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5. 09:15ㆍ서예일반
Ⅱ. 三國시대의 서예
1. 魏나라의 서예
魏(220-265)나라는 東漢의 정권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東漢의 정치와 문화의 많은 부분을 계승하였다. 曹丕가 정식으로 魏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우기 전부터 東漢 말기의 정치는 曹操의 영향권 안에서 이루어졌다. 曹操는 東漢시대 후기의 걸출한 정치가이며 문학가이자 서예가였다. 수많은 전쟁 때에도 문학과 서예를 숭상하여 새로운 文風을 열었으며 문단의 영도자 역할을 하였다. 또 수많은 서예 작품을 수집하고 훌륭한 서예가를 찾아내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도 서예의 창작에 심취하여 상당히 높은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고 전한다. 南梁의 庾肩吾는『書品』에서 曹操의 서예를 “筆墨雄贍.”(작품이 웅장하고 넉넉하다.)이라 하였고 唐나라 시대의 張懷瓘 또한『書斷』에서 “雄逸絶倫.”(웅장하고 활발하며 보통 수준을 능가한다.)라 평가하였다.
曹操가 가장 좋아한 서예가는 鍾繇이다. 鍾繇는 정치적 역량도 매우 뛰어났지만 魏나라 시대의 가장 걸출한 서예가로 曹操가 전쟁을 나갈 때에도 항상 대동하여 다닐 정도로 좋아하였다. 曹操가 매우 아낀 서예가는 鍾繇이외에도 매우 많이 있다. 荊州를 정벌할 때에는 그곳에 있는 유명한 서예가인 梁鵠을 먼저 회유하여 자신의 휘하에 둔 다음 전투를 시작하였으며 그의 글씨를 항상 장막에 걸어 놓고 감상하였다고 한다. 劉宋의 羊欣은『采古來能書人名』에서 “梁鵠得師宜官法, 魏武重之, 常以鵠書懸帳中, 宮殿題署多是鵠手也.”(梁鵠은 師宜官의 書法을 배웠다. 魏의 曹操는 그를 매우 좋아하였으며 항상 梁鵠의 서예 작품을 장막에 걸어 놓고 감상하였다. 또한 궁전의 현판도 梁鵠에게 쓰게 하여 그의 글씨가 많았다.)라 하여 曹操의 서예가와 서예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밖에도 魏나라의 서예가로 邯鄲淳, 衛覬, 胡昭, 韋誕 등이 유명하며 이들도 曹操와 曹丕의 적극적 후원 아래에서 비록 전쟁 중이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서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魏나라 시대의 서예가들은 東漢의 서풍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여 새로운 書體인 해서와 행서가 완성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隸書가 漢나라 중 후기에 완성되어 최고의 경지에 올라갔을 때 민간에서는 새로운 서체인 楷書와 行書가 성장하여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漢나라 멸망하고 魏나라 건국한 이후에는 楷書도 민간 俗體에서 官方의 정체로 그 사용이 공식화되었으며 점차 실용 서체의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楷書의 성숙은 魏나라 시대 서체 변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宋나라 시대의『宣和書譜』에는 “降及三國, 鍾繇者, 乃有[賀克捷表』, 備盡法度, 爲正書之祖.”(三國시대에 이르러 鍾繇의『賀克捷表』에는 楷書의 법칙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楷書의 시조가 되었다.)라 하여 楷書의 완성을 魏나라 시대 鍾繇의 공헌으로 평가하였다. 魏나라 시대의 서예 교육은 스승에게 전수 받는 師承의 전통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으며 한 스승을 중심으로 독특한 書派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鍾繇의 行書는 劉德升을, 邯鄲淳은 曹喜를, 韋誕은 邯鄲淳을 스승으로 섬기는 등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유지하고 書法을 전수하는 풍습이 점차 많아지게 되었다. 또 漢나라 시대와는 달리 서예에 작가의 이름이나 관직을 남기는 풍습이 많아졌다.
漢나라 시대의 후기에는 지방 세력들이 그 세력을 확장하고 반란이 빈번하여 점차 국력이 쇠약해지기 시작하였다. 또 중앙의 관료는 물론 권력이 있고 돈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조상이나 권력자의 頌德碑를 세우고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였다. 따라서 중앙의 통치권이 지방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세금도 걷히지 않아 제정은 나날이 빈약해 갔다. 曹操는 ‘禁碑令’을 내려 碑石을 세우는 행위를 엄격히 단속하였으며 권력을 자신에게로 집중되게 하였다. 이때 내려진 禁碑令은 魏나라 뿐 아니라 南朝시대에도 전통으로 자리잡아 남조의 여러 나라에서 비석을 세우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魏나라에서의 碑石를 세우는 행위는 극히 제한적이어서 그 숫자도 적을 뿐 아니라 용도도 황제의 즉위와 曹操의 공덕에 관계되는 것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曹丕가 즉위하면서 당시의 대표적인 서예가인 鍾繇와 衛覬로 하여금 魏나라의 건국이 하늘의 뜻을 받은 정당한 행위였음을 기록한 비석인『魏公卿上尊號奏』와『受禪表』를 쓰게 하고 세웠다.
