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陳摶)

2023. 9. 13. 09:32나의 이야기

진단(陳摶)은 유명한 잠의 신선(睡仙)으로 그의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다.
전하는 바로는 오대(五代) 말기, 북송(北宋) 초년에 한 어부가 의지할 데 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홀로 고기를 잡아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그가 강 속에 그물을 던지고 한나절을 기다렸는데도 한 마리 고기도 잡히지 않았다. 마지막에 그물을 끌어 올렸는데 그물에는 살갗이 자주 빛을 띤 공모양의 고깃덩어리가 하나 있었다. 그는 매우 신기했고 이것이 무슨 물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치고 허기진 어부는 자세히 살펴볼 것도 없이 그 고깃덩어리를 가지고 집에 돌아와 끓여 허기를 채울 준비를 했다. 그가 불을 피울 때 갑자기 온 하늘과 땅이 캄캄해지며 천둥과 번개가 치고 광풍이 폭우를 동반하여 천지를 뒤덮을 기세로 내렸다.

어부는 매우 놀라고 두려워했는데, 이때 더욱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땅에 놓여 있던 고깃덩어리가 큰 천둥소리에 놀라 갈라지더니 고깃덩어리 속에서 한 사내아이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어부는 너무 놀라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내아이의 응애 응애 하는 울음소리에 뒤이어 바람이 잦아들었고 비가 그치고 하늘이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어부는 앞으로 가 그 사내아이를 안아 들고 마음속으로 자신이 외로운 홀홀 단신으로 살았는데 이 아이는 혹시 하늘이 내려준 후사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어부는 너무 기뻐 고개를 젖혀 하늘로 향하고 하늘의 자비에 감사했다. 어부의 성이 진(陳)씨였고 아들은 고깃덩어리 속에서 나왔으므로 이름은 ‘단(摶:뭉칠단 엉길단)’이라 하였다.

진단은 무럭무럭 자랐으나 4,5세가 되어서야 말을 할 줄 알았고 어린나이에 벌써 산수를 좋아하여 종일 산 속에서 뛰놀고 물 속에서 놀았다. 진단은 점점 자라서 성인이 되었고 그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던 어부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부친을 장례하고, 이때부터 초야에 묻혀 사방의 명산대천을 즐겁게 유람하였다. 진단은 오악의 으뜸인 태산(泰山)을 자주 유람하고 산 위의 도장(道長)과 인생과 처세 철학을 토론하며 도교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수많은 저작을 써 학식이 해박한 사람이 되었다.

진단의 명성은 갈수록 커졌다. 하루는 그가 수도로 가 유람하는데 황제가 이 사실을 알고 즉시 진단을 불러 만났다. 서로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황제는 진단이 매우 경륜이 풍부하고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그를 궁중에 남아있게 하고 싶어 궁녀와 재물을 그에게 하사하였다. 진단은 완곡히 거절한 후에 아무렇지도 않게 훌쩍 떠나버렸다. 그는 이렇게 가고 난 후 무당산(武當山)에서 20여 년을 은거했다.

진단이 70세가 되던 해에 그는 무당산에서 서악(西岳)의 화산(華山)으로 왔다. 화산에 와서 은거한 후부터 그는 종일 잠을 잤는데, 어떤 때는 몇 일, 어떤 때는 십 몇 일을, 심지어 몇 개월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때도 있어 사람들은 그를 ‘수선(睡仙)’이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이 그를 방문했는데, 문이 굳게 잠겨있어 문틈으로 내부를 엿보니 안에는 마치 원래 사람이 없는 것처럼 방 안에서는 재잘재잘 지저귀는 새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전하기를 산에 올라 땔나무를 하는 어떤 나무꾼이 집 안에 시체가 한 구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앞으로 가서 자세히 분별해보니 원래 화산도사(華山道士) 진단이었다고 한다. 손으로 그의 심장을 만져보니 아직 미미하게 뛰고 있었고 사지와 몸도 여전히 따뜻했지만, 아무리 소리쳐도 그를 깨울 수 없었고 그는 이렇게 많은 날들을 잠을 잤다.

