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문(宋之問)

2023. 5. 23. 07:02한시

송지문 (宋之問)

중국 당나라의 시인(656?~712). 자 연청(延淸). 산시성[山西省] 펀양[汾陽] 출생. 675년 진사에 급제, 20세경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눈에 들어 습예관(習藝館) 상문감승(尙文監丞)이 된 것이 벼슬길에의 시발이었다. 그 후, 무후의 영신(佞臣) 장역지(張易之)에게 아첨하다가 지방으로 쫓겨났는데, 다시 돌아오자 역시 그때의 권력자 무삼사(武三思)에게 아첨하여 관직을 차지하는 등 파렴치한 행실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재주를 아끼고 사랑하던 중종(中宗)은 그를 수문관(修文館) 직학사(直學士)로 기용, 문학의 좋은 상대로 삼아, 군신(君臣)의 신분을 망각한 주연(酒宴)에 빠졌었다고 한다.

그 후에 현종(玄宗)이 즉위하자 영신을 추종하였다는 죄로 광둥성[廣東省] 친센현[欽縣]으로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심전기(沈佺期)와 함께 측천무후와 중종의 궁정시인으로, 연석(宴席)에서 시작(詩作)을 다투고 하여 ‘심송(沈宋)’이라 불렸다. 특히 오언시(五言詩)에 훌륭한 재능이 있었는데, 율시체(律詩體) 정비에 진력하여 심전기 ·두심언(杜審言) 등과 더불어 초당 후반의 문단에서 율시 유행의 선구로 공이 컸다. 문집에 《송지문집(宋之問集)》이 있다.



송지문(宋之問)은 훌륭한 문재(文才)가 있었으나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아첨하여 간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이덕홍(李德弘)의 《艮齋集(간재집)》 속권 4권에 “그 글이 청려(淸麗)하고 기위(奇偉)할수록 그 사람의 악(惡)의 실상을 더욱 가릴 수가 없다. 《唐書(당서)》 본전(本傳)에 송지문에 대한 본말을 낱낱이 서술하고 끝에 평하기를 ‘천하 사람들이 그의 행실을 미워한다.’고 하였으니, 사관(史官)이 참으로 악을 미워하는 의리를 잘 알았다.” 하였다.

문집으로는 《송지문집宋之問集》이 있다. 포악한 성격을 가졌던 듯, 외조카인 유희이의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해마다 꽃들은 비슷하게 피지만, 해마다 사람은 전과 같지 않네)”이라는 시구를 몹시 갖고 싶어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조카를 흙을 담은 포대로 압사시켰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위현韋絢의 《빈객가화록賓客嘉話錄》에 전한다.








靈隱寺(영은사)

  

鷲嶺鬱岧嶢(취령울초요),龍宮鎖寂寥(용궁쇄적요)。

樓觀滄海日(누관창해일),門對浙江潮(문대절강조)。

桂子月中落(계자월중락),天香雲外飄(천향운외표)。

捫蘿登墖遠(문라등탑원),刳木取泉遙(고목취천요)。

霜薄花更發(상박화갱발),冰輕葉未凋(빙경엽미조)。

夙齡尚遐異(숙령상하이),搜對滌煩囂(수대척번효)。

待入天台路(대입천태로),看余度石橋(간여도석교)。



취령(鷲嶺)은 울창하게 높이 솟았고

용궁 같은 절은 굳게 닫혀 적막하네.

누대에 올라 넓고 큰 바다의 해를 보고

창문에서 절강의 파도를 대하네.

계수나무 씨 달에서 떨어지니

고상한 향기는 구름 너머로 날리네.

여라덩굴 잡고 탑에 올라가는 길 멀고

나무에 홈을 파 먼 곳에서 샘물을 끌어 오네.

서리 엷게 내려 꽃은 다시 피고

얼음 얇아서 잎은 아직 시들지 않았네.

젊은 나이에 불교를 숭상하여

찾아와 마주하니 번민이 씻겨지네.

천태산 길에 들어가기 기다려

내가 돌다리를 건너는 것을 보게 되리라.


