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31. 11:12ㆍ한시
수락산
金時習(김시습)과 朴世堂(박세당)이 은거 했다는 수락산(水落山)
수락산(水落山)은 의정부시와 남양주시를 경계로 위치하고 있다. 산전체가 화강암과 모래로 이루어져 얼핏 보기에는 삭막하고 볼품없이 보일 수도 있으나 안으로 들어서면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락산(水落山)은 산세가 웅장하고 곳곳에 다양한 볼거리를 지니고 있다. 수락산에는 세상을 등지고 세상을 방랑하였던 김시습(金時習)의 자취가 어려 있다. 세종은 5세 때 신동소리를 듣던 김시습(金時習)을 무척 아꼈다.
당시 세자였던 문종과 어린 세손인 단종을 향해 '너를 귀히 등용할 두 군왕이다'라고 했을 만큼 김시습(金時習)의 재주를 높이 샀다. 세월이 흐른 후 수양대군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김시습(金時習)은 3일 동안이나 문을 닫고 통곡했다. 그 후 책을 불사르고 머리를 깎은 그는 중이 되어 세상을 떠돌았다. 정처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다니던 그의 발길이 이곳 수락산(水落山)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한동안 은거하였던 김시습(金時習)은 수락산(水落山) 정상을 비로봉이라 이름 짓고 다른 봉우리들도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온다.
수락산(水落山)은 서울의 북쪽 끝에 의정부시와 남양주시를 경계로 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불암산이 바로 연결되어 있어 종주가 가능하다. 산 전체가 화강암과 모래로 이루어져 있고 기암괴석과 샘, 폭포가 많은 반면 나무는 매우 적다. 산의 분위기가 다소 삭막하기는 하나 바위의 경치가 뛰어나고 곳곳에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
성종 때 金時習(김시습:1435-1493)이 은거하고 숙종 때는 朴世堂(박세당:1629-1703)이 은거한 곳이다.
南孝溫(남효온:1454-1492)은 수락산(水落山)에 김시습(金時習)을 찾아갔다가 길을 잃어 복숭아를 따서 배를 채우며
虎豹新過跡未乾. 雲心何處道人壇.
호표신과적미건. 운심하처도인단.
參天樹木疑無路, 靜看蒼?竄石間.
참천수목의무로, 정간창오찬석간.
맹수들 지나간 자취 채 마르지 않았군.
짙은 구름 속 어느 곳이 도인의 거처인가.
나무들이 하늘에 솟아 길이 없는 듯해라
돌 틈에 숨는 다람쥐를 가만히 바라본다.
라는 시를 지었다
바위의 경치가 뛰어나고 가을이면 단풍과 곳곳에 맑은 물이 흘러내려 절경을 이룬다.
수락산 동쪽 산기슭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한 이절은 신라 때 창건 되었다고만 전해지지는
남양주시 별내면(別內面)에 있는 흥국사(興國寺)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599년(신라 진평왕 21)에 원광(圓光)이 창건하고 수락사(水落寺)라 하였다. 1568년(선조 1) 나라에서 덕흥대군(德興大君)의 원당(願堂)을 짓고 흥덕사(興德寺)로 바꿨다가, 1626년(인조 4)에 중건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고쳤다. 1818년(순조 18) 요사채 대부분이 소실되었는데, 4년 후 왕명에 따라 기허(騎虛)가 대웅전과 법당 등을 중건했다. 78년(고종 15)에는 다시 소실된 것을 용암(庸庵)이 중건하였는데, 이곳에 덕흥대군의 묘소가 있으므로 흔히 ‘덕절’이라고 부른다. 경내에는 현재 정면 3칸, 측면 3칸인 팔작지붕의 대웅전과 영산전(靈山殿)·만월보전(滿月寶殿)·독성전(獨聖殿)·시왕전(十王殿)·산신전 등과 많은 사찰이 있기도 하다.
금류동음각 글씨 김시습이 머물었다고 한다
수락산(水落山)의 전설
수락이를 삼킨 수락산(水落山)
수락산(水落山)이라는 명칭에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바위가 벽을 둘러치고 있어 물이 떨어지므로(水落) 불렀다는 설(說)과, 산봉우리 형상이 마치 목이 떨어져 나간 모습(首落)과 같다하여 불렀다고 합니다. 또한 아들 `수락이를 찾는 사냥꾼의 애틋한 부정(父情)이 서려있기에 이름 지어졌다고 합니다. ……
-노원구청 문화공보실 제공-
수락산 갈울마을에 사냥꾼 부부가 살았습니다. 이들은 비록 가난했지만 마음은 항상 넉넉하여 서로를 아끼며 사랑했습니다.