『上尊號奏』는 曹魏시대의 黃初 원년(서기 220)에 새겨진 刻碑로 河南省 許州의 繁城鎭에 세워졌다.『受禪表』와 함께 曹丕의 황제 즉위가 하늘의 뜻과 신하들의 권유로 이루어진 정당한 사실임을 내용으로 한다. 碑額에는 “公卿將軍上尊號奏”가 篆書가 양각되어 있으며 碑陽에는 모두 32행, 각 행마다 49자의 隸書가 새겨져 있다.
『受禪表』는 碑額에 “受禪表”라 篆書로 양각되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上尊號奏』와 함께 黃初원년(서기 220)에 河南省 許州의 繁城鎭에 세워졌다. 1935년에 碑額은 끊어져 현재 故宮博物院에 보관되어 있다. 일반적으로『上尊號奏』는 鍾繇가,『受禪表』는 衛覬가 글씨를 썼다고 하나 두 작품 모두 梁鵠이 썼다는 기록도 보인다. 淸나라 시대의 翁方網은『兩漢金石記』에서 “此二碑實出一手, 書蓋純取方整.”(이 두 刻碑는 모두 한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書體가 모두 방정함을 갖추고 있다.)이라 하여 두 작품이 같은 서풍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의 작품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上尊號奏』와『受禪表』가 누구의 글씨인지 정확하게 고증되지 못하고 있다.
『上尊號奏』와『受禪表』가 모두 曹丕의 황제 등극에 관한 일을 기록하고 있으므로 당시의 가장 권위 있는 서예가에 의하여 글씨가 쓰여졌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겠다. 鍾繇, 衛覬, 梁鵠이 모두 당시에 가장 유명한 서예이므로 이들의 손에 의해 두 비가 쓰여졌다고 전하는 것이다.『上尊號奏』와『受禪碑』는 曹魏시대의 隸書 刻石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갖추고 있으며 三國시대의 隸書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書體가 방정하면서 엄숙하며 漢隸의 서풍을 비교적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점획의 변화가 단순하고 轉折부분이 많이 경직되어 있으며 漢나라 刻石과 비교할 때 예술적 수준이 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孔羨碑』도 위에서 설명한 두 비와 함께 黃初 원년에 세워진 魏나라 시대의 대표적 隸書이다. 碑額에는 “孔羨修孔廟碑”의 篆書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魏나라 文帝인 曹丕가 孔子의 21세손인 孔羨에게 宗聖侯의 벼슬을 내려 孔廟를 수리하고 제사지내게 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끝 부분에 “魏陳思王曹植詞, 梁鵠書.”(魏의 陳思王인 曹植이 문장을 짓고 梁鵠이 글씨를 쓰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은 당시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이 새겨 넣은 것으로 고증되고 있다. 書體의 結字가 방정하고 자형이 매우 길며 轉折 부분에 각이 많은 것 등 서풍이『上尊號奏』와 비슷하다. 이미 漢隸의 표준 結體인 偏方形에서 장방형의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楷書의 형세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淸나라 시대의 孫承澤은 “予觀其碑, 矯厲方板, 無論不及漢, 且遜[受禪』矣.”(내가 孔羨碑을 관찰해 보니 판자와 같이 변화 없어 漢隸에 못 미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受禪表』에도 못 미친다)라 하여『孔羨碑』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였다. 그러나 翁方網은『兩漢金石記』에서 “其書實自遒勁, 不必盡以漢隸一槪律之, 孫退谷(承澤)嗤其矯厲方板, 過矣.”([孔羨碑』의 書體는 진실로 매우 힘이 있으며 뛰어나다. 漢隸와 일률적으로 같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孫承澤이 판자와 같이 평평하게 하는 것에만 힘썼다고 비웃는 것은 지나치다.)라 하여 평가를 달리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孫承澤과 翁方網의『孔羨碑』에 대한 평가는 비록 각각 다르지만 漢隸와 서풍이 서로 다르다는 것에는 일치하고 있다. 魏나라 시대의 隸書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형세는 장방형이며 轉折부분에 모가 나고 점획이 楷書의 형태로 점점 바뀌어 가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것은 刻石 隸書도 楷書의 영향을 받아 형태가 변하고 있는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正始石經』은 魏나라 正始 연간(서기 240-249)에 세워진 石經이다. 儒家의 경전인『尙書』와『春秋』를 새겨서 洛陽의 太學앞에 세웠는데 古文과 小篆 그리고 隸書의 세 가지 書體를 사용하여 쓰고 새겼기 때문에『三體石經』으로 불리기도 한다.『正始石經』은 漢나라 시대의『熹平石經』이 세워진 뒤 60여 년이 지난 후 같은 자리에 세워졌다. 그러나 두 石經 모두 소멸되거나 부서져 땅속에 묻혀 버리고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근래에 石經의 파편들이 약간 발견되고 있다.
