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東晋시대의 刻石 서예

2012. 3. 15. 09:14서예일반

4) 東晋시대의 刻石 서예

淸나라 시대의 劉熙載는『書槪』에서 “晋氏初禁入碑.....”(晋나라 초기에 비석을 세우는 것을 금하였다.)라 하여 晋나라 시대에도 曹魏 시대부터 시행되던 ‘禁碑’의 관습이 남아 있어서 ‘禁碑令’을 내리고 비석을 세우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이러한 관습은 南朝시대 宋나라와 齊나라에서도 계속되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東晋시대의 것으로 전해지는 刻石 서예 작품은 閣帖이나 墨跡 殘紙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편이다. 그러나, 비록 禁碑令이 있었다고 하여도 중앙 정부의 세력이 잘 미치지 않는 변방 지역이나 주변 국가에서는 여전히 비석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비석을 세울 수 없는 중앙의 문벌 귀족은 비석을 세우는 대신 墓誌銘을 만들어 碑文과 비슷한 형식의 문장을 기록하여 땅속에 묻는 풍습이 나날이 늘어났다.

東晋시대의 刻石은 淸나라 시대부터 출토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碑碣, 闕石, 墓誌, 墓磚, 地券 등 비교적 다양한 형식이 전하여 진다. 東晋시대의 刻石 서예 작품은 대부분이 隸書와 楷書 그리고 楷書가 함께 융합된 형태인 ‘新隸體’라 불리는 새로운 서체로 쓰여져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 시대의 刻石 서예 작품이 당시의 귀족 관료 계층에서 유행하던 楷書나 行書로 쓰여져 있지 아니하고 ‘新隸體’로 쓰여져 있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현상이다. 그 이유로 첫째는 용도에 따라서 사용하는 서체를 달리 하는 관습으로 옛 사람들이 비석을 세울 때에는 고졸하고 장엄한 서체인 隸書를 사용하였던 관습을 따랐으며, 둘째는 東晋이 시대상으로 漢나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漢隸의 특징을 제대로 소화 할 수 있는 서예가가 적었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형태와 미감의 新隸體가 당시의 심미적 요구에 부합하였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東晋시대의 刻石으로 隸書와 楷書의 형태와 미감을 가지고 있는 작품은『爨寶子碑』,『楊陽神道闕』,『張鎭墓誌』,『王興之‧宋和之夫婦墓誌』,『王閩之墓誌』,『王丹虎墓誌』 등이 있으며 隸書 작품으로는『謝鯤墓誌』,『晋恭帝玄宮石碣』이 있다. 그리고 민간 서예의 느낌을 가득 간직한『孟府君墓誌』,『顔謙婦劉氏墓誌』와 篆書 작품인『朱曼妻買地券』 등이 전하고 있다.

『爨寶子碑』는 東晋의 義熙 원년(405)에 雲南省 南寧(현재의 曲靖縣 揚旗田)에 세워진 刻碑이다. 碑額에 “晋故振威將軍建寧太守爨府君之墓”라 쓰여 있어 이름을 “晋振威將軍建寧太守爨寶子碑”라 부른다. 淸나라 乾隆 43년(1778년)에 발견되어 현재 雲南省 曲靖縣 第一中學校에 보관되어 있다. 비석의 위 부분에 碑額이 있고 아래에는 13행에 매 행 4자의 題名이 있다. 본문은 모두 13행이며 새긴 날짜와 문장이 끝나는 2행을 제외한 나머지는 매 행 30자이다. 비문의 끝 부분에 보면 大亨 4년에 비석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大亨 3년 다음에 東晋의 연호는 義熙로 바뀌었으므로 大亨 4년은 마땅히 義熙 원년으로 이해하여야 한다.『爨寶子碑』와 같이 사용되지 않은 연호가 쓰여진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비석이 세워진 雲南省이 중국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東晋의 수도인 建康(지금의 南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까닭으로 연호가 바뀐 것을 미쳐 알지 못하고 이전부터 계속 사용하던 연호를 그대로 기록 한 것으로 보인다.

『爨寶子碑』가 발견되기 이전에는 王羲之, 王獻之 父子와 그들의 작품을 세긴 閣帖 서예만을 東晋시대 서예의 전부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淸나라 시대 이후에는 고증학, 금석학, 문자학 등 새로운 학문의 성숙과 발맞추어 수많은 금석 유물이 발견되었다.『爨寶子碑』와 南北朝시대의 刻石 서예 작품들도 꾸준히 발견되었으며 새로운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爨寶子碑』는 雲南省에 세워진 劉宋의『爨龍顔碑』와 함께 이름 붙여 되어 ‘二爨’이라 불리며 江蘇省에 있는 南梁의『瘞鶴銘』과 더불어 南朝시대 최고의 刻石 서예 작품으로 꼽힌다.

『爨寶子碑』의 서체는 楷書의 結字에 隸書의 筆劃을 첨가한 楷書와 隸書의 중간 형태로서 新隸體의 일종이다. 楷書로 발전한 기본 結字에 隸書의 波磔을 사용한 이러한 서체는 十六國시대의 寫經 서체와 魏晋시대의 刻石에서 많이 나타난다. 정방형의 結體와 露鋒으로 運筆한 起筆과 뾰족하고 위쪽을 향하며 뻗어 있는 收筆은 魏晋시대의 楷書와 十六國시대의 隸書와 많이 닮아 있다. 筆劃이 무겁고 튼튼하며 隸書의 波磔을 사용하여 건강하고 중후하다. 또한 결구는 고아하고 질박하면서도 기이할 뿐 아니라 글자의 획수에 따라서 크기가 자연스럽게 布置되어 예술적 미감이 돋보인다.

