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晋나라 시대의 서예가와 작품

2012. 3. 15. 09:14서예일반

4. 晋나라 시대의 서예가와 작품

1) 書藝 가문과 서예가

晉나라 시대는 귀족 사회로서 문벌 귀족 계층이 그 당시의 사상과 예술을 주도하고 있었다. 관리를 선발도 推薦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문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었으며 그 다음이 지혜와 德性을 기준으로 삼았다. 따라서 문벌 귀족들은 자신들만의 세력과 테두리를 형성하여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일반 백성들과는 매우 다른 생활을 하였을 분만 아니라 물질과 정신적 교류도 그들끼리만 행하고 있었다. 書法의 전통을 전수하고 계승하는 것도 가문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고 있었다. 가문의 자제를 우선 교육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교류가 많은 다른 귀족의 자제에게 문호를 개방하였다. 王羲之도 자신의 書論에서 서예의 오묘한 도리를 논설한 후 마지막에 가문의 書法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끝맺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서예 교육의 전통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曹魏시대부터 東晋시대까지의 書藝 世家는 衛氏, 王氏, 謝氏, 庾氏, 郗氏, 索氏, 陸氏 등이며 그 가운데에서 王氏 世家가 가장 융성하였다.

(1) 衛氏 가문의 서예가

衛氏 서예 가문의 시조는 曹魏시대의 衛覬이다. 衛覬의 書法은 아들인 衛瓘과 손자인 衛恒, 衛恒의 姪女인 衛鑠과 衛恒의 두 아들 衛璪와 衛玠의 큰 줄기를 형성하며 발전하였다. 衛覬는 鍾繇와 쌍벽을 이루는 曹魏시대의 서예가로서『受禪表』등의 작품을 남겼다고 전한다. 衛覬는 위에서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였으므로 더 이상 논술하지는 않는다.

衛瓘(220-291)은 河東의 安邑(지금의 山西省 夏縣)사람으로 字가 伯玉이며 索靖과 함께 張芝의 서예를 배웠다고 전한다. 晉나라 武帝때 가문과 재덕을 배경으로 하여 尙書令의 벼슬에 올랐다. 그는 張芝의 書法을 배운 것 이외에 아버지 衛覬의 서풍을 배우고 계승하였다. 張懷瓘은『書斷』에서 “常云 ‘我得伯英之筋, 恒得其骨, 靖得其肉’.伯玉采張芝法, 取父書參之, 遂至神妙.”(衛瓘은 항상 ‘나는 張芝의 근육을 얻었고 衛恒은 그 骨氣를 얻었으며 索靖은 그 살을 얻었다.’라고 말하였다. 衛瓘은 張芝의 書法을 배웠으며 글씨 속에 아버지인 衛覬의 서풍을 함유하여 신묘한 경지에 올랐다.)라 하여 衛瓘의 草書는 張芝의 草書에 나타나고 있는 예술적 특성을 가문의 서풍과 잘 융화하여 독특한 서풍을 형성하였다고 설명하였다. 張懷瓘은 衛瓘의 서예를 평가하면서 章草는 神品에 넣었으며 小篆, 隸書, 行書, 草書는 妙品에 넣었고 古文은 能品에 넣으며 “天姿特秀, 若鴻雁奮六翮, 飄搖乎淸風之上. 率情運用, 隨心所欲, 如天姿之美.”(천부적 소질이 특별히 빼어나 큰기러기가 날갯짓하여 淸風의 위에서 나는 듯하다. 감정을 운용은 마음먹은 대로 따르며 마치 타고난 아름다움이 있는 듯 하다.)라 하여 衛瓘은 천부적 소질이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현재 전하고 있는 작품으로는『淳化閣帖』과『大觀帖』에『頓首州民帖』이 있으나 그 작품이 眞跡을 새긴 것인지 위작을 새긴 것인지 정확하게 고증되지는 않는다. 宋나라 시대의 夢英은『十八體書』에서 衛瓘이 柳葉篆을 창조했다고 하나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으며 전하여 지지도 않는다. 衛氏 가문의 서예가 중에서 후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은 衛瓘의 아들 衛恒과 衛恒의 질녀인 衛鑠이다.

衛恒(?252-291)의 字는 巨山이며 벼슬이 黃門侍郞에 이르렀다. 惠帝시대의 永平원년 賈后 등에 의해 三族이 죽임을 당할 때 목숨을 잃었으며 다만 두 아들 衛璪와 衛玠만이 간신히 살아 남았다. 그는 草書와 隸書 그리고 古文에 매우 뛰어났다고 전한다. 南梁의 袁昻은『古今書評』에서 “衛恒書如揷花美女, 舞笑鏡臺.”(衛恒의 서예는 마치 꽃을 꽂은 미녀가 거울 앞에서 웃으며 춤추는 것 같다.)라 하였으며 南梁의 庾肩吾는『書品』에서 衛恒의 서예를 평하면서 ‘中之中品’의 위치에 놓았고 唐나라 시대의 李嗣眞도『書後品』에서 ‘中之中品’의 위치로 평하면서 “傳統多矣, 縱任輕巧, 流轉風媚, 剛健有餘, 便媚詳雅.”(전통적 법칙이 많으며 천성에 맡겨 기교가 적다. 풍치가 아름답고 건강한 기세가 넘치며 고아한 심미적 특징이 있다.)라 하였다. 또한 張懷瓘도 衛恒의 서예를 평하면서 古文과 章草 그리고 草書를 妙品의 위치에 놓았다. 이상의 평론을 근거로 하면 衛恒의 서예는 그의 아버지 衛瓘보다는 한 수 아래였으며 천부적 자질은 뛰어나지 않았으나 刻苦의 노력으로 가법을 계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宋나라 시대의 僧夢英은『十八體書』에서 衛恒이 雲書를 창작하였으나 “筆動若飛, 字張如雲, 莫能傳學.”(筆勢의 움직임이 나르는 것 같고 字勢는 구름과 같으나 전하지 않는다.)이라 하여 당시에 이미 雲書의 筆法이 끊어졌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은『淳化閣帖』에 실려 있는『往來帖』과『一日帖』이 있다.『宣和書譜․卷十三』에서는 “便娟有餘, 而剛健非所長.”(아리따운 자태는 넘치나 강건함은 부족하다.)이라 하여 衛恒의 서예는 부드러운 아름다움이 특징이라 평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宋나라 이전의 여러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衛恒의 서예는 대체로 근력의 강건함이 부족함을 지적하고 있다. 衛恒이 중국 서예사에서 이루어 놓은 업적은 서예 작품이 아니라 비교적 종합적인 서예 이론인『四體書勢』를 저술한 것이다.『晉書‧衛恒傳』에『四體書勢』의 전편이 수록되어 전하고 있으며 그 중심 내용은 문자의 기원과 변천 그리고 古文, 篆書, 隸書, 草書 등 四體의 형성과 書勢에 관하여 논술한 것으로 최초의 중국 서예사 저술이라 평가 할 수 있다. 서예 이론에 관한 구체적 설명은 다음 단락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생략한다.

중국 서예사에서 가장 유명한 여류 서예가와 서예 이론가를 꼽으라면 우리는 아마도 衛氏 가문의 衛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衛鑠(272-349)의 字는 茂漪로 汝陰太守 李矩의 아내이며 衛恒의 질녀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衛부인이라 부른다. 衛鑠은 명문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물질과 사상의 풍부한 배경 속에서 가문의 서풍을 배우는 한편 鍾繇의 書法을 전승하여 隸書와 楷書 그리고 行書에 능통하였다. 또한 당시에 이미 필명을 널리 떨친 까닭으로 王羲之도 衛鑠의 문하에서 書法을 익혔다고 전한다.

南梁의 庾肩吾는『書品』에서 衛鑠의 서예를 ‘中之上品’의 위치로 평했으며 唐나라의 李嗣眞은『書後品』에서 ‘上之下品’에 놓았다, 唐나라의 張懷瓘은『書斷』에서 衛부인의 隸書를 妙品으로 평가하며 “碎玉壺之氷, 爛瑤臺之月, 婉然芳樹, 穆若淸風.”(옥잔의 얼음이 깨어지고 요대(瑤臺)에 달빛이 흐드러지게 비치는 것 같다. 아름답기가 꽃나무와 같으며 온화함이 맑은 바람과도 같다.)이라 하였으며 淸의『佩文齋書畵譜』에서도『唐人書評』을 인용하여 여성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을 시대적 심미 특징과 잘 융화하여 표현하였다고 평가하였다. 衛鑠의 작품으로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淳化閣帖‧卷八』에 8행 96자의 행서와『仰奉帖』이 있다. 衛鑠이 중국 서예사에서 많은 영향을 끼치며 전해져 오는 것은 그가 王羲之의 스승이었다는 점이 크게 부각되었으며 서예 이론 저술인『筆陣圖』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筆陣圖』가 衛鑠의 저술인지 아니면 후대의 僞作인지 학자들의 주장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내용이 훌륭한 까닭으로 후대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筆陣圖』는 執筆과 筆法, 結字등에 관하여 처음으로 논설하여 ‘永字八法’의 기초가 되었으며 감상과 평론이 창작과 다른 독립된 영역으로 자리잡을 수 있음을 논술한 것이 중심 내용이다.