正始 연간은 明帝의 뒤를 이은 曹芳은 정치적으로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교육 사업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다. 전통 문화를 높이 받들고 儒家의 학문과 사상을 숭상한다. 正始 연간에 다섯 차례나 공자의 廟堂에 제사 지내고 태학의 博士들로 하여금 儒家의 경전을 강설하게 하는 등 儒學을 국가의 근본 통치 이념으로 채택한다. 儒學을 숭상하고 전통을 계승하는 정신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正始石經』이다. 曹芳은 漢나라 시대의『熹平石經』이 훼손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尙書』와『左傳』을 古文과 小篆 그리고 隸書로 새겨서 태학 앞에 세우게 하였다. 曹魏시대에 이미 일반적 장소에서는 古文은 사용되지 않는 書體이다. 그런데도 小篆과 古文으로 石經을 새기는 것은 당시 전통을 숭상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北魏시대의 江式은『論書表』에서 邯鄲淳이 古文에 능했으며『三體石經』을 썼다고 기록하였다.『三國志․本傳』에는 衛覬가 古文과 鳥蟲書 그리고 隸書와 草書 등에 두루 능통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을 근거로『正始石經』의 글씨는 衛覬가 글씨를 썼다고도 하며 邯鄲淳이 썼다고도 하지만 정확한 고증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당시에 小篆과 古文에 뛰어난 서예가로는 衛覬와 邯鄲淳이 있으며 衛覬는 邯鄲淳에게서 서예를 배웠다고 전한다.『三體石經』의 三體중에서 小篆은 현재 전하는『說文解字』의 小篆과 매우 비슷하고 隸書는 曹魏시대의 다른 隸書와 서풍이 같으며 古文은『說文解字』의 古文보다 小篆에 좀더 가까운 형태이다.
魏나라의 刻石 서예는 이상의 대표적 작품 이외에『張君殘碑』,『曹眞殘碑』,『王基碑』,『郛體碑』,『陳己殘碑』 등이 전하고 있다. 이들 刻石 서체는 대부분 漢나라 시대의 전통을 계승하여 隸書로 새겼다. 그러나 魏나라의 隸書는 이미 東漢의 장엄한 서풍은 사라지고 점점 빈약해 가는 양상을 나타낸다. 西漢의 서체는 簡帛 隸書 대표하고 東漢의 서예는 刻石 隸書가 대표하지만 魏나라로 넘어와서는 楷書와 行書가 점차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체의 변화는 완성되어 더 이상 새로운 서체가 탄생하지 않으며 서예가와 작품이 부각되기 때문에 서예사에서도 인물과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진다.
2. 魏나라의 서예가와 작품
1) 鍾繇의 서예
鍾繇(151-230)는 漢나라 桓帝시대의 元嘉원년에 穎川 長社(지금의 河南省 許昌)에서 출생하여 인생의 대부분을 漢나라와 함께 하였다. 따라서 그를 漢나라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隸書가 가장 성숙한 桓帝와 靈帝시대에 초년과 청년기를 보내면서 최고로 성숙한 漢隸를 익혔다. 그리고 漢나라에서도 孝廉과 侍中, 尙書僕射의 높은 벼슬에 올라 武亭侯에 봉해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가 曹魏시대에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서예의 업적도 가장 성대한 까닭으로 魏나라 시대의 서예가로 설명하는 것이다. 魏나라가 건국하면서 재상에 올랐고 明帝때 定陵侯에 봉해져 太傅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鍾太傅라 부르기도 하였다. 鍾繇의 生平과 업적에 관한 기록은 陳壽의『三國志․卷十三․鍾繇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魏晉시대 이후에는 鍾繇가 서예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王羲之, 衛覬, 張芝와 비슷하다고 평가하며 ‘鍾王’, ‘鍾衛’, ‘鍾張’ 등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는 서예를 전통의 법도가 엄격한 학문과 예술의 한 영역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며 그 법도의 시조를 이들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閣帖을 위주로 공부하는 帖學派는 鍾繇와 王羲之를 시조로 하여 ‘鍾王’의 명칭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刻碑를 위주로 공부하는 碑學派는 南宗서예의 시조로 鍾繇를, 北宗서예의 시조를 衛覬로 꼽고 있으므로 ‘鍾衛’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또한 ‘鍾張’의 명칭은 孫過庭이『書譜』에서 사용하였으며 그 원류는 南朝시대 宋나라 虞龢의 書論인『論書表』이다.