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枉尋里(왕십리) 미나리를 이항복은 귀양 가면서까지

2012. 12. 31. 11:15한시


왕십리는 미나리꽝이 많았다. 李恒福(이항복:1556-1618)은 광해군 때 북청으로 유배갔는데 제자 鄭忠信( 정충신)을 다시 보지 못하는 것과 미정의 물과 왕십리 미나리 김치를 다시 맛보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한다.

沈魯崇(심노숭:1762-1837)은 流配地(유배지)로 지인이 서울 미나리를 보내오자 감격하여


                     漢陽城東枉尋里, 家家門前種水芹.

                     한양성동왕심리, 가가문전종수근.


                     靑靑如茨復如蒲, 獨耐寒天白雪雰.

                     청청여자부여포, 독내한천백설분.


                     城裏朱門二月菹, ?芹如絲兼蘖?.

                     성리주문이월저, 연근여사겸얼훈.


                     分阮砂鐘鴨卵白, 盛來先令口流芬.

                     분원사종압란백, 성래선령구류분.


                     饌固爲美肴尤嘉, 絶勝雉?與羊?.

                     찬고위미효우가, 절승치니여양훈.


                     間以靑浦蕩平菜, 少麴新釀終日?.

                     간이청포탕평채, 소국신양종일훈.


                    又有別味號剛回, 熟芹生蔥各等分.

                    우유별미호강회, 숙근생총각등분.


                    回回束得拇指大. ?來魚?椒醬?.

                    회회속득무지대. 잡래어니초장온.


                    寸切油炒殘支茗, 且合春晝汨董?.

                    촌절유초잔지명, 차합춘주골동분.


                    千古豪興李白沙, 謫去高歌鐵嶺雲.

                    천고호흥이백사, 적거고가철령운.


                    此翁豈時飮食人, 尙憶京芹北海?.

                    차옹기시음식인, 상억경근북해분.


한양성 동쪽 왕십리에는 집집마다 문 앞에 미나리를 심는다.

푸릇푸릇 납가새도 같고 부들도 같은데

흰 눈 흩날리는 추운 겨울을 홀로 견뎌내네.

서울의 대갓집들 이월에 겉절이 만드니

가늘고 연한 미나리를 고춧가루로 버무려.

분원 사기종지와 오리 알처럼 하얀 그릇에

담아내 오면 입에 침이 먼저 돌 정도.

반찬으로도 좋고 술안주론 더욱 훌륭해서 껑젓 .

양고기보다 훨씬 낫고말고.

청포 탕평채를 곁들여 갓 빚은

술 한 잔이면 종일토록 얼근하지.

또 별미로 미나리강회가 있으니

데친 미나리와 생파를 적당히 나누어,

엄지손가락 크기로 둘둘 묶어선

저민 생선이나 고기 넣어 초장에 찍어 먹네.

남은 줄기는 잘게 잘라 기름에 볶아

봄날 점심 비빔밥에 넣어 먹기 좋구나.

배오개 시장에 채소 장사 다 있지만

오로지 미나리 장사만 치마에 돈이 가득하다.

천고의 호방한 백사 이항복은 귀양 가면서

철령 높은 구름을 노래했던 분.

이분이 어찌 식도락가랴만 북해 가에서 서울 미나리를 그리워했다네.


                 


한상수(韓相壽) 《한국민간전설집》 pp.15∼16에는

송도(개성)에서 朝鮮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아 도읍지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태조는 고달산(高達山) 암자에 있는 명승 무학을 사부(師傅)의 예로서 불러들여 천도(遷都)할 땅을 의뢰하였다.


어느 날 무학이 太祖를 위하여 동야(東野, 지금의 왕십리) 근방에서 지세를 살피고 있으니까 한 노인이 밭을 갈면서 소를 꾸짖기를

「미련하기 마치 무학 같은 소, 바른 곳을 버리고 굽은 길을 찾는구나」

하므로, 무학은 그 말을 듣고 놀라 묻기를

「지금 소더러 무학같이 미련하다고 하시었는데 내가 무학이요. 내 생각에는 이곳이 도읍지로 좋다고 생각하는데 어디 더 좋은 곳이 있습니까?」

하고 가르쳐 주기를 청했다. 그 노인이 채찍으로 가리키면서

「여기서 십리만 더 들어가 보시오.」

라고 말하였다.

노인의 말을 듣고 무학이 서쪽으로 십리를 더 들어가서 지세를 살피니 사방이 험한 산으로 싸여 있는데 도읍지로 좋은 곳이었다.

그 뒤 한양에 새 도읍지를 세우기로 결정하였으나 성벽을 어디에 축조할지 고심하던 차에 어느 날 밤에 눈이 왔는데,

그날 밤을 지내고 나니 한양 주위에는 마치 성 모양으로 빙 둘러 눈이 쌓여 설울(雪圍)이 스스로 선을 그리고 있는 것 같아 결국 그 눈이 온 자리 '설울'에 따라 성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이로 인하여 서울의 땅 이름이 설울의 와전으로 ‘서울’이 된 것이라 하며,

그때 그 노인이 무학의 물음에 ‘여기서 십리만 더 들어가 보시오’ 라고 대답한 것에서 왕십리(往十里)라는 지명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무학대사가 그 곳을 처음 왕심(枉尋)하였던 곳이므로 뒷날 왕심리(枉尋里)라 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는

朝鮮이 建國되어서 한양에 대궐을 짓는데 이 일을 무학(無學)이라는 스님이 맡아서 지었다.

그런데 대궐을 몇 군데 지어 놓으면 곧바로 허물어졌다. 그래서 대궐 짓는 것을 작파하고

다른 곳에 대궐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한 곳에 가니까 노인이 소를 가지고 밭을 갈고

있었다. 소가 잘 갈지 않으니까 이 노인은

「이놈의 소! 무학같이 미련한 소야!」

하면서 소를 나무랐다. 무학은 이 말을 듣고 그 노인한테 가서 무학이가 어째서 미련하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노인은

「한양의 지형은 학의 지형인데 무학은 그것도 모르고 대궐을 지으니 그 지은 대궐이

허물어질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학은 나는 새이기 때문에 학에다 집을 지으면 허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학을 날지 못하게 하려면 날개를 눌러 놔야 한다. 4대문을 지어서

나래를 눌러 놓고 대궐을 지어야 하는데 무학은 그런 이치도 모르고 대궐부터 지으니

대궐이 허물어질 수밖에……」

라고 말하고는 소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한다.



왕십리(往十里)- 김 소 월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往十里) 건너가서 울어나 다오,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天安)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데.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山)마루에 걸려서 운다.

                                <신천지> 1923. 8월호


김흥국의 노래 -59년 왕심리-


1.왕십리 밤거리에

구슬피게 비가 내리면

눈물을 삼키려 술을 마신다.

옛사랑을 마신다.

정주던 사람은 모두 떠나고

서울하늘 아래 나홀로

아~~ 깊어가는 가을 밤만이

왕십리를 달래주네.

2.왕십리 밤거리에

구슬피게 비가 내리면

눈물을 삼키려 술을 마신다.

옛사랑을 마신다.

정주던 사람은 모두 떠나고

서울하늘 아래 나홀로

아~~ 깊어가는 가을 밤만이

왕십리를 달래주네.

아~~ 깊어가는 가을 밤만이

왕십리를 달래주네


                 





출처 : 재령이씨 인자 조 후손
글쓴이 : 운봉(雲峰:밀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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