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15. 17:59ㆍ한시
宿金壤縣(숙금양현) - 鷄林 高兆基(고조기)
금양현에 묵으며
鳥語霜林曉(조어상림효) : 서리 내린 새벽 숲에 새들 재잘거리고
風驚客榻眠(풍경객탑면) : 평상에서 잠자던 나그네 바람에 놀라네
簷殘半窺月(첨잔반규월) : 처마는 이그러져 달이 엿보는데
人在一涯天(인재일애천) : 이 몸은 아득히 떨어진 타향에 있네.
落葉埋歸路(낙엽매귀로) : 나뭇잎 떨어져 귀로에 쌓이고
寒枝罥宿烟(한지견숙연) : 차가운 가지에 안개 희끄므레 어렸네
江東行未盡(강동행미진) : 언제나 고향 강동에 돌아갈런지
秋盡水村邊(추진수촌변) : 강 마을 어귀에 가을이 저무네.
*人在(인재) : 이 글에서는 지은이 자신을 가르킴.
榻 걸상 탑, 簷 처마 첨, 窺 엿볼 규, 罥 얽을 견
고조기(高兆基)는 고려 초기 문인으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낸 분이다. 공은 고을나의 48세손이며, 고려 선종5년(1088)에 태어나 의종11년(1157)에 별세하였다. 초명(初名)은 唐兪(당유), 호는 鷄林(계림)이며, 諡號(시호)는 文敬(문경)이다. 성주(星主) 우복사(右僕射) 유(維)의 아들로 예종2년(1107)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남쪽 서방에 나가 고을을 다스릴 때는 청백리로 이름을 날리었고 많은 옛서적을 섭렵하고 역사를 연구하여 학문이 깊었다. 한 때는 탐라성주로 있다가 인종7년(1129) 시어사(侍御史)가 되어 조정의 기강을 세우는 데 진력하였다. 인종8년(1130년) 하절사(賀節使)로 금(金)나라에 다녀왔고, 이자겸(李資謙)의 무리들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공부원 외부(工部員外部)에 파천되었으나 얼마 후 옛자리에 온 후 조정의 잘못을 들어 상소를 거듭하므로 공을 예부낭중(禮部郞中)으로 올렸고 의종 3年(1149年) 정당문학참지사(政堂文學參知事)가 되었다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의 벼슬까지 올랐다.公은 고려 조정에 출사한 이래 칠순의 노령으로 퇴임할 때까지 오직 충절과 청백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충절을 조정에서 인정하여 별세 후에는 守司空上柱國(수사공상주국)이라는 칭호를 주어 그 직위를 높여 주기도 하였으며 시문(詩文)에 뛰어나 시집(詩集) 3권을 저술하였다.묘가 있는 곳은 제주시 아라동 제궁동산이다. 제주도내 분묘 가운데 양식과 형태가 가장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묘향은 북향이며, 경내에는 묘비와 상석·장군석·동자석·석등 등을 갖추고 주위를 담장으로 축조하였다. 매년 4월 9일에 묘제를 지내고 있다.(제주의 문화재 184쪽)이 묘는 제주도에서 묻힌 사람이 알려져 있는 가장 오래된 무덤으로 지방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묘는 사각뿔 모양을 하고 있으며 봉분 윗부분은 둥글게 마감되었다. 네 귀에는 돌이 박혀 있는데 이는 묘의 규모가 조성 당시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음을 알아 볼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묘의 앞면 중앙 하단에는 반원 모양의 석판이 박혀 있고 석판에는 둥근 문양이 새겨져 있다. 묘 주위에는 산담을 하지 않고 직육면체 모양의 돌기둥을 1∼2m의 간격을 두어 세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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