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5. 09:13ㆍ서예일반
2. 南朝시대의 刻石 서예
東晋 이후 150여 년 동안의 南北朝시대에서 南朝는 한문화의 고유한 전통을 이어받아 南北朝 문화를 이끌어 나간다. 그러나 魏晋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禁碑令의 영향으로 刻石 서예 부분에서는 北朝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南朝의 서예는 제왕과 귀족들에 의하여 王羲之의 서풍이 계승하여 紙帖과 閣帖으로 남아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刻石 서예는 매우 적다. 현재까지 전하는 南朝의 刻石 작품으로 劉宋 시대의『爨龍顔碑』,『劉懷民墓誌』,『明曇憘墓誌』 등이 있으며 南齊의 것으로『吳郡造維衛尊佛題記』,『劉岱墓誌』,『呂超靜墓誌』 등이 있다. 南朝의 왕조 중에서 梁나라가 가장 많은 刻石을 남기고 있으며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瘞鶴銘』이 있다. 그밖에『蕭憺碑』,『蕭憚碑』,『蕭景墓神道石柱題字』,『蕭敷墓誌』,『蕭正立墓誌』,『蕭融墓誌』,『王慕韶墓誌』,『蕭偉墓誌』 등이 비교적 유명한 작품이다. 淸나라 시대까지만 하여도 陳나라 시대의 刻石 서예는 전하여지지 않다가 民國시대에『衛和墓誌』가 발견되어 겨우 그 면모를 확인 할 수 있게 되었다.
『爨龍顔碑』는 劉宋의 大明 2년(458)에 새겨진 비석으로 雲南省 陸凉州의 爨龍顔 묘소 앞에 세워져 있었다. 현재는 雲南省 陸良縣에 있는 貞元堡 小學校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비석의 위 부분에 “宋故龍驤將軍護鎭蠻校尉寧州刺史邛都縣侯爨使君之碑”라는 碑額이 있고 碑陰에는 문장을 지은 사람이 爨道慶이라 적혀 있으며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어떤 학자들은 글씨를 쓴 사람도 爨道慶일 것이라 추측하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고증되지 않고 있다. 碑陽은 모두 24행이며 매 행마다 45자가 새겨져 있고 碑陰은 3열로 위 열은 15행, 가운데 열은 17행, 그리고 아래 열은 16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淸나라 시대에 阮元이『爨龍顔碑』를 拓本하여 소개하고 난 후부터 이 비석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雲南省의 楊旗田에서 발견된『爨寶子碑』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두 비석을 함께 이름하여 ‘二爨’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北魏시대의『中嶽嵩高靈廟碑』와 새긴 연도가 비슷하고 자형이 많이 닮은 까닭으로 자주 이 두 비석을 비교하여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淸나라 시대의 楊守敬은『中嶽嵩高靈廟碑』가『爨龍顔碑』와 비록 형태는 많이 닮아 있으나 예술적 가치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하였다.
『爨龍顔碑』의 서체는 隸書의 筆劃을 많이 소유한 方筆의 楷書로서 隸書에서 楷書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서체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筆劃과 筆勢는 강건하고 고아하며 질박하면서도 웅장하여 굳센 미감이 있다. 또한 筆法과 결구에서 많은 변화를 채택하여 楷書이지만 변화와 움직임이 매우 풍부하여 생동감이 많은 것이 심미적 특징이다. 淸나라 시대의 桂馥은『跋爨龍顔碑』에서 “正法兼用隸法, 饒有樸拙之趣.”(楷書의 筆法에 隸書의 筆法을 겸하고 있어서 질박한 맛이 넘친다.)라 하였고 阮福도 跋文에서 “字體方正, 在隸楷之間, 畢有北魏各碑北派書法. 碑文體制古茂, 得漢碑遺法, 非唐宋所及. 此乃滇中最古之石, 極可寶貴.”(자체가 방정하며 隸書와 楷書 사이의 글씨로 北魏의 다른 刻碑 서체와 서로 다르다. 碑文의 체제는 漢碑의 법칙을 얻어서 예스럽고 뛰어나 唐宋의 刻碑가 따를 수 없다. 이 碑는 南朝시대 최고의 刻石으로 매우 귀한 보배이다.)라 하여『爨龍顔碑』가 楷書와 隸書의 筆法을 겸비한 질박한 서체이며 北魏의 刻石 서체와 다른 南朝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楊守敬은『平碑記』에서 “絶用隸法, 極其變化, 雖亦兼折刀之筆, 而溫醇爾雅, 絶無寒乞之態”(隸法을 채용하고 있어서 변화가 많다. 비록 칼로 새겨졌으나 차갑거나 구차하지 않고 온화하며 진하고 아름답게 빛난다.)라 하여『爨龍顔碑』가 隸書가 楷書로 변하는 과정의 특징을 많이 나타내고 있으며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 范壽銘은 跋文에서 “此碑與[嵩高靈廟碑』同時所樹, 南北兩碑, 遙遙聳峙, 淳樸之氣則[靈廟』爲勝, 雋逸之姿則[爨碑』爲長.”(이 刻碑는『中嶽嵩高靈廟碑』와 동시에 세워져 南北의 刻碑로 우뚝하다. 순박한 기운은『靈廟』가 뛰어나고 俊逸한 자태는『爨龍顔碑』가 뛰어나다.)이라 하여『爨寶子碑』를『嵩高靈廟碑』와 비교하여 평가하였다. 또한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 “渾厚生動, 兼茂密雄强之勝, 爲正書第一.”(질박하고 온후한 생동감으로 무성하고 웅장하며 강건한 맛을 겸비하여 楷書의 제일이다.)이라 하여 『爨龍顔碑』를 ‘神品第一’의 수준으로 평가하였다.
