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발문

2023. 11. 5. 11:37나의 이야기

세한도 : 세로 23.7 가로 1388.95cm / 국보 제180호

추사 김정희가 그린 그림으로 국보 18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크기는 23cm*69.2cm.

세한도(歲寒圖) 발문(跋文)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거년이만학대운이서기래)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금년우이우경문편기래)
此皆非世之上有(차개비세지상유) 購之千萬里之遠(구지천만리지원)
積有年而得之(적유년이득지) 非一時之事也(비일시지사야)

그대가 지난해에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 주고, 올해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120권을 보내 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且世之滔滔(차세지도도) 惟權利之是趨爲之(유권리지시추위지)
費心費力如此(비심비력여차)
而不以歸之權利(이불이귀지권리)
乃歸之海外蕉萃枯槁之人(내귀지해외초췌고고지인)
如世之趨權利者(여세지추권리자)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같이 하고서도, 그대의 이끗을 보살펴 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였구나!

太史公云(태사공운) 以權利合者(이권리합자) 權利盡以交疎(권리진이교소)
君亦世之滔滔中一人(군역세지도도중일인)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기유초연자발어도도권리지외)
不以權利視我耶?(불이권리시아야) 太史公之言非耶?(태사공지언비야)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으로 잇속을 좇는 세상 풍조의 바깥으로 초연히 몸을 빼내었구나. 잇속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孔子曰(공자왈) 歲寒然後(세한연후) 知松栢之後凋(지송백지후조)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송백시관사시이부조자)
歲寒以前一松栢也(세한이전일송백야) 歲寒以後一松栢也(세한이후일송백야)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성인특칭지어세한지후) 今君之於我(금군지어아)
由前而無加焉(유전이무가언) 由後而無損焉(유후이무손언)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더디 시들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소나무 잣나무는 본래 사계절 없이 잎이 지지 않는 것이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성인(공자)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然由前之君(연유전지군) 無可稱(무가칭) 由後之君(유후지군)
亦可見稱於聖人也耶?(역가견칭어성인야야) 聖人之特稱(성인지특칭)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비도위후조지정조경절이이)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역유소감발어세한지시자야)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더디 시드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烏乎!(오호) 西京淳厚之世(서경순후지세) 以汲鄭之賢(이급정지현)
賓客與之盛衰(빈객여지성쇠) 如下邳榜門(여하비방문)
迫切之極矣(박절지극의) 悲夫(비부) 阮堂老人書(완당노인서)

아아! 전한(前漢) 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처럼 어질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賓客)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下邽縣)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써 붙였다는 글씨 같은 것은 세상인심의 박절(迫切)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다. 완당 노인이 쓰다.

<발문의 해석>

지난해에는 <만학집>과 <대운산방문고>의 두 책을 부쳐왔고 올해는 우경의 <황청경세문편>을 부쳐왔다. 이는 모두 세간의 흔한 책들이 아니라 천만리 밖에서 구입한 것이며, 여러 해 걸려서 얻은 것이요, 일시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더구나 세상은 물밀듯이 권력만을 따르는데, 이같이 몸과 마음을 쏟아 얻은 것을 권력자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해외의 한 초췌하고 枯槁한 사람에게 주기를 세상의 권력가에 추세하는 것과 같이 하니, 태사공(사마천)이 이르기를 '권력으로 합한 자는 권력이 떨어지면 교분이 성글어진다'고 하였는데, 君도 역시 이 세상 사람으로 초연히 권력에 추세하는 테두리 밖을 떠나서 권력으로 나를 대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태사공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
공자가 말씀하시길 '세한 연후에야 송백의 후조를 알게 된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고 하였으니, 송백은 사철을 통해 시들지 않는 것이라면, 세한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인데, 성인이 특히 세한을 당한 이후를 칭찬하였다. 지금 군이 나에 대해 앞이라고 더한 것도 없고 뒤라고 덜한 바도 없으니, 세한 이전의 군은 칭찬할 것 없거니와, 세한 이후의 군은 또한 성인에게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송백을 말씀하신 것은 다만 시들지 않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전한 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급암(직간으로 이름높은 선비)과 정당시(천하의 명사와 사귀되 귀천을 가리지 않았던 인물)처럼 어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의 翟公이 대문에 써붙였다는 글씨 같은 것은 세상 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다! 완당 노인이 쓰다.

