蜚英騰茂

2023. 9. 6. 17:40즐거운 사자성어

♞비영[蜚英] 비영등무(蜚英騰茂)의 준말로, 명성과 실제가 훌륭하게 서로 부합되는 것을 말한다. <漢書 司馬相如傳下>


稱頌人的聲名事業日盛。明.孫梅錫《琴心記》第四一齣:「吾弟蜚英騰茂,下筆如神,不須謙讓,就請揮毫。」也作「飛聲騰實」。

【解釋】蜚:同“飛”。英:指名聲。茂:指實際。指人的名聲與事業日益昌盛。同“飛聲騰實”。

蜚英腾茂,汉语成语,拼音是fēi yīng téng mào,意思是指人的名声与事业日益昌盛。出自《史记.司马相如列传》。
中文名
蜚英腾茂
拼音
fēi yīng téng mào
注音
ㄈㄟ ㄧㄥ ㄊㄥˊ ㄇㄠˋ[1]  
出处
《史记.司马相如列传》

나라에서는 공신들의 업적을 책록에 기록하여 실적에 힘쓰게 하고, 명문을 새겨 비석을 세운다. 그리하면 나라의 인재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더욱 노력하게 된다. ≪史記(사기)≫ 司馬相如傳(사마상여전) 封禪文(봉선문)에 보면 “꽃다운 명성을 나타내고 성하고 충실한 것을 드날린다. 蜚英聲騰茂實 비영성등무실”는 구절이 있다.



동리 김윤안의 겸암과 서애를 애도하는 제문



겸암 류선생을 애도하는 제문[祭謙菴柳先生]



