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5. 09:14ㆍ서예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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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兩晉과 十六國시대의 서예
1. 西晉시대의 서예
晋의 武帝 司馬炎은 삼국의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50년의 짧은 기간밖에 유지하지 못한다. 북방 민족의 세력 확장으로 반세기 동안 수많은 전쟁으로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결국 長江의 북쪽은 북방 민족에게 내어 주고 또다시 분열을 맞이하였다. 사회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새로운 철학인 ‘玄學’이 성숙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곧 漢나라 시대의 전통 사상으로 자리잡은 儒學을 대신하였다. 老莊사상을 중심으로 한 玄學은 오직 유학만을 숭상한 ‘獨尊儒術’의 정치와 윤리 사상을 바꾸어 매우 폭넓은 자연 사상으로 전환하였다. 玄學의 흥성은 先秦시대의 제자백가 철학 이후 宋明의 理學과 함께 중국 철학사에서 가장 큰 획을 긋는 중심 사상으로 평가된다. 宗白華는『美學散步』에서 “中國周秦諸子以後第二度的哲學時代.”(玄學의 시대는 先秦시대의 제자백가 이후에 두 번째 높은 철학 시대이다.)라 하여 魏晉南北朝시대의 玄學이 중국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철학과 미학의 새로운 인식은 문화와 예술이 발전하고 성숙하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으며 서예의 수준도 매우 높아지게 되었다. 漢나라와 三國시대가 서예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서예의 가치를 실용에서 예술적 지위로 끌어올리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며 서예사에 가장 높은 예술 시기로 평가받는 晉나라의 서예를 탄생하게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兩晋의 서예는 唐나라의 詩와 宋나라의 詞 그리고 元나라의 曲과 더불어 가장 높은 예술 영역으로 인정받고 있다.
西晉은 역사가 짧을 뿐만 아니라 혼란의 시기인 까닭으로 서예의 저변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三國을 통일한 武帝시대에는 서예를 중시하여 書博士 제도를 설립하였으며 서예로서 관리를 뽑기도 하였다. 西晉의 서예가로는 衛瓘과 아들 衛恒 그리고 索靖과 陸機등 몇 명의 뛰어난 작가와 작품들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書法 이론이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여 문자의 발생과 변천 그리고 篆書, 隸書, 草書 등 서체의 형성과 그 형세에 관하여 평술 하기에 이른다. 西晉의 대표적 書論으로 衛恒의『四體書勢』와 索靖의[草書狀』 그리고 成公綏의『隸書體』 등을 들 수 있다.
衛瓘(220-291년)은 字가 伯玉이며 河東의 安邑(지금의 山東省 夏縣)사람이다. 아버지는 魏나라 시대의 걸출한 서예인 衛覬이며 아들은 저명한 書論家인 衛恒이다. 魏나라에서 鎭東將軍과 尙書郞의 관직을 살았고 晋나라가 건립한 후에는 太子小傅와 尙書令의 지위에 올랐다고 전한다. 그는 張芝의 서예를 배워 草書를 매우 잘 썼으며 글씨 속에 아버지인 衛覬의 서풍이 많이 함유되어 있었다는 평이다. 張懷瓘은『書斷』에서 衛瓘의 서예를 神品에 수준으로 평가하고 “引索靖爲尙書郞, 號一臺二妙.······常云 ‘我得伯英之筋, 恒得其骨, 靖得其肉’.伯玉采張芝法, 取父書參之, 遂至神妙.”(索靖을 천거하여 尙書郞의 벼슬에 오르게 하였고 당시에 一臺二妙라 불렸다.·····항상 ‘나는 張芝의 근육을 얻었고 衛恒은 그 골기를 얻었으며 索靖은 그 살을 얻었다.’라고 말하였다. 衛瓘은 張芝의 書法을 배웠으며 글씨 속에 아버지인 衛覬의 서풍을 함유하여 신묘한 경지에 올랐다.)라 하여 衛瓘의 草書를 索靖과 함께 높이 평가하였다. 현재 전하고 있는 작품으로는『淳化閣帖』과『大觀帖』에『頓首州民帖』이 있으나 그 작품이 眞跡을 새긴 것인지 위작을 새긴 것인지 정확한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索靖(239-303)의 字는 幼安이며 甘肅省의 敦煌 사람으로 張芝 누이의 손자이다. 관직은 尙書郞에 올랐으며 安樂亭侯에 봉하여졌다. 張芝의 서예를 배워 章草와 草書에 뛰어났으며 衛瓘과 함께 당대 제일의 서예로 이름을 날렸다. 