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6. 09:13ㆍ한국의 글,그림,사람
글씨로 가산을 탕진한 호남 명필 [창암 이삼만]의 글씨
화엄사, 쌍계사, 연곡사, 실상사 등과 같은 지리산 자락의 다른 사찰에는 고색창연한 신라시대 석조예술품들이 고찰의 풍미를 더해주고 있는 반면에 신라시대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천은사에는 어찌된 일인지 신라시대는 고사하고 고려시대 석물 한 점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조선조 명필들의 편액이 즐비하게 전각들을 장식하고 있어 주변 송림숲과 더불어 사찰의 품격을 깊게 해주고 있다.
천은사에는 앞서 살펴본 원교 이광사의 글씨 이외에 당대 호남 제일 명필 창암 이삼만의 글씨가 있으니 [普濟樓(보제루)]와 [會僧堂(회승당)]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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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 1770~1847)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원(允遠), 호는 창암(蒼巖). 전라북도 정읍 출생. 만년에는 전주에 살면서 완산(完山)이라고도 호를 썼다. 어린 시절에 당대의 명필이었던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웠는데, 글씨에 열중하여 포(布)를 누여가면서 연습하였다 한다.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으나 글씨에만 몰두하여 가산을 탕진하였고, 병중에도 하루 천자씩 쓰면서 “벼루 세 개를 먹으로 갈아 구멍을 내고야 말겠다.”고 맹세하였다 한다. 글씨 배우기를 청하면 점 하나 획 하나를 한달 씩 가르쳤다고 한다.
그의 글씨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우연히 전주에 온 부산상인의 장부를 쓰게 되었는데 그 상인이 귀향하여 감상가에게 보이게 된 것을 계기로 필명이 높아졌다고 한다.
오세창(吳世昌)은 “창암은 호남(湖南)에서 명필로 이름났으나 법이 모자랐다. 그러나 워낙 많이 썼으므로 필세는 건유(健愈)하다.”고 평하였다.
(일부의 설에 의하면 하동 칠불암(七佛庵)의 편액도 창암의 글씨라고 전하고 있으나, 현재 눈에 보이는 전각들에는 달려있지도 않을 뿐더러 한국전쟁때 소실된 칠불암에 창암의 글씨가 남아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특히, 초서를 잘 썼으며 그의 서체를 창암체라 하였다. 전라도 도처의 사찰에 그가 쓴 편액을 볼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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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에 있는 창암의 글씨
*천은사 보제루 현판
수홍루룰 지나 높은 계단을 오르면 만나는 보제루 우측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현판은 마당 쪽으로 달려 있다.
[甲辰冬 李三晩書(갑진동 이삼만서)]라는 관지가 있다.
1844년 창암이 세상 떠나기 3년 전인 74세때 쓴 해서체다.
*천은사 회승당 현판
보제루 계단에 앉아 마주 보이는 건물이 원교의 글씨가 달려 있는 [극락보전]이고 좌측에 보이는 건물이 [회승당]이다.
[李三晩]이라는 도서가 있다.
지리산에 각자로 남아 있는 창암의 글씨
창암이 지리산 자락에 남긴 글씨는 천은사 편액 이외에 또 있으니, 남원 주천 육모정 못 미처 길가 절벽에 세긴 각자 [龍湖石門(용호석문)]이다.
*용호석문 각자가 있는 석벽 (국립공원 구룡분소에서 육모정 방향으로 50미터 정도 올가가면 도로 좌측에 석벽이 있다.)
*용호석문 각자(석벽 우측에 있는 창암의 용호석문 각자)
구룡계곡 제2곡에 해당되는 용소로 가는 석문이라는 뜻인데 주천면에서 정령치 가는 지리산 횡단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국립공원 구룡분소가 나오고 약 50미터 더 진행하면 춘향묘 주차장 못미처 도로 좌측 석벽에 각자가 새겨져 있다.
용호석문 각자 좌측 석벽에 있는 [方丈第一洞川(방장제일동천)]은 창암의 글씨가 아니고, 그 좌측에 [金斗秀 八世 書]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룡계곡 [방장제일동천] 각자
곡성 태안사에 있는 창암의 글씨
지리산과 가까운 곡성 태안사에 가면 백장선사가 “강서(서당지장)의 법맥이 모두 동국으로 넘어가는구나!” 한탄했다는 서당의 제자 도의, 홍척, 혜철 중에서 태안사에서 구산선문 중 하나인 동리산문을 개창한 혜철의 부도와 부도비가 정의 뒤쪽 가장 높은 터에 자리잡고 있다.