남편이 뒷산으로 사냥을 가면 아내는 칡덩굴 우거진 언덕배기를 열심히 일구어 감자?고구마?콩을 심으며 잠시도 일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저녁이면 호롱불 아래서 그날 있었던 일을 정답게 주고받으며 하루의 피곤함을 잊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부부에게는 근심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결혼한 지 십여 년이 되어가지만 아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다 놓고 신령님께 간절히 빌었습니다.
사냥꾼 부부의 지극 정성에 하늘이 감동했던지 드디어 아내의 몸에 태기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고, 아내를 위한 남편의 보살핌은 대단했습니다.
사냥을 나가지 않는 날이면 집 주변을 말끔히 치워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물 항아리에 물을 가득 길어다 주며 아내를 도왔습니다.
또한 밤이면 새로 태어날 아이 이야기를 하며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날이 갈수록 배가 불러오는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은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했습니다.
드디어 온 산에 진달래가 사태를 이루던 어느 날, 사냥꾼의 아내는 심한 산기를 느꼈습니다. 사냥꾼은 처음 당하는 일이라 몹시 당황했지만 부리나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물을 끓이며, 아기 받을 준비를 했습니다.
아내의 진통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며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습니다. 사냥꾼은 더욱 초조해졌습니다.
으……으, 아이고……
차츰 아내는 기진맥진 하고 남편의 말소리조차 알아듣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내는 감았던 눈을 한번씩 힘겹게 뜨곤 할 뿐이었습니다.
아…… 아……
아내의 비명소리와 함께, 우렁찬 사내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냥꾼은 기쁨에 들떠서 아기와 아내를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심한 출혈 끝에 아기를 낳은 사냥꾼의 아내는 남편의 극진한 간호도 허사로, 삼일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냥꾼은 세상을 다 잃은 듯 했지만, 그의 품에서 쌔근쌔근 잠든 아들의 모습을 보며 시름을 달랬습니다.
사냥꾼은 아들 이름을 수락이라고 지었습니다. 엄마는 없지만 수락산의 깊고 넓은 계곡이 엄마 품과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락이는 무럭무럭 잘 자랐습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품에서 젖을 얻어먹고 자랐지만, 배가 고파서 우는 소리가 사립문 밖을 나오지 않았고, 사냥꾼 아버지를 닮아 체질적으로 건강했습니다.
수락이는 얼굴조차 모르는 어머니를 그리워하기 보다는 아버지를 한없이 따랐습니다. 사냥꾼의 아들답게 여섯 살 때는 집 근처를 뛰어다니는 토끼도 잡았고, 장에 간 아버지가 늦게 오는 날이면 동구 밖으로 마중도 나가곤 했습니다. 사냥꾼은 늠름하고 자상한 아들의 모습을 보며 아내에 대한 그리움도 차츰 잊을 수 있었습니다.
수락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갈울마을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은 불안하게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머리를 맞대고 호랑이를 잡을 궁리를 했지만 대책은 없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근심은 깊어만 갔습니다.
어떻게 하면 호환을 막지?
누가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면……
이제는 나다니는 것조차 겁이 나……
동냥젖을 먹이며 어미 없는 수락이를 키운 사냥꾼으로서는 이 기회에 마을 사람들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냥꾼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수락이를 맡아줄 집을 물색하며 호랑이 사냥을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린 수락이는 아버지와 함께 사냥 길에 나서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수락아, 호랑이 사냥은 아주 위험한 일이란다.
그러면 아버지는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혼자서 하시려고 해요?
나는 이 마을 최고의 사냥꾼이 아니냐??
저는 그 사냥꾼의 하나 뿐인 아들입니다.
그래도 아직은 어린 나이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아버지가 그렇게 위험한 사냥을 나서는데, 하나 뿐인 아들이 어찌 편안하게 남의 집에서 지내겠습니까?
사냥꾼은 끈기 있게 수락이를 설득했으나 그럴수록 그는 더욱 집요하게 아버지를 졸랐습니다. 결국 사냥꾼은 아들과 함께 호랑이 사냥을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냥을 나서던 날은 날씨마저 쾌청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사냥꾼 부자가 꼭 호랑이를 잡아오기를 바라며 그들을 떠나보냈습니다. 특히 갓난아이 적부터 수락이를 품에 안고 젖을 먹여주었던 버들이네는 수락이를 위해 미숫가루와 찰떡도 싸주었습니다.
며칠을 수락이와 함께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찾아다녔건만 호랑이의 흔적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호랑이 사냥에 대한 긴장감은 풀어지고 마치 소풍을 나온 사람들처럼 즐거웠습니다.
아버지, 저기……저 오리바위 아래가 어머니 산소지요?
어디 보자. 으…… 음 그렇구나.