張懷瓘은『書斷』에서 王隱의 말을 인용하여 “精熟至極, 索不及張; 妙有餘姿, 張不及索.”(정묘하고 무르익기가 극에 달한 것으로는 索靖이 張芝에 미치지 못하나 오묘한 자태에는 張芝가 索靖에 미치지 못한다.)이라 하였고 또 蕭子良의 말을 인용하여 “又善八分, 韋鍾之亞,『毋丘興碑』是其遺跡也.”(또한 八分에 뛰어났으며 韋誕과 鍾繇에 버금간다.『毋丘興碑』가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이다.)라 하여 索靖의 草書가 張芝와 비슷한 수준이며 隸書도 韋誕과 鍾繇에 버금가는 뛰어난 서예가임을 설명하였다. 索靖의 작품으로『毋丘興碑』와『出師頌』(2003년 8월 고궁박물원에서 민간에 돌아 다니던 것을 2200만 원에 구입 금교 9월호 소식 참고)이 唐나라 시대까지 전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에는 전하지 않으며『淳化閣帖』과『大觀帖』 등의 閣帖속에『載妖帖』,『七月帖』,『月儀帖』이 전하고 있다. 또한『晉書․索靖傳』에 그의 書論인『草書狀』의 전편이 수록되어 있으며『墨池編』과『書苑菁華』에『草書勢』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陸機(261-303)의 字는 士衡이며 吳郡(지금의 江蘇省 蘇州)사람으로 관직이 平原內史와 太子洗馬에 올랐었다. 章草에 뛰어났으며 章草로 쓴 墨迹 眞本인『平復帖』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平復帖』은 章草와 今草의 중간 형태로 종이에 쓰여진 작품으로 작자를 알 수 있는 최초의 墨迹진본으로 9행의 84자가 쓰여져 있다. 筆勢와 서풍 그리고 심미적 특징이 근래에 출토된 東晉시대의 簡牘이나 殘紙의 章草 작품에 매우 근접하고 있다. 淸나라에서 활동한 조선 사람인 安岐는『墨緣彙觀』에서 “此帖大比章草, 運筆猶存篆法.”(平復帖은 모두 章草의 筆劃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運筆에 여전히 篆書의 법칙이 존재한다.)이라 하여 篆書의 옛 법이 남아 있는 작품이라 지적하였다. 宋나라 시대에는 宮中에 소장되어『宣和書譜』에 수록되었으며 현재는 北京의 故宮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이상의 저명한 서예가 이외에도 西晉시대의 서예가로는 杜預(222-284)와 張華(232-300) 그리고 王衍(256-311년)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비록 작가는 알 수 없지만 西域에서 출토된 많은 紙本과 簡牘本의 墨跡眞本이 전하고 있어 書體의 변천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된다. 西晉시대에는 曹魏시대의 禁碑令의 영향과 武帝의 咸寧 4년(278)에 또다시 내려진 禁碑令의 영향으로 刻石서예 작품이 많이 전하지는 않지만 몇 점의 刻碑와 墓誌銘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刻石서예 작품으로는 武帝시대의 太始 6년(270)에 세워진『南鄕太守郛體碑』, 太始 8년(272)의『任城太守孫夫人碑』, 太康 10년(289)의『齊太公望表』 등의 刻碑 작품과 연대 미상의『劉韜墓誌』, 元康 원년(291)의『成晃碑』,『魏雛柩銘並陰』,『左棻墓誌並陰』등 墓誌銘 서예가 전하고 있다. 이들 刻石에 새겨진 隸書는 漢나라 말기부터 시작된 쇠퇴하기 시작한 隸書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墓誌銘의 형식도 南北朝시대의 墓誌銘과는 달리 禁碑令의 영향으로 비석의 형태를 작게 하여 墓에 묻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刻石 서예 이외에 西晉시대의 작품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墨迹으로 남아 있는 簡牘과 紙本 서예이다. 그 중에서도 불교의 영향으로 불경을 기록한 寫經은 서예사에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元康6년(296)의 연호가 기록되어 있는『諸佛要集經』은 민간 서예의 연구와 寫經서체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諸佛要集經』은 1912년 新疆의 吐魯番에서 출토된 사경으로 隸書에서 楷書로 완성되는 과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2. 十六國의 서예
