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31. 11:18ㆍ한시
護國의 歷史 한 자락에 숨쉬는 강화도(江華島)
인천광역시 강화군(江華郡)에 속한 섬으로 경기만 내의 한강 하구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5번째, 인천광역시에서는 제일 큰 섬이다. 강화군(江華郡)의 중심 섬이며, 주변에 약 15개의 섬들이 흩어져 있다. 원래는 3개의 섬이었으나, 간석지가 넓게 퍼지면서 연결된 것이다.
최고봉인 마니산(摩尼山 : 469m)을 비롯하여, 400m 내외의 산이 많으나 험준하지 않다. 저평한 충적지가 발달했으며, 남쪽 강화만으로는 넓은 간석지가 펼쳐져 있다. 기후는 대체로 한서의 차가 심하며, 비가 많다. 1월평균기온 -4.7℃ 내외, 8월평균기온 25℃ 내외, 연강수량 1,143㎜ 정도이다. 같은 위도의 내륙지방보다는 따뜻하여 난대성식물인 탕나무·동백나무 등이 자생한다. 강화읍을 중심으로 도로가 사방으로 나 있으며, 1970년에 강화대교(694m)가 건설되면서 육지와 연결되어 교통이 더욱 편리해졌다. 특히 곳곳에 역사적인 유물·유적이 많아 안보·사적관광지로도 손꼽힌다. 면적 293㎢, 해안선 길이 99km.
江華島를 江都 혹은 沁州( 심주)라고도 한다. 강화도는 우리 민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 온 참성단(塹城壇)이란 신성한 곳이다. 조선조 때의 문인 권필(權鞸;1569-1612)은 마니산(摩尼山)에 노닐면서 마니산의 신성한 풍경을(遊摩尼山用觀燈行韻)이란 시는
玉京去此不盈尺, 想聞仙佩鳴玲瓏.
옥경거차불영척, 상문선패명영롱.
琳宮駕虛鐵鳳騰, 萬壑嵐翠連觚稜.
림궁가허철봉등, 만학남취연고릉.
晩歸蒲團聞妙香, 客塵滅盡神魂凝.
만귀포단문묘향, 객진멸진신혼응.
山光雲影繞箱箔, 數聲蹄鳥留歸客.
산광운영요상박, 수성제조유귀객.
옥경(달)과 한 자도 떨어지지 않아
신선의 패옥 소리 영롱하게 울리는 듯해라.
범궁(절간)은 허공에 솟아 쇠 봉황이 튀어 오른 듯하고
일만 골짝의 남기(산기운)는 처마 모서리에 이어졌네.
저녁나절 돌아와 포단에 앉아 신묘한 향을 맡으매
객 살이 티끌은 다 없어지고 정신이 집중되는군.
산 빛과 구름 그림자는 바깥채 주렴에 감돌고
서너 곡조 새 울음은 길손의 발걸음을 머물게 하누나.
권필(權鞸)은 마니산(摩尼山) 천단에 올라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운자를 이용해(登麻尼山天壇用牧隱韻)지은 시는
分明日月臨玄圃, 浩蕩風煙沒白鷗.
분명일월임현포, 호탕풍연몰백구.
또렷하게 해와 달은 현포(천상의선경)에 임하였고,
넓게 깔린 아지랑이 속으로 흰 갈매기 잠기네.
穴口寺(혈구사)
고려 시대 강화도에 있던 사찰의 하나.
