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되지 못한 남자 [의창군 이광]의 글씨

2017. 6. 6. 11:31한국의 글,그림,사람

왕이 되지 못한 남자의 글씨

 

 

영화 [왕이 된 남자, 광해]는 왕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과 당쟁으로 혼란이 극에 달한 조선의 광해군 8(1616) 시대를 역사적인 배경으로 광해, 도승지 허균과 가짜 광해를 주축으로 삼아 그럴 듯하게 꾸며낸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그런데 꾸며낸 이야기로 만들어진 영화 중에서 역사적 사실이 있다.

영화가 끝나기 직전 자막이 올라오면서 영화의 내용에 이어진 후일담을 알려주는데, [홍길동전]의 저자이기도 한 허균은 결국 1618년 역모죄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허균이 역모죄로 능지처참을 당할 때 이 사건에 연좌 되어 훈작을 삭탈 당하고 유배되었던 왕자가 있었으니 바로 선조의 8번째 서자였던 의창군 이광(義昌君 李珖)이다.

 

의창군의 부인이 허균의 형인 허성의 딸이라 연좌된 것인데, 근본적인 이유는 글씨에 능한 의창군이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아 힘겹게 왕권을 잡은 광해군이 의창군을 견제하고 싫어한 탓이다.

 

의창군은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 풀려나 종친의 어른으로서 인조의 총애를 받게 되며, 당대 명필이었던 의창군이 1636년 화엄사에 두점의 편액을 남기게 되는데, 화엄사 불이문의 [智異山華嚴寺] [大雄殿] 편액이다.

 

 

1 지리산화엄사 편액.JPG

*화엄사 불이문에 걸려 있는 지리산화엄사 편액

 

화엄사의 경내로 들어가는 불이문 안쪽에 달아 달아놓은 편액의 좌측에

[皇明崇禎九年歲舍丙子仲秋 義昌君 珖書(황명숭정구년세사병자 의창군 광서)] 관지가 있어

의창군 이광이 인조 4 1636년에 썼음을 보여준다.

 

 

사찰의 일주문에 사찰의 이름을 써놓은 사액(寺額)은 통상 횡으로 쓰는 것이 통례인데 아마도 문의 폭이 크지 않아 맞추기 위해 종으로 두자씩 쓴 것으로 보인다.

 

이와 유사한 형식의 편액이 지리산 가까운 순천 조계산선암사 편액이 있다.

 

2 조계산 선암사 편액.JPG

*순천 조계산선암사 편액 (18세기 작자 미상)

 

 

혹자는 화엄사에 있는 의창군 편액이 글 쓴이의 이름을 관지로 기록해 놓은 효시라고 전해지는데

그 이전 시대의 편액이 많이 남아 있지 않으니 확실하지는 않다.

 

 

3 화엄사 대웅전 편액.JPG  

*화엄사 대웅전 편액

 

불이문의 [지리산화엄사] 편액과 마찬가지로 화엄사 대웅전 편액에도 동일한 관지가 있어 같은 시기에 의창군이 쓴 것이다.

 

두 편액 모두 선조 시대 유행했던 단정한 한석봉체라고 하며, 결구와 필획이 아주 단정한 수작이다.

최완수 실장의 평에 의하면, ‘글씨는 힘찬 기세로 꽉 채운 결구인데 새롭게 기반을 다지고자 힘쓰던 당시의 감각을 엿보게 한다.’

 

우리나라에 이 밖에도 의창군의 편액으로 전하는 것이 몇 점 있는데,

전북 전주 송광사 대웅전 편액, 서울 조계사 대웅전 편액과 2012년 소실되기 전 정읍 내장사 대웅전 편액에 모두 [義昌君 珖書(의창군 광서)]라는 관지가 있어 의창군의 글씨임을 나타내고 있다.

 

*4 완주 송광사 대웅전 편액.JPG 

*완주 송광사 대웅전 편액

 

5 조계사 대웅전 편액.JPG

*서울 조계사 대웅전 편액

 

송광사의 경우 의창군이 글을 쓴 송광사 사적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때 소실된송광사를 벽암각성 대사가 중창하게 되었는데,

화엄사도 벽암각성 대사가 중창하면서 의창군의 편액을 구하여 달았듯 송광사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라 수긍할 수도 있겠지만

위의 두 사진에서 보듯 조계사나 송광사 대웅전의 편액을 비교해 보면 글씨과 관지의 위치나 내용이 똑 같다. 

 

그런데, 쌍계사 대웅전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많은 사찰 대웅전의 편액을 보면 화엄사 편액과 유산한 글씨체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많은 사찰에서 글씨가 좋은 화엄사 대웅전 편액의 글씨를 모범으로 삼아 모각하여 달아 놓은 것이며,

따라서, 화엄사 대웅전을 제외하고 조계사, 송광사, 내장사 편액을 비롯하여 의창군의 글씨라고 하는 모든 대웅전 편액은 화엄사 편액의 모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서울에서 떨어져 있는 구례 화엄사에 의창군의 편액이 걸리게 된 것일까.

 

부휴선수 대사의 제자로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참전하여 공을 세운 바 있는 벽암각성 대사가 법주사를 비롯하여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많은 사찰을 중창할 수 있었던 점을 미루어 대단했을 그의 사문의 정치적 역량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최완수 실장에 의하면, ‘왜란 이후 탐관오리와 양반들의 사찰에 폐해가 심했는데 억불체제 아래에서 왕실의 을 빌려 사격을 높이고 관리와 유생들의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밝히지 못한 점이 있는데 왜 [대웅전]이냐는 의문이다.

 

화엄사 대웅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셨는데, 비로자나불을 모신 불전의 편액은 대적광전이 되어야지 석가불을 모신 대웅전이 될 수는 없다.

자료를 찾아 보아도 뽀쪽한 설명이 없는데 의창군의 편액 명망 때문에 바로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