晉의 武帝가 죽고 난 후 八王의 난으로 국력이 쇠약해지는 틈을 타고 북방 민족은 남쪽으로 세력을 크게 확장시키기에 이른다. 晋은 북방 민족의 침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 다섯 胡族의 국가가 흥성과 멸망을 거듭하였다. 이 때 북쪽 지역에 존재했던 국가는 匈奴의 劉淵이 세운 漢을 포함하여 後趙, 前燕등 열 여섯 나라였다. 따라서 역사는 이 시대를 十六國시대라 부른다. 十六國시대는 전쟁과 각종 재난으로 일반 백성은 물론 관료 계급까지도 평안한 생활을 하기가 힘들뿐 아니라 목숨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불안한 마음을 종교를 통하여 안정시키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유입된 지 얼마 안 되는 불교와 漢나라 후기에 발생한 道敎가 점차 성행하게 되고 사람들은 사찰이나 도인을 찾고 또 그들에게 의지하였다. 서예 불교와 도교의 영향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혼란한 사회의 영향으로 크게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훗날 南北朝시대의 北朝서예의 한 주류인 造像記와 寫經 서예를 탄생하게 하는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十六國시대의 서예는 魏晉시대의 서풍을 계승하였으며 서체는 隸書와 楷書가 통용되었다. 당시의 북방 민족은 대부분 유목 생활을 하는 민족으로 한문화에 비하여 낙후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書法藝術도 몇몇 漢族으로 十六國에 남아서 관직을 살던 사람들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때의 서예가로는 前涼의 張軌와 李暠, 後趙의 崔悅과 盧諶 등이 있다. 十六國시대의 서예 작품으로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刻石 서예로 前秦의『鄧太尉祠碑』와『廣武將軍碑』, 後秦의『遼東太守呂憲墓表』, 後燕의『崔遹墓誌』, 北涼의『程段兒石塔刻經』과『且渠安周造寺碑』, 前燕의『漢白石神君碑題記』 등이 있다. 墨迹 서예로는 前涼의『李柏文書』, 後秦의『大雲無想經』과『譬喩經』, 後涼의『優婆塞戒經殘卷』 등이 있다. 이중에서『廣武將軍碑』와『且渠安周造寺碑』 그리고 墨迹 진본인『李柏文書』등이 서예사에서 가치와 예술성이 높이 인정되는 작품으로 꼽힌다.
『廣武將軍碑』는 前秦의 建元 4년(368)에 새겨진 작품으로『張産碑』로도 불린다.『鄧太尉祠碑』와 함께 前秦의 가장 뛰어난 군주인 苻堅시대의 작품이다. 이들 두 비석이 모두 隸書의 기본 형태를 지니고 있으나 해서의 筆劃을 첨가하였으며 획의 굵기가 글자의 크기가 들쭉날쭉하며 자유분방하고 삐뚤삐뚤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結字와 筆劃은 漢碑와 魏碑의 隸書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北朝시대의 造像記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태이다. 前秦은 五胡 국가 중에서 비교적 높은 수준의 書法藝術 작품을 남기고 있다.『廣武將軍碑』와『鄧太尉祠碑』는 당시 유목민족의 호방한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且渠安周造寺碑』는 北涼의 承平 3년(445)에 새겨진 刻碑로서 淸나라 光緖 연간에 新疆 吐魯番의 옛 성에서 출토되었다. 書體는 隸書의 기본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가로획의 起筆이 北魏 楷書의 모양과 筆法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筆法은 東晉시대의『爨寶子碑』의 筆劃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隸書에서 楷書로 변천하는 과도기적 형태의 특징이다.
『李柏文書』는 前涼시대 永樂 원년(346년)의 墨跡 眞本으로 西域의 長史關內侯이던 李柏이 쓴 편지글이다. 모두 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行書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서체로 예술성은 물론 서예사에서의 가치가 매우 높은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李柏文書』의 서풍은 西晉과 東晋시대의 민간 서예에서 자주 나타나는 질박하고 천진스러운 미감이 심미적 특징이다.
十六國시대는 북방 유목 민족이 지배한 시기로 한문화의 핵심 예술인 서예가 크게 융성하지는 못했지만 점차 남방의 문화를 받아들여 성장해 가는 시대로서 그들만의 독특한 서예의 미적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고 말할 수 있다. 十六國시대 대부분의 왕조와 백성들은 불교를 숭상한 까닭으로 寫經과 造像記 그리고 塔刻 經文 등의 서예 작품이 주로 남아 있다. 서사 재료에 있어서도 簡牘보다는 종이가 점점 광범위하게 사용된 시기로 殘紙本 서예 작품이 비교적 많이 출토되고 있다. 또한 그 숫자는 적지만 몇몇의 磚文 서예 작품과 畵像記 작품이 전하고 있다.