임자에 대일왕도량을 혈구사에 베풀고 을묘에 친히 행차하여 행향하였다. ; 壬子 設大日王道場于穴口寺 乙卯 親幸 行香 [고려사 권제26, 4장 앞쪽, 세가 26 원종 5.6]
대몽 抗爭(항쟁) 시기에 江華島로 이주한 지식인의 고뇌를 兪升旦(유승단:1169-1232)의 穴口寺가 있다. 이 시는 시간적 순차에 의해서 직선적으로 시인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地縮兼旬路 天低近尺隣
지축겸순로 천저근척린
雨宵猶見月 風晝不躋塵
우소유견월 풍주불제진
晦朔潮爲曆 寒暄草記辰
회삭조위력 한훤초기진
干戈看世事 堪差臥雲人
간과간세사 감차와운인
땅은 꾸불꾸불하여 열흘이나 걸리는 길이었고
하늘은 나직하여 바로 옆의 이웃이네
비오는 밤에도 달을 볼 수 있고
바람 부는 날에도 먼지는 일지 않네
그믐과 초하루는 조수가 책력이 되고
춥고 더움은 풀이 때를 알리네
세상사는 온통 전쟁뿐이니
구름 위에 누운 사람 몹시도 부럽다네
李是遠(이시원:1790-1866)은 조정대신을 각성시키고 百姓들을 독려하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프랑스 함대가 江華都城(강화도성)을 포격하고 관군들이 도망 친 뒤 祠堂(사당)에 하직하고 동생(李止遠)과 김포 우거에서 간수를 마시고 자결했다. 이시원(李是遠)은 자결의 결심을 ‘강도성이 함락된 후 짓다(江都城陷後作 강도성함후작)라는 시는
一死勝於百萬兵, 萊城倭慴宋公名.
일사승어백만병, 래성왜습송공명.
身爲厲鬼能殲賊, 莫道鴻毛七尺輕.
신위려귀능섬적, 막도홍모칠척경.
한 사람의 죽음이 백만 군사보다 나은 법
동래성에선 왜놈들이 송공(송상현:宋象賢)을 두려워하였지
몸이 여귀(귀신)가 되어 능히 적을 섬멸하리니
일곱 자 몸이 새털처럼 가볍다 말하지 말라.
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은 일본군이 성 안에 들어오자, 조복(朝服)으로 갈아 입고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한 다음, 가지고 있던 부채에 고향의 부모에게 보내는 유 시 한 수를 남겼다.
孤成月暈 大鎭不救
고성월훈 대진부구
君臣義重 父子恩輕
군신의중 부자은경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
진을 구할 길이 없사옵니다.
군신간의 의가 중하여 여기서 죽게 되니
부모님의 은혜를 소홀히 하는 불효를 용서하소서.
姜瑋(강위)는 李是遠(이시원)의 자결 소식을 듣고 울분과 欽慕(흠모)의 情을 嶺營城中聞番寇入沁李沙磯是院尙書遺疏仰藥卒(영영성중문번구입심이사기시원상서유소앙약졸)題目의 詩는
寰海奔波慕死生, 從臣蹈義自崢嶸.
환해분파모사생, 종신도의자쟁영. 환:기내 환 쟁:가파를 쟁
臨危摠任封疆責, 激世先輸殣國誠.
임위총임봉강책, 격세선수근국성. 근:굶어죽을 근
講到從容須定力, 偏因倉卒見生平.
강도종용수정력, 편인창졸견생평.
受知半世成遼闊, 謾倚誓風涕屢傾.
수지반세성요활, 만의서풍체루경. 만:속일 만
바다 섬에 파도 거칠 때 생사 도리 따르시어
왕가 출신 신하로서 의리 지켜 그 행적이 빛나시니.
국난에 임하여 국가 방어의 책임을 자임해서
세상을 분격시키고자 순국의 성심 다하셨네.
차분히 힘을 양성하라 늘 강론하시더니
이렇게 창졸간에 평소 의지를 보이셨도다.
일생가르침을 나는 못 지켜
서풍에 부질없이 눈물만 거듭 쏟노라.
江華島는 조선 후기에 인간 본연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강화학파가 배태된 곳이다. 鄭齊斗(정제두:1649-1736) 강학의 뜻을 ‘산 시내(山溪)라는 詩에
涓涓流出愛無情, 好看纖源一脈淸.
연연유출애무정, 호간섬원일맥청.
去會江湖千萬里, 洪波誰軾此中生.
거회강호천만리, 홍파수식차중생.
졸졸 흘러나오니 그 무심함이 사랑스럽구나,
작은 수원의 맥이 맑아서 보기 좋아라.