『瘞鶴銘』은 본래 江蘇省 鎭江市 焦山의 磨崖에 새겨져 있었으나 宋나라 시대에 摩崖가 무너져 淸나라 시대까지 강속에 빠져 있었다. 淸나라 시대의 康熙 52년(1713) 陳鵬年이 사람을 모아 산 위로 올려놓았으며 훗날 남아 있는 다섯 조각의 글씨 90여자를 떼어 定慧寺의 寶墨軒에 옮겨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瘞鶴銘』에는 새긴 연대와 글씨를 쓴 사람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으나 宋나라 시대의 黃長睿는 南梁의 天監 13년(514)에 새겨진 刻石이라 고증하였으며 학계는 이 학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瘞鶴銘』의 글씨를 쓴 사람에 관하여는 수많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宋나라 시대의 蘇舜欽은 王羲之의 글씨라 하였고 歐陽永叔은 唐나라 시대의 顧況의 글씨라 하였으며 혹자는 王瓚의 글씨라 하였다. 宋나라 시대의 黃庭堅은『豫章文集』에서『瘞鶴銘』이 王羲之의 작품은 아니라고 하였으며 黃伯思는 南梁시대 陶弘景의 글씨라 고증하였다. 후대의 많은 학자들이『瘞鶴銘』은 陶弘景의 작품이라는 黃伯思의 학설에 많은 지지를 보내고 있다.
『瘞鶴銘』이 널리 알려진 것은 宋나라 시대 이후이며 수많은 書學者들은 이 작품의 예술성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宋나라 시대의 蘇東坡는『論書』에서 “大字難於結密而無間, 小字難於寬綽而有餘”(큰 글씨는 결구를 疏密하게 하고 사이를 없게 쓰기가 어렵고 작은 글씨는 공간을 넓게 하여 여유가 있게 쓰기가 어렵다.)라 하여 큰 글씨와 작은 글씨를 쓸 때 주의 할 점을 설명하였다. 黃庭堅은『論書』에서 “大字無過瘞鶴銘.”(큰 글씨로『瘞鶴銘』을 능가하는 작품은 없다.)이라 하여 蘇東坡가 書論에서 요구한 큰 글씨의 조건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 작품으로『瘞鶴銘』을 꼽았으며 작은 글씨의 잘 갖추고 있는 작품으로 王羲之의 작품을 꼽았다. 또『跋翟公巽所藏刻石』에서 “大字之祖也.”(큰 글씨의 근본이다.)라 하여『瘞鶴銘』이 큰 글씨의 으뜸임을 강조하였다. 宋나라 시대의 曹士冕은『法帖譜系』에서 “焦山[瘞鶴銘』筆法之妙, 爲書家冠.”(焦山에 있는『瘞鶴銘』의 오묘한 筆法은 서예가의 법칙이 된다.)이라 하였고 明나라 시대의 王世貞은『弇州山人四部稿』에서 “此銘古拙奇峭, 雄偉飛逸, 固書家之雄.”([瘞鶴銘』은 고졸하고 기이하며 웅장한 맛이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서예가의 법칙이 된다.)이라 하여 서예가들이 반드시 배워야 하는 법칙으로 설명하였다. 淸나라 시대의 王澍는『虛舟題跋』에서 “其書法雖已剝蝕, 然蕭疏淡遠, 固是神仙之迹. ...... 大字如小字, 唯[鶴銘』之如意指揮, 斯足當之.”(그 서예 작품은 이미 많이 깨어지고 부서져 있으나 소담스러운 맛이 뛰어나 아마도 신선이 쓴 것으로 추측된다. 큰 글자는 작은 글자처럼 써야 하는데 오직『瘞鶴銘』이 뜻하는 데로 움직여 큰 글자로서 작은 글자처럼 쓰는 법을 잘 표현하였다.)라 하여『瘞鶴銘』이 큰 글자로 이루어진 작품이지만 결구가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 이밖에도 翁方綱, 楊守敬 등 많은 書學者들이『瘞鶴銘』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였다.
