느껴져 오래 앉아있을 수 없었다.

대개 그 기이하고 높은 기상은 두터운 대지에서 솟아난 것이어서 몇 천 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깎아지른 절벽의 꼭대기에 비록 발을 담글만한 물이 있어 손을 씻는다 해도 기이하거늘 하물며 이 거대한 비탈에 넓고도 넓은 호수가 하늘에 닿을 듯하니 조물주(造物主)가 정신을 쏟아 언덕에 흘린 물이 나의 정신을 깨우치고, 백가지로 변화하는 모습을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나에게 보이니 어찌 망연자실(茫然自失)함이 없겠는가? 일찍이 들으니 탐라(耽羅-제주도)의 한라산(漢拏山) 위에도 백록담(白鹿潭)이 있다고 하니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부러움이 있구나.

온 산이 수포석(水泡石)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눈처럼 희게 보여서 백두(白頭)라는 이름을 얻었다. 비록 5.6월의 한 여름에도 눈이 다 녹지 않고 초가을에 새 눈이 또 내리면 쌓였던 눈 위에 새 눈이 덮이니, 이로 미루어보면 아직도 태초의 눈이 있는 것이다. 물을 손으로 떠서 마시니 아침이슬을 마시는 것처럼 가슴이 상쾌했다.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호산(胡山)은 구름사이로 보였다 안 보였다 하였는데 뾰족이 솟아올라 그 형세가 물결 같았다.

만일 안력(眼力)이 있었다면, 북쪽으로는 연갈(燕碣)까지, 남쪽으로는 형초(荊楚)까지 볼 수 있으련만 하고 생각했다. 서쪽으로 소백두(小白頭)를 바라보니 비스듬히 궤안(几案)모양으로 누웠고, 산 위에 한 개의 돌이 서 있는데 부르기를 농암(籠巖)이라 하였다. 연지봉, 보다산(臙脂峰, 寶多山)은 자손처럼 늘어서 있고 두만강, 압록강(荳滿江, 鴨綠江)은 띠처럼 비스듬하다.

무산(茂山)의 시루봉(甑峰)과 단천(端川)의 둥근산(圓山)과 육진(六鎭)의 모든 산은 개미집처럼 누웠는데 모두 무릅아래 벌려 있다.

이날은 날씨도 청명하고 바람도 한 점 없었다. 푸른 아지랑이가 희게 트인 마루에 어리고 함께 간 모든 이들을 백두산 창문 위로 드러내니 참으로 좋은 놀이였다.

악신(嶽神)이 나에게 베푸심이 참으로 넉넉하다. 지팡이 가는대로 옷깃을 풀어 제치고 나는 듯이 열자(列子)의 풍모를 닮아 신선들의 지경에 놀리라.

오늘의 형편을 보면 그럭저럭 살아가는 중생들 중에 우리와 같이 잠깐 취미에 몰입하는 이 몇이나 될까? 생각나면 놀면서 세월이 장차 저무는 것도 알지 못하면서 다만 변방(荒服)에 사는 집 떠난 나그네나 방랑하는 시인 묵객이 되어 이곳에 올 수 없음을 한탄한다.

백두산(白頭山)의 모든 봉우리는 여남(汝南)의 평에 잘못된 점을 지적했는데, <병사봉(兵使峰)의 이름이 심히 속되니, ‘옛날 북병사(北兵使) 윤광신(尹光莘)이 이산에 올랐다가 술을 마신 후 칼을 뽑아 검무(劍舞)를 추었으므로 그래서 병사봉이 되었다. 고 지금도 토인들이 전해온다.>고 한다. 지금 봉우리 하나하나 예를 들어 좋은 이름으로 바꾼다면 어찌 영릉산수(零陵山水)를 자후(子厚)가 멋대로 지은 것과 다르겠는가? 이 일은 후세의 군자를 기다릴 뿐이다.

