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31. 11:13ㆍ한시
해운대 동백섬 최치원 유적지(해운정)
秋夜雨中; 崔致遠(.추야우중; 최치원)
秋風惟苦吟 擧世少知音
추풍유고음 거세소지음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창외삼 경우 등전만리심
가을내 애써 지은 나의 시를
세상에서 아는 이는 더물구나.
창밖에 비는 오고 밤은 깊은데
등잔 앞에 먼 고향이 아른거린다.
春曉偶書 봄 새벽
?耐東流水不回 只催詩景惱人來
파내동류수불회 지최시경뇌인내
含情朝雨細復細 弄?好花開未開
함정조우세복세 농염호화개미개
亂世風光無主者 浮生名利轉悠哉
난세풍광무주자 부생명리전유재
思量可恨劉伶婦 强勸夫郎疎酒盃
사량가한류령부 강권부낭소주배
흘러가는 저 물은 돌아 못 오고
봄빛만 사람을 괴롭히누나
애틋한 아침 비 부슬 거리고
꽃들은 피고 맺고 저리 곱구나
난리때라 좋은 경치 주인이 없고
뜬 세상 명리도 쓸 데 없는 것
아내는 원망스레 소매 붙들고
구태 어이 술잔 자주 못 들게 하나
가야산 해인사
난랑비서(鸞郞碑序)
난랑(신라 화랑) 비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塋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
국유현묘지도 왈풍류 설교지원 비상선사 실내포함삼교 접화영생 차여입칙효어가 출칙충어
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국 노사구지지야 처무위지사 행부언지교 주주사지종야 제악막작 제선봉행 축건태자지화야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그 교(敎)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실은 삼교를 포함하여 군생을 접화하는 것이다. 들어 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魯司寇: 공자)의 뜻과 같은 것이요, 무위(無爲)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교(敎)를 행함은 주주사(周柱史: 노자)의 종지(宗旨)와 같은 것이요. 악(惡)한 일은 하지 않고 선(善)한 일은 받들어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 석가)의 교화(敎化)와 같은 것이다
신라 경덕왕 때 유학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글. 내용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본문에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이른다. 그 교의 기원은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다. 실로 이는 삼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그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魯司寇:孔子)의 主旨이며, 또 그 무위의 일에 처하고 말없는 敎를 행하는 것은 주주사(周柱史:老子)의 종지이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만을 행함은 축건 태자(竺乾太子:釋迦)의 교화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그 교의 기원은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최치원이 '난랑비서'를 썼을 당시에는 「선사」라는 문헌이 현존했고 거기에 화랑도의 정신이라고 할 '풍류, 현묘지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실로 이는 삼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것은 당시 삼교의 특성이 서로 공통성을 갖고 있어서 융합, 조화될 수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현묘지도와 유, 불, 도의 어느 하나가 아닌, 이들 삼교의 종교적 이념을 구비하고 있는 '현묘한 도'가 별도로 있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신라 화랑도의 바탕이 현묘지도, 즉 풍류에 있었음을 알 수 있고, 한편으로 당시 유, 불, 도 사상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엿볼 수 있다
접시꽃
당나라 유학기 (868~884) 지은 蜀葵花(촉규화) <접시꽃>
寂寞荒田側 繁花壓柔枝
적막황전측 번화압유지
.
香經梅雨歇 影帶麥風?
향경매우헐 영대맥풍의
.
車馬誰見賞 蜂蝶徒相窺
거마수견상 봉접도상규
.
自慙生地賤 堪恨人棄遺
자참생지천 감한인기유
거친 밭 언덕 쓸쓸한 곳에
탐스런 꽃송이 가지 눌렀네
매화 비 그쳐 향기 날리고
보리 바람에 그림자 흔들리네
수레 탄 사람 누가 보아주리
벌 나비만 부질없이 찾아드네
천한 땅에 태어난 것 스스로 부끄러워
사람들에게 버림 받아도 참고 견디네.
<동문선 권4><삼한시귀감>
고운이 위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자신이 소외된 인간이라는 것이다. 거친 밭 언덕은 중국을 의미한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서 거칠다는 것은 바로 인정이 메마르다는 것을 의미 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이방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 접시꽃에 자신의 처지를 비유한 시다. 아무도 찾지도 않고, 개간하려고도 않는 척박한 곳에 쓸쓸히 피어 있는 그 흔한 접시꽃.