이 일은 한번 전해지자 점점 더 신비롭게 퍼지고 더욱 멀리 퍼져 후에 주(周) 세종(世宗) 시영(柴榮)에게까지 전해졌다. 시영은 매우 신비하게 생각하여 조서를 내려 진단을 불러와 그 도술을 배우고 싶어 했다. 진단은 궁중에 불려 와서도 고개를 떨구고 곧 잠이 들었는데 한번에 한달을 넘게 잤다. 그 사이 시영이 몇 번 직접 보러 왔는데 진단이 과연 듣던 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깊이 잠이 든 것을 보았다. 시영은 속으로 그 기묘함을 칭찬하면서 도술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어느 날, 진단이 마침내 깨어나 시영은 즉시 그를 불러 그에게 도대체 어떤 도술이냐고 물었다. 진단은 사양하지 못하고 《대어가(對御歌)》 한 수를 지어 세종에게 대답했다. 그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은 잠자는 것을 좋아합니다. 신은 잠자기를 즐기죠. 전 양탄자 위에 눕지도 않고 이불을 덮지도 않습니다. 돌조각으로 베개를 삼고 도롱이를 땅에 깔지요.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번쩍여 귀신이 놀랄 때도 신은 그때 마침 코를 골며 곤히 자고 있죠. 장량(張良)과 범려(范蠡)를 한가로이 생각하고 맹덕(猛德)과 유비(劉備)에 대해 한담합니다. 서너 명의 군자(君子)가 하찮은 일로 노기등등하여 논쟁하는 것이 어찌 신과 같이 청산(靑山)의 정상에 흰 구름이 쌓인 곳을 향해 미간을 넓히고 뱃가죽을 열어젖히고 다만 잠이 들어 달이 동쪽으로 떠오르고 붉은 태양이 서쪽으로 떨어지는 것만 간여하는 것과 같겠습니까.”

세종이 듣고 난 후, 어쩔 도리 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수선은 정말로 명불허전이구나. 그는 한가로운 구름과 들의 학처럼 명리에 욕심이 없어 호화로운 궁실과 쾌적한 생활은 그의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하겠구나. 이리하여 세종은 진단을 산으로 돌아가도록 해주었다.

물론 진단이 이렇게 오래 깨지 않고 자는 것은 보통사람들처럼 ‘게을러 늦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도가의 일종의 심도 높은 단전의 정기 수련법으로 도가에서는 ‘태식(胎息)’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수면법은 세월의 이동을 알지 못하고 순수하게 수준 높은 심오한 정신세계로 들어간다. 이러한 절세의 수면법을 수련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가에서는 그를 ‘진단노조’라고 하여 존경한다.



화산


진단은 화산에 오래 거주하였는데, 그와 북송의 기업을 개창한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은 화산에서 기묘하게 교제한 적이 있다.

조광윤은 어릴 때 모친을 잃고 집이 매우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강호를 떠돌며 유랑생활을 했다. 그는 네모진 얼굴에 귀가 컸고 미목이 수려하고 태도가 당당했다. 그는 무술을 할 줄 알았고 힘이 비할 데 없이 셌으며 특히 도박을 좋아했는데, 중국의 도박이 바로 그가 흥기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매우 파렴치하여 만약에 도박에 지면 빚을 인정하지 않았고, 승복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누구라도 싸웠다. 그는 신체가 매우 건장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를 이기지 못했고, 조광윤은 이렇게 각지를 돌아다니며 그럭저럭 나날을 보냈다. 어느 해, 그는 고향인 하남(河南)에서 무슨 큰일을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관부에서 사방으로 그를 잡으려 했다.

조광윤은 두려워 몰래 섬서(陝西)의 화산 아래로 도망쳐왔다. 연일 바쁘게 도망 다니느라 뱃속이 텅텅 비고 사지에 힘이 없어 그는 한 발작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화산 위의 진단노조는 여러해 전에 당나귀를 타고 화산으로 돌아오다가 도중에 한 노인을 만났는데, 어깨에 광주리를 메고 있었는데 광주리 속에는 두 마리 용이 둘둘 휘감겨 있었다. 진단이 자세히 보니 한 마리는 조광윤이었고 다른 한 마리는 조광윤의 형제인 조이사(趙二舍)였다.

진단은 한바탕 기쁘게 하하 웃고 나서 말했다. “황제의 아버지가 어깨에 메었으니 이제부터 천하가 안정이 되겠구나.” 이날 그는 점을 쳐 조광윤이 화산으로 피난을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런 능력 있는 인재를 교화시켜 빨리 정도(正道)를 걷게 하기 위해서 복숭아를 파는 노인으로 변하여 길가에서 기다렸다.