『論書表』에 王羲之가 자신의 서예를 평하길 “頃尋諸名書, 鍾張信爲絶倫.”(요즘 여러 저명한 서예를 찾아보니 鍾繇와 張芝가 진실로 뛰어나다.)이라 말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孫過庭이 인용하고부터 서예의 수준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널리 사용하였다. ‘鍾王’, ‘鍾衛’, ‘鍾張’이라 부르는 것이 비록 사용하는 시각과 서체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鍾繇가 서예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며 그 평가도 매우 높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鍾繇는 隸書와 章草 뿐만 아니라 行書와 楷書에서도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楷書에 독보적이었다. 또한 書體의 변천이라는 관점에서도 楷書를 완성시킨 위대한 인물로 평가된다. 楷書 변천과 鍾繇의 관계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므로 여기서는 鍾繇와 그의 작품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한다. 唐나라 시대의 張懷瓘은『書斷』에서 “繇善書, 師曹喜, 蔡邕, 劉德升.”이라 하여 鍾繇가 曹喜와 蔡邕, 劉德升을 스승으로 하여 서예를 배웠다고 전한다. 曹喜는 漢나라 章帝(서기 76-88)시대의 사람으로 鍾繇가 직접적으로 배울 수 없었으며 蔡邕(?133-192)은 鍾繇보다 약 20세가 많아 직접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 鍾繇가 직접적으로 서예를 배운 사람은 劉德升이라는 주장이 가장 많으며 또한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로 인정된다. 晉나라 시대 衛恒은『四體書勢』에서 “魏初有鍾. 胡二家爲行書法, 俱學之於劉德升.”(曹魏시대의 초기에 鍾繇와 胡昭의 行書는 법으로 통했으며 모두 劉德升에게서 배웠다.)이라 하여 鍾繇는 胡昭와 함께 劉德昇에게 배웠다고 하였다. 劉德升과 鍾繇, 胡昭는 모두 穎川사람으로 고향이 같으며 나이의 차이로도 師弟관계에 있었을 가능성을 더욱 뒷받침한다.
역대 서예 평론가들은 鍾繇의 서예 중에서 楷書를 가장 높이 평가한다. 그 원인은 楷書의 객관적 수준에서도 찾을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楷書라는 書體를 완전히 독립된 書體의 영역으로 자리잡게 한 공로에 있다. 唐나라 시대의 虞世南은『書旨述』에서 “鍾太傅師資德升, 馳騖曹, 蔡, 倣學而致一體, 眞楷獨得精姸.”(鍾繇는 劉德升을 스승으로 하였으며 曹喜와 蔡邕의 법을 배웠다. 여러 가지 書體를 두루 배웠으나 하나의 書體에 정통하여 楷書는 정교하고 아름답기가 독보적이다.)이라 하였으며 張懷瓘은『書斷』에서 “眞書古雅, 道合神明, 則元常第一.”(楷書중에서 고아하고 법도에 맞으며 뛰어나기는 鍾繇가 제일이다.)이라 하여 鍾繇의 楷書는 역대 楷書가운데 가장 뛰어난 수준이라 하였다. 宋나라 시대의『宣和書譜』에는 “鍾繇[賀克捷表』, 備盡法度, 爲正書之祖.”(鍾繇의『賀克捷表』는 법도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楷書의 시조가 된다.)라 하였으며 淸나라 시대의 劉熙載도『藝槪․書槪』에서 “正行二體, 始見於鍾書, 其書之大巧若, 後人莫及.”(楷書와 行書 두 書體는 鍾繇의 서예에서 처음으로 보이는데 서예의 교묘함이 극에 달하여 후세 사람이 미치지 못한다.)라 하여 鍾繇의 楷書는 예술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역사적 가치도 매우 높다고 하였다.
鍾繇의 楷書 이외에 行書와 隸書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晉나라 시대의 衛恒은『四體書勢』에서, 劉宋의 羊欣은『采古來能書人名』에서, 梁武帝 蕭衍은『古今書人優劣評』에서, 唐나라 시대의 孫過庭은『書譜』에서 鍾繇의 楷書와 行書, 그리고 隸書를 높게 평가하였다. 南梁의 庾肩吾는『書品』에서 鍾繇의 서예를 ‘上之上品’으로 평가하고 아울러 ‘天然第一’이라 하여 천부적 소질이 매우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하였다. 羊欣은『采古來能書人名』에서 “鍾有三體: 一曰銘石之書, 最妙者也; 二曰章程書, 傳秘書敎小學者也; 三曰行狎書, 相聞者也. 三法皆世人所善.”(鍾繇는 세 가지 書體에 뛰어났다. 첫째는 刻石 서예로 가장 뛰어나며 둘째는 章程書로 조정의 서적을 베껴서 전하거나 어린 학생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셋째는 行狎書로서 편지를 써서 서로 소식을 묻고 듣는 行書이다. 세 가지 모두 세상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평가한다.)이라 하여 鍾繇는 隸書와 楷書, 行書에 매우 훌륭하다고 평가하였다.