그러므로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다. 수레 탄 사람은 임금을 위시한 고관대작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의 학문은 '탐스런 꽃송이', '매화향기'처럼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건만, 이를 알아 보지 못하는 척박한 신라가 한스럽기만 하다.
고운 당 나라를 떠나올 때 같이 귀국하는 신라인들과 어울려 지은 시는
與君相見且歌吟 莫恨流年挫壯心
여군상견차가음 막한류년좌장심
幸得東風已迎路 好花時節到鷄林
행득동풍이영로 호화시절도계림
그대여, 우리 오늘 만났으니 시나 읊고
더 큰 꿈 이루지 못한 건 한탄하지 말자
다행히 봄바람이 우리를 길 맞이하리니
꽃피는 좋은 철에 계림에 도착하는 걸.
급제 후의 고독과 어려움이 세 편의 글에 나타냈다.
上國羈棲久 多慙萬里人
상국기서구 다참만리인
他鄕少知己 莫厭訪君頻
타향소지기 막염방군빈
대국에서 타향살이 하도 오래 하니
만리 저편 가족들에게 무척 부끄럽구나.
타향이라 지기(知己)가 별로 없으니
그대 자주 찾는 것 귀찮다 마시라.
907년에는 드디어 당나라가 망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조국에서도 중국에서도 반란자들이 왕이 되었다. 충효를 주창했던 유자(儒者)로서 선생의 胸襟(흉금)은 어떠했을까. 선생은 술잔을 들고
春曉偶書(춘효우서)
亂世風光無主者 浮生名利轉悠哉
란세풍광무주자 부생명리전유재
思量可恨劉伶婦 强勸夫郞疎酒杯
사량가한유령부 강권부랑소주배
난세이니 이런 풍광에 주인도 없고
뜬 인생의 명리, 더욱 아득하기만 한데
생각하니 劉伶(중국의 유명한 애주가)의 아내가 한스럽다.
왜 남편에게 술잔 멀리하라 강권했는지. (春曉偶書)
정치라는 것은 이렇게 어이없는 것인가. 그에 대해 다시 무슨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때문에 희생되는 백성들의 버림받은 삶이 선생의 눈을 아프게 한다. 그들은 역사의 길가에 버려진 접시꽃(蜀葵花)으로 생각하고
접시꽃(蜀葵花)
寂寞荒田側 繁花壓柔枝
적막황전측 번화압유지
車馬誰見賞 蜂蝶徒相窺
거마수견상 봉접도상규
自慙生地賤 堪恨人棄遺
자참생지천 감한인기유
거친 밭 언덕 적막한 곳에
두툼한 꽃송이가 약한 가지 누르고 있다.
수레 탄 사람 누가 보아줄까.
그저 벌 나비만 와서 엿볼 뿐.
천하게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세상에서 버림받아도 참고 견딘다. (蜀葵花)
제가야산독서당
가야산 해인사로 가는 길 옆 언덕 바위에 유명한 시 '題伽倻山讀書堂(제가야산독서당)'이 새겨져 있어 이를 題詩石이라 한다.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광분첩석후중만 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상공시비성도이 고교류수진농산
미친 듯 바위 위를 내달으며 산을 울리는 물소리에
사람의 이야기는 지척에서도 알아듣기 어렵다
옳다 그르단 세상 시비소리 귀에 들릴까봐
흐르는 물을 시켜 온 산을 감쌌다
芋江驛亭 崔致遠(우강역정 최치원)
沙亭立馬待廻舟, 一帶烟波萬古愁.
사정입마대회주, 일대연파만고수 ,
直待山平兼水渴, 人間離別始應休.
직대산평겸수갈 인간이별시응휴
사정(沙亭)에 말 세우고 배오기를 기다리니
강위에 뜬 안개는 시름인양 서려있네.
마음대로 산도 물도 없앨 양이면 세
상의 슬픈 이별 그제야 끝나리.
최치원 - 郵亭夜雨(나그네 집 밤비)
旅館窮秋雨 寒窓靜夜燈
여관궁추우 한창정야등
自憐愁裏坐 眞箇定中僧
자련수리좌 진개정중승
나그네집 깊은 가을 비는 내리고
창 아래 고요한 밤 차거운 등불
가엾다 시름 속에 앉았노라니
내 정녕 참선하는 중이로구나
타국에서의 생활, 그것도 정착을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하는 나그네 생활. 아마 22세 무렵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의 시인 듯하다.