(2) 王씨 가문의 서예가

晋나라의 문벌 귀족 가문 중에서 가장 융성한 書藝 世家는 바로 琅琊 王씨 가문이다. 琅琊 王씨 가문은 가장 많은 서예가를 배출하였을 뿐 아니라 書聖이라 불리는 王羲之와 王獻之 부자를 배출한 가문으로 東晋시대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중국 서예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가문이다. 晋나라의 王씨 세가는 王羲之의 아버지인 王曠과 從兄弟인 王敦, 王導, 王廙 등 사 형제를 기준으로 하여 제 일대 王씨 서가의 書脈을 형성하였다. 제 이대와 제 삼대 王씨 가문의 書脈은 王導의 아들 王恬, 王洽, 王劭, 王薈와 王洽의 아들 王珣과 王珉으로 이어지는 한 줄기가 있으며 王羲之를 중심으로 王凝之, 王徽之, 王操之, 王獻之 등 네 아들의 두 갈래의 書脈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 王씨 가문의 서예가 중에서 王羲之와 王獻之가 가장 뛰어나며 서예사에 끼친 영향도 가장 많다. 중국 서예사를 설명할 때 王羲之와 王獻之는 그 비중의 매우 크기 때문에 새로운 단락에서 별도로 상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여기에서는 王羲之와 王獻之 부자 이외의 중요한 서예가인 王敦, 王導, 王廙, 王洽, 王凝之, 王徽之 등을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王敦(266-324)은 字가 處仲이며 王導의 從兄으로 揚州刺史와 廣武將軍의 관직을 거치며 王導와 함께 琅琊王 司馬睿를 元帝의 보위에 오르게 도와 東晋을 세우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은 공로로 征南大將軍과 鎭東大將軍의 벼슬에 올라 軍權을 장악하였다. 훗날 東晋의 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病死하였다. 王敦의 서예는 비록 王씨 가문에서 최고의 위치는 아니었으나 王導와 함께 가문의 권위를 東晋의 귀족 가문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로 끌어올려 王씨 書法의 발전에 중요한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 할 수 있다. 唐나라 시대의 張懷瓘은『書估』에서 그의 작품을 三等品에 놓았으며 謝安, 王導 등과 같은 수준이라 평가하였다. 宋나라 시대의『宣和書譜』에는 “敦初以工書得家傳之學, 其筆勢雄健.”(王敦은 서예의 소질로 가문의 학풍을 배워 그 筆勢가 웅장하고 강건하였다.)라 기록하여 王敦의 서예가 웅장하고 강건하다는 평을 하고 있다. 현재 전하는 작품은『淳化閣帖』에 실려 있는『蜡節帖』이 있을 뿐이다.

王導(276-339)는 字가 茂弘이며 王敦과 함께 司馬睿가 晋나라 元帝에 즉위하는데 세운 공으로 훗날 丞相의 자리에 올라 武岡侯에 봉하여 졌다. 明帝때에 大司馬, 太傅 등의 관직을 거치며 가문의 빛낸 인물이다. 西晉의 말년에 八王의 난과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강남으로 옮겨갈 때 다른 물건은 아무 것도 몸에 지니지 않고 오직 鍾繇의 墨跡인『宣示表』를 가슴에 품고 강을 건넌 일화가 매우 유명하다. 이것은 그가 鍾繇의 서예를 매우 중시하고 있었으며 또한 서예의 감식 능력이 매우 뛰어났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王導가『宣示表』를 강남으로 가지고 간 것은 서예의 발전적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이다.『宣示表』는 훗날 王羲之의 수중에 들어가 鍾繇를 시조로 하는 南派의 새로운 서풍이 형성하게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王導는 鍾繇와 衛瓘의 서예를 배워 行草에 뛰어났으며 당시에 이미 높은 필명을 얻었다고 전한다. 南梁의 庾肩吾는『書品』에서 王導의 서예를 ‘中之下品’의 위치에 놓았고 唐나라의 張懷瓘은 그의 行書와 草書를 能品의 위치에 놓았다. 唐나라 竇臮의『述書賦‧上』과 宋나라 시대의『宣和書譜』에서도 비록 王導의 서예를 최고의 수준으로 평가하지는 아니 하였으나 行草가 뛰어나다고 설명하였다. 현재까지 전하는 王導의 작품은『淳化閣帖』에 草書로 쓰여진『省示帖』과『改朔帖』이 있다.

王廙(276-322)는 字가 世將으로 王羲之의 숙부이며 王導의 從弟이고 東晋을 세운 元帝 司馬睿의 처남이다. 가문의 배경과 元帝의 지지로 武陵縣侯의 벼슬을 거쳐 荊州刺史의 위치에 올랐다. 글씨와 그림에 모두 능하였다고 전하며 南齊의 王僧虔은『論書』에서 “右軍之前, 惟廙爲最, 畵爲晉明帝師, 書爲右軍法.”(王羲之 이전에는 王廙가 가장 뛰어났다. 그림으로는 明帝의 스승이 되었고 서예는 王羲之의 법이 되었다.)이라 하여 書畵를 겸비한 문인이라 설명하였다. 南梁의 庾肩吾는『書品』에서 王廙의 書品을 ‘中之中品’의 위치에 놓았으며 唐나라 시대의 李嗣眞은『書後品』에서 ‘上之下品’의 위치에 놓았다. 또한 張懷瓘은『書斷』에서 隸書와 草書를 能品에 놓았고 飛白書를 妙品의 위치에 놓으며 당시의 평론을 인용하여 “時人云: ‘王廙飛白, 右軍之亞.’”(王廙의 飛白書는 王羲之에 버금간다.)라 하였다. 王廙는 張芝와 鍾繇의 서예를 배워 草書와 隸書 그리고 飛白書에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宣和書譜』에 宋나라 皇宮의 御府에 草書작품『仲春帖』, 章草작품『鄭夫人帖』, 行書작품『賀雪帖』과『嫂何如帖』이 전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淳化閣帖』에 行楷작품『上晉元帝表』, 草書작품[卄四日帖』과『七月三日帖』 그리고『嫂何如帖』이 수록되어 있다. 王廙는 제 일대 王씨 가문의 서예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서예가로 꼽힌다.

王씨 書藝 世家의 제 이대와 제 삼대 서예가는 제 일대 서예가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위치할 뿐 아니라 중국 서예사를 통틀어 가장 높은 수준에 위치한다. 가문의 선현들이 이루어 놓은 튼튼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기반 위에서 당시에 유행한 玄學을 사상적 토대로 자연을 벗삼아 수양하며 자신들의 서예가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제 이대의 王羲之는 중국 서예사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올라 書聖이라 불리고 있으며 제 삼대의 王獻之도 아버지 王羲之의 뒤를 잇고 있다. 王羲之를 제외한 제 이대 王씨 書藝 世家 중에서 중요한 인물은 王導의 아들 王恬, 王洽, 王劭, 王薈 등 사 형제와 王廙의 아들인 王茂之를 들 수 있다.

王恬(314-349)은 字가 敬豫이며 王導의 둘째 아들이다. 草書와 隸書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張懷瓘은『書斷』에서 그의 隸書를 能品의 위치에 놓았으며 “恬工於草隸, 當世難以爲比; 尤長於臨效, 率性而運, 則復非工.”(王恬은 草書와 隸書에 뛰어났으며 당시에 비교할 사람이 드물었다. 더욱이 臨摹를 매우 잘하였으며 性情에 따라 운용하여 꾸미지 않았다.)이라 하여 隸書와 草書뿐 아니라 臨書에도 뛰어났음을 설명하였다.『宣和書譜』에서도 王恬의 草書와 隸書를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현재까지 전하는 작품은『淳化閣帖』에 草書 작품인『得示帖』이 실려 있다.

王劭는 王導의 다섯째 아들로 字가 敬倫이며 생몰 년대가 분명하지 않고 王洽의 동생이며 王薈의 형으로만 알려져 있다. 관직은 吏部尙書와 建威將軍을 거쳐 吳國內史에 이르렀다. 그는 서예를 잘 할 뿐 아니라 감상에도 뛰어난 안목을 소유하였다고 전한다. 唐나라 시대의 竇臮는『述書賦‧上』에서 王恬가 서예의 감식에 뛰어 났으며 형제끼리 서로 배우고 익혀 형보다는 뛰어났으나 동생보다는 못하다고 하였다. 宋나라 시대의 陳思는『書小史』에서 王劭가 草書에 뛰어났다고 기록하였다.『淳化閣帖』에 王恬의 行書작품으로 5행49자가 실려 있다.

王薈는 王導의 여섯 아들 중에서 막내로 字는 經文이며 會稽內史와 鎭軍將軍의 관직에 올랐다. 가문의 書法을 배워 行書에 특별히 뛰어 났다고 전하며 南梁의 庾肩吾는『書品』에서 ‘下之上品’의 위치에 놓았다. 현재 전하는 작품은『萬歲通天進帖』가운데『癤腫帖』이 실려 있다.

王洽(323-358)은 字가 敬和이며 王導의 셋째 아들로 관직이 領軍將軍과 中書令에 올라 사람들은 ‘王領軍’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아버지의 서예를 배워 형제 중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草書, 隸書, 行書 등 모든 서체에 뛰어났다고 한다. 王僧虔은『論書』에서 “亡曾祖領軍書, 右軍云 ‘弟書遂不減吾, 變古制今, 唯右軍領軍.’”(돌아가신 증조부 王領軍의 서예에 대하여 王羲之는 ‘동생의 서예는 나에게 뒤지지 않으며 옛것을 새롭게 하는 것은 오직 나와 王洽 뿐이다.’라 하였다.)이라 하여 王洽은 옛것을 계승하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새것을 창조하였을 뿐 아니라 王羲之와 비슷한 수준이라 평가하였다. 南梁의 庾肩吾는『書品』에서 王洽의 서예를 ‘中之下品’의 수준으로 평가하였으며 모든 법칙에 능통하다고 하였고 唐나라의 李嗣眞은『書後品』에서 ‘上之下品’에 놓으며 표현 양식과 用筆이 王羲之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張懷瓘은『書斷』에서 王洽의 隸書, 行書, 그리고 草書를 妙品의 위치에 놓으며 “逸少與從弟洽, 變章草爲今草, 韻媚宛轉, 大行於世.”(王羲之와 그의 從弟인 王洽은 章草를 변화하여 今草를 만들어 운율의 미와 변화의 미를 세상에 유행시켰다.)라 하였으며 여러 가지 서체에 능통하였으나 특별히 草書가 뛰어나다고 하였다.

