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서예특강-31] 송(宋)대의 4대 서예가

2012. 6. 6. 10:54서예가

31. 宋代의 四大書藝家


송나라에서 걸출한 사대 서예가는 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ㆍ미불(米芾)ㆍ채양(蔡襄)이다.

소식(蘇軾, 1036-1101) 자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東坡)이며, 미산(眉山, 지금의 四川省에 속함) 사람으로, 벼슬은 단명전한림시독학사(端明殿翰林侍讀學士)ㆍ예부상서(禮部尙書) 지냈다.  소식의 문장은 혼후하고 분방함을 함유하였,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으며, 저술이 매우 풍부하다.  소식은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고,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널리 여러 사람의 장점을 취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행서와 해서에 뛰어났고, 왕승건(王僧虔)ㆍ이옹(李邕)ㆍ서호(徐浩)ㆍ안진경(顔眞卿)ㆍ양응식(楊凝式) 등에서 힘을 얻었다.  용필은 풍유롭고 질탕하며, 천진난만한 뜻이 있어, 홀로 한묵(翰墨)에서 천하의 묘함을 얻었으며, 황정견ㆍ미불ㆍ채양과 함께 ‘송사가(宋四家)’로 불렸다.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의 자는 노직(魯直)이고, 호는 부옹(涪翁)이며, 분령(분령, 지금의 江西省 修水) 사람이다.  또한 산곡도인(山谷道人)이라고도 부르며, 벼슬은 저작랑(著作郞)에 이르렀으나 뒤에 폄적을 당하였다.  그의 학문과 문장은 세상에서 뛰어났다.  서예는 처음에 주월(周越)을 스승으로 삼았고, 뒤에 안진경과 회소로 거슬러 올라갔으며, 특히 <예학명(瘞鶴銘)>에서 득력하였다.  용필은 기운 형세로 험절함을 취하였고, 종횡으로 꺾으며 우뚝솟아 스스로 격조를 이루었다.  그의 흉중에 높고 묘함을 품고 있어서 씌어진 글씨는 굳세면서도 속되지 않고, 감춰진 것을 높이 펴냄에 파리하고 굳세면서 원만하게 통하여 후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불(米芾, 1051-1107)의 자는 원장(元章)이고, 호는 해악외사(海嶽外史)ㆍ양양만사(襄陽漫士) 등이 있다.  원래는 산서성 태원(太原) 사람이나 뒤에 호북성 양양(襄陽)으로 옮겼기 때문에 세상에서 미양양(米襄陽)이라 불렀고, 벼슬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에 이르렀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또한 미남궁(米南宮)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미불은 사람됨이 대범하고 구속되지 않았고, 문장은 기이하고 험절했다.  특히 서예가 묘하여 침착하고 웅장하면서 날아 춤추는 것 같고, 바람에 부는 돛대와 진을 달리는 말처럼 침착통쾌하다.  만년에는 법도를 넘나들며 의외의 뜻을 깊게 얻었다.

채양(蔡襄, 1012-1067)의 자는 군모(君謨)이고, 흥화선유(興化仙游, 지금의 福建省에 속함)사람이다.  그의 성정은 바르고 강직하며, 역사에 밝았고, 벼슬은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에 이르렀다.  그의 서예의 필력은 매우 굳세고, 자태의 아름다움에 남음이 있으며, 스스로 일종의 풍격이 있었다.  소식은 그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채양의 글씨는 천부적인 자질이 높고, 배움이 깊이 쌓였으며, 마음과 손이 서로 응하여 변한 자태가 무궁하였기 때문에 송나라 제일의 서예가가 되었다.

君謨書天資旣高, 積學深至, 心手相應, 變態無窮, 逐爲本朝第一.


채양이 쓴 큰 글씨는 수 척(尺)이 넘고, 작은 글씨는 머리카락 같다.  필력의 위치에서 큰 글씨는 촘촘하고 치밀함을 잃지 않았고, 작은 글씨는 너그러움을 잃지 않아 당세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출처 : 여민락(與民樂)
글쓴이 : 설촌(雪村)청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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