'가을의 밤비', '차가운 창가', '가물거리는 등불' 이 모든 것들이 나그네의 외로움을 더해주는 거 들이다. 아울러 시름 속에서 고국을 그리는 자신이 흡사 선정(禪定)에 든 스님과 같이 절절하기만 하다
사산비명[四山碑銘] 4곳에 있는 비명
지리산의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
만수산의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
光塔碑),
희양산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초월산의 숭복사지비(崇福寺址碑),등
4명의 승려를 위한 비문이 그것이다. 그중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는 최치원이 찬(撰)뿐만 아니라 서(書)와 전액(篆額)을 아울러 했다. 숭복사지비는 인몰(湮沒)해 전모를 알 수 없다가 1931년 경주 동면(東面)에서 잔석(殘石)이 나와 그 편린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비문의 문체는 4·6 대우(對偶)와 6·6 대우가 주류를 이룬 전형적인 변려체(騈儷體)이다
가야산
최치원의 탄생설화
857년경 신라의 금성(지금의 경주)에 최씨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번갯불이 일고, 천둥이 사방에서 요란하게 울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밤이 되자 최씨의 부인이 사라졌다. 최씨는 부인을 찾아 헤매다가 뒷산인 일악령에 오르게 된다. 그때 그 곳에 있던 큰 바위가 큰 바위가 저절로 갈라지더니 불빛이 흘러나왔다. 속으로 들어가 보니 화려한 집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황금빛 돼지가 아내의 다리를 베고 자고 있었다. 최씨의 부인은 자기 남편을 알아보지 못했다. 최씨가 향가루를 날리자 부인은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돼지를 죽여야 나갈 수 있었다. 사슴 가죽을 돼지의 목에 걸면 죽는다하여 이대로 하니 사슴가죽이 불어나 돼지의 목을 졸라 죽였다. 최씨 부부는 이렇게 하여 황금빛 돼지의 집에서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후 최씨의 아내의 배가 불러왔다. 열 넉 달째에 아기가 태어났는데 돼지 같을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보통아이와 같았다. 최씨 부부는 이 불길한 아기를 버리기로 하고 포대기에 싼 다음에 동해 바다에 버렸다. 그 때 갑자기 선녀가 내려와 아기에게 젖을 주었다. 며일 후 그들은 다시 그곳에 갔는데 어떤 아이가 바다 한가운데 있는 큰 바위 위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글을 읽고 있었다.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고 글만 읽었다. 곧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등의 붉은 점을 보여주며 최씨의 자식이 맞노라 하며 오해를 풀어주고 아이는 문창성(文昌星)이라는 별이라고 말해준다. 또 아이를 위해 누각을 지으라고 하였다. 곧 누각을 짓고 아이를 데려다 놓으니 날마다 하늘에서 학자들이 내려와 아이에게 글을 가르쳤다. 아이는 모래 위에 나뭇가지로 글을 쓰며 공부했었다. 최씨가 쇠막대기를 가져다 주었으나 이내 다 닳아 없어져버렸다. 아이의 글 읽는 소리는 머나먼 중국황제에게까지 들렸다. 그 때, 그 나이는 겨우 세 살이었고 아이의 이름은 치원(致遠), 자는 고운(혹은 해운이라고도 한다.)이라 지었다.
?최치원[崔致遠]857~?
신라말의 대학자이며 본관은 최치원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시호는 문창후이고 경주 사량부 사람이라 전한다 아버지는 견일(肩逸)로 숭복사(崇福寺)를 창건할 때 그 일에 관계한 바 있다.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고려 중기까지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12세 때 당에 유학, 17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표수현위, 승무랑시어사내공봉을 역임하였다. 황소의 난 때 격문을 써서 이름이 높았으며 884년(27세)에 귀국하였다. 시무 10여조를 써올려 아찬이 되었으나 난세가 되자 전국을 돌며 풍월을 읊다가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한다. 저서에 사육집 1권과 계원필경 20권이 있었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逍遙自放)하며 지냈다. 그가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南山), 강주(剛州) 빙산(氷山), 합주(陜州) 청량사(淸
寺),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별서(別墅) 등이 있다. 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지냈다. 904년(효공왕 8) 무렵 해인사 화엄원(華嚴院)에서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지었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지었고 그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편 문학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성묘(聖廟: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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