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鵲橋仙(작교선,烏鵲橋)의 사연들

2012. 12. 31. 11:19한시

 

 

鵲橋仙(작교선,烏鵲橋)의 사연들


說盟說誓, 說情說意

설맹설서, 설정설의


動便春愁滿紙

동변춘수만지


多應念得脫空經

多應念得脫空經


是那個先生敎底

시나개선생교저


不茶不飯, 不言不語

부다부반, 부언부어


一味供他心焦悴

일미공타심초췌


相思已是不曾閑

상사이시부증한


又那得工夫呪

우나득공부주



맹세하고 다짐하며 정을 말하고 마음을 말하며

사랑의 근심 편지지에 가득하지만

읽는 건 아마도 거짓말

어느 선생이 시켰어요?

차도 밥도 먹지 않고 한마디 말도 없이

오로지 초췌해져요

그리움 이미 예삿일이 아니라서

당신 저주할 틈도 없어...



周密<<齊東野語, 주밀의 제동야어>> 권 11에 보인다. 이 사는 蜀(촉)나라 지방의 기녀가 지었다 한다.




鵲橋仙(작교선)-秦觀 (진관

 

纖雲弄巧,飛星傳恨 銀漢迢迢暗渡。

섬운농교,비성전한 은한초초암도 (* 책받침 변+召:   멀 迢)


金風玉露一相逢,便勝却人間無數。

금풍옥로일상봉  편승각인간무수


柔情似水,佳期如夢,忍顧鵲橋歸路。               

유정사수  가기여몽  인고작교귀로


兩情若是長久時,又豈在朝朝暮暮。      

양정약시장구시  우기재조조모모



옅은 구름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데

별똥별, 이별의 한 전하러

아득한 은하수 살며시 건넜네

가을바람 영롱한 이슬 내릴 때 한 번 만남이

인간 세상의 숱한 만남보다 나으리

물처럼 부드러운 정

꿈같은 만남

어찌 차마 고개 돌려 오작교 밟고 돌아갈까

우리 사랑 영원히 변치 않으면

아침저녁 아니 만난들 또 어떠리?



진소유(陳觀)의 작교선(鵲橋仙)


纖雲弄巧,飛星傳恨,銀漢迢迢暗渡.

섬운롱교,비성전한,은한초초암도.


金風玉露一相逢,便勝卻人間無數.

금풍옥로일상봉,편승각인간무수.


柔情似水,佳期如夢,忍顧鵲橋歸路.

유정사수,가기여몽,인고작교귀로.


兩情若是長久時,又豈在朝朝暮暮.

량정약시장구시,우기재조조모모.


직녀(織女)는 실구름 곱게곱게 수놓고

견우(牽牛)는 그리운 마음 전하려

기나긴 은하수 조용히 건너나니

가을밤 한 번 만남이 인간세상의 무수한 만남보다 나아라.

부드러운 情은 물과 같이 흐르고, 만남은 꿈과 같아

오작교(烏鵲橋) 돌아갈 길 차마 못 오르겠네.

서로의 情이 영원하기만 하다면,

어찌 朝夕의 만남을 더 구하랴?


이 시는 양우생의 백발마녀전에 나온다.

백발마녀전은 義를 중시하고 허위를 증오하는 여도적 옥나찰과 문파의 인연에 얽매여 갈등하는 무당장문제자 탁일항과의 비련(悲戀)을 그린 작품.


이 사는 견우와 직녀의 전설을 그린 것이다. 작자는 1년에 한 번 만나는 그 짧은 시간을 결코 짧다고 여기지 않고 오히려 무수한 만남보다도 더 값진 단 한번의 만남이라고 얘기해 주고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진정으로 영원불변하다면 헤어져 있더라도 그것은 진실로 헤어짐이 아니라는작자의 진지한 감정은 속된 생각하고는 그 자체가 다른 것이다.


秦觀 (진관, 1049~1100) 진관의 자는 소유(少遊), 호는 회해거사(淮海居士)북송때 문인 (北宋詞人)


작교선(鵲橋仙)- 단산 요조첩(窈窕帖)


繩聯月老, 帳垂百子, 花面玉枝交透.

승련월로, 장수백자, 화면옥지교투.


西峰殘照 回頭, 暗算計, 新人似舊.

서봉잔조 회두, 암산계, 신인사구.



월하노인의 새끼줄로 엮어

백자도(百子圖) 병풍 아래서


꽃 같은 얼굴 옥 같은 가지 서로 엉킬 때,

서쪽 봉우리에는 석양빛, 쓸쓸히 머리 돌리네.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새 사람은 옛 아내와 닮았노라고.