아, 슬프고 슬프구나 鳴呼哀哉

생각건대 공의 자질은 惟公之質

옥처럼 깨끗하고 금처럼 귀하며 如玉如金

굳건한 의지와 온화한 성품까지 剛毅溫和

겸비하셨지요 乃其兼有

안으로 엄한 가르침이 있고 內而有訓

밖으로 훌륭한 스승이 있어 外而有師

나가서나 들어와서는 복응하여 出入服膺

덕이 날로 이루어졌지요 德日以造

나라를 경영할 그릇이었지만 國有其器

하늘은 베풂에 인색하였지요 天嗇其施

누구와 못하리오만 誰之不如

백 리 수령으로 침체했네 困於百里

백성들을 교화하고 사랑함에 有化有愛

선정비를 세워 떠받들었고 石以戴之

큰 난리87)에 비록 미력한 힘이나마 亂鉅力微

마음을 다해 직책을 감당했지요 竭心當職

몸은 한산한 곳에 있었으나 身雖散處

나라를 위해 한숨을 내쉬었지요 爲國喑噫

병은 어찌 그리도 늘 가지고 계시고 病何云綿

수명은 어찌 그리도 갑작스러웠던지 壽何云遽

아, 슬프구나 鳴呼哀哉

아름다운 때 좋은 절기에 佳辰令節

가을 달뜨고 봄바람 불 때면 秋月春風

부모님 오래오래 사시라고 稱壽萬年

색동옷 입고 덩실 춤을 추었지요 彩衣雙舞

당과 정사도 있었고 有堂有舍

대나무와 소나무도 있었지요 有竹有松

시냇물과 언덕이 있었고 有水有邱

숲과 채마밭도 있었지요 有林有圃

사방 벽에는 도서들로 가득했고 圖書四壁

그 속에서 상제를 대하듯 했지요88) 對越其中

한가하고 여유롭게 지내면서 偃仰優游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었지요 若果忘世

아침저녁으로 농사에 대해 말하고 農談日夕

술 빚어 시절 따라 손님들 맞았지요 村酒時邀

사위들은 명성 떨쳤고89) 有壻蜚英

자식들은 영양90)했지요 有子榮養

인간세상 누린 오복 人間五福

누가 더불어 짝하겠습니까 孰與爲夷

오직 수명만 오래 누리지 못했으니 惟年不遐

이치를 이해하기 어렵네요 而理難究

아, 슬프구나 鳴呼哀哉

아, 소자가 嗟余小子

자질 둔하고 마음 어리석지만 質鈍心愚

25년을 하루같이 二十五年

문하에 출입하면서 出入門下

어여삐 여기는 큰 덕으로 憐存德大

가르침 받는 은혜를 입었지요 敎育恩深

경자년(1600) 늦겨울 庚子季冬

초아흐레에 初九之日

추위를 무릅쓰고 찾아뵙더니 冒寒來拜

술을 부어주면서 위로하셨지요 慰以深巵

음식은 혼자 드시지 않고 對食不飱

저를 불러 함께 드셨지요 呼我以共

공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동생이 公曰吾弟

장차 원행을 떠나는데 將有遠行

하필 이런 때 날씨가 추워져 當此沍寒

행리가 염려스럽다” 하셨지요 行李可念

이때 제가 색리가 됨에 此時爲色

처연한 듯 여기셨고 若有悽然

모시고 있다가 떠날 때 侍坐移時

인사드리고 물러났지요 拜辭而退

언제 다시 볼지를 물으시기에 問以再見

새해에 뵙자고 고하였지요 告以新正

얼마 안 있어 소식을 들으니 未幾聞之

병환이 이미 위독해져서 疾已危革

찬 기운이 내부로 파고들어 自寒入暖

의원도 손을 쓸 수 없다고 했지요 醫窮技殫

통곡하면서 집으로 들어가니 慟哭入門

눈물 비 오듯이 쏟아졌네 有淚如瀉

소리와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해 聲容不復

아득한 하늘만 쳐다보았지요 視天茫茫

아, 슬프구나 鳴呼哀哉

단아하고 방정한 자품에 端方之資

효도하고 우애로운 행실 孝友之行

정예로운 학문과 精詣之學

정직한 언론이 正直之論

지금은 없어졌으니 今也則亡

애통함을 어찌 다하리오 慟焉曷已

세월이 빠르게 흘러 日月流邁

어느덧 소상이 되었네요 奄及初祥

분주하게 여기저기 다니느라 奔走悠悠

행료91)도 빠트렸습니다 尙闕行潦

마음에 부끄러워서 心懷愧歉

얼굴이 달아오르네요 顔有忸怩

이제야 저의 작은 정성을 부쳐 始寓微誠

보잘것없는 제수를 올리니 于此菲薄

영령께서는 부디 왕림하시어 神其來格

제가 올리는 술잔 흠향하옵소서 歆我薦觴

아, 슬프구나 鳴呼哀哉





87) 큰 난리: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말한다.

88) 상제를 대하듯 했지요[對越]:대월상제(對越上帝)의 줄임말로 상제를 우러러 마주하는 지극한 정성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서책을 상제를 대하듯 지극정성으로 읽었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주송(周頌)·청묘(淸廟)」

에 “하늘에 계신 분을 대하고 사당에 계신 신주를 분주히 받든다.[對越在天 駿奔走在廟]”는 말이 있다.

89) 사위들은 명성 떨쳤고:비영(蜚英)은 비영등무(蜚英騰茂)의 준말로, 명성과 실제가 훌륭하게 서로 부합되는

것을 말한다.(漢書 「司馬相如傳下」) 류운룡의 사위는 성극당(省克堂) 김홍미(金弘微, 1557~1604)와 경암

(敬庵) 노경임(盧景任, 1569~1620)이다. 김홍미는 강릉 부사(江陵府使)를 지냈고, 노경임은 성주 목사(星州牧

使)를 역임했다.

90) 영양(榮養):자식이 출세하여 좋은 의복과 맛난 음식으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이른다.

동리선생문집 권4 _ 제문|365

91) 행료(行潦):길에 고여 있는 물이라는 뜻인데, 전의되어 제사나 진헌 때 쓰는 변변찮은 술과 음식을

말한다. 시경 「대아(大雅)·형작(泂酌)」에 “저 길가에 고인 빗물을 멀리 떠다가, 저기에서 떠내고 다

시 여기에다 붓는 정성만 지극하다면, 제사에 올리는 밥도 만들 수 있다.[泂酌彼行潦 挹彼注茲 可以饙

饎]”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366|동리선생문집





서애 류선생을 애도하는 제문[祭西厓柳先生]



아, 선생께서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셨나요? 사림에서 태산북두처럼 추앙했고, 국가에서

시귀蓍龜처럼 비겼지요. 군자들은 믿고서 두려워함이 없었고 소인들은 꺼려서 함부로 하지

못하는 바가 있었지요. 조야에선 용사행장用舍行藏92)을 살펴 그 안위를 점쳤건만, 누가 선생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이 지경에 이르리라 생각했겠습니까? 사림에서 서로 조문하여 죽음을

슬퍼했으며 도성사람들은 희망이 끊어져 길에서 통곡했지요. 하늘의 뜻은 알기 어려워 모든

일이 두렵군요. 아, 끝났구나! 허물을 탓할 곳이 없구나! 선생께서 이 세상에 계신 66년 동안, 젊어서는

청명하였고 장성하여서는 단정하셨으며, 마음은 쇄락하였고 밝은 달처럼 빛을 드리웠지요.