이 유물들은 굽은 통나무를 아치형으로 배치한 꾀 운치 있는 배알문으로 들어서게 돼있는데 , 유물을 향해 자연스레 머리를 조아리고 들어오도록 낮게 만들어 졌다,.
이 배알문 편액이 창암의 글씨이다.
*태안사 배알문 편액
[李三晩]이라는 도서가 있다. 천은사에 있는 창암의 글씨와 달리 중후한 맛을 지니고 있는 해서체다.
전남 해남의 대흥사에 남아 있는 창암의 글씨
명필들의 경연장인 전남 해남의 대흥사에 어찌 창암의 글씨가 없겠는가.
*대흥사 가허루 편액
[李三晩]이라는 방인이 있다.
대흥사에 추사와 원교가 얽힌 이야기를 남긴 바 있는데, 그 일화와 연관된 또 다른 일화가 추사와 창암 사이에도 있었으니 사실감 넘치게 복원해 놓은 구수한 입담의 유홍준 교수의 글을 그대로 옮겨 창암을 비롯하여 당대 명필들의 애환스린 삶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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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추사의 또 다른 호)이 제주도로 유배 가는 길에 있었던 일로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능히 있을 법한 전설 두개가 전한다.
하나는 전주를 지날 때 그곳의 이름난 서가 창암 이삼만을 만난 얘기다. (또 다른 하나는 이미 옮긴 바 있는 원교 이광사와 얽힌 이야기이다.)
창암은 전형적인 시골의 서생으로 원교 필첩을 보고 열심히 글씨를 써 스스로 일가를 이룬, 요즘으로 치면 지방작가였다. 그의 예명은 비록 서울까지 올라가진 않았지만 호남에서는 확고부동한 것이어서 지리산 천은사의 [보제로]같은 현판도 썼고, 곡성 태안사의 혀쳘스님 부도로 오르는 계단의 작은 문 위에 [배알문] 같은 아담한 글씨를 남기기도 했다. 완당 나니 48세 때 쓴 정부인김씨 묘비의 뒷면은 바로 창암의 글씨였다.
창암의 글씨는 속칭 유수체(流水體)라 해서 그 유연성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흐름이 도도하지 못하여 영락없는 천진스러움의 진국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그가 쓴 붓을 보면 황모필(黃毛筆)도 못되고 개꼬리를 훑어내어 만든 것이라 그의 작품에는 먹물이 뚝뚝 떨어지는 부실한 것이 많았고, 도장은 돌도장은 고사하고 나무도장도 아닌 고구마도장을 마른 인주에 찍은 것이 많았다. 그래서 창암의 글씨는 아주 촌스러웠고 좋게 말해서 향색(鄕色)이 짙었다.
그런 창암이 불세출의 서가로 이미 청나라에서도 높은 이름을 얻고 있던 완당에게 글씨를 보여주며 평을 부탁한 것이다. 그때 창암은 완당보다 열여섯이 더 많은 71세의 노인이었다. 현장엔 그의 제자들이 쭉 배석했단다.
창암의 글씨를 보면서 완당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 세련된 모더니스트가 한점 거리낌도, 부끄러움도 없이 풍기는 촌티 앞에 당혹했을 희한한 광경을 나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완당의 눈에 이쯤 되면 촌티도 하나의 경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완당은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완당이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그리고는 무슨 모욕이나 당한 사람처럼 자리를 차고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자 창암의 제자들이 수모를 당한 스승을 대신하여 완당을 두들겨 팰 작정으로 몰려나가려고 하니 창암이 앞을 막으면서 말렸다고 한다. 그리고 완당이 삽짝을 닫고 나가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단다.
“저 사림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 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
(그 길로 추사는 제주도 유배길에 올라 9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제주도에 갇혀 있다가 64세가 되어
전주에 온 완당은 창암 이삼만을 찾았다. 제주로 내려가던 때 그의 글씨를 보고 모질게 비판한 것을 사죄하고 싶어서였다.