강과 호수를 만나며 천만 리를 가나니
큰 파도도 바로 이곳에서 생겨남을 그 누가 알랴.
歷盡千巖萬壑艱, 如何日夜負曾閑.
역진천암만학간, 여하일야부증한.
滔滔萬里奔歸意, 只在滄波大海間.
도도만리분귀의, 지재창파대해간.
험준한 천맘만학을 두루 거치다니
어찌하여 밤낮으로 한가하질 못하는가.
도도하게 만 리를 내달려 가는 뜻은
다만 대해의 창파를 목표하기 때문.
ꋮ崔奎瑞(최규서:1650-1735)는 소론의 정객이며 온건한 학자다. 하일리(霞逸里: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리(里)에 있으면서 ‘수운헌에 적다(題睡雲軒)라는 詩는
雲在峀, 捲復舒, 舒扶捲. 人在欄, 睡復醒, 醒復睡.
운재수, 권부서, 서부권. 인재란, 수부성, 성부수.
捲則睡, 人在峀, 雲在欄. 舒則醒, 人在欄, 雲在峀.
권칙수, 인재수, 운재란. 서칙성, 인재란, 운재수.
구름이 산굴에 있어 말았다간 펼치고 펼쳤다간 마누나
사람은 난간에 있어 졸다가는 깨고 깨었다간 자누나.
(구름이)말면 (사람은) 자니 사람은 산굴에 있고 구름은 난간에 있도다.
(구름이)펼치면 (사람은)깨니 사람은 난간에 있고 구름은 산굴에 있도다.
역사속의 강화도(江華島)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 병자조약)
조선 고종 13년(1876)에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위협하에서 조선의 신헌(申憲)·윤자승(尹滋承)과 일본의 구로다(黑田淸陸) 사이에 체결된 조약. 내용으로는 조선의 자주국 선언, 사절의 교환, 3개항(부산·인천·원산)개항, 영상재판권 인정 등인데, 이는 일본의 침략적 의도하에서 이루어진 불평등조약(不平等條約)으로 역사적 시련의 서곡이다
또 강화도(江華島)에는 많은 사람이 왔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곳이기도 하다
조선 제10대 왕 燕山君은. 폭정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나 폐위되고, 교동도에 유배되었다.
조선 25대 왕 哲宗은. 강화도에 유배되어 용흥궁 자리의 초가에서 살다가 즉위하였다.
병자호란 때 김상용(金尙鎔)은 강화산성이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병인양요 때, 양헌수(梁憲洙)는 프랑스군과 정족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장군.
이시원(李是遠) 전주 덕천군의 후예로서 자 자직(子直), 호는 사기(沙磯)이다.
1866년 프랑스 군인이 강화를 침략할때 유수 이하는 도망치고 숙중, 영조 두임금의 영정을 봉안한 궁전 다 적의 수중에 들어가 불타고 혹은 파괴된 것을 본 공이 78세의 고령으로 아우와 함께 약을 마시고 순절했다. 고종이 이 소식을 듣고 영의정을 추서하고 忠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수사(淨水寺)를 중건한 함허대사(涵虛大師)스님 등이다..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甲比古次)’였다. ‘갑비’는 고유어 ‘갑’을, 고차는 ‘곶, 곶이’를 표기한 것이다. 이러한 명칭은 현재 강화읍 소속의 갑곶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갑곶은 갑은 돌 위에 돌을 올려놓은 것을 ‘갑석(甲石)’, 두 배를 ‘갑절’, 겹창을 ‘갑창(甲窓)‘이라 하는 것처럼 둘(2)의 뜻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한강 하류의 조강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지점이 강화의 동북단에서 둘로 갈라져 강화의 북단과 강화ㆍ김포 사이의 염하로 나뉘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고차‘는 ’고즈, 고지‘로 변하여 곶이 된다. 곶(串)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해온 한자음으로 강, 바다로 돌출한 지역이나, 내륙에서 벌판을 향해 길게 뻗어나간 지형에서 온 지명형태소 이다. 즉 갑비고차란 현대어로는 ’갑곶, 갑곶이‘가 되며, 두 갈래로 갈라진 물(바다, 강)가에 있는 곶으로 된 고을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후대에 불려지는 혈구, 해구, 강화라는 지명은 둘로 갈라진다는 뜻이 사라지고 물과 관련되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서기 400 년 : 고구려 광개토왕시 혈구군(穴口郡)으로 호칭 하였고, 신라 경덕왕 때( 757년)에 신라가 점령하여 해구(海口)군, 원성왕 때(790년) 혈구진을 두어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고려 초에는 열구현(冽口縣)이라 하였다. 고종이 몽고 침입을 피해 이곳으로 와 도읍을 정하고 군으로 고쳐 호를 강도(江都)라 하였다 한다. 고려 태조23년(940년)에 비로소 강화로 개칭하고 현을 두었다. 이들 땅이름은 모두 한강 또는 하구 등의 지역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군사적 요충지인 만큼 성쌓기가 많았다. 그래서 성토 다지는 노래와 축성의 노래가 전한다.
