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6. 09:17ㆍ한국의 글,그림,사람
삼소굴 三笑窟 과 경봉스님의 글씨
삼소굴(三笑窟) 유래
지리산중 깊숙이 자리한 암자 중에서 도솔암 만큼 깊으면서도 밝고도 시야가 시원한 곳은 더물다.
도솔암 요사채에 눈길을 끄는 편액이 있으니 삼소굴(三笑窟)이 그것이다.
*도솔암 삼소굴
도솔암 전문 산꾼인 <산용호>님의 확인에 의하면, 삼소굴 편액은 현재 도솔암에서 수행중인 정견스님의 스승이자 조계종의 선맥을 이어온 대표적인 선승이자 제 10대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신 바 있는 혜암스님(慧菴; 1920~2001)께서 도솔암에서 수행하던 중 도솔암 편액과 더불어 삼소굴 편액을 달아 놓은 것이다.
달필은 아니지만 평생 하루에 한 번만 먹지 않는 자세로 수행에 정신한 혜암스님의 정진을 엿보게 한다.
그런데, 이 삼소굴이라는 이름은 혜암스님의 스승이었던 경봉스님의 수행처에서 따온 이름이다.
경봉스님(1892~1982)
법호는 경봉(鏡峰), 시호는 원광(圓光), 법명은 정석(靖錫)이다.
일제강점기때부터 통도사를 중심으로 한국불교계에 많은 업적을 남긴 대선사이다.
통도사 극락암에서 3년 장자불와(長座不臥) 수행을 거쳤으며, 오랫동안 참선 수행의 결과로 좌탈입망(坐脫入亡: 앉거나 선 자세로 열반하는 것)할 만큼 근대 대표적인 선승이었다.
경봉스님이 출가한 이후 줄곧 통도사 부속암자인 극락암의 선방에서 50여년 한결같이 머물며 수행하다가 좌탈입망한 곳이 바로 삼소굴이다.
*극락암 삼소굴
*극락암 삼소굴 편액(석재 서병오의 글씨)
삼소굴은 경봉스님이 붙인 이름인데 1920-30년대 서예대가로 이름을 떨쳤던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 1862~1935)의 글씨이며, 삼소굴 좌측의 선방에 걸린 경봉스님의 시호를 딴 원광재(圓光齋)도 석재의 글씨인데 석재가 경봉스님과 교유하며 글씨를 가르쳐주던 때 쓴 것으로 보인다.
(영남에서 주로 활동한 탓에 아쉽게도 지리산 자락에는 석재의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
*극락암 원광재
석재가 생전인 1920년대 극락암을 방문하여 선방에 경봉스님의 시호인 [원광제]를 써 주었다면 경봉스님이 서른 무렵에 벌써 원광이라는 시호를 사용하며 자신의 선방을 가질 만큼 대승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삼소굴에 대하여 경봉 스님은 “삼소의 ‘삼’은 우주의 극수인 3이요, ‘소’란 염주를 목에 걸어놓고 이리저리 찾다가 결국 목에 걸린 것을 발견하고는 허허 웃는 것”이라고 선문답 하듯 일러주었는데,
정확한 어원은 중국 동진시대(381년)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토종의 초조 헤원(慧遠)은 381년에 여산 돌림사를 창건하였다.
이후 그는 그림자는 산을 나서지 않고 발자취는 속세에 들이지 않는다(影不出山 足不出俗)라는 금율을 세워 30년간 산문을 나가지 않았다.
어느날 절을 찾은 당대에 이름난 전원시인인 유가(儒家)의 도연명과 도가(道家)의 육수정을 배웅하다 깊은 대화에 빠져 그만 동림정사 아래에 있는 계곡인 호계를 건너 산문을 넘고 말았다. 이를 경계하던 절간 호랑이의 표효에 뒤늦게 깨닫고 유불선의 세사람이 함께 웃었다는 옛 일화 호계삼소(虎溪三笑)에서 따온 이름이다.
*송나라 화가 석각(石恪)이 그린 호계삼소도(虎溪三笑圖).
경봉스님의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과 혜암스님의 지리산 도솔암 삼소굴 이외에도 우리나라에 삼소굴 혹은 삼소당의 선방이 몇 있는데, 이와 같은 일화에서 알 수 있듯 혜원스님처럼 수도증진하겠다는 의미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지리산에 남긴 경봉스님의 글씨
통상 동양화에서 시(詩), 서(書), 화(畵)의 세가지 모두 높은 경지를 이루었을 때 삼절(三絶)이라 부르는데, 스님은 여기에 차(茶)와 선(禪)을 더하여 오절(五絶)을 갖춘 대선사(大禪師)로 불린 만큼 선승다운 선필(禪筆)을 날렸다.