전통 서예는 나이가 많아질수록 좋은 작품을 남기는 것이 보편적 평론인데 王洽은 겨우 36세의 나이에 세상을 버린 까닭으로 王羲之만큼 좋은 작품은 남기지 못하였다. 현재 전하는 작품은『淳化閣帖』에 草書작품인『辱告帖』, 行書작품으로『仁愛帖』과『兄子帖』 그리고『向感塞帖』 등이 실려 있다. 王洽의 집안에서는 王洽 자신 뿐 아니라 그의 아내인 荀氏와 두 아들 王珣과 王珉도 필명이 매우 높았다고 전한다.

王珣(350-401)은 王導의 손자이며 王洽의 아들이며 字는 元琳이다. 東亭侯에 봉하여지고 또 輔國將軍, 吳國內史, 尙書僕射, 尙書令 등의 벼슬에 올랐다. 어릴 때부터 서예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으며 行書와 草書에 뛰어 났었다고 전한다.『宣和書譜』에는 “珣三世以能書稱.”(王珣은 세 살에 이미 서예를 잘 한다는 말을 들었다.)라 기록하고 있으며 明나라 시대 董其昌 王珣의 草書는 東晋의 서풍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전하는 작품으로는『淳化閣帖』에 草書작품『三月帖』과『伯遠帖』이 실려 있다.

『伯遠帖』은 작자가 기록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墨跡 진본 行書 작품이다. 가로와 세로가 17.2×25.1㎝, 5행 47자이다. 이 작품은 王珣이 伯遠에게 보내는 편지글로서 상대방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애절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체의 품격이 고졸 하면서도 筆勢가 자유 분방한 미감이 특징이다. 明나라 시대의 董其昌은 이 작품을 감상하고『題王珣眞迹』에서 “珣書瀟灑古澹. 長安所見墨跡, 此爲尤物, 足見東晉風流.”(王珣의 서예는 산뜻하고 깨끗하며 고아하고 담박하다. 長安에서 감상한 墨跡은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족히 東晋시대 서풍의 흐름을 보는 것 같다.)라 평하여『伯遠帖』이 東晋의 서풍을 대표한다고 평가하였다. 淸나라 乾隆帝시대에는『伯遠帖』이 王羲之의『快雪時晴帖』과 王獻之의『中秋帖』과 함께 희귀한 작품으로 여겨져 ‘三希堂’에 보관되었으며 이후부터 이 세 가지 법帖을『三希堂法帖』이라 부르게 되었다.『伯遠帖』은 宋나라 시대부터 궁중의 내부에 보관되어 오다가 明나라의 董其昌, 淸나라에서 활동한 朝鮮인 安岐의 손을 거쳐서 홍콩에까지 흘러갔다가 현재에는 北京의 故宮博物院에 보존되어 있다.

王珉(351-388)은 字가 季琰이며 王獻之와 같은 中書令의 벼슬에 올라 사람들은 王獻之를 ‘大令’, 王珉을 ‘小令’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行書, 隸書, 草書에 뛰어났으며 南梁의 庾肩吾는『書品』에서 ‘上之上品’의 위치에 놓으며 “季琰筋力俱駿.”(王珉의 서예는 근육과 힘을 갖추고 있는 뛰어난 수준이다.)이라 기록하였다. 唐나라 시대의 張懷瓘도『書斷』에서 王珉의 隸書, 行書, 草書를 妙品의 높은 위치에 놓았으며 竇臮의『述書賦‧上』과『宣和書譜』에서도 매우 훌륭한 서예가라 기록하고 있다. 書論의 저서로는『行書狀』이 전하고 있으며『淳化閣帖』에 草書와 行書작품이 실려 있다.

王씨 가문의 제 삼대 서예가로 王珣과 王珉이외에도 王玄之, 王肅之, 王凝之, 王徽之, 王操之, 王渙之, 王獻之 등 王羲之의 아들 칠 형제가 유명하다. 宋나라 시대의 黃伯思는『東觀餘論』에서 “王氏凝‧操‧徽‧渙之四子書, 與子敬書俱傳, 皆得家範, 而體名不同; 凝之得其韻, 操之得其體, 徽之得其勢, 渙之得其貌, 獻之得其源.”(王羲之의 아들 凝之, 操之, 徽之, 渙之등 네 명의 서예와 獻之의 서예가 전하고 있으며 모두 집안의 書法을 배웠으나 體勢와 명성은 달랐다; 凝之는 그 기운을 얻었고 操之는 그 형체를 얻었으며 徽之는 그 세력을 얻었고 渙之는 그 모양을 얻었으며 獻之는 그 원리를 얻었다.)이라 하였다. 黃伯思의 평을 근거로 하면 王羲之의 아들 중에서 王徽之와 王獻之가 각각 王羲之의 기운과 원리를 얻었으므로 가장 높은 수준의 서예를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王獻之는 아버지 王羲之와 함께 二王이라 불리며 서예사에서 제 2인자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王凝之(? -399)는 字가 叔平으로 江州刺史와 會稽內史의 벼슬을 살았으며 草書를 잘 썼다고 전한다.『晉書‧王羲之전』의 기록에 의하면 五斗米敎(道敎)를 믿었으며 그 중에서 王凝之가 가장 독실하였다고 한다. 도교를 믿음으로 유교 학설을 배척하고 淸談 사상에 의한 神仙方術에 의지한 王凝之는 결국 사상의 모순으로 인하여 孫恩에게 살해당하게 된다. 唐나라의 張懷瓘은『書估』에서 王凝之의 서예를 제 4등의 위치에 놓아 羊欣과 孔琳之와 같은 수준으로 평가하였다. 宋나라 시대의 黃庭堅은『山谷題跋』에서 “凝之字法最密, 恨不多書”(王凝之의 結字法은 가장 세밀하나 많이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라 하여 宋나라 시대에 이미 王凝之의 작품이 많이 전하여지지 않음을 설명하였다. 현재 전하는 작품은『淳化閣帖』에 草書작품『八月卄九日帖』이 있다.

王徽之(? -386)의 字는 子猷이며 黃門侍郞의 벼슬에 올랐으며 楷書와 草書를 잘 썼다고 전한다.『晉書』의 기록에 의하면 王徽之는 동생인 王獻之와 사이가 매우 좋았으며 王徽之가 죽고 난 후 한달 만에 병을 얻어 죽었다고 전한다. 張懷瓘은『書估』에서 王徽之의 서예를 제4등의 위치에 놓아 羊欣, 孔琳之 등의 서예와 같은 수준으로 평가하였다.『宣和書譜』에서는 “律以家法, 在羲‧獻間”(가법을 법칙으로 하여 王羲之와 王獻之의 사이에 있다.)이라 하여 그의 서예를 높게 평가였고 또 宋나라 皇宮에『僧倫帖』,『至節帖』,『仲宗帖』,『蔡家帖』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淳化閣帖』에 草書작품으로 6행의 52字가 전하고 있으며『萬歲通天進帖』속에 行書작품인『新月帖』이 수록되어 있다.

(3) 謝씨 가문의 서예가

謝氏世家는 비록 東晋사회의 書藝 世家 중에서 그 세력이 강대하지는 못하였으나 王씨 집안과의 서예 교류가 많은 까닭으로 말미암아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衛氏世家 서예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謝安이며 종형 謝尙과 동생 謝萬이 당시의 서단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唐나라 시대의 竇臮는『述書賦』에서 謝尙은 草書가 매우 뛰어나다고 평하였다. 宋나라 시대의『宣和書譜』에는 謝尙의『餘寒帖』이 궁중에 보관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현재에까지 전해지지는 않는다.『宣和書譜』에 의하면 謝萬은 行草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뛰어 났다고 전한다. 현재까지 전하는 작품으로는『淳化閣帖』에 行草 작품 한 점이 실려 있다.

謝安(320-85)은 陳郡 陽夏사람으로 字는 安石이며 尙書僕射와 揚州刺史의 관직을 거쳐 太傅의 위치에 올랐다. 行書와 隸書에 특별히 뛰어났으며 감상과 비평에도 높은 수준을 겸비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南齊시대의 王僧虔은『論書』에서 謝安의 서예는 能品에 들어가며 스스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南梁의 庾肩吾는『書品』에서 ‘中之上’의 위치에 놓았다. 唐나라 시대의 孫過庭은『書譜』에서 “謝安素善尺牘, 而輕子敬之書.”(謝安은 본래 편지 글 서체를 잘 썼으며 王獻之의 서예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라 하였으며 李嗣眞은『書後品』에서 謝安의 글씨를 ‘中之中’품에 놓았다. 張懷瓘은『書斷』에서 謝安의 隸書, 行書, 草書를 妙品의 위치에 놓았으며 宋나라 시대의 米芾은『謝帖贊』에서 “不繇不羲, 自發淡古.”(鍾繇와 다르며 王羲之와도 다르고 스스로 담백하고 고아한 미감을 계발하였다.)라 하였다.

東晋시대 귀족 계층은 玄學 사상에 기초를 두고 학문과 예술을 수련하였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으로 謝安도 자연을 벗삼아 고아하고 조용한 심성을 배양하며 서예에 정진하였다. 王羲之와 서예뿐만 아니라 사상과 철학을 교류하며 돈독한 우의를 나누었다. 서체가 고아하고 소담스러운 미감이 특징이며 王羲之의 영향을 많이 받은 흔적이 엿보인다.『宣和書譜』의 기록에 의하면 宋나라 궁중에 謝安의『近問帖』,『善護帖』,『中郞帖』이 있었다고 전하며 현재까지 전하는 작품으로는『淳化閣帖』에 行草작품 두 점이 실려 있다.