현재까지 전하는 鍾繇의 작품으로 隸書는『上尊號碑』가 있으며 楷書는『宣示表』․[力命表』․[賀克捷表』․[薦季直表』․[調元表』․[墓田丙舍帖』․[還示帖』 등이 있고 行書는『白騎帖』․[常患帖』([常羸帖』이라고도 함) ․[雪寒帖』․[長風帖』등이 있다. 이상의 楷書와 行書 ‘五表六帖’은 모두 閣帖本으로 전하며 墨迹本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薦季直表』는 淸나라 후기까지 전해지다가 1860년 圓明園이 불탈 때 裴景福의 손에 들어갔다가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사진으로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사진이 진품을 찍은 것인지 모조품을 찍은 것인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아다. 楷書 작품 ‘五表’와 行書 작품 ‘六帖’도 鍾繇의 眞跡을 閣帖에 수록한 것이 아니라 모두 후대 사람의 摹本이나 臨書本을 수록한 것이다. 南朝시대 宋나라의 虞龢는『論書表』에서 당시에 전하는 鍾繇의 眞跡은 697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梁나라에 와서는 陶弘景이『與梁武帝議書啓』에서 “世論咸云江東無復鍾跡, 常以歎息” (세상 사람들이 모두 江東에 鍾繇의 眞跡이 더 이상 없다고 말하였다. 항상 이것 때문에 탄식한다.).이라 하여 南朝시대의 후기에 이미 鍾繇의 眞跡은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음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宋나라 시대의 閣帖에 전하는 鍾繇의 서예는 모두 후대의 글씨로 고증하는 것이다.
『薦季直表』는 鍾繇가 나이가 많아 정무를 돌볼 수 없게 되어 魏나라를 위하여 예전에 魏나라 조정의 신하였던 季直을 다시 추천하는 내용이다. 墨跡을 찍은 사진과『三希堂法帖』본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墨迹을 찍은 사진은 民國시대의 초기까지 전하던 墨迹 진본을 찍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본은 도둑이 훔쳐 땅속에 묻었는데 후에 꺼내 보니 모두 망가지고 못쓰게 되었다고 한다. 사진을 근거로 하면 貞觀, 淳化, 大觀, 宣和 및 米芾 등의 印章이 찍혀 있어서 墨跡本이 唐나라와 宋나라 시대에까지 궁중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이것은 鍾繇의 진품이 아니라 宋나라 시대의 위조품일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楊守敬은『評帖記』에서 唐太宗의 貞觀년간에 이미 曹魏시대의 서예 작품이 없었다고 하였으며『宣和書譜』와 米芾의『書史』에도 실려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진품일 가능성이 적다고 했다. 또한 墨迹의 끝에 “黃初 이년(221)八月司徒東武侯臣鍾繇表”라고 쓰여 있는 것은『三國志․魏書․鍾繇傳』의 내용과 맞지 않아서 眞跡으로 불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薦季直表』의 楷書는 고아하며 품격이 매우 높은 것을 인정하여 역대 많은 서예들이 애호하였다. 淸나라 시대의 馬宗霍는『書林藻覽』에서 鄭元砠와 袁泰의 말을 인용해 법도가 엄격하고 고법이 잘 감추어져 있다고 평가하였다.
『賀捷表』는 東漢이 망하고 爲나라가 건국하기 1년 전인 建安 24년(219)에 쓴 것으로『戎路表』 또는『賀克捷表』라 부르기도 한다. 蜀나라 장군인 關羽가 죽은 것은 魏나라의 군사와 정치활동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쁜 소식임을 曹操에게 알리는 내용이다. 宋나라 시대 歐陽修의『集古錄跋』과『宣和書譜』에 소개되어 있으며 현재 전하는 것은『鬱岡齋帖』,『宋淳熙秘閣續帖』,『寶賢堂帖』,『王烟堂帖』 등에 새겨져 있다.『賀捷表』는 閣帖에 전하는 楷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하며 淸나라 시대의 王澍는『論書賸語』에서 唐나라 때의 摹本이라 하였다.
『賀捷表』의 書體와 章法은 다른 鍾繇의 작품과 많은 차이가 난다. 布置에 있어서 글자의 크기를 달리하여 楷書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자유로움을 더했으며 起筆과 收筆을 날카롭게 하여 유연함과 날카로운 미감을 적절히 조화하였다.『宣和書譜』에서는 “備盡法度, 爲正書之祖”(법도를 잘 갖추고 있어서 楷書의 시조가 되었다.)라 하여 이 작품이 매우 뛰어난 楷書일 뿐 아니라 楷書의 근본임을 기록하였다.
『宣示表』는 鍾繇가 71세가 되는 黃初 2년(221)에 쓴 것으로 그의 楷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지금 전하는 閣帖은 鍾繇의 眞跡을 새긴 것이 아니라 王羲之가 臨摹한 것을 새겨 놓은 것이다. 南朝시대 齊나라의 王僧虔은『論書』에서 晉나라의 王導는 鍾繇의 서예를 매우 좋아하였으며 晉나라가 동쪽으로 쫓겨갈 때『宣示表』만을 품에 넣고 가져가서 후에 王羲之에게 주었고 王羲之는 또 王修에게 주었는데 王修가 죽자 그의 어머니가 관에 함께 넣어 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宣示表』의 진본은 사라지게 되었고 지금 전하는 것은 王羲之가 臨摹해 놓은 것을 근거로 새긴 閣帖本으로『淳化閣帖』,『大觀帖』,『寶賢堂帖』,『東西堂帖』,『停雲堂帖』,『墨池堂帖』등 매우 많이 있다.