인효仁孝와 형우제공兄友弟恭은 일찍이 가정의 가르침에 복응한 것이고, 성명誠明93)과 경이직내敬

以直內는 진실로 사우의 허여에서 비롯된 것이었지요. 이와 같은 자질로써 이와 같은

학문을 돈독히 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질타하는 소리를 견마犬馬에게 미치지 않았고,

남을 대함에 있어서는 게으른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지요. 온종일 꼿꼿이 앉아 마음속에

있는 것을 보존하여 지킨 것은 대개 본원의 땅에서 함양하여 온갖 변화에 대응하는 주체로

삼으려 함이었지요. 군주를 섬김에는 거짓 없이 오로지 충경忠敬하는 마음으로 하였으며, 백성을

부림에는 제사를 받들 듯이 하여 길러주고 위무함에 힘쓰셨지요. 진술함에는 정성을 드러내고

아룀에 명백으로 섬겼으며, 옥 같은 용모와 쇠북 같은 목소리94)에 백관들이 모두 탄복하였지요.

봉장封章을 진열함에 말뜻이 매우 절실하였으며, 10년 동안 경연에 있었어도 덕을 한결같이

하여 조금도 하자가 없다는 포숭褒崇이 있었지요. 대개 이미 성현이 서로 만나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경사가 있었거늘, 어찌하여 재상95)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왜구들이 난리를 일으켜 이 세상의

이 백성들로 하여금 그 덕업의 성대함을 보지 못하게 하였던가. 난리가 극심하고 강상이 다

유린되었을 때, 다만 당시 숨어 지내면서 몸을 보전하고 처자를 보호하던 무리들은 평소 군주의

옷을 입고 군주의 음식을 먹지 않은 자가 없거늘, 유독 선생만이 대가를 호종하면서 구휼에

힘쓰셨습니다. 대패한 군대를 구원하라는 명을 받을 때 흥복興復의 책임을 자임하여 기미와

변화에 응하여 완급緩急을 잃지 않으셨지요.

대가가 도성으로 되돌아왔을 때 옛 수도는 매몰되었는데, 선생께서 다스림에 힘써 득실을

지적하고 진술하여 안으로 안집安集의 방안을 다하였고 밖으로 방비의 계책을 세웠으며, 이미

흩어진 인심을 수습하고 이미 좌절된 사기를 독려하였지요. 천자의 위세가 떨쳐 일어나 육군六軍(천

자의 군대)이 우리나라에 오자 선생께서 군대를 통솔하며 장수와 군사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각로閣老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경탄하지 않은 자가 없는 것은 대개 선생의 충의忠義가

남들을 깊이 감격시킨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시 표문表文은 대체로 선생의 손에서

나왔으며, 그때 지은 상소는 윤문을 가하지 않아도 훌륭했지요. 그 중흥의 공에 있어서는 진실로

마땅히 규모를 헤아려 풍지風旨를 맛보아 먼저 난을 평정한 뒤에 적을 꺾으셨지요. 비록 선생이

이와 같은 재주와 덕과 공이 있었지만 오히려 부류들의 헐뜯음을 면하지 못했고,

심지어 비난함을 그만두지 않았지요. 아, 소인들이 의론을 좋아함이 이와 같군요.

선생은 이때부터 산속에 은거하면서 시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지요. 다만

육씨陸氏의 처방96)을 베껴 자주 시대를 걱정하는 눈물을 흘렸지요. 선생 같은 분이야말로

이른바 진퇴의 도리를 터득하였고 소장消長의 이치에 통달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 평생 독서함에는 한두 번 눈이 지나가면 종신토록 잊어버리지

않으셨지요. 이를테면 예악禮樂·산수算數·의약醫藥·복서卜筮에서 군사를 부리고 병사를 쓰는 요점

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여 알아서 그 대강을 통괄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게다가 정대한 기상과

온축한 경륜經綸을 한 번 베풀지 않고 손 놓고 지붕만 쳐다볼 뿐이었으니, 하늘이 우리나라를

태평으로 다스리고자 하지 않아서 이겠는가?