# 적공은 하규지방의 廷尉가 되었을 때 빈객이 줄을 서다가 정위에서 물러나자 대문에 참새가 깃을 칠 정도로 한산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정위가 되어 빈객이 구름같이 모여들자 적공은 대문에다 '참된 사람은 역경에 처했을 때 알 수 있다'는 내용의 방문을 써붙였다. 이 때 생긴 고사성어가 '門前雀羅'이다


이제 <세한도>의 발문에도 적혀있지만 그 주변이야기를 해보도록 합니다.

<세한도>는 헌종 10년 1844년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을 때, 자신의 제자인 역관 이상적(호: 藕船)을 위해 그려준 일품입니다.
이 때 추사의 나이는 59세 였는데, 그의 제자 이상적은 두 번이나 제주도로 건너가 문안을 하였고 역관의 직함으로 수시로 연경을 드나들 때마다 구했던 귀한 자료를 추사에게 전해 줄 수 있었습니다.
특히 字學에 밝은 계복의 <만학집> 8권과 <대운산방문고>와 구경이 편찬한 <황청경세문편> 120권의 자료들은 절해고도에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추사에게는 지극히 고마운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추사는 제자를 위해 푸른 청송 네그루가 서있는 외딴집의 겨울풍경을 그렸는데 이를 제하여 '세한도'라 하였으니 이리하여 추사의 최고의 걸작 <세한도>가 탄생된 것입니다.
추사로 부터 세한도를 건내 받은 이상적은 이듬해 다시 李晸應을 동지사로 하는 연행을 따라 연경에 갈 때 <세한도>를 가지고 갑니다.
그해 정월, 추사의 詩友였던 吳贊의 연회에 초대받은 이상적은 연회에 참가한 16명의 문신들에게 추사의 근황을 설명하는 한편 <세한도>를 꺼내어 이들에게 자랑하여 보였습니다. 평소 추사와 깊은 교우를 맺고 있던 이들은 <세한도>를 보고 깊은 감동을 하여 오찬을 비롯하여 장악진, 조진작, 조동견 등 16명은 文과 詩로서 題贊을 하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문사들의 제찬이 합장됨으로써 <세한도>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으며 마침내 귀국한 이상적은 다시 제주도를 찿아 추사에게 이를 보여주면서 자랑을 하였다 합니다.
이 후 이상적 집안의 家寶로 전해 내려오게 되었는데 <세한도>의 운명은 흥미롭고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만큼 기구하기도 합니다.
역관으로서 언어에 대한 탁월한 기교를 구사하여 섬세하고 화려하며 때로는 청아하다는 평을 얻은 이상적은 임금의 총애를 받아 영구히 '지중추부사'직을 받았으며, 12번이나 중국을 내왕하면서 당대의 저명한 중국 문인들과 교류를 맺어 중국에서 시문집<車中記夢>을 발간까지 하였던 인물입니다.
그가 1865년 죽자 <세한도>는 그의 제자 김석준에게 옮겨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역시 역시 역관이었고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며 세도가였습니다.
그는 <세한도>에 합장된 16명의 淸儒들의 제찬 속에 자신의 追贊을 삽입하였습니다.
그가 죽고 아들이 물려받고 후 일제 시대에 후지스카에게 넘어갔다는 설이 있고,
이상적이 죽고 민영휘로 민규식으로 그리고 후지스카로 갔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뭏든 후지스카는 <세한도>를 소장하게 되는데 그는 청년시절 부터 추사에 미쳐있던 한학자였습니다.