윤시유(尹詩有 1780-1833 자는 군보)가 신부와 즐거운 날을 보내겠지마는 한편으로는 전처를 떠올릴 것이라고 했다. 군보가 과연 그랬을까? 우리의 관습상 재혼 축하 시에서 죽은 아내를 거론하는 것이 좀 거슬릴 수 있다. 다산이 배출한 뛰어난 제자의 시를 나는 여기서 처음 보았다. 다른 시도 새 사람과의 즐거움과 그 뒤에 도사린 전처에 대한 쓸쓸한 느낌을 표현하였다.


다산의 요조첩(窈窕帖)에 실린 글 중의 한 수 수제자 이청이 쓴 鵲橋仙(작교선)이다.

친구가 재혼을 함에 여러 사람의 축하시를 받아 서첩으로 만들어 선물을 하였다.



 

 


결혼을 축하하며

아름다운 시냇가의 집에 새 사람을 맞는다네.

잔치 자리에선 술을 마시고 신부 방엔 화촉 밝혔네.

눈을 들어 꽃(신부)을 보니 정신이 어떨떨

다만 옥 같고 구슬 같다고만 말한다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이 제자 윤시유(尹詩有 1780-1833 자는 군보)의 결혼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쓴 시. 재혼이지만, 제자의 결혼을 축하하는 스승의 진심이 잘 드러나 있다. 오의보와 소동파의 사(詞) 두 곡조를 참조해 지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조선후기 양반들의 소실들이기

19세기 초반 명사인 김려(金僚)는 충청도 결성이 고향인 金箕書(김기서 1766-1822)가 55세 때인 1820년, 제천현감으로 재직 중에 첩을 들이게 되자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준 일이 있다.

"장년이 되었음을 생각하니 마음에서 불이 나네.

(그래, 나도)40년 전에는 15살 팔팔한 사내였어.

울긋불긋한 보료(깔개) 위엔 비단 금침 화사하고

뒤에는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의 속화(포르노성 그림) 그린 작은 병풍 둘러쳤네

오늘밤엔 원앙이의 단꿈을 꾸어보게

촛불 그림자 몽롱하게 雲雨(운우)를 즐기며 말이네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와 동시대를 살다간 사람의 입을 통해 김홍도가 속화를 그렸다는 사실이 공개되고 있어 흥미롭고, 그런 속화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시는 주목을 요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첩을 사는 비용은 얼마나 되었을까?

안 교수는 전라도 출신 黃胤錫(황윤석,1729-1791)이란 시림이 13세부터 63세까지 장장 50년에 걸쳐 쓴 ‘이재난고’라는

방방대한 일기에 의하면 황윤석(黃胤錫)은 41세가 된 1769년 8월23일, 4년간 계속되는 서울 생활의 외로움을 달랠 요량으로 말을 팔아 집과 소실을 얻으려고 이 문제를 서리인 李成春(이성춘)이란 사람과 의논했다.

이 대화에서 황윤석(黃胤錫)은 나이와 외모는 따지지 않고 첩과 종을 겸한 여자를 얻되, 너무 어리면 자기 몸을 상할 수 있으므로 노성(老成)한 여자가 좋다고 부탁한다.

이에 대해 이성춘(李成春)은 40냥만 있으면 안방 1칸, 내실 1칸, 부엌 1칸, 사랑방 1칸,마구간이나 헛간 1칸이 있는 초가 1채를 얻을 수 있고, 그러면 혼기 놓친 가난한 집 여자는 쉽게 얻을 수 있으니 굳이 30살 된 여자는 구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소실을 구하지 못하게 되자 같은 해 11월23일 신춘일에 황윤석(黃胤錫)은 다시 대궐 주변에 사는 황씨노파에게 소실 한 사람을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았다. 이 와중에 황윤석(黃胤錫)은 소실과 혼례하는 초례청에서 가까이 다가가 신부의 모습을 보다가 그만 자기 아내와 비슷해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고 하는 심경을 일기에 쓰기도 했다. 이 대목에서도 본처에 대한 남편의 두려움이 묻어난다.

이런 황윤석(黃胤錫)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 생겼다. 그 사이에 본처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에 황윤석(黃胤錫)은 상처한 지 1년만인 1777년, 우여곡절 끝에 고모의 소개로 송일좌(宋日佐)라는 사람의 누이를 소실로 맞이하게 된다.

일기에 의하면 그는 첩 사는 비용으로 15냥을 지불했다. 한데 일기에는 이런 액수는 애초 고모가 제시한 첩 사는 비용 20냥보다는 5냥이 적다.

조선후기 서울지역에 통용된 첩 구입비용은 15-40냥 정도였으며 말 1마리를 팔아 그것을 충당할 수 있을 정도임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안 교수는 최근 발간된 한국한문학회 기관지인 '한국한문학' 35집에 기고한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인간면모와 일상'이라는 논문에서 박제가의 첩장가 들기를 고리로 삼아 이와 같은 조선후기의 '소실들이기' 양상을 고찰했다.

                                                   <참고한 자료:안대회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 나그네
글쓴이 : 운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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