조광윤은 이리저리 도망 다니느라 배고프고 목이 마른 차에 멀리서 복숭아를 파는 사람을 보았다. 그 복숭아는 옥같이 흰데다 분홍색이 알맞게 섞여 선명하고 싱싱하여 향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조광윤은 먹고 싶어 침을 질질 흘리며 앞으로 뛰어가 옆에 쪼그리고 앉아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복숭아를 배불리 먹은 후에 그는 여느 때처럼 엉덩이를 두드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훌쩍 가려고 했다.

뜻밖에도 복숭아를 파는 노인이 그를 막고 말했다. “내 복숭아를 먹었으면 돈을 내야지!” 조광윤은 복숭아를 먹고 배가 불러 힘이 생겨 몽둥이를 휘두르며 때리려 했지만 진단은 여전히 평온하고 온화하게 말했다.

“많이 달라는 게 아니네. 1문(文)만 내면 되네.” 조광윤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내가 그렇게 많은 복숭아를 먹었는데 1문만 내라니! 그야말로 내게 거저 먹여준 것 아닌가, 그렇다면 돈을 내지 뭐! 그는 손을 뻗어 주머니 속을 한참 뒤졌지만 1문의 돈도 없었다. 그가 노인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 돈이 1문도 없어요!”

진단이 말했다. “돈이 없으면 땅바닥에서 굴러야지!” 조광윤은 방법이 없어 정말로 땅바닥에서 구르려고 하자 진단이 이를 보고 황급히 말리며 말했다. “에이! 1문의 돈만으로도 영웅을 괴롭힐 수 있구먼.”

조광윤은 이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 진단은 또 이어서 그에게 훌륭한 사내대장부가 약한 자를 속이고 행패를 부려서는 안 되고 마땅히 대업을 한차례 이루어야 한다고 권면하고, 또 조광윤에게  동관(潼關:섬서성 서안 오른쪽)으로 시영을 찾아가 군대에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조광윤은 듣고 노인에게 감사하며 동관으로 갔다. 시영은 조광윤이 키가 크고 튼튼하며 무예가 뛰어난 것을 보고 즉시 그를 거두어 들였다.

조광윤은 군대를 따라 연달아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가 또 용맹하고 전투에 능했기 때문에 시영의 눈에 들어 매우 빨리 군대를 통솔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조광윤은 이것이 모두 복숭아를 파는 노인의 가르침을 받은 결과라고 생각하고, 다시 화산 아래에 와서 복숭아 파는 노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나절을 찾았는데도 그 노인의 종적을 찾지 못했다. 그는 마음이 답답한 채로 화산의 유명한 도교사원인 옥천원(玉泉院)에 도착하니 한 늙은 도사가 탁자 위에 바둑판을 벌여놓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일시에 마음이 기뻐져 복숭아 파는 노인을 찾는 일을 마음 저편으로 보내고 앞으로 가서 말했다. “도사님, 우리 한판 둡시다!”

이 늙은 도사가 바로 진단이었다. 그는 조광윤이 바둑에 중독되어 발작하며 두 손을 부르르 떠는 것을 보고 일부러 그를 유혹하며 말했다. “우리 무엇으로 내기를 할까? 은량 내기를 하자!” 조광윤은 이 말을 듣고 더욱 힘이 났다. 쌍방은 모두 은자 한 덩어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첫째 판은 진단이 이겼지만 그는 은자를 가져가지 않았다. 둘째 판은 진단이 졌고 조광윤은 손을 뻗어 은자를 가져갔다. 진단이 말했다. “1승1패니 누구도 이겼다고 할 수 없네! 자네가 이렇게 재미있어 하고 오늘 우리 둘도 인연이 있으니 우리 산 정상에 올라 가세나!”

조광윤은 내기를 하던 여흥이 아직 짙게 남아 흔쾌히 승낙했다. 진단이 길을 인도하여 그들이 돌출된 고개의 정상에 도착하니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고 기세가 비범하여 마치 선경과 같았다.

