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교 이광사의 글씨

2017. 6. 6. 09:15한국의 글,그림,사람

비운의 명필 원교 이광사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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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교 이광사 (圓嶠 李匡師 1705~1777)

호를 원교(圓嶠)라 했고 본관은 전주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글씨의 명가여서 종고조부에서부터 부친까지 모두 명필이었다.

원교는 인품도 높았고 양명학을 받아들인 학자였으며 또 명필로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1755년 전라도 나주에서 불온한 글을 벽에다 쓴 이른바 나주벽서사건이 일어나 큰아버지가 처형될 때 원교도 이 시건에 연좌되어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되었다.

원교는 의금부에 끌려왔을 때 하늘에 대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내게 뛰어난 글씨 재주가 있으니 내 목숨을 버리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부르짖어 영조대왕이 이를 가긍히 여겨 죽이지는 않고 귀양 보냈다고 한다.

 

이리하여 원교가 회령으로 귀양가자 30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유배지까지 따라왔다. 원교의 인품과 학식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것을 문제삼아 원교를 다시 전라도 완도에 있는 신지도로 이배시켰고, 원교는 그기에서 22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유홍준의 [완당평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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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교는 조선시대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뜻을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죄 없이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비운의 명필이었다.

원교가 전라도 신지도에 유배되어 있는 22년 동안 그의 글씨를 받기 위하여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하는데, 그렇다 보니 호남 지방의 사찰에 그의 글씨가 많아 남아 있다.

 

 

지리산 천은사에 있는 원교의 글씨

 

 

그 종에서도 지리산 천은사에 걸작이 걸려 있으니 바로 천은사 일주문의 [智異山泉隱寺] 편액이다.

 

 1 지리산천은사편액.JPG

*[智異山泉隱寺(지리산천은사) 편액

좌측 아래 [圓嶠]라는 방인 도서가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단유(袒裕)선사가 중창할 때 원교의 글씨를 받아 걸어 놓은 것이라 한다.

 

 

이 편액 글씨와 관련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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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는 823년 인도 승려인 덕운선사가 감로사라는 이름으로 찬건한 절이었다.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물이 있어 감로사라 했는데, 이 물을 마시면 흐렸던 정신도 맑아진다 해서 많은 스님들이 몰려들어 한때는 천명이 넘는 스님이 지내기도 했으며, 고려 충렬왕때에는 남방제일선찰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중건할 때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기에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 하여 천은사라고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름을 바꾼 뒤부터 원인 모를 화재가 잦고, 재화가 끊이지 않았다. 주민들도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는 뱀을 죽였기 때문이라며 두려워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의 4대명필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가 [지리산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는 듯한 체로 써서 걸었더니 이후로는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지리산자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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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은사 감로수.JPG

*천은사 감로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샘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주문을 지나 수홍로를 지나면 감로수라는 새로 조성한 샘이 있다.

 

 

천은사에는 일주문 편액 이외에 원교의 글씨가 두점 더 있고, 원교의 바로 다음 세대에 필명을 날린 창암 이삼만과 근세의 영재 송태회 등 호남의 명필들의 향기가 그윽하다.

 

 

3 천은사 극락보전 편액.JPG

*[極樂寶殿(극락보전)] 편액

(원교[圓嶠]라는 양각의 도서가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1773년 천은사의 대화재 이후 혜암(慧庵)선사가 중수 하던 1774년경에 쓴 것으로 보인다.

 

4 천은사 명부전 편액.JPG

*[冥府殿(명부전)] 편액

역시 [圓嶠]라는 방인 도서가 있다. 꾸미지 않고 일필에 휘호한 듯 쓴 글씨로 원교 특유의 맛이 살아 있다.

 

 

 

천은사 관람료 징수하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천은사는 주차장에서 한걸음에 달려 돌아볼 수 있는 위치에 있으므로 잠시 들러 명필들의 편액을 달고 있는 전은사 전각들을 감상한다면 관람료 이상으로 얻고 나올 것이다.

 

 

 

 

천은사 일주문에 걸려 있는 글씨 못지 않은 원교의 걸작들이 걸려 있는 사찰들이 호남 지방에 많다.