『宣示表』는『薦季直表』와『賀捷表』의 중간 형태의 楷書로서 點畫을 자세히 관찰하면 가로획에서 완전히 성숙된 楷書의 起筆과 收筆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모든 筆劃에서 隸書의 느낌을 떨쳐 버리고 새로운 서체인 楷書를 완성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王羲之가 臨摹한 작품을 새겨 놓은 것이기 때문에 혹자는 王羲之 서풍의 楷書라고 하고 혹자는 宋나라 이후의 서풍을 가미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원본은 鍾繇의 작품이며 臨摹의 목적이 정확한 筆劃과 結字 등 똑같은 작품을 만드는 것에 있는 만큼 鍾繇의 서풍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鍾繇의 서예는 법칙이 엄격한 漢隸의 기초 위에서 새로운 書體인 楷書를 완성시켰다. 자연의 심미적 특징을 楷書로 승화시켜 표현한 예술적 수준은 역대 서예가 중에서도 최고로 인정받는다. 蔡邕이 말한 ‘자연’과 ‘형세’의 이론적 근거를 筆劃과 結字, 章法등에서 완전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書體의 변천사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東晉시대에 서예의 꽃이 피게 하는 기초를 닦았으며 “書聖”이라 불리는 王羲之가 탄생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2) 기타 서예가와 작품
曹魏시대의 가장 걸출한 서예가는 鍾繇이다. 역대 서예사에서 鍾繇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인물은 張芝와 衛覬 그리고 王羲之와 王獻之가 있다. 張芝는 鍾繇보다 한 세대 빠른 인물이고 王羲之는 후대의 인물이며 衛覬는 鍾繇와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衛覬는 河東의 安邑(지금의 山西省 夏縣)사람으로 字를 伯儒라 하였다고 전하지만 생졸연대는 알 수가 없다.『三國志․魏書』에 漢나라 후기 曹操에 의해 司空掾에 오르고 魏나라에서는 尙書僕射에까지 올랐으며 古文, 鳥篆, 隸書, 草書 등 많은 書體에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南宋의 羊欣은『采古來能書人名』에서 “善草及古文, 略盡其妙. 草體微瘦, 而筆跡靜熟”(草書와 古文을 잘 썼으며 그 오묘한 아름다움을 모두 표현했다. 草書는 야간 말라 있었지만 글씨가 안정되고 무르익어 있다.)이라 하여 衛覬가 매우 높은 수준의 서예가임을 설명하였다.
衛覬는 邯鄲淳을 스승으로 하여 아들인 衛瓘과 손자인 衛恒과 또 그 아들인 衛璪와 衛玠을 거치고 또 衛恒의 질녀인 衛鑠(衛夫人)으로 이어지는 衛씨 世家 書脈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다. 晉나라의 衛恒은『四體書勢』에서 “魏初傳古文者, 出於邯鄲淳. 恒祖敬侯寫淳[尙書』, 後以示淳, 而淳不別.”(魏나라 초기에 古文이 전하고 있었는데 邯鄲淳이 계승한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가 邯鄲淳의『尙書』를 臨書 하여 邯鄲淳에게 보여주니 그는 누구의 글씨인지 구별하지 못하였다.)이라 하여 衛覬가 邯鄲淳에게서 古文을 배워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衛覬의 작품으로 전하는 것으로『受禪表』가 있으나 이 작품이 누구의 서체인지 확실히 고증되지 않고 있으며 유감스럽게 다른 작품은 전하지 않는다.
韋誕(179-253)은 字가 仲將이며 京兆(지금의 陝西省 西安)사람이다.『三國志․魏書』에 韋誕은 漢나라 建安연간에 郎中의 자리에 있었으며 魏나라에서는 武都太守와 侍中의 벼슬에 올랐다고 기록하였다. 張芝와 邯鄲淳을 스승으로 하여 서예를 배워 여러 書體를 고루 잘 썼으며 중요한 장소에 사용하던 禮器나 祭器의 문장과 明帝시대에 洛陽과 許 그리고 鄴 세 곳에 궁전을 건설할 때 편액은 모두 韋誕이 썼다고 전한다. 張懷瓘은『書斷』에서 “草跡之妙, 亞乎索靖, 八分, 隸, 章, 飛白入妙, 小篆入能.”(草書의 오묘함은 索靖에 버금가고 八分과 隸書, 章草, 飛白書는 妙品에 들어가며 小篆은 能品에 들어간다.)이라 하여 각 書體에 매우 높은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하는 작품은 찾아볼 수 없다. 이밖에도 魏나라의 서예로는 鍾會(225-264), 胡昭(85-173), 曹植(192-232) 虞松 등이 있었다.