벽운계곡을 내려다보는 사냥꾼의 얼굴에는 쓸쓸한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아침부터 상투봉 부근에서 호랑이의 발자국을 찾아낸 아버지와 아들은 바짝 긴장함과 동시에 몸은 분주해졌습니다.
바람결에 부스럭거리는 갈참나무잎 소리에도 머리끝이 쭈뼛쭈뼛했고 날갯짓하며 날아가는 솔부엉이를 항해 활시위를 당기기도 했습니다.
점심때가 지나자 삿갓봉?감투봉?고식 봉에 길게 걸려 있던 구름이 모여들면서 사방은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나기가 올 기미가 분명했습니다. 숲 속의 산새들도 부산을 떨며 어디론가 날아가고 떡갈나무 잎사귀에는 이미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사냥꾼과 수락이는 재빨리 물개바위 쪽으로 향했습니다. 그 근방에는 비를 피하기 적합한 바위들이 여럿 있기 때문입니다.
차츰 빗방울은 굵어졌고 수시로 으르렁대는 천둥소리에 그들은 걸음을 더욱 재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물개바위를 눈앞에 두고 더 이상 비를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허겁지겁 비를 피해 들어간 바위굴은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넓고 아늑했습니다. 사냥꾼과 수락이는 비에 젖은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사냥꾼도 수락이가 아들이라기보다는 사냥의 든든한 동반자로 느껴졌습니다.
아침도 변변히 먹지 못하고 한나절을 쫓아다닌 탓에 그들은 그제야 시장기를 느꼈습니다. 사냥을 떠날 때 버들이네가 싸준 미숫가루와 몇 덩이 남아 있는 찰떡으로 허기를 면하자 수락이는 눈꺼풀이 자꾸 무거워졌습니다.
바깥은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사냥꾼은 이미 요란하게 코를 골고 있었습니다.
얼마가 지났을까. 주변이 조용해서 보니 굴속으로 한줄기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덩달아 향긋한 풀꽃향도 따라 들어왔습니다.
사냥꾼은 모처럼 즐긴 단잠에서 깨어나 행복에 겨운 목소리로 아들을 불렀습니다.
수……락아. 내 아들……
……
어이 장군, 그만 일어납시다.
……
수락아… 수락아…
사냥꾼은 몇 번씩이나 아들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었습니다. 놀라 바깥으로 뛰쳐나가 목청껏 아들을 불렀습니다. 온 산에 ?수락아? ?수락아? 메아리만 쳤을 뿐 대답은 없었습니다.
비가 멎기를 기다리며 잠이 든 사이 호랑이가 수락이를 물고 가버린 뒤였습니다.
사냥꾼은 미친 듯이 산 속을 헤매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비만 오면 산에서 `?수락아?`?수락아?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산 이름을 ?수락산?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수락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옛날 한 사냥꾼이 아들 수락을 데리고 지금의 수락산으로 호랑이 사냥을 나왔다. 그런데 그 날 갑자기 큰 소낙비가 쏟아져 사냥꾼 부자는 비를 피하여 큰 바위 밑에서 비가 멎기를 기다리면서 잠이 들었다. 그 때 호랑이가 나타나 잠자고 있는 수락을 물어가 버리고, 한참 뒤 잠에서 깨어난 아버지 사냥꾼은 아들 수락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자 초조해진 아버지는 아들 수락을 찾아 헤매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뒤로 비만 오면 산에서 '수락아!수락아!' 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사람들이 산 이름을 “수락산”이라 하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신빙성이 없는 점은 호랑이 사냥에 어떻게 아들을 데리고 다닐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어이없다.
또 다른 유래는
동편 금류동 계곡으로 쏟아 붓는 많은 폭포들을 두고 '물이 떨어지는 산(水落山)'이라는데 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맞는 설 같다.
산의 아름다운 경치 대부분이 서울의 반대편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에 집중돼 있다. 부근에 있는 벽운동 유원지는 주변의 도봉산과 북한산에 눌린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등지고 서 있는 수락산을 반역 산이라 불렀다.
수락산에는 세상을 등지고 세상을 방랑하였던 김시습의 자취가 어려 있다. 김시습은 후일 금오신화라는 소설을 지은 사람으로, 5세 때 신동소리를 들었으며 세종대왕이 무척 아꼈다.
수락산에서 김시습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내원사와 저 너머의 석림사다. 그가 수락산의 봉우리마다 이름을 지어 붙인 것이 내원암의 현판에 남아 있다고 하나 직접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내원암과 금류폭포 사이의 너른 암반에는 '금류동천(金流洞天)' 이라는 해서체의 암각글씨가 새겨져 있는 그 필획이 범상치 않다. 흥미로운 것은 '간폭정기'라는 옛날 책에 따르면 "수락산 옥류동에 있는 옥류폭포 옆에 간폭정을 지었는데, 그 위 5리쯤에 매월당 김시습의 옛 살던 터가 있다"는 것이다. 옥류 폭포에서 5리쯤 위면 대략 이 암각글씨가 있는 곳이나 그 바로 위의 내원사가 된다.