조광윤은 매우 즐거워했고, 진단은 또 커다란 바위 위에 바둑판을 벌여놓고 이어서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첫판과 둘째 판 모두 조광윤이 졌고, 셋째판과 넷째 판도 역시 그가 졌다. 그는 하도 져서 당해낼 수가 없을 지경이었고, 군도(軍刀)와 군마(戰馬)까지도 모두 내어 주게 되었다. 그러나 조광윤은 여전히 승복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바둑을 두고 싶어 했다.

진단이 말했다. “더 두는 건 괜찮지만, 내기를 걸지 않으면 더 두기가 곤란한데!” 조광윤은 귀밑머리까지 빨개져 눈 딱 감고 말했다. “좋아요. 마지막으로 한판만 둡시다.” “그래, 뭘 내기할 건데?” 조광윤은 사실 내기를 걸만한 물건이 없었으므로 급한 김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화산을 걸겠어요!” 진단이 말했다. “좋아, 약속했어. 자네가 만약에 또 지면 이 화산은 자네에게 속하지 않는 거야.”

조광윤이 생각했다. 이 노인은 정말 웃긴다. 어차피 원래도 화산이 내 것은 아니었잖은가!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내가 지면 화산을 도사께 판 셈 치죠.” 이번 바둑도 과연 조광윤이 졌다. 진단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종이와 붓을 가져와 매산(賣山) 문서를 쓰고 골짜기를 향해 던지려 하자 조광윤이 급히 가서 그 종이를 뺏으니 뜻밖에도 자신의 손자국이 종이 위에 찍혔다.

조광윤은 좋지 않은 기분으로 화산을 떠나와 얼마 안 되어 그는 정말로 정권을 장악하여 송(宋) 왕조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또 다시 화산의 복숭아파는 노인과 바둑을 잘 두던 늙은 도사가 생각이 나 사람을 보내 그를 찾았다. 사신이 돌아와 말하기를, 그 두 노인은 원래 같은 사람으로 그가 바로 진단이며 산에 은거하는 고수로 산을 내려와 수도로 오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조광윤은 이때서야 자신이 신선을 만났었다고 크게 깨달았다. 그는 연달아 세 차례 조서를 내렸지만, 진단은 단호하게 산을 내려오지 않았다. 마지막에 진단은 “한 조각 야심은 흰 구름에 의해 전부 붙잡혔으니, 제왕의 명령으로 영단을 전수하는 것을 그치고 봉황의 뜻을 품고 옵니다.(一片野心, 全被白雲留住; 九重龍詔, 休敎丹鳳銜來)”라는 상주문을 써서 사신에게 전해 황상께 주고 또 황상께서 화산을 판 일을 잊지 말라는 전갈도 가져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러한 원인으로 화산은 “자고로 세금을 헌납하지 않았고” 이후의 역대 황제도 이에 대해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진단은 118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심이징(沈以澄))



중국 5岳    

■ 東岳 (泰山)
태산은 오악중의 으뜸으로서 산동성중부의 태안시에 위치해 있다. 기차를  타고 태안시에서 내려  차에 오르면 태산아래에 내리게 된다.  선인들이 이르기를 `태산의 岩을 보고 魯邦(노방)이  보인다`  맹자가  말하기를 `공자가 태산에 올라서 천하가 작은 것을 알았다`한다. 한무제가 태산에 올라 말하기를 `높고  험하고 크고 특이하고 웅장하고 赫(혁)하고 駭(해)하고 惑(혹)하다` 태산의 총면적은 426평방km로서 주봉은 해발 1545m에 달한다. 동쪽으로는 바다를 향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워 독특한 지리위치와 자연조건으로 華夏神山으로 불리운다. 태산은  하,상조 시기부터 72군왕과 제후들이 자리를 보고 위치를 돌을 새겼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후 한무제, 광무제, 당태종, 송대진종, 청대강희, 건륭등 역대의 군황제들이 모두 태산에 와서 제사를 지내다.
    