도솔암에 삼소굴을 짓고 수행했던 혜암스님 덕분인지 도솔암 주변 중부칠암자인 상무주암과 문수암에 선의 기운이 그윽한 경봉스님의 글씨가 걸려 있다.
*상무주암 편액
편액의 왼쪽 관지에 [圓光]이라는 수결과 [鏡峰]이라는 낙관이 있어 경봉스님의 글씨임을 알려 주고 있다.
*문수암 편액
이 외에도 지리산 대원사에도 경봉스님의 글씨 두점이 있다.
*대원사 출입문에 해당되는 봉상루에 걸린 [方丈山大原寺] 편액. 중후한 필획의 해서체
*대원사 [梵鍾閣] 편액. 선필 행서체
모두 [鏡峰]이라는 수결이 보인다.
경봉스님의 수행처 삼소굴에 있는 경봉스님의 글씨
사찰의 풍수적 경치로 치자면 우리나라 몇 손가락에 꼽을 만큼 멋진 통도사 극락암에도 경봉스님이 50여년 머물며 수행한 만큼 주변 경치 못지 않게 경봉스님의 글씨를 둘러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경봉스님의 거처인 삼소굴 편액은 석재의 글씨이지만, 나란히 걸려 있는 [方丈]은 경봉스님 글씨이다.
*극락암의 茹茹門(여여문) 편액
*극락암의 正受寶閣(정수보각) 편액
불국사에 있는 경봉스님 글씨
경봉스님의 글씨는 대선사 답게 불국사에서도 만날 수 있다.
*불국사 안양문과 安養門 편액
*불국사 無說殿 편액
낙산사에 있는 경봉스님 글씨
멀리 강원도 양양 낙산사에도 경봉스님의 글씨가 있다.
*낙산사 圓通寶殿(원통보전) 편액
원본은 2005년 낙산사 대화재때 원통보전 불전과 함께 소실되었으나 복구하면서 편액은 복각하여 경봉스님의 선필의 글맛을 그대로 살려 달아 놓았다.
*낙산사 紅蓮庵(홍련암) 편액
2005년 화재때 조금 떨어져 있는 홍련암에까지 불길이 닿지 않아 다행히 편액도 보존할 수 있었다.
이밖에 경봉스님 글씨는 여수 항일암의 靈龜庵(영구암), 강원도 월정사 正法寶閣(정법보각), 양산 비로암에 關山聽水(관산청수), 남해 용문사 백련암(白蓮庵)등이 있다.
삼소굴일지
우리 같은 필부에게 경봉스님이 한국 현대불교에 끼친 공헌이나 참선의 경지는 세세히 알 길은 없지만, 경봉스님이 18세부터 85살까지 67년간 매일 일기를 썼으며 일기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한국불교의 근현대사가 담겨 있는 [삼소굴일지]를 남긴 것만으로도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깊은 지리산 자락에 까지 남긴 경봉스님의 글씨를 음미하면서 [삼소굴일지] 중에서 감명 깊은 한대목을 인용해본다.
입적 14년전 자신의 수의를 만드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 심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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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사는 제자 이대각심이 작년에 내 수의를 지으라고 옷감을 마련해 비구니, 사미니에게 주었는데
이달이 음력 윤달이라고 해서 오늘 내 수의를 짓기 위해 보살들과 비구니들이 모여와서 옷을 지었다.
의복이라도 수의라고 하니 대중들의 마음도 이상하게 씁쓸한 감이 든다 하고
나도 생각에 본래 거래생멸(去來生滅)이 없다고는 하지만 세상 인연이 다해가는 모양이니 무상의 감이 더욱 느껴진다.
금년 병오년에서 무진년을 계산하면 39년간인데 그 동안 내가 받은 부고가 무려 640여 명이구나….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한번 가고는 소식이 없구나.
옛 부처도 이렇게 가고 지금 부처도 이렇게 가니 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
청산은 우뚝 섰고 녹수는 흘러가네.
어떤 것이 그르며 어떤 것이 옳은가.
쯧쯧쯧….
야밤 삼경에 촛불 춤을 볼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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