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樹白雲圖(추수백운도)

2023. 2. 19. 20:40한국의 글,그림,사람


英英白雲(영영백운) 繞彼秋樹(요피추수)

從子衡門(종자형문) 伊誰之故(이수지고)

山川悠邈(산천유막) 昔不我顧(석불아고)

何如今者(여하금자) 庶幾朝暮(서기조모)



아름다운 흰 구름 저 가을날 나무를 휘감네

그대의 허름한 집을 좇은 건 무엇 때문일까?

산천은 아득하여 옛적 나는 돌보지 않았네

어떠한가 지금은? 아침 저녁 만나세.





[해설]

이것은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그리고

김조순의 아들 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1785-1840)이 발제를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을 왜 ‘영영백운도’라 하는지 영문은 알겠는데

김유근의 유고집인 황산집(黃山集)에 題秋樹白雲圖(제추수백운도)가 실려 있다.



英英(영영)은 유연하고 나긋하며 밝은 모양, 아름다운 모양을 말한다.

뭉게구름은 叢雲(총운)이라 한다.

繞(요)는 ‘휘감다, 둘러 싸다’를 뜻한다.

彼(피)는 다소 먼거리의 ‘저’를 말한다.

從子(종자)는 조카를 뜻하나, 여기서는 ‘그대를 쫒다’로 직역함이 옳을 듯하다.

衡門(형문)은 두 개의 기둥에다 한 개의 횡목을 가로질러서 만든 허술한 대문이라는 뜻으로,

은자가 사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悠邈(유막)은 유원(悠遠)과 같다. 멀고 아득하다를 뜻한다.

何如(하여)는 어떠하다. 어떠한가? 어찌 ...만 하겠는가? ...만 못하다. 등의 뜻을 가진다.

庶幾(서기)는 무엇을 바라다. 바라건대를 뜻한다.

  거의 될 듯한 희망을 庶幾之望(서기지망)이라 하고

  어떠한 일도 한 쪽으로 기울어 일하면 안된다는 뜻의 서기중용(庶幾中庸)이란 성어가 있다.



김조순(1765-1832)은 조선 말기 세도정치의 문을 연 인물로 알려졌다.

안동김씨의 가문은 절개와 지조의 상징 인조대 척화파 김상헌(金尙憲1570-1652)에서 출발한다.

그의 손자가 숙종대 노론의 영수 김수항(金壽恒1629-1689)이고

증손이 영조의 즉위를 추진한 영의정 김창집(金昌集1648-1722)이다.

김창집의 4대손 즉 현손이 김조순이다. 178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노론임은 분명하나 시파,벽파의 싸움에 중립이었다. 정조가 그를 무척 아꼈다.

정순왕후에게서 비변사제조가 되었고

정조의 유지로 그의 딸 순원왕후가 간택을 거치지 않고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승을 지내지 않았으나 비변사제조, 병조판서,훈련대장,호위대장 즉 병권만은 사양하지 않았고 그의 자손들이 내리 이어받으며 붕당을 종식하고 그의 일가가 대원군 시대 전까지 조선을 좌우지한다.



김유근은

1810년 부사과(副司果)로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1817년 33의 나이로 정3품 당상관 이조참의가 되고

1822년 종2품 이조참판, 1825년 대사헌이 되었다. 같은 해 선혜청제조,

1826년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1827년 홍문관 제학을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제수 되었으나 부임길에 강도를 만나 귀경하였고 바로 병조판서가 된다.

사직을 고집하여 예문관 제학으로 부임되고

1828년 이조판서가 된다.

1830년 사직을 청해 우빈객으로 제수된다.

1831년 예조, 공조를 거쳐 병조판서가 된다.

1832년 어영대장, 공조판서,

1834년 좌부빈객, 선혜청 제조를 지냈고 순조가 죽자 홍문관 제학으로 묘지문을 지었다.

헌종의 즉위후 1835년 예조판서, 훈련대장, 판돈녕부사를 지냈다.

그러다 중풍과 실어증에 걸려 1840년 사망한다.



김조순과 더불어 글씨와 그림 시조에 능하였다.

역시 김조순의 사망 이전부터 병조판서를 지냈다.

김조순의 사후 군사실권을 잡아 판돈녕부사에 올라 안동김문의 중심을 잡아갔다.

흥미롭게도 1825년과 1827년 김정희의 부친인 김노경도 병판을 지냈다.