동경제대를 졸업한 그는 1936년 모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는데 논문의 제목이 '李朝에 있어서 淸朝文化의 移入과 金阮堂'일 정도로 추사에 심취해 있던 학자였습니다. 그는 경성제대 교수로 재직하며 추사의 작품들을 닥치는 대로 수집하다 이 <세한도>를 소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1940년 경성제대를 퇴임하면서 <세한도>의 그림과 제발만을 복사하여 '金阮堂手畵歲寒圖'의 복제판을 내었습니다. 이것을 당시 젊은 서예가이며 서화골동의 수장가였던 素筌 孫在馨씨가 보고 후지스카와 소전과의 그 유명한 씨름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1943년 소전은 후지스카로 부터 세한도를 구입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944년 여름 후지스카는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불리한 전황을 알고 동경으로 훌쩍 날아 갔습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소전은 곧바로 동경으로 건너갔습니다.
소전이 동경에 도착하였을 때는 연일 미군기가 공습을 하여 수라장처럼 살벌하였고 후지스카는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있었습니다. 소전을 본 후지스카는 찿아 온 뜻을 알았지만 묻지 않았고 소전도 <세한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매일 병문안 겸 인사를 올렸고 이런 식으로 문안이 석달이 가까이 되던 날에 후지스카는 "손선생 내 죽기 전에는 세한도를 내놓을 수 없지만 세상을 뜰 때 내 아들에게 유언을 해서라도 선생에게 보낼터이니 이제 그만 조선으로 돌아가시오."했습니다. 그러나 소전은 이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 문안을 하였습니다. 결국 후지스카는 소전의 끈질긴 집념에 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후지스카는 "세한도는 조선 민족의 유산일 뿐아니라 세계 문화인의 유산입니다. 그래서 조선사람이 아닌 일본인으로서도 그 그림을 아끼고 사랑한 것입니다. 나는 10여년간을 <세한도>와 함께 있었으니 이제 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한도>는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후지스카의 집은 폭격을 맞아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책과 함께 추사와 북학파 자료들이 모두 불타고 말았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세한도>만 살아남은 것입니다.
소전은 귀국 즉시 당대의 서화감식가이며 대수장가였던 吳世昌을 찿아가 <세한도>를 보이고 인사를 하자, 오세창은 즉석에서 '戰禍를 무릅쓰고 死地에 들어가 우리의 國寶를 찿아왔노라'라고 題를 썼습니다.
그리고 훗날 정인보와 이시영의 贊이 또한 붙어 총 20명의 찬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1974년 12월에 국보 18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한편 소전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선거자금이 쪼들리자 이근태에게 저당잡혔다가 끝내 되찿지 못하고 개성부자로 미술품 수장가였던 孫世基에게 넘어갔고 지금은 그의 아들인 孫昌根이 수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감상을 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사학자 이병도의 감상을 옮겨놓습니다.
