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南北朝시대의 서예 개관

2012. 3. 15. 09:14서예일반

. 南北朝시대의 서예

1. 南北朝시대의 서예 개관

1) 南朝시대의 서예 개관

永初 원년(420)에 東晋의 武將인 劉裕가 宋나라를 세운 이후부터 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589년까지 남쪽에서는 宋나라(420-589), 齊나라(479-502), 梁나라(502-557), 陳나라(557-589)가 흥망을 거듭 하였다. 북쪽에서는 晋나라가 남쪽으로 옮겨간 것과 때를 같이 하여 화북 지방의 여러 민족이 130년에 걸쳐 항쟁을 거듭 하였으며 결국 北魏가 북쪽 지방을 통일하여 매우 강대한 국가로 성장한다. 그러나 北魏도 東魏(534-550)와 西魏(535-557)로 갈라지고 또 北齊(550-577)와 北周(557-581)로 흥망을 거듭하다가 北周가 다시 北齊를 멸망시키고 잠시 통일하였다가 결국 隋나라에 의하여 남북이 통일된다. 이와 같이 남쪽과 북쪽에서 각 왕조가 흥망을 거듭한 때를 南北朝시대라 부르고 宋, 齊, 梁, 陳을 南朝라하며 北魏, 東魏, 西魏, 北齊, 北周 등의 시대를 北朝라 부른다.

南朝는 長江 유역의 기름진 땅에 위치하였으며 비교적 안정된 사회적 조건 아래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 할 수 있었다. 또한 제철 기술의 발명과 연금술의 발전, 그리고 水利시설의 확충 등으로 농경과 과학 기술이 빠르게 개선되어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화북 지역의 사람들이 강남으로 이주하여 인구는 급속도로 증가하였고 국가는 더욱 발전하였으며 귀족들은 넒은 영토와 풍부한 노동력으로 더욱 풍요로운 생활을 즐기며 생활 할 수 있었다. 南朝 사회는 晋나라 이래로 자리잡은 문벌 세가 중심의 귀족 사회를 형성하며 발전함에 따라 그 문화는 자연스럽게 귀족 중심의 문화로 성장한다. 귀족들은 풍부한 물질과 재력을 바탕으로 종교와 문학, 예술 등에 심취하기도 한다. 漢나라와 魏나라의 문예가 고아하고 질박한 맛이 특징이고 법칙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東晋과 南朝시대의 문예는 우아하고 새련 되어 있으며 생동감 있는 운치를 표현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王羲之의 서예, 顧愷之의 회화, 戴逵의 조각 등이 모두 東晋시대에 완성되어 南朝시대 예술의 새로운 심미적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문학 부분에서는 律詩와 律賦, 그리고 四六騈儷文이 완성되어 화려하고 유창한 맛을 표현하였다. 또한 불교와 도교가 성행하여 道經과 佛經의 저술이 활발할 뿐 아니라 유교와 도교, 불교의 교리를 융합하여 경전을 새롭게 이해하는 학풍이 생겨났다. 귀족들의 문예에 대한 심취는 사회 전체의 문화 수준을 높게 할 뿐 아니라 帝王과 새로운 왕조의 문화적 목표와 이정표를 세울 수 있게 하였다.

南朝시대의 帝王과 문벌 귀족들은 문예를 애호하였을 뿐 아니라 대부분이 유명한 서예가이기도 하였다. 帝王 서예가로는 宋나라의 孝武帝인 劉駿과 齊나라 高帝인 蕭道成, 그리고 梁나라 武帝인 蕭衍이 대표적이다. 수많은 문벌 세족들과 제왕 서예가들은 東晋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王羲之의 서예를 숭상하였다. 宋나라의 孝武帝는 王羲之의 서예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었으며 明帝는 각 지방에 사람을 파견하여 王羲之와 王獻之의 작품을 모으게 하였을 뿐 아니라 虞龢, 徐希秀 등으로 하여금 정리하고 순서를 정하게 하여 책으로 편찬하였다. 梁나라의 武帝인 蕭衍도 王羲之 부자의 서예를 애호하여 널리 구하고 정리하여 책으로 묶은 것이 760권이 있었다고 전한다. 梁나라 元帝때까지 南朝의 왕실에 소장되어 전하여 오던 王羲之와 王獻之 부자의 수많은 작품들이 梁나라 承聖 3년(554) 西魏와의 전쟁에서 모두 불타 없어졌다고 기록되고 있다.