태산에는 가는 곳마다 절간과 석상, 묘비등 문화고적이 대량으로 있다.태산을 경모하여 지은 시만 천여수가 넘는다. 두보의시 "망악"에서 말하기를 `태산의 정상에 올라 보니 천하의 산들이 작아보인다.로 천고의 名詩로 알려지고 있다. 태산은 또 `佛` , `道` 二敎의 지대이기도 하다. 가는 곳마다 절, 명승고적이 분포되여 있다. 유명한 건물로는 `岱(대)묘` ,`岱宗坊` , 斗母宮`,`經石谷` ,`壺天閣', '中天門`, `五松亭, '十八盤` , `南天門', 玉皇頂`등이 있다.  `대묘`(岱묘) ,  태산을 유람하게 되면 제일 먼저 보는것이 대묘이다. 대묘는 진안성내에 위치해 있다. 남쪽에 태안문부터 통천가, 북쪽의 태산판도, 남천문의 중축선, 역대의 황제들이 제사지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진,한대부터 修建한 대묘는 많은 희귀문물들이 있다. 대묘의 주요궁전 천주궁은 북송代에  始建한 것이다. 건물내의 `동악태산상` , `동악태산선출유`벽화, 등이 있다. 태산을 오르는 길은 동쪽길과 서쪽길이 있다. 일반적으로 동쪽길에서 산에 올라 절정에 오른후 중천문에 내려와 서쪽길의 대로로 내려와 산에서 내린다. 태산의 절정까지으 높이는 9km이고 산으로 오르는 층계는 6293개이다. 중천문은  숙박,휴식처로서 여기에서 직접 케이불카를 타고 岱에 올라 태산의 경관을 관상할수  있다.  태산의 절정 玉皇頂에 오르면 頂東에는 관일정,頂西에는 망강정,頂東南에는 拱北石(공부석)이  있어  四大奇觀중의 하나이다.


■ 西岳(華山)
화산은 태화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중국 오악중의 서악으로 섬서성관중평원동부의 화음현경내에 있으며 서안시에서 120km떨어져 있다.화산은 기봉들이 솟아있고 절벽이 가파르게 많아서 기세가 사람을 억누르게 한다.화산은 동,서,남,북,중,다섯개 산봉우리가 모여 이루어졌는데 雄奇險峻(웅기험준)하고 하늘을 받치고 있어 멀리서 한떨기의 활짝 피여 있는 연꽃처럼 보이기에 화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였다. 화산은 험한 것으로  소문이 나있다.

`옥천원`(玉泉院), 화산으로 가는 길은 자고로 한갈래밖에 없다. 길은 옥천원에서 시작된다. 옥천원내에는 녹음이 하늘을 가리우고 건축이 웅위롭고 회랑이 꾸불꾸불, 푸른 샘물은 맛갈스러워 여행의 성지이다. `回心石` `과 후손처우(원숭이도 근심한다는 뜻) 선암절벽을 지나면 北峰에 이르게 된다. 북봉은 산세가 험하고 삼면이 절벽이고 한갈래의 길만이 남봉으로 통한다. 여기에 `차이야`(양쪽이 절벽과 낭떠러지이고 길이 쫇아 절벽에 귀를 대고 건는다는 뜻) , 倉龍峰(양쪽이 만장절벽이고 너비가 1m좌우이고 길이가 1km이다.  당조시인 한유가 여기까지 와서 통곡하며 시가와 유서를 절벽아래로 던졌다고 한다) 등을 지나면 金鎖關(김쇄관)에 이르게 된다.여기에서 동봉,남봉,서봉이 똑똑히 보인다. 세봉사이에 산간소분지가 있는데 세봉우리 물이 모여 玉井을 이루고 雨季에는 물이 넘쳐 동서 양쪽으로 흘러넘쳐 하늘에서 날아내리는 폭포를 이룬다. 그다음 중봉, 동봉, 남봉 (2160m),서봉을 구경하게 된다.    


■ 南岳(형산;衡山)
형산은 호남성형양시 京廣철로 한측에 한마리 거용이  중국南疆에 엎드려 있는것 같다. 형산은 72봉으로 이루어 졌는데 형양부터 장사까지 꾸불꾸불 800리 되며 최고봉인 祝融봉과 42개의 이름난 산봉우리가 있다. 역사기재를 보면 5000년의 역사가 있는데 祝融氏가 황하를 건너 경주에 와 형산에 올라 천상을 보고 불씨를 보존하여 식물을 익히는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하여 남악의 신을 祝融이라고 한다. 남악은 도교의 여러가지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고 남방종교,문화중심으로서 절, 서당이 수풀처럼 일어섰으며 詩詞歌賦(시사가부)가 성하며 남명호상학파, 명청유물주의 (주자학),민국대학등이 운집해 있어 `문명오구(奧區)로 이름있다.
  
