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6. 09:19ㆍ한국의 글,그림,사람
쌍계사에 있는 추사의 작품
추사 글씨의 편액은 쌍계사 금당 구역에 본당으로 자리하고 있는 금당에 달려 있다.
*쌍계사 금당 좌우에 걸려 있는 육조정상탑과 세계일화조종육엽 편액이 추사의 글씨이다.
쌍계사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옛 절터로 추정되는 금당구역과 임진왜란 이후에 벽암각성 대사가 중창하면서 새롭게 자리 잡은 대웅전 구역이다.
금당은 대웅전 앞뜰이나 구층석탑에서 좌측으로 불일폭포 가는 길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돈오문(頓悟門) 앞에서 우측으로 꺾여 올라가는데 금당구역은 바로 돈오문 안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금당 구역 맨 위에 자리한 금당의 가운데 [金堂(금당)]이라는 편액이 있고 그 좌우에 각각 [六祖頂相塔((육조정상탑)과 [世界一花祖宗六葉(세계일화조종육엽)]의 두 편액이 추사의 글씨이다.
*금당 안에 있는 육조정상탑 (정상탑 아래에 육조 헤능의 두상이 봉안되어 있다 한다.)
六祖頂相塔 이란 달마대사로부터 시작되는 중국 선종의 6대조에 해당되는 혜능 선사의 頂相(두상)을 금당 안에 모시고 그 위에 세운 탑을 말한다.
(8세기 중국과 신라에 걸쳐 국제적으로 일어난 희대의 혜능조사 두상 절취 사건의 전말은 별도로 정리할 예정이다.)
世界一花祖宗六葉 이란 세계는 세계는 부처를 의미하고 일화는 불법의 세계를 뜻하며 6엽은 달마로부터 6조 혜능에 이르는 선종 여섯분의 조사를 의미하여 부처에서부터 6조 헤능에 이르기까지 선종의 역사를 뜻한다.
추사는 각 서체를 독창적으로 만들어 예술적 가치를 더 높였는데, 이 글씨는 해서(楷書體)를 기반으로 만든 추사체의 대표적인 글씨체이다.
그런데, 현재 걸려 있는 편액은 복각한 것이고 원본은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최완수 실장의 평으로는 현재 걸려 있는 편액이 복각하는 과정에서 ‘각법이 시원통치 않아 필력을 크게 손상시켜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성보박물관에 가 보면 편액을 유리틀 안에 눕혀 놓아 빛의 반사로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다.
필부의 눈으로 복각 과정의 미세한 흠은 구별할 수 없으니 현재 달려 있는 편액만으로도 힘이 넘치면서도 과하지 않는 추사의 필력을 감상하기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쌍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있는 [육조정상탑] 편액 원본
*쌍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세계일화조종육엽] 편액 원본
보존하느라 덧칠을 입혔는지 상태가 엉망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추사의 글씨가 쌍계사에 남아 있을까.
최완수 실장의 글을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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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글씨가 이곳에 걸려 있게 된 내력은 추사가 불교에 밝아 육조 대사의 정상이 이곳에 모셔져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추사 당시에 이곳에 만허(晩虛)라는 스님이 살고 있어 차를 잘 만들었기 때문에 그 차를 얻는 보답으로 이런 글씨를 서 보내 주었던 것 같다.
완당선생전집에 실린 [희증만허병서(戲贈晩虛幷序)]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만허는 쌍계사의 육조탑 아래에 주석하였는데 제다(제다)에 공고(공고)해서 차를 가지고 와 먹게 해 준다. 비록 용정의 두강이라도 이 보다 더 낫지는 않을 것이다. 향적세계의 부엌에도 이런 무상묘미(無上妙味)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종일구를 기증해 육조탑 앞에 차를 공양하게 했다.
그런데 어찌 다종만 기증하였겠는가. 차에 걸신들린 추사로서는 만허 스님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었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해서 추사가 심혈을 기울여 쓴 현판 글씨가 이곳에 걸려 육조정상탑의 탑전을 더욱 빛내게 되었을 것이다.
-최완수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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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액이 전해주는 일화를 통해서 추사와 불교와의 인연, 차와의 인연을 포함하여 품성을 짐작하게 한다.
추사의 생애를 간략하게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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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19세기 최고의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김정희는 추사체라는 고유명사로 불리는 최고의 글씨는 물론이고 세한도로 대표되는 그림과 시와 산문에 이르기까지 학자로서, 또는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다. 금석학 연구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겼으며 전각(篆刻) 또한 최고의 기술을 가져 천재 예술가로서 그의 이름을 능가할 인물은 거의 없다고 평가 받고 있다.
(출처; 네이버 캐스트에 있는 실학박물관 정성희 연구사)
1786년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노경(魯敬) 맏아들로 예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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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불교 문화를 꽃피운 신라시대부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는 동안 왕권에서는 통치이념이자 민중에게는 생활 신앙이었기에 불교의 문화는 그 시대의 정치적 정신적 역량을 총집결하여 이룩한 예술이다.
