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서예특강-28] 최초로 米點山水畵를 창조한 서화가

2012. 6. 6. 10:53서예가

28. 최초로 米點山水畵를 창조한 서화가


최초로 미점산수화(米點山水畵)를 창조한 사람은 북송의 미불이다.

미불(米芾, 1051~1107)의 처음 이름은 불(黻)이고 자는 원장(元章)이며 호는 녹문거사(鹿門居士)․양양만사(襄陽漫士)․해악외사(海嶽外士)이고 후에 불(芾)로 개명했다.  본적지는 산서성 태원(太原)이고 후에 호북성 양양(襄陽)으로 옮겼기 때문에 세상에서 미양양(米襄陽)으로 불렀으며 만년에는 강소성 진강(鎭江)에 정착했다.  휘종인 조길(趙佶)이 미불을 서화학박사로 불렀고 벼슬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에 이르렀기 때문에 사람들은 ‘미남궁(米南宮)’으로 일컬었다. 

미불은 천성이 고매하고 인물됨이 소산하며 옛것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고 괴석을 많이 모았으며 행동거지는 자유분방하여 세상에서 ‘미전(米顚)’이라 불렀다.  그는 시와 문장에 능했고 감상에 정통하며 서화에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가 그린 산수화는 동원(董源)으로부터 나와 천진함을 나타나면서 공교하고 섬세함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수묵점염(水墨點染)을 많이 운영했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붓을 믿고 제작함에 대부분 연기와 구름으로 수석을 가리고 덮어 뜻과 같으면 문득 그친다.

信筆作之, 多以煙雲掩映樹石, 意似便已.


이렇게 가로로 점을 찍어 쌓는 화법은 구확첨준(鉤廓添皴)의 전통을 타파하여 새로운 풍격을 개창한 것으로 그림에는 수묵이 무르익고 기운이 생동한다.  회화사에서는 그와 아들인 미우인(米友仁)의 화법을 ‘미가산(米家山)’․‘미씨운산(米氏雲山)’․‘미파(米派)’라 불린다.

미불의 서예는 이전 사람의 장점을 널리 취해 용필이 뛰어나고 호매하며 기운과 풍격은 호방하여 채양ㆍ소식․황정견과 함께 ‘송사가(宋四家)’라 불렸다.  그의 서예는 처음에 왕희지 부자를 스승으로 삼았고 전서는 사주(史籒)를 종주로 삼았으며 예서는 사의관(師宜官)으로 들어갔다.  그는 스스로 “글씨 잘 쓰는 사람은 단지 한 필치만 있으나 나는 유독 사면이 있다[善書者只有一筆, 我獨有四面].”라고 한 것을 보면 자신을 매우 높게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고종인 조구(趙構)도 『한묵지(翰墨志)』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불이 글씨에 능하다는 이름을 얻었으니 국내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것 같다.  미불은 진해․전서․예서에 매우 공교하지 않았으나 오직 행서와 초서는 진실로 능품에 들었다.  미불은 육조의 한묵을 수집하고 붓끝에서 따랐다.  그러므로 침착통쾌함이 마치 준마를 타고 나가고 물러남에 여유가 있어 채찍과 굴레를 번거롭게 하지 않은 것 같아 사람의 뜻에 마땅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천고에 그 법을 본받는 자는 그 외모를 얻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높이 보고 활보하며 기운이 위풍당당하여 특별히 그 안에서 본래 육조의 묘한 곳을 근본으로 하여 온양함을 탐구하지 않더라도 풍골은 자연히 속되지 않았다. 

米芾得能書之名, 似無負于海內. 芾于眞楷篆隸不甚工, 惟于行草誠入能品. 以芾收六朝翰墨, 副在筆端, 故沉着痛快, 如乘駿馬, 進退裕如, 不煩鞭勒, 無不當人意. 然千古效其法者, 不過得其外貌, 高視闊步, 氣韻軒昻, 殊不究其中本六朝妙處醞釀, 風骨自然超逸也. 


이것이 보면 당시 미불의 글씨가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글씨는 작은 종이에 몇 자 있는 것도 다투어 서로 구하여 진귀한 보물로 여겼으며, 비문 글씨를 청하느라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의 묵적으로는 <초계시권(苕溪詩卷)>․<촉소첩(蜀素帖)> 등 여러 종류가 있다.  논저로는 『서사(書史)』․『화사(畵史)』․『보장대방록(寶章待訪錄)』 등이 있는데 모두 평소에 서화를 논한 말들이다.  그가 말한 바는 항상 독창적인 곳이 있어 실제로 좁은 길에서 벗어나 서예가의 법도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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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여민락(與民樂)
글쓴이 : 설촌(雪村)청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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