3. 吳나라와 蜀나라의 서예
曹丕가 漢나라의 정권을 이어받아 魏나라를 세우자 지방 세력으로 자리를 굳힌 劉備는 蜀(지금의 四川省)의 成都를 도읍으로 하여 蜀漢을 세웠으며 孫權은 江東(지금의 江蘇省, 浙江省, 安徽省)지역에 建業(鄴)을 도읍으로 하여 吳나라를 세었다. 劉備가 세운 蜀漢의 그 정치적 명분은 漢나라를 다시 찾아 부흥시키는 것이었다. 劉備와 蜀의 실권을 쥐고 있던 諸葛亮은 實事求是의 이념으로 국력을 배양하여 삼국을 통일시키는 것이 정치 목표였다. 따라서 예술 행위나 화려한 장식을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공덕을 노래부르는 문장까지도 짓지 못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와 사회적 영향으로 비석을 세우는 풍습은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吳나라 시대의 石刻 작품은 전해지지 않을 뿐 아니라 墨迹 서예도 찾아볼 수 없다.
吳나라는 江東에 자리잡고 비교적 풍요한 조건 속에서 발전한다. 蜀과는 달리 물질 자원이 풍부하고 長江을 경계로 하여 넉넉하고 안정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문학과 예술도 꾸준히 발전할 수 있었다. 중원 지역에 자리잡은 魏나라와 비교하여 비록 남겨진 서예 작품은 적을지라도 그 예술적 수준은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吳나라의 유명한 작품으로『天發神讖碑』,『禪國山碑』,『谷朗碑』,『葛府君碑』,『急就章』 등 매우 완전한 형태의 작품 이외에도『黃龍元年磚』,『甘露二年磚』 등의 磚文과『文武帖』이 전하고 있다. 吳나라 서예는 戰國시대에 長江 유역에서 발전한 楚나라의 영향으로 중원의 서예와 다른 서풍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남방 지역에 편중된 지역적 영향과 남방 민족의 예술적 기질이 조화를 이루어 부드럽고 우아한 심미적 특징이 있는 그들만의 특유한 서풍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서풍은 戰國시대 楚나라 金文에서 표현하고 있는 심미적 특징과 많은 관련을 맺고 있다. 강건함 속에 함축된 부드러움이 있으며 전통과 색다른 신선한 예술적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吳나라 시대의 서예가로는 張昭, 張宏, 皇象, 蘇建 등이 있으며 그 중에서 皇象과 蘇建이 매우 유명하다.
皇象은 字가 休明이라 전하며 吳나라 江都(지금의 江蘇省 揚州) 사람으로 관직이 侍中과 靑州刺史를 지냈다는 기록이『三國志』 등에 전해지나 그 生平에 관하여 분명하게 알려지지는 않는다. 그는 小篆과 漢隸 그리고 章草에 매우 뛰어났으며 隸書는 蔡邕을 배우고 章草는 杜度를 배웠다고 전한다. 唐나라 시대의 張懷瓘은『書斷』에서 “休明章草入神, 八分入妙, 小篆入能”(皇象의 章草는 神品에 들고 八分은 妙品에 들며 小篆은 能品에 들었다.)이라 하여 皇象의 작품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또한『書斷』에서 皇象은 章草를 杜度에게서 배웠으며 그 수준을 王羲之의 楷書와 대등하게 평가하였고 八分을 蔡邕에 버금간다고 평가하였다. 皇象의 작품으로 전하는 것으로『急就章』과 閣帖本의『文武帖』, 그리고『天發神讖碑』가 있다.
『天發神讖碑』는 吳나라 天璽 원년(276)에 江寧(지금의 南京)의 天禧寺에 세워진 비석으로『天璽紀功頌』,『三段碑』,『吳孫皓紀功碑』 등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淸나라 시대 嘉慶 연간에 불에 타서 사라져 버렸으며 현재는 탁본만이 전하고 있다. 宋나라 시대에 이미 세 부분으로 끊어져 있었으며 상단은 21행, 중단은 19행, 하단은 10행으로 모두 2백여 자의 篆書가 새겨져 있으며 宋나라의 胡宗師, 石豫亨 그리고 明나라의 耿定向이 쓴 발문이 측면에 새겨 있다. 淸나라 시대의 王昶은『金石萃編』에서 비의 형태가 원래 세 덩어리로 나누어 있었으며 문장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비석이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현재까지 학자들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고 있다. 또한 姚鼐는 跋文에서『天發神讖碑』가 碑石이 아니라 둥근 형태의 바위에 새긴 刻石이라 하였다.