(4) 庾씨 가문의 서예가

庾씨 가문은 東晋의 明帝 시대에 정치적 기반을 튼튼하게 하였다. 明帝의 皇后가 庾씨인 까닭으로 그 世族의 정치적 세력은 더욱 강대하였다. 庾씨 書藝 世家 중에서 명성이 높은 인물은 明穆 皇后와 남매 지간인 庾亮, 庾懌, 庾冰, 庾翼의형제가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 庾翼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다.

庾亮(289-340)의 字는 元規로 東晋의 초기에 中書郞에 올랐으며 明帝시대에 中書監과 永昌縣開國公에 벼슬에 올라 中書令과 江, 荊, 豫의 三州刺史 등 수많은 관직을 거쳤다.『晉書』의 기록에 의하면 談論에 능하고 老莊을 좋아하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行書와 草書에 매우 뛰어났으며 南梁의 庾肩吾는『書品』에서 ‘中之下品’, 唐나라 시대의 韋續은『墨藪‧九品書人論』에서 ‘上之下品’의 수준으로 평가하였다. 唐나라 시대의 竇臮는『述書賦‧上』에서 庾亮의 書勢는 강한 骨氣가 특징이라 평가하였으며 張懷瓘은『書估』에서 제 4등의 수준으로 평가하며 羊欣, 孔琳之 등과 같은 수준이라 하였다.『淳化閣帖』에 行草작품인『書箱帖』이 전하고 있다.

庾翼(305-345)의 字는 稚恭이며 庾亮의 동생으로 荊州刺史와 征西將軍 등의 벼슬을 하였다. 당시에는 王羲之와 동등한 명성을 얻었으나 후대에는 알아주는 사람이 점차 줄어들었다. 전하는 說에 의하면 庾亮이 王羲之에게 글씨를 청하자 王羲之가 말하길 “翼在彼, 豈復假此!”(庾翼이 그 곳에 있는데 어찌 나에게 글씨를 청하는가!”)라 하여 庾翼의 서예를 자신과 동등한 수준으로 평가하였다고 한다. 南梁의 庾肩吾는『書品』에서 庾翼의 서예를 ‘中之上品’의 위치에 놓았으며 唐나라의 李嗣眞은『書後品』에서 ‘上之下品’에 놓았다. 張懷瓘은『書斷』에서 庾翼의 章草, 隸書, 草書를 能品의 위치에 놓았으며 竇臮는『述書賦‧上』에서 “稚恭名齊逸少, 墨妙所宗. 善草則鷹搏準擊, 工正則劍鍔刀鋒.”(庾翼의 書名이 王羲之와 같았으며 필묵의 오묘함이 근본이 있었다. 草書에 뛰어남은 송골매가 정확하게 공격하는 것과 같고 楷書에 뛰어남은 칼날의 예리함과 같다.)이라 하여 庾翼의 서예 수준을 王羲之와 동등하게 평가하며 특히 草書와 楷書에 뛰어나다고 하였다.

唐나라 이전의 많은 書學者들은 庾翼의 서예를 王羲之와 같은 수준으로 매우 뛰어나다고 평가하였으나 宋나라 이후에는 소장되어 전해지는 작품이 적었으며 평가도 높지 않았다. 米芾은『書史』에서 “筆勢細弱, 字相連屬.”(筆勢는 가늘고 약하며 글자가 하나의 형태로 이루어 졌다.)이라 하여 庾翼의 서예는 힘이 부족하고 변화가 적다고 하였다.『宣和書譜』에 宋나라 궁중에 庾翼의 草書 작품『步征帖』, 行書작품『盛事帖』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까지 전하는 작품은『淳化閣帖』에 行楷작품 한 점이 실려 있을 뿐이다.

2) 王羲之의 서예

王羲之(303-361 혹은 321-379)는 琅琊의 臨沂(지금의 山東省)사람으로 字는 逸少이며 號는 澹齋이다. 東晋의 가장 뛰어난 문벌 귀족 출신으로 당시의 뛰어난 서예가인 王曠의 아들이며 王導과 王敦의 조카이다. 右軍將軍과 會稽內史의 벼슬에 올라 사람들은 王右軍과 王會稽라 부르기도 하였다.『晋書』의 기록에 의하면 유아기에는 말을 더듬는 까닭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받지 못하다가 10세를 전후로 하여 王敦과 王導의 관심을 받으며 王廙와 衛부인 衛鑠에게 집중적으로 서예를 배웠다고 전한다. 어느 날 아버지 王曠의 방에서 옛날의 유명한 法帖을 보고 연마한 후 큰 발전이 있었다고 한다.

晋나라와 함께 강남으로 내려온 王羲之는 李斯와 曹喜의 서예, 蔡邕의『熹平石經』, 종형인 王洽의 집에서 본 王昶의『華岳碑』 등의 작품을 배우고서 衛夫人의 서예만 배우는 것은 잘못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후 草書는 張芝, 隸書는 蔡邕, 楷書는 鍾繇를 배웠으며 梁鵠과 張敞 등의 서법을 두루 섭렵하였다. 이러한 행적은 지신의 서론인『題衛夫人筆陣圖後』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다. 唐나라 시대 張彦遠의『書法要錄』의 기록에 의하면 王羲之는 자신의 서예를 “我書比鍾繇, 當抗行; 比張芝草, 猶當雁行.”(나의 서예를 鍾繇와 비교하면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고 張芝의 草書와 비교하면 내가 미치지 못한다.)이라 하여 鍾繇와 비슷하고 張芝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王羲之의 서예는 張芝와 鍾繇 등을 계승하고 아들인 王獻之, 南朝시대의 서예, 隋나라의 智永, 虞世南, 歐陽詢 등 初唐의 四大家, 米芾, 黃庭堅 등 北宋 四大家, 元나라의 趙孟頫 등으로 이어지는 중국 書脈의 기틀을 다진 가장 뛰어난 서예가로 평가된다.

王羲之는 생전에 매우 많은 작품을 하였고 그 중에서 비록 眞跡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작품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후세에 서예가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은 자신이 글을 짓고 쓴『蘭亭序』이다. 小楷로 옛 사람의 문장을 쓴『樂毅論』,『黃庭經』,『東方朔畫讚』 등과 草書 작품인『十七帖』과『得示帖』, 行草작품인『喪亂帖』과『快雪時晴帖』 그리고 集字本인『聖敎序』 등이 유명하다. 王羲之의 서예를 연구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이 雙鉤本이거나 臨書本 혹은 摹刻本일뿐 眞跡은 한 점도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王羲之의 서예를 이해하려면 우선 그가 무슨 서체에 뛰어났으며 어떤 철학과 미학으로 서예를 하였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晉書』의 기록에 의하면 王羲之는 隸書에 뛰어 났다고 하였고 劉宋의 羊欣은『采古來能書人名』에서 “博精群法, 特善草隸.”(모든 법칙에 넓게 정통하였으며 草書와 隸書에 특별히 뛰어났다.)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隸書는 현재의 개념으로 楷書를 말한다. 張懷瓘은『書議』에서 역대 서예가를 서체별로 등급을 매길 때 王羲之의 眞書, 行書, 草書, 章草에 모두 뛰어난 수준으로 평가하였으며『書斷』에서는 飛白書와 八分도 각각 ‘神品二十五人’과 ‘妙品九十八人’에 넣었다. 그러나 王羲之의『飛白書』나『八分』은 전하지 않아 우리는 그 면모를 살펴볼 수 없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王羲之는 楷書, 行書, 草書의 세 가지 서체에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楷書, 行書, 草書는 漢나라 후기와 三國시대에 이미 비교적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서체이며 曹魏시대에 서예가는 대부분 이 세 가지 서체를 잘 쓰고 있었다. 王羲之가 이 세 가지 서체에 특별히 뛰어난 까닭은 東晋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東晋은 서체의 변천이 완성되어 隸書, 草書, 楷書 등 뛰어난 수준의 작품이 아직 소실되지 않고 많이 남아 있어서 직접 보고 배울 수 있었다. 또한 儒學을 기초로 한 漢나라 시대와 달리 東晋은 귀족들은 玄學의 淸談 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사상적으로 매우 자유로운 생활을 하였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은 심미적 영역을 광범위하게 하였으며 천부적 자질과 더불어 각고의 노력으로 뛰어난 서예가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楷書는 魏晋南北朝시대에 공식적으로 사용되던 서체의 하나로서 古體에서 今體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서체이다. 그것이 누구에 의하여 언제 만들어진 서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隸書가 완성되어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東漢시대에 민간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三國시대 이후부터 楷書는 민간은 물론 문인 사대부들도 서사 활동의 근본 서체로 인정하였으며 曹魏시대 이후부터 명실공히 공식 서체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楷書가 완성하는데 가장 많은 업적이 있으며 또 매우 잘 쓴 사람은 曹魏시대의 鍾繇이다. 王羲之의 楷書는 鍾繇를 계승하여 대부분 小楷를 남기고 있으며 대표작은『樂毅論』,『東方朔畫讚』,『黃庭經』 등이다. 이 세 작품의 眞跡은 모두 소실되어 전하지 않으며 현재는 唐나라 시대의 臨摹本이나 宋나라 시대의 摹刻本 뿐이다. 南梁시대 陶弘景의 書論인『與梁武帝論書啓』에 梁나라 궁중에『樂毅論』의 臨摹本이 있었으며 梁武帝와 이 작품에 대하여 토론하는 가운데『東方朔畫讚』과『黃庭經』이 거론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隋나라 시대의 智永이 쓴『題右軍樂毅論後』에는 이 세 가지 작품의 이동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南朝시대에 이미 진본은 사라지고 臨摹本만이 돌아다닐 뿐이었다고 한다.