지리산이 품고 있는 사찰 문화를 통하여 우리나라 전체의 불교 문화를 들여다 보며
역으로, 전체의 불교 문화를 통하여 지리산 자락의 사찰 문화의 위상과 의미를 새겨볼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이자 서예를 한 차원 높은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추사가 지리산에 남긴 편액을 실마리 삼아 우리나라 사찰에 남겨진 추사의 명작들을 감상해 봄으로서 넓은 안목으로 쌍계사에 있는 추사의 작품을 친숙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경북 영천 은해사에 있는 추사의 작품
추사의 대표작들이 남아 있는 사찰 중에 하나가 팔공산 자락 영천 은해사이다.
은해사는 1847년 대화재 후 중건 불사를 하면서 중창주 스님과 추사와의 인연으로 제주도 유배에서 돌아온 추사가 써 주었는데 [大雄殿], [寶華樓], [佛光] 세 점의 추사 작품이 전한다.
*은해사 [대웅전] 편액
대웅전 편액에 대하여 최완수 실장과 유홍준 교수는 다음과 같은 감상기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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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익을 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 듯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둥글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을 부부려 놓은 듯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뗀 것 같 같은 기수(起收)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얼핏 결구에 무관심한 듯하지만 필획의 태세변화와 공간 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최완수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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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사에 있는 추사의 글씨들은 9년간의 제주도 유배생활을 통하여 온갖 신산을 겪으며 한결 무르익고 원만해진 추사의 솜씨와 인격이 그대로 드러나 차츰 노성함을 뛰어넘어 무심함의 경지로 다가가는 그런 글씨들인 것이다.
-유홍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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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쉽게도 더 이상 은해사 대웅전에서는 추사의 편액을 볼 수 없다.
추사의 편액이 걸려 있던 대웅전에는 아미타불을 보셨놓았기 때문에 최근에 아미타불을 모신 불전의 이름인 [극락보전]으로 바로 잡아 새 편액을 달아 놓고 추사의 대웅전 편액은 성보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하면서 주기적으로 공개하므로 은해사를 찾아 간다 해도 감상하기가 쉽지 않다. 횡포다.
*은해사 보화루 편액
은해사에 있는 추사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전각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은해사 [불광]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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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광 편액 또한 추사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60세 넘은 나이에 슨 필획에 힘이 있으면서도 한결 부드러운 완숙미가 묻어나는 작품이라는 평을 듣는 이 글씨에는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주지의 부탁으로 [불광]의 편액을 쓰기 위하여 당대 최고의 서예가 였던 추사였지만 한 점의 편액을 쓰기 위하여 백장이 넘는 파지를 남길 만큼 하나의 작품을 건지기 위해 수 많은 작업을 반복하여 만들어진 명작이다.
주지 스님이 추사의 [佛光] 글을 받아 편액을 만들려고 보니 갈등이 생겼다. [佛]자의 세로획 하나가 유별나게 길어 그대로 편액을 만들면 편액이 통상적인 모양이 안 될 것이고 거는데도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고민 끝에 [불]자의 세로로 긴 획을 [광]자의 세로 길이에 맞추어 잘라 버린 채 편액을 만들어 걸었다. 나중에 은해사를 방문한 추사가 그 편액을 보고 대노하여 마당에서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추사가 고심 끝에 내놓은 [불광] 작품의 핵심은 바로 [불]자의 긴 세로 획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전체 작품 구성이 빈 공간과 조화를 이뤄 멋진 작품이 된 것을 짤라 버려 망쳐 놓았으니 추사가 그냥 둘 리 없었다.
주지는 늦게야 이유를 알아 채고 추사에게 용서를 빌고 다시 글씨 원본 대로 판각을 해서 걸게 된 것이다.
-영남일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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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액 또한 성보박물관 안에 전시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은해사 부속 암자인 백흥암에도 [十笏方丈]을 비롯하여 주련을 비롯하여 몇점의 추사 작품이 걸려 있으나 아쉽게도 백흥암은 비구니암자로서 사월초파일에만 개방을 하여 감상이 불가하다.
전남 해남 대흥사에 있는 추사의 작품
추사의 작품이 남아 있는 곳으로 전남 해남의 대흥사를 빼 놓을 수 없다.
대흥사는 초의선사가 있던 곳으로 추사와 각별한 우정을 나눈 사이인지라 제주도 유배가면서 또한 돌아오면서 방문하여 머문 곳인데, 추사와 원교 이광사의 야사가 전하는 곳이기도 하다.
(원교 이광사와 얽인 야사는 원교 편에 논하기로 한다.)