『天發神讖碑』의 비문은 吳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孫皓가 자신의 통치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신에게 제사 드리는 내용이며 그 목적으로 비석을 세워서 후세에 전하게 된 것이다. 서체는 小篆의 결구와 章法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隸書의 筆法과 미감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筆劃도 둥근 형태와 네모난 형태를 함께 지니고 있다. 가로획의 起筆과 收筆은 方筆을 기본으로 하며 세로획의 起筆은 方筆이나 收筆은 뾰족하게 뽑아 내는 懸針으로 이루어져 體勢가 강건하고 준엄하다. 그러나 結字의 구성이 小篆의 장방형이고 곡선을 적절히 사용한 까닭으로 함축된 부드러움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淸나라 시대의 楊賓, 翁方綱, 包世臣, 康有爲 등이『天發神讖碑』의 예술성을 높게 평가하였으며 예술성과 역사적 가치가 높은 까닭으로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周在浚, 王著, 吳玉搢의『天發神讖碑考』와 汪照의『天發神讖碑續考』 그리고 羅振玉의『天發神讖碑補考』 등이 유명하다. 현재 重刻本이 전하고 있으며 宋나라 시대의 拓本도 故宮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葛府君碑』는 楷書로 새겨진 최초의 刻石 서예이다. 吳나라의 刻石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언제 새겼는지는 알 수 없다. 元나라 시대의 陸友仁은『硯北雜誌』에서 “句容縣西五里石門村者, 有[吳故衡陽郡太守葛府君之碑』仆田野中....... 以其石理甚粗, 文皆漫滅, 可撫者祇額十二字耳.”(句容縣 서쪽 石門村의 들에『葛府君碑』가 있다...... 돌의 손상이 심하여 글씨는 모두 毁滅되었고 알 수 있는 것은 碑額의 열 두자 뿐이다.)라 하여『葛府君碑』가 있는 위치와 상태에 대해 설명하였다. 淸나라 시대의 乾隆 연간에 孫星衍이 다시 찾아내 탁본을 하여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葛府君碑』의 楷書는 단정하고 장중하면서 질박하고 온후한 아름다움이 있다. 王昶은『金石萃編』에서 星衍의 글을 인용하여 “楷法之見於法帖者, 則有程邈最先, 然不足信; 其見於碑碣, 殆始於此, 良可寶也.”(楷書의 법칙은 法帖을 근거로 하면 程邈이 가장 먼저이나 믿을 수 없다. 楷書를 碑碣에서 보면 아마도『葛府君碑』가 가장 먼저의 것으로 진실로 매우 보배이다.)라 하여『葛府君碑』의 역사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谷朗碑』는 吳나라 시대의 鳳凰 원년(272)에 湖南省 耒陽에 세워진 刻石이다. 隸書의 기본 형태를 지니고 있으면서 楷書의 筆劃이 많이 곁들어진 작품으로 碑額에도 같은 서체로 “吳故九眞太守谷府君之碑”라 쓰여져 있다. 書體가 방정하고 筆劃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으며 품격이 고아하여 漢나라 시대 隸書의 심미적 특징에 근접하고 있다는 평이다.
이밖에도 天璽 원년(276)에 篆書로 쓰여진『禪國山碑』와 皇象의 작품으로 전하는 閣帖本『急就章』등이 유명하다. 淸나라 시대의 楊守敬은『平碑記』에서 “秦漢篆書, 自[瑯琊臺』,『嵩山石闕』數碑而外, 罕有存者, 惟此巍然無羔, 雖漫漶之餘, 尙存數百字. 玩其筆法, 卽未必追踪秦相, 亦斷非後代所及”(秦漢의 篆書로『琅琊臺刻石』과『嵩山石闕』등 몇 점의 刻碑 이외에 전하는 것은 드물다. 오직『禪國山碑』만이 우뚝하다. 비록 닳아서 희미하나 여전히 몇 백자가 된다. 그 筆法을 감상하니 秦篆을 쫓을 수는 없지만 또한 후대의 것들이 따라 갈 수는 없다.)라 하여『禪國山碑』를 秦나라 시대 이후의 가장 훌륭한 篆書 작품이라 평가하였다.『急就章』은 漢나라 시대에 아동들을 교육하던 교과서로서 史游가 지었다고 전한다. 魏晉시대에 많은 서예들이 臨書하였다고 전해지며 그 중에서도 皇象의 章草를 최고로 친다. 宋나라 시대의 宣和 2년(1120)에 葉夢得이 새긴『潁昌本』을 근거로 하여 明나라 正統 4년(1439)에 楊政이 重刻한『松江本』이 가장 좋은 작품으로 꼽힌다. 이밖에도 漢나라 시대의 磚文과 漢簡 및 晉나라 시대의 殘紙本 등의『急就章』이 전한다.
吳나라 시대의 서예는 그 예술적 가치에서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자 書體의 발전적 측면에서도 刻石 楷書의 시대를 도래하게 하는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三國시대는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書體가 隸書에서 楷書로 변화하는 시기로 평가되며 그 중심 역할을 鍾繇와 그의 작품, 그리고『谷朗碑』와『葛府君碑』가 하였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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