王羲之의 楷書는 衛부인과 王廙를 직접 전수 받고 鍾繇의 書法를 익혀 옛 서체와 당시의 서체를 모두 섭렵하였다고 할 수 있다. 鍾繇의 楷書 작품인『宣示表』,『賀捷表』,『薦季直表』 등은 국가의 중요한 사업과 관련이 있는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에 官方에서 사용되던 서체로서 楷書의 기본 결구에 隸書의 筆劃과 미감이 농후한 것이 특색이다. 그러나 王羲之의 楷書에서는 三國시대까지 나타나는 隸書의 筆劃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성숙된 모양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특징이 王羲之의 眞跡에서 볼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현재 전하는 작품이 楷書가 완성되고 난 후의 서가들에 의하여 臨摹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지 정화하게 파악 할 수 없는 것이 매우 아쉽다. 현재 전하는 王羲之의 楷書 작품을 근거로 하면 그는 진실로 서체로서의 楷書를 완성한 인물일 뿐 아니라 매우 뛰어난 예술성을 표현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 학설에서 楷書가 완성된 시기는 보편적으로 唐나라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唐나라 시대의 楷書에서 나타나는 서체의 특징이 鍾繇와 王羲之의 楷書에서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楷書의 완성은 魏晋시대 이전이라 고증할 수 있다. 鍾繇와 王羲之의 楷書는 완성된 筆劃이 규칙적으로 사용되었으며 筆劃의 배치 관계가 확립되었고 結體가 가지런하여 楷書 법칙을 모두 갖추고 있다. 따라서 서체로서의 楷書는 魏晋시대의 蔡邕과 王羲之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이해이다.

行書도 楷書와 마찬가지로 정확한 탄생 시기는 알 수 없고 漢나라 시대의 민간에서 비교적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문헌의 기록에는 東漢시대의 劉德昇이 行書를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설득력이 부족하다. 行書가 문인 사대부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鍾繇와 胡昭가 行書로 작품을 창작한 三國시대 이후이다.『晉書』의 기록에 의하면 西晉시대에 書博士 제도를 두어 行書를 배우게 하였으며 이때 鍾繇와 胡昭의 서체를 규범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민간에서도 行書가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저명한 서예가들의 정리와 창작으로 말미암아 篆書, 隸書, 楷書 등의 서체와 동등한 위치에 올랐다. 魏晋시대에는 楷書를 공문서나 출판 등 공식적 서체로 사용하였고 行書는 편지 등 비교적 개인적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王羲之는 王廙를 통해 鍾繇의 行書를 배웠으며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작가 정신으로 자신의 독특한 경지를 만들어 내었다고 평가된다. 가장 대표적 行書 작품으로는『蘭亭序』,『快雪時晴帖』,『孔侍中帖』,『喪亂帖』 등이 있다. 王羲之가 鍾繇의 行書를 배워 새로운 형태로 창작하였다고 하는 평론의 기록은 쉽게 찾아 볼 수 있으나 그 근거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이유는 鍾繇의 行書작품으로 현재까지 전하는 것이 없으며 문헌의 기록으로만 남아 있기며 王羲之의 작품도 眞跡이 아니라 후대의 臨摹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王羲之의 行書를 연구 할 때 문헌의 기록을 참고하고 王羲之의 臨摹本과 남아 있는 당시의 行書 작품을 비교하여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당시의 行書작품으로 王羲之의 行書와 비교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작품은 新疆에서 출토된 前涼시대의 墨跡 眞本인『李柏文書』로서『蘭亭序』보다 7년 빠른 346년의 작품이다.『李柏文書』와『蘭亭序』를 비교하면 筆劃, 結構, 章法 등 서예의 모든 구성 요소에서 서로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蘭亭論辨』중에서 徐森玉, 郭沫若 등 많은 학자들은 蘭亭序를 王羲之의 작품이 아니라 후대의 위작이라 주장하기도 하였다. 진위에 대한 학설이 무성한『蘭亭序』에 관한 설명은 잠시 뒤로 미루어 다시 알아보기로 한다. 그러나『李柏文書』를 王羲之의 다른 行書 작품인『姨母帖』,『二謝帖』 등과 비교하면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형태와 미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어서 같은 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또한『姨母帖』에 나타나는 하는 ‘自’, ‘勝’, ‘不’, ‘之’ 등의 字形은『蘭亭序』의 서체와도 많이 닮아 있음을 알 수 있고 전체적 미감은『喪亂帖』,『二謝帖』,『得示帖』 등 王羲之의 대표적 行草 작품과도 서로 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字形과 미감의 공통점을 종합하면 王羲之의 行書 작품이 비록 하나 하나는 다른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나 筆勢와 字勢 그리고 심미적 특징은 서로 통하고 있으며 시대성도 갖추고 있다.

王羲之는 行書의 품격을 한 차원 올려놓았을 뿐 아니라 草書와 적절하게 조화시켜 새로운 서체를 계발하여 자신의 뛰어난 예술적 경지를 표현하였다고 평가된다.『蘭亭序』를 제외한 王羲之의 行書 작품의 대부분은 行書와 草書사이의 형태로 글자와 글자의 筆劃과 筆意가 상호 연결되는 것은 물론이고 한 글자 내부에서도 연결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서체는 형태를 간단하게 할 뿐 아니라 변화의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다. 王羲之는 새로운 것을 창작하려는 심미적 요구로 草書의 筆法을 사용하여 行書를 썼기 때문에 ‘新體行書’라 불리는 독특한 형태와 심미적 특징이 있는 行草를 창작 할 수 있었다. 行書와 草書의 미감이 혼합된 작품이며 가장 뛰어난 수준으로 평가받는 작품은『喪亂帖』,『孔侍中帖』,『姨母帖』, 등이 있다.

草書는 크게 隸書의 筆劃이 많이 남아 있는 章草와 象形性은 물론 상형을 대신할 수 있는 筆劃 마저도 생략하여 매우 간단한 부호로 쓴 今草로 나누어진다. 漢나라 시대 趙壹의『非草書』에 의하면 草書는 이미 東漢시대에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에 중국의 서북 지역에서 발견된 수많은 草書 墨跡을 근거로 하면 漢나라 시대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던 草書는 章草가 대부분이고 今草는 아직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것 같다. 草書를 가장 잘 쓴 사람은 東漢의 張芝를 들고 있으며 그는 章草와 今草에 모두 뛰어나 ‘草聖’이라 불렸으며 魏晋시대에 草書를 배우는 사람들은 모두 張芝의 草書를 법칙으로 삼았다. 王羲之도 張芝의 草書를 배워 그 수준이 張芝에 버금간다고 평가받고 있다.『晉書』와 역대 書論들의 기록에 의하면 王羲之는 章草와 今草에 모두 뛰어났다고 하였으나 현존하는 章草 작품은『澄淸堂帖』에 실려 있는『豹奴帖』뿐이다. 王羲之의 草書 작품으로 가장 인정받는『十七帖』속에도 章草의 筆劃과 심미적 특징이 함유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今草의 특징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현대에는 王羲之 章草의 진면목을 연구하기에 부족함이 많은 것이 유감이다.

唐나라 시대 이후에 王羲之가 草書에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것은 章草보다는 새로운 서체인 今草를 두고 이야기 것이다. 張懷瓘의『書斷』에 의하면 글자가 하나 하나 독립된 章草를 직접 또는 筆意의 연결을 특징으로 하는 今草로 완성한 서예가는 張芝라 하였다. 王羲之의 草書를 설명 할 때에도 張芝의 영향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항목이다. 그러나 王羲之의 草書를 張芝의 草書와 비교하면 많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王羲之의 草書는 張芝의 草書보다 규칙적이며 기본에 충실 할 뿐 아니라 章草나 行書의 筆劃을 많이 빌려쓰고 있다. 또한 張芝의 草書는 몇 글자의 筆劃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王羲之의 草書는 한 글자 안에서는 筆劃의 연결을 꾀하였지만 글자와 글자는 筆勢와 의미만 연결되게 하였고 직접적 연결은 가능한 피한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고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을 唐 太宗 李世民은『王羲之傳論』에서 “狀若斷而還連”(형상이 마치 떨어져 있는 듯 하나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이라 하여 그 심미적 형태와 미감을 설명하였다. 王羲之의 草書는 글자의 독립 의식이 강하고 유창한 草書 본래의 심미적 범주에 정확한 筆劃을 구사하여 뚜렷하고 강건한 맛을 표현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王羲之의 서예에 대한 평가는 수많은 書學者에 의해 이루어 졌으며 그 가치와 역사적 위치를 인정받았고 있다. 東晋과 南北朝시대에 이미 최고의 서예가로 인정되었고 唐나라 太宗 이후부터는 書聖의 위치를 차지하여 전통 서예의 법칙으로 꼽히고 있다.『淳化閣帖』에 실려 있는『衛夫人帖』에는 “衛有一弟子王逸少, 甚能學衛眞書, 咄咄逼人, 筆勢洞精, 字體遒媚.”(나(衛鑠)에게는 제자 王羲之가 있는데 나의 楷書를 매우 잘 배워 다른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그의 서예는 筆勢가 명확하고 정묘하며 字體는 강건하고 아름답다.)라 하였고 南梁의 陶弘景은『與梁武帝論書啓』에서 “逸少學鍾, 勢巧形密.”(王羲之는 鍾繇를 배웠으며 筆勢가 정교하고 자형이 세밀하다.)이라 하여 王羲之는 衛부인과 鍾繇의 楷書를 배웠으며 정묘하고 강건한 미감이 있다고 하였다. 梁武帝는『古今書人優劣評』에서 “王羲之書, 字勢雄逸, 如龍跳天門, 虎臥鳳闕, 故歷代寶之.”(王羲之의 서예는 筆勢가 웅장하고 빼어나 마치 용이 하늘로 도약하고 봉황이 궁궐에 누워 있는 듯 하기 때문에 역대의 보물이 되었다.) 라 하여 王羲之의 서예를 최고의 수준으로 평가하였다. 南梁의 庾肩吾는『書品』에서 王羲之의 서예를 ‘上之上品’의 위치에 놓으며 “功夫不及張, 天然過之; 天然不及鍾, 功夫過之.”(노력은 張芝에 미치지 않으나 천부적 소질은 張芝를 능가하고; 천부적 소질은 鍾繇에 미치지 않으나 노력은 鍾繇를 능가한다.)라 하여 張芝나 鍾繇와 같은 수준으로 평가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근거로 하면 南北朝시대 이전에 王羲之의 서예는 매우 높은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鍾繇나 張芝와 동등한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唐太宗 李世民은 직접『王羲之傳論』를 지어 王羲之 서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였으며 당시에 전하는 王羲之 작품을 모두 거두어 들여 궁중에서 소장하였다. 唐太宗이 이처럼 王羲之의 서예를 유달리 좋아한 까닭으로 唐나라 시대에는 오직 王羲之 서예만이 書法의 典範이 되었으며 평론하는 사람들도 거의 모두 찬양 일변도의 길을 걸었다. 張懷瓘은『書斷』에서 王羲之의 隸書, 行書, 章草, 飛白, 草書를 모두 神品의 위치에 놓았으며 八分을 妙品으로 보았다. 이것은 王羲之가 晋나라 시대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今字體에 모두 뛰어나다는 설명으로 명실공히 書聖의 위치를 차지하게 하는 기록이다. 그는 또한『六體書論』에서 王羲之의 楷書를 “骨肉相稱, 婉態姸華.”(뼈와 살이 적당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갖추었다.)라 하였고 行書를 “動合規儀, 調諧金石, 天姿神縱, 無以寄辭.”(움직임이 법도에 맞고 金石과 조화를 이루어 자연스런 字勢와 신비로운 결구는 말로서 표현 할 수 없다.)라 하여 王羲之의 서예 중에서도 楷書와 行書가 가장 뛰어나다고 하였다.