"본시 세한도는 <논어>의 종지에 따른 소식의 '三淸圖'가 비롯이다. 추운 겨울에도 변함이 없는 松竹의 常靑과 梅蘭의 傲寒을 받들은 意趣다. 곧 군자는 역경에서도 그 절조를 지킴에 비긴 표백인 것이다. 완당의 세한도는 완당의 작품 '부작란도' 에서 화제로 썼던 '오직 하나일 뿐 둘 이상은 있을 수 없다'의 회심작이다. 천지가 백설로 덮인 납작한 토담집 안팎에 네 그루의 소나무가 그려진 단출한 꾸밈새이다. 槁枯한 구도와 老健한 線畵와 古拙한 격조가 넘치는 자화상이다. 그림 속에 詩가 있고 道가 스며 情이 넘실 거린다. 이는 높깊은 학문과 남다른 견문과 타고 난 大手가 아니고는 다다르지 못할 절경이다. 물론 소나무는 의표의 상징이요, 토탐집은 적거의 실상이요, 혈창은 고고한 숨통이다. 명문의 완당이라 세한도를 구성하면서 체념을 되새겨 기구한 현실을 자위했을 것은 산산이 부질없다. 안의 노송은 자기의 표상이니 아름드리 밑그루의 대담한 龍蛇는 치뻗다가 갈라진 앙상한 一枝와 좋은 대비가 된다. 그 꿈틀거리는 용사, 창창한 침엽, 자못 의연한 기상으로 해서 사뭇 안간힘이 시퍼렇다. 모진 풍파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조절하는 완당의 自存이 도사리고 있다. 한편 밖에 나란한 소나무는 문객의 나툼이다. 싫으면 뱉고 달면 삼키는 세파와는 진작에 담을 싼 꿋꿋한 자세인 것이다. 이중에 하나가 이상적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한신대강사이며 한국회화사가 전공인 오주석씨의 감상을 또한 옮겨봅니다.
"〈세한도〉의 짜임을 보면 과연 불세출의 서예가 추사 김정희다운 놀라운 구성력에 탄성을 발하지 않을 수 없다. 여백을 중심으로 바라보면 소나무와 잣나무가 두 그루씩 선 곳에서 화면은 세 개의 여백 공간으로 나뉜다. 세 여백은 처음이 제일 넓고 두 번째서 조금 줄었다가 마지막에서 가장 좁아진다. 가장 여백이 좁아진 곳 뒤에서 그의 내심을 토로하는 발문이 바로 이어진다. 그런데 첫째 여백은 애초 너무 휑한 느낌을 줄 위험이 있었다. 이것은 상변에 바짝 붙여 쓴 '歲寒圖'라는 짙은 제목 글씨와 수직으로 두 줄 내려 쓴 '藕船是賞 阮堂' 이라는 작은 관지 글씨에 힘입어 절묘한 공간 분할을 이루면서 구제되었다.
여백이 아닌 형태의 연결을 보자. 얼핏 보기에는 놓치기 쉽지만, 작품 오른편 아래 구석에서 늙은 소나무의 오른쪽 가지를 잇고, 잣나무의 왼쪽가지로부터 다시 그림 왼편 아래 구석으로 연결해가면, 작품의 전체 윤곽은 안정감 있는 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다. 보고 또 보아도 <세한도>가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문의 화발을 보자. 정성 들여 方眼(바둑판 선)을 긋고 쓴 글은 위쪽에 넓은 여백을 두고 아래쪽을 밭게 자리잡았다. 이렇게 아래쪽에 치우쳐 자리한 발문은, 그림을 중간에 두고 상변의 '세한도' 글씨와 서로 대척점에 서서 마주보고 있다. 제목 '세한도' 와 그 뜻을 풀어낸 장문의 글씨들은 마치 크고 작은 추로써 저울에 평형을 준 것처럼 서로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세심한 눈으로 찍혀 있는 네개의 印章을 보면
우측상단 완당 밑에 납작한 모양의 '正喜', 그림과 발문이 걸친 자리에 '阮堂', 발문의 끝에 '秋史', 그리고 우측 하단에 '長毋相忘'입니다. 이 '장무상망'은 추사의 印譜에 없는 것으로 미루어 이상적이 나중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데 '오랫동안 서로 잊지말자'는 내용이 애뜻한 사제의 정을 읽을 수 있게 합니다.