당시기사(唐詩紀事)에서 말하기를. “송지문이 귀양 갔다 석방되어 강남에 이르렀다. 영은사를 유람하며 밤에 달이 너무 밝아 긴 복도를 걸으면서 시를 읊조리다가 ‘鷲嶺鬱岧峣, 龍宮鎖寂寥(취령울초요, 용궁쇄적요)’라고 하다 오랫동안 잇지를 못했다. 어떤 노승이 장명등을 켜고서 물었다. ‘젊은이는 밤이 깊었는데 잠을 자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하고 묻자 송지문이 대답하였다.

'우연히 이 절에 시를 적어놓고자 시상을 일으키는데 잇지 못하겠습니다.’ 노승이 곧 대답하기를 ‘어찌 樓觀滄海日,門對浙江潮(누관창해일, 문대절강조)’라고 읊지 않는가?’라고 하자 송지문이 깜짝 놀라 그 구절의 아름다움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날 밝기를 기다려 다시 찾아뵈었으나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절의 중들 중 그를 아는 사람이 말하기를 ‘그 사람은 낙빈왕이다.’라고 하였다.  송지문(宋之問)이 관직에서 좌천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항주(杭州)에 내려왔다가 우연한 기회에 영은사(靈隱寺)을 돌아보게 되어 영은사의 절경을 보고 젊은 시절부터 불교를 숭상하는 마음에 도를 깨우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전당시(全唐詩)에는 작자가 송지문(宋之問)으로 되어 있으나 당시선(唐詩選)에는 낙빈왕(駱賓王)의 작품으로 되어 있어 작자가 누구인가의 논란이 되고 있다. 전당시 주석(註釋)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으며 송지문의 시로 실려 있다.








明河篇(명하편)



八月涼風天氣晶(팔월량풍천기정),萬里無雲河漢明(만리무운하한명)。

昏見南樓清且淺(혼현남루청차천),曉落西山縱復橫(효락서산종복횡)。

洛陽城闕天中起(낙양성궐천중기),長河夜夜千門裏(장하야야천문리)。

復道連甍共蔽虧(복도련맹공폐휴),畫堂瓊戶特相宜(화당경호특상의)。

雲母帳前初泛濫(운모장전초범람),水精簾外轉逶迤(수정렴외전위이)。

倬彼昭回如練白(탁피소회여련백),復出東城接南陌(복출동성접남맥)。

南陌征人去不歸(남북정인거불귀),誰家今夜擣寒衣(수가금야도한의)。

鴛鴦機上疎螢度(원앙기상소형도),烏鵲橋邊一雁飛(오작교변일안비)。

雁飛螢度愁難歇(안비형도수난헐),坐見明河漸微沒(좌견명하점미몰)。

已能舒卷任浮雲(이능서권임부운),不惜光輝讓流月(불석광휘양유월)。

明河可望不可親(명하가망불가친),願得乘槎一問津(원득승사일문진)。

更將織女支機石(갱장직녀지기석),還訪成都賣卜人(환방성도매복인)。



팔월이라 서늘한 바람 날씨 맑으니

만 리에 구름 없어 은하수 밝네.

저녁에 남쪽 누각 위에 나타나면 맑고 또 얕게 보이고

새벽에 서산에 질 때에는 종횡으로 있다오.

낙양의 성과 대궐이 하늘 가운데 높이 솟으니

긴 은하수 밤마다 천 개의 대궐문 가운데에서 보이네.

복도와 이어진 용마루에 함께 가리워져 반만 보이니

그림 그린 집의 옥문(玉門)에 특히 서로 어울리네.

운모(雲母) 장막 앞에 처음에는 수없이 보이고

수정 주렴 밖에는 더욱 길게 이어져 있다오.

분명히 보이는 저 밝은 빛 흰 비단 같은데

다시 동쪽 성에 나와 남쪽 길거리와 이어지네.

남북으로 부역 간 사람 가고 돌아오지 못하는데

뉘 집에서 오늘밤 겨울옷 다듬이질 하는가.

원앙새 무늬 짜는 베틀 위에 외로운 반딧불 지나가고

오작교(烏鵲橋) 가에 외기러기 날아가네.

기러기 날고 반딧불 지나가니 시름 그치기 어려워

앉아서 밤새우며 밝은 은하수 점점 희미해짐 보노라.

이미 펴지고 걷힘 뜬구름에 맡기니

밝은 빛 흐르는 달에게 빼앗김 아까워하지 않네.