저 같은 소생은 어려서 찾아뵙고 문하에 출입한 것이 지금까지 31년이 되었습니다. 완악하고

어리석은 자질이 비록 교육을 받으면서 조금도 변화되지는 못했지만, 선생의 동정動靜과 어묵語黙

에 대해서는 항상 스스로 경모하고 익숙히 살핀 것은 몰래 공명선公明宣을 본받고자 함이었습니

다.97) 일에 골몰하여 스승님을 멀리 떠났으나 도리어 그리워하는 마음은 단 하루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해 겨울에야 비로소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오셨는데, 산장으로

찾아가 뵈었지요. 선생께서 비록 평소 혈담血痰을 앓고 있었지만 신체가 건강하시어 이전에

비해 조금도 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동안의 기거에 대해서 길게 대화를 나눌 겨를도 없이

직사가 어떠한지 만을 여쭙고는 인사를 드리고 문을 나오면서 겨울 해가 저물어 감을 탄식하였습

니다. 얼마 안 있어 선생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람을 시켜 안부를 물으니, “우연히

헤어진 것이 장차 영원히 헤어지게 된다.” 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편지를 읽음에 슬픈

마음 절로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믿을 바는 천지신명일 뿐인데, 아! 믿을 수 있는 것도 믿을

수 없다고 병석에서 쓴 선생의 편지가 마침내 여기에서 징험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병석에 계실 때에도 간호 한번 해 드리지 못하였고, 돌아가심에도 촛대도 잡지 못했네요. 또한

장사지내는 날에도 때마침 공차公差의 일이 있어서 발인과 장사에 참여하지도 못했습니다. 이

하찮은 벼슬 때문에 세 가지 하지 못한 애통함이 있게 되었으니, 태산처럼 스승님을 추앙하던

정성은 영원히 어긋나 버렸고 자식처럼 대해 주시던 은혜를 심히 저버렸습니다. 제문을 지어

슬픔을 부치니 눈물이 샘처럼 흘러내립니다.

영령이 계신다면 저의 이 글을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아, 슬픕니다



祭西厓柳先生



嗚呼。先生而至於斯耶。士林仰以爲山斗。國家擬以爲蓍龜。君子有所恃而無恐。小人有所憚而不爲。朝野觀其用舍而卜其安危。孰謂先生遽去世而至於玆也。士林相弔。殄瘁是悲。都民望絶。哭于道路。天意難知。萬事可懼。嗚呼已矣。歸咎無處。先生在世。六十有六歲。少而淸明。長而端方。胷中灑落。皓月揚光。仁孝友弟。早服家庭之敎。誠明敬直。實資師友之得。以如是之資。篤如是之學。事親則叱咜之聲未嘗至於犬馬。待人則惰慢之氣未嘗加於容色。終日危坐。有以保固其中心之所存。蓋涵養於本原之地。爲酬酢萬變之主也。愛君勿欺而志專忠敬。使民如祭而心勞字撫。至於陳見悃誠。奏事明白。玉色金聲。百僚嘆服。封章陳列。辭意剴切。至有十年經幄。一德無瑕之褒。則蓋已有聖贒相逢。千載一會之慶矣。奈何爰立未幾。冦賊交亂。使斯世斯民未覩其德業之盛也。亂離斯棘。綱維蕩悉。顧當時竄伏林藪。全軀保妻子之輩。莫非平日衣君衣食君食者也。惟先生間關扈駕。嚼齒拭血。受命於敗軍之際。自任以興復之責。臨機應變。不失緩急。及夫鑾輿言旋。故都埋沒。先生經理庶務。指陳得失。內盡安集之方。外建備禦之策。收人心於已散。勵士氣於旣挫。當時天威奮張。六軍東臨。先生周旋行伍之間。能得將士之心。閣老而不名。莫不加敬者。蓋先生之忠義。有以感激人之深也。况一時表文。大抵出於先生之手。臨時立草。不待潤色而後工也。若論其當世之人。第其中興之功。則固宜究䂓模而味風旨。先撥亂而後摧鋒也。雖以先生之才如是德如是功如是。而猶未免流俗之毁。至加醜詆之無已。嗚呼。小人之好議論如是哉。先生自此杜門空山。未嘗一言及於時事。惟抄陸氏之方。頻灑憂時之淚。若先生者蓋所謂得乎進退之道。而達乎消長之理者歟。先生資稟絶人。平生讀書。一再過眼而終身不忘也。若夫禮樂筭數醫藥卜筮。以至行師用兵之要。莫不究知而總其大綱。况乎正大之氣。經綸之蘊。不能一施。而未免袖手仰屋。則天未欲平治我東方者耶。允安小生。丱角趨拜。出入門下者。爾來三十有一年矣。頑愚之質。雖未少變於敎育之下。其於先生之動靜語默。常自敬慕而熟察者。竊欲效於公明宣矣。汩沒塵埃。遠違函丈。顧區區瞻戀之懷。則無一日不懸懸也。去年冬始得丐暇還鄕。拜于山庄。先生雖素患痰血。而體履康寧。未見有少衰於前矣。叙寒燠之未暇。問職事之如何。及拜辭而出門。悵冬暉之易斜。未幾而聞先生之疾。一向危篤。急使人候問。則有偶爾分手。將成永訣之語。奉讀悲虞。不能自已。所可恃者。神明而已。嗚呼可恃者不可恃。而先生病裏之書。孰意其卒驗於此也。病不得擧扶。歿不得執燭。及其窆也。適有公差之事。又不得執引而臨穴。縻玆薄宦。有此三不得之痛。則永乖山仰之忱。深負子視之恩。緘辭寓哀。淚落懸泉。不亡者存。庶幾鑑乎斯文。嗚呼哀哉。

