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18. 09:11ㆍ한시
방속리산訪俗離山
조선朝鮮 김창흡金昌翕 (1653 ~ 1722)
강남유자부지환江南遊子不知還하고
고사추풍장구한古寺秋風杖屨閒이라
소별계룡여흥재笑別鷄龍餘興在한데
마전유유속리산馬前猶有俗離山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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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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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을 주유하는 나그네는 돌아갈 줄 모르고
옛 절에 가을바람 부니 발길이 한가롭네.
웃으며 계룡산을 떠난 흥취가 아직 남아있는데
말 앞엔 오히려 속리산이 다가와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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杖屨: ‘지팡이와 짚신 또는 이름난 사람이 머무른 자취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閒: ‘한가할 한’자로 ‘한가하다, 틈, 편안함’의 뜻으로 나그네의 마음이나 태도가 조급하거나 서두르는 기색이 없이 여유롭다는 의미이다.
鷄龍: 우리나라 4대 명산의 하나로 충청남도 공주시·계룡시·논산시와 대전광역시에 걸쳐 있는 높이 845m 계룡산을 가리킨다.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차령산맥 서남부에 있으며 금강에 의한 침식으로 이루어졌다. 산세가 험하며, 노성천·구곡천·갑천 등이 발원하여 금강으로 흘러든다. 주봉인 천황봉을 비롯하여 연천봉·삼불봉·관음봉·형제봉 등 20여 개의 봉우리들이 남북방향으로 이어지다가 동쪽으로 2줄기, 서쪽으로 1줄기를 뻗치고 있는데, 전체 모습이 닭 볏을 쓴 용과 같다고 하여 계룡산이라 했다. 경북 청도군 운문사의 강원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 수련 도량으로 손꼽히는 동학사東鶴寺와 하늘과 땅과 사람 가운데서 가장 으뜸가는 사찰이라는 갑사甲寺가 있다.
俗離山: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 사이에 있는 높이 1,057미터 산山을 가리킨다. 천황봉을 중심으로 관음봉·비로봉·경업대·문장대·입석대 등 해발 1,000m 내외의 산봉우리들이 있다. 그 중 문장대는 속리산의 빼어난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경승지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속리산 일대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8대 경승지의 한 곳으로 전해져 오는 곳으로 소백산맥의 명산으로 꼽히며, 제2금강 또는 소금강小金剛 등으로도 불린다. 호서지방 제일의 가람伽藍이라는 법주사法住寺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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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시인이 21세 때 계룡산을 떠나 속리산을 찾아가며 지어 그의 연작시聯作詩 <갈역잡영葛驛雜詠>에 담겨진 것이다. 기구起句와 승구承句에서 한강 남쪽으로 가을철 명승지 유람을 떠나 계룡산과 옛 절들을 유람하니, 집으로 돌아갈 생각 없이 도리어 발길이 한가롭다며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전구轉句와 결구結句는 아직도 계룡산의 흥취가 아직 남아있는데, 또 다시 말을 타고 한가로이 속리산으로 향하며 길을 나서기 좋아하는 시인의 마음을 그대로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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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보다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평생 여행을 즐겼던 김창흡金昌翕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자이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셋째 아들이다. 김창집과 김창협의 동생이기도 하다. 형 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부모의 명령으로 응시했고 현종 14년(167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김석주金錫胄의 추천으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나가지 않았고,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가 사약을 받고 죽자 은거했다. 1696년 서연관書筵官, 1721년 집의執義가 되었다. 이듬해 영조가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외딴 섬에 유배된 형 창집이 사약賜藥을 받고 죽자, 그도 지병持病이 악화되어 죽었다. 저서로 삼연집三淵集이 있다
[출처] 김창흡金昌翕의 방속리산訪俗離山 - 속리산을 찾아서|작성자 향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