밝은 은하수 바라볼 수는 있으나 가까이할 수 없으니

원컨대 뗏목 타고 한번 나루터 물으리라.

다시 직녀가 베틀 받치던 돌 가져다가

성도(成都)에 점치는 사람 찾아가리라.


이 시는《唐文粹(당문수)》17권에 실려 있는 바, 제목 그대로 하늘의 은하수를 읊은 내용이다. 송지문(宋之問)이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북문학사(北門學士)로 제수해 줄 것을 바랬으나 허락받지 못하자, 이 시를 지어 스스로 위로하였다고 한다.

무후(武后) 때에 젊고 준걸스럽고 문재가 있는 자들은 대부분 북문학사(北門學士)에 보임되었다. 송지문(宋之問)이 북문학사에 보임해 줄 것을 청하자, 무후는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송지문은 口過(구과:입냄새)가 있다.” 하니, 송지문은 마침내 〈明河篇(명하편)〉을 지어 자신을 비유하였다. 명하는 무후를 비유하고 총애를 받지 못함을 스스로 서글퍼한 것이다.

송지문(宋之問)은 훌륭한 문재(文才)가 있었으나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아첨하여 간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이덕홍(李德弘)의 《艮齋集(간재집)》 속권 4권에 “그 글이 청려(淸麗)하고 기위(奇偉)할수록 그 사람의 악(惡)의 실상을 더욱 가릴 수가 없다. 《唐書(당서)》 본전(本傳)에 송지문에 대한 본말을 낱낱이 서술하고 끝에 평하기를 ‘천하 사람들이 그의 행실을 미워한다.’고 하였으니, 사관(史官)이 참으로 악을 미워하는 의리를 잘 알았다.” 하였다.








有所思(유소사)



洛陽城東桃李花(낙양성동도리화), 飛來飛去落誰家(비래비거낙수가).

幽閨兒女惜顔色(유규아녀석안색), 坐見落花長歎息(좌견락화장탄식).

今年花落顔色改(금년화락안색개), 明年花開復誰在(명년화개복수재).

已見松柏摧爲薪(이견송백최위신), 更聞桑田變成海(갱문상전변성해).

古人無復洛城東(고인무부낙성동), 今人還對落花風(금인환대락화풍).

年年歲歲花相似(연년세세화상사), 歲歲年年人不同(세세년년인부동).

寄言全盛紅顔子(기언전성홍안자), 須憐半死白頭翁(수련반사백두옹).

此翁白頭眞可憐(차옹백두진가련), 伊昔紅顔美少年(이석홍안미소년).

公子王孫芳樹下(공자왕손방수하), 淸歌妙舞落花前(청가묘무낙화전).

光祿池臺文錦綉(광록지대문금수), 將軍臺閣畵神仙(장군대각화신선).

一朝臥病無相識(일조와병무상식), 三春行樂在誰邊(삼춘행락재수변).

婉轉蛾眉能幾時(완전아미능기시), 須臾鶴髮亂如絲(수유학발난여사).

但看古來歌舞地(단간고래가무지), 惟有黃昏鳥雀飛(유유황혼조작비).



낙양성(洛陽城) 동쪽 복숭아꽃 오얏꽃

날아오고 날아가며 누구의 집에 지는고.

​깊은 규방의 아가씨 제 얼굴이 아까운지

앉아서 떨어지는 꽃잎 보며 길게 한숨짓는다오.

​올해에 꽃이 지면 얼굴은 더욱 늙으리라.

내년에 피는 꽃은 또 누가 보려는가.

​이미 송백(松柏)이 꺾여 땔감나무 됨 보았고

또 뽕나무밭이 변해 바다가 되었단 말 들었다오.

​옛사람 이미 죽어 낙양성 동쪽으로 다시 찾아오지 못하는데

지금 사람 다시 바람에 지는 꽃 대하고 있노라.

​해마다 꽃은 서로 비슷하나

해마다 사람은 같지 않다오.

​한창 젊은 홍안(紅顔)의 젊은이에게 말하노니

반쯤 죽은 백발의 늙은이 부디 가엾게 여겨주오.

​이 늙은이의 흰 머리 참으로 가련하니

그도 저 옛날에는 홍안의 미소년 이었다오.