*대흥사 무량수각 편액
원교와의 야사에 얽힌 편액인 [無量壽閣]은 추사가 제주도 유배 가는 길이 들러 대웅보전에 걸려 있던 원교의 글씨를 떼어 내게 하고 대신 써서 대웅보전 오른 쪽에 있는 선방에 걸려있는데, 유홍준 교수의 평에 의하면 ‘예서체에 멋을 한껏 넣었는데 획이 대단히 기름지고 유기가 난다.’
대흥사에 남겨진 추사의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글씨가 [茗禪]이다,.
*대흥사 [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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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선]은 초의선사가 보내준 차에 대한 보답으로 차광이던 추사가 초의선사의 호를 만들어 쓴 것인데, 혹자에 따라서는 추사의 대표작으로 꼽고, 혹자는 비록 대표작은 아니더라도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기지고 싶은 작품으로 손꼽는 작품이다.
중후하고 졸(拙=소박)한 멋의 [명선] 두 글자 양옆에 작고 가늘며 흐름이 경쾌한 행서가 치장되어있어 작품의 구성미도 가히 일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경지란 [茗禪]이 [茶禪一體(다선일체)]를 말하듯 서선일치(書禪一致)하고나 할까.
-유홍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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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 선운사에 있는 추사의 작품
추사가 사찰에 남긴 명필로서 선운사에 있는 [백파선사비문]을 빼 놓을 수 없다.
선운사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 숲 속 부도밭에 있는 이 비의 정확한 이름은 [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器大用之碑(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이다.
앞면에는 이와 같은 해서체의 비명이 있고 뒷면에는 그 뜻풀이를 유려한 행서체로 정중하면서 도도하게 써내려 갔다.
생전에 추사와 애증의 관계였던 백파선사가 입적하자 제자들이 추사에게 찾아와 비문을 부탁하여 써 준 것인데 추사 만년의 최고의 금석문이 되었다.
이 비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사와 백파선사 간의 오랜 애증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데 이곳에 남기기는 너무 장황하거니와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그만 둔다.
다만, 글씨의 내용은 몰라도 정연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필력이 살아 꿈틀거리는 듯 그림으로서 보는 눈만 있으면 감상할 수 있는 것인지라 비문 앞에 발길을 멈추고 한 시대 정신을 세우기 위하여 치열하게 살다 간 추사의 생애를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선운사 백파선사비문 (이 비는 실제의 비를 95%로 줄여 만든 복제품이며 원본은 박물관에 수장해 놓았다.)
*백파선사 비문 원본 탁본
추사의 백파선사비문의 글씨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하여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유홍준 교수의 감상기를 필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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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의 앞면에는 엄격한 규율을 느끼게 하는 방정한 해서체의 힘찬 필치로 비의 명칭을 써 놓았는데, 나는 세상 사람들이 추사체를 일러 ‘웅혼한 힘’을 보여준다고 표현한 것을 여기서 처음으로 실감하였다. 또 혹자가 말하기를 추사가 글씨를 쓸 때는 마치 ‘송곳으로 강판을 뚫는 힘’으로 붓끝을 강하게 내리꽂았다고 한 것도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뒷면에는 추사가 이 비문을 지으면서 왜 백파을 화엄종주하고 했고, 대율사라고 불렀으며 대기대용이라는 말을 꼭 써야 했는가를 풀이한 비문과 그 분의 삶을 기리는 명(銘)이 잔글씨로 새겨져 있다. 울림이 강하고 변화가 많은 추사체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 행서글씨는 추사 말년의 최고 명작으로 평가되는 금석문이다.
-유홍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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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봉은사에 있는 추사의 작품
서울에 거주한 다면 추사의 작품을 보기 위하여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강남 한가운데 있는 봉은사에 가면 추사의 말년 대작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작이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전에 써서 마지막 작품이 되었던 [板殿(판전)]이다.
*서울 봉은사 [판전]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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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은 병든 몸임에도 불구하고 글자 하나의 크기가 어릴애 몸통만한 대자로 판전 두 글자를 욕심없는 필치로 완성하였다. 그리고 옆에 낙관하기를 [七十一菓病中作(칠십일과병중작)] 즉, 71세 된 과천 사람이 병중에 쓰다라는 뜻으로 이 글씨가 결국 추사의 절필이다.
[板殿] 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졸)함이 극치에 달해 있다. 어린아이 글씨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바닥에 쓴 것 같기도 한데 졸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스럽게 살아 있다. 이쯤 되면 불계공졸도 뛰어넘은 경지라고나 할까. 아니면 극과 극은 만나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나로서는 감히 비평의 대상으로 삼을 수조차 없는 신령스런 작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홍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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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대웅전] 편액
봉은사 [大雄殿]에도 전형적인 추사체로 쓰고 추사의 또 다른 호인 [阮堂] 두인이 찍여 있어 추사의 말년작으로 본다. 진관사에 가면 모각하여 걸려 있다.
이 외에도 추사의 묵향을 음미해 보려면 예산의 추사 고택과 추사가 맒년을 보낸 경기도 과천에 있는 추사박물관을 방문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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