성토 다지는 노래
어기어라 성토로다
성토지경 다져보세
고루고루 다져보세
이 자리에 성을 쌓아
오랑캐 침략 막아내고
삼천리 금수강산
우리 힘으로 지켜보세
세세연연 시화연풍
국태민안 하옵구나
(후렴)어기어라 성토로다
축성의 노래
어이어라 목도로다성돌이 무겁구나
조심조심 목도하세
서해바다 수평선에
오랑캐선 보기 전에
성을 쌓고 지켜보세
오랑캐선 들어오면
힘을 모아 쳐부수자
장가든지 삼일만에
성부역에 나갔는데
몇십살이 지났는지
아들놈이 찾아왔네
애비옷을 질머지고
찾아 와서 하는 말이
우리 아비 찾어주소
부자상봉 지켜보던
감독양반 하는 말이
눈시울이 적시면서
네 나이가 몇살이냐
아들놈이 한는 말이
익살 맞게 대답하되
내 나이는 이륙이오
부자상봉 지켜보매
묵도하던 인부들은
고향에 두고 나온
부모처자 생각나서
하던 일손 멈추고서
소리내여 통곡하네
어서 빨리 성을 쌓고
외적 침략 막아내여
금수강산 이룩하여
대대손손 물려주세
(후렴) 어이어라 목도로다
강화문화원(1973), 강화사.
정수사(淨水寺) 각시바위 전설
涵虛大師(함허대사)와 여인의 가슴앓인 사연이 깃든 정수사(淨水寺) 각시바위
(涵虛大師)(淨水寺)
강화도(江華島) 마니산 자락에 자리 잡은 정수사(淨水寺)는 함허대사(涵虛大師)가 수도하던 곳으로 절 앞쪽 바다에 여인의 모습을 닮은 바위가 있다.
정수사(淨水寺)에서 수도하던 함허대사(涵虛大師)는 훌륭한 스님이었지만 남편으로서는 매정한 사람이었나 보다. 옛날 함허대사(涵虛大師)가 정수사(淨水寺)에 머물 때의 일이다. 출가하기 전에 결혼을 했던 모양인데 그 아내가 멀리서 함허대사(涵虛大師)를 찾아 왔으나 대사는 부인을 만나지도 않고 훌쩍 떠나버렸다. 부인을 만나면 힘겹게 쌓아온 수도가 무너질지 모르니 야속하게 생각하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편지 한 장만을 남긴 채.
그러나 아내는 남편 만나기를 포기 할 수가 없었다. 간절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 삼키다가 어렵게 찾아온 사랑인데 어찌 편지 한 장에 발길을 돌릴 수 있었겠는가.
아내는 쓰러지고 또 쓰러지며 마니산 곳곳을 목이 터져라 남편을 부르면서 찾아 다녔다. 그때 함허대사(涵虛大師)는 함허동천(涵虛洞天) 계곡에 있었다. 세속의 번뇌를 벗고자 커다란 바위에 글을 새기고 있었다. ‘涵虛桐(함허동)’ 세 글자를 새겼을 때 그를 발견한 아내가 달려왔다.