​공자(公子)와 왕손(王孫)이 아름다운 나무 아래에서 놀았고

맑은 노래와 묘한 춤으로 지는 꽃 앞에서 놀았노라.

​광록대부(光祿大夫)의 못과 누대에는 비단 무늬 장식되었고

장군(將軍)의 누각에는 신선 그려져 있었네.

​하루 아침에 병들어 눕자 알아주는 이 하나 없으니

봄날의 즐거움 어디에 있을까

​아리따운 여인은 얼마나 갈까.

잠깐 사이에 백발이 실타래처럼 어지럽다오.

​옛 사람이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던 곳에도

날은 지는데 새들만 날고 있구나.





有所思(유소사)는 남자에게 배반당한 여자의 마음을 슬픈 가락으로 부른 노래이다. 악부시집(樂府詩集)에 실려 있는 한요가(漢鐃歌) 18곡 중에 한 수로 고취곡사(鼓吹曲辭)이다. 고취곡사는 타악기와 취주(吹奏) 악기 위주로 구성된 연주 형식 혹은 연주 악곡을 일컬으며 원래는 군악가사였다.

≪악부시집≫에는 총 5290편의 악부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중 작가 이름이 있는 작품은 576명의 3793편, 없는 작품은 1497편이다.

이 시는 남자에게 배반당한 여인이 남자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였으나 남자의 마음이 변한 것을 알자 선물을 태워버리고 다시는 생각하지 말자는 슬픈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심전기(沈佺期), 송지문(宋之問), 이백(李白), 노동(盧仝) 등 많은 시인들이 이 제목으로 시를 지었다. 이 시는 세상의 변고가 무상하여 노소가 번갈아 서로 교대함을 말하였으니, 개탄하는 감회를 깊이 붙였다.



《唐詩遺響(당시유향)》1권에 실려 있는데, 제목은〈代悲白頭翁(대비백두옹)〉, 작자는 劉希夷(유희이)로 되어 있다. 바람에 떨어지는 꽃을 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한 것으로, 유희이가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하다.《唐才子傳(당재자전)》의〈劉希夷傳(유희이전)〉에 “希夷(희이)가 일찍이〈白頭吟(백두음)〉의 한 연(聯)인 ‘今年花落顔色改(금년화락안색개) 明年花落復誰有(명년화락복수유)’를 짓고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말은 讖(참:예언)이다. 석숭(石崇)이 「白頭는 돌아가는 곳이 같다」고 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고 곧 이 시를 없애버렸다. 그리고 또다시 읊기를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이라고 한 다음 다시 탄식하며 ‘죽고 사는 것은 天命이 있으니 어찌 이 허언(虛言) 때문이겠는가’ 하고, 마침내 위에 없애버렸던 시와 함께 남겨 두었다.

장인인 송지문(宋之問)이 뒤의 한 연(聯)을 매우 좋아하여 이 시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고 자신에게 달라고 간절히 요구하였으나 유희이는 허락만 하고 결국 주지 않았다. 송지문은 그가 자신을 속인 것에 노하여 종을 시켜 별채에서 흙 포대로 압사시켜 죽이니, 당시 그의 나이가 채 서른이 못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불쌍하게 여겼다.” 하였다. 송지문이 자신의 시로 절취(竊取)하였다는 두 연구(聯句)는 명구(名句)로 유명하다.








渡漢江 (도한강)



嶺外音書斷, 經冬復歷春.

近鄉情更怯, 不敢問來人



영남 밖으로 내몰려 가족과 소식 끊기고,

겨울 나고 또다시 봄이 지나네.



고향 가까워지자 한결 두려워지는 심정,

그곳서 온 사람에게 차마 집 소식 묻지 못하네.







우리나라에서 많이 읽은 <<오칠당음>> 첫 장을 펴면 송지문(宋之問, 656~712)의 <도중한식(途中寒食)>이라는 시가 나온다. 그리고 4번째에 바로 이 시가 나온다. 이 책은 저자별로 작품을 배치해서 몇 수 연이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는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영외(嶺外)는 고개의 바깥을 말한다. 바깥은 당시 수도인 장안의 시각에서 볼 때 바깥을 말하고 영(嶺)이란 오령(五嶺)이라 해서 중국 남방에 있는 5개의 큰 산맥을 말한다. 중국에는 예로부터 죄를 지은 관원을 지방의 낮은 관리로 좌천시키거나 유배를 보냈는데 이 5령의 남쪽으로 많이 보냈다. 영외를 달리 영표(嶺表)라고도 하는데, 영외, 영남, 영표 이런 말은 우리나라의 영남에도 그대로 썼던 말이다.