전주성에 들어서면서 완당은 먼저 창암의 집을 묻기 위해 어느 집에 들렀더니 그 집 주인 하는 말이 창암 선생은 이미 3년전인 1847년에 돌아가셨다며 무슨 일로 찾느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이에 완당이 앞뒤 예기를 늘어놓으니 주인은 자신이 바로 창암에게 글씨를 배운 제자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게 하였다. 저녁 후 주인은 완당에게 시키지도 않는 예기를 많이 늘어놓았다.
“그때 대감께서 평하고 돌아간 뒤 우리 선생은 대감을 좀 서운해 하면서 조선 붓의 거친 듯 천연스런 맛은 모른다고 하셨어요. 그런데도 대감의 말씀 준 이 말은 서가(書家)라면 반드시 새겨야 할 필결(筆訣-서법의 비결)이라며 제게 써주신 것이 있답니다.
주인은 문갑을 열고는 잘 접은 절첩(折帖)을 완당 앞에 펼쳐 보였다.
[書道以漢魏爲原 若專事晉家 恐或有取姸]]
[글씨는 한나라 위나라를 모범으로 삼아야지, 진나라를 따르면 아마 예뻐지기만 할까 두렵다.]
(이 말은 추사가 대흥사에서 원교 이광사를 혹독하게 비판한 이유이기도 한데, 진체(晉體)라고도 하는 왕희지의 글씨의 진본은 오래 전에 없어졌고 우리가 알고 있는 왕희지 법첩이란 판각에 판각을 거듭하면서 변질되어 사실상 다 가짜인데 원교는 이 가짜의 법첩에 의지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창암은 추사에게 모욕을 당했지만 추사의 지론을 받아들여 후학들에게 필결로 남긴 것이다.)
글을 다 읽고 난 완당은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런 순박하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분에게 내가 왜 그랬던가? 그때 왜 나는 창암은 창암대로, 원교는 원교대로 그들 나름의 한 생(生)이 있고, 그들 나름의 성취가 있었음을 몰랐을까? 내가 원교의 시절에 태어났으면 원교만한 글씨를 썼을 것이며, 창암 같은 처지에서 밖으로의 견문이 막혀 이는 사정이었다면 창암 이상의 글씨를 썼겠는가? 사실 원교가 왕희지를 따른 것 자체야 잘못이 없지 않은가? 세상이 의심하지 않는 왕희지를 어떻게 원교만이 평지돌출로 그것이 왕희지의 진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또 창암의 글씨에 배어 있는 향색(鄕色.향토색)은 그 나름의 미적 가치가 아니겠는가?
이날 밤 완당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누운 채로 가만히 눈을 떠보니 보름을 갓 지난 밝은 달빛이 창을 뚫고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완당은 문득 일어나 앉아 먹을 갈고 종이를 펴놓은 다음 한 호흡 고르고 붓을 들어 죽은 창암을 위해 묘비명을 썼다.
[명필 창암 완산이공삼만지묘(名筆 蒼巖 完山李公三晩之墓)]라는 묘표를 쓰고는 다음과 같은 묘문을 썼다고 한다.
‘여기 한 생을 글씨를 위해 살다 간 어질고 위대한 서가가 누워있으니, 후생들아 감히 이 무덤을 훼손하지 말지어다.’
그런데 또 일설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공는 필법이 뛰어난 우리 동방의 노익장으로, 신화화된 이름은 중국에까지 펴져 제자 수십 인이 항시 배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으며, 또한 그 제자 중엔 세상에 이름을 떨친 이가 많았다.’
아무리 봐도 먼저 글이 완당의 글답고 또 사리에 맞는다. 이튿날, 완당은 이 묘비문을 집주인에게 주고 한양으로 떠났다고 한다.
(현재 창암의 묘에는 추사가 써 주었다는 이 비문은 없다.)
-유홍준 교수의 [완당평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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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 편액 글씨는 이 밖에도
밀양 표충사 원통당, 공주 동학사 육화당, 금산 보석사 대웅전(어줍잖은 솜씨로 보수하느라 치졸하게 덧칠을 글씨를 해놓아 벼려 놓았다.)에 있으며,
광주 부용정, 대구 삼가헌, 곡성 함허정을 비롯하여 활동했던 전주를 중심으로 정자에도 많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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