그녀는 섧게 울며 남편을 불렀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 어찌 중생을 구제 할 수가 있겠느냐”며 그녀가 바라는 것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저 얼굴만 한번 마주칠 수 있다면, 따뜻한 눈빛으로 빙긋 웃어만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 쪽으로 얼굴 한번 돌리지 않았다. 온힘을 다해 마지막 한 글자를 새길 뿐이었다. 마침내 ‘涵虛洞天(함허동천)’이란 네 글자가 완성되고 글을 다 새긴 함허대사(涵虛大師)는 아내를 외면한 채 정수사(淨水寺)로 돌아와 좌선에 들어갔다.
잠긴 문밖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조용히 돌아서서 절을 떠나 정수사(淨水寺) 앞바다에 몸을 던졌다. 이승에서 맺은 인연, 저승에서나마 다시 잇겠다는 생각으로 목숨을 버린 것이다. 얼마 뒤 아내의 영혼이 바위가 되어 바다위로 솟아오르니 사람들은 이를 ‘각시바위’ 또는 ‘각시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정수사에서 노래함 -- 전동균 作
수국꽃잎은 푸름에서 붉음으로 건너가고
나는 서러운 서른에서
막막한 마흔으로 건너가는 중이다
문닫힌 삼성각
돌계단 위에서 바라보는 서해바다,
어느새 밀물 들어 출렁이는 저 바다에서
우리는 삼겹살을 구워 먹고
검은 진흙뻘 속에
손바닥만한 구멍이나 뚫으며 놀다 왔을 뿐이다
그러니, 정수사여
서답 빨래 널린 옛 절에도
해마다 수국꽃은 새로 피어나고
바람은 또 몸을 허물어
낮고 긴 풍경 소리, 풍경 소리 울리듯이
낮술 취한 나에게
나를 따라온 달랑게 같은 어린것들에게
저 크나큰 바다의 눈부신 물결 한자락 허락해다오
햇빛 속에서도 오돌오돌 떨고 있는
이 세상 모든 맨발들을
오늘 하룻밤, 이불처럼 덮어다오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세계사, 2002, p50~51
강화도 인조견과 여인들의 억센 삶
강화도와 직접 관련된 말은 '넉살 좋은 강화년' 또는 '넉 살 좋은 강화 연'이라는 말이다. 앞의 말은 '-광화년/광해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앞 속담의 와전인 듯하다. 뒷말이 먼저 생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강화문화원에서 펴낸 강화사에서는 앞의 말이 먼저이고 뒷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일반 사람들은 앞의 말을 더 많이 알고 있다. "넉살 좋은 강화년이라더니 옛말 그른 데가 하나도 없다니까!"(김문수, 끈)라는 소설 용례에서 보듯이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다. 이 속담은 체면도 염치도 모르는 여자를 조롱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그러나 실제 배경을 보면 이런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인 삶의 태도가 배여 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이 말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다만 인조견과 관련되어 생겼다는 것으로 보아 인조견이 생긴 뒤 일 것이다. 강화도에서 인조견을 언제부터 생산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일제 시대 이후로 유명해졌다. 구체적으로 1920년 전후 약 20년간 강화군민 대다수가 인조견 생산에 들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1920년대에 채록된 '강화 처녀민요'의 가사에는
함점면 큰애기 화문석 짜러 나간다.
옳다 그렇다 거짓말이 아니다.
양오리 화문석이 유명해서 그렇지
강화면 큰애기 직조짜기로 나간다.
옳다 그렇다 거짓말이 아니다.
강화 인조견이 유명해서 그렇지
인조견을 초기에는 강화 여인들이 직접 방문으로 팔았는데 이런 과정에서 강화 여인들의 장사 수완이 좋아 생긴 말이라고 한다. 물론 이 말의 배경에는 강화 여인들의 억센 삶의 역사가 깔려 있을 것이다. 갖은 외환과 군사 요충지로서의 터전, 바닷길의 중심지, 피난민이 많았던 곳이었으니 이곳 여인들이 헤쳐 나온 삶의 풍랑을 능히 짐작할 만하다.