송지문은 시적 역량으로는 대단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측천무후 때 출세를 하느라 그가 몰락하자 바로 그 이듬해인 705년에 이 오령 남쪽으로 유배를 온 것이다. 그 지역이 바로 광동(廣東) 나정현(羅定縣)이라는 곳이다. 나정이라는 곳은 지금 광조우 시 서쪽 우저우(梧州)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사방 큰 산이 있어 교통이 아주 불편하니 편지를 못 받았다는 말이 사실과 부합한다. 이 시는 그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 고향 집으로 돌아가며 지은 것이다.



오래 객지에 머물다 귀향길에 나선 나그네라면 가까워지는 고향을 떠올리는 일이 더없는 설렘이자 벅찬 감격일 것이다. 그 경쾌한 발걸음이며 달뜬 심경을 무엇에 비기랴. 한데 시인은 ‘고향 가까워지자 한결 두려워지는 심정’이 된다. 심지어 고향 사람을 만나고서도 ‘차마 집 소식을 묻지 못한다’. 왜 그랬을까.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다. 궁금하지만 묻지 못하는 모순심리는 불안감에서 기인한다. 가족이 평안하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깨트리고 싶지 않기에 애써 궁금증을 억누르려 한 것이다. 이는 또 당시 시인의 처지와도 무관치 않다. 유배지 영남 땅 광둥(廣東) 지방에서 몰래 도망 나와 귀향길에 올랐기에 신분 노출이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무측천(武則天)의 측근으로 온갖 호사를 다 누리던 시인은 여황제가 축출되면서 황량한 오지로 좌천되었고 낙양 귀환이 아득해지자 탈출을 결행한 것이다. 시인의 은밀한 귀향이 환희로 이어질지는 미지수. 낙양과는 꽤 먼 거리인 한수(漢水)를 지나면서도 ‘고향과 가까워진’ 걸 느꼈다니 심리적으로 이미 귀향의 성공을 예감했는지 모른다.


▲ 漢江(한강) : 한수(漢水)이다. 장강(長江)의 가장 긴 지류(支流)로서,

섬서(陝西)에서 발원(發源)하여 호북(湖北)을 거쳐 무한(武漢)에 이르러 장강(長江)으로 유입(流入)된다.



이 시를 보면 실제의 자기 체험을 녹여 쓴 시라 쉬운 말 가운데 절실한 정을 표현하고 있어 이 시인의 재주를 알 수 있다. 자신이 귀양 간 사이 집안에 화가 닥친 것은 아닌지, 혹 그동안 무슨 상사라도 있었던 것은 아닌지 별별 생각이 떠올라 고향 쪽에서 오는 사람을 봐도 선뜻 물어보지 못하는 불안한 인간 심리의 한 자락을 묘하게 낚아챈 것이다.

송지문의 고향이 산서성 분주(汾州)라고도 하고 괵주(虢州) 홍농(弘農), 즉 오늘날의 하남성 영보(靈寶)라고도 하는데 이 시로 보면 영보가 맞을 듯하다. 한강은 <<시경>>에도 많이 나오는 한수(漢水)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장강의 큰 지류로, 황화와 장강 사이에 위치해 있어 만약 고향을 분주로 잡으면 우리나라 지리 개념으로 환산해 볼 때 얼추 서울서 부산이나 의주까지 가는 거리니 대충 잡아도 아직 보름은 족히 가야 한다. 이는 시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 그런데 고향을 영보로 잡으면 이제 거리도 몇 백리 정도로 서울서 평양 정도 거리에 지나지 않고 또 평탄한 길을 갈 뿐 아니라 큰 도로가 나오니 위의 시 내용과 아주 잘 맞게 된다. 이 시가 송지문의 고향을 확인하는데 도움을 준다.