王羲之의 眞跡은 한 점도 전하여 지지 않고 있지만 臨摹本이나 여러 閣帖속에 수록되어 있는 摹刻本은 매우 많다. 현재까지 전하는 작품은 行書와 行草작품으로『蘭亭序』,『集字聖敎序』,『興福寺碑』,『姨母帖』,『快雪時晴帖』,『平安帖』,『何如帖』,『奉橘帖』,『喪亂帖』,『二謝帖』,『得示帖』,『孔侍中帖』,등이 있으며 楷書는『樂毅論』,『黃庭經』,『東方朔畫讚』,『曹娥碑』 등이 있고 草書는『初月帖』,『寒切帖』,『行穰帖』,『頻有哀禍帖』,『遠宦帖』,『上虞帖』,『大道帖』,『十七帖』,『王略帖』,『豹奴帖』등이 있다. 이 가운데에서 예술성과 서예사적 가치를 가장 높이 평가받는 작품은『蘭亭序』,『喪亂帖』,『十七帖』과 集字本으로『集字聖敎序』 등이 있다.

『蘭亭序』는 東晋시대 穆帝 永和 9년(353)에 王羲之가 쓴 行書작품이다. 謝安, 孫綽, 謝萬 등 41명의 벗들이 會稽의 蘭亭에서 ‘修禊’(3월에 물가에서 행하는 제사)의 예를 마치고 흥겹게 술을 마시며 시를 지을 때의 序文으로 鼠鬚筆로서 蠶繭紙에 썼다고 전해진다.『蘭亭序』가唐나라 이전에는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다가 唐太宗 시대에 王羲之의 7세손인 智永의 제자 辯才가 소장하고 있는 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에 唐太宗은 王羲之의 서예 작품을 유달리 좋아하여 가격의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수집하여 삼천 점을 넘게 모았으며『蘭亭序』도 수중에 넣으려 하였다. 그러나『蘭亭序』를 소장한 辯才는 쉽게 내 놓으려 하지 않아 결국 監察御使 蕭翼을 파견해 속여 뺏고 지극히 애호하였다고 전한다. 唐太宗은『蘭亭序』의 眞跡은 자신이 감상하고 馮承素 등 搨書人으로 하여금 臨摹하게 하여 황태자와 여러 왕자, 그리고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후『蘭亭序』는 唐太宗과 여러 書學者들의 높은 평가로 가장 훌륭한 서예 작품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또한 唐太宗은 임종 할 때에 고종에게 명령하여『蘭亭序』의 眞跡을 昭陵에 殉葬하게 하여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이 때부터 蘭亭序는 더욱 유명해 지고 ‘天下第一行書’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蘭亭序』의 臨摹本은 매우 많이 있으나 唐나라 시대 虞世南의 臨摹本, 褚遂良의 臨摹本, 馮承素의 摹搨本 이외의 것은 원본의 臨摹本이 아니라 이 세 가지를 母本으로 하여 다시 臨摹한 것들이다. 虞世南의 臨摹本은 작품의 끝에 “臣張金界奴上進”이라 쓰여져 있기 때문에『張金界奴本』이라 불리기도 한다. 明나라 시대의 董其昌이『張金界奴本』을 虞世南의 臨摹本이라 고증하였고 淸나라 乾隆帝 시대의『蘭亭八柱帖』에 이 臨摹本을 새겨 넣었으며 이 刻本을『八柱第一本』이라 부른다. 褚遂良의 臨摹本은 작품의 앞부분에 ‘褚摸王羲之蘭亭帖’이라 쓰여 있으며 뒷부분에 宋나라 시대 米芾의 발문이 기록되어 있다.『蘭亭八柱帖』의 두 번째에 새겨져『八柱第二本』이라 불린다. 馮承素의 摹搨本은 唐나라 中宗의 연호인 ‘神龍’이 찍혀 있어서『神龍本』이라 불리기도 한다. 元나라 시대의 郭天錫이 발문에서 唐太宗시대의 搨書人 馮承素의 摹搨本이라 고증한 다음부터『馮承素本』 이라 불리고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알 수 없다. 현재 전하고 있는『蘭亭序』의 臨摹本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이『馮承素本』으로 用筆의 轉折과 먹색의 농담뿐만 아니라 筆劃 가운데의 ‘破鋒’이나 ‘斷鋒’까지도 잘 표현하여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馮承素本』은『蘭亭八柱帖』의 세 번째에 새겨져『八柱第三本』이라 불리며 현재 北京의 故宮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蘭亭序』는 臨摹本 이외에 摹刻本으로도 많이 전하여 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은『定武本』이다. 唐太宗시대에 臨摹가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던 歐陽詢의 臨摹本을 돌에 새겨서 궁중에 보관하며 拓本하여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唐나라가 멸망하고 난 후 五代시대에는 이 刻石을 汴都로 옮겨 보관하였으며 遼나라 太宗 耶律德光이 북방으로 옮기다가 도중에 병사하자 殺虎林(眞定 中山)에 버린 것을 宋나라 仁宗의 慶歷년간(1041-1048)에 발견하여 定州에 보관하였다. 定州는 唐나라 시대까지 ‘義武軍’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宋나라 이후에는 太祖 趙光義의 이름자를 피하기 위하여 ‘定武軍’으로 바꾸어 불렀다. ‘定武本’이라는 이름은 宋나라 시대에 발견된 이 지명을 본 떠 붙여졌으며『定武蘭亭』이라 불리기도 한다. 宋나라 英宗의 熙寧연간에 薛珦이 定武太守로 있을 때『定武蘭亭』의 拓本을 요구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原刻을 보호하기 위하여 새로운 刻石을 만들었으며 그의 아들도 摹刻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많은 사람들이『定武蘭亭』을 근거로 하여 摹刻을 하게 되었고『定武蘭亭』은 더욱 귀중하게 여겨져 哲宗때에는 궁중의 宣和殿으로 옮겨 보관되어 졌으나 宋나라가 南渡한 이후에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현재까지 전하여 지는『定武蘭亭』의 원작 拓本은 元나라 柯九思가 소장한 작품과 趙孟頫가 소장했던 ‘獨孤本’의 몇 행만이 전할뿐이다.

歐陽詢이 臨摹한『定武蘭亭』은 摹刻本 가운데에서 王羲之의 서풍을 가장 잘 표현하였다고 평가받는다. 元나라 시대의 趙孟頫는『蘭亭十三跋』에서 “古今言書以右軍爲最善, 評右軍之書者以禊帖爲最善, 眞跡旣亡, 其刻石者以定武爲最善.”(예로부터 서예는 王羲之가 가장 뛰어나다고 하였으며 王右軍의 서예를 평하는 사람은 그의 蘭亭序가 가장 뛰어나다고 하였으나 眞跡은 이미 사라졌고 그 刻石으로는 定武本이 가장 뛰어나다.)이라 하여 定武本『蘭亭序』가 刻石本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하였다.『蘭亭序』의 摹刻本은 定武本이외에도『玉泉本』,『宣城本』 등 수백 종이 넘고 있다.