 

自臙脂洞陟白頭山上角記

 

乙亥晴 夜五更仍上山行十里 見日出 瑟海彤雲盪漾 但衆山障礙 恨不得窮扶桑也路上見白躑躅盛開 以風勢之惡 枝蔓撲地 不能峻茂 又見沙石 爲風所驅 因其匯聚 自成水田樣 井井方方 溝洫分明 在在皆然 長淵金沙 素稱異觀 而恐不能如此 行五里到地境浦 冬雪未消 仍舍馬踏氷而渡 自臙脂小洞 至上角小白頭及臙脂峰 每挾其左而行 盡日與之相終

始到分水嶺 見定界碑 碑文曰 烏喇管穆克登 奉旨査邊 審視至此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云云 此是康凞壬辰五月所竪也 土門卽今荳滿江 而源流入泡石中 便成山陸 至四十餘里始乃湧出 嘗攷淸人方象瑛封長白山記曰 康凞以其發祥之地 下禮部議封爲長白山神享祀 如五岳焉 蓋淸之肇基 王跡始於天女之降於澤中云 白頭一名長白也 浦邊有木柵石墩卽同年八月 因朝令設築 以分南北者 洪相致中 以北評事董其役定界時 我國則要其竪碑於白頭之報恩水 山南屬我 山北屬彼 而奈其無厭之欲 必於地境浦上 勒分鴻溝之界因此我東疆土之蹙不知爲幾百里 且見碑末記蹟 則定界時 朝廷之差遣 不過象胥輩數人而已 一任克登之恣意所欲 經界 卽王政之大者 而廟堂之小於邊謨如此 良可慨惋

自定界碑 行二十里 山徑所舖 亦皆水泡石 而無一莖草 眞不毛之地也 乃登白頭之下角兩眼忽明 始俯見大澤之滉漾 神쌍(+)魂悸 殆不自定 繼登中角 眼界與下角同 而澤勢漸 始登上角 卽兵使峰也 乃見大澤全面 廣可三十里 長可四十里 而四山周廻則爲八十里云 然坐山脊 而俯瞰其廣 略約如此 若計以平陸之縱行 則其幅員又當如何 淼淼汪汪 一望無垠 殊令人目眩而心醉 雖廣陵觀濤 淅江乘潮 惟其意想之所不到未至若此之奇也

東有一峰 曰蛙喝峰 其形如鋸人之蹲坐睨視澤中者 然亦一奇賞 蓋白山外體卽重厚土山 而內體 卽石峰鑱刻接之以藻繢 四面如削堵包以大澤 東西南無空缺處 只北缺一罅 水由其中 洩注下絶壁 名曰天上水 仍北流爲黑龍江也 此是寧古塔近地 按淸一統志曰澤畔巨石 環列其中 一石尤嵬然 卽石獅子仰天吼 有雄視四海之象云

池光冉冉 堆如萬頃玻 而諸峰倒影 隨波宛轉 丹碧淪漪 卽一活畵也 又見一道雲氣 自澤中起若烟非烟 空濛不散 頃刻萬變 壁色五采 煥燁而大率赤色 勝酷似丹陽之舍人巖 而無形不具 有態皆成 裂如掀裙 累如浮圖 有方者圓者突者平者 離而相遇者 合而相分或猛獸奇鬼森然欲博 篔籜菡 挺然競秀者

又一峰突入澤中 褰若高竿 超然獨立 與兵使峰相對 稍迤而北有一峰 石勢四圍嶙簇列 如金剛之衆香城 綽約可愛時或微風鼓浪 則波聲沸騰 坎窾鐺 如奏景鐘泗磬 衆山皆響水色黝碧 奫然不見其底 其下必有神物之攸伏 雖靑天白日 陰森寒烈 不能久坐 蓋其奇崛卓犖 拔乎厚坤 不知爲幾千仞 則絶之頂 雖有涔蹄之涓滴 尙可拊掌 況此巨浸大陂 洋洋峻極于天造物者之費精流峙 亦覺神巧百變 而以坎井堪蛙之見 安得無茫然自失乎 曾聞耽羅漢拏之上 亦有白鹿潭 而於此有望洋之羨云

山顚全是水泡石 遠望 白鑒如雪故 所以有白頭之名 而雖五六月之盛暑 雪未盡消初秋新雪又降 新舊相繼 以此推之 尙有太始之雪也 余掬水而飮之 爽肺如汲沆瀣 北望胡山 出沒雲間 衝然角列 勢如波浪 若有眼力 則可以北窮燕碣 南窮荊楚 西見小白頭如橫几案 而山上有一石斗 起名曰籠巖 臙脂寶多 列如兒孫 荳滿鴨綠 橫以襟帶 茂山之甑峰 端川之圓山 曁六鎭諸山 若坯螻邱垤 皆在脚膝之底 是日也 天氣淸晶 無點風微靄縈靑繞白軒豁 呈露同遊中亦有屢上白頭者 而玆遊爲最勝云

