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5. 09:15ㆍ서예일반
제4장 魏晉南北朝시대의 서예
Ⅰ. 魏晉南北朝의 시대와 서예 개관
漢나라 시대의 후기 曹操가 국가의 전권을 행사할 때 서남쪽에서는 劉備가 동남쪽에서는 孫權이 지방 세력으로 점점 성장하고 있었다. 서기 220년 曹操의 아들 曹丕가 漢나라의 정권을 이어받아 魏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우자 서기 221년에 劉備가 蜀漢을, 이어서 222년에 孫權이 吳라는 이름으로 각각 독립된 나라를 세운다. 이때의 중국 역사를 三國시대(220-265)라 부른다. 약 45년 동안의 魏, 蜀, 吳의 三國대립은 서기 265년 司馬炎이 西晉(265-316년)을 세우면서 잠시 통일된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중앙 정부의 힘이 강대하지 못한 까닭으로 서쪽과 북쪽 방면의 匈奴, 羯, 鮮卑, 氐, 羌 등 많은 민족들이 세력을 확대하여 점차 남쪽으로 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외세의 힘과 西晉사회의 門閥정치와 통치 계급의 부패 그리고 八王의 亂의 영향으로 결국 西晉은 멸망하게 된다. 西晉이 멸망하고 서쪽과 북쪽에서는 十六國이 흥망을 거듭 하게 되며 동쪽에서는 司馬睿가 東晉(317-420년)을 세워 비교적 풍요로운 생활을 한다.
많은 민족이 번갈아 가며 흥망을 거듭하는 十六國과 東晋도 다른 민족의 끊임없는 침범과 지배 계층 내부의 권력 갈등으로 말미암아 남쪽과 북쪽으로 나뉘어 새로운 질서가 생겨나게 된다. 남쪽에서는 宋나라(420-479), 齊나라(419-502), 梁나라(502-557), 陳나라(557-589)가 차례로 흥성했다가 또 멸망을 하게 되었고 북쪽에는 拓跋氏가 北魏(386-534)을 세워 강력한 힘으로 비교적 안정된 정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北魏도 후기에 정치적 혼란과 승려의 득세 그리고 각 민족의 권력 쟁탈로 인해 東魏(534-550)와 西魏(535-556)로 분열되고 또 東魏는 北齊(550-577)로 西魏는 北周(557-581)로 혼란을 거듭하게 된다. 남쪽과 북쪽으로 갈려서 각각 흥망을 거듭한 이 시기를 南北朝시대라 부른다. 南朝는 吳와 東晉을 포함하여 宋, 齊, 梁, 陳의 여섯 나라가 도읍을 강남에 정하고 차례로 일어났기 때문에 六朝라 부른다. 六朝는 漢族이 통치한 국가이기 때문에 漢族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인의 관점에서는 다른 민족이 통치한 국가보다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예전에는 역사가들도 南朝에 정통성을 부여해 六朝시대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北朝와 南朝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으며 南北朝시대라 한다. 또 三國시대부터 南北朝시대를 통틀어 魏晉南北朝(220-589) 시대라 부른다.
魏晉南北朝시대는 정치와 사회는 물론 문화면에서도 많은 변화를 겪는 시기로서 兩漢시대의 사상적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儒敎와 經學이 붕괴되고 철학 사상의 해방을 맞이하였다. 佛敎가 유입되고 玄學이 발전하는 등 매우 다양한 사상적 시대로서 문학과 예술에 매우 찬란한 업적을 낳았다. 사상의 해방과 儒敎와 經學의 붕괴, 玄學과 老莊사상의 유행, 佛敎의 유입 등으로 말미암아 지식 계층의 의식이 새로운 변화에 순응하여 서예의 창작과 이론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예는 고대 중국의 지식 계층에게 있어서 자신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학문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漢나라 시대 서예는 儒敎를 숭상하여 禮儀의 표현과 상통하는 외재된 형상의 기세를 추구하였다. 隸書의 波磔은 기세의 집중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魏晉南北朝시대의 서예와 書論의 대표적 심미 표현은 精神과 韻律에 있다. 정신과 韻律은 형세의 미감을 작가 주관적 개성으로 한 단계 끌어 올렸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魏晉南北朝시대는 몇 천년의 서예사에서 시대적 특유의 미감을 형성하는 큰 획을 그었다고 말할 수 있다. 魏晉南北朝시대 서예의 특징은 한자 서체 변천의 마지막 단계로서 秦篆, 漢隸의 완성에 이어 楷書, 行書, 草書 등 모든 書體가 완성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漢나라 시대에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된 章草는 더욱 발전하여 今草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楷書와 行書도 東晋시대와 北魏시대에 書體로서의 완성을 하였다.