당나라 때 교통로를 참조하면 송지문은 일단 광주로 간 다음, 여기서 장사, 악양을 지나 형주, 양양을 거쳐 이제 정주, 동관으로 가는 길을 잡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한강을 건너 양양(襄陽) 부근에서 썼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자신의 집이 있는 홍농 방면으로는 큰 도로가 나 있으므로 오는 사람이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 말씨 등으로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고 산천 풍물이 자기 고향과 비슷해지기 때문에 고향이 가깝다는 정서적 반응이 실제 정황과 부합한다.

송지문은 당대 율시의 초석을 다진 인물. 뭇 신하들과 시재를 겨루어 즉석에서 황제의 비단 두루마기를 하사받을 정도로 시재가 출중했다. 출세를 위해 여황제의 남총(男寵·성적으로 여황제의 총애를 받는 미남자)에게 아첨도 하고 스스로 남총이 되려다가 좌절되었다거나, 조카의 시구를 뺏으려다 실패하자 그 목숨을 앗았다는 일화가 오명으로 남아 있다. 이 시를 보면 아주 진정을 토로하여 시를 쓰는 사람인데 송지문은 무슨 생각으로 처신을 그렇게 하여 후세의 박한 평가를 자초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연구가 필요하다.








題大庾嶺北驛 (제대유령북역)



陽月南飛雁 양월남비안

傳聞至此回 전문지차회

我行殊未已 아행수미이

何日復歸來 하일부귀래

江靜潮初落 강정조초락

林昏瘴不開 임혼장불개

明朝望鄕處 명조망향처

應見隴頭梅 응견롱두매



시월이라 기러기 남쪽으로 나는데

듣자니 이곳에서 되돌아간다 하네

​내 길은 새와 달라 끝이 나지 않아서

어느 때나 왔던 길로 돌아갈지 모르겠네

썰물이 빠져나간 강은 물이 낮아져 잔잔하고

숲은 어둡고 독기를 품은 길은 막혀 있네

​내일 아침 높은 곳 올라 고향 쪽을 바라보면

산마루 길 따라 핀 매화꽃이 보이겠지





내가 듣기로, 10월에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는 대유령(大庾嶺)에 이르면 머물렀다가 이듬해 봄에 다시 되돌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유배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어느 때에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향과 풍토(風土)가 다른 이곳은 간조(干潮) 때라서 강물은 잔잔하고 고요하며, 산의 이내와 장기(瘴氣)가 걷히지 않아 숲속은 어둡기만 하다. 내일 아침 내가 대유령 위에 올라서서 고개 돌려 북쪽 고향 땅을 바라보면, 응당 고갯마루에 피어 있는 매화가 보일 것이다.

[解題] 송지문(宋之問)은 일생 동안 그의 정치적 입지(立地)로 인해 광동성(廣東省) 농주(瀧州), 절강성(折江省) 월주(越州) 등에 폄적되고 마지막으로 광서성(廣西省) 흠주(欽州)·계주(桂州)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이 시는 기행시(紀行詩)로 대유령, 즉 매령(梅嶺)의 북역(北驛)에 제(題)한 것인데, ≪舊唐書(구당서)≫의 기록에 의하면 흠주(欽州)로 유배 가면서 대유령을 지날 때에 쓴 것으로 보인다.

수련(首聯)과 함련(頷聯)에서는 기러기와 시인의 처지를 비교하여, 돌아갈 기약이 없는 자신의 신세가 기러기만도 못함을 말하였다. 경련(頸聯)에서는 눈앞의 풍경을 묘사했는데 ‘潮初落(조초락)’, ‘瘴不開(장불개)’는 고향의 풍토(風土)와 다른 낯선 환경을 대변해주고 있어 언외지의(言外之意)가 있다. 미련(尾聯)의 두 句는 자위(自慰)로 보이지만 고향을 그리는 간절한 마음과 유배지로 향하는 고통이 배어 있다. 이 시는 언어가 유창(流暢)하고 매우 함축적이며,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장법(章法)이 분명하여 작시(作詩)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唐 阎立本 《步辇图》

  송지문(宋之問) 시에 대한 응제시 (苑中遇雪應制)  



<금원에서 눈을 만나>시에 대한 응제시 (苑中遇雪應制)