다음으로 <세한도>의 필법을 보면
추사가 일찌기 말하였듯이 말년에 그가 추구하였던 필법은 澁筆이었습니다. 삽필은 사물의 선을 생략하고 단순화하여 먹을 사용할 때에는 피 한 방울 아끼듯이 최소한으로 그림을 그림으로써 여백의 미를 최대한으로 살리는 필법입니다. 그러므로 이 필법을 사용할 때에는 자연 부드러운 붓이 아닌 독필이라 불리우는 몽당붓을 사용하였다고 전합니다.
세한도의 거칠고 투박하게 보이는 선은 털이 거의 다 빠진 몽당붓을 사용하여 억지로 먹을 묻혀 그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거친 붓질 때문에 오히려 모진 풍파 속에서도 끝내 조절하는 꿋꿋한 선비정신이 날카롭게 표출되었던 것입니다.


역관인 이상적은 1843년 특사단 수행길에 청나라에서 구한 '만학집'(晩學集)8권과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6권을 보내주었다. 이듬해에는 중국을 다녀와 하장령(賀長齡)의 '황청경세문편'(皇淸經世文編) 120권을 보내주었는데, 추사가 이에 감격하여 세한도를 그려 주었다고 전한다.

둘째,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공자가 말한 고사성어를 인용했다.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歳寒然後 知松柏之後凋).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일부 학자들은 측백나무로 추정)가 시들지않음을 안다는 뜻. 송백(松柏)은 잎이 가늘어서 주변의 무성한 나무의 잎이 푸른 계절에는 존재감이 드러나지않는다. 겨울이 시작되어 낙엽이 지면 그들만이 푸르름을 알게된다. 이 구절은 세한연후 송백후조, 더 줄여서 세한송백후조, 세한송백으로 알려지면서 지조와 의리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세한도를 한마디로 압축해서 설명해준다.

마지막 세번째, 사기의 급정열전(汲鄭列傳)에 나오는 하규의 적공(翟公) 고사를 언급했다. '급정지현 빈객여지성쇠 여하비방문 박절지극'(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

전한시대 청렴하고 강직했던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같은 어진 관리들도 권력의 성쇠에따라 빈객들이 몰리고 빠지고 했는데, '여하비방문'(如下邳榜門), 즉 "하규현의 적공이 대문에 써붙인 방(榜)도 같다"라고 추사는 통탄하듯 마무리 글을 썼다. 추사는 적공이 대문에 쓴 글을 차마 옮기지는 않았다.

사마천은 급정열전을 쓰고나서 다음과 같이 평을 달았다.

"하규의 적공(翟公)은 이렇게 말했다. 처음 내가 정위(검찰총수)가 되자 빈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뤘지만, 내가 파면되자 문밖에 참새잡는 그물을 쳐도 될 정도로 한산했다. 다시 내가 정위로 복권되자 예전처럼 사람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그래서 나는 대문에 '한번 죽고 한번 사는데 사귀는 정을 알고, 한번 가난하고 한번 부유함으로써 사귀는 모습을 알고, 한번 귀천을 경험해봄으로써 (친구의) 사귀는 모습이 보이더라'고 크게 써붙였다. 급암이나 정당시에게도 이러한 말이 해당된다니 슬프도다!"

여기서 생긴 고사성어가 '문전작라'(門前雀羅)다. 문앞에 참새잡는 그물을 친다, 그만큼 방문하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추사는 사기 인용을 마무리하면서 "세상인심이 박절하구나. 슬프도다! 완당노인쓰다"라고 발문을 맺었다.

끝말은 마치 사마천이 마지막에 한 말과 닮았다. 어쩌면 추사는 자신의 운명이 사마천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사마천이 궁형의 수모를 이겨내고 불세출의 걸작 사기를 남겼듯이, 추사 역시 절망과 고통속에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인류의 문화유산이라고 평가받는 세한도를 남겼다.

※적공이 대문에 붙인 글

一死一生乃知交情(일사일생내지교정)

一貧一富乃知交態(일빈일부내지교태)

一貴一賤交情乃見(일귀일천교정내현)

한번 생사의 고비를 넘겨보니 비로소 사귀는 정(친구의 마음)을 알겠고,  한번 빈부,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보니 비로소 사귀는 태도(친구의 태도)를 알겠고,  한번 귀천을 경험해보니 교정, 사귀는 정(친구의 마음)이 비로소 보이는 구나.

**乃(내)---이로써, 비로소(어조사)

**見(현, 견)---보다, 보이다, 드러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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