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31. 11:10ㆍ한시
樂道吟; 李資玄(.낙도음; 이자현)
家在碧山岑 從來有寶琴
가재벽산잠 종래유보금
不妨彈一曲 祇是少知音
불방탄일곡 기시소지음
산중에 조용히 살고 있어도
전부터 내려오는 거문고 있네.
때로는 한 곡조 타고 싶지만
어느 누가 내 곡조 알아주리오.
ꋮ이자현(李資玄);1061(문종 15)∼1125(인종 3). 고려의 학자. 본관은 인주(仁州). 자는 진정(眞靖), 호는 식암(息庵)·청평거사(淸平居士)·희이자(希夷子). 자연(子淵)의 손자이며, 의(顗)의 맏아들이다.
1089년(선종 6)과거에 급제하여 대악서승(大樂署丞)이 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춘천의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서 아버지가 세웠던 보현원(普賢院)을 문수원(文殊院)이라 고치고 당(堂)과 암자를 지어 이곳에서 나물밥과 베옷으로 생활하며 선(禪)을 즐겼다. 예종이 사람을 시켜 다향(茶香)과 금백(金帛)을 보내어 여러 번 불렀으나 사양하였다.
1117년(예종 12)예종이 남경(南京)에 행차하였을 때 왕을 만나기는 하였으나 곧 다시 문수원에 들어가 평생을 수도생활로 일관하였다.시호는 진락(眞樂)이다
청펑사 회전문
청평산 문수원기 (淸平山文殊院記)》
춘천 청평사의 뜰에 서 있었던 비석《진락공 중수 청평산 문수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는 고려 때 명문재상가(名門宰相家) 출신으로 관직을 버리고 청평산에 들어와 선(禪)을 닦다 세상을 떠난 진락공(眞樂公) 李資玄의 생애를 기록한 것이다
*오봉산(五峯山)은 경수산, 혹은 청평산淸平山이라고 불리다 근래에 와서 소양호에서 보면 다섯 개의 봉우리(나한봉, 관음봉, 문수봉, 보현봉, 비로봉)가 연이어 있어 오봉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 金富軾(高麗)撰,(금부식(고려)찬,) 坦然(高麗)書.(탄연(고려)서).
1帖(4折 8面) 拓本 41×27.5cm 蝴蝶裝(1첩(4절 8면) 탁본 41×27.5cm 호접장)
춘성군春城郡 북상면北山面 청평리淸平里 청평사淸平寺에 있는 문수원중수비문수원중수비의 탁본 성책. 조선김석총람(상권)에 따 르면 이 비는 상부·하부가 모두 결실, 비문의 일부만이 잔존하고 있는데, 비석은 원래 세로 4척 5촌, 가로 4척 3촌의 비교적 자그마한 것이었다 한다. 그리고 본 탁본에는 없으나 자경 3촌으로 된 해서 제액이 또 있었다고 한다. 결자가 반 이상이나 되어 도저히 판독할 수 없고, 여기에 다시 表具上의 착오가 심하여 비문 전체의 맥락이 전혀 닿지를 아니한다. 다행히 국립박물관 소장 구탁본이 위 김석총람에 수록되어 있어 비문 전체를 통독해 볼 수가 있다. 본 탁본본은 결자 부분이 많으므로 비문 판독상으로 볼 때 별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가치로는, 비문 판독보다도 오히려 고려 중기의 명필 탄연 즉 대감국사의 필적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점에 있다 할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진요공眞樂公 이자현李資玄이 이곳 청평산에 은거, 보현원을 중수하고 그곳에서 선기를 닦음으로써 위대한 선승이 되었다는 줄거리에 불과하나, 탄연선사坦然禪師의 필적은 본 탁본 본이 아니면 쉽사리 얻어 볼 수가 없다. 따라서 본탁본본의 비중을 진요공의 행장 자체 보다도 탄연선사의 필적에 두어야 할 것이다. 坦然(1070∼1159)은 고려의 고승으로, 속성 손씨, 호 묵암默庵이며, 시호는 대감국사이다. 국사의 비명에 따르면 그는 천생의 이재로 9세에 속문, 15세에 명경생明經生에 들어갔을 만큼 재주가 비상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19세에 이미 世子(睿宗)師로서 東宮에 出仕할 정도의 수재였지만, 그는 안적사 安寂寺에 가서 승이 되고 뒤에 중대사·삼중대사·선사重大師·三重大師·禪師 등 승려로서 높은 위계位階를 받고, 또 누대에 걸쳐 왕실로부터 융숭한 대우를 받았다. 