 

 

전남 해남 대흥사에 있는 원교의 글씨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유품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로서 한국 불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서산종(西山宗)의 본산으로 명망 있는 선사들을 많이 배출 한 만큼 당대 명필들의 편액들이 다투어 전각을 장식해왔다.

 

당대 4대 명필로 이름을 날린 원교의 글씨도 당연히 걸리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추사-원교 간에 유명한 일화를 남긴 [大雄寶殿(대웅보전)] 편액이다.

  

5 대흥사 대웅보전 편액.JPG

*원교의 대흥사 [大雄寶殿(대웅보전)]

통상은 왼쪽 하단에 낙관으로 도서를 찍는데 특이하게도 오른쪽 하단에 [원교]라는 도서가 있는 원교 특유의 행서이다.

 

 

8 대흥사 무량수각 편액.JPG

*대웅보전 옆 선방에 걸려 있는 추사의 [無量壽閣(무량수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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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교 못지 않게 당쟁의 그늘에 유배지를 전전해야 했던 경주 김씨 가문의 추사는 안동 김씨의 세도에 밀려 1840 55세의 나이에 제주도로 귀양을 떠나게 되었다.)

 

기약 없는 귀양살이를 떠난 완당(阮堂 ;추사 김정희의 또 다른 호)은 전주를 지나 해남 대둔사로 향했다. 유배길에서 초의선사를 만난 것은 그가 유배길에서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엷은 기쁨이었을 것이다.

완당은 이윽고 10리 숲길을 지나 대둔사에 당도했다. 누각 아래로는 냇물이 장히 흐르는데 그 위 현판을 보니 침계루(枕溪樓)라 씌어 있었다. 계곡을 베개로 한 누각! 이름 한번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현판이 조선의 글씨를 죄 망가뜨려놓은 장본인이니 원교 이광사의 글씨임을 알고 는 이내 심사가 뒤틀렸다.

침계루를 지나 절마당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니 [大雄寶殿(대웅보전)] 네 글자 또한 원교의 글씨였다. 사실 원교가 신지도에서 30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전라도의 절이란 절은 너나없이 원교의 글씨를 받아갔다. 그만큼 원교는 대중적 인기와 존경을 함께 받았다.

 

완당은 초의를 만나자 차를 나누며 기막힌 억울함과 아픔, 그리고 막막한 앞길에 대한 걱정을 하소연하였고, 초의는 부처님 말씀을 이끌어 유배가는 완당을 위로했다. 그런데 완당은 그 와중에도 초의에게 부탁 아닌 명령을 내렸다.

 

원교의 현판을 떼어 내리게!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것을 걸고 있는가!”

 

그리고 나서 완당은 지필묵을 가져오게 하고는 예의 힘차고 윤기나며 멋스러운 글씨로 [대웅보전] 네 글자를 써주며 이것을 나무에 새겨 걸라고 했다. 완당은 붓을 잡은 김에  차를 나누던 선방에 [無量壽閣(무량수각)]이라는 현판 횡액을 하나 더 써주었다.

초의는 항상 그랬듯이 말없이 이를 받아 완당이 부탁한 대로 [대웅보전]을 갈아달고 [무량수각]을 대웅전 곁에 있는 선방 벽에 걸었다고 한다.

 

원교의 [대웅보전]과 완당의 [무량수각] 두 글씨는 두 사람의 서예세계가 얼마나 달랐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무량수각]처럼 윤기나고 멋이 들어 있고 변화가 많은 글씨를 쓰는 사람은 [대웅보전]처럼 꿋꿋하고 획이 메마른 글씨를 좋아할 수 없는 법이다. 완당 자신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원교를 낮추어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완당은 제주도로 가서 9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내고 예순 넷의 나이에 방면되어 풀려나게 되었다. 그 사이 추사는 추사체(秋史體)라는 독특한 경지의 서체를 완성하게 되었으며 인간적으로 한층 완숙의 경지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추사가 제주도에서 풀려나 완도를 거쳐 해남에 당도하여 다시 초의선사를 만났다.

 

완당, 정말로 고생 많았소. 지난 10년의 세월이 완당에겐 너무도 가혹했고 무심했소.”