남악형산은 산봉우리가 청수하고 수목이 울창하며 산꽃이 사처에 향기를 풍긴다. . 남악은 역대의 황제들이 수렵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형산은 8대 풍경구로 나뉜다.  古鎭,華嚴湖,磨鏡臺,祝融峰,광제사,藏經殿,수렴동,方廣寺風景區로 각각 특색이 아름답고 웅대하여 고대 역대황제들이 수렵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유명하다.


■ 北岳(항산;恒山)
북악항산은 산서성휘원현에 위치하여 北疆(북강)에 웅크리고 있고 남쪽으로는 연조(화북일대)에 잇달아 있다. 당대시인 가도의 `항악묘`에 이르기를 `천지에 오악이 있거늘 항악이 북쪽에 위치해 있도다. 岩이重疊萬丈(중첩만장)이고 怪異(기이)함을 알수가 없구나`고 항산의 예측할 수 없는 기세와 북악의 경치의 特色輪廓(특색윤곽)을 그려내였다. 항산은 웅장하고 험난하여 산세가 연달아 기복을 이루고 250km를 가로 타고 1108봉이 무리지어 있다. 주봉은 산서훠원현의남쪽에 두개의 산봉우리로 되여 있는데 동은 천봉영,서는 취병산, 이라고 한다. 해발2017m로서 두봉우리가 구름속을 찌르고 들어가 도끼로 깍고 칼로 더듬은듯한 가운데의 금용협, 해협사이로 물이 흘러 산골짜기는 고요하고 깊으며 웅준한 천연적요새이다.
  
항산은 북방에 위치해 있으며 4000여년전 위연제가 북쪽으로 훠원까지 왔다가  북악으로 정했다. 여기에는 고적이 많고 북방명승지이다. 북악항산에서 제일 저명한것으로는 古刹懸空寺이다. 북위부터 14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절은 취병봉의 산허리의 선암절벽에 지어져 있고 산에 기대여  岸에 떠 있어 위로 보면 아스란 벼랑을 떠이고 있고 아래로는 깊은 협곡이 있어 루각이 위엄스레 떠있어 장관이다.


■中岳(嵩山)
숭산은 중원의 하남성중부에 위치해 있어 독특한 지리적위치를 가지고  있다. 황제가 여기에서 활동하였고 하우(하조우제)가 여기에서 흥하기 시작하였다. `사기`의 기재에 의하면 `시조의 삼대의 君이 여기에서 있어 숭고함을 일컬어 중악이라고 ......` 숭산은 太室山과 少室山으로 되여 있는데 각각 36개 봉우리씩 있다. 동은 태실산인데 주봉은 峻極峰(준극봉)으로서 해발1494m 이고 서는 소실산인데 저재봉의 높이는 1512m에 달한다. 산맥이 잇달아 있고 기세가 웅위하여 거용이 60여km에 달하는것 같다.숭산의 이름은 `시경`중의 `숭고유악, 극준하여 하늘을 향한다.`에서 온것이다. 자고로 기세가 방백하고 풍경이 수려한 숭산은 역대제왕, 관리, 승도, 문인, 무사들이 선망하는 곳으로서 `삼리에 절 하나, 오리에 연못 하나`의 이름이 있다. 지금까지도 유명한곳으로는 곳으로는 중악대묘, 소림사, 숭양서당, 그야말로 도, 석, 유 삼교의 정화이다.
  
중악묘의 규모는 방대하고 2000여년을 거치면서 역대의 끊임없는 증축을 거쳐 지금까지 보존해왔다. 중악묘는 진대에 시작하였는데 원명은 태실사로서 태실산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이였다.  少林寺는 `천하제일名刹`로서 북위태화20년에 건축하였다. 역사가 유구하고 중국불교단종의 발원지으로 소림무술의 발생지기도 하다. 少林寺는 소실산 수림에 들러 쌓여 있다. 북위효창3년에 인도고승 달마가 와서 널리 제자를 받아 `단정`법문을 전수하여 중국 단종의 시초가 되었다. 숭산서당에는 다른 문화의 분위기가 감돈다. 武가 아니고 文의 지방으로 책을 읽는 곳 이다. 그 외에 숭산에는 `중악한삼각` 숭악사 및 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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