嶽神之餉我 亦孔之厚矣 放杖披襟 飄飄乎御列子之風 而游群仙之圃 試看今日域中魚魚衆生 如吾輩之間趣者 爲幾人 隨意徜徉 不知日之將 但恨地是荒服騷人墨客不能到此 白頭諸峰 見漏於汝南之評 所謂兵使峰者名甚俗 昔北兵使 尹光莘登此峰 酒後拔劍起舞故 因以名之 土人至今傳說 今若一一品題 肇錫嘉名 則豈非零陵山水 被子厚而擅勝者耶 此則惟俟後世之君子矣

 

7. 대택(大澤)을 보고 다시 삼지(三池)에 도착했다가 갑산부치(甲山府治)로 돌아온 기록

 

신시(申時)에 연지동 30리로 돌아와 점심을 들고 천수 40리에서 유숙하다.

 

병자(丙子)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삼지참(三池站)을 지나 중지(中池)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잠시 쉬었다. 물속에 괴석(怪石)이 하나 있는데 깊은 골이 파였고 위와 아래에 구멍이 있어 매우 기이 하여 싣고 갔다.

못 가의 삼나무를 깎아 희게 만들고 그 곳에 나와 신생의 이름과 날짜를 썼다.

임수어(林水魚) 45리에서 점심을 들고 5리쯤 갔을 때 큰 비를 만났다. 초저녁에 자포수(自浦水) 45리 지점에 도착하여 유숙했다. 종자가 시내에서 낚시로 고기를 잡아왔는데 모양이 은구어(銀口魚)같았고 맛이 좋았다.

 

정축(丁丑) .

이른 새벽에 비를 맞으며 떠났다. 심포(深浦) 15리에서 점심을 들었다. 미시(未時)에 혜수령(惠水嶺)을 넘었으나 비가 그치지 않았다. 보다천(甫多川) 35리 지점 최씨 성을 가진 집에서 잠시 쉬었다.

 6. 7일동안 산행을 하는 동안 계속 무인지경(無人之境)을 헤매다가 오늘에야 처음 촌락과 초가집을 보니 사람마음이 즐거워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다. 이 어찌 ‘병주(幷州)가 고향 같다.‘ 고 함이 아니겠는가?

사인 김경록이 술과 떡을 가져와 일행이 모두 배부르게 먹었다.

날이 어두워 신동인보(新同仁堡)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무인(戊寅) 맑음.

혜산진(惠山鎭) 40리에서 점심을 들고 괘궁정(掛弓亭)에 올라 더위를 식힌 다음 진헌(鎭軒)에서 유숙했다.

 

기묘(己卯) .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아간령(阿間嶺)을 넘고, 구동인사(舊同仁社) 60리에서 말을 먹였다.

황혼 무렵에 부()로 돌아와 잘 집을 고쳤다.

이번 산행은 5일간 노숙하였고 가고 오는데 10일이 걸렸다. 가고 온 거리가 모두 740리였다.

! 내가 젊어서부터 산수를 좋아해서 경기지역의 이름난 산들은 나귀 한 마리와 밀랍 칠한 나막신을 신고 거의 편력했다.

또 동으로 금강산(金剛山)과 서로 아사달(阿斯達-묘향산?)과 남으로 속리산(俗理山)까지 4군의 명산과 큰 호수와 샘물, 숨어 있는 동리와 특이한 경승(景勝)들을 거의 편력하였으나 모두 백두산에 양보해야할 것이었다.

진실로 이 땅에 보내준 은혜를 입지 않았으면 어찌 숙석(夙昔)으로 원했던 일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주상께서 주신 것 아님이 없구나.

그러니 옛날 소동파(蘇東坡)가 말하기를 ‘남황(南荒-남쪽의 변방)에서 아홉 번 죽더라도 내가 여기서 놀면서 기절(奇絶)한 곳에서 평생을 보낸다 해도 한하지 않으리.’ 하였는데,

내가 이곳에서 또한 그러하다.