사상과 철학의 자유로운 발전과 함께 帝王과 문벌 귀족의 서예에 관한 관심은 魏晉南北朝시대의 서예 발전할 수 있는 근본 요소 중의 하나가 된다. 漢나라 후기 曹操는 鐘繇를 총애하였으며 그의 아들 曹丕가 魏를 세운 후에도 鍾繇를 중요하였다. 劉宋시대의 明帝와 南齊시대의 高帝, 蕭道成 그리고 北魏시대의 太祖 등 많은 제왕들과 王家, 謝家등 문벌 귀족들이 서예를 숭상하여 서예는 찬란한 발전을 하게 된다. 帝王과 문벌 귀족들 중에서는 서예를 좋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는 매우 유명한 서예가들도 많이 있다. 齊나라 高帝와 梁나라 武帝인 蕭衍은 서예가로서도 매우 유명하다. 문벌 귀족으로 유명한 서예 집안은 東晉시대의 王家, 謝家, 郗家, 庾家를 꼽을 수 있으며 北魏시대에는 崔家와 廬家를 들 수 있다.
魏晋 南北朝시대는 빈번한 전쟁과 수많은 국가의 흥망성쇠로 백성들은 마음의 안식처를 종교에서 찾으려는 성향이 깊어짐과 함께 불교가 유입되고 도교와 玄學이 급속히 전파된다. 특히 불교의 영혼 불멸과 輪廻 사상은 당시 사회의 불안한 생명 의식을 위탁하고 위안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크게 성행한다. 따라서 굴을 파고 佛像을 세우거나 불경을 쓰고 새기는 풍속이 유행함과 발맞추어 민간 서예도 급속히 발전한다. 또한 漢나라 후기에 曹操가 내린 禁碑令이 魏晋과 南朝에 전통으로 자리 잡아 刻碑를 세우는 대신에 墓誌를 묻는 풍습이 생겨나 서예의 새로운 형식으로 자리잡는다. 돌에 글씨를 쓰고 새기는 풍속은 春秋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찾을 수 있으며 秦漢시대에 매우 성행한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刻石은 주로 碑碣의 형태이며 南北朝시대에 이르러 刻碑, 造像, 墓誌銘 등 다양한 영역의 刻石이 탄생하게 된다.
魏晉南北朝시대의 서예는 예술로서의 독립적 위치에 올라섰다고 표현된다. 문자의 기록은 실용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실용의 편리함을 추구하며 변천하였다. 그러나 漢나라를 거치면서 자각 예술의 위치에 오르기 시작하였고 魏晋시대에 예술의 한 영역으로 완전히 자리잡아 감상을 위한 창작 행위가 정착되었다. 서예가 예술의 한 영역으로 자리잡는 것과 동시에 탄생한 학문이 서예 이론이며 그 수준은 魏晉南北朝시대에 매우 높게 올라간다. 서예가 예술로서 자리를 굳히고 발전하는 것과 書論이 발전하는 것은 정비례하고 있으며 바꾸어 말해 書論의 연구와 발전은 서예 創作의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론은 창작의 바탕이 되고 창작의 발전은 새로운 이론을 낳게 되는 것이 모든 예술 영역의 진리이다.