  

92) 용사행장(用舍行藏):출처(出處) 혹은 행지(行止)를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에서 “쓰이게 되면 나의

도를 행하고 버림을 받으면 숨는다.[用之則行 舍之則藏]”라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93) 성명(誠明):마음에 거짓이 없고 지극히 진실한 상태를 성(誠)이라 하고, 사리를 분명히 아는 것을 명(明)이라

한다. 중용장구 제21장에 “성(誠)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성(性)이라 하고 명으로 말미암아 성해지는

것을 교라 이르니, 성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성해진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동리선생문집 권4 _ 제문|367

94) 옥……목소리[玉色金聲]:인품이 맑고 지조가 곧음을 형용한 말이다. 상서대전(尙書大傳)에 보인다. 주희

(朱熹)의 「정명도화상찬(程明道畫像贊)」에 “양기가 만물을 기르듯 하고 산처럼 우뚝 섰으며, 옥빛처럼 아름답

고 종소리처럼 쟁쟁했다.[揚休山立 玉色金聲]”라고 하였다.

95) 재상(宰相):원립(爰立)은 재상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서경 「열명상(說命上)」에 “이에 세워서 재상으로

삼아 왕이 그 좌우에 두셨다.[爰立作相 王置諸其左右]”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368|동리선생문집

96) 육씨(陸氏)의 처방:당(唐)나라 육지(陸贄)가 충주 별가(忠州別駕)로 좌천되어 있을 때 도가(道家)의 방서(方

書)를 모아서 베껴 썼다고 한다.(醫說 卷2 「陸宣公裒方書」)

97) 공명선(公明宣)을……함이었습니다:공명선은 증자(曾子)의 제자인데, 증자의 문하에 있으면서 3년 동안

책을 읽지 않자, 증자가 배우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이에 공명선이 대답하기를, “어찌 감히 배우지 않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부모님이 계실 때에는 개나 말도 꾸짖지 않으시기에 이것을 기꺼이 배웠고, 빈객을 응대하실

때에는 공손하고 검소하게 대하며 태만하지 않으시기에 이것을 기꺼이 배웠고, 조정에 계실 때에는 아랫사람에

게 엄격하게 대하면서도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시기에 이것을 기꺼이 배웠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배우지

않으면서 선생님의 문하에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小學集註 제4 「稽古」) 여기서는 김윤안이 류성룡을

오랫동안 스승으로 섬기며 성심을 다한 것을 말한 것이다.동리선생문집 권4 _ 제문|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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