전등사(傳燈寺)
전등사(傳燈寺) 그 이름에 대한 유래....
전등사(傳燈寺)가 이와 같은 이름을 얻게 된 유래는 고려 충렬왕8년(1282) 충렬왕의 왕비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를 시켜 송에서 들어온 대장경과 함께 옥등잔(전등(傳燈))시주하게 되면서 전등사(傳燈寺)로 절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여기에는 애절한 설화가 전한다.
때는 고려 제23대 고종 때 몽고 군대가 갑자기 침입해 오자 임금은 이를 피해 강화도로 향했고 한강을 따라 배를 타고 나아가는데, 강화도의 광성나루 가까이에 이르러 배가 심하게 춤을 추었다. 아무리 가도 계속 물살이 심하고 물결이 심하게 일어 배가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았고 임금은 새파랗게 얼굴이 질렸다. 그런데도 사공은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리저리 물길을 옮기며 배를 이리저리 저었다. 임금은 이것을 사공의 장난으로 여겨 이를 괘씸하게 생각, 사공의 목을 베도록 했다. 사공은 이때 배 안에 마련해 두었던 바가지를 바다에 띄우면서 "이 바가지를 따라가면 아무리 물살이 세어도 배가 뒤집히지 않을 것이니 그대로 하십시오" 하고는 칼을 받아 죽었다. 배는 사공의 말대로 하여 무사히 강화도에 닿게 되었다. 그제서야 임금은 사공 죽인 것을 크게 뉘우치고 그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것이 사공이 안전한 뱃길을 찾느라고 그랬던 것이다. 지금 김포군 대곶면 신안리 산9번지에 있는 묘는 사공이 묻힌 곳이라고 전한다. 그가 죽은 광성나루 앞 바닷목을 지나는 뱃사람들 중엔 안전 통과를 기원하며 그의 묘 앞에 먼저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결국 그 뱃사공 이름이 손돌(孫突)이어서 그 곳을 '손돌목'이라고 했다고 한다. 한자로는 손돌항(孫突項) 또는 손석항(孫石項)이라고 한다.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 20일이 되면, 해마다 센 바람이 부는데 이를 '손돌바람' 또 이 때 심한 추위를 손돌이 추위라고 한다. 경기 충청도 일대에서는 겨울에 모진 바람이 불면 '손돌이가 몹시 화났다'고 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은상님의 시가 있다.
원혼이 바람에 들어
이 바다에 떠돌면서
해마다 그날이 오면
분하여 운다하네
그 왕도 간지 오래니
잊어버리고 말려무나,
손돌이 어진 사공
제죽음 한함이라.
고국정한을 못풀어 웃는개다
일년도 삼백육십일
다불어도 남겠고나.
이 설화가 우리에게 던져 주는 의미가 크다. 피지배 계층의 목숨을 하찮게 여긴 지배 계층의 한 단면을 알 수 있고, 그래도 사공은 억울하게 죽어가면서까지 충성을 바친 순박했던 민초들의 묵직했던 삶도 읽을 수 있다. 아무리 거센 물결도 오랜 일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헤쳐나가는 어부의 슬기를 어찌 머리로 살아온 왕이 알 수 있었겠는가. 지금 우리 사회는 그때 그 모습과 어쩌면 똑 같을까.
전등사(傳燈寺) 은행나무의 전설
은행나무를 공손수(公孫樹) 행자목(杏子木)이라 하며 잎의 모양이 오리발을 닮았다 하여 압각수(鴨脚樹)라고도 한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전등사(傳燈寺)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노승나무, 동승나무라 부르기도 하고 암컷 수컷이라 하여 애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정성을 드리기도 하는 이 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 관하여 내려오는 한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 배불숭유의 정책으로 불교는 매우 탄압 받았다. 유생들 혹은 관원들이 마음만 먹으면 탄압을 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승려들은 이에 저항하지 않았다. 노예와 같이 부림을 당하여도 종교적 인내로 다 견디었던 것이다.