 

觀大澤重抵三池還甲山府治記

 

申時 還臙脂洞三十里 午炊 泉水四十里宿

丙子晴 昧爽發 歷三池站 到中池下馬少歇 見水中一怪石 嵌空有上下穴形甚奇仍載之而行 斫池邊杉木白而書余及申生姓名 與年月日 林水魚四十五里 午炊 行五里 遇大雨 薄暮扺自浦水四十五里宿 從者釣川魚以進 形如銀口魚 味甚佳

丁丑雨 黎明冒雨行 深浦十五里午炊 未時 踰惠水嶺 雨未晴 到甫多川三十五里暫息崔性人家 山行六七日 連涉無人之境 今日始見村落茅茨 人情懽喜 若返田里 此豈非視幷州如故鄕者耶 社人金慶祿 設酒餠而餉之 一行皆鮑 日晡到新同仁堡宿

戊寅晴 惠山鎭四十里午炊 登掛弓亭納凉 仍留宿鎭軒

己卯雨 黎明發 踰阿間嶺 舊同仁社六十里秣馬 黃昏還府治寓舍 是行也露宿爲五日 往返爲十日 程途合七百四十里

噫 余自少雅好山水 畿甸名嶽 匹驢蠟屐之跡 幾乎殆遍 又東至于金剛 西至于阿斯達南至于俗離 四郡名山 巨瀆潭壁泉 洞無不搜奇剔幽 而至於傑魁之勝 詭異之觀 皆遜於白頭 倘非恩譴之特玆土 何以諧夙昔尋眞之願耶無往非聖主賜 而蘇長公所謂九死南荒 吾不恨玆遊 奇絶冠平生者 余於此亦云

 

궁발(窮髮) : 북극(北極) 지방(地方)의 초목(草木)이 없는 땅, 장자 소요유(逍遙遊)에서 ‘북쪽 불모의 땅에 깊은 바다가 있는데 이를 천지(天池)라고 했다.(窮髮之北有冥海者 天池也)

 

황복(荒服) : (史記-흉노열전)에 나오는 것으로 지역을 말함. ...십여년이 흘러 무왕이(商의)주왕을 정벌하고 낙읍을 만들었으며, 다시 풍호의 땅으로 되돌아 와서 융이를 경수와 낙수이북으로 쫓아내니, (융이들이)이때부터 들어와 조공을 하였으며,(그들이사는 지역을 명하여부르기를)황복이라고 했다.

(... 後十有餘年武王伐紂而營 復居于 酆酆 放逐戎夷 겨 洛之北 以時入貢 命曰 「荒服」)

 

상서배(象胥輩) : 역관(譯官)의 무리

 

() : 거리를 재는 단위(單位)의 하나. 주척(周尺)으로 여섯 자, (), 거리를 발걸음으로 재는 단위(單位). 한 발짝 뛰어 놓을 때 발과 발 사이를 말함.

 

왕자유(王子猷) : 왕자유(王子猷)는 동진(東晋)사람이다. 그는 산음(山陰)에 살고 친구인 대안도(戴安道)는 섬계(剡溪)에 살았는데, 눈이 내린 밤에 왕자유가 술이 거나하여 배를 타고 섬계(剡溪)를 거슬러 올라 대안도의 집 문 앞에 이르러서는, 그냥 도로 돌아서므로, 그 이유를 묻자, “내가 처음에 흥이 나서 찾아왔는데, 이제 흥이 식었기에 도로 돌아간다.” 하였다.

설중유객휴회도(雪中有客休回棹)

 

황예(荒裔) : 멀리 떨어진 지방(地方). 먼 외국(外國)

유뷰옹약(有孚顒若) : 주역의 풍지관(風地觀)괘에서

문왕은 “觀 盥而不遷 有孚 顒若(觀은 세수를 하고 제사 올리기 직전이듯이 하면 믿음을 두어 우러르리라)”라고 하였다

 

슬해(瑟海) : 조선과 왜의 중요한 두 해로중 하나인 북방해로인 육오주(陸奧州)-슬해(瑟海)해로를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동해를 가리키는 듯 함.

 

역공지후(亦孔之厚) : 詩經 大雅 生民之什에서

豈弟君子, 來游來歌, 以矢其音. 伴奐爾游矣, 優游爾休矣. 豈弟君子, 俾爾彌爾性, 似先公酋矣. 爾土宇, 亦孔之厚. 豈弟君子, 俾爾彌爾性, 百神爾主矣. 爾受命長矣, 茀祿爾康矣. 豈弟君子, 俾爾彌爾性, 爾常矣...