예술의 창조는 작가의 性情이 얼마나 잘 표현되었으며 또 뚜렷한 개성과 시대성 등으로 그 수준을 가름 할 수 있다.『蘭亭序』의 예술적 가치는 바로 이 작품에 당시의 심미적 범주와 작가의 미적 요구가 잘 융화되어 표현되었으며 筆勢와 자형, 그리고 章法이『蘭亭序』만의 독특한 형태로 같은 시대의 다른 작품과 구별되는 개성이 매우 뚜렷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唐나라 시대의 虞世南, 褚遂良, 歐陽詢 등 당대 최고의 명필들이『蘭亭序』를 臨摹 하였으나 28행, 324자로 이루어진『蘭亭序』의 章法과 結構는 조금도 바꾸지 아니 하였다.『蘭亭序』를 수십 장씩 臨摹하게 하고 또 그것을 臨摹 할 때 조금의 변화도 추구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한 작품을 臨摹하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최고로 인정하는 의미가 더 큰 것이다. 明나라 시대의 董其昌은『畵禪堂隨筆』에서 “古今論書, 以章法爲一大事. 右軍[蘭亭序』章法爲古今第一, 其字皆暎帶而生, 或大或小, 隨手所如, 皆入法則, 所以爲新品也.”(옛 사람이 서예를 평론 할 때 章法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王羲之『蘭亭序』의 章法은 세상에서 제일로 그 글자가 모두 서로 어울려 생동감이 있으며 크고 작은 글자가 뜻대로 이루어져 모두 법칙에 맞는 까닭으로 神品이 되었다.)라 하여『蘭亭序』는 章法과 結體가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 평가하였다. 行書 작품으로서 구속되지 아니하며 산만하지도 않고 온유하면서도 약하지 아니하고 가볍거나 무겁지 않으며 자연스러운『蘭亭序』는 中庸의 심미적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꼽힌다.

『喪亂帖』은 王羲之의 行草작품인『姨母帖』,『得示帖』과 함께 한 장의 麻紙에 摹寫 되어 있으며 唐나라 시대에 일본으로 옮겨져 현재까지 보관되어 오고 있다. 이 帖의 머리 부분에 있는 ‘延歷敕定’이라는 圖書로 唐나라 후기 이전에 臨摹 된 것으로 고증된다. ‘延歷’은 日本의 年號로 唐나라 德宗시대에 해당한다. 張彦遠이 쓴『法書要錄‧右軍書記』 등 唐나라 시대의 書論에는『喪亂帖』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는 않으나 많은 학자들은 永和 12년(356)에 쓴 王羲之의 작품으로 고증한다.『喪亂帖』은 한편의 완전한 형식의 문장으로 조상의 묘소가 장마에 유실된 소식을 듣고서도 곧장 달려가 보수하지 못함을 심정을 안타까워하며 기록한 내용이다.

『喪亂帖』은 字勢가 웅장하고 강건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작품으로 王羲之 行草의 진가가 충분히 발휘된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다. 웅장하고 강건한 이미지는 神龍本의『蘭亭序』를 훨씬 능가한다. 梁武帝가『古今書人優劣評』에서 “王羲之書, 字勢雄逸, 如龍跳天門, 虎臥鳳闕”(王羲之의 서예는 筆勢가 웅장하고 빼어나 마치 용이 하늘로 도약하고 봉황이 궁궐에 누워 있는 듯 하다.)이라 평가한 것은 바로『喪亂帖』과 같은 작품을 진정 수준 높은 王羲之의 작품으로 보고 평가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喪亂帖』은 雄强한 미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작 할 당시의 성정을 잘 표현 한 작품으로도 크게 인정받고 있다. 모두 여덟 행으로 이루어진 작품 중에서 앞의 두 행이 雄强한 미감을 대표하며 둘째 행의 마지막 글자인 ‘追’자부터 조금씩 강건한 맛을 잃어 가기 시작하여 마지막 부분인 여섯째 행의 마지막 ‘奈何奈何’부터는 서체도 완전한 草書로 바뀔 뿐 아니라 강건한 느낌은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까닭은 글씨를 쓰는 도중에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 생각이 더 이상 자형이나 筆法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다만 애통한 심경을 기록하는 書寫 행위에 그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지는 생각이 글자의 필획이나 자형에 있지 않고 오직 性情의 오묘한 변화를 축적된 예술적 감각과 천부적 소질을 바탕으로 표현한 뛰어난 수준이라 평가할 수 있다.

『十七帖』은 王羲之 草書의 대표작으로 문장이 ‘十七日....’로 시작되므로『十七帖』으로 이름 붙여졌다. 唐나라 시대의 張彦遠은『法書要錄‧右軍書記』에서『十七帖』은 길이가 1丈 2尺이며 107행으로 모두 943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貞觀 연간에 궁중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唐太宗은 王羲之의 草書를 삼천 장이나 수집하여 1丈 2尺을 한 권으로 묶었다고 하였는데『十七帖』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墨跡진본은 전하지 않고 있으며 전하는 摹刻本도 134행 1160자이고 문장 중에 4행 20자의 楷書가 새겨져 있는 등『法書要錄』의 기록과 많이 다르다. 墨跡 진본이 소실되어 그 까닭을 알 수 없고 다만 새기는 과정에서 증감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만 할뿐이다. 현재까지 전하는 摹刻本은 수십 종에 이르나 첩의 끝에 ‘勅’字와 ‘僧權’이라는 款識가 있는 것이 최고의 수준이다. 이 것은 唐나라 시대의 摹刻本이라 고증하며『勅字本』 혹은『館本』이라 부른다.

『十七帖』은 법도가 매우 준엄하고 筆劃이 뚜렷하며 건실하여 예로부터 草書를 배우는 가장 모범적인 法帖으로 여겨져 왔다.『館本』의『十七帖』을 살펴보면 摹刻이 매우 정교하여 收筆과 起筆 그리고 轉折이 아주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으며 筆劃이 단아하면서도 소박하다. 宋나라 시대의 黃伯思는『東觀餘論』에서 “此帖逸少書中龍也.”(『十七帖』은 王羲之 서예 가운데에서 매우 훌륭한 작품이다.)라 하였고 明나라 시대의 方孝孺는『十七帖跋』에서 “此帖寓森嚴於縱逸, 蓄圓勁於浮動, 其起止屈折, 如天造神運, 變化倏忽, 莫可端倪, 令人驚歎自失.”([十七帖』은 자유로움 속에서 법칙이 엄격하고 움직임 속에서 원만하며 기운이 넘친다. 그 起筆과 收筆, 그리고 굴리고 꺾는 筆法이 마치 귀신이 조화를 부린 것 같이 변화가 매우 빨라 추측하기가 어렵고 그저 보는 이로 하여금 탄복하고 실의에 빠지게 할뿐이다.)이라 하여『十七帖』이 王羲之의 작품 중에서 매우 뛰어난 작품이며 筆法이 엄격한 작품이라 설명하였다.

3) 王獻之의 서예

王獻之(344-386)는 王羲之의 일곱 번째 아들로 字는 子敬이며 建武將軍과 吳興太守를 거쳐 中書令의 벼슬에 올라 王大令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서예를 배웠으며 형제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소질을 보여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으며 성장하였다. 전하는 설에 의하면 어린 시절 王獻之가 글씨를 쓸 때 王羲之가 등뒤에서 갑자기 붓을 잡아 당겼으나 뽑히지 않자 자라서 큰 필명을 얻으며 훌륭한 서예가가 될 것을 예견하였다고 한다. 王羲之의 서예를 배우면서 한편으로는 張芝의 草書를 배운 王獻之는 行書와 草書를 잘 썼으며 다시 자신만의 새로운 書法으로 특히 行草에 뛰어 났다고 전한다. 唐나라 시대의 張懷瓘은『書斷』에서 “幼學於父, 次習於張, 後改變制度, 別創其法.”(어릴 때에는 아버지의 書法을 배우고 다음으로 張芝를 배웠으며 후에 筆法을 바꾸어 새로운 書法을 창조하였다.)이라 하였고 또『書議』에서 “子敬才高識遠, 行草之外, 更開一門...... . 子敬之法, 非草非行, 流便於草, 開張於行, ...... .”(王獻之는 재주와 식견이 넓어 行書와 草書이외에 또 하나의 서체를 만들었다. 그의 書法은 行書도 아니고 草書도 아니며 草書보다 유동적이고 行書보다 넓게 펼쳐진다.)이라 하여 王獻之가 行書와 草書사이의 새로운 서체를 개발하였다고 하였다.

王獻之가 뛰어난 서예가라 하는 것은 글씨를 잘 쓴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破體’라 불리는 새로운 서체를 창조한 작가 정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張懷瓘의『書斷』에 의하면 그의 창조 정신은 어려서부터 돋보이기 시작하였으며 “古之章草未能宏逸, 今窮僞略之理, 極草縱之致, 不若藁行之間, 於往法固殊, 大人宜改體.”(옛날의 章草로는 뛰어날 수 없으며 지금 간략하게 하고 빠르게 쓰는 이치는 궁극에 달하여 草書와 行書사이의 서체보다 못 할 뿐만 아니라 옛날의 법칙과도 다르므로 아버지께서는 마땅히 서체를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라 하여 15, 6세에 王羲之에게 서체를 바꿀 것을 권유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은 王獻之의 창조 정신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의 용기와 지혜가 얼마나 뛰어난지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破體’는 ‘大令體’라 불리기도 하는 서체로 楷書와 行書, 行書와 草書사이의 구분을 깨트려 행서에 가까운 楷書를 ‘行楷’라 부르고 草書에 가까운 行書를 ‘行草’라 부른다. 楷行과 行草의 破體는 楷書의 안정되고 정교함과 行書나 초서의 유창함이 동시에 표현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王獻之의 서예는 王獻之와 버금간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父子를 함께 이름하여 ‘二王’이라 부른다. 劉宋의 羊欣은『采古來能書人名』에서 “骨勢不及父, 而媚趣過之.”(골기와 筆勢는 아버지의 서예에 미치지 못하나 아름다움과 풍취는 아버지보다 뛰어나다.)라 하였으며 虞龢는『論書表』에서 “優劣旣微, 而會美俱深, 故同爲終古之獨絶, 百代之楷式.”(우열이 거의 차이가 나지 않고 모두 아름다움의 극치로 함께 최고의 수준을 뽐내며 세상의 법칙이 되었다.)이라 하여 王獻之의 서예가 王羲之와 같은 수준으로 평가하였다. 南梁의 庾肩吾는『書品』에서 王獻之의 서예를 ‘上之中品’의 위치에 놓았고 唐나라의 李嗣眞은『書後品』에서 ‘逸品’의 위치에 놓아 거의 최고의 수준으로 평가하였다. 唐나라 시대의 張懷瓘은『書斷』에서 王獻之의 隸書, 行書, 章草, 飛白, 草書를 神品으로 평가하였고 八分을 能品으로 평가하며 “至於行草, 興合如孤峰四絶, 逈出天外, 其峻峭不可量也.”(行草는 높이 솟은 산과 깎아지른 낭떠러지처럼 매우 뛰어나 그 높이를 측량 할 수 없다.)라 하여 行草가 가장 뛰어나다고 하였고 또 “能極小眞書, 可謂窮微入聖, 筋骨緊密, 不減於父.”(작은 글씨의 楷書에 매우 뛰어나 성인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으며 근육과 골기의 조화가 결코 아버지에게 뒤지지 않는다.)라 하여 小楷는 王羲之와 버금간다고 하였다.