문벌 귀족들은 서예를 가업으로 삼아 서예 작품에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하려 하였을 뿐 아니라 서예를 입신양명의 기회로 삼기도 하였다. 청나라 후기와 근대를 산 馬宗霍는『書林藻鑑』에서 “南朝시대의 문벌 귀족들은 서예로서 제왕의 눈에 들어 높은 관직을 얻을 수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南朝의 서예가는 문벌 귀족 관료들이 주류가 되었으며 민간 서예가들이 광범위하게 활동한 北朝시대와 많은 차이가 난다. 제왕들의 서예에 대한 관심과 애호는 서예가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대부분의 관료와 귀족들을 서예가의 대열에 들어서게 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서예를 높은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릴 수 있게 하였다. 東晋을 이은 宋나라 시대의 귀족 사회에서는 王羲之보다 王獻之의 서예가 더 존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羊欣, 謝靈運, 薄紹之, 孔琳之, 蕭思話 등이 王獻之를 숭상한 서예가들로 꼽힌다. 齊나라와 梁나라 시대에도 王羲之와 王獻之 부자의 서예는 심미적 표준이 되어 王曇首와 아들 王僧虔, 그리고 손자인 王慈와 王志 등의 서예가를 배출하였다. 이밖에도 梁나라의 陶弘景, 蕭子雲, 阮硏과 陳나라의 智永 등 여러 서예가들이 王羲之의 서풍을 중심으로 작품을 창작하였다.

南朝시대는 제왕과 귀족들이 王羲之와 王獻之 부자의 서예를 특별히 좋아한 까닭으로 南朝의 서예는 王羲之의 서풍으로 통일되었다. 사대부 계층은 물론 일반 백성들도 王羲之와 王獻之 부자의 서예를 구하여 臨書 하였고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명한 서예가들이 臨書한 작품을 구하여 배웠다. 王羲之와 王獻之 부자의 서예를 배우는 전통은 唐宋과 元明淸을 거쳐 현대까지 이어져 중국 서예의 정통으로 자리잡고 있다. 唐宋시대 이후에는 王羲之와 王獻之의 서예 작품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목판이나 석판에 새겨서 그 拓本을 臨書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따라서 南朝시대의 서예 작품은 대부분 紙帖이나 閣帖으로 남아 있게 되었으며 刻石 서예가 많이 남아 있는 北朝의 서예와 함께 이름하여 北碑南帖으로 부르고 있다. 또한 南朝의 서예는 대부분이 行草를 중심으로 남아 있는 까닭으로 北楷南行으로 부르기도 한다.

2) 北朝시대의 서예 개관

北朝는 鮮卑族의 拓跋珪가 세운 魏나라가 439년 여러 민족의 국가가 난립한 북쪽을 통일하고 중원의 중화 문화를 수용하면서 급속히 발전하게 된다. 이 시대를 역사는 後魏 혹은 北魏라 부른다. 494년 北魏의 孝文帝는 平城(지금의 山西省 大同)에서 洛陽으로 도읍을 옮기고 난 후 정치와 문화, 언어와 문자 등 각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漢化정책을 펼쳐 국력의 기초를 문화에서 찾으려 하였다. 東晋이 남쪽으로 옮겨갈 때 대부분의 문벌 귀족들이 강남으로 옮겨갔으나 일부의 귀족들은 중원에 남아 있거나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 피해 있었다.『魏書‧釋老誌』의 기록에 의하면 北涼이 멸망 한 후 황하 유역의 많은 지식인들이 北魏의 도성인 平城에 들어와 살았으며 그 가운데에서 관직에 나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北魏의 위정자들은 남아 있던 漢族 지식인들을 적극 수용하여 국가 발전에 중요한 기초로 활용하려 하였으며 漢族 지식인들도 北魏의 漢化 정책에 부응하여 정치와 문화의 전면에 나와 北朝 사회의 문화적 수준을 올리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北魏에서 분열한 東魏와 西魏, 그리고 北齊와 北周도 北魏 시대의 漢化 정책을 이어받아 北朝 사회에서의 漢文化는 꾸준히 발전하였다.