魏나라 시대 鍾繇의 “用筆”설과 東晉시대 衛夫人 衛鑠의『筆陳圖』, 王羲之의『書論』과『題衛夫人筆陳圖後』, 劉宋시대 羊欣의『采古來能書人名』, 南齊시대 王僧虔의『論書』 梁나라 시대 陶弘景의『與梁武帝論書啓』, 袁昻의『古今書評』, 蕭衍의『古今書人憂劣評』, 庾肩吾의『書品』 등의 書論이 전하고 있다. 또한 書體의 특징과 書勢를 논술한 晉나라 시대 成公綏의『隸書體』, 衛恒의『四體書勢』, 索靖의『草書勢』, 陽泉의『草書賦』, 王珉의『行書狀』, 南宋시대 鮑照의『飛白書勢銘』, 北魏시대 江式의『論書表』와 蕭衍의『草書狀』등이 魏晉南北朝시대의 유명한 書論이다.
魏晉南北朝시대 서예가 높은 수준에 오를 수 있는 요소로 사상적 배경이 많은 작용을 하였지만 서예 용구와 재료의 개선과 폭넓은 사용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秦漢시대의 墨迹작품을 살펴볼 때 竹簡書이나 木牘 그리고 약간의 비단이 보편적 서사 재료였다. 竹簡과 木牘은 만들고 쓰기에도 불편할 뿐 아니라 휴대가 어렵고 책을 만들어도 부피가 매우 크기 때문에 보관이 쉽지 않았다. 비록 碑碣이나 비단이 크기의 제한에서 약간은 해방되었지만 碑碣은 특수한 용도에서 사용되었으며 비단은 비싸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三國시대와 西晉시대에는 종이와 簡牘이 함께 사용되었으며 東晉시대로 접어들면서 종이의 사용은 매우 광범위하게 번져 나갔다. 따라서 일상의 書寫 활동에서 종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朝廷의 공식적 문서도 종이로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현재까지 발견되는 兩晉시대의 서예 자료를 살펴볼 때 西晉시대의 것으로는 종이와 簡牘이 모두 출토되고 있으나 東晉시대의 것은 종이에 쓰인 작품이 주종을 이룬다. 東晉시대 이후의 종이의 대량 사용은 서예를 한 차원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는데 중요한 물질 작용을 한다. 현재까지의 서예사에서 가장 많은 서예들이 東晉시대의 서예를 典範으로 삼는 것은 종이의 발전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종이의 종류가 많아지고 품질이 향상됨과 함께 붓의 재료도 양털이나 토끼털을 비롯하여 쥐의 수염과 닭의 깃 등 다양한 재료가 사용된다. 王羲之의『蘭亭序』도 鼠鬚筆로서 쓴 것이라 하고 新疆에서 출토된 晉나라 시대의『三國誌』, 西晉시대의 陸機가 쓴 최초의 墨迹 眞本인『平復帖』 등이 모두 종이에 쓴 墨書이다. 이와 같은 작품을 살펴볼 때 魏晉시대에 이미 종이, 붓, 먹, 벼루의 제작과 사용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魏晉南北朝시대의 사회와 문화의 물질적 환경은 이전 시대와 비교할 때 매우 특수한 것으로서 수많은 서예가와 서예 작품을 탄생하게 하였다. 三國시대 魏나라의 鍾繇, 吳나라의 皇象, 西晉의 衛瓘, 索靖, 陸機, 東晉의 王羲之, 王獻之, 謝安, 郗愔등 서예사에서 가장 걸출한 서예가들이 이 시대에 많이 탄생하였다. 또한 北魏를 중심으로 한 北朝에서는 曹魏시대의 전통인 禁碑令의 영향을 받지 않은 까닭과 불교의 영향으로 刻碑와 造像, 墓誌 등 刻石서예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다. 북방의 서예 작품은 대다수 작가의 이름을 남기지 않은 까닭으로 서예가를 중심으로 한 연구보다 王朝나 서사 재료의 형식 그리고 작품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방법이 많이 사용된다. 曹魏시대에 내려진 禁碑令의 영향은 南朝시대 전반에 영향을 끼쳐 北朝에 비해 남겨진 刻石 작품은 매우 적다. 그러나 東晉시대의 爨寶子碑, 劉宋시대의 爨龍顔碑, 南梁의 瘞鶴銘등은 매우 높은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남조의 刻碑이다. 禁碑令으로 刻碑를 세우지 못한 남조에서도 墓誌를 묻는 관습은 점차 성행하여 墓誌銘 서예가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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