김정희는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金興慶,1677-1750)의 현손이다.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金漢藎,1720-1758)이 영조의 사위로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다.

월성이 경주의 다른 이름이니 경주가 본관이라는 것이다.

영조의 서녀인 화순옹주(和順翁主,1720-1758)는 임금의 딸로서는 유일하게 열녀가 된 분이다.

김한신이 죽자 굶어 뒤따라 죽은 것이다.

일설에 옹주가 아버지 영조에게 주고자 만든 곤룡포의 치수를 재보고자

남편 김한신에게 입혔다가 사도세자가 이를 보고 화가 나 벼루를 던져

월성위가 맞은 이후 병이 들어 죽었다고 한다.

김정희 집안이 노론으로 벽파에 속하여 사도세자와의 인연을 지어낸 것이리라.

김한신과 옹주에게는 자식이 없어 김흥경의 또 다른 아들 김한정(金漢禎)의 아들 중

김이주(金頤柱, ?-1797)에게 가계를 잇게 하였다.

김이주는 김정희가 태어날 당시 대사헌이 되고 1790년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김이주의 넷째 아들이 김정희의 아버지인 김노경(金魯敬,1766-1837)이다.



김노경은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육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고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받은 직책 중 제일 높다.

본래 돈녕부는 왕실의 외척이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친척들을 우대하기 위해 설치된 직무가 없는 정2품 관직이다.



추사는 어려서부터 글씨로 유명세를 탔다.

그리고 1810년 사행길의 아버지를 따라 연경에 가서 옹방강 등과 교유한다.



김유근이 당상관 이조참의에 있고 부친 김노경이 예조판서였던

1819년 대과에 급제한다.

1823년(38세) 정7품의 규장각 대교(待敎)를 지내고

1826년(41세)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운명의 김우명을 만난다.

1827년(42세) 당상관 정3품 예조참의가 되며

1836년(51세) 종2품인 병조참판,

1839년(54세) 형조참판이 된다.



나이는 한 살 추사가 많지만, 벼슬의 지위를 논한다면 아버지를 김조순으로 둔 김유근이 몇 단계 위다.

김정희의 부친과 비견할 자리를 지낸 김유근의 직책이 훨씬 무게가 나간다.



정파로는 같은 노론이나

정조 사후의 관직 세계에서는 사도세자에 대한 동정으로 나누는 시파와 벽파의 갈래에서 나눠진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시파인 김조순의 안동김문이 알짜배기를 독식하게 됨에 따라 왕의 외척이나 벽파이며 경주김문인 김정희의 집안은 아웃사이더가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서로를 인정하며 한가닥하는 예술인으로서의 교류로 보여진다.

추사는 풍양조문의 조인영과도 진흥왕순수비 등의 교유가 있었다.



타고난 그 순간부터 금수저였다고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가 있었다하여 손 저을 일도 아니다.

단지 그 둘이 살았던 2백년 전의 조선이 그닥 긍정적인 시공이 아니었으며 이 작품도 넋을 놓을 만큼의 격조라 느끼지 못할 뿐이다.



기교로서의 글씨와 품격으로서의 글씨가 다르다는 말이 있다.

<차이나는 클라스> ‘글씨가 사람이다’에 전북대 김병기 교수가 나왔다.

김 교수는 추사의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을 강조하며

‘금시벽해金翅劈海 향상도하香象渡河’ 필법을 소개했다.



식견이 없는 나로서는 인정하는 바가 없지는 않으나 김정희가 그 이전의 글씨와 그림을 김정희라는 그릇으로 통일했다는 이론에는 거부감이 있다.

나는 김정희가 강골과 고집에 풍파를 향해 울부짖는 성질있는 한 마리 호랑이였다고 생각한다.

추사는 조선 후기의 글씨와 그림에 일대 큰 바람을 일으킨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동주(東洲) 이용희(李用熙, 1917~1997)의 지적을 참고해볼 일이다.

조선 말기 풍속화와 진경산수, 원교의 동국진체 등 조선적인 예술이 풍성해질 때 추사는 중국을 모델로 하는 복고풍으로 민족 예술의 불꽃을 꺼버렸다고 동주는 말했다.

강우방이 조선 서화에 매우 큰 영향을 일으킨 추사라는 바람(風)을 높게 평가한 유홍준을 그리도 비판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다시 문화 사대주의를 불러온 이가 바로 추사라는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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