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驪州(여주)의 옛 숨결을 찾아

2012. 12. 31. 11:18한시

 

 

驪州(여주)의 옛 숨결을 찾아 


京畿道 여주(驪州)는 京畿道의 東南部에 위치하는 곳으로 동쪽으로는 江原道 原州, 서로는 이천·광주, 남으로는 충북 음성, 북으로는 양평과 접하고 있다. 여주의 면적은 610.92km2, 인구 9만 6800 여명(1989년)이다.


여주(驪州)에는 先史時代 遺物은 물론 대신면 보통리와 능서면 용은리, 여주읍(驪州邑) 상리 등지에 많은 고분이 있고 대신면 천서리에 파사산성이, 능서면의 신지리 성터를 비롯해 유적이 풍부하고 의병장 이인영 이언적등 훌륭한 인물도 여주 출신이다.


여주(驪州) 신록사(神勒寺)는 英陵(영릉,세종대왕)의 願刹(죽은 사람의 화상이나 위패를 모셔두고 명복을 비는 법당)이다. 드넓은 숲으로 유명하다 임란 때 타버린 뒤 중창되어 ‘보은사’라는 사액을 받았다. 신록사(神勒寺) 는 高麗 말 나옹화상 惠勤(혜근:1320-1376)이 열반한 古刹이기도 하다.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惠勤)는 江月軒(강월헌)에 거처하였다. 강 속에 사는 용에게 굴레를 씌워 굴복시켰다고 해서‘신록’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鄭斗卿(정두경)의 고시 ‘신록사(神勒寺) ’를 보면 나옹이 설법하면 귀신도 참예했다고 한다.


臺下江流百丈聽. 當年說法句紳聽.

대하강류백장청. 당년설법구신청.


川女朱下方丈實. 龍王惹參蓮花經.

천여주하방장실. 용왕야참연화경.


동 아래 강물은 일백 장으로 맑구나.

당시 설법하면 귀신이 와서 들었다네.

천녀는 낮에 방장에 내려오고

용왕은 밤에 연화법석에 참여하였지.


?고려 때 李穡(이색:1328-1396)은 68세 때 신록사(神勒寺)를 보고 청심루 묵으면서 ‘여흥 청심루 시판 題詠(제영)에 차운하다’(驪興淸心樓齊次暈)시는



恨無樓記官?端, 誰名淸心闕署顔.

한무누기관편단, 수명청심궐서안.


?水功高馬巖石, 浮天勢大龍門山.

한수공고마암석, 부천세대용문산.


?居雪落軒窓外, 凉臥風來枕?間.

욱거설락헌창외, 양와풍래침점간.


況是春風與秋月, 賞心薇景更寬閑.

황시춘풍여추월, 상심미경갱관한.


한스럽군 편액 머리에 樓記(누기)가 없다니

누가 청심이라 이름 했는지 서명이 빠졌구나.

물을 막는 공은 마암석이 높고

하늘에 뜬 형세는 용문산이 크다.

방 아이 따스한 때 창밖에는 눈송이 지고

서늘할 때 누우면 베갯머리에 바람 든다.

봄바람 불고 가을 달 걸렸을 때는 또 어떤가.

편안한 마음과 경치 즐기는 마음이 더욱 느긋하구나.


?여주와 가장 인연이 깊은 시인은 申光漢(신광한:1484-1555)이다. 1521년 신사무옥으로 삭탈관직 당하고 여주 원형지에 은둔하여 15년간 살았다.

신광한(申光漢)은 이소경에 ‘차운한 책의 끝에 적다(書和離騷經券端:(서화이소경권단)라는 시는


千古湘江事, 如何恨獨深.

천고상강사, 여하한독심.

分明猶有血, 嗚咽尙含心.

분명유유혈, 오열상함심.


雲去蒼梧杳, 悲來白髮森.

운거창오묘, 비래백발삼. 

唯餘不盡語, 欲和更霑襟.

유여부진어, 욕화갱점금.


아득한 옛적 상강의 일이여

어찌하여 홀로 한이 깊었나.