3. 東晋시대의 서예
八王의 난과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황하 유역은 큰 혼란을 겪고 있었으나 長江 이남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中原 지역에서 권력을 쥐고 있던 귀족과 관료 계층들은 난리를 피하여 속속 강남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강남은 황족의 후예인 司馬睿가 安東將軍의 관직으로 모든 행정과 군사를 관리하고 있었다. 司馬睿는 강남의 실권자와 이주해 온 귀족과 관료들의 지지로 권력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했다. 316년 晉의 愍帝가 十六國 가운데 하나인 漢의 포로가 되자 강남의 귀족들은 司馬睿를 진의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의 역사를 東晉이라 부른다.
西晉시대의 전쟁과 혼란을 겪은 후 강남으로 이주한 東晉의 귀족은 물론 백성들까지도 삶에 대한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 전통적인 철학 사상인 儒敎가 자신들의 생활에 별로 유익하지 못하다는 생각으로 道家와 道敎적 생활에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되었다. 따라서 漢나라 후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玄學의 淸談 사상은 西晉을 거쳐 東晉에 들어와서는 최고의 위치로 자리잡는다. 老莊의 자연 사상과 儒家의 名敎가 융합되고 또 佛敎의 사상이 더하여진 玄學은 “天地萬物皆以無爲本”(천지 만물이 모두 무위를 근본으로 한다.)이라는 ‘貴無’ 사상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귀족들은 이상과 현실 속에서 철학과 정치와의 관계에 대하여 깊은 고찰을 하게 되었으며 정신 세계의 추구가 더욱 강렬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玄學 사조의 영향은 문화 각 영역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중심 철학이 되었으며 서예의 심미적 범주도 더욱 광범위하고 높아져 가게 되었다. 玄學 사상은 서예 작품의 韻致를 숭상하고 품격과 골기를 추구하는 미학 영역을 형성하며 중국 서예사에서 가장 뛰어난 書法藝術의 시대로 기록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東晉시대는 書體 발전사의 측면에서 볼 때 한자 書體가 완성된 시기이며 종이가 簡牘 등의 서사 재료를 밀어내고 완전히 사용되었다. 또한 서사 활동이 실용 위주에서 예술 행위로서 창작하는 자각 시대에 접어들어서 서예들의 창작 활동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東晉시대의 서예는 중국 서예사에서 가장 뛰어난 시대로 평가되며 그 중에서도 行書와 草書의 업적이 매우 뛰어나다. 중국 문학과 예술사에서 漢나라의 賦, 唐나라의 詩, 宋나라의 詞와 함께 東晉시대의 서예는 중국 문화의 가장 높은 수준으로 평가된다.
東晉의 서예가 번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玄學의 淸談 사상이 가장 큰 배경이었으나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시대적 혹은 물질적 배경이 뒷받침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서예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정신과 서예에 대한 예술적 축구로 서예 가문이 탄생하고 또 그 수준이 높아지고 또 서예 이론의 발전으로 서예의 심미적 범주를 폭넓게 하여 활발한 창작 활동에 미학적 기초를 제공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三國시대와 西晉을 거치는 동안 楷書와 行書 그리고 草書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며 東晉시대에 결국 書體의 완성을 맞이하는 서예와 서체 내부적 배경 이외에 붓과 먹, 종이를 만드는 기술의 발전으로 서사 용구의 개량이 물질적 배경에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문화와 교육의 정치제도 또한 東晋 서예의 수준을 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西晉시대에 설치한 ‘書博士’ 제도의 영향으로 鍾繇와 胡昭 등 뛰어난 서예를 후학들에게 가르치게 되었으며 뛰어난 서예 수준으로 관직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서예의 연마에 열중할 수 있었다. 東晉시대까지는 蔡邕의 隸書, 張芝의 草書, 劉德升의 行書, 鍾繇의 楷書 등 많은 墨跡들이 전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곧 晉나라 사람들에게 바로 살아 있는 法本이 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와 사회 그리고 물질적 배경들이 東晉의 서예를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東晉시대 서예의 가장 뛰어난 성과는 行書와 草書에서 찾을 수 있으며 후세의 끼친 영향도 매우 심원하다고 평가 할 수 있다. 書體 중에서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書體는 行書이며 東晉시대의 서예가들이 가장 잘 표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東晉의 서예는 漢나라 이전의 서예와 단순히 기록하는 수단이 아니라 창작하고 감상하는 예술적 경지로 인식하였다. 당시의 서예가들은 작품을 창작할 때 자신의 사상과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書體로 行書와 草書를 중요한 표현 수단으로 삼았다. 草體字인 行書와 楷書는 다른 正體字보다 筆劃은 물론 결구와 布置가 자유스럽고 또 흐름과 율동이 많으므로 감정의 흐름과 음률을 잘 표현할 수 있다. 東晋의 서예가는 결구와 형체의 아름다움을 중요시하였을 뿐 아니라 體勢와 筆勢에 내재된 운치와 품격을 추구하였으며 이것을 통하여 작가의 내면세계와 심미적 감정을 표현하였다.