『瘞鶴銘』이 새겨지고 난 후 천여 년에 걸쳐 수많은 서예가들이 배우고 臨書하여 그 속에서 서예의 법칙을 터득하려고 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 서예가는 黃庭堅으로 草書와 行書, 楷書 등 모든 작품에서『瘞鶴銘』의 筆意를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楷書작품인『松風閣』은『瘞鶴銘』의 筆法과 體勢, 그리고 筆意를 매우 잘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楊守敬과 같은 학자는『平碑記』에서 黃庭堅이 비록 평생 동안『瘞鶴銘』의 筆法을 배웠으나 운치가 부족하고 힘이 약하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宋拓本의『瘞鶴銘』은 커다란 글씨로 산 위의 摩崖에 새겨진 작품의 특징인 장엄하고 강건한 미감을 잘 간직하고 있다. 藏鋒과 圓筆의 筆勢는 자연스러우면서도 대범하고 생동감이 있으며 매우 통쾌한 맛이 특징이다. 楷書의 기본 결구에 篆書와 隸書, 行書의 필치와 맛을 첨가하여 서풍이 예스럽고 질박하다.『瘞鶴銘』의 拓本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宋拓本이고 그 다음은 水拓本이다.『瘞鶴銘』이 물 속에 빠져 있을 때인 淸나라 康熙 52년(1713) 이전의 拓本을 水拓本이라 부른다. 봄과 여름철에는 물이 많아 탁본할 수 없었으며 겨울철에 물이 말라 있을 때 拓本하였다. 몇 백년을 흐르는 물 속에 잠겨서 물결에 깎여진 까닭으로 淸나라 이후의 拓本은 장엄하고 강건한 기백이 많이 소멸되었다. 물 속에서 들어 낸 당시의 拓本은 水拓本과 큰 차이가 없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筆劃이 많이 망가져 그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蕭憺碑』는 南梁의 普通 4년(523) 江蘇省 南京에 세워진 刻碑로 碑額에 楷書로 “梁故侍中司徒驃騎將軍始興忠武王之碑”라 새겨져 있어『始興忠武王碑』라 불리기도 한다. 碑陰에는 글씨가 없고 碑陽은 모두 36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 행 86자의 楷書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刻碑가 많이 마멸되어 2500자 정도만이 판별이 가능하다. 徐勉이 비문을 짓고 貝義淵이 글씨를 썼으며 房賢明이 새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貝義淵의 生平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蕭憺碑』와 비슷한 서풍의 刻碑인『蕭秀碑』에 그의 글씨라는 기록만 남기고 있을 뿐이다.『蕭憺碑』의 서체는 北魏시대의 墓誌銘 서체와 비슷하여 筆勢의 흐름이 부드러우면서도 강건하다.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 “貝義淵書[始興之碑』, ......意象雄强, 其源亦出衛氏, 若結體峻密, 行筆英銳, 直與率更(歐陽詢)[皇甫碑』無二.”(貝義淵의 글씨인『蕭憺碑』는 筆意가 웅장하고 강건하다. 그 원류는 衛覬로 結體가 뛰어나고 行筆이 예리하며 歐陽詢의『皇甫碑』와 비슷하다.)라 하였고 양수경은『平碑記』에서 “書法極有姿致, 無北朝人雜用分體習氣.”(書法이 매우 뛰어나고 개성이 있다. 北朝 사람들의 서체에 나타나는 隸書의 筆勢가 나타나지 않는다.)라 하여『蕭憺碑』의 서체는 같은 시대의 楷書와 달리 隸書의 느낌을 완전히 떨쳐 버리고 독립된 楷書의 筆劃과 자형으로 이루어져 唐楷의 근본이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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