분명 血誠(혈성)을 지녔기에

품은 마음 있어 오열하였으리.

구름은 창오산 위로 아득히 떠가고

슬픔은 성성한 백발에 밀려온다.

다만 못한 말 남았기에 和韻(화운)하려 하니

눈물이 다시 옷깃을 적시네.



無爲(무위)  李彦迪(이언적)


萬物變遷無定態  一身閒適自隨時

만물변천무정태  일신한적자수시


年來漸省經營力  長對靑山不賦詩

연래점생경영력  장대청산불부시



하는 일 없이 변화하는 세상 이치 고정된 모습 없나니

이 몸도 한가로이 때 따라 노니노라

몇 해 째 차츰차츰 애쓰는 맘도 줄어들어

오래 청산 마주할 뿐 시도 짓지 않는다네



秋聲(추성) 가을소리 李彦迪(이언적)


月色今宵分外明  憑欄靜聽已秋聲

월색금소분외명  빙란정청이추성


商音一曲無人會  ?上霜毛四五莖  빈;살적 빈 귀밑 털빈

상음일곡무인회  빈상상모사오경



오늘 저녁 달빛은 밝기만 하여

난간에 기대니 고요히 들리는 가을소리.

한 곡조 상조에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

귀밑머리 서리 맞은 머릿발 네 댓 줄기.

                                        <林居十五詠>에서


이언적(李彦迪) 1491(성종 22)∼1553(명종 8)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여주(驪州).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참군 수회(壽會)의 손자로, 생원 번(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소(鷄川君昭)의 딸이다.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한다.

1610년(광해군 2)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배향되고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여주 쌀은 일명 경기미라고도 불리는데 옛날에는 매년 7월 말경부터 생산된『자채쌀』을 한강을 통해 한양에 계신 임금님께 여주 물과 함께 진상했던 쌀이다.


또 점토, 백토, 고령토 등 전국에서 제일 좋은 도자기 원료가 생산되었기 때문에 도자기로 유명하다.


이곳에 도요지가 조성된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999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북내면 중암리에 고려백자가마터를 발견하고 세종실록에 여주자기에 대한 기록이 있는 점과 시중 골동품상에 여주자기가 현존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고려조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구국의 깃발을 든 선봉장(李麟榮/1867~1909)

한말의 의병장. 일명 준영(竣榮). 경기 여주(驪州) 출생. 유생(儒生)으로 일찍이 대성전재임(大成殿齋任)을 지냈다.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유인석(柳麟錫)·이강년(李康秊)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강원도 의병장 이은찬(李殷瓚) 등의 추대로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이 되어 지평(砥平:경기 양평)·홍천(洪川)·춘천(春川) 등지에서 활약하고, 양주(楊州)에서 허위(許蔿)·이강년(李康秊) 등이 이끄는 각지 의병과 연합군을 조직, 13도 창의총대장으로서 1만여 명의 병력을 지휘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도중에 38회의 전투를 치르고,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이르렀다가 일본의 저항에 밀려 퇴각, 여주지방에서 패하였다. 그 후 시영(時榮)이라는 가명으로 충북 황간(黃澗)에 숨어 지내다가 일본헌병에게 잡혀 경성감옥에서 사형 당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명당을 얻은 원두표(元斗杓 )의 이야기


원두표(元斗杓 1593-1664)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원두표(元斗杓)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면  원두표(元斗杓) 형제가 아버지 상을 당하였을 때 세도 있는 사람만 보아주고 한미한 사람은 보아주지 않는 지관(地官)을 데려오기 위하여 꾀를 낸 이야기다. 원두표(元斗杓)의동생이 지관을 데리고 오다가 "지관노릇을 하려면 빈부귀천을 가리지 말고 보아주어야지 부자만 보아주니 혼나봐라."하고 나무에 매달아 놓고 가버렸다.