東晋시대의 서예는 귀족과 문벌 중심으로 전통을 계승하며 발전하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의 서예 세가는 王家, 衛家, 郗家, 庾家, 陸家 등으로 이들 문벌 귀족은 정치적 지위와 학문적 지위가 매우 높았으며 당시의 淸談 사상의 영향으로 자연 경치를 벗삼아 시를 짓고 서예를 하는 등의 풍류를 좋아하였다. 이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실력을 나타내고 있는 가문은 王氏 世家로서 수많은 서예가를 배출하였으며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서예가는 王羲之와 王獻之 부자이다. 王氏 世家는 宋, 齊, 梁, 陳으로 이어지는 南朝와 막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그 영향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曹魏시대에 내려진 禁碑令은 東晉시대에도 영향을 끼쳐서 刻碑를 세우는 행위는 여전히 자유스럽지 못하였다. 따라서 수많은 帖本과 민간의 墨跡인 殘紙本을 남기고 있는 이때에도 刻石 서예 작품은『爨寶子碑』,『楊陽神道闕』,『張鎭墓誌』,『謝鯤墓誌』,『顔謙婦劉氏墓誌』,『王興之․宋和之夫婦墓誌』,『王閩之墓誌』,『王丹虎墓誌』,『孟府君墓誌』,『朱曼妻買地券』 등이 전할뿐이다. 이 가운데서도 대부분이 墓誌이며 떠 碑刻이라 할지라도 중앙의 권력이 잘 미치지 않는 변방에 세워진 것이 특징이다. 東晉시대의 刻石 서예는 대부분 隸書에서 楷書로 변천하는 과정에 있는 書體들이다. 이러한 書體를 현대의 문자학자들은 新隸體라 부르고 있다. 新隸體라는 용어가 그 서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특징을 대신하는 명칭이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이미 새로운 서체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필자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러한 書體로 쓰여진 東晋시대의 刻石 서예는 비교적 서투른 맛과 질박한 심미적 특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시대의 刻石 작품으로 예술성이 뛰어나며 서예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은『爨寶子碑』와『王興之․宋和之夫婦墓誌』 등을 꼽을 수 있다.
新隸體는 魏晉시대에 이미 완성되어 사용되고 있던 隸書와 章草이외에 隸書에서 楷書로의 변화를 진행하고 있는 도중에 나타나는 형태의 書體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書體는 漢나라 후기와 魏晉시대에 민간에서 사용되었던 俗體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楷書의 결구를 위주로 하고 있으나 隸書의 筆意에 行草의 자유스러운 맛을 동시에 첨가하여 발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新隸體는 東晉의 刻石 자료 뿐 아니라 簡牘이나 殘紙本의 서예 자료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서체이다. 서체 변천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新隸體가 東晋의 많은 보편적 서체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당시에 서사 행위는 귀족 관료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보편적으로 행하여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뛰어나고 유명한 귀족 계층의 몇몇 서예가는 이미 완성된 전형적인 楷書를 쓰고 있었지만 이상의 서예 자료를 살펴볼 때 보통의 관료 계층과 민간에서 사용하는 서체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유는 당시 서예에 관련된 물질적 환경이 삼국 시대 이전보다는 매우 성숙하여 민간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게 서사 재료를 구하여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사 활동이 사회 전반에서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따라서 官方에서 사용하던 서체와 민간에서 사용하는 서체의 교류가 쉽게 이루어 질 수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서체의 영역이 통일 될 수 있었다. 그리고 漢나라 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전문 서예가 계층이 점점 두터워 지고 뛰어난 서예가가 많이 나타나게 되자 다른 귀족 계층은 물론 일반 백성들도 이들의 서예를 법칙으로 삼아 연마하게 되었으며 서체의 계층별 차이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었다. 서체의 통일 현상은 南朝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王羲之의 서풍으로 통일되었다. 따라서 南北朝시대 이후에는 官方과 민간의 서체 구분은 사라지게 되었으며 서예사에서도 시대적 혹은 개인적 서풍에 대하여 연구하는 것을 중심으로 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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