김시습이 삼각산 중흥사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수양대군(세조)의 쿠데타 소식을 듣고는 책을 불사르고 머리를 깎은 뒤 세상을 피해 숨어든 첫 번째 장소가 바로 이 수락산이다. 당시 그의 나이 고작 열아홉이었다. 그는 열아홉에 세상을 버리고 한양에 등을 돌려 이곳을 찾았는데, 인적 끊긴 산 속의 암자에 틀어박혀 비통한 청춘을 보냈던 김시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무겁다.(출처 : 네이버 지식iN)
수락산에서 趙司翼
우윳빛 뒤 뒤 감긴 뭉게구름에 무심의 시선 멈추니
등 굽은 도토리 산 숲 위로 쪽빛 하늘 메마른 햇살이 눈 부시다
수락산에서, 이 산 어디 하나 남김없이
산 사과 이파리까지 갈 빛으로 익어가는데
계곡 겨드랑이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흥국사” 어느 스님의 염불인들 이보다 더 고요할까
하늘 어느 먼 곳에서 갈 볕 눈부시게 내려와
점박이 돌배 익는 냄새 향기롭고 억새 풀숲까지 유 백의 흥건한 꽃을 피웠다
조상님네도 모르는 오랜 어느 날
이름 없는 조각가의 손장난인 듯한 검 빛 “홈통바위”
그 허리를 감아 도는 갈바람 사각거리는 소리에
지례 놀란 까투리며 산비둘기가
암봉들 하늘 향한 무도의 장관 위로 허공을 가른다
아 어느 또 다른 계절이 이보다 더 넉넉할까
속세의 그 무엇인들 이 산 모든 것보다 더 욕심 없을까
계곡물 “옥류 폭포”로 내릴 때마다
한 겹 벗기고 두 겹 벗겨
“마당바위” 넓은 가슴에
내 사지를 에워 싼 고단한 이야기 내려 놓는다
흥국사(남양주)
서강(西江)을 여행하다가 보았던 세조의 수족인 한명회의 시를 인용해 자신의 저항정신을 표현한 시를 짓기도 했다고 한다.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이러한 한명회의 시에서 ‘扶’자 대신 ‘亡’자를, ‘臥’자 대신 ‘汚’자를 넣어
靑春亡社稷(청춘망사직)
白首汚江湖(백수오강호)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
는 뜻으로 완전히 바꿔버렸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배꼽을 잡고 웃으며 이 시를 읊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김시습(金時習) 의 증오심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하게 하는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또 변덕스런 날씨를 당시 세상사에 비유하여
乍晴乍雨(사청사우) / 金時習(김시습)
乍晴乍雨雨還晴 天道猶然況世情
사청사우우환청 천도유연황세정
譽我便是還毁我 逃名却自爲求名
예아편시환훼아 도명각자위구명
花開花謝春何管 雲去雲來山不爭
화개화사춘하관 운거운래산부쟁
其語世上須記憶 取歡無處得平生
기어세상수기억 취환무처득평생
잠깐 개었다 비가 오고 비 오다 다시 개이니
자연의 이치도 그러한데 하물며 세상 인심이야
나를 칭송하다가도 곧 다시 나를 헐뜯게 되고
명예를 피한다면서 도리어 명예를 구하게 되네
꽃이 피고 시들어지는 것을 봄이 어찌 하리오
구름이 오고 가는 것을 산은 다투지 아니하네
세상 사람에게 말하노니 모름지기 기억하시길
기쁨을 얻은들 평생토록 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세상을 비관하며 책을 모두 불태운 후 승려가 되어 방랑 생활을 하였다.
평생 동안 절개와 지조를 지키며 살다간 그의 말년에
牙?(아중-벌레먹은 어금니)-김시습 金時習
伊昔少年日 ?眉決?肩
이석소년일 당미결체견
自從牙齒? 已擇脆甘嚥
자종아치우 이택취감연
細芋烹重爛 兒鷄煮復煎
세우팽중란 아계자부전
如斯得滋味 生事可堪憐
여사득자미 생사가감련
옛적 젊은 시절에는
눈 부릅뜨고 돼지다리 뜯었는데
어금니 벌레 먹은 뒤로는
무르고 단 것만 가려서 먹는다네.
작은 토란도 삶은 걸 또 삶고
어린 닭도 익히고 또 익히네.
이렇게 해야 먹을 수가 있으니
사는 일이 참 불쌍타 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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