 

아사달(阿斯達) : 개천(開天) 1565, 무진(戊辰) 원년: 상월 3(B.C 2333), 조선제국(朝鮮帝國)의 시조 단군성조(檀君聖祖) 5(五加)의 장관들과 800여명의 측근들을 데리고 와서 밝은 땅(檀木) 아사달(阿斯達)에 자리잡고 삼신(三神)께 제사한 후, 하늘의 뜻을 받들어 새나라가 열리었음을 만방에 선포하였다. 묘향산을 말한다.                  譯 : 春江 徐廷建

 


 

 소재(篠齋) 서기수(徐淇修): 1771(영조 47)1834(순조 34)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비연(斐然), 호는 소재(篠齋)며 황주목사 명민(命敏)의 아들이고, 황주목사 종벽(宗璧)의 손자다.

어머니는 온양정씨(溫陽鄭氏)로 이조판서 창유(昌兪)의 딸이다.

1792(정조 16) 사마시에  합격하고, 1801(순조1) 증광시(增廣試)에 갑과 (甲科)3등으로 합격하여  한림원기거주(翰林苑起居注)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정치적 모함으로 함경도 갑산(甲山)에 유배되었다.

5년에 걸친 유배생활 동안 오직 독서에 전념하였으며, 자신이 거처하는 방을 ‘목석거(木石居)’라 부르고 일체 세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유배에서 풀려나자 친지들과 함께 백두산을 유람한 뒤 그때의 기행문으로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를 썼다.

1825년 세자시강원문학,  1830년 성균관대사성,  1831년 이조참의,

1832 년 공조참판, 1833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후에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청빈한 생활에 자족하며 시작에 많은 정열을 쏟았다.

특히, 사영운(謝靈運)·맹호연(孟浩然)·두보(杜甫)를 흠모하였으며, 대체로 자연을 대상으로 한 산수시를 많이 썼다.

저서로는 《소재유고》 4권이 있다.


 

소재집(篠齋集): 조선 후기의 문신 서기수(徐淇修)의 시문집.

4권 4책. 필사본.

서문과 발문이 없어 문집이 출간된 경위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책은 사후의 일을 나타내는 부록 또는 행장이 없고, 다만 저자의 자기 소개인 자표(自表)만이 수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저자 생전에 편집,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 도서 등에 있다.

권1ㆍ2에 시 356수,

 

권3에 소차(疏箚) 9편,

서(序) 3편,

기(記) 3편,

제발(題跋) 1편,

상량문 2편,

교서 1편,

 

권4에 술몽(述夢) 1편,

제문 15편,

명(銘) 2편,

묘지 3편,

광지(壙誌) 4편,

행장 2편,

자표(自表)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낭만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으며, 자연을 주제로 한 산수시(山水詩)가 많다. 또한, 재해를 당한 백성들의 곤궁에 대한 동정,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는 사대부로서의 우국충정을 표현한 시들도 상당수 있다. 특히, 시어를 다듬고 표현 기교를 발휘하는 데 힘을 기울인 흔적이 보인다.

 

서(序) 가운데 「팔장사열전서(八壯士列傳序)」는 병자호란으로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을 때 그를 호위하였던 8장사의 전기에 관한 서문으로 주목된다.

 

기(記) 가운데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는 그가 갑산(甲山)으로 유배된 뒤 풀려나 백두산을 유람한 과정과 감상을 담은 기행문이다. 갑산­운총보(雲寵堡)­오시천(烏時川)­신동인보(新同仁堡)­혜수령(惠水嶺)­자포수(自浦水)­허항령(虛項嶺)­삼지­연지봉(臙脂峰)­백두산 정상­대택(大澤)­삼지(三池)를 거쳐 갑산으로 돌아오는 사이에 대하게 된 웅대한 대자연의 변화무쌍하고 장엄한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각지의 지명 유래도 간결하게 소개되고 있다.

 

그밖에 권3에 수록된 소차는 대부분 사직소로 정치적 식견과 당시 그가 처해 있던 정국의 동향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글들이다.

 

권4의 「술몽」은 꿈속에서 어느 도사가 천인성명(天人性命)으로부터 역대의 치란(治亂)과 득실(得失)에 이르기까지 한 이야기를 기술한 것으로 특이한 내용이다.

 

행장은 저자의 작은 형 노수(潞修)와 큰 형 낙수(洛修)에 대한 것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옛산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선비의 산수기행  (0) 2017.06.06
서명응의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   (0) 2017.06.06
금강산화첩 - 김홍도  (0) 2017.06.06
金剛山 紀行 - 南孝溫  (0) 2017.06.06
遊金剛山記 - 이정구  (0) 2017.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