그의 특장特長은 무엇보다도 비명에도 보이듯이 필법 즉 서예에 있었다. 그리하여 당대의 학사 홍관洪灌과 늘 함께 칭명이 되고 있었다 한다. 따라서 무릇 寶殿·화루寶殿·花樓의 제액題額과 병장屛障 기타 명문들은 대개 두 사람의 필적으로 쓴 것이 많았고, 송나라 사람들도 그의 묘묵妙墨을 사랑하여 글씨를 받고자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 李匡師 같은 사람도 일찌기 「여승원연 전상성교서 이실계동인단수지화麗僧垣然 專象聖敎序 而實啓東人團授之畵」(서화징 p.18)고 한 대로 왕희지의 특성이 무엇보다도 강하게 풍긴다. 그리고 그의 필적 가운데의 하나인 本 ≪문수원중수비文殊院重修碑≫에 대해 ≪나려림랑고羅麗琳瑯考≫ 같은 데서는 「행호行毫가 마치 봉황이 춤추는 듯하다」고 격찬한 바도 있을 만큼(槿域書畵徵 p.19) 本 碑는 우리나라 書藝史上 중요한 작품이다. 그러나 해서제액楷書題額 12자가 없는 것은 본 탁본본의 결점이라 하겠다
당나라 공주와 상사뱀 전설
청평사 삼층석탑(공주탑)
청평사에는 애화 맺힌 당나라 공주의 전설이 있다.
"중국 당나라 때 태종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눈물의 씨앗이 사랑이던가. 공주는 평민 청년과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이를 안 태종의 노여움으로 청년은 사형을 당하고 죽어서 상사뱀이 되어 어느날 자는 공주의 몸을 칭칭 감아버리어서 아무도 이 뱀을 때어 낼 수가 없었다. 어느 노승의 말에 따라 신라에 영험이 있다는 절을 찾아 청평사 근처에 이르렀다. 목욕하고 굴(지금의 공주 굴)에서 잠을 잔 다음 날 범종소리 은은히 들려오는 아침이었다. 아침밥을 구하러 간다는 공주의 말에 상사뱀이 몸을 풀어주자 공주는 청평사 법당에서 법회를 올리고 있었다. 상사뱀이 공주를 찾아 이 절의 회전문에 들어서는 순간 벼락을 맞고 상사뱀은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런 소문을 들은 태종이 기뻐하며 금 세 덩어리를 보내 주었다. 하나는 공주가 거처할 건물을 짓고, 또 하나는 공주의 귀국할 여비로, 나머지는 후일 건물을 고칠 때 쓰라는 것이었다. 그 일부를 오봉산 어디엔가 묻어 두었다 한다. 공주는 한편으로는 상사뱀의 극락왕생을 빌면서, 부처님의 은공에 보답하려고 청평사에 삼층석탑을 세워놓고 귀국하였다."
그때 목욕하던 웅덩이를 '공주탕', 쌓았다는 삼층석탑은 '공주탑'이란 이름으로 전하여 오고 있다.
이런 전설이 청평사 가는 주차장 서쪽 끝에 공주와 상사뱀 전설이 당시 공주의 모습과 함께 그 유래 탑이 서 있다.
뱀을 기다리며 -청평사 공주탑에 기대어-한 승 태
이렇게 낙담하는 마음이 많으니
한때 사랑도 참 많았나 보다
이름을 淸平이라 하고 석탑을 쌓은들
호랑이와 이리가 주인자리를 내놓을 수야 있나
두려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아홉 가지 소리로 폭포는 떨어지는데
떠난 뱀은 언제나 오는 걸까
아직도 그림자못의 공주는
저문 능선에 귀 기울이고
그대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난 아직 이해할 수 없다
공주탑은
환희령 작은 언덕 위에 있다
탑신의 모서리마다 새겨진 火印을
옥개석 위로 기어 올라간 영혼을
山寺 길목의 높은 곳에 이르러
바람만 공양하고 간다.
어쩌자고 뱀으로 사랑을 알았을까
서쪽 능선으로 몇 겁의 허물을 벗고
저물어 흐르는 길 돌아갈 때마저 잃어
邂逅고개까지의 억새밭에는 햇살이 많다
돌아갈 숲속엔 여전히, 그대
산새들의 보금자리 군데군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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