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撰墓誌銘-壙中本

2022. 12. 26. 18:53한국의 글,그림,사람

정약용이 자신의 일생을 묘지명 형식으로 지은 것이다. ‘집중본(集中本)’이라 하여 문집에 수록할 목적으로 쓴 것과 ‘광중본(壙中本)’이라 하여 무덤 속에 넣기 위해 간략하게 정리한 두 본이 있다. 이 글은 광중본이다.
저자 정약용
원전 서지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 제1집 제16권 시문집 묘지명
제작 연도 1822년(순조 22)
구분 한국고전 > 산문 > 비지류(碑誌類)
본문
번역
자찬 묘지명
【광중본(壙中本)】
이는 열수(洌水) 정약용의 무덤이다. 본명을 약용(若鏞), 자를 미용(美庸), 호를 사암(俟菴)1)이라 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정재원(丁載遠)이다. 음직(蔭職)2)으로 벼슬에 나아가 진주 목사(晉州牧使)까지 지냈다. 어머니는 숙인(淑人) 해남 윤씨(海南尹氏)3)이다. 영조 임오년(1762, 영조 38) 6월 16일에 약용을 열수(洌水, 한강의 별칭) 가의 마현리(馬峴里)4)에서 낳았다.
약용은 어려서는 머리가 영특하였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했다. 22세(1783, 정조 7)에 경전의 뜻을 풀이하는 시험[경의(經義)]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변려문(騈儷文)5) 공부에 전념하여 28세(1789, 정조 13)에 갑과(甲科) 2등으로 합격했다. 대신(大臣)들의 선발로 규장각(奎章閣) 월과 문신(月課文臣)6)에 들고, 곧이어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승진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과 교리(校理),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비변사 낭관(備邊司郎官)이 되었고, 외직으로 경기 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로도 나갔다.
을묘년(1795, 정조 19, 34세) 봄에 경모궁(景慕宮)7) 상호도감(上號都監)8)에 낭관으로 참여한 공으로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발탁되고,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고 병조 참의가 되었다.
가경(嘉慶, 청(淸)나라 인종(仁宗)의 연호) 정사년(1797, 정조 21, 36세)에 외직으로 나가 곡산 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가 되어 선정(善政)을 많이 베풀었다. 기미년(1799, 정조 23, 38세)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승지가 되고, 형조 참의가 되어서는 억울한 옥사를 올바르게 처리하였다. 경신년(1800, 정조 24, 39세) 6월에는 임금께 《한서선(漢書選)》을 하사받았다. 그달에 정조대왕께서 승하하시자 이때부터 화란(禍亂)이 시작되었다.9)
원문
自撰墓誌銘 (자찬묘지명)
【壙中本 (광중본)】
是唯洌水 丁鏞之墓也。 本名曰若鏞, 字曰美庸, 號曰俟菴。 父諱載遠, 蔭仕至晉州牧使, 母淑人海南尹氏。 以英宗壬午六月十六日, 生鏞于洌水之上馬峴之里。
幼而穎悟, 長而好學, 二十二, 以經義爲進士, 專治儷文, 二十八, 中甲科第二人。 大臣選啓, 隷奎章閣月課文臣, 旋入翰林, 爲藝文館檢閱, 升爲司憲府持平·司諫院正言·弘文館修撰·校理·成均館直講·備邊司郞官, 出而爲京畿暗行御史。
乙卯春, 以景慕宮上號都監郞官, 由司諫擢拜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 由右副至左副承旨, 爲兵曹參議。
嘉慶丁巳, 出爲谷山都護使, 多惠政。 己未, 復入爲承旨, 刑曹參議, 理冤獄。 庚申六月, 蒙賜《漢書選》。 是月正宗大王薨, 於是乎禍作矣。

'한국의 글,그림,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망휴한장도(莣畦寒螿圖)- 강세황  (0) 2023.02.24
秋樹白雲圖(추수백운도)  (1) 2023.02.19
조속  (1) 2022.12.25
조지운  (0) 2022.12.25
김홍도 총석정도외  (0) 2022.10.19