北朝의 국가들이 비록 漢族의 고유한 문화에 동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북방 민족 특유의 강건하고 웅장한 미적 감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北朝의 서풍은 질박하고 강건하며 때로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南朝의 서예가 세련되고 유창한 기법으로 수려하고 우아한 서풍을 표현하고 있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현재까지 전하여 지는 刻石 서예 작품과 寫經 서예 작품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北朝와 南朝의 서풍이 서로 다른 것은 민족의 고유한 성품의 차이 뿐 아니라 지리적 조건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北齊의 顔之推는『顔氏家訓』에서 “남방의 물과 토지는 온화하고 유연하기 때문에 그 음악이 맑고 화려하며 북방의 산천은 깊고 두텁기 때문에 음악이 깊고도 질박하다.”고 하여 南朝와 北朝의 심미적 차이를 지리적 조건의 차이에서 이유를 찾아 설명하였다. 심미적 차이는 표현 형식과 재료에 따라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北朝의 서예 작품은 대부분 刻石 서예이기 때문에 南朝의 墨跡이나 帖과 비교할 때 질박하고 강건한 미감이 더욱 자연스럽게 표현되기도 하였다.

南朝가 魏나라 이래로 전해 내려온 禁碑令의 전통으로 비석을 매우 적게 세웠다. 그러나 北朝의 여러 국가는 禁碑令의 관습을 받아들이지 않아 자유스럽게 비석을 세우고 墓誌를 묻거나 造像記와 摩崖刻石을 남길 수 있었다. 북방의 여러 민족은 厚葬을 매우 중요시하여 墓誌를 묻고 비석을 세우는 등의 일로서 집안의 역량을 표현하려 하였다. 또한 불교를 숭상하여 불상을 만들고 그 옆에 造像記를 세우거나 산 속의 摩崖에다 불경을 쓰고 새기는 등 의 불사를 많이 하였다. 따라서 北朝의 서예 작품은 墓誌와 墓石, 造像記, 摩崖刻石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수많은 墓誌銘와 刻碑, 그리고 造像記와 摩崖刻石을 쓰고 새기는 작업은 매우 힘들고 또 위험하기 때문에 귀족이나 관료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보다 일반 백성들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 더 많았다. 다양한 형식의 刻石을 새겨서 세우는 풍습은 일반 대중의 書法 예술에 대한 참여를 증가 시켰으며 이것은 곧 서예의 심미적 범주와 형식을 넓히는 좋은 동기가 되었다. 南朝의 서예가 세련되어 우아하고 유창한 심미적 특징으로 일관된 것에 비하여 北朝의 서풍은 더욱 다양하고 풍부한 미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造像記는 강건하고 웅장하면서도 서민적인 미감을 표현하였으며 墓誌銘은 깔끔하면서도 엄숙한 미감을 표현하였다. 刻碑는 造像記와 墓誌銘의 미감을 잘 조화시킨 고아한 미감을 표현하였고 摩崖와 磚文은 질박하면서도 천진스러운 미감을 표현하는 등 北朝의 서풍과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淸나라 시대의 包世臣은『藝舟雙楫』에서 “北朝人落筆峻而結體莊和, 行黙澀而取勢排宕.”(北朝시대의 사람들은 글씨를 쓰는 것이 준엄하고 結體가 장중하였다. 行筆과 墨法이 매끄럽지는 않으나 筆勢가 호탕하다.)이라 하여 北朝의 서예는 준엄하고 장중하며 강건하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 北碑의 서풍을 魄力雄强, 氣像渾穆, 筆法跳越, 點畫峻厚, 意態奇逸, 精神飛動, 興趣酣足, 骨法洞達, 結構天成, 血肉豊美 등 열 가지 미감으로 분류하여 평가하였다.

南朝시대의 서예는 紙帖이나 閣帖의 형태로 전하는 行書와 草書가 서체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과 달리 北朝의 서예는 刻石의 형태로 대부분이 楷書로 이루어져 있다. 唐나라 시대의 張懷瓘은『書斷』에서 “趨時適變, 行書爲要; 題勒方복??, 眞乃居先.”(시대의 변화에 맞추기에는 行書가 적당하고 현판이나 비석 등에는 正字體가 어울린다.)이라 하여 行書는 변화를 추구하기가 쉽고 楷書나 隸書등 正體는 題銘에 어울리는 서체로 분류하여 서체와 용도와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刻石으로 이루어진 秦나라 시대의 篆書와 漢나라 시대의 隸書, 그리고 그 이전에 甲骨文과 金文이 모두 正體로서 새기거나 또는 새겨서 주조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北朝시대의 작품도 새겨서 이루어진 刻石 서예이기 때문에 같은 시대의 南朝에서 유행한 行草를 사용하지 않고 楷書로 쓰여진 것은 용도와 서체가 잘 어우러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중국과 서예
글쓴이 : 금릉산방인 소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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