紫禁仙輿詰旦來

青旂遙倚望春臺

不知庭霰今朝落

疑是林花昨夜開



궁중에서 황제의 수레 새벽에 나오니

푸른 기가 멀리 망춘대 옆에 서 있네

뜰의 눈이 오늘 아침 내린 줄 모르고

숲의 꽃이 어젯밤에 피었는가 하였네



응제(應制)는 황제나 왕이 시를 지어라는 명을 내리면 이에 응하여 지은 작품을 말한다. 여기서 ‘제(制)’는 본래 황제의 명령을 뜻하고 ‘응(應)’은 그 명을 받든다는 의미이다. 제목을 내려주는 경우도 있고 소재나 상황만 제시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시와는 다르게 이 시를 주문한 사람과의 특수한 맥락을 고려하고 읽어야 한다. 이런 작품들은 대개 그날 시를 짓는 상황에 따라 주제는 이미 정해지게 마련이므로 작품의 승패는 주로 수사(修辭)의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적절하고도 뜻이 좋은 고사를 쓰거나 조어(措語), 즉 엮어낸 말이 상서로운 것이어야 호평을 받는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많은 경우 아부로 일관되어 있는 작품이 많다.



송지문(宋之問, 656~712)이 이 시를 언제 지었는지 상고하지 못했으나 칙천무후나 중종 때 지어진 것은 분명하다. 송지문이 심전기(沈佺期)와 함께 당시 궁정 시인으로 활약했기 때문이다.이 시는 《문원영화(文苑英華)》에 <봉화유원우설응제(奉和游苑遇雪應制)>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금원에 놀러 갔다가 눈을 만나다>라는 시를 받들어 화답한 응제시’라는 제목을 지금의 제목으로 축약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 같이 지은 이교(李嶠)와 유헌(劉憲) 두 시인의 시가 남아 있는데 내용을 보면 어주도 내려주고 한 모양이다. 송지문이 이런 문인들과 함께 새벽에 어가를 호종하여 망춘궁으로 가서 이 시를 지은 것이다. 송지문은 궁궐 밖으로도 어가 행렬을 수행하여 지은 시들이 그의 시집에 남아 있다.



조선 시대에서 과거로 인재를 뽑으면 문벌이나 성적 등을 고려하여 승문원, 성균관, 교서관에 배속하는데 이를 분관(分館)이라 한다. 이때 모든 부분이 가장 우수한 사람을 승문원에 분관하는데 이 승문원은 중국과의 외교 문서를 다루는 곳이다. 외교 문서를 다루는 곳에 가장 우수한 인재를 배치하는 것은 중국의 황제나 예부에 문서를 올릴 때 그 양식과 특수한 용어를 잘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문장을 잘 지어내는 문필 역량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오늘날은 문학 능력이 작가 등으로 출세하지 않으면 순수 문학을 하는 영역으로 줄어들었지만, 예전에는 외교와 어명에 따른 수응 등으로 출세의 첩경이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람을 사귈 때는 시를 지어야 하고 국정에 의견이 있으면 상소나 차자를 올려야 하기 때문에 시작 능력이나 공거문(公車文), 즉 상소문체 등에 능하지 않으면 행세는 고사하고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한글에 비해 한문을 존중한 풍토는 실은 이런 현실적 필요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금(紫禁)은 황제가 사는 궁궐을 의미한다. 여기서 ‘자(紫)’ 자가 들어간 것은 황제의 별자리가 자미원(紫微垣)이기 때문이며 금(禁)은 외부인의 출입을 엄금하는 궁궐 특유의 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선여(仙輿)는 황제가 타는 수레를 말한다. 힐단(詰旦)은 동이 터오는 새벽을 말한다. 망춘대(望春臺)는 당시 망춘궁(望春宮) 안에 있던 대(臺)를 의미한다. 망춘궁은 지대가 상당히 높아 앞으로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청기(青旂)는 청기(靑旗)와 같은 말로 황제의 어가 행렬에 의장으로 사용되는 깃발을 의미한다. 하필 색깔이 파란 것은 맹춘, 즉 이른 봄에는 청색의 깃발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에 황제가 멀리 바라보고 싶어 어가를 타고 망춘대로 와서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상서로운 눈이 내린 상황을 알 수 있다. 이런 눈이 올 때 응제 작품이 많다. 시인은 짐짓 낯설어하는 표정으로 오늘 아침에 눈이 내린 줄 모르고 어젯밤에 꽃이 핀 줄 알았다고 말했으니 눈을 보고 기분이 좋았을 황제를 더욱 기쁘게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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