 

초의, 그렇지만은 않네. 이 몸, 제주도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네. 제주도에 유배되지 않았다면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볼 시간을 갖지 못했을 것일세. 사물과 치열하게 대결하며 현상을 열심히 좇다 보면 자신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쫓기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마는 법이라네. 제주도가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었으니 어디 그게 작은 것인가.”

 

어허, 완당이 성불하려나 보오. 어허허.”

 

여보게, 초의, 내가 지난번 제주에 가면서 떼어내라고 한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 혹시 지금도 있나?”

 

그거, 어딘가 헛간 구석에 있겠지. 나는 잘 버리지 않는 성미니까.”

 

여보게 초의, 그 현판을 다시 달고 내 글씨를 떼어내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네.”

 

그리하여 결국 그날 완당의 현판을 떼어내고 다시 원교의 현판을 걸어놓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대둔사 대웅보전엔 원교 이광사의 현판이 걸려 있다.

 

                                                                                   -유홍준의 [완당평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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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흥사 침계루 편액.JPG

*대흥사 대웅보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枕溪樓(침계루)] 편액 (행서)

 

이밖에도 대흥사에는 원교의 다른 편액 두편을 포함하여 명필의 경연장으로 불릴만큼 많은 멸필 편액들이 사찰의 품격을 한층 올리고 있다.

 

7 대흥사 천불전 편액.JPG

*대흥사 [千佛殿(천불전)] 편액

 

 

8 대흥사 해탈문 편액.jpg

*대흥사 [解脫門(해탈문)] 편액

거리낌없이 붓을 휘둘러 속박과  얽매임을 벗어버린 듯 초탈한 글씨의 행서이다.

해탈문 위에 걸려 있는 [頭輪山大興寺(두륜산대흥사]편액은 해사 김성근의 글씨다.

 

 

 

강진 백련사에 있는 원교의 글씨

 

 

9 백련사 대웅보전 편액.JPG

*백련사 [大雄寶殿(대웅보전)] 편액

이 편액은 전각의 결구 때문에 특이하게 세로 두 판으로 나누어 걸었다. 백련사는 1760년 대화재이후 주요 전각이 소실되었다고 하는데, 1762년 원교가 신지도에 유배 중에 쓴 글씨로 용사(龍蛇)가 얽힌 듯, 등나무 줄기가 설킨 듯 그의 시사를 여실히 드러내는 행서이다.

 

10 백련사 명부전 편액.jpg

*백련사 [冥府殿(명부전)] 편액 (해서체)

 

11 백련사 만경루 편액.JPG

*백련사 [萬景樓(만경루)] 편액

원교 특유의 행서체에서 보이는 꿈틀거리는 모습을 한 해서체로 기구한 삶과 세상 이님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는 글씨이다. 만경루 안에 걸려 있다.

 

 

 

고창 선운사에 있는 원교의 글씨

 

고창 선운사에는 볼거리가 동백과 꽃무릇 이외에도 추사의 백파선사비도 있으며, 원교의 글씨도 두점이 있다.

 

12 선운사 천왕문 편액.JPG

*선운사 [天王門(천왕문)] 편액

[李匡師印]이란 도서가 있는 행서이다.

 

 

13 선운사 정와 편액.jpg

*선운사 [정와(靜窩)] 편액

두인에 [원교] 관지에 [이광사인]이란 도서가 있는 행서이며 일탈미가 돗보이는 글씨이다.

요사에 걸려 있던 [靜窩(정와-조용하고 작은 집] 편액은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수장하고 있다.

시중에  기념품처럼 복제품이 많이 있는데 원교의 글씨를 모각한 것들이다.

 

 

부안 내소사에 있는 원교의 글씨

 

14 내소사 대웅보전 편액.jpg

*내소사 [大雄寶殿(대웅보전]] 편액

백련사 대웅보전 편액과도 통하는 글씨다.

 

15 내소사 설선당 편액.jpg

*내소사 [說禪堂(설선당)] 편액

요사에 걸려 있는 이 편액은 절해고도에서 온갖 회한을 툭툭 털어내고 쓴 듯한 행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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