어느 날 전등사(傳燈寺)에 관가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아주 어려운 요구를 하였다.
절에 있는 은행나무의 은행이 열릴 쯤 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열매를 회수해 갔는데 이번에는 은행열매를 스무 가마니를 요구하였다. 그런데 그 은행나무에서 열리는 은행의 양은 열가마니 정도였다.
관가에서는 수확량의 두 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절의 한 동자승이 이 사실을 노승에게 알렸다.
그는 동자승에게 그들을 미워하지 말라 타일렀지만 곧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열가마니 이상 나오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한들 나라에 대한 반항이라며 탄압의 근거로 삼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저런 고민 끝에 노승은 백련사의 추송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추송스님은 도술이 뛰어나니 어떻게 해볼 수 있으시겠지.' 그는 동자승을 추송스님에게 보냈다. 동자승과 함께 도착한 추송스님은 은행나무가 더 열리게 하는 3일기도를 하기로 하고 곧 기도에 착수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모이고 군관도 찾아 왔다. 그리고는 불가능함을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그 직후 갑자기 멀쩡하던 군관의 눈이 맞은 듯 부어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3일째 되는 날 늦은 오후 은행나무에서 3일정성의 막바지에 다달아 염불소리가 멎었을 때 추송스님이 축원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축원의 내용은 두 그루 나무의 열매를 앞으로 맺지 않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뜻밖의 축원에 모인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축원이 끝나자 먹구름이 몰려와 뇌성과 함께 때아닌 비가 무섭게 내렸고 사람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렸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스님도 노승도 동자승 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말들 하였고 이후 전등사에 대한 탄압은 없어졌다 하였다.
전등사(傳燈寺)에는 지금도 그 은행나무만이 그 사연을 안은 채 서있다.
杏子木(행자목 은행나무)-康晳
막차를 기다리다
하늘을 본다.
그 사람이 나를 보고 있다.
노란 은행나무 아래서
하늘을 본다.
孫子 때에 結實을 하는 은행
열매를 땅에 묻어줘야
번식하는
생명력을 상실한 나무다.
떨어진 은행처럼
그 곳에 앉아
하늘을 본다
아직도 푸르름이 남아 있는 시월
愛殘한 非夢속에
미련(未練)한 흔적만 촉촉하다.
裸婦像 얽힌 哀切한 사랑의 전설
나부상(裸婦像) 전설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여자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다. 과거 전등사(傳燈寺) 대웅전을 만들던 도편수가 마을의 여인과 사랑을 나누다 정이 깊어졌고 공사가 끝나는 대로 함께 살기로 하고는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주었다. 하지만 여인은 공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도편수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도망을 갔다. 사랑도 잃고 돈도 잃은 도편수는 여자를 원망하며 대웅전 네 귀퉁이에 그 여인의 나체상(裸體像)을 조각해 넣어 무거운 지붕을 떠받들게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대웅전의 네 귀퉁이에는 울분을 참지 못한 목수는 그녀에 대한 사랑과 증오를 대웅전 추녀 밑에 그녀의 裸體像(나체상)을 만들어 그녀가 수백 년 동안이 추녀를 떠받치는 고통을 가지고 살도록 했다 고합니다.
지금도 전등사(傳燈寺)에는 나부상이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직접 보면 희극적인 느낌이 강해 도대체 여인이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사랑하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심정은 참으로 哀切(애절)한 사랑
안타깝다. 도편수의 애절했던 사랑에 너무 가슴이 아파온다. 언제고 시간이 다시 허락하는 날 다시 오고 싶다.
'한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鵲橋仙(작교선,烏鵲橋)의 사연들 (0) | 2012.12.31 |
---|---|
[스크랩] 驪州(여주)의 옛 숨결을 찾아 (0) | 2012.12.31 |
[스크랩] 조선시대 해어화(解語花)들의 애절한 노래. (0) | 2012.12.31 |
[스크랩] 枉尋里(왕십리) 미나리를 이항복은 귀양 가면서까지 (0) | 2012.12.31 |
[스크랩] 난세에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살다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0) | 2012.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