宋나라 시대 이후에는 서예의 법칙보다 맛과 느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심미적 요구로 인하여 王獻之의 서예를 王羲之 보다 수준 높게 평가하는 학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米芾은『書史』에서 “子敬天眞逸, 豈父可比.”(王獻之 서예의 천진하고 脫俗적인 미감은 어찌 아버지에 비하겠는가!)라 하여 천진하고 초탈한 맛은 王羲之도 王獻之에 비교 될 수 없다고 하였다. 黃庭堅은『山谷題跋』에서 “余嘗以右軍父子草書比之文章, 右軍似左氏, 大令似莊周.”(내가 일찍이 王羲之 부자의 草書를 문장과 비교해 보았는데 王羲之의 草書는『春秋左氏傳』 같고 王獻之의 草書는『莊子』 같았다.)라 하여 王羲之의 草書는 법칙이 엄숙하고 王獻之의 草書는 예술적 풍취와 자연스러운 맛이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

王羲之의 서예는 東晋시대부터 현재까지 항상 최고의 자리를 지키며 호평을 받은 반면 王獻之는 南朝와 唐나라 초기에 일부 書學者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南梁의 袁昻은『古今書評』에서 “王獻之書如何? 洛間少年, 雖皆充悅, 而擧體沓拖, 殊不可耐.”(王獻之의 서예가 어떠한가? 소년 시절에는 비록 모두 만족하여 기뻐하였지만 體勢를 유창하게 풀어놓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였다.)라 하여 王獻之의 서예가 세월이 갈수록 자신의 한계에 구속되어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하였다. 唐太宗은『王羲之傳論』에서 王獻之의 서예를 “獻之雖有父風, 殊非新巧. 觀其字勢, 疏瘦如隆冬之枯樹; 覽其筆縱, 拘束如嚴家之. 餓隸. ...... 兼斯二者, 固翰墨之病歟!”(王獻之가 비록 아버지의 서풍은 이어 받았지만 새로운 기교는 없다. 글자의 體勢는 성글고 메마르기가 마치 한겨울의 마른나무와 같고 筆勢는 구속되어 있는 것이 마치 엄격한 집안의 노예와 같다. ...... 성글고 메마른 體勢와 구속된 筆勢는 서예의 병이 아니겠는가!)라 하여 가풍을 이었으나 부족함이 많다고 지적하였다. 唐太宗의 이러한 평가는 사실에 근거한 공정하고 객관적 평가라기보다는 王羲之의 서예만을 편파적으로 좋아하는 그의 편협 되고 왜곡된 서예관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唐太宗이 王羲之의 서예를 특별히 좋아하여 수집하고 臨摹하여 널리 퍼트린 까닭으로 唐나라 시대에는 王羲之의 서예가 매우 높이 평가되었다. 王獻之의 서예는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되어 수집하거나 臨摹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배우는 사람도 적을 수밖에 없었으며 王羲之에 비하면 남아 있는 작품도 적다. 현재까지 전하는 작품으로는 行草墨跡인『鴨頭丸帖』을 비롯하여 摹搨本인『卄九日帖』,『送梨帖』,『地黃湯帖』 등이 있으며 宋나라 시대의 米芾이 臨書한 것이라 전하는『中秋帖』이 있다.『淳化閣帖』의 제9권과 10권이 모두 王獻之의 작품을 摹刻한 것으로 그 가운데『洛神賦』,『十二月帖』,『辭中令帖』,『鵝群帖』,『蘭草帖』,『授衣帖』,『舍丙帖』,『東山帖』,『保母磚帖』 등이 유명한 작품으로 꼽힌다.

『鴨頭丸帖』는 가로27㎝, 세로26㎝의 명주 바탕에 쓴 2행, 15자의 行草 작품이다. 王獻之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전하는 墨跡 眞本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上海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본문 앞에는 明나라 시대의 王肯堂이 쓴 “晋尙書令王獻之鴨頭丸帖”이라는 제목이 있으며 뒤에는 元나라 天歷 3년(1330)에 이 帖을 柯九思에게 下賜 한다는 내용의 虞集이 쓴 勅書記가 적혀 있다. 또한 ‘宣和’, ‘政和’, ‘御書’, ‘紹興’, ‘奉華堂印’, ‘第一希有’, ‘天歷之寶’, ‘臣九思’ 등의 수많은 鑑賞印이 찍혀 있으며 宋高宗, 王肯堂, 董其昌, 周壽昌, 江標, 柳元 등의 발문과 감상문이 있다. 작품에 있는 도서와 題跋 등으로 미루어『鴨頭丸帖』은 宋나라 시대부터 궁중에 소장되어 있었으며 元나라 때에는 柯九思에게 下賜되었다가 明나라 시대에 다시 궁중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體勢와 結字가 王羲之의 작품보다 유동적으로 위 글자와 아래 글자의 연결이 매우 돋보인다. 윤택하고 메마름이 조화를 이룬 用墨法과 달리고 서거나 누르고 드는 用筆法은 구속됨이 없이 매우 자연스러운 탈속의 경지를 표현하였다고 평가된다.

『地黃湯帖』은 종이에 쓰여진 6행 44자의 行草작품이다. 진본은 소실되어 전하지 아니하고 현재 전하고 있는 것은 후대의 臨摹本이다. 淸나라 시대의 孫承澤은 米芾의 臨書本이라 하였고 근대의 沈尹黙은 唐나라 시대의 摹本을 후대 사람이 臨書한 작품이라 하는 등 여러 학설이 전하고 있다.『地黃湯帖』에 찍혀 있는 圖書를 근거로 이 작품이 宋나라 시대에는 궁중 내부에 소장되어 있었으며 明나라 때에는 文徵明, 그리고 淸나라 시대에는 吳榮光이 소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일본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있다. 淸나라 시대 楊守敬의『平帖記』와 孫承澤의『庚子消夏記』 등에『地黃湯帖』의 심미적 특징과 예술적 수준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다. 현재 전하는 臨摹本을 근거로 미루어 볼 때 用筆이 매우 유창하고 골격의 힘이 강건한 맛이 특징이다. 臨摹本 이외에『淳化閣帖』,『筠淸館法帖』 등에 摹刻本이 수록되어 있다.

『中秋帖』은 3행, 22자의 款識가 없는 王獻之의 行草작품으로 眞跡은 소실되었고 현재 전하는 것은 宋나라 시대 米芾의 臨書本이다. 많은 학자들은 米芾이 王獻之의『十二月帖』중에서 일부분을 臨書한 작품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이 첩의 앞머리에는 淸나라 孤宗이 쓴 “晋王獻之中秋帖”이라는 題首가 있으며 董其昌, 項元汴 등의 발문이 있다. 董其昌은 발문에서 “大令此帖, 米老以爲天下第一”(米芾은 王獻之의 이 첩을 천하제일이라 여겼다.)이라 하였으며 淸나라 시대 吳升의『大觀錄』에서는 “書法古厚, 墨彩氣韻鮮潤. 但大似肥婢, 雖非鉤塡, 恐是宋人臨仿. 此帖曾見於米氏[書史』, 自爲元章所臨無疑.”(書法이 예스럽고 중후하며 먹색이 생기와 운치가 있어 맑고 윤택하다. 다만 많이 살쪄 있고 진중 하지는 않는 것이 아마도 宋나라 사람의 臨書본일 것이다. 이 첩이 米芾의『書史』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米芾이 臨書한 것으로 여겨진다.)라 하여『中秋帖』의 예술적 수준과 역사에 관하여 기록하였다.

『中秋帖』의 특징은 筆毫에 많은 먹을 찍어 쓴 까닭으로 起筆에 먹색이 진할 뿐 아니라 한 번 먹을 찍어서 여러 글자를 써 筆劃이 끊이지 아니하고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글씨를 ‘一筆書’라 부른다. 전체적 미감이 秦나라 시대의 다른 작품들 보다 조금 무겁고 운치가 적은 것이 단점이나 이러한 것은 아마도 臨書한 사람이 원래의 맛을 살리는 것보다는 자신의 筆意를 많이 삽입한 까닭으로 보인다. 이 첩이 宋나라 시대부터 궁중에 보관되어 ‘宣和’, ‘紹興’, ‘御書’, ‘廣仁殿’, ‘弘文之印’, ‘乾隆’, ‘嘉慶’ 등의 鑑賞印이 찍혀 있다. 淸나라 시대의 乾隆 황제는『中秋帖』을 王羲之의『快雪時晴帖』, 王珣의『伯遠帖』과 더불어 ‘三希堂’에 보관하여 매우 귀하게 여겼으며 현재에는 북경의 故宮博物院에 보관되어 있다.

출처 : 중국과 서예
글쓴이 : 금릉산방인 소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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