조금 뒤 형 두표가 우연을 가장하여 지관을 구해주고 그 대가로 아버지의 묏자리를 얻었더니 그 지관이 명당자리를 보아준 덕분으로 원두표(元斗杓)가 정승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여주 신록사(神勒寺) 는 高麗 말 나옹화상 惠勤(혜근:1320-1376)이 열반한 古刹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있는 청산은 나를 보고란 시도 나옹 화상(懶翁 和尙)의 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나옹 화상(懶翁 和尙)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聊無愛而無惜兮

료무애이무석혜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나옹화상서왕가(懶翁和尙西往歌)

<현대어로 풀이)


나도 한때는 속세사람의 자식이었으니

사람이 오래 살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니 모든 것이 허망하도다.

부모가 주신 얼굴은 죽은 후에는 아무 소용없이 어찌할 방법이 없다

잠시 동안 생각하여 속세의 일들을 모두 다 내동댕이치고

부모님께 하직하고 표주박 하나만을 차고 반벌 누더기 옷에

명아부 지팡이차림으로 명산을 찾아 들어가서

불경을 아는 훌륭한 스님을 직접 만나 뵈어 마음을 밝히리라

부처님의 교법과 교리를 하나하나 묻고 찾아서 내 것으로 만들리라

여섯 가지의 도적을 잡으리라 허공마를 빗겨 타고

마야검을 손에 들고 오온산에 들어가니

제산은 첩첩하고 사상산이 더욱 높다

육근 문언저리에 자취 없는 도적은

나며 들며 하는 둥에 번뇌 신을 없애 버리고

지혜로 배를 만들어 삼계바다를 건너리라

염불중생을 배에 실어두고 삼승은 돛대에 달고 

일승은 돛을 달고 춘풍은 순히 불고

백운은 뒤섞이는데 인간을 생각하니

슬프고 서럽다 염불하지 않는 중생들아!

몇 생을 살려고 속세의 일들만 탐내고 집착하여

애욕에 잠겼느냐? 하루도 열두시간이요

한달도 서른 날인데 어느 날에 한가할 것인가?

청정하고 자비로운 부처님의 성품은 사람마다 가졌은들

어느 날에 생각하며 항사공덕은

본래 구족한들 어느 때에 내어 쓸까?

극락세계는 멀어지고 지옥은 가깝구나.

이보시오 어르신네! 권하노니 종제선근을 심으시오

금생에서 한 공덕은 후생에서 과보를 받으니 

백변을 재물을 탐하는 것은 티끌이요

삼일을 한 염불은 백천만겁에 부족함이 없는 보배로다 

아아! 이 보배는 천겁을 지나도 낡지않고  

만세를 지나도 언제나 지금이다

맑은 하늘이 넓다고 한들 이 마음에 미치지 못하고

해와 달이 밝다고 한들 이 마음에 미칠 수 있겠는가

삼세의 부처들은 이 마음을 알으시고

육도의 중생들은 이 마음을 저버리시네.

삼계윤회를 어느 날에 그칠까?

잠깐 동안을 생각하고 마음을 깨쳐먹고 

태허를 생각하니 산은 첩첩이고 물을 졸졸 흐르고

바람은 쓸쓸하게 불고 꽃은 밝고 소나무와 대나무는 떨어지는

화장바다를 건너 저어 극락세계 들어가니

칠보금지에 칠보 망을 들렀으니 구경하기 더욱 좋네.

구품연대에 염불소리 자자하고

푸른 학과 흰 학과 앵무새와 공작새

금빛 봉황새와 푸른빛 봉황새가 하는 것은 염불이다

맑은 바람이 부러오니 염불소리 아련히 들여오네.

아아! 슬프다 우리도 인간에 나왔다가

염불발고 어이할까? 나무아미타불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惠勤) (1320∼1376)


고려말의 고승. 혜근(彗勤)이라고도 쓴다. 성은 아(牙)씨. 속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 선관서영(善官署令) 서구(瑞具)의 아들 이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인하여 무상을 느끼고, 공덕산 묘적암(妙寂 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를 찾아가 출가하였다. 그뒤 전국의 이름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 寺)에서 대오(大悟)하였다. 그때 이 절에 우거하고 있던 일본 승 석옹(石翁) 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출처 : 재령이씨 인자 조 후손
글쓴이 : 운봉(雲峰:밀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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