淸나라 중 후기에 碑學이 흥성한 후부터『爨寶子碑』는 書學者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것과 더불어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爨寶子碑』의 전체적 미감을 “端樸若古佛之容”(단아하고 질박한 것이 마치 오래된 부처의 용모와 같다.)이라 하였으며 또 “樸厚古茂, 奇姿百出, 與魏碑之[靈廟』『鞠彦雲』皆在隸楷之間, 可以考見變體源流.”(질박하고 온후하며 예스럽고 풍성한 미감 등 많은 기이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魏碑의『中嶽嵩高靈廟碑』와『鞠彦雲墓誌』 등이 모두 隸書와 楷書 사이의 서체들로서 서체가 변하는 원류를 고찰하여 볼 수 있다.)라 하여『爨寶子碑』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고 서예사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王興之․宋和之夫婦墓誌』는 東晋의 永和 4년(348) 10월에 새겨진 墓誌銘으로서『王興之墓誌』라 불리기도 한다. 墓誌石의 양쪽 면에 모두 墓誌銘이 새겨져 있으며 한쪽 면에는 王興之의 墓誌銘이 새겨져 있고 다른 한쪽 면에는 부인 宋和之의 墓誌銘이 새겨져 있다. 王興之는 咸康 6년(340)에 세상을 버렸고 宋和之는 永和 4년(348)에 세상을 버렸다고 기록된 문장의 내용으로 미루어 이 墓誌銘이 永和 4년에 새져 진 것이라 설명하는 것이다. 이 墓誌는 1965년에 南京의 新民門밖에서『王閩之墓誌』,『王丹虎墓誌』와 함께 출토되어 郭沫若등 書學者들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이 세 종류의 墓誌는 한 사람의 書家에 의하여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자형이 방정하여 묵직하고 질박한 미감이 특징으로『爨寶子碑』와『爨龍顔碑』의 서체와 많이 닮아 있다. 다만 二爨을 규칙적으로 다듬어 놓은 듯 하여 자연스럽고 소박한 느낌이 적은 것이 단점이다.

『王興之墓誌』가 출토되고 난 후 중국 서예 이론계에는 郭沫若을 중심으로『蘭亭序』의 진위에 관한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王羲之를 중심으로 하는 東晋시대의 수많은 閣帖과 臨摹本들이 같은 시대의 刻石 서예 작품인『王興之墓誌』,『王閩之墓誌』 등과 비교할 때 자형과 서풍이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을 근거로 하여『蘭亭序』의 진위에 관하여 懷疑를 품은 학자들이 점차 늘어갔다. 郭沫若이 1965년『由王謝墓誌的出土論到蘭亭序的眞僞』라는 제목의 문장에서『蘭亭序』가 王羲之의 진본이 아니라 후대의 위작일 것이라 논증하자 書學界는 순식간에『蘭亭序』의 眞僞에 관한 논쟁으로 일대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 몇 년에 걸친 논쟁은 書學界 뿐 아니라 결국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게 되어 마침내 毛澤東의 지시로 잠시 덮어두게 되었다. 그러나『蘭亭序』의 眞僞에 관한 의문은 사라지지 않고 書學界의 문제로 남아 있으며 1977년 文物出版社에서는 수년 동안 이어져 온『蘭亭序』의 眞僞에 관한 논쟁을 모아『蘭亭論辨』의 이름으로 출판을 하기에까지 이른다.

『王興之墓誌』와『王閩之墓誌』, 그리고『王丹虎墓誌』는 王씨 세가의 서가에 의하여 쓰여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王興之, 王閩之 등은 王羲之와 같은 집안이지만 그들의 墓誌銘 서체와 王羲之의 작품의 서풍은 시대를 달리하는 정도로 많은 차이가 난다.『蘭亭序』와 王羲之 서예의 서풍을 긍정하는 학자들은 한 시대에 여러 가지 서풍이 존재하는 것을 매우 높게 평가하며 여러 서풍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여 논증하고 있다. 그 근거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은 쓰임새에 따라 서풍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墓誌나 비석 등에는 장중하고 방정한 서풍의 글씨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서가들의 심미적 요구가 한 시대에 여러 서풍의 글씨가 존재할 수 있게 하였다고 설명한다.

『孟府君墓誌』는 東晋의 泰元 원년(376)에 새겨진 刻石으로 다섯 점의 磚에 새겨서 墓室의 4방과 관의 앞에 놓았던 것이다. 다섯 점의 墓誌 중에서 세 점의 서체가 서로 비슷하고 또 다른 두 점의 서체가 서로 비슷하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어떤 학자들은 두 사람의 서예가에 의하여 쓰여진 작품이라 주장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서체의 굵기는 다르지만 자형이 비슷한 점으로 미루어 한 사람의 서가가 쓴 작품을 두 사람이 새겨서 서풍이 다르게 표현되었다고 한다. 두 가지 서풍의『孟府君墓誌』는 隸書에서 楷書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서체로 捺畫의 筆勢가 유난히 길며 가로획의 중심이 위쪽으로 향하여 收筆한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筆勢는 모두 魏晋시대에 隸書가 楷書로 변화하는 과정 중의 新隸體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이다.

출처 : 중국과 서예
글쓴이 : 금릉산방인 소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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